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31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3. 30. 18:58

2020년 3월 31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요한 8,21-30)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당신이 누구요?” 이는 요한 복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질문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그것을 찾아낸 이들의 증언입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불신하던 이들도 있었고 진리에 눈을 감은 채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도 있었습니다. 믿음을 받아들인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께서 돌아가실 것임을 드러내는 명확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로 깨닫습니다. 이 말씀은 광야에서 있었던 구리 뱀의 사건과 연결됩니다. 감사하지 않고 불만과 불평만이 가득하여 벌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리 뱀이 구원의 표징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신 분이십니다.

이 두 사건은 사람들의 배척과 불신 그리고 그것과 대조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잘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어디에서 오신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구원을 위한 믿음의 바탕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교 처음 들어가서 어느 선배님 방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글쎄 이상한 책들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토대가 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해서 조잡해 보이는 복사판 책들이 꽂혀 있는 것입니다. 80년대 뉴스에 종종 나왔던 간첩이라는 증거로 제시된 불온서적이 이 선배의 방에 있었습니다.

‘혹시 간첩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혼란에 빠졌습니다. 물론 이 사회를 전복하기 위해 이런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학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구해서 복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신학교에 들어온 저로서는, 또 이제까지 강력한 반공교육을 받아왔던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때 불온서적으로 취급받던 책들이 모두 풀려서 깔끔한 디자인으로 다시 인쇄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생각의 자유를 침해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나와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가 아닌 함께 하지 못할 사람을 가리는 사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해야 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 사람까지도 구원으로 이끄시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떠나시겠다는 엄포였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닫혀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이제 포기할 만도 합니다. 그냥 죄 속에서 죽으라면서 내버려 두시면 더 편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더불어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 줄 십자가에 관해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으로 이끌려고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사람들과 얼마나 함께하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편협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교육이란 알지 못하는 바를 알도록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마크 트웨인).


소리

언젠가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11시 30분입니다. 낮이 아니라 밤이었습니다. 너무 일찍 일어났기에, 조금 더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냥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계 초침 소리, 차량 지나가는 소리, 바람 소리, 개 짖는 소리.

그 소리가 저를 일어나라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집중하면서 읽다가 문득 침대에서 들었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소리가 제 주변에 있었지만, 집중하다 보니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나를 방해하는 많은 소리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집중할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 소리 자체에 집중하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도 이런 소리가 아닐까요? 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소리가 계속 곁에서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경제적 어려움, 판단의 혼란 등이 바로 나를 힘들게 하는 소리입니다. 이것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기에 힘든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께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에 집중해서 소리의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소리에만 집중하면서 못 살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나'를 바꾸기 전에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 (https://youtu.be/t4Hma6RhT20)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서 “나”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 이름인 “나는 나”(I AM)입니다. 따라서 “정녕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하느님”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인간으로 보이시지만 아버지께서 그분과 함께 계시니 또한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이전의 “나” 속에 사로잡혀 죄 속에서 죽게 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변화되었다고 속을 뿐입니다. 내가 믿는 “나”를 바꿀 때 비로소 변화됩니다.

      영화 ‘기억의 밤’(2017)은 설정이 재미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 조직 보스가 어머니와 누나를 살해한 살인범을 나이가 들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살인범의 기억은 20여 년 전, 살인하기 이전의 고3 학생 나이에 멈춰져 있습니다. 살인할 당시와 그 이후의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살인을 저지른 집을 개조하여 최면으로 고3 시절로 다시 되돌려 살인의 기억을 되살리려 한 것입니다.

      자신이 고3이라고 믿는 이 살인자는 천진난만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부모와 형이 자신을 속이는 것을 눈치채면서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경찰서로 들어갔는데 자신을 고3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믿는 1997년 고3 학생이 아니라 2017년이었던 것이고, 그도 훨씬 나이가 들어있는 자신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기억해 냅니다. 자신이 살인자였음을.

      우리도 자신의 처지를 모른 채 고3의 착한 아들이라고만 믿고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자신 안으로 들어와 자신이 고3의 ‘나’가 아니라 마흔이 넘은 살인자 아저씨임을 알게 되면 비로소 변화가 시작됩니다. 뉘우치고 사죄하고 새로운 ‘나’로 살게 되는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3 수험생이라고 믿고 있는 상태에서 착해지려고 노력해봐야 변화에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될 때 참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것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해방되는 길을 “나”의 정체성이 변화되는 것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하느님이라 할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가 바뀌지 않으면 절대 죄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인간이라고만 믿고 있으면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으로 이웃을 살해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화를 내는 것도 살해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면 지금까지 내가 섬겨오던 “나”가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795)

      이 믿음을 위해 성체를 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당신 머리로 받아들여 당신이 곧 아버지가 되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우리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 되시는 것을 믿지 못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나”라는 죄 속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은 벌써 2년 동안 매일 잠자기 전에 “나는 예수다!”를 100번씩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우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지!’를 100번씩 결심해봐야 큰 소용이 없습니다. 변화는 자신의 “나”에 대한 믿음을 변화시키면서 성취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은 누구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리스도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변화는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때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야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우리의 몸은 정교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르몬, 백혈구는 우리 몸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막아냅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뚫고 들어오는 무서운 세균이 있었습니다. ‘천연두, 페스트, 콜레라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병으로 죽었고, 인류의 평균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이런 질병은 인류의 의식과 문화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신에 의존하던 종교의 권위가 떨어졌습니다. 인간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는 인본주의, 계몽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인간 중심의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세균에 대항하는 항생제가 만들어졌고, 지금은 이런 병은 대부분 사라졌고, 생겨도 치료받으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세균에 의한 감염은 대부분 항생제를 만들 수 있지만 최근에는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생기고 있습니다.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바이러스는 세균보다 훨씬 작습니다. 세균이 코끼리의 크기라면 바이러스는 코끼리 등에 앉은 파리정도의 크기입니다. 최근에 인류를 괴롭힌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스페인 독감,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가 있습니다. 이번에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19도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입니다. 바이러스는 변종이 쉽게 생기기 때문에 항생제를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예방이 중요합니다. 적당한 운동과 긍정적인 생각이 예방에 도움이 됩니다. 백신이 개발되면 시간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몸을 병들게 하는 세균,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항생제와 백신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제약회사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서 약을 개발할 것입니다. 인류의 건강에 도움이 되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현미경으로 볼 수 있지만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난민이 있습니다. 굶주림과 가난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항생제와 백신을 만들지도 않고,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교만, 인색, 시기(질투), 분노, 음욕, 탐욕(탐식), 나태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칠죄종(七罪宗)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카인은 동생을 시기하였습니다. 헤롯은 분노로 어린아이를 죽이도록 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했습니다. 부자는 창고를 넓혔지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무엇으로 칠죄종을 끊어 버릴 수 있을까요?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치유되었습니다. 구리 뱀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죄의 뿌리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다리입니다. 우리를 화해하게 하는 다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간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마음과 하나 되길 

 -반영억신부-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가지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났다면 큰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 없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기왕이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과를 보내되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엮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아래에서 왔다고 아래 것만 생각하고 아랫것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갇히면 죽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순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 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떤 아가씨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습니다.

램프를 쓱쓱 문지르니 요정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 한가지만입니다.” 그 아가씨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돈도 가지고 싶고, 남자도 만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한 번에 다 말하면 되겠다!” 그래서 램프의 요정에게 말했습니다. “돈남자결혼!” 요정은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아가씨는 정신이 돈 남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이영근신부-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신원을 묻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앞 문장에서 이미 당신의 신원을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두 가지로 밝히십니다.

<첫째>위에서 온 분으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분명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니 그분께 속한 이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둘째> 내가 나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를 일곱 번에 걸쳐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한 15,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그렇습니다. 진정,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주님께서 내가 나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입은 이 빛 안에서 사순의 길을 따라 갑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4-15).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의 손길로 저를 다듬으시고,

당신의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송영진신부-


지혜로운 사람은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앞일을 미리 대비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눈앞의 일에 대해서만 집착하고,
앞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대비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심판 때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회개하면서, 심판에 대비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일만 신경 쓰면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다가 심판받을 때가 되면 그때서야 후회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경험한 사람도 없고, 미리 목격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래서 그 일은 심각하게 실감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감나지 않더라도 미리 잘 준비하는 것이 ‘지혜’이고,
반대로 “그날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태평하게 지내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지혜’ 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은 아니고,
또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잘 배우려고 노력하고,
배운 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의지’가 지혜이고, 또 그런 노력이 지혜입니다.
집회서 저자는 ‘지혜’는 ‘주님을 경외함’이라고 말합니다(집회 1,14-20).
주님을 믿고, 말씀 안에서 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충실하게 섬기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이 말씀에서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해 달라고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이 심판은 종말의 공심판일 수도 있고, 개인의 사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부터 잘 대비하지 않으면 너희는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심판이 닥치기 전에 미리 잘 대비하는 것인데,
그것을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대비하지 않고 태평하게 지내다가 그때 가서 도와달라고 빌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여기서 “나는 간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신다는 뜻이고,
이 말씀을 심판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나는 지금은 떠나지만 심판관으로서 다시 온다.” 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24).”

이 말씀에서,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이라는 뜻인데,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내가 주는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계속 죄 속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자들은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라는 말씀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현세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만 찾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허무하게 소멸될 것들만 찾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들이 소멸될 때 함께 소멸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기 죄 속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됩니다.
너무 늦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멸망을 피하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라는 말씀과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고,
또 당신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찾는 세속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2-3).”
여기서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라는 말은,
신앙인은 세례를 받을 때 세속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세례를 받을 때에 세속이 우리 안에서 죽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세속은, 또는 ‘땅에 있는 것들’은
죽은 것들, 즉 생명력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신앙인은
‘위에 있는 것’만,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만 생각해야 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뒤에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세례는 그 생명을 누리는 삶의 시작이고,
신앙생활은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딴 생각을 하거나 한눈을 팔아서 길에서 벗어나고,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게 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8,21-30: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21) 바리사이들이 그분을 찾는 이유는 그분을 겨냥하여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이다. 좋은 것과는 거리가 먼 온갖 이유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 많다.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장사꾼이나 다름없다. 올바른 방식으로 찾는 이들만이 평화를 발견한다. 말씀을 찾는 이, 그분께서 아버지께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그분을 찾는 이들이 올바로 그분을 찾는 이들이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그분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박해하려고 찾았으며, 그분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그분을 찾았다. 바리사이들은 악의에 차서 잘못된 방식으로 그분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것은 그리스도를 잘못된 의도로 찾는 이들에게 일어난다. 예수님은 악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시는 데 이들은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23) 예수님께서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마태 6,21 참조) 땅에 보물을 쌓는다면 그 행위 때문에 아래, 땅에 속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면(마태 6,20 참조) 그는 위로부터 태어난(요한 3,3 참조) 사람이며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1코린 15,49)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모든 하늘을 거친 다음 가장 복된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24) 자기 죄 속에서 죽는 이는,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진리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믿음을 말하지만 행실이 없다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예수님의 의를 믿는 이는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그분의 지혜를 믿는 이들은 어리석은 말을 하지도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 자체가 그를 죽이고 만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25) 하고 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르치며 많은 기적을 보여 주었는데도 그렇게 묻고 있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25) 이 말씀은 그들은 그분의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또 그분이 누군지 알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들의 말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한 마디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부터라는 말씀은 당신 자신이 이미 한 처음”(요한 1,1)이신 말씀이심을 나타낸다.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 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26)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미래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당신도 참된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참되신 분의 아들로서 당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27)고 한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28) 이 말씀은 당신이 수난을 통하여 들어 올려지기 전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들어 올려짐은 십자가로 들어 올려짐이며 이 들어 올려짐은 그분의 치욕이었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립 2,8)하셨기 때문이다. 이 수난은 이 말씀을 들은 이들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29)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으나 언제나 함께 하셨다. 그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이 가신 곳이면 어디나 계셔야 했다. 아드님을 버려두실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경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기회는 부여되어 있지만,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다시 그 은총의 때를 맞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있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때를 잘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느냐 않느냐 하는 결단을 내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결과도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아들을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 28)

-한상우신부-

십자가로
주님을
믿게됩니다.

믿음의 무게는
십자가의
무게입니다.

믿음의 길은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로
순종을 배웁니다.

십자가는
내것이 아니기에
주님의 것이기에
내마음대로
붙들 수 없습니다.

십자가로 믿게 되고
십자가로 다시
깨어납니다.

십자가로 단련된
믿음은 쉬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합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또한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시들지 않습니다.

막을 수 없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사랑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와
무관한 삶은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들어올려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힘껏 밀어주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죄가 어디에서 오는지, 구원은 또 어디에서 오는지 보여줍니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민수 21,4-5).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서서 광야 생활을 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미르얌과 아론도 죽고 반역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요르단 점령이 시작될 참이니 백성은 긴 행군에 지쳐갑니다. 게다가 이제 그들에게 물도 양식도 떨어져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나설 때, 당장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성큼 들어갈 것이라 여겼을까요... 백성이 조급해졌다는 건 그들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걸 뜻합니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아직 그곳이 아닌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의 불평은 드세지고 거칠어집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민수 21,6).

성경은 때맞춰 광야에 우글우글 나타나 백성을 문 불 뱀들이 주님의 징벌이라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어쩌면 마음속 독기와 악의에 조급함마저 가미되어 백성의 입을 거쳐 튀어나온 불평들이 사납고 거칠은 불뱀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전자의 불뱀은 사람을 물고 후자의 불뱀은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

백성을 위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해결책을 주십니다. 기둥에 높이 달린 뱀 형상의 구리 모형은 이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생명을 되돌려 줍니다.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요한 28)

예수님도 구리 뱀처럼 높이 들어 올려지셔야 합니다. 인간을 공격하고 물어뜯는 죽음의 독기를 사그라지게 하는 힘은 무죄한 이의 피밖에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요한 8,29).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그분은 공생활 내내 홀로셨습니다. 물론 제자들과 군중이 따랐지만, 끝까지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셨지요. 같은 눈높이에서 마음을 주고받을 비슷한 수준의 벗을 얻기는 어려우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요한 5,34 참조),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으며(요한 5,41), 사람의 속마음을 아시기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십니다(요한 2,24).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이리라"(영성체송).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홀로이시나 실은 홀로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고독한 희생제사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벌거벗겨진 비움의 극치기에, 오히려 가장 완전한 충만함입니다. 가장 하느님스럽지 못한 한계까지 끌어안은 완성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제 그 십자가 밑으로 주님의 백성이 모여듭니다. 우리는 십자가 기둥 위에 매달리신 무기력한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과 삶을 물어뜯던 죽음과 같은 악습에서 구원됩니다. 그분의 피로 몸 안에 퍼진 독이 희석되고 상처도 아물어 갑니다.

우리에겐 십자가가 답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코로나19로 사태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쓰러져갑니다. 불뱀과도 같이 우리 영혼마저도 물어뜯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조급한 마음으로 서로 불평불만한다면 그건 답이 아닐 겁니다. 오늘도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의사, 간호사, 행정당국 등과 함께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왜냐면 십자가만이 답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나의 십자가도 묵묵히 져나가겠다고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뱅을 높이 매달고 보는 까닭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209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20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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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서 “나”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 이름인 “나는 나”(I AM)입니다. 따라서 “정녕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하느님”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인간으로 보이시지만 아버지께서 그분과 함께 계시니 또한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이전의 “나” 속에 사로잡혀 죄 속에서 죽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면 지금까지 내가 섬겨오던 “나”가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795)

이 믿음을 위해 성체를 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당신 머리로 받아들여 당신이 곧 아버지가 되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우리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 되시는 것을 믿지 못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나”라는 죄 속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은 벌써 2년 동안 매일 잠자기 전에 “나는 예수다!”를 100번씩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우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지!’를 100번씩 결심해봐야 큰 소용이 없습니다. 변화는 자신의 “나”에 대한 믿음을 변화시키면서 성취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은 누구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리스도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변화는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때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야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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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교만인색시기(질투), 분노음욕탐욕(탐식), 나태가 있습니다교회는 이것을 칠죄종(七罪宗)이라고 합니다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습니다카인은 동생을 시기하였습니다헤롯은 분노로 어린아이를 죽이도록 했습니다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했습니다부자는 창고를 넓혔지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무엇으로 칠죄종을 끊어 버릴 수 있을까요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치유되었습니다구리 뱀은 무엇입니까하느님의 말씀입니다하느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죄의 뿌리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입니다십자가는 무엇입니까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다리입니다우리를 화해하게 하는 다리입니다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간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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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를 일곱 번에 걸쳐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한 15,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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