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4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45-56)
“You know nothing,
nor do you consider that it is better for you
that one man should die instead of the people,
so that the whole nation may not peris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성주간을 앞두고 주님 수난에 함께할 준비의 필요성을 오늘 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솔로몬 사후 분열된 왕국의 재통일에 대한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다윗을 유일한 목자와 제후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예언과 함께 이 재통일된 왕국의 평화로움이라는 영원한 계약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과 거처를 그 백성 가운데 두시어 그제야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는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의회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최고 의회는 세속 권력과 많은 재물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과 하나 됨을 거부합니다. 특히 카야파 대사제는 기회주의적 발언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말썽을 일으키는 자를 제거하려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민족에게 이익을 가져온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에제키엘의 예언이 대사제와 최고 의회가 원하지 않는 하나 됨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목자와 제후로서 민족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죽음은 널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하나로 모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주간을 준비하며 다음과 같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카야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가, 아니면 예수님과 하나 됨을 진정으로 바라는가?’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잠시 뒤, 어느 남자가 급하게 전화를 받습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휴대전화가 밖으로 크게 들렸는데, 이런 대화였습니다.
“아빠! 나 게임기 사도 돼? 저번에 사준다고 했잖아.”
“그래, 사.”
“아빠! 스마트폰도 바꾸고 싶은데 사도 돼?”
“알았어. 그렇게 해.”
사람들은 당연히 아빠와 아들의 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은 이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합니다.
“이 휴대전화 주인 누구세요?”
주인도 아니면서 전화 속의 아이와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그렇게 보입니다. 즉, 세상의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인 척 살고 있습니다.
라자로가 되살아난 뒤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많았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도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의심하는 사람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 의심의 첫 번째 이유는 시샘입니다. 예수님 전에는 온전히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지요. 그 사랑과 존경이 이제 예수님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의심의 두 번째 의심은 불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주 찾아가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계명인 사랑을 내놓으면서, 이들을 향해 위선자라면서 꾸짖기도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은 로마로부터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 체제 안에서 유지되는 자기들 나라의 한시적 권한과 성전에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이 예수님 주위에 모이면 모일수록 로마는 반역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지금까지 부분적으로나마 가지고 있는 자유를 모두 잃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던 모습은 스스로가 주인인 척했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봐서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을 만날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서로 사는 지역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달라서 아주 친한 친구 외에는 볼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의 아버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부모님 장례에는 가봐야겠다 싶어서 장례식장을 홀로 찾아갔습니다.
문상하고 친구와 정말 오랜만에 인사를 나눴습니다. 거의 25년 만에 만난 것 같습니다. 친구는 “고맙다”라고 말한 뒤에, “진짜 오랜만에 보네. 너 살아 있었구나.”라고 합니다. 하긴 천주교 신자가 아니니 신부로 사는 제 소식을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친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서 제 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휴대전화에 제 이름과 전화번호가 주소록에 이미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고등학생 때 우리 집 전화번호였지만, 큰 감동이었습니다.
30년도 훨씬 전인 우리 집 전화번호, 당연히 연락이 안 되니 지울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합니다.
“이름이라도 보면 옛날 생각나잖아.”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짐을 해 봅니다. 나 역시 누군가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지요.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다
-전삼용신부-
헨리 벤 다이크(Henry Van Dyke)의 저서 「네 번째 동방박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 알타반(Altaban)이라는 동방박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세 가지 예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쯤 도착했을 때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세 박사 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는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는 떠났고 아기 예수님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신 후였습니다. 허탈해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로데왕이 사내아기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이집트로 갔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33년의 세월이 흘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놀라며 골고타로 뛰어갔습니다.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던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를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드릴 예물도 없는데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할 때 큰 지진이 일어났고 기왓장이 그를 덮쳤습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그의 귀에 커다란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이제 내가 너를 맞을 준비를 하겠다. 나는 영원히 네가 나에게 주려고 한 것을 부족함 없이 갚아 주겠다.”
알타반은 그리스도와 함께 미소를 띤 얼굴로 평화로이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은 제가 조금 바꿔봤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도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당신께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에게 그것의 참 주인은 당신이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비교할 수 없는 은혜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선악과를 자신의 것인 양 여기는 것이나,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참 주인을 몰라본 덕에 부활의 상급은 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들어온 죽음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가야파 대사제의 입으로 이 진리를 말씀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살려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자신들의 것인 양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다시 받을 공로를 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한 이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세상은 이제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들과 유다인들처럼 대하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심판도 그렇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즘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다시 ‘만민구원설’과 같은 이단적 사상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보다는 부활에 더 집중하려는 모습입니다. 죽음 후에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머물지 않고 다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희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후가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을 어떠한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짐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로마로 순교를 당하기 위해 압송당하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마치 천국에 들 수 있는 특권인 양 방해하지 말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 내 지상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나는 하느님을 뵙기를 원하며,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참조). 그분과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는 삶이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류시화님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비슷한 의미도 있습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제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버지니아, 아그네스, 바실, 밴쿠버’ 한인 공동체에 신문 홍보와 사순특강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3주간 바쁜 일정이 예상되었지만 다음 기회를 위한 충전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한국에서 오기로 한 신부님도 일정이 취소되었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기로 했는데 역시 다음으로 미루어졌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기쁨은 더 커질 것 같습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는 한국에는 커다란 폭풍우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감염되었고, 사망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피해도 막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런 폭풍우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피해가 심했던 대구, 경북 지역에 대한 도움의 손길이 많았습니다. 전라남도에서는 매일 도시락을 만들어 나누어주었습니다. 마스크가 부족한 걸 알고 많은 분들이 마스크를 보내 주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자원봉사자가 있었습니다. 세입자에 대한 임대료를 감면해 주기도 했고, 면제해 주기도 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치권은 추경예산을 의결하였습니다. 유증상자의 확진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 방법은 신속했고, 정확했습니다. 한국의 감염병에 대한 대처능력은 국제적인 모범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의 상황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잘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작년 이맘때입니다. 안식년 중이었던 저는 안식년 중이었던 신부님들과 남미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국에서 미국 달라스를 거쳐 페루 리마에 도착하는 일정이었습니다. 페루에서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로 이어지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달라스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상악화로 출발이 취소되었습니다. 다음 비행기는 3일 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3일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마침 달라스 한인 성당에 동창신부님이 있었습니다. 동창신부님의 사제관에 머물 수 있었고, 주님 수난 성지주일 미사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기상악화로 여행 일정은 변경되었지만 성지주일 전례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에 이끌려 니네베로 갔듯이, 주님께서는 안식년 중인 저를 기상악화를 통하여 성당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기상악화는 마침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전례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쉼표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시기의 절정인 ‘성주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인 드라마의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년 반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 죽음, 부활의 드라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새로운 역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들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지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리를 저버린 빌라도, 무관심으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군중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낙원에 들어간 죄인일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을 보면서 우리들 또한 주님께 위로를 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위로를 드리면서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이신 동시에 희생물이시고, 하느님이신 동시에 성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도 피하고 싶으셨던 순간, 아버지께서 정하신 끔찍한 순간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이 다가옴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이 예수님은 공공연한 표적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과 표징을 바라본 몇몇 사람이 대사제에게 일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자질한 것입니다. 당혹스러웠던 대사제는 임시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대책 마련에 고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유다인들은 고위급 사제들과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과 원로들 가운데 70명을 뽑아 유다 최고 의회를 구성했습니다. 대사제는 당연직 의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의회에 참석했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의 걱정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위축될 자신들의 입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로마 당국이 소요 사태를 우려한 나머지 로마 군대가 출병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기원후 18~36년 사이 대사제를 역임했던 가야파는 아주 특별한 발언을 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의 걱정을 고려한 정치적 발언이었습니다.“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앞날에 대해 정확한 예언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느냐, 무죄를 선고하느냐 보다도 유다 전체를 위해 예수님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대 사제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희생 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 일을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히브리서 7장 2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제이신 동시에 희생물이시고, 하느님이신 동시에 성전이십니다.
한편 유다인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그들은 철저하게도 방관자로서 ‘예수님 사태’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대단한 호기심거리일 뿐입니다. 마치 내기라도 걸 태도입니다.
인류 최대의 선물이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참으로 야박하고 대하는 인간들이 모습이 표독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감사와 보답과 찬미는커녕 무시하고, 시험하고, 놀려대는 사람들입니다. 극진히 정성껏 모시기는커녕 문전박대하고, 그를 향해 돌을 들고,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모욕적인 언사와 배은망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더 큰 사랑의 실천을 위해, 더 큰 가치의 획득을 위해, 사사로운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는 예수님의 큰 걸음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하나로 모으기 위한 일에 동참해야
-반영억신부-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카야파는 의회의 결의를 독려하고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사람은 카야파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 가운데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게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실 죽어야 할 사람이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굿은 일에는 나이고 생색나는 일에는 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신 주님처럼’ 우리도 모으기 위한 노력에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신속하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미루지 않는 사랑,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 곧 라자로를 살리는 일을 보고서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이들은 단지 믿지 않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거부하고 고발하고 방해하고, 그분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민족과 백성과 공동체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분을 죽이기로 결의한 이들의 속셈이 드러납니다. 곧 그들은 민족과 백성과 공동체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과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고슴도치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들을 방어합니다.
그리고 사악한 악의에 차서 계략과 음모를 꾸며댑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비단 교회 밖의 일반 사회에만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바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바로 내 자신의 삶 안에서도, 아주 교묘하게 강력한 영향력으로 행사되기도 합니다.
이를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영적 세속성”이라 지적하고, 강렬하고 단호하게 경계하셨습니다.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무려 다섯 개의 항(93-97항)을 배려하여, 이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 교묘한 방법입니다.”(93항)
그리고 앙리 드 뤼박은 이러한 “영적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더 엄청난 재앙이 될 것”([교회에 관한 성찰])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사실, ‘영적 세속성’에 빠진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결국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처럼, ‘영적 세속성’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자기 기득권과 자기중심성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는 일은 그토록 중대한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의 큰 차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곧 믿는 이들은 희망을 그분께 두는 이들이요, 믿지 않는 이들은 희망을 그분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는 이들입니다.
곧 그분이 바라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희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이 갈리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믿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희망을 두고서 아버지의 뜻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로지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기에,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자신이 죽는 길을 나선 것입니다.
나는 진정, 누구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가?
주님!
오늘 저희를 이기심과 자애심에서 빼내시어 당신 안에 가두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1,45-56: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죽은 라자로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소문이 퍼져나가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요.”(47-48절). 그들은 세상의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주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정말 성전과 백성을 걱정해서 이런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염려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이 만일에 민중봉기라도 하게 되면 로마의 진압을 받게 되고, 성전은 파괴되며, 유다민족은 완전히 지배를 당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생각을 하였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사람들이 보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예수님을 견제하기 위해, 그 사태를 수습하려고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이때에 대사제 가야파가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49-50절)하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흩어져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예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위로써의 의미를 갖는다. 이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하여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이해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성찰해 보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안전과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는 예수라는 존재를 없애야 한다는 결정이 나도록 당시의 상황을 몰고 갔던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죽일 방법만 찾았고 이제는 그렇게 하기로 결의하고,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진위를 가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명예나 안위에 우선을 두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기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살고 있는 다른 무죄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하며,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 되도록 기도하자.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요한 11, 52)
-한상우신부-
흩어진 일상을
모아들이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흩어진 마음들이
예수님을 찾는
사순입니다.
잃어버렸던
삶의 중심이
주님임을 드디어
깨닫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업어 주시고
받아주시며
우리를 하나로
끌어 모으십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모아들이십니다.
모아들이시는
주님께로
가야 할 우리의
마음입니다.
흩어짐이
절망이 되었습니다.
모아들임은
희망이 되었습니다.
모아들임은
밀알 하나처럼
죽지않고서는
이룰 수없는
참된 사랑입니다.
흩어진 분열을
치유하시는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능케하십니다.
모아들이는
마음이 없다면
신앙은 허상이
됩니다.
모아들이는
희생이 모든 것을
가능케하는
십자가가 됩니다.
모아들임은
십자가의
사명임을
기억하는 사순의
끝자락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요한 11,50).
대사제 가야파의 입에서 하느님의 의중이 흘러나옵니다.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일 뿐 그의 생각이 아닙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무지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한 사람"
이 한 사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다인은 이 "한 사람"을 죽이려 하지만, 실상 그 죽음을 통해 그 "한 사람"이 온 민족을 멸망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그 한 사람에 대해서는 제1독서에서도 각기 다른 표현으로 반복해 이야기합니다.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에제 37,22).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에제 37,24).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에제 37,25).
주 하느님께서 유배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21)고 하시면서, 한 임금, 유일한 목자, 영원한 제후를 약속하십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카야파의 말에 등장하는 그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이라는 신학적 해석을 덧붙입니다. 한 분이고 유일하며 영원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은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민족을 살리실 것입니다.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에제 37,26).
성경의 갈피마다에서 마주치는 하느님의 갈망은, 당신의 영광을 내려놓고서라도 기어이 백성 틈에 거처를 마련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늘 모자람 없이 홀로 충만하신 그분이 먼저 인간에게 말을 걸어 오시고 하느님이 되어 주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같이 살자고 하시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사람들 틈에 들어오셔서 거처를 마련해 함께 사시는 주님을 사람들은 가장 교묘하고 잔인하며 치욕적인 방식으로 내쫓으려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듯 외짝 사랑꾼이실 때가 더 많습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복음 환호송).
충실히 야훼 하느님을 섬기며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유다인들에게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새로움에 대해 완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새 일"(이사 43,19)에 눈과 귀를 막은 채, "묵은 것이 좋다"(루카 5,39)며 옛 포도주에 취한 상태로는 새 포도주는 안중에도 없을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올해 사순시기와 부활시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낯설게 다가옵니다. 우리를 회개와 보속으로 이끌어 주던 전례는 물론, 함께함을 통해 서로를 자극하고 성장시키던 공동체적 활동도 그쳐버렸습니다.
하지만 인류적 위기의 터널을 지나며 단순히 옛 것의 향수에 젖어있기보다, 이번 사순시기와 부활시기에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로움은 무엇일지 숙고한다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벗님! 그러니 잊지 맙시다. 옛날 어느 때와 비교해 좋았는지 나빴는지보다 중요한 건 지금 직면한 새로움에서 깊숙히 묻혀 있던 보물을 파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새롭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이 그 보물이고, 말씀이 보물입니다. 오늘도 그 보물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복된 날 되소서.

우리의 공동체는?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400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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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순교를 당하기 위해 압송당하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마치 천국에 들 수 있는 특권인 양 방해하지 말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 내 지상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나는 하느님을 뵙기를 원하며,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참조). 그분과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는 삶이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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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폭풍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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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속성’에 빠진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결국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처럼, ‘영적 세속성’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자기 기득권과 자기중심성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는 일은 그토록 중대한 일인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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