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30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3. 29. 19:11

2020 3 30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요한 8,1-11)

 

"Let the on e among you who is without sin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다니엘서가 전하는 수산나의 이야기와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이야기는 많이 닮았습니다. 수산나는 주님을 경외하던 사람으로 억울한 누명을 씁니다. 그러나 그 누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수산나의 결백을 주장할 사람은 본인밖에 없는 반면, 원로 두 명 모두 수산나의 간음을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증언은 두 사람 이상일 때 유효하였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자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가 잡힌 경우 남녀 모두에게 벌을 내리지만, 오늘 복음은 홀로 잡혀 온 여자의 처벌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여자가 수산나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에 대한 단죄는 없어야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다른 이를 심판하고 단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이들을 벌하시고 책임을 물으시지만 누명을 쓴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가 있더라도 회개하고 참회하는 이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복을 내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죄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단죄보다 용서를, 심판보다 자비를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만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도 때로는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아무도 없고 자신만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신부님께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니 얼마나 외롭겠어요?”

그러나 혼자 살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아내도 있고 자녀도 셋이나 둔 한 집의 가장이었습니다. 함께 살고 있지만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서 너무 외롭다는 것입니다. 즉, 분명히 누군가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외로운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제 편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언제나 함께 해주시는 주님, 그래서 계속해서 저를 성장시켜주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부터는 자신의 외로움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외로움은 주님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옵니다.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 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은 여자를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곤혹스러운 문제를 던집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율법 준수 여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실 간음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상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여자 한 명만 있을 뿐이었지요. 이런 불합리함이 답답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면서 자기 자신부터 의로움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의 외로움을 느껴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적의를 표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 손가락질하면서 죽어 마땅하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경멸, 그 누구도 자기편이 되어 주지 않는 커다란 외로움 속에 있었습니다.

이때 유일하게 예수님만 같은 편이 되어 자신을 지켜주셨습니다. 여기에 커다란 위로까지 주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사람에게서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주님으로부터만 가능하며,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사랑 가득한 분이십니다.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칸트).



외로움

외로움은 ‘혼자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외로움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연히 사전을 보다가, 외로움의 반대말이 ‘번거로움’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번거로움이란 귀찮고 짜증이 날 때 쓰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유대감, 공감, 교감, 연대감 등의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비슷한 말들을 따져보면 정확하게 반대말이라고 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책에서 보았던 이 표현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외로움의 반대말은 없다.”

외로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외로움을 극복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생각을 묻는 사람에겐 정체성으로 대답해야!

-전삼용신부-


 많은 경우에 생각의 차이 때문에 논쟁이 일어나고 결국엔 사이가 갈라집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논리로 반박해서는 싸움만 됩니다. 그러나 말싸움을 해서 많은 것이 달라지나요? 서로의 생각의 차이를 놓고 누구 생각이 옳으냐고 따지는 것만큼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도 없습니다. 논쟁을 피하십시오.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상처만 남습니다.

      하루는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서로가 자기주장을 내세우면서 고집했습니다. 해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나뭇잎은 초록빛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바삐 움직인다. 그 결과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반면 달은 다르게 주장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뭇잎은 은빛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세상은 언제나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이렇게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내세웠습니다. 그때 바람이 지나가다가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람이 웃으면서 중재에 나섰습니다.

“얘들아, 그만 싸워. 너희들은 괜히 싸우고 있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알다시피 낮에 해가 떠 있을 때도 불고, 밤에 달이 떠 있을 때도 불잖아? 그러니 내가 다 아니까 말해줄게. 낮에 해가 떠오르면 해가 말한 그대로야. 나뭇잎은 초록빛이 되고 또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그 결과 세상은 시끄러워진단다. 그러다가도 밤에 달이 뜨게 되면 사정은 달라져. 달이 말한 대로 된단다. 나뭇잎은 은빛이 되고 또 사람들은 보금자리를 찾아서 잠에 곯아떨어진단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거야. 어디 그것뿐인 줄 아니? 행여 구름이 달빛을 가리게 되면 나뭇잎은 빛을 잃어버리고 검은색으로 바뀌어버리고 만단다. 너희들은 전부를 알지 못하고 극히 작은 한 부분만 알고 있어서 쓸데없이 서로들 싸우고 있는 거야.”

      해와 달의 입장에서는 바람이 매우 얄미울 것입니다. 그리고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서로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너는 해고, 너는 달이야!”라고 말해주는 것이 현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얄미워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모세의 법을 들먹이며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묻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셨다면 당신의 생각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에 관한 생각을 말해 달라고 했는데, “너희도 죄인임을 깨달아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내가 배우자를 이기고 싶다면 나의 온 생각은 그 목적을 위해 갖은 방법을 찾아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말싸움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하다 끝나버립니다. 돌을 들면 던질 곳만 찾게 되어있습니다. 이미 어떤 욕구가 지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욕구에 묶여 그 욕구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그런데 ‘욕구는 정체성에 지배당합니다.’ 내가 의사이면 병을 치료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자기를 아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욕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욕구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을 바꾸려면 정체성을 바꿔줘야 합니다.

      물론 새로운 정체성은 누군가의 피 흘림으로써만 얻어집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는 것은 새로 태어남이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시며, 한 간음한 여인의 죄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용서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주시기 위해 유다인들로부터 죽임을 감수하셔야 하셨습니다.

      사람을 바꾸고 싶다면 생각보다 정체성을 바꿔주십시오. 한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을 아버지 책임으로 여기고 비뚤어졌습니다. 매번 경찰서에 가서 아버지가 빌어야 했습니다. 한 번은 이번은 안 된다고 말하는 젊은 경찰에게 “저희 아이가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정말 착한 아이였습니다. 마지막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라고 무릎 꿇고 청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마음을 잡고 서울 소재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잔소리로 그 아이의 생각을 바꾸려 했다면 평생 싸움만 하다 끝났을 것입니다. 논쟁을 피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피 흘림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려주십시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과 논쟁하는 사람은 자신도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https://youtu.be/9N_JQTa1i9A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햇볕은 내가 죽지 않는 이유가 되었고, 깨달음과 공부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살아야 했습니다. 언제 석방 될지 모르는 감옥에서 창살 넘어 비추는 햇빛을 보았다고 합니다. 햇빛이 비추는 곳에 있으면 잠시나마 따뜻했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책을 읽고, 사색하면서 예전에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이유를 모른다면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수산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원로 두 명은 죽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건강하였고, 존경받았고, 가진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산나에게 누명을 씌었습니다. 몸은 건강했지만, 마음은 병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몰랐던 원로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거짓과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비록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수산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원로들이 누명을 씌었고, 율법에 따라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악의 유혹에 몸을 맡기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산나의 마음을 아셨고, 다니엘을 통하여 수난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셨습니다. 수산나는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어둠을 온 몸으로 밝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현실의 삶에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의 마음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정한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과 군중들의 시선을 보았습니다. 군중들은 율법에 따라서 여인을 단죄하려했습니다. 손에는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돌을 던지면서 나의 잘못을 감추려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돌보다 더 아픈 글을 던지기도 합니다. 돌은 떨어지면 그만이지만 글은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기억에 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쉽게 두드리는 키보드의 자판은 거리의 제한도 없습니다. 시간의 제한도 없습니다.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셨습니다. 군중들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군중들의 눈에 핏발도 사라졌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돌을 맞을 잘못을 했음을 알았습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들도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아갔습니다. 비록 부정한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 하셨습니다. 인터넷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따뜻함을 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선행이 많은 사람을 선행으로 초대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정성스럽게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면서 사랑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받아서 죽어야 했던 수산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죄를 지어서 죽어야 했던 여인은 예수님의 자비하심으로 용서받았습니다. 수산나와 여인 중에 누가 더 하느님께 감사드렸을까? 죄를 용서받았던 여인은 살아야 할 이유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바르고 정성스럽게 닦아 드렸습니다.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한번만이라도 더 주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단심조만고(丹心照萬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직하고 정성스러우며 거짓과 삿됨이 없는 마음은 영원한 세상에 빛나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모이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하느님의 뜨거운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

 -양승국신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과의 만남입니다. 복음서 여러 아름다운 장면들 가운데 참으로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최근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긴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정체성과 신원을 주제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꽤나 피곤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단골 피정 장소인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좀 쉬시기도 하시고 밤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께는 또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체포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둑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복음 8장 4~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자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고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순간 보여주신 예쉼의 태도가 특별합니다.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복음 8장 6절)

 

 이 부분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체 예수님께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요?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어떤 성경학자는 이 부분이 너무 궁금해서 이것만 연구하다가 결국 답을 못얻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는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것은 ‘둘러서있는 고발자들의 죄목’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렵고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경우, 즉답을 피하고 싶을 때, 말없이 땅에 무엇인가 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취하셨을 것입니다. 일종의 김빼기 작전, 냉각 작전이었습니다. 동시에 마음의 여유도 얻고, 아버지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올리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 그 어떤 현자, 솔로몬 할아버지도 내놓을 수 없는 명답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복음 8장 7절)

 

 하느님의 따스한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묵상하며 떠오른 생각 한 가지! 우리도 언젠가 뜨거운 하느님의 따스한 자비를 만나는 순간, 그간 켜켜이 쌓아왔던 모든 죄가 눈녹듯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질 것입니다.


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

  -반영억신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삽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죄에 죄를 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기원하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요한 8,11).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데에 더디게 움직이지만 주님은 용서하시는 데에 더디지 않고 지치지도 않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주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혹시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나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고발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더 큰 돌로 더 세게 내리치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단지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게 하소서.

차마 던지지도 못하면서,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가 있지는 않는지 보게 하소서.

돌덩이를 품어 무거워지고 짓눌려 있는 자신을 보게 하소서.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를 내려놓게 하소서.

돌덩이에 대신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사랑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송영진신부-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3-9).”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 아니라,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고발당한 죄목 그대로 분명히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제1독서에 수산나 이야기가 나오는데, 수산나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습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 율법대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을 먼저 할 것인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자비와 용서를 먼저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것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도 중요하고,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만일에 자비와 용서를 외면하고 율법과 정의만 강조하면,
죄인에게 회개하고 보속할 기회도 주지 않는,
무자비하고 사랑도 없는 무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반대로 자비와 용서만 강조하고, 율법과 정의 실현을 무시하면,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선 자체이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정의의 실현은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맹목적으로 할 일이 아니라 정의와 선의 실현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무엇인가 쓰신 것은 침묵을 지키신 것이고,
이 침묵은 각자 자신의 죄를 성찰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 가운데 죄 있는 자는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은 “죄인은 다른 죄인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 라는 가르침이고,
또 산상 설교에서 말씀하신,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라는 가르침과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라는 가르침을
재확인하시는 말씀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말씀은,
여자에게 죄가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도 아니고,
또 여자를 변호하거나 옹호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여자의 죄를 심판하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너희는 너희 자신이 받게 될 심판을 먼저 생각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사회 정의와 선의 실현을 뒤로 미루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의 사법제도와 사법 질서를 무시하신 것도 아닙니다.
범죄와 악은 막아야 하고, 선량한 시민들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한 번 죄를 지었다고 모두 사형에 처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사법제도는 죄인의 회개와 재범 방지에 초점을 맞춰서 운용되어야 합니다.

< 그런데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죄 있는 자들’이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죄 없는 척’을 하면서 먼저 돌을 던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짜 성인 성녀는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죄인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고,
용서하려고 노력하는데, 죄 있는 자들은 더 극성스럽게 앞장서서
죄와 악의 척결을 주장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서의 이야기 속에서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말로 자기 죄를 고백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도 죄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고백한
사람들이고,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라는 말은,
‘예수님만’ 죄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라는 말은, 붙잡혀 온 그 여자가
죄인으로서 심판과 처벌을 받으려고 서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어떤 식으로든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예수님만 남으신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처벌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용서받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0-11)”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상황을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고,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죄인일 뿐이다.” 라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죄인이라고 해서
여자의 죄가 대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가 크든지 작든지 간에 죄인이 죄인을 심판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여라.” 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마태 10,28).
< 만일에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만 두려워한다면, 위선자가 됩니다.
겉으로 꾸민 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가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도 죄가 있으니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라는 뜻이 결코 아니고, 당신은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너무 쉽게 용서하신 것은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그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현장에서 붙잡혀서 끌려오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세워져서 큰 곤욕을 치렀으니, 너무 쉽게 용서받은 것은 아닙니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무죄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인데,
또다시 죄를 짓게 된다면,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8,1-1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유대인들이 주님을 시험하려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십니까?”(4-5) 그들은 속임수를 가지고 이러한 말로 주님께 접근하고 있다. 이 말에는 교묘하게 함정을 만들어 예수님을 고소하여 없애려고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만일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으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가르치던 사랑을 잊었다고 비웃었을 것이고,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하셨으면, 예수님께 노여움을 드러내며, 율법과 반대되는 사악한 행동을 하는 자라고 당당하게 단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실지 미리 짐작한다는 것은 그들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눈먼 사악함이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의 길을 방해하여 세상에 빛을 비추지 못하게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6) 예수님은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신다. 아마 그 여자를 단죄하라고 죄인들인 그들이 그 여자를 데려 왔으나, ‘너희부터 단죄를 해야겠다,’고 하시는 것 같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강요한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여자를 돌로 쳐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그 손가락은 돌에다 율법의 십계명을 쓰신 분임을 알려주시고 계시다.

 

이 행동은 또한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예레 17,13)는 말씀과 같이, 지금 여자를 고발하는 자들과 죽을 운명으로 태어난 모든 이의 죄를 땅에 기록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하셨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의 이름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땅에 쓰일 때가 왔음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죄를 용서하러 오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 예수님은 그들의 함정을 아시고 그 함정에 빠지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양심은 있었다. 그들은 혼란에 빠져 서로 마주 보기도 불편한 듯,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모두 떠나갔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땅에 무엇을 쓰신 것은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자비의 눈길을 보내신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10) 그 여자는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11)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1)고 하신다. 그 여자를 단죄하는 사람들은 없어졌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이다. 주님께서는 그 여자를 그렇게 단죄하셨다. 그러나 그녀의 죄를 단죄하신 것이다.

 

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이웃의 잘못을 어떠한 눈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성급히 판단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과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5)는 말씀을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잘못한 자가 회개하여 잘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진정한 용서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다. 하느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는 완성되지 못한 존재이다. 항구하게 우리 자신을 정화해 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은혜를 청하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7)

-한상우신부-

얼마나 더
단죄를 해야
단죄의 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까.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묻고 또 묻는
사순입니다.

모질고 모진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드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모두가 측은하고
모두가 부족한
이들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좀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단죄와 사랑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단죄의 돌을
내려놓아야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용서와
십자가 사이에서
만나게되는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죄가 아닌 용서로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역설과 모순에서
벗어나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기를
기도드립니다.

함께 살아가는
서로의 의미가
단죄와 심판이 아닌

삶의 아름다움과
부끄럽지 않을
사랑을 배워나가는
은총의 순간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에서 우리는 매우 당혹스런 스캔들을 마주합니다. 독서는 누명을 쓴 무죄한 수산나의 이야기고, 복음은 현장에서 붙잡혔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여인 이야기지요.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다니 13,45).

수산나가 악하고 음흉한 두 원로의 거짓 고발로 처형장에 끌려가던 중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수산나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다니 13,2-3 참조)임을 하느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다니 13,46).

적어도 다니엘은 다른 사람들처럼 원로요 재판관인 고발자들의 신분만 믿고 맹목적으로 동조를 선택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그 순수한 마음 안에 있는 통찰과 의견의 영을 "깨우신" 것이지요. 이제는 다니엘에게 선택의 순간입니다. 혹시라도 그가 침묵하면 무죄한 이가 흘린 피의 책임이 그에게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다니 13,62).

사람들은 다니엘에게 귀기울였고, 다른 원로들은 하느님의 개입을 감지하고 다니엘에게 원로의 지위를 주어 신문을 허락합니다. 온 백성이 모두 하느님의 뜻에 합심한 결과로 정결한 수산나는 목숨을 건지게 되지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4-5)

아주 분위기가 험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렇잖아도 곤욕스런 여인을 성전 한복판에 세웁니다.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하라'고 침묵을 택하시면 그 여인이 죽고, '그래도 그러면 되겠냐'고 하시면 예수님이 올가미에 걸릴 겁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 8,7.9).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으로 답변하십니다. 율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인간 실존에 대한 자각을 "깨우신" 겁니다. 이에 나이 많은 이들부터 떠나가지요. 아마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기 허물을 기억하고 성찰하는 지혜가 건드려진 듯합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회오리처럼 몰아친 죽음의 기운이 물러가고 여인은 목숨을 구합니다. 예수님도 그녀를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이제부터!"

이것이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 ...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8-9)고,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 43,25)고 하셨지요. 주님의 관심사는 과거의 죄악과 그 상처가 아니라 이제부터 펼쳐질 새 삶입니다.

무죄한 수산나를 위해 손수 나서신 하느님께서는 이제 세상이 죄인이라고 심판한 여인에게서까지 단죄를 거두십니다. 이제는 "죄가 없으니 살려주겠다"가 아니라 "비록 죄인이어도 살려 주겠다"는 마음이십니다.

청년 다니엘은 하느님의 뜻을 증언하여 수산나를 살렸지요. 예수님은 당신만의 방식으로 여인을 살리십니다. 그분의 방식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이의 죄의 책임을 당신이 모조리 다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우리에게 남기신 당부란 "이제부터"라는 새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회개와 보속으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이 사순시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새 희망을 속삭여 주십니다. "죄가 없느냐? 살 것이다. 죄가 있느냐? 그래도 살 것이다. 내가 대신 죗값을 치렀으니 안심하여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죄인 여러분, 우리 모두 더 겸손하게 감사하며 "이제부터"의 삶을 살아갑시다.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용서하리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184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4월 3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내가 배우자를 이기고 싶다면 나의 온 생각은 그 목적을 위해 갖은 방법을 찾아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말싸움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하다 끝나버립니다. 돌을 들면 던질 곳만 찾게 되어있습니다. 이미 어떤 욕구가 지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욕구에 묶여 그 욕구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그런데 ‘욕구는 정체성에 지배당합니다.’ 내가 의사이면 병을 치료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자기를 아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욕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욕구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을 바꾸려면 정체성을 바꿔줘야 합니다.

      물론 새로운 정체성은 누군가의 피 흘림으로써만 얻어집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는 것은 새로 태어남이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시며, 한 간음한 여인의 죄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용서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주시기 위해 유다인들로부터 죽임을 감수하셔야 하셨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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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 올 것입니다그러나 살아가는 이유를 모른다면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독서에서 우리는 수산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원로 두 명은 죽을 이유가 없었습니다건강하였고존경받았고가진 것도 많았습니다그러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몰랐습니다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산나에게 누명을 씌었습니다몸은 건강했지만마음은 병들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몰랐던 원로들을 심판하셨습니다거짓과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들의 삶이 비록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수산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존경받는 원로들이 누명을 씌었고율법에 따라서 죽어야 했습니다그러나 수산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악의 유혹에 몸을 맡기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수산나의 마음을 아셨고다니엘을 통하여 수난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셨습니다수산나는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시대의 어둠을 온 몸으로 밝히는 사람이 있습니다비록 현실의 삶에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의 마음에 살아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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