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6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5. 5. 19:50

2020 5월 6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요한 12,44-50)


I came into the world as light,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me might not remain in dark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도 떠올릴 수 있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보고 있는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시선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자신이 바라보는 것들 안에서 다른 것을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품을 넓혀 가는 사람입니다.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기에 앞서, 세상을 밝히셨고 그로써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요한 복음 안에 나타난 예수님의 역할은 파견되신 분으로서 파견하신 분, 곧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밝혀 주시고 시야를 넓혀 주시는 데 당신의 삶을 온통 내어놓으셨던 것이지요.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모든 것을 보았다고 여기며, 다른 면을 본 이들을 향하여 서로 삿대질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에서, 과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실 수 있으실까요?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아파하고 보듬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그저 내일, 저 세상의 장밋빛 인생만을 꿈꾼다면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다른 이의 이야기와 논리에 공감하기는커녕 거친 언사를 내뱉고 얕은 자기 신념을 고집하는 완고함의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그 누구라도 구원으로 초대받았다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는 일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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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어떤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지금의 이 문제는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면서 늘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형제님의 믿음은 클까요? 작을까요? 이런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흔들릴 수 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업의 문제 해결은 주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니지요. 믿음의 대상은 사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또 반대로 해결해 주지도 않을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주님’입니다. 사업의 문제 해결을 믿는 것은 기복주의의 형태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자체에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께 믿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만 믿음을 두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 곁을 쉽게 떠나고, 불평불만으로 주님을 대합니다. 하지만 주님 자체에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면서 기쁨의 삶을 살아갑니다.

나의 믿음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님의 선물만 바라보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만 믿음을 두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사람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믿게 됩니다. 즉, 아들을 보고서 아들을 키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신성 안에서 당신과 같은 본질을 나누시면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표징 자체만을 요구할 뿐이었습니다. 주님 자체에 믿음을 두지 못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만 믿음을 두려고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을 위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원의 빛을 가져다주기 위해 당신 신성의 눈 부신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 자체에 믿음을 둘 수 있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나의 믿음이 오로지 주님만을 향하고 있는가?”
당신에게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포용하라(게리 베이너척).



인재를 고르는 4가지 방법.

중국 고대 현자들은 인재를 고를 때 4가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첫째, 남이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같이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인가?

남들이 다 즐거워하는데 옆에서 이상한 말로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기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 내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즐거움을 절제하는 사람인가?

내게 좋은 일이 있어도 힘들게 사는 남을 생각해서 기쁨을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셋째, 두려울 때 얼마나 내색하지 않고 용기 있게 사는가?

두려운 문제가 생겨도 호들갑 떨지 않고 그 문제 속에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으면 나중에 더 큰 문제의 장벽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생깁니다.

넷째,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얼마나 혼자 슬픔을 삭일 줄 아는가?

나 한 사람이 감정을 삭이면 주변의 많은 사람이 편안해짐을 알고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는 인재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나 자신도 그런 인재가 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더욱더 각박하고 힘든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이기게 만드는 말을 따르라

-전삼용신부-


오래 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공장에서 위대한 성악가를 꿈꾸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생활 중에 겨우 첫 레슨을 받았을 때, 교사는 그에게 “너는 성악가로서 자질이 없어. 네 목소리는 덧문에서 나는 바람 소리 같다.”라고 혹평했습니다. 그 소년은 큰 좌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어머니는 실망하는 아들을 꼭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할 수 있어, 실망하지 말아라. 네가 훌륭한 성악가가 되도록 이 엄마는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고 너를 돕겠다.”

소년은 어머니의 격려를 받으면서 열심히 노래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세계적인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였습니다.

      말에는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정확한 것은 좋은 말은 나를 성장시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싸움을 하게 만듭니다. 연습 없이 좋아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쁜 말은 그냥 주저앉게 만듭니다. 그런 말들은 다 자아에게서, 혹은 그 자아를 통해 나에게 말하는 마귀들의 소리입니다. 나를 주저앉히는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합니다.

      정말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 연주자는 아무리 어려운 곡이라도 연주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악보를 연주하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 연주하는 악보는 분명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곡일 확률이 높습니다. 부모도 자녀를 위해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면 대소변을 가려보라 하고 그것을 하면 수저로 밥을 먹어보라 합니다. 사랑의 말인데 점점 나를 훈련하는 말이고 자신과 싸우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조언을 따른다면 그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이 되어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께 파견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여 그분처럼 살기 위해 연습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거부한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치 않는 말에 더 믿음을 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나를 훈련하게 만드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나에게 유익한 말씀입니다. 나 자신과 싸우게 하는 말씀이 나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인간이 다 자아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아는 자신이 편한 것만 찾고 그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자아를 선택한 인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나를 힘들게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함이 곧 구원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오산성당에 있을 때 이런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밥을 지어 두 병에 넣고 한 병엔 욕을 하고 한 병엔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자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놓고 신자들이 직접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정말 칭찬을 한 병은 누룩의 좋은 냄새가 났고 욕을 한 병은 검게 타버린 것처럼 썩은 냄새를 풍겼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는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창조는 힘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를 괴롭힙니다. 내가 썩지 않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주저앉으려고 하지만 하느님 말씀은 그런 나와 싸우게 만드십니다. 나를 이기게 만드는 말씀을 받아들입시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하느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우리 역사는 깊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은 장충단(獎忠壇)’의 유래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장충단은 공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인이 된 가수 배호는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불렀습니다. 장충단에는 로라 스케이트장이 있었고, 장충 체육관이 있었고, 테니스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충단의 원래 의미는 지금의 국립 현충원과 같았다고 합니다. 고종황제의 명을 받고 세계 일주를 다녀온 민영환은 다른 나라에는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순국한 사람을 기리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민영환은 고종황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고종황제는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순국한 사람을 기억하는 장소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바로 그 장소가 충성을 장려하는 제단이란 뜻의 장충단입니다. 역사는 불의한 힘에 의해서 왜곡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합니다.

 

터키의 이스탐불에는 소피아 성당이 있습니다. 이스탐불의 예전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도시를 하나 만들었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정했습니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에 성당을 세웠고 이름은 소피아 성당이라 정했습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사원이 되었고, 이슬람은 성당의 벽화를 회칠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회칠한 벽을 걷어내니 아름다운 성화가 있었습니다. 소피아 성당은 지금은 터키의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야은 길재가 남긴 글처럼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 곳없고,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인가 합니다. 역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느님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기다려 주시며,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하느님을 증거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치유시켜 주셨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하느님을 증거하셨습니다. 늘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행동, 기도를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기도했으며, 서로 격려하였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늘 감사드리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

-이영근신부-


<요한복음>표징의 책영광의 책으로 나눌 때, 오늘 <복음>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면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서두인 로고스 찬가에서부터 줄곧 계속되어 온 빛의 자녀 찾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리고 그것은 나는으로 표현되는 네 번에 걸친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이라고 하십니다.

<네 번째>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고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계시 선언에 앞서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 이면에는 아버지의 권능이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이는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계시자이고. 그래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말씀하시는 아들의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에 달려있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빛이신 말씀으로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비춰 드러내주고, 아버지께로 향하여 이끌어 갑니다. 그러니 이제 말씀의 엔진인 성령에 따라 힘차게 달려야 할 때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이루시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제게 간청함은 제게 희망을 두심이요, 제가 더디어도 놀라운 인내로 기다림은 제게 믿음을 품으심입니다.

제가 무릎 꿇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호의로 인내하고 때를 기다릴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사랑이신 예수님

-반영억신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 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심판 

-송영진신부-


교리를 가르칠 때, 또는 강론을 할 때,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는 말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심판과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르치는 일이 편하고 쉬워지긴 할 텐데,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리를 잘못 가르치는 것이 되고, 잘못된 강론을 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를 짓는 일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6-47).”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하느님의 뜻’은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 즉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최후의 심판 전까지만 사람들을 사랑하시다가 심판 때에는
그 사랑을 중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심판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은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죄인들을(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심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하고,
자기 스스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하시고 처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심판과 처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즉 예수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그 죄인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곧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 죄인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포기해버리면 예수님도 ‘나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말하는 ‘포기’ 라는 말은,
심판 때에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일에 지금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태평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서 고통을 겪을 때,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고 벌부터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판과 벌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만 내린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고통을 겪을 때, “죄 없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억울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경우도 역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고, 하느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죄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서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심판과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함부로) 판단하는 죄를 짓는 일이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서 제자들이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요한 9,1-3).
<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로데가 천벌을 받아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사도 12,23).
그처럼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일에 직접 개입하시는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아주 가끔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부로 하느님의 심판과 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에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숙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세계적인 재난의 경우에는 사람들은 흔히
“종말이 온 것은 아닐까? 혹시 이 재난이 ‘최후의 심판’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외에는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치는지,
또 최후의 심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닥치는 재난들이 종말의 재난인지,
또는 최후의 심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이 재난이 혹시 종말의 재난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면,
거의 백퍼센트 종말의 재난이 아닙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닥쳐서
순식간에 끝나는 전우주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마르 13장).
종말과 심판을 의식한다면 ‘회개’부터 하는 것이 옳은데,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서워하기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2,23)고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아들을 고백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을 다 모시고 있다.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분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5)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이 같은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흐르는 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 물이 흐를 수 있게 한 샘의 물을 쓰는 것과 같다. 흐르는 물의 본질은 샘물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는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을 영원으로부터 보고 계시며, 아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하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에 싸일 것이다. 우리를 비추는 빛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 남아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오신 빛을 믿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가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 주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고 하셨다. 그래서 당신의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정녕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호세 6,6 참조)라고 하신 것과 같이, 희생제물은 의로운 사람을 더욱 맞갖은 사람이 되게 하고, 자비는 죄인이 구원받게 해 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8) 이 말씀은 그분이 마지막 날에 몸소 심판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시는 말씀이다. 그분이 하신 말씀은 바로 그분 자신이시다. 그분의 말씀이 바로 그분이기 때문에 그분으로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업신여긴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죄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49)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인격적 말씀이시니 아버지를 잘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셨으며, 그러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 영원한 생명이 아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곧 아버지의 명령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50)라고 하신 것이다. , “지금 너희에게 말하는 내가 바로 말씀이다.”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참되시고, 아들은 진리이시다. 참되신 분께서 진리를 낳으셨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완전해서 새로운 진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당신의 진리를 말씀하시면 되는 분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말씀이시고, 진리이신 그분을 맞아들이고 따르면서 항상 빛속에 살며 세상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자.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 46)

-한상우신부-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는
초록의 빛나는
오월입니다.

이 생명의
빛이 다다르지
못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사랑의
빛이십니다.

두루두루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의 마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용서하시고
끌어안는 빛의
마음입니다.

빛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됩니다.

우리를
모아들이시는
구원의
빛이십니다.

빛이 있기에
새로워집니다.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빛이 있습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의 길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어제 복음의 마지막 문장을 부연하는 듯합니다. 요한 복음 10장의 후반부부터 12장의 뒷부분 사이에 유다인들의 반발과 라자로를 살리신 일화들이 들어 있지만 전혀 손색없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5).

아버지와 예수님의 하나됨은 두 분의 무한한 겸손의 토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일하시되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아들을 통해 뜻을 이루시지요. 또 아드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시면서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각인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시며 온갖 선과 능력과 표징이 아버지의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50).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것을 섞지 않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되기를 꺼리지 않으시지요.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예수님으로서는 말씀이신 당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실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1독서 첫머리에서 밝히듯 이 말씀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사도 12,24).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성장하고 쇠퇴하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지요. 자란다는 건 자체의 생명력과 외부적 협력이 함께 움직인 결과입니다. 말씀의 생명력은 홀로 고립되어 계시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도들, 신도들과 함께 풍요로이 증폭되어 번져 나갑니다.

말씀이 널리 퍼져 나가는 과정 안에는 "예배와 단식"(사도 12,2)이나 "찬송"(화답송)만큼 "따로 세우고 떠나 보내는"(사도 12,2-3 참조) 도전을 공동체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성도 중요합니다. 그 모든 일 안에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시는 말씀이 마지막 날에 결정적인 힘을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8).

심판은 육체적 죽음 너머의 삶을 기대하는 인류에게 참으로 큰 도전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주체가 사랑이신 아버지가 아니고,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이 아니라, 당신 입에서 발설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온 생애를 걸쳐 사랑으로 전달하신 아버지의 말씀, 그분의 뜻은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뇌리에 새겨져 있고 마음에 물들어 있지요. 어쩌면 우리 온 존재 안에는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주님의 말씀, 가르침과 사랑이 가득 차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과 교리는 물론 자연과 양심과 모든 선한 이웃들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 자신을 이룬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는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투명하고 사심없이 전하시는 아버지의 뜻과 함께 자라서 오늘의 "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하는 심판의 기준은 저마다 각자 안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온 세상을 휘돌아 자라고 퍼져 나가는 말씀께서 우리 각자 안에서도 작용하시니까요.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 바로 그 예수님과 내가 하나라는 믿음이 있다면 심판은 더 이상 우리를 두려움에 몰아넣지 않습니다. 사랑이신 분과 사랑으로 하나인 우리에게 심판은 그리던 님과의 해후이고 애쓴 보람이며 사랑의 보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겠지요. 그 말씀이 우리를 드러나게 해주고 우리는 그 말씀으로 예수님을 드러낸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임의 신비를 체험하리라 믿습니다. 아멘.

내 말 네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니?  

-김찬선신부-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오늘 사도행전을 읽다가 하느님의 말씀이 자랐다는 표현이 새삼스러워서
그 뜻이 무엇일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이 널리 퍼져 나갔다는 뜻으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널리 퍼져 나간 것과 다른 의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
또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지 않고 그대로이거나 죽어갈 수도 있고
우리들 공동체 안에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거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바로 떠오르는 것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씨앗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아예 씨가 뿌리내리지 못한 경우도 있고,
씨가 뿌리내리기는 했지만, 곧 말라비틀어져 죽거나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 어떤 경우건 하느님의 말씀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잘 자란 씨앗은 수십 배의 열매를 내는데
한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잘 자라면 그는
하느님을 믿는 이의 수를 늘리는 수확을 거두고,
하느님의 말씀이 널리 퍼져 나가게 하는 결과를 맺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이 한 사람 안에서 잘 자라기만 해도
하느님 말씀은 그 사람 안에만 머물지 않고 널리 퍼져 나가지만
공동체 안에서 잘 자라면 하느님 말씀은 더 멀리 또 많이 퍼져 나갈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안에서 하느님 말씀이 잘 자라고 있는지
먼저 성찰한 다음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잘 자라고 있는지도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공동체가 기도는 같이 많이 하는데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는 같이 성찰하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자라도록
같이 노력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는데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아이가 자기 필요한 것만 달라고 하고
부모가 하는 말은 듣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인데
우리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바로 그렇게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수도 생활을 하면서 늘 아쉬운 것은
공동으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실패하는 것, 다시 말해서
공동체에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같이 듣는 것에 자주 실패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매일 미사를 드리거나 전례를 거행하면서
복음이나 성경 말씀을 같이 듣지만 거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같이 찾지 못하기에 각기 듣고, 각기 느끼고, 각기 결심하고는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느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같이 듣자는 뜻에서
성경을 세 번 같이 펼치곤 하였지요.

하느님 말씀을 같이 들었다면 이제는 같이 실천함으로써
싹이 튼 하느님 말씀이 자라게 해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더 멀리 또 많이 퍼져 나가게 해야겠지요.

아무튼 오늘 저에게는 이런 하느님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내 말 네 안에서 잘 자리고 있니?'
'내 말 너희들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니?'

그런데 아무튼 우리가 다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들으면 그것을 실천해야 하기에 듣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5월 15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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