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4월 2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4. 1. 19:08

2020년 4월 2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
요한 8,51-59)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keeps my word 
will never see dea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의 명령은 단순히 유목민의 자리 이동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삶의 근거를 끊어 버려야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실행에 옮겼으며, 이는 그대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생활 장소의 변화에 따른 삶의 태도만 바뀐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실존 방식이 변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보면 이를 충실하게 수행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자손의 번성과 함께 이 약속이 대대로 이어지는 당신과의 영원한 계약을 맺으십니다. 이 계약의 본질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안에서 그리고 그분께서 세우신 계약을 통해서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계약의 새로운 면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쉽게 저버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로서 사랑의 관계를 다시 맺으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느님의 계약을 완성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강조하십니다. 이 새 계약의 완성은 우리를 죄로 말미암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며, 당신 말씀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지켜 나가는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아브라함을 두고 그분과 논쟁을 펼친 유다인들처럼 관습적 사고에 얽매이기보다는 아브라함이 보였던 믿음에 따른 실존 방식의 변화를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사순 시기는 바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약속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완성하신 계약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때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거룩히 봉헌해야 할 미사 시간에 웃음을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정성을 들이는 성찬례 순간 때 말이지요. 성체 거양을 하는 순간, 한 꼬마 아이가 자신의 엄마에게 큰 소리로 묻습니다.

“저 아저씨가 뭐 하는 거야? 소꿉장난하는 거야?”

아이의 눈에 저는 아저씨로 보일 뿐이었고, 제가 하는 행동이 소꿉장난으로 비쳤나 봅니다. 모두가 조용한 상태에서 들린 이 목소리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웃었고, 저 역시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는 재미있는 상황이지만, 종종 미사 중에 짜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미사 중에 그 자리에 편안히 앉아 전화 통화를 하시는 분, 성가를 이상하게 불러 성가 같지 않게 만드시는 분, 맨 앞에 앉아서 가만히 있지 않고 부스럭거리는 분, 미사 중에 자주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시는 분 등등…….

그러나 짜증 자체에 머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내가 미사에 집중하지 못해서 신경 쓰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짜증의 틀에서 어렵지 않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하고 받아주지 못하면 결국 자기 자신만 손해입니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 내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짜증 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유다인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었겠지요. 세상에 그 누구도 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숨이 멈추는 죽음을 진짜 죽음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의 단순한 통과 과정으로만 보십니다. 진짜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파멸되어 구원받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마귀 들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혈통 타령을 하면서,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생각과 다름을 ‘틀렸다’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짜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주님의 반대편에 설 뿐입니다. 이러한 불신의 마음과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닫힌 마음이 스스로를 증언하시면서 우리 구원의 열쇠를 지니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의 모든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바라보십시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비울수록 더 많이 채울 수 있습니다.
삶은 손을 펼치고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손을 마주 잡기 위해(엘리 위젤).



성찬례

성찬례라는 말은 원래 ‘감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찬례를 라틴어로 ‘Eucharistia’라고 적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선물이 되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면서 그분과 하나를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연로하신 자매님께서 제 손을 잡고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사연을 물으니, 자신의 딸이 큰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착한 딸이라면서….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며 자신을 대신 데려가고 딸을 살려달라고 제게 매달리십니다. 딸 대신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 자매님의 딸에 대한 사랑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 큽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당신 모두를 내어놓으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지요. 그래서 감사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이에게 그 사랑을 전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사랑을 주신 분이 원하는 것이라면 감사한 마음에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체를 모신 사람은 성당 밖에서도 그렇게 살게 됩니다. 즉, 이웃에게 사랑을 먹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분은 불가능한 것을 주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

-전삼용신부-


어제 6세 여자아이가 “신부님, 하느님은 어떻게 만날 수 있어요?” 하는 부담스러운 질문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갑자기 말문이 막힌 저는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얼버무렸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유튜브에 올라있는, Brad TV 동영상 중에 아랍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한 기독교 여성이 테러 공격을 당한 이후의 놀라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리크 벨트만은 40년 전 네덜란드를 떠나 예루살렘에 올 때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랍 아이들을 키우는 수양 엄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32년 동안 그는 수양 엄마가 됐고 그동안 20명가량의 아이가 길거나 짧게 머물다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타고 있던 버스에 두 명의 남자가 타면서 그녀의 삶은 갑자기 큰 변화를 맞았습니다. 예루살렘 근처 동네에서 온 두 명의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버스에 올라타서는 승객들을 칼로 찌르고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이스라엘인 3명이 사망했습니다. 칼을 가지고 있던 남자는 벨트만에게 달려가 어깨, 가슴, 손을 마구 찔렀습니다. 그녀는 여섯 군데나 칼에 찔렸고 폐도 망가졌습니다. 다행히 생명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벨트만에게 제일 먼저 “엄마, 우리를 미워하고 아랍 사람들을 미워할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아랍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벨트만은 한번도 아랍 사람을 미워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고 엄마를 찌른 사람도 용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엄마, 그건 말도 안 돼요. 엄마를 죽이려고 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되물었습니다. 벨트만도 마음속으로는 ‘그래. 그런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아이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용서하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단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그 능력을 주시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이태리에서 많은 이들이 바이러스로 죽어갈 때 어떤 노 신부님은 자신의 산소마스크를 젊은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죽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실 때 분명 자신도 놀랄 그 힘을 주시는 분을 만나고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으려고 한다면 이미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많은 능력이 있는 줄 알지만, 지금처럼 살 수 있는 것은 다 누군가로부터 그런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면 그 능력도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고,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늑대에게 자랐다면 절대 두 발로 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발로 걷는 능력도 받는 것이라면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능력도 당연히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분은 다른 것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다시 살게 하실 수 있는 능력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부모의 말을 잘 따라주는 아이들은 또한 부모가 지은 집에서 살고 부모가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아이들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불가능한 보상을 주기도 합니다. 내가 두 발로 걷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요구한 분이 계시고 그분은 또 다른 불가능한 것도 주실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불가능한 보상도 줄 수 있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요구하는 예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시는 ‘말씀’은 분명 인간이 지키기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랑을 우리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형을 만나기 전에 밤새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형의 얼굴이 하느님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저도 저를 모함하고 악의적으로 손해를 보이려 한 사람을 만나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면 신기하게 그 사람 얼굴이 가족처럼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 사람도 바뀌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신비한 체험에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당신 말을 따랐기에 영원한 생명의 영광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게 됩니다. 일단 주님의 말씀을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죽음을 보지 않을 것도 믿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조재형신부-


만트라(mantra)'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보호한다.’라는 뜻입니다. 좋은 말과, 좋은 소리는 마음을 보호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위로를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말과 소리도 있습니다. 한 모임에서 늙어 보이네요. 나이가 많아 보이네요. 작년보다 늙었네요.’라는 말을 3번이나 들었습니다. 저는 기억도 나지 않는 분이 그런 말을 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말이 마음에 남아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생각하니 저도 무심코 한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기억력이 좋네요. 어쩌면 그렇게 이름을 잘 외우세요. 대단하세요.’ 이런 말을 3번이나 들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레지나, 데레사, 멜키세댁, 캐롤, 크리스티나, 미카엘라, 아우그스티나, 로사, 요한, 바오로, 요안나, 그라치아라는 그날 모임의 세례명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아마도 제게 좋은 말을 해 주신 분들의 힘인 것 같습니다.

 

오랜 동안 누워있는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러 간 사제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신부님이 기도한다고 해서 아이가 좋아지겠습니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사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돼지같이 생겼네요.’ 그러자 아이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돼지라니요. 그게 할 말입니까?’라며 화를 냈습니다. 사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니, 그렇게 화를 냈지 않습니까? 나의 부정적인 말이 마음에 큰 영향을 준 것을 인정한다면, 내가 좋은 이야기를 하면 그것도 마음에 큰 영향을 주지 않겠습니까?’ 아이 아버지는 사제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겸손하게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말을 했던 고향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간절히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셨고, 걷게 하셨고,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비록 지금은 가진 것도 없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처지였지만 아브라함은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겁니다. 희망이 보였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죽을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제가 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잘했네!’입니다. 이 말은 제게도 용기와 힘을 주곤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도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게 늘 힘이 되어주는 말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만트라는 무엇인가요


하느님의 권위 아래서

-반영억신부-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한 1,14).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하고 편협한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가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억매이지 않으며 죽음마저 극복하는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통교 안에 초대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셨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당신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4,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십니다.’ 곧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바퀴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머리글에 있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요한 1,1-2).” 라는
신앙고백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라는 말씀은, ‘한처음부터’ 라는 뜻입니다.
(‘한처음’이라는 말은, 창조 이전의 시간을 뜻합니다.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한처음’은 시간 이전의 시간이고, 영원 속의 시간입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 예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는 아버지와 구분되는 아드님이시지만,
하느님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시는 분이고(요한 10,30),
그래서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은,
사도들이 체험을 통해서 갖게 된 믿음을 전해 받아서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체험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게 되었고,
이 믿음을 목숨 바쳐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라고 표현하셨을까?
겉으로만 보면, 유대인들이 먼저 아브라함을 언급했기 때문인데(요한 8,52),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한낱 피조물인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 조상이라는 점에서, 또 첫 번째로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아브라함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떠받들었고,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훌륭한)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라고 말씀하시자,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요한 8,53)” 라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예수님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니신 분이라면, 믿을 이유도 없고, 믿으면 안 됩니다.
위대한 성인들과 위인들의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고,
그분들의 삶이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분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면, 과거의 인물일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우리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구원과 생명을 얻고 싶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세상에는 정말 좋은 책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은,
그리고 항상 꾸준히 읽어야 할 책은 ‘성경’입니다.
그 책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8,56).”

이 말씀은 “메시아는 아브라함보다 위대하신 분이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고,
“내가 바로 그 메시아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은 ‘나의 날’이(메시아 시대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즐거워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실제로 메시아 시대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틀림없이 오게 될 메시아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았고,
믿었기 때문에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 시대를 ‘나의 날’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밝히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언급하신 것은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이 메시아 시대를 믿고 기뻐했다는 말은 구약성경에는 없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희망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또 믿음과 희망에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고 증인이 되는 인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1-2).”
(우리는 사순 시기가 지나고 나면 부활절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생 전체를 사순 시기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인생이라는 사순 시기가 지나가면,
예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구원과 행복과 평화가 우리를 맞이한다는 것,
우리는 바로 그것을 믿어야 하고,
믿는다면, 인생이라는 사순 시기를 충실하게 지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 인생살이가 좀 더 힘든 경우도 있지만,
믿음과 희망이 있다면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8,51-59: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51).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이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말씀은 본성상 죽음이 보이지 않도록 막아준다. 이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빛을, 생명을 주시며 그 빛을 꺼뜨리지 않고 생명을 잃지 않는 사람은 결코 어둠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당해야 할 두 번째 죽음, 영원한 죽음, 지옥의 죽음, 저주받은 자들의 죽음,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받을 몫인 그 죽음을 보지 않게 해 주셨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52) 고통을 당하면 더 성숙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호의를 받으면서 더욱 악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께 더욱 적대적이 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말씀을 알아듣지도, 따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죽음에 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보편적인 죽음의 의미로 생각하고 대들고 있다.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하고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53) 그들은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마태 22,32)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예수님의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기에 살아있으며(로마 14,9 참조), 더 이상 죽음을 보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모든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킨 이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당신을 아브라함과 예언자들보다 높다고 하신다고 비난하면서,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53)하고 그들이 대든다. 예수께서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54)라고 대답하시며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신다.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이 바로 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아들을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55)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했지만 잘 알지 못했던 분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그들이 그분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아들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셨다. 우리도 그분을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57)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본 것은 그의 외아들이자 맏이인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아들을 바치려고 했던 때이다. 아브라함은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창세 22,13)를 대신 바쳤다. 그 어린양의 상징으로 민족들의 구원을 보았다. 유대인들은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요?”(57)라고 말하였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58)고 하신다. 여기서 은 지나간 시간을 의미하고 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만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이 바로 있는 나이다. 그러므로 항상 계신 분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가까이 오시고 당신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시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59)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돌을 던지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셔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다. 볼 수 있는 이들은 그분을 보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를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도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고 따르며 그분을 올바로 보고 알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내 아버지시다.(요한 8, 54)

-한상우신부-

봄꽃 지듯
빠르게 지나가는
아쉬운 우리의
봄날입니다.

사라질 재력과
권력이 아닌
사라지지 않을
하느님의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생명에 생명을
더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버지 없이는
아들이 있을 수
없듯, 하느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아버지
하느님께 속한
영광의 삶입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빛나시는
영광이 있기에
십자가의 길도
사랑으로
빛날 수 있습니다.

온 생명을 다해
사랑하시는
그 삶이 영광의
참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럽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립시다.

아버지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영광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아브라함이 반복해 등장합니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 17,5).

구약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단순히 그 사람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운명을 담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이름을 받는 것은 새 존재로 거듭 나는 것이고 이제부터 새 소명을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뜻의 히브리말 "아브 하몬"과 연관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에 길을 나선 아브라함을 당신 백성의 선조로 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7).

아브라함은 주님의 축복으로 많은 짐승과 종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낯선 땅에 몸붙여 사는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아직 직계 자손도 없다 보니 혈족 관계를 탄탄하게 형성하기 전이고, 무엇보다 세상을 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삶의 근간을 붙들어줄 힘과는 이제야 비로소 관계를 맺어가는 중이었지요.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8).

주님께서 이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얼마나 큰 힘과 위안을 주는 말씀인지요. 오래 몸붙여 살아도 여전히 내 것이 아닌 이방 지역 광야에서 든든한 보호자, 벗,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확인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소환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이 말씀이 유다인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유다인들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모세와 같이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느님과 직접 계약을 맺은 위대한 성조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율법이나 어기는 몽상가 젊은이가 감히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다니 몹시 괘씸하고 불쾌한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요한 8,53)

그간 신념과 자부심에 차 머물던 안전지대에 진동과 균열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진리가 다가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용보다는 방어와 의심, 반격을 선택하기 일쑤지요.

"내 아버지시다 ... 너희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요한 8,54).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우리 하느님'이라 부르는 그분이 내 아버지시다..." 라고요.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셔서 계약을 맺은 아브라함이 위대하다면 그 하느님의 아들은 과연 어떠할까요!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

예수님 입에서 가슴 떨리는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아십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서로를 아는 만큼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에 모두 아십니다. 서로 아는 존재들 사이에는 사랑이 흐릅니다. 앎은 사랑에 찬 인식입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요한 8,57)

그런데 유다인들은 핵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 당신이 누구신지를 "너희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말씀하셨음에도 줄곧 아브라함을 물고 늘어집니다. 조상도 좋고 가족도 좋고 동료도 좋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성인데, 유다인들은 직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요한 8,59).

결국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고,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십니다. 자칭 하느님 백성인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돌로 쫓아낸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인들의 계속되는 배척의 사건들과 함께 신앙의 중심이 불가피하게 이동됩니다. 성자 예수님의 오심과 현존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잊지 않으신 하느님 자비의 연속이고 확장이며 완성임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열지도 않고 내버린 선물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인들을 통해 주님을 느끼고 거룩한 자극을 받습니다. 훌륭한 위인들과 이웃을 통해서도 그렇지요.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귀해도 우리의 목적은 아니지요. 그들이 반향하는 하느님 모상을 통해, 하느님을 향해 더욱 오롯이 정진하라고 보내주신 길벗이고 안내판이며 이정표들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당에 가지 못하는 날들이 점점 길어져 속상하시죠? 괜찮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자리가 곧 성전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선물,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말씀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 길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고운 길벗이고 기도의 동반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신의의 하느님과 신뢰의 아브라함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281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22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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