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4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5. 3. 19:11

2020년 5월 4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1-10 

 
I am the gate.
Whoever enters through me will be saved,
and will come in and go out and find pastu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나는 착한 목자다.”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착함’을 묵상해 봅니다. 착함은 다른 이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고, 착함은 서로를 아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일과 서로를 아는 일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대개 ‘안다는 것’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정보의 수집이나 지식의 축적으로 이해합니다. “나는 그 사람 알아.”라고 말할 때,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은 아닐까 되물어 봅니다.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앎’은 그 대상에 대한 전적인 의탁이고, 우리는 그러한 의탁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예수님 안에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의탁할 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생명을 얻어 누립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보다는 제 일신의 평온함을 위한 거짓 믿음이 널리 퍼져 있는 오늘날, 나는 무엇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자주 반문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 보자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을 함께 믿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 …….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착한 삶’입니다. 저 혼자 올바르고, 저 혼자 똑똑한 삶은 모든 이를 당신의 우리 안에 불러오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뜻과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착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명령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가해자 지목 문화’가 너무 팽배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잘못을 한 가해자를 향한 비판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해자로 모든 이유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또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라는 것에 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가해자로 지목되어서 피해를 본 경우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가해자로 지목되었지만, 피해자가 되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실수로 문장을 잘못 썼다고 합니다. 이 문장 하나에 꼬투리가 잡혀서 온갖 비난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댓글을 보고서 참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댓글에는 눈썹이 어떻다느니, 말할 때 입술이 어떻게 움직인다든지, 목소리가 어떻다든지,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지……. 등의 말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는 듯이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거부하는 가운데 상처는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은 나중에 ‘아니면 말고’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주인공의 상처는 스스로 극복하기 힘들 정도가 됩니다. 무조건 비판하는 폭력성은 점점 더 커지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서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에서는 절대로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들은 진리 앞에서도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착한 목자와 삯꾼에 대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삯꾼은 위험에 처하면 양들을 버려두고 달아납니다. 자신의 안녕만 생각하기에 양들이 공격을 받든 말든 마음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면서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누가 삯꾼인지, 착한 목자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양들인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에 대한 사랑이 컸습니다. 결국, 삯꾼과 착한 목자의 구별은 사랑의 여부에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이 삯꾼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닐까요? 사랑 없이 행하는 말과 행동이 커다란 폭력으로 작용해서 다른 이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착한 목자인 주님을 따르는 착한 양입니다. 이 양들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못된 삯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착한 양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헬렌 켈러).



가지치기

가지치기하는 정원사를 보면서, 나무의 처지를 생각해봅니다.

‘나는 자유롭게 성장하고 싶은데 왜 고통을 주는 거야?’

가지를 치는 고통에 정원사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라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면서 화를 낼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보기 싫은 모습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잔가지가 많아져서 햇빛과 영양분이 고르게 공급될 수가 없지요. 나무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지치기는 인간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을 넘어 나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으면 행복할까요? 때로는 쓸데없는 마음은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합니다. 나의 성장을 막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미움, 욕심, 부정적 판단, 이기적 마음 등등……. 잘라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잔가지들을 쳐내야만 진정으로 잘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습을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잘못된 마음을 치셨습니다.                    

생명은 내어주기 때문에 얻는 것이다

-전삼용신부-


  소통 강사 김창옥씨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의에서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소통 전문가라 자처하지만 정작 아들과는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사랑이 딸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딸과는 매우 이상적 관계입니다. 집에 가면 딸이 먼저 달려오고 그러면 아버지는 반갑게 딸을 맞아줍니다. 그런데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군대 교관을 흉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창옥씨는 ‘아버지’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인지를 못 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술과 도박과 폭력과 가정에 대한 무관심한 분이었습니다. 본인이 아버지를 모르니 아들들에게 아버지를 알려줄 수 없었고 그래서 아들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로부터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니 어린이집에 가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상처가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딸이 아빠를 보고 달려오면 아빠는 딸을 ‘공주님’이라 부르고 안아줍니다. 그런데 쌍둥이 두 아들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은혜 아빠!”라며 슬금슬금 멋쩍게 다가옵니다. 나의 아빠라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가 되려면 먼저 착한 목자에게 배웠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누군가를 착한 목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것이지 나에게서 생겨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3달 동안 열심히 아빠 연기를 하며 따듯하게 대해 주었더니 비로소 “김창옥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기를 3개월 더 했더니 비로소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알아야 아버지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다.

      강연을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김창옥씨는 공항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을 위해 돌담을 쌓으며 함께 허물어진 아버지의 한 다리와 어깨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에게 “미안하다!”란 말을 들었을 때 모든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소통이 될 때 아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주인이 주는 사랑을 양들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분명히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아버지와 그 생명을 전해주는 착한 목자로서의 아드님과 그로 인해 태어나는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려면 하느님의 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물이자 생명의 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생명을 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흘려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시 생명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에의 참여의 기본입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사막에서 피땀 흘려 벌어 아내에게 가져다줄 때 어떤 아내들은 그것을 자녀를 키우는 데 쓰지 않고 제비들에게 가져다 바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들이 돌아올 때 많은 이혼과 자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계는 그렇게 깨어집니다. 돈은 피와 같습니다. 그것을 흘려주지 않으면 다시 그것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는 이가 원하는 이에게 흘려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양육하신 모범을 이웃들에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이웃들에게 흘려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또 받게 될 것입니다. 이 흐름에 참여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선교’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성령의 힘으로 나의 피를 이웃에게 뿌려야 합니다. 그 피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그 피가 나를 통과하며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웁니다. 착한 목자는 그렇게 영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보스톤엘 가면 하버드 대학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학은 재력가의 기부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버드 대학도 많은 재력가의 기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초라해 보이는 노년의 부부가 하버드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기부금을 담당하는 직원은 노년의 초라한 부부를 보고 조금은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노부부는 직원의 태도를 보고 적은 금액을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대학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대학의 이름은 스텐퍼드 대학이라고 합니다. 스텐퍼드 대학은 하버드 대학 못지않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직원이 좀 더 친절했다면, 노부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않았다면 대학 하나를 만들만큼의 기부를 받았을 것입니다.

 

백화점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있습니다. 누추해 보이는 여인이 직원에게 옷의 가격을 물었습니다. 직원은 가격표를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그렇게 비싼 옷을 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직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가격표를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잠시 당황했고, 옷의 가격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옷을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직원은 친절하게 이 옷은 한정판이라서 구매하면 환불이나 반품이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직원의 말은 들은 여인은 처음에는 마음에 들었는데 막상 입어보니 마음에 안 드네요.’라고 말하며 옷을 사지 않았습니다. 직원이 여인의 외모를 보지 않았다면 비싼 옷을 구입하는 고객을 만났을 겁니다.

 

초대교회에는 이방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별과 차별은 공동체와 국가를 형성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여성과 남성, 귀족과 천민을 구분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류가 발전시킨 사회체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코로나19는 국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종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지역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가 국가, 종교, 지역으로 구별되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몸에 함께 살아야 하는 지체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다름은 인정하지만, 함께 연대하고,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전쟁과 폭력, 갈등과 분열은 차별과 구별이 극단화될 때 생겨납니다. 평화와 자유, 사랑과 행복은 포용과 연대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선포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목자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유배를 겪으면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모아들일 미래의 착한 목자로 소개하면서(에제 34,11-16;스바 3,19;미카 2,12 ), 미래에 나타나 백성의 목자가 될 다윗 가문의 한 인물로 언급합니다(예레 3,15;23,4-6;에제 34,23-24;37,24;미카 5,1-4).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하느님과 하나 됨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곧 그는 하느님이 보낸 목자인 동시에, 보낸 분의 마음에 드는 목자입니다. 그것은 삯꾼과는 달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로 드러납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4-16)


여기에는 착한 목자의 특성이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첫째> 특성은 양들과 서로 압니다. 목자는 항상 양들과 관계하여 있고, 양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곧 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목자 입니다. 그렇게 함께 있기에 서로 압니다. 이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알 듯, 밤낮 같이 지내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곧 양들을 안다(γινωσκω)는 것은 사랑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둘째> 특성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 곧 목자가 양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양이 목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 이것이 바로 목자의 존재 근거요 신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자는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착한 목자<셋째> 특성은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이 목숨을 내놓으심으로 목숨을 다시 얻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바로 이 사랑의 죽음과 부활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요한 10,17)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서 받은 명령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주님!

당신의 눈은 항상 저를 향하고 계십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놓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십니다.

주인이면서도 군림하지 않으시고 시중들기 위하심입니다.

이 지고한 당신의 사랑 앞에, 황송함으로 무릎 꿇어 경배합니다.

오늘 제 마음이 형제를 향하여 있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경청하고 식별한 다음 행동하라

-반영억신부-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달아 들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 곧 미사 안에서 성체를 자주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으로 가서 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목소리를 알아듣고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함께한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행동은 경청과 식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식별을 거치면 근심, 걱정, 슬픔과 좌절, 실망, 불안을 조장하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세상 속의 헛된 목소리를 경계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구원의 길로 가는 이정표이며 등대입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 밥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송영진신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이 말씀에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는가?
‘누가’ 예수님의 목숨을 가져갔는가?”
예수님을 죽인 박해자들인가?
박해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긴 했지만,
그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목숨을 가져가거나 취할 수 있는 능력도 권한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탄인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예수님의 목숨에 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거나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인가?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에(요한 10,30) 하느님도 아닙니다.
따라서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라는 말씀은, 15장에 있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당신의 ‘양들에 대한 큰 사랑’을 나타내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서’, ‘양들에게’ 당신의 목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일”로 설명합니다.
그 제물은 하느님께 바친 제물입니다.
그런데 그 제물을 받으신 하느님께서는 그 제물로 무엇을 하셨을까?
인류 구원을 위한 씨로 삼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치셨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은 양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 겉으로 보기에는 박해자들이(또는 악의 세력이)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양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의 양들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일입니다.
양들의 영혼이라는 밭에
당신의 목숨이라는 씨를 뿌리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씨를 받아서 잘 키워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은
양들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완전한 일치’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양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셨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라는 말씀은, “내 양이 되려면 나를 알아야 한다.”,
즉 예수님의 양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이 말씀은 표현된 그대로 해석하면 잘못된 해석이 되기 쉽기 때문에,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교리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사랑으로 일치되어 계셨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도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로 생각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두 분은 원래 사랑하셨고,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그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고, 그 사랑이 드러난 일입니다.
양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그 뜻에 순종하셨고,
그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 일을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양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또 양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하여’ 라는 표현 때문에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부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신 일이 아니라, 부활의 한 과정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여’는 단순하게 ‘그리고’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일’을, 양들의 영혼이라는 밭에
당신의 목숨이라는 씨를 뿌리신 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씨는 죽으면 끝나버리는 씨가 아니라 죽어도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씨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양들에게 부활의 씨를 심은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일의 결과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4-6).”
이 말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 말이라서 과거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서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기를 바라면” 믿고 회개하라고 권고하는 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 라는 말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멸망을 당한다.)”고 경고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양들 쪽에서도 ‘착한 양’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착한 양’은, 착한 목자만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양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도둑들과는 반대이시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성사로 변화시키고 당신께서 구원하신 양들에게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배부르게 하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자유의지로 자기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 놓으셨다. 그분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마르 10,45 참조)고 하신 분이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착한 목자는 어떤 사람이냐? 그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심이 없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여기에 삯꾼이 나온다. 삯꾼은 세상 재물을 더 사랑하는 자들로 목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현세의 보상을 위해 그들에게 풀을 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목자의 자리를 차지하곤 있으나 양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려는 마음이 없는 삯꾼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다.”(필리 2,21)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든지 삯꾼이다. 이들은 자기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고 느끼면 도망을 가고 만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2) 그 이리는 악령이다. 그 악령은 사람의 마음을 유혹으로 찢어 놓고, 목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이리는 어떤 사람은 만취하도록 유혹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의 불을 붙이고, 어떤 이는 교만으로 치켜세우고, 어떤 이는 분노로 파멸시킴으로써 양들을 물어 가고 흩어 버린다. 삯꾼에게는 이런 이리에게 저항하고자 하는 어떤 열의도 양들에 대한 사랑도 없다. 그는 오직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추구한다. 양떼가 아무리 크게 다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고 계신 친밀한 관계와 같은 가까운 관계에 있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고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두고 달아나지 않는다.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셨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 양들을 지키셨다. 그분은 양들을 이끌고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16) 이것은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양 우리 바깥에 있지 않고 한 양 우리에서 한 목자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착한 목자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목자안에 있으면서 한 목자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한 목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7) 아드님은 이미 하느님으로서 언제나 아버지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시지만, 그분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요한 3,16)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이시므로 그 뜻을 이루신 주님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18)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이 자발적인 것이고, 그분은 당신이 내 놓으시고 다시 되찾을 수 있는 분이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당신의 죄의 결과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임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또한 그분이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 이 명령은 바로 세상을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 뜻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7)는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 주셨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 11)

-한상우신부-

착한 목자를
기억하는
날 되십시오.

사랑이
머무는 곳에
착한 목자가
있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놓는 거룩한
희생입니다.

양(羊) 옆에는
언제나 착한
목자가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할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날마다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진실로 양들을
사랑합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길을
만듭니다.

목숨을 내놓기에
주님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살립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과
착한 목자는
하나입니다.

사랑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그 사랑으로 완성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착한 목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이라 부르시는 이들의 범위가 드러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십니다. 양들을 목숨과 바꿀 만큼 사랑하시기에 그렇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랑으로 움직이는 착한 목자와 직업적 삯꾼이 구별이 됩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

예수님의 양 우리는 아직 닫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이라 품으시는 범위는 무한합니다. 인종이나 국가, 민족, 성별, 직업, 나이, 능력 그 어느 것도 제한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선민사상으로 우쭐해있는 유다인들에게는 불편하고 못마땅한 진실이 될 겁니다.

제1독서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푼 것에 대해 따지는 유다교 출신 신자들에게 베드로가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사도 11,10)

베드로 역시 다른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처럼 율법을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 큰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환시 안에서 "잡아먹어라"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에 "절대 안 됩니다"를 세 번씩이나 반복한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율법에 대한 베드로의 고집과 하느님의 인내가 팽팽히 맞서는 대목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사도 11,17)

이방인들에게 성령께서 내리시자 베드로는 남은 한 점의 미혹마저 싹 털어내고 완전히 돌아섭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도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 즉 할례받은 신자들과 "똑같은 선물"을 주시니 그가 감히 왈가불가 할 수 없지요. 성령은 그들도 하느님 백성이라는 하느님 뜻의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니까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어느 한 지역, 어느 민족에게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하신 양들 안에는 단지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만 포함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이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온 인류, 모든 피조물이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착한 목자의 양들입니다. 이 모두를 위해 예수님께서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아시고 나도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과 나의 상호적 앎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앎과 같다고(요한14-15 참조) 하시니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과연 그 앎과 사랑은 어마어마한 신비의 영역일 겁니다.

그렇게 우리를 뼛속까지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뿐입니까?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지요. 우리가 스스로 잘 안다고 여겨,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결격이라 치부해 버린다면, 율법을 고수하느라 하느님 명령을 세 번씩이나 밀어낸 베드로의 고집과 다를 바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양 우리 문을 닫아버리지 않으십니다. 양 우리의 내부는 무한히 넓고 그 안의 양들도 엄청나게 다양하지요. 그 안에 받아들여지는 건 오로지 하느님 선택이니 우리 중 누구도 설익은 율법주의로 막아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덕에 우리도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은 열려있습니까? 닫혀 있습니까? 이방인이라 안 되고 죄인이라 안 되고 냉담자라 안 됩니까? 베드로와 초대교회 공동체가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듯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아직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 주시니, 우리 교회의 문도, 우리 마음의 문도 열어놓고 기다립시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양들의 문 안에 들어와 있겠지요? 아니라구요. 괜찮습니다. 아직 열려 있어요. 그분이 문 앞에서 벗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서 달려 들어가세요. 벗님이 안전하게 들어오는 것을 보셔야 그분도 문을 닫고 축제를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우리 안에서 착한 목자와 함께 한 자리를 차지한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의 사랑없는 인간의 예의는 폐기해도  
-김찬선신부-


사도들과 유다 지방의 신자들이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듣고 보이는 반응이 제게는 의외입니다.
다른 민족이 하느님을 믿기 시작하였다면 기뻐해야 마땅한데,
그들과 식사한 것 때문에 베드로에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아 하느님 백성이 되어도 할례받지 않으면
한 민족이 아니니 한 형제가 아니라는 말이고,
하느님 백성이 되는 것보다 한 족속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들의 행위가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을 자기 민족이 독점하고 자기 민족 안에 가두려고 한 점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이 더 많은 민족에게 알려지고
사랑받게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실은 질문이 아니고 사도들과 유다의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막으려 한 것이라고 베드로가 나무라는 것인데
제 생각에 사도들과 유다 신자들은 두 가지로 잘못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막은 것 그래서 차별과 분열이 생긴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중시하고 중요한 것을 멸시한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이스라엘에 주셨던 선물을
이민족에게도 같이 주셨음을 얘기하며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을
어떻게 막겠냐며 사도들과 유다 신자들을 설득합니다.

근자에 와서 우리는 Unity in Diversity, 곧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수없이 얘기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일치는 지니자는 것입니다.

다양성多樣性과 일치성一致性, 이 두 가지는
공동체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양성과 개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일치성만 고집한다면
그 일치는 진정한 일치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획일일 뿐이고,
일치는 생각지 않고 개성이나 개인의 자유만 고집하면
콩가루 집안이 되어 그 공동체는 공동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사실 다름이 없으면 일치도 없는 것입니다.
일치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하는 것이니
완전히 똑같은 것은 일치가 아니라 획일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공동체는
개인과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개인에게는 일치의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일치의 정신을 갖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기에
공동체가 성령을 모실 때 일치의 정신도 갖게 되고 일치도 이룰 수 있지요.

다음으로 사도들과 유다 신자들이 두 번째로 잘못한 것은
가치의 전도, 곧 덜 중요한 것을 중시하고 중요한 것을 멸시한 것입니다.

사실 할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 민족에게는 할례가 민족성을 가늠하는 것이기에 중요할지 모르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러기에 이렇게 일부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민족에게 중요한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왼손잡이는 재주가 많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슬픈 뜻을 담고 있지요.
옛날에 왼손잡이는 오른손을 쓰도록 강요받아 오른손 왼손을 다 쓰다 보니 
재주가 많게 된 것인데 오른손잡이가 기준이 되고 중심이 되던 옛날에 
모두 오른손을 쓰는 것이 예의라고 하며 왼손을 
쓰는 사람은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이런 예의는 쓸데없는 예의입니다. 
사랑이 아니고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이것과 비교하여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치 않으니
쓸데없이 사랑 이외의 것을 예의로 포장하고 중시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사랑 없는 것이 제일 예의 없는 것이니 사랑 없는 예의는 폐기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4월 23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문이다.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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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물이자 생명의 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생명을 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흘려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시 생명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에의 참여의 기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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