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3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Margaret K 2020. 5. 2. 19:32

2020 5 3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양 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

 (요한 10,1-10)

 

 The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recognize his voice.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생명 주일) 매일미사

최요안 세례자요한 신부 집전 : https://youtu.be/4gmcigxHlP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문’에 빗대어 드러내십니다. 그리스 말에 ‘문’은, 안팎을 구분하는 개념의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드나드는 ‘통교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통교하는 문은 안팎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그 자유 안에서 예수님과 신앙인은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서로를 닮아 가며, 서로를 통하여 생명을 공유합니다.
‘문’은 그래서 서로를 향한 ‘길’이 됩니다. 길을 걷다 보면 목적지에 다다르고 그 목적지에서 목자와 양들은 서로 만나 풀밭의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길을 벗어나 걷게 되면 힘들고 불편해서 목적지에 다다르기는커녕 자기 존재마저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는 무엇을 해도 안 돼!’ …….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를 탓하며 세상살이마저 내려놓을까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고민의 끝은 결국 자신 안에 갇혀 버리는 외톨이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만든 ‘길’이 아니라 통교와 소통, 그리고 서로를 살찌우는 생명으로 열린 길이어야 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려고 떼쓰듯 덤벼드는 완고한 투정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일이 예수님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한다는 것을 자기 삶의 만족이나 욕망의 충족으로 폄훼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용인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신앙은 서로의 목소리를 애써 꼼꼼히 듣는 이들의 여유 안에 풍성한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깊은 사랑의 문

-키엣대주교-


사랑이 넘치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열어 주신 무한한 은총의 문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셨고 그 처음은 유다인들이었습니다.

“닭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 후 다른 많은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주님의 문은 종족과 언어를 초월하여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아주 활짝 열린 은총의 문입니다. 인간세상을 초월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열린 문이며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문입니다.

주님의 문은 깊은 사랑의 문입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이름은 사람을 뜻하고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부터 우리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가 아직 태아일 때 당신 두 눈이 보셨고 이미 정해진 날 가운데 아직 하나도 시작하지 않았을 때 당신 책에 그 모든 것이 쓰였습니다.”

그 분께서 당신의 소리를 알려주셨기에 우리는 그 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며 당신의 소리를 들려주셨고 당신의 사업에 초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예수님께서 어둠과 단절의 돌문을 부수고 부활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 인간도 더 이상 육신이 소멸되는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한된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살수 있는 성령의 세계로 나가는 문도 열어 주셨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세계, 어떠한 한계도 없는 열린 세계, 새로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원천을 향하는 문이십니다.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이웃이 많습니다. 희망이 없는 삶은 비록 살아있어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한 삶이라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열어 주신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 고통과 질병, 절망이 없는 새로운 삶, 그 새로운 삶은 바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생활과 주님의 삶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새로운 삶이란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행복한 삶을 의미합니다.

비록 힘들고 지친 삶이지만 언제나 더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되기 위해 저 높은 고귀한 곳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새 생명이 태어날 때 축복을 주고 생일을 축하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양의 무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진정한 목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양들이 푸르른 들판에서 목초를 뜯어먹고 영원한 생명수를 만날 수 있도록 넓은 지평선까지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돌보아 주시는 주님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이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유일한 우리의 목자이신 그분을 따르고 그 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끝없는 지평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언제나 그분 가까이 따르십시오.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분께 가까이 가십시오. 지친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언제나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하고 그 목소리를 따라 주님께 다가가십시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는 주님의 문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은 넓게 열린 문이십니다. 그러나 그 문은 때로는 닫혀 있습니다. 나는 그 문을 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더 넓은 문을 열기 위해 어떤 노력과 희생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양들의 문이다

-이성우신부-


어린 시절 우리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자주 부르시곤 했습니다. 부르시는 목적은 대부분 심부름이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신 나게 노래 부르며 하는 심부름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구시렁거리며 하는 심부름도 제법 있었습니다. 당연히 대가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도와드렸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은 경우도 있었지만 가끔은 꾀를 부려 못 들은 척하거나 숨어 있다가 혼이 나고 기분도 엉망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수고했다며 맛있는 간식이나 심지어 용돈이라도 주실라치면 그 기분 최고였지요.

사실 우리는 부르심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상이 부르심과 응답의 연속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선생님들은 제자들을,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을 부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친구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상대를 부를 때는 무엇인가 용건이 있다는 뜻이기에 가끔 그냥 불렀다는 이들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어떨까요?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도 부르심과 응답은 멈추지 않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성소라면 하느님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는 응답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싱거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원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그것을 사제 성소, 수도 성소, 혼인 성소 등으로 구분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있고,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감각(sensus fidei)을 키워야 합니다.

감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어떤 분야에서든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도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뜻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감각을 키워주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또한, 그분은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분께 시선을 고정한 채 말씀을 듣고 빵을 나누며 함께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뛰어난 감각을 얻게 될 것이고 용기를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모범이시고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선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시는 길잡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여러분 모두 성소 안에 담긴 보화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완벽한 신뢰와 결속의 관계

-김혜윤수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그 사람은 보고 있었다.” 스위스의 일간지 「노이어 쮜르허 자이퉁」 (Neue Zurcher Zeitung)이 ‘어둠속의 대화’라는 작품을 평하면서 쓴 문장입니다. 장애우 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수녀님을 통해 알게 된 이 전시회는, 시각이 차단된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더 잘 파악하게 됨을, 그리고 어둠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시각 이외의 감각들을 활용하여 보다 진정한 소통에 이를 수 있음을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와 그를 따르는 양떼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양들은 여러 목자들 중 유독 자기 목자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동시에 목자는 자기 양들을 찾아내어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요한 10,3) 느낌, 체취, 목소리만으로 상대를 구별하여 알아내고 그만이 갖는 특성을 이름과 일치시켜 인식하는 관계는 특별한 관심과 섬세한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고, 하느님과 우리가 바로 그런 관계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 복음의 맥락
본문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됩니다.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시고(요한 10,1-6) 후반부에서는 ‘양 우리의 문’에 비유하십니다.(7-10절) ‘목자’와 ‘양 우리의 문’은 모두 당시 근동지역의 목축업을 배경으로 할 때 이해되는 이미지들입니다. 우선 ‘목자’는 이스라엘 안에서 고대로부터 매우 친근하게 정착된 이미지였습니다. 구약성경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모세와 다윗은 백성의 영도자가 되기 전에 이미 실제로 양떼를 치던 목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마을에는 주거지에서 떨어진 외곽에 큰 양 우리가 있었고, 그곳에서 양들을 공동으로 사육하였다고 합니다. 양 우리에는 여러 소유주의 양들이 무작위로 섞여 있었지만, 그들은 각자의 목자가 불러내는 소리를 알아듣고 그 목자의 음성에만 움직입니다. 두 번째로는 ‘문’에 대한 것인데, 양들이 머무는 울타리에는 일반적으로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양들에게 출입 시의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양들을 강도나 도둑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의 본문은 이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목자이지만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라고 선언합니다.

찰스 에밀 제이콥의 ‘우리로 돌아가다’(1818).

■ 목자의 특징
오늘 복음의 본문은 착한 목자가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자세히 알려줍니다. 우선 목자는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존재입니다.(3절) 목자가 아닌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4절) 나는데 이유는 양들이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절) 한국어 ‘알아듣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아쿠오’는 단순히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경청하여 식별하고 이해함을 의미합니다. 양들과 목자는 단순히 목소리만을 구별하여 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아는 관계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호명한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3절) 나갔다가 또다시 하나하나 양 우리로 들여보내는 일을 합니다. 매일같이 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함께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이지만 그 어떤 리더십도 해내지 못하는 충실한 추종 관계를 형성합니다. 세 번째는 양들에 “앞장서”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앞장서 감’은 모든 역경과 장애를 미리 마주하고 걷어내며 가야할 방향성을 결정함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는 매일의 난관을 먼저 마주하고 양들과 함께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그들을 따르게 하여 “풀밭을 찾아…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9-10절)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소리를 알아듣고 들은 바를 행하며 이를 충실히 따르는 매일의 관계가 서로를 사랑으로 살려내는 기적과 구원이 됨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착한 목자와 반대되는 이미지도 소개합니다.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이들입니다.(10절) 사실 도둑은 하느님 백성의 소유를 빼앗는 이들이고, 강도는 하느님 백성을 폭력과 위협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 백성을 갈취하고 생명을 도살하며 권위적 폭력으로 지배하는 이들은 목자가 아닌 도둑이며 강도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목자이시며 주님이시고 구원자이신 분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제2독서, 1베드 2,21) 주심으로써 진정한 목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보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히포그람모스’는 아이들이 언어를 배울 때 반복적으로 따라 쓰기를 연습하는 일정한 샘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런 연습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발자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이크노스’ 역시 ‘발자국’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단어로서, 단순히 따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발걸음이 남긴 흔적을 그대로 밟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분께서 ‘본보기와 발자취’로 보여주신 모범의 구체적 내용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다는 것이고(23절)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24절) 이것이 진정한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가 되는 길이며(25절)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다고 선포합니다.(제1독서, 사도 2,36) ‘목자’이신 그분은 이제 하느님에 의해 ‘주님’과 ‘메시아’로 임명되신 것입니다.

코로나19와의 전쟁 중에 대한민국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새로 대표가 된 이들은 모두 행복과 복지를 약속했고 고통과 불평등, 불의로부터의 해방을 정직과 충성으로 이룩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늘 반복되어 온 역사의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적 전망은 철저한 희생정신과 항구한 헌신, 국민에 대한 지독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렇지 못할 때는 혐오와 폭력, 비명이 난무하는 최악의 국회로 또 다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목소리만으로도 민중을 안심시키고 따를 수 있게 하는 완벽한 신뢰 관계이며, 이 관계는 어쩌면 어둠 속에서도 온전히 그의 소리를 믿고 따르는 절대적 결속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관계라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오히려 더 강한 빛을 선명하게 볼 수 있고 강인한 신념과 사랑이 소통되는 기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기적을 ‘혁명’이라 부르고 우리는 이를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사명

-김병수신부-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매년 성소 주일이 되면 신학교와 수도원에서는 성소 주일 행사 로 시끌벅적할 텐데,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대부분 행사가 취소되거나 축소되어 하루를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성소 주일인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특별히 교회의 거룩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성직자, 수도자와 예비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각자의 성소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 TV 뉴스에서 인터뷰 장면을 보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일하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둔 여간호사에게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두 달 가까이 집에도 못 가면서까지 이렇게 치료 에 전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간호사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사명감이죠!” 이 한마디의 말을 건네는 간호사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와 마스크 자국이 선명하였지만, 보는 이에게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하기 충분 하였습니다. “사명감이죠!” 지금도 제 뇌리에 남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가족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 었을 텐데, 그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간호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소중하게 보였습니다. 이번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간호사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대구와 경북으로 달려와 주 신 의사, 의료진, 119 구조 대원, 공무원, 자원봉사자들 모두가 자신이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의 길을 먼저 가고 있는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성소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 성소자들이 가져야 할 사명감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시기에 좋은 본보기를 보여준 그들을 생각하며 하느 님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제와 수도자들,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더욱 투철한 사명감으 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분명 감동할 것이며 많은 이들이 성소의 길에 동참할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 10,2)


주님의 거울

-안기민신부-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거울이라는 영어 ‘mirror’ 는 ‘놀라다’ 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는 연못 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놀라서 빠져 익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지나친 자기도취를 뜻하 는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백설 공주에서 마녀도 신비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이쁘다고 생각하며 거울에게 ‘누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니?’하고 묻고 서는 그만 놀라고 맙니다. 우리 자신도 거울을 보면서 놀라곤 합니다. ‘내 얼굴에 이렇게 많은 잡티가 있다니’, ‘주름이 왜 이리 많지!’, ‘여기에도 흰머리카락이 있네’하면서 놀랍니다. 주로 거울에 비친 외적인 모습에 놀라워하지요.

내면을 비출 수 있는 거울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기인식이나 자기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 님께서는 우리 내면의 거울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비추어 주십니 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우리 내면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놀라워합니다. 그저 부끄럽기만 합니다.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지, 자기 패배감에 빠지거나 자신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거울은 우리의 외모를 비추기만 하는 단순한 거울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참 내면을 보게 됩니다. 그분을 통해서 자신의 참 내면을 보게 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떠나 주시길 간청합니다. 자신이 죄인 이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안 에 있는 또 다른 내면의 모습을 보도록 비추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삶으로의 가능성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분과 함께한다면 과거의 모습이 변화되어 주님 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비추어 알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능력과 재능을 보시고 당신의 일꾼과 봉사자로 우리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그분 앞에서 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이 하찮은 인간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내면의 거울로 끊임없이 부르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모습을 다듬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십니 다. 사제 성소는 주님의 선물로서, 그분께 우리의 모습을 비추면서 그분을 닮는 모습으로 변화시켜 가는 삶의 여정입니다.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나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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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하는 가장 큰 걱정은 무엇일까요?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취업하는 데 도움이 될까?’라고 합니다.

사실 이 걱정은 저 역시 신학교 다니면서 많이 했던 걱정이었습니다. 물론 취업이라는 목적은 아니지만,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신부 생활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결론은 이제야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도움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들이 정리되면서 예전에 공부했던 것들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갑니다. 또 당시에 공부했던 습관들도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당시의 공부가 제 삶에 분명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유한 나를 만들어가면서 이 세상 안에서 제 몫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빠른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 또 편하게 좋은 결과를 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바보 같은 삶이고,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을 것 같은 삶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곧바로 내게 어떤 결과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목자는 양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양을 인도하며,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모아들입니다. 즉, 양은 목자를 무조건 따라야만 합니다. 목자만이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성실하게 가르치며, 위험에서 구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목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따라서 양인 우리는 무조건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심과 걱정이 자리 잡습니다. 혹시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닌지, 정말로 안전한 길인지를 의심하며 걱정합니다. 그러나 양이 목자를 따르는 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양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지요. 목자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만을 듣고 있을까요? 목자이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구원을 성자의 권능에 맡기셨지요. 따라서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우리 각자의 성소를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성소라고 할 수 있는 사제와 수도자의 성소자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분 목소리를 듣고 올바르게 따르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행복과 자신감은 당신이 입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예쁜 것이다(테일러 스위프트). 



모든 것을 바꿔놓으신 주님.

사형수에 대한 십자가형은 유다인의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마의 형벌이었습니다. 유다인의 사형 형벌은 넓은 웅덩이를 파고 그 가운데 사형수를 세워 놓고 아래로 돌을 던지는 ‘석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에 있었기에 석형이 아니라 십자가형에 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처지가 바뀌었습니다. 웅덩이에 유다인들이, 돌을 던져야 하는 언덕 위에 예수님이 서 계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타는 원래 모세가 성막을 만들었을 때 짐승을 잡던 번제소가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즉, 짐승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장소였습니다. 이 장소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가 세워지는 곳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장소를 생명의 장소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모든 것을 바꾸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관습에 매여서 여전히 자기식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바꾸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입니다.                   

문이 아닌 목자는 도둑이다

-전삼용신부-


영화 ‘스틸라이프’(2013)는 고독사를 처리해주는 존이라는 한 구청직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는 고독사 한 사람들을 그가 원했을 법한 종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런데 워낙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기에 그의 일 처리는 매우 더뎠습니다. 고인의 장례식에 와줄 만한 사람의 단서를 찾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느린 일 처리에 짜증이 난 그의 새로운 상사는 22년간 같은 일을 해온 그를 해고하고 새로운 사람을 고용합니다. 새로운 직원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고독사 한 사람들을 재빠르게 ‘처리’합니다.


      이제 존은 마지막 일만 처리하면 됩니다. 마지막 대상은 빌리라는 자신의 집 앞에 살았던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를 힘겹게 찾아냈지만, 그녀는 빌리의 장례식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진첩에 있는 딸을 찾아냈습니다. 딸은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그렇게 자신을 찾아와 준 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둘은 아버지 장례 때 만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존은 장례식 전날 교통사고를 당해 말 그대로 고독사를 하게 됩니다. 존은 아무도 와주지 않는 장례식을 끝으로 재빠른 일 처리를 하는 직원에 의해 매장됩니다. 그 옆에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존을 기다리는 빌리의 딸과 몇 명의 사람들이 다행히도 빌리의 장례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존의 주위로 그동안 그가 장례를 치러주었던 모든 고독사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추도를 해 줍니다. 존은 세상에서 혼자였지만 천국에서는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주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는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목자는 자기 양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어서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 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 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아이들처럼, 결점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말해줍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단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단점을 덮어주셨고 우리는 그 희생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문이라고 하십니다. 목자는 양우리에 이미 있는 양 중에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이 이름을 지어준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있는 양들을 아드님을 통과하여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파견받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양들이 아버지께 가는 문이 되십니다. 문은 양들을 보호하고 또 참 목자에게 양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양들을 봉헌하는 문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목자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이지만 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파견되어 양들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양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목자가 양우리에 도착하였지만, 문지기들은 목자를 죽였습니다. 양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파견받은 목자들입니다. 자신의 우리에 양들을 잘 모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칫 양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도둑이 되고 맙니다. 도둑을 조심하고 또 도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파견받은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길이 되어주어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있는 양들을 데리고 나를 밟고 아버지께로 가시게 만드는 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깊은 산속에 거미 한마리가 오랫동안 친구없이 외롭게 지냈습니다.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거미줄을 보니 이슬 한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넌 누구냐?”

“난 이슬이야!”

거미는 오랫동안 친구가 없던 차에 “우리 친구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슬은 잠시 생각하다가 “응 그래 좋아.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나를 절대로 만지면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거미는 약속 지킬 것을 이슬에게 맹세했습니다. 그 후 거미와 이슬은 행복을 만끽하면서 외로울 땐 서로 위로하고 즐거움을 서로 나누었고, 세월은 흘러 거미는 이슬이 없는 생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미는 이슬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거미가 용기를 내어 “나 너를 한번 만져보고 싶어 응?”하고 말했습니다.

이슬이 슬픈 표정으로 “너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럼 너 나에게 또 한 가지 약속을 해야해. 만약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거미는 “응!”하고 말했습니다.

거미가 두 손으로 이슬을 꼬옥 껴안는 순간 이슬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파견되었다는 의식을 갖지 않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파견받았음을 잊으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도둑이 됩니다. 주님께 봉헌하는 부모라야 참 목자요 주님께서 드나드는 문이 됩니다.


      우리는 참 목자에게 닫힌 문입니까, 열린 문입니까? 자신을 죽여 그리스도께서 통과하게 하지 않는 목자는 모두 닫힌 문입니다. 문은 마치 혈관처럼 자신이 커지면 닫힙니다. 우리는 참 목자를 자신이 얼마나 목자에게 열린 문인지를 보며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이슬처럼 여기고 다시 하늘로 올려보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 물어보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장황한 말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 더 큰 호소력을 주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의 말보다는 한 사람의 행동이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코로나19의 현장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의자에 잠시 기대어 눈을 부치고 있는 의사의 사진입니다. 말은 없었지만 현장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 같았습니다. 의료인들의 수고가 정말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콧등에 밴드를 부친 간호사들의 사진입니다. 마스크를 하루 종일 착용하니 콧등에 상처가 났고, 밴드를 부친 것입니다. 밴드를 부쳐가면서까지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천과 아산의 주민들이 길가에 걸어놓은 현수막이 있었습니다. 현수막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푹 쉬다가 가십시오.’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버스를 탔던 교민들은 현수막을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을 겁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아버지처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위험이 있음에도 주민들은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었습니다. 2주간의 격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주민들은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를 받으면 사라집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 사라집니다. 길가의 현수막을 보면서 코로나19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열대를 가득채운 물건을 보았습니다. 코로나19의 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은 사재기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있으며, 질병관리본부의 대응을 믿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서는 텅 빈 진열대를 보았습니다. 휴지를 살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327일입니다. 텅 빈 바티칸 광장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교황님 홀로 제단으로 올라가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고령의 교황님이 홀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듯이 교황님은 기도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수고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두려워했던 제자들처럼 교황님도 예수님께 두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렇게 믿고 싶지만 솔직히 아직은 두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광장은 텅 비었지만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님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자연과 생태계를 함부로 대했음을 반성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을 더욱 그리워하는 시간이 되었고, 신자들은 사제와 함께 하는 미사의 소중함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욕심과 교만함으로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겸손과 희생으로 타인을 위해서 살도록 마음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어진 능력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능력과 재능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회개했는지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는지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타인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신학생 때 읽었던 글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음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사리에 맞지 않는 독선을 피우지 않으며, 평신도와 함께 본당을 이끌어 가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

평신도들에게 적절한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

검소하게 물질에 마음 쓰지 않으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웃어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과 행동에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성사 집행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교구장과 장상에게 순명하며, 동료 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교우에게 매이지 않는, 양쪽 귀를 모두 여는 사제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유일한 착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성소주일에 어울리게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착한 목자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일한 착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저희 같은 사목자들은 그저 유일한 착한 목자 예수님의 협조자일 따름입니다.

  

이스라엘 전통 안에서 목자는 구원자를 가리켰습니다. 시편 23장은 참목자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장 1~4절)

 

한편 이사야 예언자가 강조하는 착한 목자상은 이렇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야서 40장 10~11절)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목자’라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구원하시는지, 어떻게 따뜻하고 세심하게 보살피시는지를 묘사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런 착한 목자상을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함을 통해 그분께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실현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복음서 전체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양떼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목자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착한 목자라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붙여서는 안될 고귀한 수식어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감히 목자 운운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언제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가엾은 양 한 마리일 뿐입니다.

 

새벽안개가 걷히고 풀잎 끝에 아침 이슬이 방울방울 맺힌 아침, 간단하게 요기를 끝낸 목자는 양들을 깨우러 우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목자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양들이기에 한 녀석 한 녀석이 다 소중합니다. 밤새 잘 잤는지, 아픈 녀석을 없는지 한 마리 한 마리 얼굴을 보며 건강 상태를 확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야 수 백 마리 양들이 다 비슷비슷, 그 녀석이 그 녀석 같겠지만, 매일 매 순간 양떼들과 동고동락하는 목자는 한 마리 한 마리 다 소중하고 다른 녀석들과 구별이 가능합니다. 어떤 목자는 모든 양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도 합니다.

 

양들도 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중에는 게으른 녀석, 늘 뒤로 빠지는 녀석, 아침 잠이 유난히 많은 녀석, 시들시들 병약한 녀석, 다른 양들을 못살게 구는 녀석...

 

그래서 목자는 아침부터 밤 되기까지 늘 바쁩니다. 잔소리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침 해가 중천에 뜬지 오래다, 이제 그만 자고 빨리 일어나라, 너는 오늘 털이 그게 뭐냐, 이리 와라. 내가 빗어줄게. 거기 구석에 너희 둘, 아침부터 왜 싸우냐? 자 빨리 자리 털고 일어서자. 아침 먹으러 나가야지...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조금이라도 더 잘 먹이기 위해 좋은 풀밭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작은 개울도 건너고 도로도 건너 마침내 도착한 넓은 평원, 가슴이 탁 트일 정도입니다. 멀리 작은 호수 위로 부서지는 아침햇살이 눈부십니다. 목자의 인도한 잘 차려진 밥상 앞에 양들은 정신없이 풀을 뜯기 시작합니다. 양질의 풀을 맛있게 먹어대는 목자의 마음이 훈훈해지고 흐뭇해집니다.

 

보십시오. 착한 목자의 하루 일상입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도 동일합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이영근신부-


부활 4 주일인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 불려 왔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1독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여기서 베드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에 어떻게 처신하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요 메시아로 삼으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거십니다.”(사도 2,38)


그리고 그는 그의 편지인 <2독서>에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2,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 다른 한 방향은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한편, 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고 말하며,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는 복음의 비유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오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당신께서는 거처할 집을 마련하시고 가슴을 열고 팔을 벌리시고 부르십니다.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서로 통해야 한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각자의 성소에 충실 할 수 있는 은총을 기원합니다.

한자성어 중에 ‘염화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꽃을 집어 들고 웃음을 띠다’ 란 뜻으로 ‘말도 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에로 전하는 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들 앞에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말없이 약간 비틀어보였는데 가섭이란 제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답니다. 다시 말하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서로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더욱 주님과도 소통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10,3).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10,27-28).고 하셨는데 진정 나는 그분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신데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못 알아듣고 있으니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해야 하고 그분의 행동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침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토마스커킹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3장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고요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아무리 얘기를 하려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식사를 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이른 새벽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살이에 바쁘고 지치고 힘이 들지만 그럴수록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는 길이 그분 마음에 드는 길인지 알게 되고, 살게 되며 마침내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루 잠시 잠깐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들으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십시오. 사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먼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위로와 희망, 지혜, 문제의 답, 그리고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힘과 능력의 손길, 열매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폭 넓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고 부자간에, 부부간에, 이웃 간에도 서로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도 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지켜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직자, 수도자의 길에 나설 수 있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소의 동기는 아주 다양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도 부르심을 주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도 신부님들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밥상에 김이 올라가고 달걀이 놓여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시골 공소에서 지냈는데 어른들로부터 주일공소예절에 나오는 것으로 칭찬을 듣게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너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공소회장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어울리던 회장님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명은 수녀가 되었으며 하나는 결혼을 하여 자녀에게 성소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특별성소의 꿈을 키워줄 수 있는 칭찬과 권고를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혼성소도 좋고, 수도자, 성직자의 성소가 다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에로 부르심 받는 것이 은총입니다. 특별 성소인 성직자, 수도자의 부름도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만큼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각 가정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교황님 담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6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해 8월 4일 사제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저는 사제들에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날마다 헌신적으로 하느님 백성을 섬기며 살아가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사제들에게 전하는 감사와 그들 직무에 보내는 지지를 고통, 감사, 용기, 찬미, 이 네 가지 핵심 단어들로 표현하였습니다. 제57차 성소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다시 한번 이 표현들을 살펴보며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이번 성소 주일 복음 구절의 배경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복음 구절은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폭풍우 치던 밤에 예수님과 베드로에게 일어난 특별한 일화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마태 14,22-33 참조).

군중의 경탄을 자아낸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군중을 돌려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는 이 장면은 어느 모로는 우리 삶의 여정을 연상시켜 줍니다. 실제로 우리 삶의 배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안전한 뭍에 닿기를 초조히 고대하며, 바다 위에서 기회든 위험이든 맞닥뜨릴 채비를 하는 동시에, 키잡이가 우리를 마침내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기를 열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배가 항로를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안전한 항구로 이끄는 등대의 불빛을 좇아가는 대신에, 환영에 현혹되어 버리거나, 난관과 의혹과 두려움이라는 맞바람이 불어닥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제자들의 마음에도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나자렛의 스승을 따르라고 부름받아,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안위를 뒤로한 채 주님을 따라나서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건너편 강가로 건너갈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 모험은 평온하지만은 않습니다. 밤이 되어 맞바람이 불고 배는 출렁이는 파도에 요동칩니다. 부르심에 부응할 수 없고 이를 해낼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압도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 힘겨운 여정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말해 줍니다. 한밤을 가르는 여명의 첫 빛줄기처럼, 주님께서는 파도로 심하게 출렁이는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분께서는 파도치는 물 위를 걸어 당신을 만나러 오라고 베드로를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를 구해 주십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고 바람을 그치게 해 주십니다.

그러하기에 성소에 관한 첫 번째 표현은 감사입니다. 올바른 항로를 향하여 배를 저어가야 하는 과제는 그저 우리 노력에만 맡겨진 일도 아니고, 우리가 선택한 여정에만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아실현과 삶의 계획들의 성취는 각자 고립된 ‘나’로서 내리는 결정들로 계산되는 결과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 무엇보다 이는, 높은 데서 오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인 건너편 강가를 가리키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배에 오를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도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한편, 키잡이가 되시어 우리와 동행해 주시고 우리에게 방향을 일러 주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암초를 만나 좌초하지 않도록 막아 주시어, 심지어 우리가 파도치는 물 위를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모든 성소는 우리를 만나러 오신 주님께서 보내시는 사랑의 눈길에서 생겨납니다. 우리의 배가 폭풍우에 휩싸이는 바로 그 순간조차도 성소가 생겨나고 있을 것입니다. “성소는 우리 자신의 선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소는 주님의 과분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60주년을 맞이하여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이하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 2019.8.4.). 따라서 마음을 열어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깨달을 때라야 우리는 성소를 발견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다가오시는 광경을 보고 제자들은 처음에는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들을 안심시켜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이 말씀이 우리의 삶과 성소 여정에 언제나 함께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이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두 번째 표현인 용기입니다.

우리가 길을 걷지 못하게, 성장하지 못하게,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정해 주신 진로를 선택하지 못하게 종종 우리를 가로막는 것들은 분명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유령들입니다. 안전한 강가를 버리고 혼인 생활, 성품 사제직, 축성 생활 등의 생활 신분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부름받을 때에 우리가 보이는 첫 반응은 ‘불신의 유령’인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이것은 나의 성소일 리 없어! 그 길이 진짜 옳은 길일까? 주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일까?

그러한 상념들, 곧 우리 마음속에서 추진력을 잃게 만드는 정당화와 계산속이 점점 자라나, 우리가 동요하는 가운데 출발지 강가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머무르게 만듭니다. 우리가 틀렸는지 모른다고, 우리는 그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우리는 그저 쫓아버려야 할 유령을 보았던 것이라고 여깁니다.

혼인을 하거나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께 봉사하고자 축성되는 것과 같은 삶의 근본적인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배를 흔들어대는 의문도 의구심도 어려움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러 오시어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에도 그렇게 해 주십니다. 그러한 주님 현존을 믿을 때에 우리는, 제가 이미 “달콤한 슬픔”(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이라고 말했던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권태는 성소의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내적 좌절입니다.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저는 또한 고통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이 고통이라는 단어를 고단함이라는 말로 다르게 표현하고자 합니다. 모든 성소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특히 평신도, 사제 그리고 축성 생활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성소를 통하여, 우리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복음을 위하여 봉사하는 데에 우리 삶을 바치기를 주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성인처럼 우리는 열망과 열정과 함께 결점과 두려움도 지니고 있습니다.

혼인 생활이나 사제 직무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책임이나 다가올 어려움에 압도된다면, 우리는 이내 예수님의 눈길을 피하다가 베드로와 같이 물에 빠져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믿음은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며 모든 폭풍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줍니다. 피로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물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성소를 기쁘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열정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집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역사의 격동기에, 특히 우리가 폭풍우에 휩싸여 있을 때에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역풍을 잠재우시어 악과 두려움과 체념의 세력이 더 이상 우리를 압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구체적 성소에 따라 살아갈 때에 그러한 역풍이 우리를 지쳐 쓰러지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시민 사회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은 모든 사람, 제가 즐겨 표현하듯 ‘용감한’ 부부들, 그리고 특별히 축성 생활이나 사제직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저는 여러분의 고단함을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립감, 성소의 강렬한 불꽃을 차츰 사그라들게 만드는 타성에 젖어 버릴 위험, 우리 시대의 불확실성과 불안함의 무게,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용기 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그분은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잡아 주시며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파도 한복판에서도, 우리의 삶은 찬미를 향하여 열려 있습니다. 찬미라는 이 말이 제가 여기에서 말하는 성소에 관한 마지막 표현입니다. 찬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같은 내적 자세를 함양하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 머무신 주님의 눈길에 감사드리고, 두려움과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간직하시며, 용감하게 당신의 성소를 받아들이시어, 당신의 삶이 주님을 향한 영원한 찬미의 노래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특히 이 성소 주일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일상 사목 활동을 통해서도, 교회가 계속해서 성소를 증진할 수 있기를 당부합니다. 교회가 우리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신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견할 수 있기를 빕니다. 하느님께 “예.”라고 대답할 용기를 찾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온갖 고단함을 이겨 내어, 우리의 삶이 마침내 하느님과 형제자매들과 온 세상을 향한 찬미의 노래가 되기를 빕니다. 동정 마리아시여, 저희와 함께해 주시고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0년 3월 8일 사순 제2주일 프란치스코 


성소 주일 

-송영진신부-


성소자 수 감소에 대해서 전문가들이 여러 가지로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소자 수가 줄어드는 것은,
젊은이들이 사제나 수도자의 삶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삶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제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산율 탓과 세상 풍조 탓을 하기 전에, 또 젊은이들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을 탓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눈에 사제답게 사는 사제들이 별로 안 보이고,
수도자답게 사는 수도자가 별로 안 보이니
그 삶을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반성과 성찰이 먼저입니다.)
물론 모든 사제와 모든 수도자가 다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떻든 우리 교회가 옛날보다는 확실히,
전반적으로 세속에 물들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중세 때에 교회가 심각하게 타락하고 부패했을 때, 오히려 성인 성녀가 더 많이
나왔고, 그 성인 성녀들을 보고 성소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위기 때에도 남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들이 늘 있습니다.
그런 신앙인들 덕분에 교회가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되고,
성소자들도 완전히 끊어지지 않고 꾸준히 나옵니다.
(그렇게 된다고 믿습니다.
전부 다 포기하면 교회는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은 수의 신앙인이라도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교회는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이 전부 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 세상은 금방 하느님 나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요한 10,1).”

들어야 할 말씀은 안 듣고 듣지 않아야 할 소리만 듣는다면,
그것은 도둑과 강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러다가 결국 그들 뒤를 따라가는 일이 생깁니다.
읽어야 할 성경은 안 읽고 다른 책들만 읽고,
그 책들 속에 무슨 대단한 진리라도 들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런 책들에 빠져 있다면, 그러면 진리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제들이 그렇게 되면 ‘참 목자의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2-3).”

이 말씀에서,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라는 말씀은,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로,
또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만 들어야 한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목자의 목소리만 듣는 사람이고, 또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잘 알아들으려면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말씀 안에서’, 또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이비 종교에 잘 빠집니다.)

여기서 목자는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는 이’로,
도둑과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문’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하느님 나라의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시는 분”입니다.
도둑과 강도는 양들을 ‘하느님 나라의 문’이 아닌 다른 문으로
데리고 가는 자들입니다.
그 문은 ‘멸망으로 이끄는 문’입니다(마태 7,1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대단히 좁다고
말씀하시는데(마태 7,14), 하느님께서 일부러 좁고 험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세속의 눈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신앙생활은 재미없고, 힘들고, 어려운 생활입니다.
그러나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은 기쁨 가득한 생활이고, 행복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힘든 줄을 모르고 항상 기뻐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다.”는 말씀도(마태 7,13)
세속의 눈으로 볼 때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재미있고, 즐겁고,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먼저 판단하는 사람이고,
멸망을 향해서 나 있는 길은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눈앞만 보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길의 끝을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4-5).”

이 말씀에서 “그를 따른다.”는 “그를 따라야 한다.”로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야 한다.”로, 또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는 “낯선 사람은 피해 달아나야 한다.”로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된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신앙생활은 목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먼저 따라가는 이들의 뒤를 새로운 신앙인들이 또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교회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사제 성소도 그렇게 앞서 가는 사제의 뒤를 다른 사제가 뒤따라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앞서 가고 있는 사제가 먼저 잘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낯선 사람’이라는 말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이든지,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간에......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오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착한 목자로 나타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가졌던 목자로서 안정과 번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생활의 친교, 친근한 애정 등의 의미를 지닌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목자라는 개념은 그들의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드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상징적 개념을 사용한다. 교회는 이 개념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시며, 그분이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수난 하시기 전에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드러내시는 절정의 순간이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우리에서 있는 일을 말씀하신다. 목자들은 한 양우리에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각자 자기 양들을 집어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래서 목자가 부르면 그들은 목자를 따라나서고, 다른 양들은 자기 주인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문지기역시 목자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으로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한다.

 

그러나 도둑들딴 데로몰래 들어가 양들을 훔친다. 잡히지 않은 양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5). 이것은 참 목자도둑강도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목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둑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누가 으로 양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고, 양들을 죽여 없애려고하는 도둑이며 강도인가?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그들은 폭력으로 그리스도를 없애려 한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10). , 양 떼뿐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목자까지도 없애려 한다. 그래야 양떼를 흩어지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마태 26,31).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모든 양 떼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10)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참되고 유일한 목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의 문”(7-9)이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9)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항상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초대를 따름으로써 진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도둑과는 달리 목자가 반드시 통과해야 이시며, 또한 참된 목자가 베푸는 희생적 사랑의 봉사를 잘 보여주신다. 즉 예수께서는 참 목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태어날 무수한 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증명의 이시다.

 

이것이 오늘 성소주일의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으려 준비된 많은 젊은이가 있다. 그러나 한편 주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실천해야 할 그 봉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이상은 높지만 주저하는 그 마음에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참된 목자는 항상 그분뿐이시며 주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떳떳하게 당신을 드러낼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 모든 사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데, 참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참으로 봉사하는, 그리고 모든 교우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한상우신부-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떠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부르심의 문이
있습니다.

역사를
바꾸어 놓는
떠남이 있기에
새로워지는
만남이 있습니다.

부르심의 진가는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부르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게 되는
부르심의
참된 여정입니다.

무너짐과 아파함
사이에 피어나는
성소의 꽃이며

불안정과 울음
사이에서 맺혀지는
성소의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성소의 여정을
기쁘게 봉헌하는
성소 주일 되십시오.

이 시대의
수도 성소는
가난과 인내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성소주일인 오늘 미사 말씀들에서는 '부르심과 들음'에 대해 깊이 숙고하라고 하십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ㄱ).

양들은 기가 막히게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주인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는 단번에 알아차리고 절대로 따라가지 않지요.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ㄴ).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압니다. 이름을 안다는 건 그 존재를 면밀히, 구석구석까지 섬세히 알고 감지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양이라도 목자의 사랑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그렇게 잘 알아듣는 이유는 먼저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애정을 갖고 대하며 불러 주기 때문입니다.

그냥 '뭉뚱그려' 막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귀하게 이름을 불러줍니다. 아무개 엄마아빠가 아니고 아무개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 주시는 주인이시기에 그 각별한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지요.

한편, 우리를 아무개로 취급하며 애정없이 부르는 다수의 목소리는 금방 알아듣고 주인이 아님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녀를 부르시는 방법도 이렇게 개별적이고 각별한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확실하기에 그 목소리를 분명히 알아듣고 주인의 뒤를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 풍성한 생명의 길(요한 10,10 참조)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설교대목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이들이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묻습니다. 이 질문 안에는, 신앙생활을 하느라고 하면서도 늘 미진하고 부족한 듯한 죄스러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목소리도 들어 있지요.

한편,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선포하는 것을 본 사람들의 첫반응은 분명히 부정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들은' 사람들은 그 소리가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들렸을 겁니다.

그래서 마음 아파하며 회개의 길을 찾습니다. 생명의 길을 찾습니다. 세례로 새로 태어나는 길을 걷습니다. 여기서도 부르심(설교)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들음"이 성소의 결실을 맺음을 봅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사도 2,39).

사실 이 부르심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축복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아듣는 이는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 부르심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이 축복을 걷어 차 버리는 것이겠지요.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베드 2,21).

베드로 사도는 이 은총과 축복이 그저 평안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런 은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1베드 2,20) 얻게 되는 은총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모든 성소의 길은 생명으로 이끄는 축복인 동시에 고난도 겪을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길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요한 10,4).

"앞장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말씀입니다. 그분은, 자기는 뒤로 빠진 채 양들을 몰아대는 삯꾼이나 양들을 해치고 팔아넘기려는 도둑과 다릅니다. 위험한 광야를 먼저 성큼성큼 헤쳐나가며 길을 만드시고 "발자취"를 남기십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이 "본보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1베드 2,25)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보호자이십니다. 대가에 연연함 없이 사랑 때문에 양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목자이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단 하나,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요한 10,10)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이 소명 자체가 대가이고 보상이며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각별한 개별적인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 부르심을 단번에 알아듣고 '예' 하고 응답하였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사제로 부르심을 받든 평신도로 부르심을 받든, 수도 성소로 부르심을 받든 결혼 성소로 부르심을 받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한 소명으로 불러 주셨음을 기억합시다.

남들이 가는 길이 때론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총과 축복의 선물은 나만의 길입니다. 물론 지금 그 길이 모호해 보일 수도 있고 때론 많은 고난도 섞여 있을 수가 있습니다. 거짓 목자의 목소리에 내가 흔들릴 수도 있고, 그분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귀기울여 들어봅시다. 저 멀리서 그분은 손짓하며 나를 부르십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들 때문에 잘 안 들리겠지만요.

오늘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내가 주님의 애정어린 목소리를 처음 듣고 설레었던 그때로 돌아가 봅시다. 그 음성을 다시 기억하고 벗님을 애타게 부르며 손짓하고 계시는 그분을 만나 뵙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저어기 계시네요. 빨리 쫓아가세요.

나는 성소자입니까?  
-김찬선신부-


부활 제4주일은 목자와 양의 얘기를 복음에서 들여주며
화답송과 영성체 후 기도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하늘의 영원한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우리의 목자이심을 노래하고 있고,
그래서 교회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부르시는 목자와
따르는 양들의 관계임을 기념하며 성소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보면 지금까지 성소주일을 지내며 많은 분들이 이 성소주일의
주인공이 아니고 늘 성소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보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성소자가 아니고 지금 수도원이나 신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다른 사람만 성소자라고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나는 성소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내가 만일 성소자가 아니라면
주님께서 나는 부르시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만일 주님께서 나만 부르시지 않았다면 매우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랬다면 서운한 정도가 아니라 매우 불행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주님의 성소 그러니까 주님의 부르심은
일차적으로 당신께로의 부르심입니다.

서양 언어에서 볼 때 성소는 직분에로의 부르심 성격이 큽니다.
Vocation이라는 말이 직업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것을 보면
어떤 직분이나 직업에로 부르신 것 특히 성직에로 부르신 것을 뜻하였지요.

그런데 이것은 특별한 성소이고,
보편적이고 가장 중요한 성소는 당신께로의 부르심입니다.
요즘와서 새 사제들을 보며 선배 사제들이 걱정하는 것중의 하나가
새 사제들이 사제직을 거룩한 부르심의 차원에서 보기보다
하나의 직업으로 보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직분에로 부르신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에게로 부르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만일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면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기에 불행해지는 거지요.

이것이 사제들의 문제라면 평신도들의 경우는
자신도 성소자라는 의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주님 당신에게로 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예외가 없는데
나는 부르심을 받지 않은 것처럼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갔었지요.
그래서 오늘 베드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인식치도 의식치도 않고 살 때 우리는
주님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가다가 길잃은 양이 되고 말겠지요.
사실 한동안 또는 지금까지 길잃은 양처럼 살았는데 이제 우리는
주님을 내 영혼의 목자요 보호자임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돌아온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에 대해 오늘 베드로서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요약을 하면 1)선행을 하는 것,
2)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선행을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따라가는 자의 첫 번째 실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악행을 함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를 위해 주님처럼 고난을 겪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이 선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고 선행을 했다면 그 선행은 사랑이
아니라 돈거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거래입니다.
부모의 행복은 자신의 사랑에 자식들이 보답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희생 덕분에 자식들이 행복할 때 행복한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우리도 청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5월 7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양 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그를 뒤따라간다. (요한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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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점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말해줍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단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단점을 덮어주셨고 우리는 그 희생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문이라고 하십니다. 목자는 양우리에 이미 있는 양 중에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이 이름을 지어준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있는 양들을 아드님을 통과하여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파견받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양들이 아버지께 가는 문이 되십니다. 문은 양들을 보호하고 또 참 목자에게 양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양들을 봉헌하는 문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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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사랑 때문에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생명의 복음을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사실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분명“(문을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상처받고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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