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7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요한 13,16-20)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receives the one I send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예수님을 주인은커녕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메시아를 믿지 않은 것도 아니고, 메시아에 대하여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자렛 촌놈 예수는 아니다.’라는 완고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당신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그 운명이라는 것이 어이없게도 제자의 배신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자 길을 나선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대개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관에 익숙합니다. 선한 것은 악한 것과 결코 섞일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제 눈에 싫은 것을 악하다며 어깃장을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 악하고 더럽고 모자란 것을 통하여 오늘도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어설픈 정의감과 설익은 지식으로, 약하고 부족하며 때로는 죄스럽고 비참한 사람들의 주님을, 그리고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단죄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 단죄가 오늘 또다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바로 그 제자의 민낯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제때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입니다. 배우고 익힘으로써 변화하고 성숙해지는 자신을 보는 일보다 기쁜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에 과연 그런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겠냐는 의문이 듭니다.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특히 자기 생각과 다르면 그 안에서 배우려는 생각보다는 무조건 반대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런 마음에서 과연 기쁠 수가 있을까요? 얼굴 붉히면서 싸우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보통 거의 하루에 한 권꼴로 책을 읽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기쁨을 얻습니다. 사람들과 만남에서도 배우고 익히려고 노력합니다. 내 생각과 전혀 다르다 해도 찾으려 노력하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자리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틀렸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하기가 힘듭니다. 그 근거를 물으면 인터넷에 다 나와 있는데 그것도 몰랐냐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평생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인터넷의 자극적인 가짜 뉴스만 보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양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종들이 주인과 똑같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 종들이 한없이 겸손해져서 당신과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사랑 많은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 겸손을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겸손을 스스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 겸손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맞아들이는 것에서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더욱더 확대되어서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내 생각과 다르다고 반대하고,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반대하고, 내 편이 안 되었다고 반대하고, 나보다 가진 것이 많다고 반대하고, 나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다고 반대하고, 나보다 행복해 보인다고 반대하고…….
예수님을 너무나도 많이 반대했던 우리였습니다. 반대했던 사람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이유는 그들 안에도 예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리고 사람들이 날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상담 오신 분에게 “무엇을 원하세요?”라고 묻자 곧바로 하신 대답이었습니다. 이분은 이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친구도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고, 가족도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관계라면 당연히 이해해줘야 하지 않나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이분은 자기가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한 불평과 불만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먼저 이해하고 지지해야, 나에 대한 이해와 지지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만을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해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랑의 관계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내가 아니기에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내가 나를 이해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함께 하는 관계의 여지가 생겨납니다.

맞아들임은 들어높임이다.
-전삼용신부-
한때 성공회의 주교가 되기를 꿈꾸었던 사무엘 브랭글이라는 청년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부스 장군은 그의 지원을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그에게 다른 훈련생들의 군화를 닦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낙심한 브랭글은 속으로 ‘내가 군화나 닦으려고 내 꿈을 좇아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어부들의 발 위로 허리를 굽히시는 모습을 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 주고 있을 때, 인근에 살던 이웃 주민이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데레사 수녀는 대답했습니다.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콜롬비아 신학교 스티븐 올포드 박사에게 학생들이 물었습니다.
“저희들에게 크리스천 리더십의 비결이 무엇인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올포드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결이요? 무릎을 꿇으십시오.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십시오. 그리고 심장이 깨어져도 참으십시오!”
가장 단순한 진리지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가 있습니다. 받아들임은 낮아짐이란 것입니다. 자신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내가 주님보다 높아져있기 때문입니다.
손님을 맞이할 때 우리는 손님에게 일을 시킬까요, 아니면 우리가 할까요? 모든 맞아들임은 내가 종이 되는 일입니다. 아기를 맞아들인 엄마는 어떨까요? 태중의 아기를 위해 봉사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제자들을 당신 품으로 맞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예수님을 맞아들이려면 또한 예수님을 높이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산은 물을 담아놓을 수 없습니다.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곡은 산보다 낮으므로 물을 맞아들이고 강은 더하고 바다는 더합니다. 성모님께서 바다와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은총 자체를 맞아들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때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주님의 뜻대로 이웃을 맞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을 맞아들이지 않으면 주님도 맞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웃들에게 겸손하고 이웃을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섬길 줄 모르면 예수님도 섬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에 발꿈치를 들면 예수님께 발꿈치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은 바로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시작됩니다. 이웃을 섬길 줄 모르면 교회도, 그리스도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16세기 ‘로마의 사도’라 불리는 재속 사제로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한 필립보 네리의 일화입니다.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거룩한 영성으로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녀를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녀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수련 수녀를 오도록 했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 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한 재속 사제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을 벗기라고 하니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시키는 사제를 판단하고는 자신은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수녀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와서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궁금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엔 성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안에 맞아들인 주님이 나를 성전으로 만듭니다. 내가 맞아들인 사람들이 나의 열매들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려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내 발밑에는 오로지 나 자신만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쓸 때는 이런 양식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도 이런 양식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글을 읽는 사람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런 양식을 따라가면서 긴장과 몰입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극적인 반전이나, 예상 밖의 결론이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뻔한 결말과 지나치게 행복한 결론 보다는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감정이 정화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모두 행복한 결말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는 기승전결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지구라는 열차를 멈춰 세웠습니다. 미사는 중지 되었고, 자유로운 여행은 사회적인 거리두기로 멈추었습니다. 선진국이라는 유럽과 세계 최고의 국가인 미국은 코로나19 앞에 당황하였고, 유연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은 코로나19를 유연하게 막아냈고, 감염병을 막아내는 모범국가가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진단하고 있습니다. 크루즈 여행은 당분간 주춤할 거라고 합니다. 장시간 좁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확진자가 발생한 크루즈 선박이 입항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장거리 항공 여행도 주춤할 거라고 합니다. 좁은 공간에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거리 항공 여행이나, 국내 여행이 많아질 거라고 합니다.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보다는 온라인 쇼핑이 많아질 거라고 합니다. 외식보다는 가정에서의 식사가 많아질 거라고 합니다. 물건의 구입도 가격과 성능도 보지만 안전과 성능을 보게 될 거라고 합니다. 한국의 진단키트는 안전성과 정확성이 높았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대응은 투명했고, 공개적이었고, 민주적이었습니다. 한국의 국가적인 위상은 더 높아질 거라고 합니다. 이는 무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역사를 ‘기승전결’의 과정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모세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낡은 관습과 관행을 정화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왕에게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 중에 이스라엘을 이끌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분은 예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바로로 사도의 이야기를 읽으면 구원의 역사가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르침과 표징과 말씀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곧 새로운 나라, 하느님의 나라가 세월질 것 같았습니다. 로마의 군사력도 물리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두려워 숨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모욕과 조롱이 있었습니다.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규와 함께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극적인 반전이 있었습니다.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산다면 비록 기승전결의 행복한 결말은 아닐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모든 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를 알고 실천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섬김의 도는 실행함에 있습니다. 실행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는 도입니다. 그러니 실행하는 자가 복됩니다. 곧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김을 실행하는 것이 복 있으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실, 섬김은 실행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그래서 당신은 공관복음에서 말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이토록,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섬기심을 실행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섬김과 존경을 받고 싶고, 크고 높은 자 되고 싶어 합니다.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먼저 섬기는 이가 섬김을 받고, 먼저 존경하는 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낮출수록 사실은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을 섬기면서 주인을 섬기게 되고, 파견 받은 이를 섬기면서 파견하신 분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
-반영억신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든 일을 감당할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인정한다면 세상이 여유로울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데 있어서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숨, 곧 영을 받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그 자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분과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몫이 있는데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식으로서의 몫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위치도 다릅니다. 기관의 장이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위치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작품으로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을 빌미 삼아 나를 내세우지 말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도구로써 만족하라.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믿음을 표현하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자기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실천하되 “그대로”, “온전히”! 다시 말하면 겉모양으로 만이 아니라 속마음까지 진실하게 행하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3,1)하신 예수님의 마음까지 닮으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중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내가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고 하셨습니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걸립니다. 지금 열심히 사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맙니다. 이정도면 됐지 뭐 얼마나 더 어떻게 하란 말이야! 라는 속마음을 들켜서 부끄럽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뽑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느님 앞에 나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 예기치 않은 일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은총의 기회로 삼고 하느님 앞에 당당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더욱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헤아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알면 안 만큼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하면 행복합니다.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롭고 기쁨도 충만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라는 말씀의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서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신앙인들이 ‘서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일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입니다.
(‘섬기는 사랑’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제자들(신앙인들)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 아니고,
또 제자들(신앙인들)이 당신보다 더 낮은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도 아니고,
“신앙생활은 주님이신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종이 주인의 뜻에 순종하듯이, 또 파견된 이가 파견한 이의 뜻에 순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예수님만이 ‘구원’을 받기 위한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보다 더 높은 분이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보다 더 높은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보다 더 낮은 위치로 낮추셔서
우리를 섬기신 분입니다(루카 22,27).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람들을 섬기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섬기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이라는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서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이고,
넓은 뜻으로는 당신이 앞장서 가시는 길을 그대로 따라서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섬기는 사랑의 실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마태 16,24).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또 남을 섬기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힘들 때가 많지만, 십자가의 길
끝에는 십자가보다 훨씬 더 큰 영광과 영예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행복하다.’ 라는 말은, 여기서는 ‘복되다.’, 즉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뒤를(당신의 뒤만) 따르라고 강조하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요한 13,18).”
이 말씀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앞에서 말씀하신 ‘행복(복, 구원)’에 해당되지 않는 제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행복(복,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실천’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유다는 ‘섬기는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 뒤를 따르지 않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 ‘권력욕’도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감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가? 라는 문제로 다투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권력욕을
버리려고 노력했는데, 유다만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을 원해서,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닐까, 라고 짐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시편 41,10).” 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유다의 배반은
‘식사공동체’(가족공동체)에 대한 배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그의 배반은 ‘큰 죄’ 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유다의 배반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다의 배반이라는 큰 걸림돌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제자의 배반 등을 미리 예고하신 것은,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 13,19).
그리고 사도단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어도, 메시아 예수님께서 뽑으시고 파견하신
사람들이라는 사도들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요한 13,20).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3,16-20: 나와 함께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16절)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은 겸손하게, 온건하게, 조용히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는 주님의 말씀대로 더 낮은 사람일수록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로 주님과 같이 될 수 있다. 주님은 아버지의 선과 사랑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분은 주님이시면서도 우리 모든 죄인들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부를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주시어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우리는 ‘아들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7절) 이것은 우리가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사랑과 열정에 어울리는 것은 덕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의 지식이 실천으로 드러나게 될 때, 항상 생각지 못한 큰 결과를 얻게 된다. 실천이 없으면 지식도 심각한 불구가 된다.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라고 쓰여 있다. 믿음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고백을 모두 포함하지만, 실천으로 나오는 빛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뽑은 이들을 아시고 발꿈치를 치켜든 자들을 아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다 아시면서 유다는 왜 뽑으셨을까?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창조하셨고, 사울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 유다를 뽑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분명히 제자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는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아담도 하와도 사울도 유다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택한 결과이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19절)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신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생각을 몰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따라온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주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2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이는 바로 파견된 자 ‘사도’들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맞아들이는 이는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맞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파견된 이에게는 보내신 분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파견된 그리스도를 맞아들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그분을 보내신 분 아버지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사도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사도들을 가르치신 분을 발견할 것이며, 우리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찾는다면, 아들 안에서 그분을 낳으신 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 20)
-한상우신부-
예수님과의
교감이 생명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스스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기쁨입니다.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
맞아들임의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길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길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우리의 마음에
맞아들여야 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과 세상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맞아들이는
성모성월의
믿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부터 3주간에 걸쳐 우리는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중에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요한 13 -17장)를 묵상합니다. 오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들려 주시는 말씀으로 제자들이 겸손한 봉사의 삶을 살아라고 당부하시며, 당신이 '섬기러 오신 메시아'이심을 다시한번 보여주십니다. 이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시작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관계의 끈을 관상합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예수님께서 행복의 비결을 일러 주십니다. 곧 자기 분수를 알면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한 자각,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힘으로 살아가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을 삶으로 표현합니다. 진실한 자기 인식은 겸손의 첫걸음이지요.
제1독서에서 언급된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그분께서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 13,25).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그분보다 앞서 파견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라고 착각하거나 기대하며 추앙해도 그는 자기 본분을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어 자기에게까지 이어진 관계의 질서를 겸허히 존중합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우리는 이 세상에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 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겸손하고 진실한 자기 인식은 자신의 근원을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기까지 나를 성장시키고 파견한 무수한 인연과 손길들을 잊지 않습니다. 그 손길들을 거슬러 올라가, 그 끝에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계심을 감지합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설교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준비시킨 존재답게 이스라엘의 구세사를 간명하고 명료하게 정리하여 선포합니다.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사도 13,23).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이끌어 오신 하느님께서 때가 차자 당신 아드님을 다윗 가문에서 구원자로 보내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을 파견하신 하느님을 뵈어야 했지요. 예수님을 맞아들임으로써 자기들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사도들과 신자들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한때 무지와 고집으로 구원자를 배척해 죽였지만, 그 모든 걸 용서하시고 사도들을 통해 내미시는 새 기회의 손길에서 그분 얼굴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벗님 곁에 누가 있습니까? 그에게서 그를 파견하신 예수님을, 예수님에게서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의 얼굴이 보입니까? 우리가 맞아들이는 가난하고 작고 보잘것없고 때로는 성가시고 귀찮고 부담스러운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지요!
병들어 신음하는 생태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혐오와 차별, 자기 안위를 위해 조장하는 분열과 대립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고요하고 묵묵히 선을 추구하며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파견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과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내가 맞아들이는 이들 안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아멘.

맞아들임에 대하여
-김찬선신부-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맞아들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코로나 전염병의 홍역을 치룬 뒤여서인지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어제는 수녀원 미사 후 아침을 먹으면서 본당사목을 하는 수녀님께
요즘 미사에 오시는 분들이 코로나 사태 전과 같은지, 아니면 줄었는지
물었더니 아직은 전보다 많이 나오시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아무튼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도 하고 반성도 하게 되는데
저는 길을 가면서 만나는 사람이 잠재적인 전파자로 여겨지면서
가능한 한 마주치는 것을 피하게 되었는데
이런 저 자신을 보는 것이 한편 부끄러우면서 다른 한편 슬펐습니다.
사람을 기꺼이 맞아들이지 않고 꺼려하다니 말입니다.
물론 제가 꺼려한 이유가 제가 병을 옮을까 봐 그런 것보다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니 슈퍼 전파자가 될까 봐, 특히
봉쇄 수녀원도 방문해야 하니 그분들께 전파할까 봐 그런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사람이 사람을 꺼려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랑입니다.
더욱이 전염병 시기에 온전히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람을 받아들일 때 그저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돈많은 사람이면 받아들이고 돈없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 때 우리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돈 있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인간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한 인간 존중이고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주님께서는 더 높은 차원에서 맞아들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보낸 사람을 맞아들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보낸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어찌 보면 하나 마나 한 말씀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면 당신이 보내셨다는 것을 몰랐음에도
당신이 보낸 사람을 맞아들이면 주님을 맞아들인 거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수도회들 전통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주님 모시듯이 하라고 하는데
하느님인 줄 모르고 아브라함이 손님을 극진히 맞이한 것이
하느님을 모신 것이 되고 그래서 복을 받게 된 일에서 비롯된 가르침이지요.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그가 비록 강도일지라도 주님으로 맞아들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일 뿐 아니라 당신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을
따듯하게 맞아들일 때 당신을 따뜻하게 맞아들인 것이라고 하셨던 거지요.
< 성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에 보면 강도 셋이 수도원에 애긍을 청하러
왔는데 수도원장이 냉정하게 내쫓은 것을 프란치스코가 알고 쫓아가
오히려 용서 청하고 자신이 애긍해온 것을 갖다 주라고 하였더니
그 강도들이 회개하고 작은 형제들이 된 얘기가 있지요.
제가 수련장으로 있을 때 저희 수도원에 도둑이 들어왔고 형제들에게 잡힌
적이 있는데 고향에 갈 차비가 없어서 훔친 거라고 하는 말을 듣고
형제들은 경찰에 넘겨야 한다고 하였지만 저는 그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훔쳐갈 것이 있는 저희 수도원의 부요함을 부끄러워하며 그리고
<잔 꽃송이>의 이 얘기를 생각하며 오히려 차비를 줘서 보냈습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오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가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신앙인의 눈과 영성의 눈이 아니면 이것은 바보 같은 짓일 뿐이지만
저는 성인의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것이고
오늘 주님 말씀을 이렇게라도 실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하고 같이 사는 짝꿍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 만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내게 보낸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맞아들이는 하루가 되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요한 13,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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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에 맞아들인 주님이 나를 성전으로 만듭니다. 내가 맞아들인 사람들이 나의 열매들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려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내 발밑에는 오로지 나 자신만 있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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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섬김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실, 섬김은 실행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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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뽑은 이들을 아시고 발꿈치를 치켜든 자들을 아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다 아시면서 유다는 왜 뽑으셨을까?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창조하셨고, 사울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 유다를 뽑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분명히 제자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는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아담도 하와도 사울도 유다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택한 결과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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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3주간에 걸쳐 우리는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중에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요한 13 -17장)를 묵상합니다. 오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들려 주시는 말씀으로 제자들이 겸손한 봉사의 삶을 살아라고 당부하시며, 당신이 '섬기러 오신 메시아'이심을 다시한번 보여주십니다. 이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시작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관계의 끈을 관상합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예수님께서 행복의 비결을 일러 주십니다. 곧 자기 분수를 알면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한 자각,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힘으로 살아가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을 삶으로 표현합니다. 진실한 자기 인식은 겸손의 첫걸음이지요.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우리는 이 세상에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 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겸손하고 진실한 자기 인식은 자신의 근원을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기까지 나를 성장시키고 파견한 무수한 인연과 손길들을 잊지 않습니다. 그 손길들을 거슬러 올라가, 그 끝에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계심을 감지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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