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클라라

성녀 클라라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동정녀) C.A.라이나티 수녀 지음

Margaret K 2020. 3. 10. 04:05

성녀 클라라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동정녀)

 C.A.라이나티 수녀 지음

익산 성 글라라 수녀원 옮김

 

제 1장 글라라 디 파바로네 

 

당시의 아씨시 P 28

성녀 글라라는 1193년 아씨시의 온화한 정기를 머금고 성 루피노 광장의 저택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대의 아씨시는 바르바로사 황제가 일으킨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 받고 있던 때 였습니다.
16년 전에 이도시와 전 스뽈레또 공작령을 정복한 황제는 황제권과 봉건체제를 지속적으로 수호하기
위해 황족인 콘라드 공작을 로까 마조레에 주둔 시켰습니다.
높은 성벽과 날카로운 첨탑으로 무장하고, 깍아지른 둣 가파른 언덕위에 서 있는 성채는 마치
폭정의 화신인 양 아씨시와 그 주변을 엄하게 내려다보며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 가장 압제받는 농노와 일반 서민을 물로 이제 막 일어나기 시작한 중산 계급의
상인층은 봉건영주와 황제에 의한 억압의 상징이며 과다한 세금과 종군의 의무를 상기 시키는
성채를 불만에 가득한 얼굴로 올려다 보곤 하였습니다.  이 백성의 무리를 미노레라고 부르는 한편,
황제권의 비호를 받아 이들을 억압하는 영주귀족 마조레라고 불렀습니다.

그 무렵 시대적 흐름을 타고 도시국가 형태를 갖추어 가던 아씨시는 이를 제지당한 채 황제가
부과한 봉건체제의 의무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불만은 날로 더해갔습니다.  특히 당시에 활발해지기 시작 한 무력으로 재산가가 된
상인층의 태도는 나날이 방자하여, 새로운 조류에 의해 실세를 잃어가는 상류충에 맞서 그
예속관계로부터 차츰 벗어났습니다.  당시에 농노와 일반 백성 여시 불만과 적개심을 영주와
주인에게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불만의 씨앗인 굻주림으로 죽어간 가족들의 빈 자리를 바라보는
야위고 힘없는 얼굴들에게서 이 현상은 더 뚜렷했습니다.  거듭되는 전쟁이 잘 익은 과일과
추수를 앞둔 황금들판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드는 횡포가 예사롭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계충간의 암투 속에서 귀족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무장을 강화하는 동시에
자신들에게 도움과 피난처를 제공할 곳으로 아씨시와 등을 돌리고 있는 도시를 물색해 두어햐
했습니다.


파바로네가 P 29

성녀 글라라는 이러한 시대에 마조레, 즉 상류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 루피노 성당  근처에 큰 저택을 가지고 있던 오프레두초의 아들들이 아버지 파바로네와,
숙부 모날도와 쉬피오는 가문의 영예를 드높이는 기사들로서 시에서 가장 지체 높고 권세 당당한
귀족들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상당히 떨어진 로마극장 쪽에서부터 저택 정문에 이르도록
들려 오는 말발굽 소리며,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밤 늦도록 무용담을 나누며 집안을 울리는
무사들의 호탕한 웃음소리 등이 기사 가문의 맏딸인 글라라에게는 생소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함께 지체 높은 기사귀족의 생활 수준을 말하듯 트고 작은 집안 일로 하인들의 발걸음은
언제나 분주하게 오갔습니다.

귀족이며 부자인 파바로네는 고귀한 신분과 재산에다 애덕과 자비심을 겸비한 오르또라나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당시 많은 귀족가의 여주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귀부인 주위에도
몇몇 부녀들이 모여 작은 모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성 루피노 광장 건너편에 사는
겔푸초가 부녀들과의 우정은 특히 각별하였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파바로네가의 여주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긍을 전했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 주었으며 성지순례도 함께 하였는데
거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순례길도 없지 않았습니다.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발자취를 더듬는 로마 순례나 대천사 성 미카엘이 성전이 있는
가르가노 산 순례는 순ㄴ례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열악한 교통 수단과
형편없는 도로 상태는 자칫하다가 길을 잘못들어 늪이나 수렁에 빠져든는 일, 열병으로 생사를
헤매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도시간의 극심한 적대 관계는 아씨시를
조금만 벗어나 트라시메노 호수께로 방향을 잠았다 하면 무장한 뻬루지아 군의 검색에 걸려들기
마련이었습니다.  이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났나손 치더라도, 언제 어느 때 어둑한 숲길이나
바위 틈에서 산적의 무리가 달려들지 모른는 상황이어서 순례란 한 마디로 불확실하고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파바로네가 여주인의 깊은 신심은 로마와 가르가노 산 순례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마저 순례하여 주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까지 발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신심과 자선으로 유명한 이 귀부인이 온 아씨시이에 명망이 높고 주변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음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첫아기를 가지게 된 부인은 분만일이 가까워 올수록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움 역시 기도로 이겨 내리라 결심하고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부인은 성당으로 달려가 십자가 앞에 꿇어 오래 기도했습니다.  그 위기에 순간에 주님 손수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한 것입니다.
성당 십자가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던 어느 날,  "두려워 마오, 부인, 머지않아 온 세상을 환히
비출 빛을 아무 어려움 없이 낳게 될 것이오." 하는 음성으로 또렷이 들었습니다.
마음 속 깊숙이 새겨진 이 말씀을 부인은 결코 잊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약속된
빛의 아기로서 성장해가는 딸을  대할 때마다 부인의 마을에는 이 음성이 늘 새롭게 울려 왔습니다.
20여 년 후에 글라라의 딸이며 자신의 자매인 산 다미아노의 수녀들에게 반복하게 될 그 약속을
굳게 믿으녀 아기에게 빛을 상기하는 이름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파바로네경의 맏딸은
글라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 P 31

아기는 거룩한 어머니의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가정교육은 어려서 부터 깊은 신앙과
이웃사랑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데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의 기본교리와 기도도 가르쳤습니다.
아기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보다는 매일매일의 산 표양으로 더 많이 배웠습니다.
12세기 말엽의 아씨시는 사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즐비한 곳이라는 오명을 오랜 기간 벗지 못하고 비참과 곤궁의 시기을 겪고 있었습니다.  빈민가의 움막과 구석진 골목에서 굶주림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탄식 소리는 성 루피노 광장 곁의 저택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자비로운 오르폴라나 부인은 이들의 곤경을 덜어 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강구 하였고 소녀 글라라
역시 어머니의 모범을 따라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려고 애썻습니다.  가령 소녀는 자기 몫의 맛있는
음식을 가만히 남겨 두었다가 보나 디 젤푸초로 하여금 어려운 이웃에게 갖다 주게 하였습니다.
소녀는 또한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본받고자 하여서 이 역시 좋은 땅에 떨어진 이사인 양
백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주 어려서 부터 어머니에게서 들은 기도를 혼자 되뇌이는 소녀를
사람들을 종종 볼수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사용하던, 오늘날 묵주에 비길 수 있는 매듭끈을 아직
가지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기도를 헤아리는 데 공깃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와 지도 아래 성장해 갔습ㄴ디ㅏ.
몇 년 후에 보게 된 동생은 성 프란치스꼬가 지어 준 이름인 아녜스 자매, 아씨시의 성녀 아녜스로 더
많이 알려 졌지망, 어린 시절 집에서의 이름은 카타리나였습니다.
막내인 베아뜨리체가 태어나고 글라라의 나이 너댓 살 되던 해에 고향 아씨시는 큰 혼란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아씨시에 치솟는 불길 P 32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서거하자 세니가의 로타리오 백작이 1198년 1월 8일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인노첼시오 3세로 등극하였습니다.  새 교황이 무엇보다 먼저 원래 교황령에 속했던 스뽈레또
공작령의 탈환을 시도하크로 불리한 상황을 재빠리 간파한 콘라드 공작은 나르니에 와 있는
교황사절에게 영지를 반환하려고 같은 해 4월 아씨시를 총총히 떠나갔습니다.
공작의 퇴가은 백성들에게 일중의 폭동 신호와도 같았습니다.  서로 사전에 모의라도 한 듯 격노한
백성들은 일제히 몰려가서 성채를 쳐부수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막강한 황제군의
주둔지요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로까 마조레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황제권의 상징이던 성채를 무너뜨린 백성들은 시의 자립을 보장할 시의회를 구성하고 집정관을 선출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이 날뛰는 백성들은 황제군의 요새를 초토화한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자기 영ㅈ에게 맺힌 한마저 풀려고 했습니다.  영주들은 위험한 낌새를
눈치 채고 시내에 있는 저택을 떠나 시 외곽의 성채로 피신하여 그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지스렐리오 디 알베리코의 아들들, 제라도와 레오나르도, 그리고 포르테브라초가의
주인으로 있던 사소로소 성채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몬테모로 언덕과 뽀지오 산 다미아노에
있는 요환 마태오가의 성제가 피해를 당하고,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귀족이 함께 모여 대항하던
산 사비노 성탑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새가 불타고 그 과정에서 백송과 귀족 사이에 일어나 칼부림으로 이 혼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격노의 소용들이는 시내엥 있는 귀족들의 저택이라는 새로운 목표물로
휘몰아쳤습니다.  이  저택들은 대부분 무로로또 구역과 시내 중심가에 있었습니다.
아씨시 주민은 치솟는 불길과 전쟁의 아우성 가운데 12세기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지스텔리오가를 선두로 귀족들이 하나 둘 고향을 등지고 아씨시 주민이 가장 미워하는 도시
빠루지아를 향하여 떠난는것으로 13 세기의 새날이 밝아  왔습니다.  이 중에는 글라라의 소꿉동무인
필립빠의 아버지 레오나르도 디 지스렐리오도 끼어 있었습니다.
얼마후 백성들로 부터 저택이 파손당하거나 불타버려 재산 피해를 입은 기사들마저 빠루지아
진영으로 옮겨 가기 시작하여 파바로네가도 이에 합세하였습니다.


아씨시- 뻬루지아전쟁-P 34

뻬루지아가 망명해 온 귀족들의 재산 반환과 피해 보상을 아씨시에 요구하자 오랜 숙적인 두 도시 사이에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좋은 구실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발발한 전쟁은 1200년에서 1205년까지 계속되다가 잠시 휴전을 거쳐 1209년에야 끝나게 되었습니다.
모날도 숙부를 선두로 한 글라라의 가족도 아씨시의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 휘말려들어
뻬루지아 편에 서서 고향을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습니다.
글라라의 가족이 언급되는 경우 자주 숙부인 모날도가 가문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글라라의 할아버지인 오프레두초의 장자였거나 혹은 그의 과격한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파바로네 경은 이들과 행동을 같이하여서 다른 귀족들처럼 가족들을 얼마동안 뻬루지아로
피신시켰습니다. 그 시기는 아마 1202년에서 1205년 사이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간이 어느 정도였던 간에 열 살 남짓한 소녀가 주위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곳에서도 고향에서 처럼 필립빠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이 소꿉동무를 글라라는 훗날 산 다미아노에서 가난의 삶을 함께 나누는 첫 자매이며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또한 글라라의 가족에게 거처를 제공한 집에도 그 또래의 소녀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이 벤베누따로 후일
글라라의 발자취를 따르는 첫 자매가 되었습니다.
"소녀 글라라는 아주 공손하고 친절했으며, 그 겸손하고도 솔직한 태도를 접하노라면 그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여 계시는 느낌을 받았다"고 시성조사 과정에서 벤베누따 수녀는 증언하였습니다.
뻬루지아에서의 소녀 글라라를 두 친구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아씨시로 다시 귀향한 후에
소녀를 가까이 대하던 친척과 이웃, 그리고 아인들도 같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싹트는 성소 P35

하느님께서 한 영혼을 당신께로 이끄시는 과정을 부르심, 혹은 성소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부르심의 시작을 알아 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몹시 어려운 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주께서 한 영혼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그 순간을 꼬집어

말하기는 힘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나 다 확연히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시기에 많은 경우 당사자에게조차 성소는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성소를 이야기 할 때 또 다른 어려움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일반적으로 어느 한순간 갑자기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작용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차츰차츰 단계적으로 스며들어 온 존재가

완전히 거기에 젖어들어야 비로소 부르시는 음성이 또렷하고도 확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은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는 그 과정에서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부르심은 영혼을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기위해 세속을 떠남을 이야기할 때

성녀 글라라는 바로 이 회개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삶의 변화가 항상 외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특히 성녀 글라라처럼 하느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 본 적이 전혀 없던 영혼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영혼조차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께로 초대되면 외적 생활이 평소와 다름없더라도

내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즉 지금까지는 무심히 혹은 어떤 특정한 목적 아래 하던 행위들이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그 모두를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글라라에게 있어서 부르심의 순간이 언제였다고 단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어린 시절을

살펴보노라면, 하느님은 일찍부터 은밀하고도 독특한 방법으로 드러내 보이셨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은밀하고도 독특한 방법이라는 표현을 빌림은,  어려서부터 기도와 고신극기에 

남다른 열심을 보인 생애를 두고 하는 생각입니다.  어린 글라라는 오직 주님만을 기도와

보속의 삶에로 부름받았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부르심의 구체적인 실현방법은 성 프란치스코로 부터 비추임 받기까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습니다.

뻬루지아에서 귀향한 후에도 밖으로 드러난 생활은 여전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표양을 따라 할 수 있는 한 애긍과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자기 몫의 음식을 먹지 않고 가만히 남겨 두었다가 보나를 통하여 남몰래

가난한 이들에게 보냈으나 하인들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배워서 해 온 대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고통과 고독을 찾는 소녀 P 36

이외에도 또 다른 무엇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으로 소녀의 영혼 깊은 곳에 일고 있던 새로운
징후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시가에 그리스도께서는 흘려들일 수 없는 방법으로
소녀를 부르시어 당신을 따르는 어떤 특정한 길 초대하고 계셨던 듯합니다.  소녀의 삶은
언제부터인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받기를 원학 그 기회를에 찾는 나날이었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여, 구하오니 저에게 두 가지 은총을 들오 허락하소서, 그 하나는 저의 생전에
예수님 당신께서 수난 시간에 겪으신 모든 고통을 제 몸과 영혼이 가능한 한 전부 맛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토록 고통의 쓴 잔을 비우시기까지 우리 죄인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모두 느끼는 것입니다." 라고 성 프란치스꼬는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주니을 열려히 사랑한 성인이 그분을 더 사랑하고자 간곡히 드린 이러한 기도가 온갖 것을 다
청하면서 고통만은 피해가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생소하기만 합니다.
우리와 꼭같은 피와 살을 가지시고도 자원하여 사지를 십자가에 못 박히우시고 창검에 심장을
뜷리우기까지 한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성인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에 대한 성이늬 감사와 사랑은 이토록 컸습니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말한 대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로 변화되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분의 고통을 사랑하여 온 마음으로 갈망하고 이를 통한
그 분과의 결합을 추구합니다.   고통을 사랑하는 그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척도는 바로 고통에 대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응 그분 삶의 연장이요 완성으로서 그 해위는 그분 행위의 계속이어야
하며, 그는 오늘을 사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고통을 받으신 그분과
꼭같은 목적을 가지고 삶으로써 그분의 고통을 재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분은 위하여 받는 고통은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지체 높은 가문에 재산과 아리따운 외모까지도 두루 갖춘 이 소녀가 -- 사실 글라라는 1253년
에 이르기까지 라니에리 디 베르나르도의 추억 속에 매우 아름다운 처녀로 남아 있었습니다. ----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수반되든 고통에 족하지 않고 더 큰 고통을 목말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부께 영광드릴 일념에서 아무도 모르게 고복을 바쳐 입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최소한의 음식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아울러 그 같은 보속 생활의 지탱이 되는 기도에로 더욱 열심히 자주 숨어 들었습니다.


주변에는 평범한 일상 생황이 어어져 갔지만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소녀에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고 있는 은밀한 실체에 자리를 내어 주면 내어줄수록 자기를 두르고 있는

실생활의 빛은 점점 바래어 갔습니다.  성소가 뚜렷한 형태를 드로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매순간 

온전히 응답하는 그 때, 그녀는 현실을 보다 활기있고 고운 빛으로 되찾게 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를 수정보다도 더 투명한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가지에만 몰두되어 있는 그 무렵의 글라라에게 다른 관심의 대상은 물론 생각의 방향을

돌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성 루피노 광장에 모여 시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군중도, 성 루피노 성당에서 사열식을 받는 늠름한 기사들도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집과 인접해 있는 성 루피노 성당과 광장은 젊은 기사와 관리며 온 시민의 집회 장소로서 시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저택의 창가를 서성이는 글라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외딴 방의 고요와 고독만을 찾으며 누구를 보려고 하거나, 또 누구에게 보여지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글라라의 태도는 사춘기 소녀의 변덕이나 우울 증세가 아니라 모든 성소에 동반되기 

마련인 고독에의 갈구였습니다. 이는 가없는 고요에의 갈증이었습니다.
이 고요 가운데서만이 영혼은 존재 깊은 곳으로 부터 울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보다 분명하게
알아  듣고 이해하며 그 감미로움에 젖어들 수 있었습니다.
글라라에게 드러난 모든 현상들이 이 경우였음이 틀림없는 증거는, 자기 기분에 좌우되어 말하거나
침묵하는 변덕을 보이는 법이 결코 없이 소녀의 일상적인 태도나,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주 자연스러웠다는 점입니다.  소녀는 스스럼없이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이야기의 방향이 언제가 하느님과 천상사정으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생각하고 있느 것을 말하기 마련이니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해야겠지요.


글라라와 가까이 지내던 젤푸초가의 두 딸, 보나와 빠치피까라든지, 파바로네가를 자주 드나들던
우꼴리노 디 삐에뜨로 자아르도네나 라니에리 디 베르나르도 같은 귀족들은 소녀의 기품있고
온화한 태도와 입가를 떠나지 않던 잔잔한 미소며 하느님께로만 향하던 담화들에 대해 감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글라라의 평판은 이들을 통해서도 저택의 담장을 넘어 온 아씨시 시가로
퍼져나갔습니다.

물론 아씨시 시내에서 파바로네가 장녀의 소문이 지금껏 생소하지는 않았습니다.
보나를 통하여 글라라의 사랑과 도움을 체험한 가난한 오두막마다 퍼진 소문을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통해서 언제나 정결의 표시가 되어 온 그 오롯하고 삼가는 태도를 흠모하는
수많은 젊음이들이 구혼의 희망에 불타 일없이 광장을 오가며 저택의 창을 쳐다보았으나
그 모두는 헛일이었습니다.  그녀에게 결혼은 전혀 관심 밖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거부

글라라에게 결혼에 대해서 제일 처음 말문을 연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보나를 산티아고로
성지 순례를 보낼 만큼 열심한 신앙과 매사에 자비롭고 겸양한 딸의 태도는 아버지가 보기에도
매우 흡족하고 칭찬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또래들이 흔히 갖는 몸치장에는
추호의 흥미도 보이지 않는 채, 모든 점에 있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에 온 관심을 쏟고 그분께
관해서밖에 이야기하지 않는 열 일곱의 과년한 처녀인 딸의 행동거지며  태도는 아버지에게
여간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좋은 가문에다 많은 지참금, 빼어난 미모와 착한 마음씨의 딸은 아버지가 보기에 어떤 권세가의
상대자로도 모자라지 않는 신부감이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는 딸의 의중을 조용히 타진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딸은 결혼을 단연코 거부하였습니다.  결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여 주님을 위하여 동정을 지킬 결심을 단호하게 밝혔습니다.  이에 상반되는 어느 누구의
권유도 돌이킬 수 없으리만큼 그 결심은 너무도 확고했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가정의 평화를 위해 라니에리 디 베르나르도를 비롯한 가까운 친지들이 원만한
해결을 중재하려고 부모에 대한 순종과 효도를 상기시키며 설득에 나섰지만 모두가 헛수고에
그쳤습니다.  이들 모두는, 결혼을 완강히 거부하며 세속의 헛된 기쁨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름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설명하는 소녀의 열성에 감탄하여 물러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말머리를 돌려 1210년대의 글라라 주변을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거의 3년 가까이나
아씨시 시내에는 호상 삐에뜨르 베르나르도네의 아들, 프란치스꼬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화제거리가
없는 듯 했습니다.  거창한 기사의 의장을 갖추어 그가 아뿔리아 전장으로 떠너던 날은 온 시내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몇몇 사람만이 성인으로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돌았다고 말하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제2장 부르심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 P 45

아씨시의 성 프라치꼬는 너무 잘 알려져서 그 생애의 큰 사건들만을 짧게 나열한대도 이 장이

매우 방대해질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서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의 회개, 참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기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여 온  아씨시를 뒤끓게 한 사건이 소녀 글라라에게 끼친 영향만을

언급하겠습니다.

아씨시 젊은이들의 왕이며 우상으로 군림하던 프란치스꼬가 지극히 높으신 가난 귀부인의 기사로 

변신하는 영적 모험은 대략 1206년에서 1209년, 글라라의 나이 13세에서 16세때인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프란치스코의 회개 과정에서 마치 이정표와도 같이 동반된 의미있는 사건들로 인하여 그의

영적 위기의 갈림길은 온 아씨시와 더불어 글라라에게도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 그 이전에도 온 시민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바는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꼬 스스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 자기를 드러내는 데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타고난 성품임과 동시에 부모로부터 조장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자신의 프랑스 여행중에 태어나 세례 때 이미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장남을 

희귀한 이름 프란치스꼬로 바꿀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프란치스꼬는 아버지로 부터 예리한 통찰력과 뛰어난 활동 수완을, 어머니로부터는 

기사도에 입각한 명예심과 대범한 아량을  타고나 시의 젊은이들 가운데 단연 두각을 드러내었습니다

프란치스꼬는 오로지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값비싼 비단에다 허름한 무명천을 댄 의복을

맞춰 입는가 하면 자기 또래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여 우월감을 과시하려고 모든 잔치와 술자석의

비용을 도맡아 부담하였습니다.  이렇듯 호화로운 여흥에 매료된 아들의 온갖 허영과 낭비를

묵인하는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를 두고 아씨시 시가에는 수근 거리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이런 행각에도 싫증을 느꼈던지 그는 돌연 무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창한 기사의 의장을 갖춘 프란치스꼬가 어느 화창한 날 산 조르지오

성문을 지나 로마 가도로 말을 몰았습니다.  아뿔리아 전투에 참전하여 기사가 되어 둘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그에게 용맹한 기사의 작위를 안겨 줄 승리는 이미 자기 차지인 듯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며칠 후 괴상한 표정을 짓고 풀이 다 죽어 말고삐 쥔 손을 축 늘어뜨린 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용감한 기사의 화려한 승리에의 영광은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회개 P 47

귀향후, 그의 기이한 태도와 행동을 이루 다 셀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소음을 피해 고요하고

외진 곳을 찾아 다니며 하루 종일 끼니도 잊은 채 넓은 들판을 방황하였습니다.  고독한 산보 중에

들판 곳곳에서 마주치는 작은 성소에서 기도하는 버릇도 생겨 났습니다.

어느 날부터 프란치스꼬가 아예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산 다미아노 성당 가까운 동굴에서 지낸다는 

소문이 시내에 퍼졌습니다.  어떤 날에는 다 찢어진 옷차림에 내적 동요가 뚜렷한 표정으로 

산 죠르지오 성당 앞 네거리를 지나는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로

취급하여 놀리도 조롱하였으며, 귀도 주교의 법정에서 입고 있던 옷마저 다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 줄 때 온 아씨시는 증인으로 둘러서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글라라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도 "주교님, 아버지의 돈뿐만 아니라 제가 입고

있는 옷도 모두 아버지에게 돌려 주겠습니다."라고 했다던 프란치스꼬의 대답을 자주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야말로 그리스도께 거침없이 나아가게 하는 완전한 가난의 길입니다.  가난하면,

현재 걸치고 있는 옷마저 자기 것이 아닐 정도로 완전히 가난하면 -- 프란치스꼬처럼 입고 있는 

옷마저 자기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을 청하는 사람에게 줄 때까지, 혹은 자기보다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당분간 사용할 뿐이라면 --- 하느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될

걱정이라고는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지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주님을 신뢰하면서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 위해 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 입니다.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두가 여러분에게

필요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나머지도 다 곁들여 받게 됩니다."

또 이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전대에 금도 은도 동전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때에

자루도 신발도 지팡이도 속옷도 두벌씩 지니지 마시오.   사실  일꾼은 마땅히 제 양식을 얻을 

만합니다."

프란치스꼬는 복음 말씀 그대로 신고 있던 신발도 벗고, 지팡이를 버리고, 가죽 혁대를 동아줄과

바꾸었습니다.  그는 장차 작은 형제들의 수도복이 될 옷차림으로 고향에 들어가 설교하였습니다.


설교하는 프란치스코 P 49

때는 1209년 봄이었습니다.  전쟁의 참화로 지칠 대로 지친 도시에 프란치스꼬의 말은 흡사 심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타오르는 불과 같았으며, 듣는 모든이의 마음을 감탄으로 채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시작하는 설교는 온 성당을 울리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생명의 숨결마냥 부드럽게 번져 갔습니다.

그는 성 루피노 성당에서도 설교하였습니다. 설교 내용은 아주 단순한 것으로 주로 성교회의 

기본 교의, 사말(죽음, 심판, 천국, 지옥), 복음에 관해 소박하게 말했습니다.   타는 듯한 깊은 영성의

불길로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또 가난에 대하여서 설교하였습니다.  가난은 하느님 안에서 모두 되돌려 받기 위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론에 그치지 않음을 청중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씨시 굴지의 부잣집 맏아들이 북음을 그대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던 그 순간의

증인들이 바로 설교를 듣는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글라라는 어쩌면 

자기에게도 프란치스꼬와 같이 남김없이 버리는 온전한 봉헌을 하느님께서 원하시지는 않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프란치스꼬를 중심으로 모여든 열두 명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파바로네가의 맏딸도

익히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품삯도 요구하는 법 없이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동냥을 다녔습니다.

힘든 노동의 이유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이며 그들의 긷는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이 기도야말로 

포기한 자기를 되찾음 없이 마음을 드높여 그분으로 만족하며 하느님을 높이 기려 칭송할 뿐 다른

부탁은 입술에 올리지 않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온갖 피조물의 천만가지  음성들을 한데

아우르는 유일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맑은 창공을 나르는 종달새의 지저귐과 신록을 울리는 매미

울음이 각각 다른 음색일지라도, 이들 모두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을 좇아 서로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하느님 찬미라는 인간 본연의 지고한 성무에 한 목소리로 동참합임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겸손되이 부탁할 뿐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는 이 작은 무리를 글라라는

마음으로 부터 깊이 동정하였습니다.  글라라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보나 디 첼푸초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생겼습니다.  아씨시 외곽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성당을 수리하는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이 적어도 하루에 한 끼만이라도 따뜻한 음식을 마련 할 수 있도록 얼마간의 돈을 전달하는 

일이 그겄이었습니다.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가 파바로네 가문에서 자주 화젯거리로 등장하는 충분한 이유가

생겼으니, 1210년에 쉬피오 삼촌의 아들 루피노, 즉 글라라의 사촌이 귀족 자제로서 누리는 부귀영화

를 버리고 형제들의 누더기 수도복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난의 길섶에서 P 51

때는 1209년 봄이었습니다.  전쟁의 참화로 지칠 대로 지친 도시에 프란치스꼬의 말은 흡사 심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타오르는 불과 같았으며, 듣는 모든이의 마음을 감탄으로 채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시작하는 설교는 온 성당을 울리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생명의 숨결마냥 부드럽게 번져 갔습니다.

그는 성 루피노 성당에서도 설교하였습니다. 설교 내용은 아주 단순한 것으로 주로 성교회의 

기본 교의, 사말(죽음, 심판, 천국, 지옥), 복음에 관해 소박하게 말했습니다.   타는 듯한 깊은 영성의

불길로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또 가난에 대하여서 설교하였습니다.  가난은 하느님 안에서 모두 되돌려 받기 위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론에 그치지 않음을 청중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씨시 굴지의 부잣집 맏아들이 북음을 그대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던 그 순간의

증인들이 바로 설교를 듣는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글라라는 어쩌면 

자기에게도 프란치스꼬와 같이 남김없이 버리는 온전한 봉헌을 하느님께서 원하시지는 않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프란치스꼬를 중심으로 모여든 열두 명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파바로네가의 맏딸도

익히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품삯도 요구하는 법 없이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동냥을 다녔습니다.

힘든 노동의 이유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이며 그들의 긷는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이 기도야말로 

포기한 자기를 되찾음 없이 마음을 드높여 그분으로 만족하며 하느님을 높이 기려 칭송할 뿐 다른

부탁은 입술에 올리지 않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온갖 피조물의 천만가지  음성들을 한데

아우르는 유일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맑은 창공을 나르는 종달새의 지저귐과 신록을 울리는 매미

울음이 각각 다른 음색일지라도, 이들 모두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을 좇아 서로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하느님 찬미라는 인간 본연의 지고한 성무에 한 목소리로 동참합임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겸손되이 부탁할 뿐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는 이 작은 무리를 글라라는

마음으로 부터 깊이 동정하였습니다.  글라라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보나 디 첼푸초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생겼습니다.  아씨시 외곽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성당을 수리하는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이 적어도 하루에 한 끼만이라도 따뜻한 음식을 마련 할 수 있도록 얼마간의 돈을 전달하는 

일이 그겄이었습니다.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가 파바로네 가문에서 자주 화젯거리로 등장하는 충분한 이유가

생겼으니, 1210년에 쉬피오 삼촌의 아들 루피노, 즉 글라라의 사촌이 귀족 자제로서 누리는 부귀영화

를 버리고 형제들의 누더기 수도복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와의 만남 P 52

때는 1209년 봄이었습니다.  전쟁의 참화로 지칠 대로 지친 도시에 프란치스꼬의 말은 흡사 심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타오르는 불과 같았으며, 듣는 모든이의 마음을 감탄으로 채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시작하는 설교는 온 성당을 울리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생명의 숨결마냥 부드럽게 번져 갔습니다.

그는 성 루피노 성당에서도 설교하였습니다. 설교 내용은 아주 단순한 것으로 주로 성교회의 

기본 교의, 사말(죽음, 심판, 천국, 지옥), 복음에 관해 소박하게 말했습니다.   타는 듯한 깊은 영성의

불길로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또 가난에 대하여서 설교하였습니다.  가난은 하느님 안에서 모두 되돌려 받기 위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론에 그치지 않음을 청중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씨시 굴지의 부잣집 맏아들이 북음을 그대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던 그 순간의

증인들이 바로 설교를 듣는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글라라는 어쩌면 

자기에게도 프란치스꼬와 같이 남김없이 버리는 온전한 봉헌을 하느님께서 원하시지는 않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프란치스꼬를 중심으로 모여든 열두 명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파바로네가의 맏딸도

익히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품삯도 요구하는 법 없이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동냥을 다녔습니다.

힘든 노동의 이유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이며 그들의 긷는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이 기도야말로 

포기한 자기를 되찾음 없이 마음을 드높여 그분으로 만족하며 하느님을 높이 기려 칭송할 뿐 다른

부탁은 입술에 올리지 않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온갖 피조물의 천만가지  음성들을 한데

아우르는 유일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맑은 창공을 나르는 종달새의 지저귐과 신록을 울리는 매미

울음이 각각 다른 음색일지라도, 이들 모두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을 좇아 서로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하느님 찬미라는 인간 본연의 지고한 성무에 한 목소리로 동참합임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겸손되이 부탁할 뿐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는 이 작은 무리를 글라라는

마음으로 부터 깊이 동정하였습니다.  글라라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보나 디 첼푸초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생겼습니다.  아씨시 외곽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성당을 수리하는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이 적어도 하루에 한 끼만이라도 따뜻한 음식을 마련 할 수 있도록 얼마간의 돈을 전달하는 

일이 그겄이었습니다.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가 파바로네 가문에서 자주 화젯거리로 등장하는 충분한 이유가

생겼으니, 1210년에 쉬피오 삼촌의 아들 루피노, 즉 글라라의 사촌이 귀족 자제로서 누리는 부귀영화

를 버리고 형제들의 누더기 수도복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착하시고 어지시며 좋으신 분

선과 사랑의 샘이신 창조주요 구세주이시며

참도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그 홀로 자비로우시며 다정하신 분

정의와 진실의 한 분이신 주님이시며

인자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그 홀로 거룩하시며 단순하신 분

결백과 순결의 한 분이신 주님이시며

감미로우신 하는님 외이네느 다른 아무것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회개한 속죄자의

모든 죄 씻어진 기쁨을 함께 누리는

모든 성도들과 의인들과 성인들에게

충만한 은총과 영과의 샘이시여

조촐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듣지도 찾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숨쉬지도 만족하지도

기뻐하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방해하지 못하기를!

그분과 우리 사이 가로막지 못하기를!

그분께 한 순간도 떼어놓지 못하기를!

삼위이시고 일체이시며 지존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을

시작나 마침도 변함도 없이 영원하신

만물의 창조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헤아릴 수도 이해마저 할 수 없이

존재하시어 우리를 기르시는 하느님을

당신을 믿으며 희망하고 사랑하며

따르는 영혼들의 구원자 하느님을

보고 듣고 만질 수도 없이 숨어계시나

우리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님을

배은망덕하고 비참하여 부당한 우리가

찬미 흠숭드리기 충분하지 못하고

맞갖은 사랑으로 뫼시지 못하지만

지금부터 영원까지 온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매일 매시간 그리고 시간 밖의

끝남없는 지속 속에서 노래항니

우리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시여

겸손되이 빋어 섬기며 마음 속 깊이

존경과 감사를 세세에 드리게 하소서


거룩하신 주님

당신만이 기적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시나이다

하늘과 땅의 임금님

당신만이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나이다

삼위이시고 하나이신 주님이시여

당신만이 모든 신들의 하느님이시나이다

참된 용사이시고 어지신 아버지

당신만이 온갖 선 지고한 선 선 자체이시나이다

영원하신 주님

당신만이 가없이 크시오니이다

감미로우신 주님

주님만이 우리 즐거움이시며 기쁨이시나이다

너그러우신 주님

당신만이 겸손하시나이다

인내와 자비의 주님

당신만이 고요와 안식이시나이다

정의와 중용의 주님

당신만이 지배이시나이다

주님 당신만이 우리를 흡족케 하는 충만이시니

우리가 편히 쉴 샘터시나이다

주님 당신만이 파수꾼 방어자이시니

우리 힘 우리의 보루시나이다

주니 당신만이 아름다우시니

우리 희망 우리 믿음 우리의 사랑이시나이다

주님 당신만이 정든 님이시니

우리 마음의 임자이시나이다

주님 당신만이 살아계신 참 생명이시니

우리 생명의 하느님 영원 구세주시니이다


이러한 표현은 어떤 개념의 지루한 나열이라기보다는 무심하신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인간이

다 표현치 못하는 마을과 정서를 드러내는 작은 몸짓일 뿐입니다.  이때 인간의 넘치는 마음은

표현이 가능한 인간적 언어를 다 동원해도 부족할 듯 느껴지고 오로지 깊은 침묵의 흠숭으로 

만족을 얻을 따름입니다.

성 프란치스꼬는 하느님에 대하여 이와같이 글라라에게 이야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영원한

기쁨에로 그녀의 시야가 열리면서 세속의 부귀 영화가 헛됨을 더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영원한 기쁨에 대한 그리움에서 천상 혼인잔치를 거룩한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습니다.

이는 성 프란치스꼬의 말씀으로 글라라가 깨우친 온갖 선 지고한 선 선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사랑의 샘이신 하는님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마치 캄캄한 방에서 갑자기 밝은 대로 나오면 눈이 부셔서 항상 대하는 사물도 제대로 분간 못하듯,

하니님께 대한 인식을 글라라 하여금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고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물정에 점점 더 어두어지고 주위의 모든 사물은 빛을 바래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인도 P 56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꼬와 소녀의 만남은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 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자신을 그분의 계획대로 인도할 수 있도록 소녀는 모든 사정을 온전히 그에게 맡기고 순명하였습니다


     "온전히 착하시고 어지시며 좋으신 분

      선과 사랑의 샘이신 창조주요 구세주이시며

      참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듣지고 찾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숨 쉬지도 만족하지도

      기뻐하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맙시다"하고 그는 이야기 했습니다

.

이 외의 다른 말이 글라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초가을의 신선한 공기와 창공을

나는 철새들의 지저귐도, 한겨울 수바시오의 가파른 언덕에서 몰아치는 눈보라도, 같은 음성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1212년의 봄이 왔습니다.  교회 전례의 리듬에 발맞추어 3월이 엄숙한 

사순절을 데리고 왔습니다.  삼월 열 여드렛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리는 성주간의 시작인

성지주일을 며칠 남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날 성지주일에, 부활서야에 세례받을 예비자들에게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인의

기본 윤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 날을 택하여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 자신을 버리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부터 기쁨이  넘쳐날 것이며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는

그리스도의 언약이 기본 철칙으로 반드시 이 포기를 뒤따름을 글라라는 보여 줄 것입니다.


결심 P 61

마지막 만남에서 성인은 집을 나오려는 글라라에게 이러줄 당부를 끝냈습니다.

소녀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 성지주일에도 특별히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친지들과

함께 성 루피노 서당의 성지가지 축성예절에 참여할 터입니다.

그러나 성 월요일이 시작되는 한밤중에 소녀는 아무도 몰래 집을 나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해

줄 성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이 있는 뽀르찌웅꿀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성당으로 달려 갈 것입니다.

성지주일  --  성주간의 비통이 있기 전 마지막 축제날.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가시자 군중은 빨마가지를 흔들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환호하며 경배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머지 않은 당신의 때를, 그 고통의 시간을 생각하시며 마음 속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 영혼이 몹시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저를 구원

하소서.'  할까요?  아니, 저는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성지주일은 수세기를 두고 축일의 본질에 맞갖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축제적 분위기를 간직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 날은 다가오는 시간을 깊은 묵사옥 쓰라린 마음으로 직시함이 더 

어울립니다.  이날은 우리 안에 어떤 의미의 슬픔이 마음 깊은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날 입니다.

어쩌면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통곡을 삼키게 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해갈되는 그러한 아픔이 마을을 가득 채우는 날입니다.

성 루피노 성당 안은 장미창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봄빛이며, 햇살을 받아 더한층 빛나는 화려한

옷과 보석, 귀도 주교가 나누어 주는 올리브나무 가지의 부딪는 소리들로 완연한 축제 분위기

였습니다.  특별히 성당 한 켠, 색색의 비단옷으로 갖은 치장을 다한 귀족 집안 부녀들로 말미암아

축제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는 듯하였습니다.  이제 이들이 주교에게 나아가 성지가지를 받아

오기 시작합니다.  글라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글라라는 자기 자리에 꿇어앉은 채 움직일

줄을 모릅니다.  주위에 모든 눈이 재촉이라도 하듯 소녀에게로 향했습니다. 

왜 움직이지 않을까요?  그토록 깊이 기도하고 있을까요?  자기만을 주시하는 듯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을 지나갈 용기가 나지 않는 걸까요?  성당 안의 모두가 글라라를 바라보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마냥 귀도 주교가 제대 난간에서

내려와 소녀에게로 다가가더니 성지가지를 거네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 순간 글라라는 마음으로 "이제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영광되게 하소서."

라는 말을 끝냈습니다.  


부르심에의 응답 P 63

마지막 만남에서 성인은 집을 나오려는 글라라에게 이러줄 당부를 끝냈습니다.

소녀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 성지주일에도 특별히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친지들과

함께 성 루피노 서당의 성지가지 축성예절에 참여할 터입니다.

그러나 성 월요일이 시작되는 한밤중에 소녀는 아무도 몰래 집을 나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해

줄 성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이 있는 뽀르찌웅꿀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성당으로 달려 갈 것입니다.

성지주일  --  성주간의 비통이 있기 전 마지막 축제날.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가시자 군중은 빨마가지를 흔들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환호하며 경배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머지 않은 당신의 때를, 그 고통의 시간을 생각하시며 마음 속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 영혼이 몹시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저를 구원

하소서.'  할까요?  아니, 저는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성지주일은 수세기를 두고 축일의 본질에 맞갖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축제적 분위기를 간직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 날은 다가오는 시간을 깊은 묵사옥 쓰라린 마음으로 직시함이 더 

어울립니다.  이날은 우리 안에 어떤 의미의 슬픔이 마음 깊은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날 입니다.

어쩌면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통곡을 삼키게 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해갈되는 그러한 아픔이 마을을 가득 채우는 날입니다.

성 루피노 성당 안은 장미창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봄빛이며, 햇살을 받아 더한층 빛나는 화려한

옷과 보석, 귀도 주교가 나누어 주는 올리브나무 가지의 부딪는 소리들로 완연한 축제 분위기

였습니다.  특별히 성당 한 켠, 색색의 비단옷으로 갖은 치장을 다한 귀족 집안 부녀들로 말미암아

축제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는 듯하였습니다.  이제 이들이 주교에게 나아가 성지가지를 받아

오기 시작합니다.  글라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글라라는 자기 자리에 꿇어앉은 채 움직일

줄을 모릅니다.  주위에 모든 눈이 재촉이라도 하듯 소녀에게로 향했습니다. 

왜 움직이지 않을까요?  그토록 깊이 기도하고 있을까요?  자기만을 주시하는 듯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을 지나갈 용기가 나지 않는 걸까요?  성당 안의 모두가 글라라를 바라보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마냥 귀도 주교가 제대 난간에서

내려와 소녀에게로 다가가더니 성지가지를 거네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 순간 글라라는 마음으로 "이제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영광되게 하소서."

라는 말을 끝냈습니다.  

 

제 3장 산 다미아노

 

뽀르찌울꿀라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P66

저기 골짜기 아래 관목이 빽빽이 들어선 숲속의 뽀리지웅꿀라 성당에서는 성 프란치소꼬가

형제들과 함께 글라라의 도착을 기다리며 기도로 밝히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발자욱 소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숲속 오솔길에서 기척이 있자마자 그들은

성당에서 나와 손에손에 횃불을 들고 소녀를 장엄하게 성당 안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제대 앞에 무릎을 끟은 글라라는 자기를 에워싼 형제들 가운데서 성 프란치스꼬의

손길 아래 자신을 온전히 하는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 봉헌의 표징으로 소녀의 아름다운 머리채가

잘라져 나갔습니다.

글라라는 이제 그 어떤 외적인 것과도 인연을 끊고 온전히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히 그녀를 세속과 멀어지게 하는 행위 하나하나는 곧바로 참되고 영원한 행복의 

언약입니다.  이로써 그녀는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동정녀의 아들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누이요 정배이며 어머니가 되어 마치 이른 봄날 대자연이 터트리는 환호성 마냥, 한

영혼을 온전히 소유하신 주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서 그분만이 주실 수 있고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새로운 기쁨을 옷 입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는 한순간에 이루어지셨습니다.  천사들의 모후이신 동정 성모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께

"예" 하고 말씀드린 그 순간에 말입니다.

평생을 두고 한 지금 이 응답은 삶의 매 순간에 메아리 칠 것입니다.

예식 후 성 프란치스꼬는 아씨시 외곽에 있는 성 바오로 대수도원으로 소녀를 데리고 갔습니다.

오늘날의 바스타아 마을 부근에 위치한 이 베네딕도회 수녀원의 보호아래 그녀를 두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는 글라라가 잠시나마 성 베네딕도의 회칙대로 수도 생활을 해보기로 원해서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한밤중에 뽀르찌웅꿀라로 도망나와 성 프란치소꼬의 주례로 자신을 천상 아버지께

온전히 봉헌한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영적 딸이 되기를 원했다면 그렇게 비밀히

집을 나올 필요없이 바로 베네딕도회의 한 수녀원을 찾아가 규정된 법규와 회칙에 따라 기존의 

수도 생활을 하면 될터였습니다.

그러나 글라라는 성 베네딕도와 성녀 스콜라스티까의 영적 딸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그 밤의 

봉헌은 어떤 특정한 수도 규칙을 받아 들이은 서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마저 조건이나 전제가 될

수 없도록, 그냥 단순한 하느님께 자기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 홀로 아무 부담도 없게 하는 가난과,

오로지 하느님께만 마음이 향하게 하는 정결과, 가난이 물질로 부터 자유를 주듯 자신으로부터

이탈케 하는 순명 안에서 옆을 쳐다보거나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이 때 주님께 드린 응답은 특정한 규칙의 필요성조차

구속이라 여겨질 정도로 완전무결한 제물이었습니다.



가문의 방문 P68

글라라가 자기 성소를 확신하면서도 베네딕도회 수녀원에 잠시 머물기로 한 것은 가문에서 있을

벗한 소동을 예견한 하느님의 사람이 내린 현명한 조처에 동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맏딸의 야반도주를 알게 된 파바로네가의 어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곁문을 열고 나간 흔적을 발견한 집안 사람들은 연약한 소녀 혼자 그 힘든 작업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였습니다.  거처가 확인되자마자 무단 가출한 소녀를 기어코 데려오고야 말리라고

벼르며 성 바오로 대수도원으로 몰려갔습니다.

물론 이 수녀원도 다른 모든 수도원이나 성당 등의 성역과 마찬가지고 보호권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성역으로 피난해 온 모두는 이 권한에 의해 교회의 보호를 받고, 만일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

가해자는 교회로부터 파문의 벌을 각오해야 하는 규정입니다.  그러므로 소녀가 수녀원을 강제로 

떠나야 할 사태에 이르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교회가 파문의 벌을 내릴수 없는 형태의 폭력이

있었습니다.  이 폭력이야말로 외부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혹심하게 피해자의 영혼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파바로네가의 어른들이 집으로 돌아 가자며 며칠을 두고 소녀를 종용할 때 바로 이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먼저 어른들은 집에서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보낸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시키고 마음만 있으면

자기 것이 될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그려 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배은망덕한 처사로 당하는

친지들의 괴로움을 열거하고도 부족해서 화를 내고 협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고통의 며칠을 보낸 후, 마침내 친지들의 갖은 수단을 한순간에 그만두게 하는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도원 성당 제대로 나아가서 온 힘의 원천이기라도 하듯, 아울러 이 괴로운 투쟁의

방패인 양 제대포를 움켜 쥐고, 오직 그리스도 한분께 속한 표지로 삭발한 맨머리를 보이기위해

머리수건을 풀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속이 말하는 아름다운 처녀가 아닙니다.  아씨시에서

제일 가는 명문가의 맏딸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말하는 인간적 행복과는 거리가 먼 그리스도

한분께만 모든 희망을 둡니다."라고 선포하는 듯한 대담함 행동 앞에 칮지들은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성 프란치스꼬와 필립보와 베르나르도 형제는 친지들이 할 수 없던 일, 즉 글라라를 그

수도원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친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당분간의 체류는 가능했지만 이 수녀원에

입회 할 마음이 없는 소녀를 더는 그속에 머무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수녀원 측에서

그 며칠간의 소동을 보고 떠나가 주기를 부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글라라를 받아 준 곳은 평화의 거룩한 천사 수녀원이었습니다.  수바시오 산 남쪽 언덕 아래 

옛 성문 밖 스펠로 가도에 있는 수녀원은 당시에 흔하던 독수 은둔 형태의 수녀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많던 은둔소의 자재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 보속 수녀원은 평화의 천사에게 봉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언니를 뒤따른 아녜스 P70

글라라가 집을 나간 지 열 엿새가 되던 날입니다.  어린 동생 아네스가 집을 나와 언니가 있는

평화의 거룩한 천사 수녀원으로 왔습니다.  후에 로마의 동정 순교자 아네스의 이름을 따라

성녀로 추앙받게 될 이 소녀는 넘치는 기쁨으로 동생을 맞는 언니에게 주님만을 섬기기 위해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보다 이 어린 동생을 사랑하여 주께서 자기와 같은 길로 불러

주시기를 항상 기도해 온 글라라는 친동기를 영적 자매로 허락하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따름이었습니다.  벅찬 감격과 기쁨으로 나눈 평화의 인사로써 아네스는 그리스도의 가난 안에서

글라라의 첫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녜스의 저항 P70

아네스의 가출을 알게 된 아버지는 이번만은 딸을 죽이든 살리든 반드시 집으로 데려오리라

작정하고 부하 장정 열 둘을 거느린 모날도 북부를 평화의 거룩한 천사 수녀원으로 보냈습니다.

몇 시간 후 부하들은 아네스가 아니라, 철장갑으로 무장한 채 한 쪽팔이 마비되어 화가 나서 

길길이 뛰는 모날도를 말에 태워 데리고 왔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집안 사람에게 모날도

숙부는 단호하고 명백한 목소리로 사건의 전모를 보고하였습니다.

"수녀원에 도착하자 나는 용의주도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먼저 수녀들과 타협하였소.

아네스를 만나 보라고 그애의 아버지가 나를 보냈는데 수녀원측이 이에 협조하지 않으면 주교님께

항의하겠다고 말하자 수녀들은 곧 봉쇄구역이 아닌 출구 가까이의 첫 건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는 세속의 옷차림 그대로인 아네스를 그곳에서 만날수 있었소.

아직 그애가 결심을 굳히지 않았거나 형제들이 날을 잡아 삭발하고 착복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수녀들이 이 문제에 상관하기를 꺼리며 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데다가 아네스도 형제들과 온전한 의견 일치를 못 본 듯하길래 그애를 데려오는 일은 아무 문제도

없는 듯하였소.  그래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소.  이제 형님과 형수는 물론 우리 가문에서 더

이상 집 나간 소녀 따위로 골치를 앓을 필요가 없어졌기에 말이오.

그러나 아네스를 만나자마자 나 그애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소.  왜냐하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말씀에 순종 해야 한다고 내가 으름장을 놓자 즉시 봉쇄구역으로

도망 가려 했었단  말이오.  물론 이 숙부가 더 빨랐도.  난 재빨리 봉쇄문과 소녀 사이를 가로막았고

내 부하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우리 주위을 빙 둘러섰었소.  수녀원 경비대들은 얼씬조차 않았기에

무기를 쓸 필요도 없었소.  

일이 이쯤되자 아네슨 절대로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처량하게 울부짖었소.  너 정말 아버지에게

반항할거냐?  그 명령을 어길거냐고 나 호통을 쳤소.  이 뻔뻔스런 불효를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소.  아무리 투구를 썼더라도 그때 내가 얼마나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보았는지는 

그애의 공포에 질린 눈으로 충분히 짐작됩니다.  아, 그런데도 아네스는 절대로 굽히려 들지 

않았단 말이요.  안 돌아간다는 게 아니겠소. 나는 한번, 두번, 세번까지 집에 돌아가겠느냐고

물었소.  세번째 물음에도 막무가내이자 은둔소에서 수녀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그애를

끌어내라고 명령을 내렸소. 

가장의 명령을 수행하는 나에게 교회로부터 파문 따위의 위험은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지요. 내 부하 둘이 아네스를 붙잡자 그애는 마구 반항하느라 머리채까지 풀어졌소.

질질 끌고 출구를 향해 가는 우악스런 장정들에게 드래는 울부짖으며 상상도 못할 힘으로 저항합디다


그 와중에서 머리칼과 옷자락이 찢겨 나가고 몇 대 맞았대도 난 구인할 수 없소.  부하들은 내

말이라면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사내들임을 세상이 다 아는 바 아니오?  그리고 저항하는 아네스의 

울부짖음 이 그들을 더 당황하게 했을거요.  그러나 부하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사정 봐 가면서 

얌전히 다루었다고 믿어도 좋을거요.  그애를 정말 때리려고 한 건 나였소.  수도원 건너 편

숲속길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나는 금발 머리 소녀의 머리통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쉽게 박살내고 말 철장갑 낀 손을 그애를 향해 쳐들었단 말이요.  일이 거기까지 간 이유를 말하리라.

아녜스가 울고불고 그리스도께 도움을 호소하는가 하면 글라라와 수녀들, 주위의 주민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며 울부짖으니 그들 모두가 단걸음으로 그 올리브나무 숲길고 달려 나오는 게 아니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이거 야단인걸,  이러다가 수녀원측 병사들과 우리가 무기로 맞붙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지나 않을까 생각하던 판에, 끌고 가던 장정들이 손을 털며 어쩌나 무거운지 당해낼 

재간이 없다잖소. 아니 그래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형과 형수님 생각은 어떻소?  어쨋든 내게는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단 말이요.  그래서 난

넷이서 가기 팔 다리 한 쪽씩을 들라고 명령했도.  그것도 안된다기에 여섯 명이 하라고 소리 질렀소.

이  근방에서 누구보다도 잘 훈련된 내 부하 여섯이 연약한 소녀 하나를 땅바닥에서 일으키지 

못하다니 이거 어디 창피해서 살겠소? 난 그들이 겁이 나서 힘이 빠졌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판단했소.  그렇지 않고야 팔삭동자도 웃을 이 아니요?  이런경우는 어떤 명령도 소용이

없고 오직 본보기를 보이는 외에는 딴 도리가 없는지라, 그애를 치려고 손을 들어 올렸던거요.

나를 말릴 자는 아무도 없으리 만큼 나는 그 때 흥분하여 정신이 없었소. 

그 순간에 일어나 이를 누구는 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오만 내게는 홧병일 뿐이오.  너무 화가 나서

마비현상을 일으킨거란 말이요.  자, 이제 보시오.  부하들은 아네스 대신 나를 들쳐 업고 왔도.

내가 그애 보다 조금 덜 무거웠던 모양이오.  몸의 절반이 마비가 되어 뻣뻣해지고 팔은 움직일 수도

없고 한쪽 눈 밖에 볼 수가 없는 날 말이요.  내몸에서 성한 곳이라곤 이 혀뿐이오......"

건장한 장정 여섯이 다려들어도 꼼짝 않는 아녜스를 데려가는 것을 단념한 모날도 숙부 일행은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보고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에는 다음의 사실이 덧붙여져야 완전합니다.  여섯명의 장정이 할 수 없었던 일이

글라라에게는 가능했습니다.  숙부와 그 일행이 개울가 올리브나무 숲의 길에서 쓰러진 소녀를

두고 실랑이하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숙부를 설득하여 보내자마자 동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기쁘게 일어나 언니의 품에 안겼습니다.  언니와 함께 평화의 거룩한 천사 은둔 수녀원으로 간

아네스는 얼마 후,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성 프란치스꼬로부터 형제회의 보속의 수도복을

받아 입었습니다.


가난의 성지, 산 다미아노 P77

평화의 거룩한 천사 은둔 수녀원 역시 성 프란치스꼬의 인도로 걸어야 할 성녀 글라라의 길,

그 소명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 영성과는 전혀 다르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꼬는 그 소명에 맞갖은 거처를 발견하여서 곧 결정적 장소, 아씨시 성밖의 산 다미아노로

그들은 옮겨 갔습니다.  그 작은 성당과 수도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난의 성지로 간주됩니다.

순례객의 발길을 멀리서부터 재촉하는 작은 성당의 특색있는 종소리며, 수도원의 나즈막한 담장을

넘어 하늘 높이 치솟은 측백나무와 작은 화랑에 감도는 시정적 분위기는 숙연한 마음으로 들어선 

그곳은 진정한 프란치스칸 고유의 분위기가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설혹 그 깊은 내면을 가늠하려는

마음없이 분위기의 표현만을 보는 이들이 달콤한 감상만을 고집한다 해도 이 점은 변함없습니다.

그들은 아씨시 곳곳에 늘어선 선물가게의 조잡한 화첩에서 쉽게 접하는 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충고하고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인의 삶의 일부분을 전부인 양 그들 나름의 감미롭고 낭만적인 

성인으로서의 프란치스꼬만을 알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와 한가지로 상처 입고 피흘리며

라 베르나 산을 내려오는 성인은 모르고 있으며, 또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산 다미아노의 참 모습을 보려는 이에게 그 곳은 진정한 프란치스칸의 영성의 산 정표입니다.  

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성 프란치스꼬의 내적 삶에 보다 깊숙이 다가가야만 할 것입니다.

회개 직전 영적 위기의 시간에 그는 들판을 쏘다니다가 이 작은 성소를 발견하고 그곳 십자가 앞에

자주 머물렀습니다.  그는 영혼의 굶주림과 갈망을 채워 줄 어떤 끝없는 그리움 때문에 마음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그리움은 그 당시나 오늘날에나 하느님께 나아가는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한결같이 일고 있는 가장 절박한 물음이며 관심사입니다.

"주님, 제가 해야 할 바를 알려 주십시오.  당신은 제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프란치스꼬의 절실한 물음과오랜 기다림에는 비잔틴식 십자가상에서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우리에게는 옛 수도원 의 헐벗은 건물의 소리 없는 응답뿐입니다.  거친 판자조각 몇 장을 아무렇게나 끼워 맞춘 듯한 낡고 초라한  꼬레또  ----  작은 가대 ---- 의

모습만이 조용한 대답으로 우리 심금을 울릴 뿐입니다.

성녀 글라라와 자매들이 이 가대로 부터 공동방이며 침실이던 지붕방으로 가기위해 오르내리던

가파르고 어둠침침한 층계의 응답만이 들려옵니다.

산 다미아노는 가난과 기도외의 그 무엇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단순과 소박이며, 오직 하느님만을 찾도록 우리를 재촉할 뿐, 다른 모두는 낭비며

무거운 짐이라고 속삭입니다.

이 평화의 오아시스를 다녀가는 우리는 소박한 삶에서의 그리움을 가득안고 이제 되돌아가야

하는 세상에 참된 프란치스꼬적 삶을 가져다 주고픈 소망을 갖게 됩니다.  프란치스꼬의 삶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며, 매순간 행위 하나하나에서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삶은 반드시 외적 표지, 가령 수도복을 입고서야 가능한 일만은 아닐 터입니다.

이 가난의 둥지에서 글라라는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마흔 두해의 생애를 이 담장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십여 성상은 기도와 침묵,  가난과 보속, 하느님과 자매들에 대한 사랑으로

사위어진 삶이었습니다.


첫 자매들과 생황량식 P80

산 다미아노로 옮겨 온 후 오래지 않아 소꿉치누들인 빠치피까와 벤베누따가 입회하였습디다.

마찬가지로 성녀와 자매들에 대한 소문이 너리 퍼지게 되자 그들을 본받고 같은 삶을 나누려는 

많은 처녀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밖에 내세우지 않는 새로운 복음적

공동체에서 주님의 영께 자신을 옺전히 내맡기는 자간한 자매가 되어, 서로 사랑을 나누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좇아 살려는 목적뿐이었습니다.

산 다미아노에서 탄생한 이 수도공동체가 성녀 글라라에게는 마치 성부의 사랑하올 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스러운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가난과 겸손을 따르던 복되신

사부 성 프라치스꼬의 말고 모범을 통하여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교회에 낳아 주신 작은

양떼처럼 여겨졌습니다.

이 첫 자매들의 이름과 그 거룩한 삶의 증언은 오는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옵니다.  성녀의 거룩한

모범에 감화된 자매들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에게 내어 주기를 배우고 

거룩한 어머니의 이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성녀의 뜻을 성실히 지켰습니다.

벤네누/다에 이어 발비나 디 마르띠노가 입히했고, 한 해 뒤에는 레오나르도 디 지스렐리오의 딸

필리빠가 수도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어머니의 모범을 따라 한결같이 사부 프란치스꼬

에게 자원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성인은 이 작은 공동체를 돌보고 얼마동안 이들의 열심을 시험해

본 후 "생활양식"(Forma vivendi)을 주었습니다.

1253년 사도좌의 인준을 받은 회칙에서 성녀 글라라는 산 다미아노의 생활양식 ---  일종의 원회칙 

---을 요약하여 전합니다.

"복되신 사부님은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 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감으로 거룩한 복음적 삶을 선택하신 자매들은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 천상 아버지의

딸이며 여종일 뿐 아니라 성려의 정배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우리 가족과 똑같이

여기고 직접 혹은 형제들을 통하여, 항상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보살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점을 나는 스스로의 우리 형제회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살아 계실 때 성인은 이 약속을 충실히 지키셨고 형제들도 이것을 지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에 대한 하느님 섭리의 보살핌과 관심은
성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스런 보살핌을 앞지르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빠치피까 디 젤푸초는 1213년  여름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의 증인입니다.
어느 날 수도원에 기름이 떨어져서 환자들의 음식을 장만하기고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성녀는 가난한 자매들을 위하여 애긍을 청해오는 일을 맡고 있는
벤테벤가 형제에게 주님 사랑으로 기름을 얻어 달라고 부탁하고 형제가 기름을 
얻어 담아올 항아리는 잠시 후 나갈 채비를 한 형제가 올 때까지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그런데 형제가 와서 항아리를 집어 들었을 때는 이미 기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형제는 하릴없이 사람을 불러 헛걸음을시키는 수녀들이라고 투덜거리면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은 이렇게 성녀의 깊은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


복음을 살도록 부름받은 공동체 P82

산 다미아노에서의 초창기 수도 생활에 대한 좋은 증언은 아코의 주교 막 서품되어 성청과

이탈리아를 들어 성지를 순례한 비트리의 야고보 주교가 1216년 제노아에서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성청의 집무가 이루어지고 있던 뻬루지아에 머무는 중에 그 주변에 크나큰 위로를 

받을 기회가 있었네.  세상에서 온갖 부귀여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을 등진후 공동으로 생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디.

그들 중 남자들은 작으 형제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교황과 추기경단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더군.

이들은 세속사에는 일체 관여치 않은채 사도적 열성에 불타 위험에 처한 영혼들을 세속의 헛됨으로

부터 구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네 ------   그들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라는

성서 말씀대로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양식을 그래도 살고 있지.

낮에든 도시와 촌락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기 위해 전력을 쏟고 밤에는 은둔소나

외딴 움막으로 물러나 관상으로 밤을 지세운다네.

한편 이들  중 여인들은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지.  그들은 

부동산이나 기금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손수 일하여 자기들의 생계를 꾸려 가더군.  이들은

자기들에게는 의외인 존경을 성직자나 신자들로부터 받을라 치면 대단히 슬픔에 젖어 얼토당토 않은

일을 당하기나 한 듯 놀라워 한다네"

수도회 소속이 아닌 외부인이 1216년에 전해 주는 기록은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 작은

형제들과 같은 수도가족이었다고 증언 합니다.  이 기록에서 외부인의 눈에 비친 수도회의 특징은

세속 부귀 영화에 대한 자발적인 포기였습니다.  아울러 수도회 초창기의 회원들은 잡다한

세상사에는 일체 상관함 없이 오로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 그들의 온 정열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귀중한 체험을 그 시대에 새롭게 일깨워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한마음 한뜻의

형제애를 살아갔다고 합니다.

또 그들은 부동산이나 토지는 물론 어떤 희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자매들도 작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했습니다.

더 귀중한 증언은 형제들과 자매들이 한 수도가족임은 사실이었지만, 당시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보속단체들과는 달리 무질서한 혼성 공동체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정 반대로 이 증언이 명확히

밝히듯이 가난한 자매들의 생활 양식은 형제들의 그것과 판이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복음선포를

위해 둘씩 짝지어 세상 각처에 흩어져 살았으며 자매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흩어져 살던 형제들은 일젛한 시기마다 총회를 위해 모여들었으나 자매들은 결코 수도원 봉쇄를

떠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위에서 살표 본 특징만으로도 가난한 자배들은 교회 안의 다른 기족 수도회는 물론이요

당시에 유행하던 사도적 가난을 빙자한 이단단체와도 뚜렷이 구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은 프란치소꼬가 주님을 위해서 모은 딸들이며 성신의 감도로

주어진 그 마음의 딸들로써 기존 수도회와는 전혀 다른 생활양식을 표방하는 수도회였습니다.

그들은 작은 형제들과 함께 놀랍고도 뚜렷한 표징으로 기존 수도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수도생활을

교회 안에 가져왔습니다.

이 생활양식은 성 프란치스꼬에 의해 새로이 일어난 복음을 완저히 그대로 살려는 노력으로서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름이며, 가족과도 같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삶입니다

그러면서도 프란치스칸 수도가족 제1회가 갖는 특성을 자매들은 믿음과 소망의 차원에만

이해하였기에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길을 떠나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형제들

처럼 실제로 세상을 두루 다녀햐만이 복음선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녀는 복음을 살기 위하여 기존 어느 수녀원보다도 엄격한 봉쇄의 담장을 선택하였습니다.

성녀 글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은 사부 프란치스꼬의 인도를 받아 그 처럼 자기를 포기하고 이탈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미다.  그들은 가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신비 안에 깊이

뿌리내려 동정의 마음만이 지닌 꿋꿋함과 여성 특유의 오롯함으로 주님 영의 인도를 성실히

따름이 삶의 유일한 청사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순박하게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사는 이 영성의 동질성은 생활양식의 상이서을 뛰어 넘어 서로가 형제요, 자매인 수도가족간의 남다른 사랑과 복된 영적 결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아울러 형태의 복음적 삶은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도 형제지의를 나누는 낙원적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광의 임금님과

하나되는 영적 혼인의 체험으로 넘치는 기쁨 가운데 진선미 자체이신 그분이 지복 안에 완전히 젖어

드는 존재적 행복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꼬의 영적 모험 그 전부는 성녀 글라라와 그 자매들에게서 완전히 이해받고 새롭고도

철저히 생활화되었고 성녀는 이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용맹하게 옹호하였습니다.

사부의 영적 모험은 성녀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태초부터 몸소

마련해 두신 숨겨진 당신 사랑의 감미로운을 맛보는 영적 체험이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수도희의 제 2회인 가난한 자매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꼬에게 주어진 특유의 

카리스마에 깊이 뿌리 박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께 순명하며 제1회와 같이 가난의

고귀한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은 천사의 지존하신 아버지께서 당신 은총으로 성녀 글라라의 마음을 비추시어,  지극히 복되신

사부 성 프란치스꼬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르는 회개생활 ---- 보속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성녀의 삶, 곧 복되신 프라치스꼬가 창설한 가난한 자에 수도회의 생활양식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사는 삶 입니다.

그 길은 성녀가 굳게 서약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의 가난과 겸손,

거룩한 복음을 항상 실행하는 지극한 가난의 삶입니다.

그 삶은 성녀가 간곡히 부탁한 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하는 서로간의 사랑의 일치를 

항상 유지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그 길은 성녀가 원한 대로 가톨릭 신앙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언제나 성교회의 손길 아래 자신을

내맡기고 모든 규정과 명령에 순명하는 성교회에 충성하는 삶입니다.


이 모두가 관상 수도회적 영역 안에서 이루러지고 이로써 프란치스칸 수도가족이 제2회인 

가난한 자매 수도회는 제1회를 보충하는 동반자적 역활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군중에게 설교하면서도 고독한 산 위에서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수도회적으로 드러내며,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인 지체로서의 수도회가 

성교회안에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수도원장(aBBATISSA) P86

성 프란치소꼬와 성녀 글라라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신앙과 순명의 끈으로 이어진 영적 부녀지간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부님과 아씨시 교구장인 귀도 주교에 대한 순명에서 성녀는 성 다미아노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3년 후에 대수도원장의 직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녀는 이 직책을 임종의 순간까지

수행해야 했습니다.  성녀에게 있어 이 직무는 명예직이 아니라, 오직 순명에 의해서만 받아들이느

힘들고 고생스러운 섬김의 소임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부 프란치소꼬가 형제회 총봉사자에게한 요구를 성녀 글라라는 자신이 쓴 회칙에서 수도원장이 임무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자매는 자기가 어떤 중대한 임무를 위임받았는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에

대해 누구에게 헴바쳐야 하는지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그리고 직책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덕행과

거룩한 생활로 다른 자매들 보다 뛰어나고 앞서도록 노력을 귀울임으로써 자매들은 그 표양에 

감화와 자극을 받아 두려움에서보다 사랑에 의하며 순명하도록 해야 합니다.

수도원장은 특정한 자매를 편애하고 더 가까이 함으로써 온 공동체에 그 화가 미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할 것입니다.  또한 괴로워 하는 자매들을 위로하고 시련 중의 자매들이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겸손의 삶 P87

회칙의 조항들은 말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순명으로 맡은 직책이 높고 명예로울수록 성녀는

성 프란치스꼬와 마찬가지로 작은 자임을 늘 실감하였습니다.  수도원의 허드렛일이란

허드렛일은 으례 자신의 몫으로 도맡아 하였습니다.  자매들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거나

밖에서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자매들의 흙먼지투성이인 발을 씻어 주는 비천한 일을 다시없는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발을 다 씻긴 대수도원장이 재빨리 고개를 숙여 겸손된 친구로

자매들을 공경하는 모습 역시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삶 P87

아씨시의 작은 가난뱅이가 보인 겸손의 모범을 자매들에게 성실히 반영하는 이상으로 성녀 글라라는

사랑 깊은 어머니였습니다.  북풍이 창을 흔들고 문틈 새로 찬바람이 몰아치는 산 다미아노의 추운

겨울 밤에는 웅크려 잠든 자매들의 추위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고 이불자락을 끄어 덮어 주는 

사랑스런 어머니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보속과 극기이 실천에 있어 자신에게는 엄격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이러한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자매들에게는 너그러웠습니다.

자매들 중에 누가 의기소침하여 풀이 죽어 있지나 않은지, 혹은 어느 자매에게 슬픔과 곤경, 유혹의

작은 조짐이락도 보일세라 그 자애로운 눈길은 항상 자매 개개인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짐을 눈치채게 되면 그 자매를 조용히 불러 넘치는 사랑에서 나온 위로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온갖 방도를 찾아 내었습니다.  갖가지 위로도 부족하게 되면 자매들의 아픔을 어떻게라도

덜어 주고픈 안타까움에서 눈물을 가들 머금고 가만히 응시하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였습니다.

혹시 자매들의 마음에 응어리진 감정이나 고집을 접하게 될때는 어느 어진 어머니보다도 따스한 

사랑으로 가만가만 달래다가, 그래도 부족하면 각성의 계기로 이끄려는 일념에서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할 만큼 사랑이 마음으로부터 넘쳐 흘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딸들이 하느님의 평화 안에 머무른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육신적 고통도 참을 수가 없는 애틋함에서 병든 자매들에게 주님의 구원 표시인 십자 성호를 강복

하노라면 즉각적이 치유가 이루어졌습니다

정겨운 사랑의 발로인 원장 어머니의 단순한 십자 강복은 벤베누따 디 마돈나 디아브라 수녀의 

겨드랑이에 난 곪은 종기를 단번에 아물게 하였으며, 13개월이나 수종으로 고개를 움직일 수 없이

시름시름 앓고 있던 아마따 수녀에게 순식간에 쾌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 수년간 난청으로 

고통받던 안드레아 수녀와 크리스티나 수녀, 오랫동안 말을 할 수 없었던 뻬루지아의 벤네누따 

수녀도 원장어머니의 강복으로 오랜 병고에서 풀려 났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자매들이 성녀

글라라가 하느님 품으로 가기까지 수년네 걸쳐 자주 하느님의 치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성녀는 직책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덕행과 거룩한 생홀로 다른 자매들 보다 뛰어나고 앞서는

수도원장으로서 고통에 우는 자매들을 위로하고 시름에 눌린 딸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주려고 

갖은 정성을 다 쏟았습니다.

모들 자매들이 시성조사 과정에서 이구동성으로 증언하듯 원장 어머니는 딸들이 수도규칙을 살고

사부 프란치스꼬의 카리스마에 충실하도록 이끈 산 표양이며 완덕의 거울로 그들 가운데 

머물렀습니다.


분별력 P89

추운 겨울 밤, 잠든 자매들에게 이불을 끌어 덮어 주는 따듯한 어머니의 손길은 또한 새벽부터

한밤중의 성무일도에 이르기까지 때 맞추어 종을 울려서 기도 시간을 알리고 가대에 제일 먼저 

내려가 불을 밝히는 가 하면,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조차도 못 듣고 여전히 곤히 자고 있는 수녀들을

자리에서 가만히 일으텨 주는 굳센 손길이기도 하였습니다.

탁월한 영성가이며 스승인 성녀는 홀로 하느님 신비 안에 젖어들 수 있도록 작은 소음도 마음의 

처소로부터 몰아낼 것과  연약한 육신의 그럭 듯한 요구들은 단호히 물리쳐서, 온갖 육적 충동을

분별력 있는 처신으로 이여나가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곧장 부르는 가장 좋은

가르침은 긴 말보다는 한 번의 표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머니가 고통받으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육신을 제어하려고 엄격히 재를 지키려 고행으로 뭄을 아끼지 않음을 볼 때마다

수녀들은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속의 삶 P89

성녀 글라라는 움브리아 지방 농부들이 손쉽게 구하던 옷감인 모와 면이 반반씩 섞인 천으로 된

거친 수도복 한 벌로 만족하였습니다.  몸에서 매지 않던 고의는 자매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수도복 안에 몰래 받쳐 입었습니다.  고의들은 주로 뻣뻣한 돼지털가죽이 살갗을 찌르는 조끼 형태의

속옷과 맨몸을  동여맬 수 있게 말꼬리털로 만든 가느다란 끈이었습니다.

오포르똘로의 아네스 수녀는 어머니의 고행까지 해볼 일념으로 성녀를 조르고 졸라서 말꼬리털로

만든 끈을 빌렸습니다.  그러나 사흘을 간신히 견딘 후에 어쩔수 없이 되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성녀는 냇가에서 주워 온 돌을 베개로 하여 딱딱한 맨바닥을 잠자리로 삼았고

포도나무 줄기로 엮은 멍석요와 한 묶음의 짚으로 된 베개를 자신에게 허락하였습니다.  병이 몹시

위중하여진 후에야 성 프란치스꼬의 명령에 따라 짚요를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스스로 실천한 

고행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격했지만 단식제에 대한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렇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놋쇠로 되어 있지 않고 바위와 같은 강한 힘도 우리에게는 없어요.  오히려 연약한

우리 육신은 쉬이 편안함을 찾으며 허약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이런 여건을 참작해야지요. 그런데

내가 아는 바로는 그대의 단식제가 너무 무분별하여 불가능해 보여요.  주님 안에서 내 지극히 

사랑하는 자매여!  그대는 지혜롭고 신중한 분별력으로 이 점에 유의하시기를 간절히 부탁해요.

나는 그대가 삶으로 주님께 찬미와 영적 예배를 드리며 지혜의 소금을 쳐서 간이 잘 맞는 희생제물을 주님께 드리기를 바래요."

이같은 중용의 덕을 성녀는 영적 딸들에게 권하고 가르쳤지만 자신에게 적용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만은 첼라노의 토마스 형제가 성 프란치스꼬에 대해 말한 대로 성녀의 언행이 

일치않은 부분이었습니다.  반복하여 문헌에서 밝히고 있듯이 여기서도 성셔는 사부님의 여린 풀포기

임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단식제에서의 중용을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권하면서도 스스로는 사람이 해낼 수 없을 정도의

단식재를 꾸준히 지켜나갔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월요일과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은 

완전한 단식일로서음식은 전혀 입에 대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부활대축일 전 사순시기와

성탄대축일 전의 50일 봉재시기에는 주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오직 빵과 물로만 식사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 시기동안의 주일에는 집 안에 포도주가 있으며 물 대신 조금 마셨습니다.

이런 식의 완전한 단식과 물과 빵만의 단식이 교대로 이어졌습니다.

성녀 스스로가 육신에 가한 고행들은 그 열려한 소망대로 사실 순교에 버금가는 사랑의 행위로서

갚음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확언하셨던 것입니다.  1220년 모로코에서 순고한 작은 형제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성녀은 그들의 표양에 따라 순교하려는  열망에서 산 다미아노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정통 문헌의 증언은 성녀가 봉쇄의 담장을 떠나고 싶어했던 단 한 번의 경우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가장 큰 사랑이라고 이러주신 그대로 하느님을 증거하려는 바램만이 그같은

소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순명의 삶 P 91

이같은 고행, 특히 그 중에서도 매주 사흘간의 완전한 단식은 성녀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와 아씨시의 주교님은 매일 적어도 50그램의 빵을 먹어야 한다고 순명의 이름으로 명령하였습니다.

 

성녀는 순명하였습니다.

이미 말한 대로 성 프란치크고와 성녀 글라라 사이는 무엇보다 앞서 영적 부녀지간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대수도원장직을 극구 사양하는 성녀에게 이를 명령한 것이나 지나친 단식과 고행에 제동을 거는 성인의 태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널리 퍼진 민간설화가 두 성인에 대한 수많은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여기서 언급해야 할 필요성을 우리는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아무리 지순하다 해도 이 참다운 우정, 사실 그대로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은 바로 그만큼 상대방이 하느님을 사랑함을 보는 것으로 서로에게 다시없는 기쁨을 선물하는 두사람----

같은 영에서 태어나 순수하고도 왜곡됨 없는 곧은 길로 복음을 따르는 하나의 삶을 살도록 예정된 두 사람----

서로를 보완해 가도록 삼위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하나의 소명에서 비롯된 것이 이들 성인 성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 제1회와 제2회의 같은 카리스마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과 성 프란치스코 P 92 

 

작은 형제회와 성녀 글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는 사실 오직 하나의 수도회로서 성 프란치스코가 회개한 바로 그 순간 같은 영의 역사하심으로 태어났습니다. 

별이 빛나는 아시시 밤거리에서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주님의 영으로 완전히 변화된 그 순간에 이미 가난한 자매 수도회는 태어난 것입디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그를 이끌어 내셔서 자신으로부터도 온전히 벗어나, 가난하게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이를 회개의 생활로 초대하고, 평화의 복음을 가져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의 빵을 쪼개어 만민과 함께 나누는 가운데 그들 모두를 형제로서 사랑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첫 순간 --- 산 다미아노의 외딴 동굴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홀로 대좌한 후 --- 세상 만물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 한 분께만 시선을 두고서 확 트인 창공과 들판, 산과 초원으로 이루어진 수도원, 무한히 넓고 개방된 봉쇄구역인 세상을 위대한 임금님의 사자로서 두루 다니며 자유로이 노래하던 그 순간에 프란치스코의 성소를 보완하도록 주님의 영은 성녀 글라라를 일깨운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주님께서 '가서 다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하는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를 프란치스코의 성소를 분명히 해 주신 그 소명의 장소 산 다미아노 담장 안의 가난한 동정녀가 성녀 글라라입니다. 

 

성녀 글라라는 기니긴 밤의 고요와 관상 중에 가련한 버러지인 프란치스코와 한없이 감미로우시고 사랑하올 하느님 간의 다정한 밀어가 끊임없이 어어지도록 그를 대신하기로 예정된 하느님 신비 안에 숨어든 동정녀입니다. 

 

그곳 산 다미아노에서 선인은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설립을 계획해 본 적은 없었으나, 자신의 성소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를 보다 확실히 해주는 그 영 안에서 보았습니다. 문헌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자기 육신의 아버지 수중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은 후 최초로 시작한 일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는 일이었다... 예로부터 산 다미아노 성당이었던 자리에, 그는 지극히 복되신 분의 은총의 힘으로 짧은 기간에 열성을 다하여 그 성당을 수리 복구하였다.

 

<그는 열정적인 언변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 성당 수리에 그들의 관심을 모은 후,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명백한 어조의 불어로 그 자리에 장차 거룩한 동정녀들이 살 수도원이 세워질 것임을 분명히 예언하였다. 그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 충만되어 있을 때마다 불어로 말하였다>

 

<그는 끈기있게 성당을 수리하면서 자기를 도와 주는 이들뿐 아니라 근처를 지나는 주민들도 들을 수 있도록 성령의 기쁨 안에서 목청껏 불어로 외쳤다. 어서 와 나와 함께 산 다미아노 수도원을 건축합시다. 머지 않아 이곳에는 좋은 평판과 거룩한 생활로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드릴 수녀원이 설립될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성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해 오신 것이 허물어 없어지고 말 성당 하나를 수리하라는 뜻이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곳에는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미리 예언하신 대로 거룩한 동정녀들의 수도회가 세워져 이들은 마치 잘 다듬어져 빛나는 산 돌처럼 사용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에게는 단 한 가지 목적밖에 없었으니 곧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카리스마는 동일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스스로 자주 밝힌 대로 작은 형제들과 가난한 자매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이끌어 낸 것은 하나이며 같은 영이었습니다.

 

세라핌적 수도가족의 제2회는 성 프란치스코가 주님 영의 인도를 받아 세속을 떠나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 같은 영의 역사하심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성 프란치스코의 마음과 영혼 안에는 프란치스코가 그녀를 즐겨 부르던 이름인 그리스도인, 가난한 동정녀 글라라가 굳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영은 성녀 글라라를 같은 소명을 살고 복음적 생활체험과 신앙체험을 나누도록 그의 옆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이 성소는 사람들이 자주 오인하는 평행을 이루는 비교적인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살고 있는 독특한 성소를 보완하는 생활양식입니다.

 

이 보완관계에서 보면, 생애 말엽까지 유일한 수도원으로 넓은 세상만을 가지기를 원하여 형제들이 얼마간 머무는 장소를 은둔소나 다른 장소라고 굳이 불명확한 표현을 한 그가 가난한 자매들을 위해서는 돌로 된 견고한 수도원을 머물 곳으로 손수 지어 준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칸 성소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그 이끄심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이 세상을 갈아가는 생활양식은 그분과 함께 오로지 아버지를 위하여 살고, 이러한 삶으로 세상과 인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과 성녀 글라라의 삶의 공통점입니다. 

 

하나인 프란치스코적 영감은 두 가지 영역을 가집니다.

 

말씀을 향해 열러 있는 관상적 영역과 말씀을 증거하는 활동적 영역입니다. 이는 또한 사랑의 두 영역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관상적인 동시에 활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활동 중에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관상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고요와 관상 가운데 그분과 함께 있는 관상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고요와 관상 가운데 그분과 함께 있는 관상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고요와 관상 가운데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거할 큰 일을 꿈꾸며 열망하기 마련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확 트인 창공과 들판, 산과 초원으로 이루어진 수도원, 무한히 넓고 개방된 봉쇄구역인 세상 안에서 자유로이 천주 성자의 가난과 순명을 복음의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재현하기 위해 세상을 두루 다녔습니다. 

 

주 예수님처럼 형제들은 <낮에는 도시와 촌락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기 위해 전력을 쏟고, 밤에는 은둔소나 외딴 움막으로 물러나 관상으로 밤을 지새우곤 하더라>고 1216년에 이미 비트리의 야고보 주교는 증언하였습니다.

 

반면에 성녀 글라라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산 다미아노의 아늑하고 무한한 고요 가운데 머무는 믿음의 여인이며 가난한 동정녀로 성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지존의 종으로서 가난과 겸손의 존재를 통하여 성교회를 재건할 수 있도록 주님의 영께 자기를 오롯이 개방하고 내어드리는 처녀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복음적 여인으로서 하는 이 관상과 침묵의 증언은 성 프란치스코의 활동보다 효과가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산 다미아노에서의 고독한 시간에 성 프란치스코의 영혼을 타오르는 사랑으로 체워 주던 임금님의 신비는 이제 성녀 글라라의 영원한 신비가 되었습니다. 이는 홀로 고독한 산을 찾으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신비의 문지방을 넘는 신성함이며, 또 한편으로는 그분의 무한성을 땅에 엎디어 겸손되이 우러르는 가난으로 수도회와 온 교회를 위해 그분의 영을 받아들임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산 다미아노를 수리하면서 주님 영의 감도하심으로 이런 내적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얼마간의 가난 생활을 체험한 자매들에게 준 원회칙에서 성인은 그들을 성령의 정배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난성무일도>에서 동정 성모 마리아를 같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가난하게 구유에 누워 계셨고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셨으며 십자가에 알몸으로 매달려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고 내어 준 성녀 글라라의 마음 안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삶의 모든 순간에, 심지어 의혹과 불안으로 아둠을 더듬는 순간에도 자신의 참모습을 만났습니다.

 

성인이 형제들과 함께 회개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수도생활 초기에 주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세상을 두루 다니며 설교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고독한 은둔소에서 관상에 전념해야 할지 고심할 때, 실베스텔 형제의 조언과 성녀의 기도는 그에게 주님의 뜻을 계시해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성녀 글라라는 보완과 보충의 구실로 하느님께서 성인 곁에 불러 주신 소명의 도움이며 삶의 동반자로서, 그의 일을 거들어 줄, 그에게 알맞는 짝이었습니다. 성녀 글라라 안에서 프란치스칸 가족 모두는 어떠한 상황 중에서도 그 님과 끊임없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분과의 이 대화는 인간적 언어의 나열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한없이 좋으신 주님과 나누는 사랑의 체험이며 주님 앞에 선 인간의 존재적 가난의 체험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마음 안에 단 하나의 씨앗처럼 뿌려진 내적 계시는 싹이 돋아나 수많은 가지의 한 그루 나무로 자라났고, 이 가지들은 서로 보완관계를 갖고 뻗어 나갔습니다. 아 니무는 가지간에 아무런 뒤엉킴이나 혼란도 없이  주 하느님 앞에서 맑고도 곧은 형태를 유지하며 성장해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영역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해야 하고, 완수할 임무는 다르지만 단 하나의 나무 등걸에서 자라난 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큰 소명에서 비롯된 서로의 결합을 어떻게 순수한 양상과 방법으로 지켜나가야 할지를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형제들에게 표양으로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을 자주 방문하기를 삼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책망하는 형제들에게 그 정당성을 설명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적거나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마시오.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죄라면 그들을 그리스도와 정혼시켜 주었음을 더 큰 죄가 아니겠소?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함으로써 형제들도 나와 같이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도 스스로 원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자매들을 방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랜 수도 생활을 한 경험있고 착실하며 영적인 형제들이 마지못해서 방문하며, 이마저 극히 꺼리는 형제들이 자매들을 돌보는 직책에 임명되어야 합니다.>

 

그는 항상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자매들을 영적으로 돌보아 줄 사제를 포함한 성직형제 둘과 지극한 가난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평형제 둘을 형제들 중에서 뽑아 산 다미아노에 거주케 하는 약속에 충실하였습니다.

 

두 성인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음을 성녀의 첫 자매들은 증언하는데 스테파노 형제의 치유는 그 좋은 실례 중의 하나입니다.

 

뻬루지아의 벤베누따 수녀가 이런 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스테파노 형제에게 정신 이상의 증세가 보이자 성 프란치스코는 산 다미아노로 보내 성녀가 치유의 십자 성호를 형제에게 그어 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성녀는 다소곳이 순명하였습니다. 성녀가 십자 성호를 그어 주자 형제는 곧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그는 완전히 치유되어 있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기도의 봉헌된 삶을 원하는 동정녀들을 산 다미아노의 수도원장에게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필요한 때에 성인은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하였고 성녀는 순명하였습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단식과 고행의 조정과 대수도원장직을 받아들이게 한 사실로 입증합니다.

 

두 분의 우정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 것은 태양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주님께 드리는 피조물의 찬가가 1225년 초 잠 못이루는 밤에 처음으로 산 다미아노 곁의 작은 움막에서 울려퍼진 것입니다.

 

아울러 피조물의 찬가를 지은 얼마 후에 성인은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성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성인이 이 노래로 자매들을 위로하려고 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병을 염려한 나머지 스스로의 건강조차 돌보지 않아 위태로울 지경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자매들을 직접 방문할 수 없어서 형제들을 통하여 자신의 애정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매들이여

주님의 부르심 받아 곳곳에서 모여든 누이들이여 들으소서

진리 안에 오롯한 삶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순명 안에 머무소서

성령에 의한 삶이사 무엇과도 비길 바 없나니

바깥 생활에 눈길 주지 마소서

큰 사랑으로 당부하노니

주님의 선물을 정성껏 관리하소서

병고에 시달리는 누이도

간호에 지친 누이도

항구히 평화 안에 머무소서

이 모든 고통과 수고의 상이 크리니

내 누이들이여

그대들 모두 동정 성 마리아와 함께

여왕의 화관을 하늘에서 받으리이다.


그리고 성인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기 며칠 전 가난한 자매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당부를 적어 유산으로 남겼는데 성녀는 자신과 자매들에게 남긴 사부의 유언을 한 자도 빠드리지 않고 회칙 6장에 그대로 수록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형제인 나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높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극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생활과 가난을 따르고 끝날까지 그 생활 안에 항구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주인이신 자매 여러분께 간청하며 권고하노니, 더없이 거룩한 이 생활과 가난 안에서 항상 살아가십시오. 또한 어느 누구의 가르침이나 권고를 받더라도 이 생활양식을 어떠한 형태로이건 절대로 떠나지 않도록 온갖 조심을 다하십시오.

 

성녀는 자신과 수도회가 성인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이 은총의 통공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성녀는 자신을 새 수도회의 창설자로 결코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있어서 수도회의 창설자는 오직 성 프란치스코일 땨름이었습니다. 사부 프란치스코는 주님만을 섬기려는 성녀와 자매들에게 주어진 수도회의 창설자며 육성자요, 도움자였습니다.

 

또 성녀의 생각에는 자신과 자매들이 성부의 사랑하올 아드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스러운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가난과 겸손을 따르던 복되신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말과 모법을 통하여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교회에 낳아 주신 작은 양떼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덕분으로 프란치스칸 수도가족의 제2회가 하느님의 밭에 씨뿌려져 싹이 움터 자라났다고 굳게 믿는 성녀와 자매들에게 있어 성 프란치스코의 존재는 언제까지나 굳센 기둥이며 하느님 다음으로 유일한 위안이요 받침대였습니다.

 

이런 사부 곁에 선 자신은 성인이 심어서 가꾸는 작은 씨앗이며 여린 풀포기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성녀는 회칙의 맨 처음에 겸손하면서도 사뭇 자랑스럽게 '그리스도의 부당한 여종이며 지극히 복되신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의 여린 풀포기 인 나 글라라...'하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과 제일 먼저 옮겨 심은 어린나무일 뿐만 아니라, 작은 형제회의 중심이요 심장인 뽀르치웅꿀라의 천사들의 동정 성 마리아 제대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던 그날 밤, 그 숲속에서 자기 앞을 밝히려고 횃불을 들고 기다렸던 성인의 첫 동료 원탁기사들에게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거룩한 순간의 장소로 뽀르찌웅꿀라의 성 마리아성당이 선택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같은 기초 위에 하나의 영에 의해 탄생된 두 수도회의 생활양식을 부각시키려는 주님의 섭리를 따른 무의식의 의도와 소망이었습니다. 이 생활양식은 다름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는 삶입니다.

 

이러한 빛 안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여린 풀포기라는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였기에 모든 것은, 삶 자체까지도 자기라는 새싹을 하느님 밭에 옮겨 심어 주고 버팀목이 되어 준 성인의 덕분임을 마음 깊이 확신하였으므로 성녀는 스스로와 자매들을 대신하여 성 프란치스코에게 순명을 약속하였습니다.

 

성녀가 자신의 회칙과 유언에서 거듭 강조하는 이 순명은 한 수도회의 장상에게 인정되고 유보되는 그런 법적인 의미를 훨씬 초월하는 관계입니다. 성령 안에서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닌 존경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 순명으로 성녀는 하느님께서 사부 프란치스코에게 주시는 주님 영에의 은총적 자기동화에 한 몫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사부의 고유한 믿음과 사랑의 체험,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뒤 따르는 삶에서 얻어지는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가난한 이에게는 이 세상에서 이미 주어지는 천상지복에 이르기까지, 그의 하느님 체험 전부를 성인의 인도를 받아 삶으로 반영할 수 있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 사이에 오갔던 우정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잦은 만남이 필요없었습니다.

 

깊은 믿음과 이상에의 일치로 성숙해 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능할 수 있는 가장 지순한 영적 우정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분 안에 바탕을 두고 그분을 통하여 이어진 이들 사이는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우면서도 꾸밈없이 소박하고, 흠도 티도 없는 청순한 인간관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성인이 세상을 떠날 즈음, 한 인간의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그 순간을 기록한 <완덕이 거울>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나려던 무렵, 아씨시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 중에서 최초로 심겨진 어린 나무이며 복음적 완덕의 실천에서 사부 프란치스코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동정녀 글라라는 사부보다 자신이 먼저 죽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다음으로 유일한 아버지요 위로자이며 자기들을 하느님 은총의 삶으로 인도하고 그 안에서 견고케 한 최초의 스승인 성 프란치스코를 다시는 뵙지 못하고 죽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위로조차 마다하고 슬피 울었다. 

 

그래서 한 형제는 성인에게 보내 이러한 걱정을 알렸다. 아버지 이상의 사랑으로 그들을 아끼던 성인은 이 소식을 듣고 큰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앟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를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을 엄습한 근심과 슬픔을 덜어 주시 위하여 자신의 강복과 함께 행여 그들이 천주 성자의 계명과 권고를 거슬러 범했을 모든 잘못을 용서한다고 편지를 적어 자기 대신 한 형제를 산 다미아노로 보내며 말하였다.

 

"가서 글라라 자매에게 설사 지금 나를 못 보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오. 그녀가 죽기 전에 산 다미아노의 모든 자매들은 나를 보겠고 이로써 큰 위로를 받게 되리라고 하십시오."


얼마 후 이 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성 프란치스코가 돌아가시자, 다음날 아침 일찍 아씨시의 온 시민과 성직자들이 그 거룩한 시신을 모셔가는 그들 모두는 기쁨에 넘쳐 꺾어든 나뭇가지를 흔들며 큰 소리로 성가와 찬미가를 노래하며 아씨시를 향하여 행렬을 시작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나타내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듯, 거룩한 시신을 모신 행렬은 당신 딸이며 여종인 가난한 자매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도중에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들렸다.

 

수도원에 도착하자. 평소에 성체를 영하거나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이는 쇠창살로 된 봉쇄문의 휘장을 걷고 기다리는 자매들 앞으로 형제들은 시신을 들것에서 내려 안고 왔다.

 

자신들을 그토록 아꺼 주던 위대하신 아버지의 위로와 권고를 이젠 영영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비통함에 젖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동정녀 글라라와 자매들이 성인이 약속한 크나큰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시신을 안은 형제들은 상당한 시간을 거기서 지체하였다>

 

그것은 1226년 10월 4일의 일이었습니다. 그 2년 전부터 글라라는 병석에 눕게 되었고 이 지병은 임종의 시각까지 29년간 성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29년은 고통 중에 사랑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성녀의 삶의 신비, 그토록 순수한 믿음과 오롯한 성실로 인간적 모든 즐거움을 떠나고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살아간 이 삶의 신비는 무엇일까요?

 

 

 

제4장 성녀 글라라의 기도

 


성녀 글라라의 신비는 기도입니다. 주님 곁에 머물러 있기를 중단하지 않은 데  그 삶의 깊은 신비가 있습니다. 

 

열어덟의 나이로 한밤중에 집을 나와 뽀르찌웅꿀라 성당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제대 앞에 나아간 그 순간, 성녀는 세상으로 향하는 문의 빗장을 굳게 닫아 걸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 신비의 방에 들어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신비 안으로 숨어든 성녀가 선택한 봉쇄의 담장은 눈에 보이는 표시일 뿐입니다. 이 신비를 떠나지 않으려는 의지의 작은 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 다미아노의 봉쇄담장 안에서 보낸 성녀의 전생애는 마치 기도와 관상으로 지새운 긴 밤, 하느님과 함께 한 프란치스코의 하룻밤과도 같았습니다.

 

산 다미아노의 담장 안에서 성녀는 온전히 하느님께 잠겨들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성녀는 가련한 버러지 성 프란치스코와 한없이 감미로우시고 사랑하올 하느님 사이에 오간 사랑의 밀어가 메아리치는 곳이어서 더없이 정겨운 움부리아의 넓은 들판이며, 나무와 풀포기를 흔드는 오빠 바람의 다정한 속삭임과 고요와 적막의 바위동굴, 맑고 잔잔한 물결이 이는 트라시메노 호수를 다시 만났습니다.

 

성녀 글라라에게 있어 봉쇄는 자유입니다. 자유인 프란치스코가 누리는 낙원적 자유, 주님과 단 둘이 누리는 그 자유의 공간입니다. 마치 그의 가난이 온갖 선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품는 빈 마음인 것과도 같습니다.

 

'네 마음을 비워 큰 그릇이 되어라, 그러면 내가 그 그릇을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리라.'고 주께서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자진하여 가난해지면 온갖 부와 넘치는 사랑, 성부와 성자와 성신간에 오가는 사랑의 친교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영을 받아들일 빈 그릇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비워 가노라면 주님 홀로 우리 안에 머무시며 우리는 그분의 거처가 됩니다.

 

가난해진다는 것은 바로 관성적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동정 마리아 안에서 말씀을 사람되게 하신 영, 가난한 이의 대부이신 주님의 영께 자신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성녀 글라라의 삶은 다만 기도입니다. 그 나이 열여덟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를 성 프란치스코에게 온전히 내맡기고 인간 본성의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까지 모두 포기하였습니다.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믿음이며 전재산은 하느님의 영광일 뿐인 영적이며 내적인 무소유의 처지에 만족하였습니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것이 기도이든 노동이든 성녀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구하였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임으로써--주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어감으로써 --성녀는 기도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그 존재와 삶은 쉬임없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어 감으로써 -- 성녀는 기도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그 존재와 삶은 쉬임없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되려고 소박하게 마음을 열고서 존재 깊숙이 받아들인 말씀의 성숙을 위해 하느님 신비의 샘가에 고요히 머무는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성녀 글라라는 마음을 활짝 열고 빈 두 손마저 내밀며 기다리는 순박하고도 굳센 동정녀입니다.

 

성부로부터 샘솟아 성신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흘러 내리는 구원과 은총의 카다란 물줄기를 받아 담는 맑고도 깨끗한 빈 그릇입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이 생명을 얻도록 산 위에서 밤을 지새우며 성부의 현존 앞에 머무는 그리스도 곁에서 성녀 글라라는 침묵하는 가난한 동정녀로 있습니다.

 

성녀의 가난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방해가 되는 그 어떤 속박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해주는 기도와 관상의 필수적 전제조건입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 거기에 당신의 마음도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물이란 하느님 소유인 만물 중에서 인간이 자기 소유로 느끼는 모두를 일컫습니다. 

 

순명은 그녀를 자기로부터 분리시켜 하느님께서 항상 자유로이 이용하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시신으로 비유하고 성녀 글라라 안에서 육화된 참된 순명의 사람은 정말 이 세상에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만이 다음 일에 대해 전혀 기대함없이 다만 그 순간의 평화 안에 만족하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주어진 순간을 살기 때문입니다.

 

봉쇄의 숨은 생활은 가난과 순명의 절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보다 깊이 있게 표현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비워가는 삶의 형태입니다. 

 

성녀 글라라에게 있어 봉쇄의 삶은 온 인류를 위하여 홀로 산 위에서 아버지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에의 체험입니다.

 

주님이 맛본 십자가상 고독의 체험, 하느님과 인류를 중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와 세상 사이에 서서 인간사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자진하여 희생제물이 되는 그 고독에의 체험입니다. 


단지 하느님을 위하여, 그분과 함께하기 위하여, 그분으로 인하여 세상은 물론 스스로까지 오롯이 포기하게 되면 세상사에 흥미와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속의 가지가지 것에 관심을 갖고 살아야 된다는 사실 자체가 역겹고 방해처럼 여겨집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흠숭하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어떤 피조물을 찾으실 때 그 무엇도 감히 그분과 피조물 사이에 오가는 담화를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그 순간부터 성녀 글라라는 오로지 그분께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 삶의 전부는 심지어 호흡까지도 사랑하는 분과의 끊임없는 사랑의 교환이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현존 가운데서 거닐음이며 그 님과 말없는 사랑의 속삭임이 였습니다. 

 

그 온 존재는 항상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서만 비롯되는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어떠한 갈등이나 혼란의 표시도 찾아볼 수 없이 명랑하고 쾌활하여 넘치는 내적 기쁨은 성녀를 대하는 모든 이에게 번져갔습니다.

 

성녀는 아주 오래,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성녀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온 힘으로, 존재 전부로 그분을 사랑하고 흠숭합니다.

 

성녀에게 있어 기도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한 오라기의 남김도 없이 전 존재와 더불어 하느님께 온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녀의 기도는 끊임없는 고신극기로 스스로를 정화하며 결코 한계을 두지 않는 자이포기로 표현되는 포괄적인 가난과 참된 순명의 삶입니다.

 

성녀의 기도 방식은 무궁무진하였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땅에 엎디어 주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흠숭하는 데 지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분 앞에 머무는 이런 오랜 시간을 통하여 그분을 사랑하며 자신을 그분께 봉헌할 새로운 착상과 힘을 항상 새롭게 얻었습니다.

 

기도에서 물러나오는 성녀에게서 자매들은 그때마다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보다 얼굴이 더 맑고 아름다웠으며 입에서는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만이 흘러나왔습니다. 시성조사 과정에서 자매들은 이에 대해 수없이 많은 증언을 하였습니다.

 

기도에서 물러나온 동정녀 글라라는 하느님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할 말이 없는 듯 그 외에는 일체 들으려고도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권고와 위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듯하여 자매들은 그녀가 기도에서 물러나오기를 간절히 가디렸으며 매번 마치 천국에서 지상으로 되돌아온 거룩한 분을 만나듯 기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여종은 쉴 줄을 모르고 기도하였고 이야기는 언제나 하느님과 천상 사물에 관한 것뿐이었으며, 세상사에 도무지 관심이 없어서 그런 일을 입에 담거나 귀기울이는 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동정녀 글라라의 삶은 끊임없는 기도와 관상의 나날이었습니다. 기도에서 물러나오면 그녀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더 곱고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형용할 수 없이 부드럽고 감미로워 천국에서 성인들이 바로 그렇게 지낼 것 같았습니다.

이미 관상의 경지에 이르렀어도 항상 새롭게 온 마음으로 기도하는 원장 어머니에게서 한 점의 방심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또 기도 후의 얼굴빛은 평소보다 더 맑게 빛났고 말마디에는 정이 넘치도록 담뿍들어 있었습니다. 


끝기도 후 수도원의 하루 일과가 다 끝나 수녀들이 모두 딱딱한 멘바닥의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성녀는 홀로 기도하였습니다. 땅에 엎디어 기도하는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기도중에 자주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 어느날 밤에 사탄은 검둥이 소년의 모습을 하고 곁에 와서, "그렇게 울다간 눈이 먼다. 이제 그만해 둬."라고 말하자 "하느님을 뵙는 이는 결코 눈이 멀지 않아.'하고 응수하였습니다.

 

같은 날 밤 자저의 독서기도 후에 혼자 기도하고 있는 성녀에게 그 유혹자는 다시 한번 다가와, "너무 울지 마, 그렇게 오래 울다간 뇌가 물러져 콧물과 함께 흘러내리고 코도 삐뚤어지고 말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을 섬기는 이는 절대로 삐뚤어지지 않지."라고 즉석에서 응수하니, 사탄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성 프란치스코가 말한 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이며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게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면 그분의 형제가 됩니다.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입니다. 거룩한 행실로서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을 비추어 줄 때 우리는 또한 그분을 낳게 됩니다.

 

성녀 글라라는 그리스도의 딸, 누이이며 어머니였습니다. 그리스도께 다한 타는 사랑으로 인하여 이 모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어머니가 그분을 누더기에 싸여 초라한 구유에 눕히시는 정경을 묵상하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였습니다. 주님이 올리브 동산에서 당하시는 극도의 고통을 함게 나누고 십자가 상에서 목말라 하시는 그분의 갈증에 동참했습니다.

 

성녀는 언제나 그분과 함께하고 그분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셨고 성녀는 포도나무의 잔가지로서 매순간 새로이 그 둥치로부터 수액을 빨아들였습니다. 

 

 

베들레헴의 아기

 

그리스도의 성탄 축제를 성녀 글라라는 해마다 넘치는 사랑과 경이에 가득찬 마음으로 맞이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이신 거울의 맨 밑을 보시고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워 계시는 그 가난을 깊이 바라봅시다. 

 

오, 놀라운 겸손이여! 오, 기막힌 가난이여!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이 구유에 누워 계시다니!> 하고 보혜미아의 공주 아녜스에게 편지를 보낸 성녀 글라라는 자매들에게 남긴 수도규칙에서 말했습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지극히 거룩하고 사랑하올 아기와, 지극히 거룩하온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나의 자매들에게 훈계하고 간청하며 권고합니다. 항상 남루한 옷을 입으십시오.>

 

아트리의 필립보 형제가 자매들에게 강론한 어느 날, 세 살 남짓한 옥동자가 강론이 끝날 때까지 성녀 곁에 다정스레 앉아 있는 모습을 아녜수 디 오뽀르뚤로 수녀가 목격하였는데 이 때 수녀는 특별한 천상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칸 디 까삐따네오 수녀도 성녀의 품에 안겨 있는 대단히 사랑스런 옥동자를 보았으며 그 아기를 어루만질 때마다 머리 위에는 타는 듯한 불날개가 둘로 나뉘어지면서 성녀의 얼굴을 덮어 숨겨 주더라고 증언하였습니다.

 

1252년의 성탄절에 일어난 일화 역시 여기에 소개할 충분한 가치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성탄대축일은 이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성탄 축제였습니다. 자정 미사 전 성무일도를 바치기 위해 한 수녀도 빠짐없이 가대로 내려가고 성녀는 홀로 병든 몸을 자리에 누이고 공동침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꼼짝 못하고 누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성당을 향하는 수녀들의 발걸음이 고요한 밤을 울리더니 이윽고 그 소리도 엄추었습니다. 곧 아래층 가대에서는 구세주의 성탄을 기리는 수도원 전례의 벅찬 감격이 기쁨의 환호성이 되어 울려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녀는 외로이 지붕방의 침실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동정녀의 품안에 사람이 되어 나셔서 초라한 강보에 싸인 그 아기,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육화인 천상 아기를 온 수도가족과 함께 찬미하고 흠숭하는 전례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간절하였습니다. 가대로부터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텅 비어 싸늘한 방은 적막과 고요뿐이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성탄 축제에, 이 큰 잔칫날 저를 홀로 여기 두시옵니까?' 성녀는 탄식하였습니다. 이 날은 오랜 병상생활 그 어느 때보다 고독하였습니다. 

 

평화가 넘치는 이 밤에 --- 머지않아 베들레험 마구간 구유에는 아기가 누워 울음을 터뜨릴 터였습니다. 태어날 천상 아기, 그 크나큰 사랑에 대해 묵상하면서 아기께서 잠시 후에는 오시리라는 확신으로 인해 갑자기 들이쉬는 공기가 더 맑아진 듯하였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삼라만상이 숨을 죽이고 있는 이 밤의 평화! 이제 곧 한 아가의 울음소리가 이곳을 채울 것입니다.

 

'오 타는 사랑이여! 눈부신 태양보다 더한 빛이시여! 당신이 오시는데 주님, 저는 이렇게 홀로 누워 있나이다. ----'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의 온갖 상념들이 사랑 안에 녹아 내렸습니다.

 

그러자 멀리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부터 장엄한 성탄성가가 똑똑하게 들려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분명 형제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시편을 노래하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작은 형제들의 성탄 전례였습니다. 장내는 성대한 성가와 눈부신 불빛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분, 아기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구유에는 찬란한 빛에 감싸인 아기, 지존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누워 계십니다.

 

폭 넓은 장옷을 두른 동정 성모님은 어느 때보다 더 순결한 자태로 그 곁에 끓어 계십니다.

 

그분이 탄생하셨습니다.

 

오, 사랑, 사랑, 사랑이 넘치는 아기여! 주님, 찬란한 당신 사랑의 빛이 이 밤의 어둠을 밝히나이다. 탄생하신 당신께 올리옵는 이 찬미가를 들으십니까? 주님, 당신께서 정녕 탄생하셨나이다.

 

자정 미사 후 그 거룩한 밤의 은총과 기쁨을 홀로 계신 어머니와 나누려고 지붕방을 찾아든 수도가족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들을 맞아들이는 어미니의 기쁨을 뵈었습니다.

 

"사랑하는 따님들이여, 우리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로 해요, 자매들과 함께할 수조차 없이 혼자 이 거룩한 밤을 보내야 하는 나를 주님은 가여워하셨습니다. 그분의 그지없는 은총으로 나는 오늘 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성탄 전애제에 실제로 참례하고 주님의 구유도 볼 수 있었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께 대한 사랑

 

성녀 글라라의 천상아기께 대한 남다른 사랑에 이런 특별한 방법으로 성탄 전례에 참례하는 기쁨의 은총이 허락되었듯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께 대한 크나큰 사랑은 또한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께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어, 주님이 당하신 수난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새롭게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엮어 가르쳐 준 <주의 수난 성무일도>를 성녀는 자주 기도하였습니다. 또 주님의 수난을 기억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평소에 입고 있는 고의의 수많은 매듭을 더욱 졸라매었습니다.

 

성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항상 염두에 두고 마음 깊이 모실 것을 수련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묘사하는 영적 훈화는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아녜스 성녀에게 보낸 편지도 이러한 맥락으로 계속됩니다.

 

<이젠 끝으로, 거울의 맨 위로 그대의 시선을 향하시어 십자나무위에 못박혀 고통을 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깊이 바로보며 관상합시다.

 

그리스도 자신이신 이 거울께서 십자나무에 매달려 계실 때 지나가는 행인들에게조차 이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재촉하셨어요.

 

'길 가는 나그네들이여, 나를 보시오, 내가 겪는 고생과 같은 고생이 또 어디 있겠소?' 사랑하는 자매여, 이렇게 눈물로 탄식하시는 그분의 외침에 마음과 입을 모아, 당신 손수 성서에서 말씀하신 대로 응답하기로 해요.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내 마음 괴로워하겠나이다. 그러므로 천상 임금의 왕후이신 자매여, 이 사랑의 불덩이에서 불을 붙여 그대 안에 주님께 대한 사랑의 불이 날로 다 타오르게 하소서>

 

성녀는 주님의 수고 수난을 기념하며 마음 깊이 품고 헤아리는 데 온 정열을 다 소모하였습니다. 주님의 수난시기는 곧 성녀의 수난시기였습니다.

 

어느 해 성목요일, 오후도 이미 지나 저녁 어둠이 깔리고 있었습니다. 올리브산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하실 정도로 고통 당하심에 생각을 모으자, 성녀 앞에는 고통의 심연이 열리듯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슬픔이 복받쳐 왔습니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는 주님과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성녀는 외딴 곳으로 물러 나왔습니다. 형언할 수 없이 큰 고통으로 피땀 흘리시는 그분과 함께 그 고통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습니다. 

 

기드온 골짜기로부터 폭도 무리의 온갖 조롱을 참아받으시는 총독 관저의 뜰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온 인류의 구원의 길인 그 고통의 길을 성녀의 영혼은 주님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되어 자신의 존재 전부로 고통받는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비애가 엄습하여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조차 없어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눕고 말았습니다.

 

간호를 맡고 있던 필립빠 수녀가 오랜 침묵에 걱정이 되어 방에 들어왔을 때 이러한 상태의 어머니를 발견하였습니다. 성녀는 성금요일 하루종일을 자리에 누워 탈혼중에 수난당하시는 주님과 하나되어 있었습니다.

 

성토요일도 다 저문 저녁 시각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는 그대로 누워계신 채였습니다. 마침내 촛불을 밝혀든 필립빠 수녀가 가끼이 가서 순명의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요기하지 않는 날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사부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순명의 부름에 성녀는 제 정신으로 돌아와 필립빠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침에 무슨 촛불인가요?"

 

"어머니, 밤이 이미 지나 낮이 되고 또 그 하루가 지나고 새 밤의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하였어요." 라고 경건한 딸이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아, 이 얼마나 복된 잠이었는가! 사랑하는 따님이요, 내 그토록 그리워 하던 바를 주께서 지나간 밤들에 허락하셨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이 사실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게 비밀로 해주어요."

 

<주님의 신비를 자기 마음 속에 간직하는 종은 복됩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시는 선물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또다른 이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기보다는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말로 보여 주려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그는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고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별로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라고 성 프란치스코는 가르쳤습니다. 

 

 

지존하신 성체와 성녀 글라라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신비 안에 잠겨들어 이를 관상하는 성녀의 삶에 있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며 결과였습니다.

 

성인들에게는 주님과의 일치 가운데 그분의 삶을 재현함이 자신의 존재 전부를 온통 그리스도화 하고 그분으로 가득 채우는 것-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 을 의미하므로 성체성사 안에서의 예수님과의 결합은 성녀 글라라를 매번 깊은 경회심으로 가득 체워 온 마음으로 전율케 하였습니다.

 

지존하온 성사 안에 감추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녀는 얼마나 지극한 정성과 경외심으로 모셨던지 마치 온몸이 이를 다 표현하는 듯이 영성체 때마다 전신이 바르르 떨렸습니다.

 

 

사라센 군대의 산 다미아노 침범

 

지존하온 성체께 대한 성녀 글라라의 무한정한 신뢰와 믿음을 명확히 증언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1240년 9월의 어느 금요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야수와도 같은 사라센인들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프리드리히 2세는 아씨시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녀는 지붕방의 병석에 누워 운신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군인들과는 그 포악성이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라센 군대가 수도원을 향하여 일제히 몰려드는지 고함소리와 무기 부딧치는 소리가 요란해지자 기겁을 한 수녀들이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며 유일한 도움이요 보호자로 믿는 어머니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성녀는 그들 모두를 안심시키며 침착하게 말하였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매들, 사랑하는 따님들이여, 두려워하지 말아요,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한 그 어떤 원수나 재앙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리니 우리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께 굳건한 신뢰심을 가지고 달아듭시다. 그분 손수 우리를 구해 주실 거예요, 나 역시 그대들이 아무런 고통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증이 되겠으니 그들이 오거든 나를 그들 앞에 대려다 주어요."

 

성무일도 9시경을 기도하는 시각에 이르러 수도원 담장까지 몰려온 폭도들의 함성과 무기 부딧치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산 다미아노 봉쇄 안의 수녀들은 큰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대부분의 폭도들이 벌써 수도원 경내로 침입해서 몇몇이 담장을 넘어 들어오는가 하면 일부는 수도원 내부 뜰까지 들어와 수도원 식당문을 부서져라 두드려도 안에서 기척이 없으니 강제로 열기 위해 서너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밀어젖히고 있었습니다. 혼비백산한 수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거룩한 어머니의 주위로 몰려들 뿐이이었습니다.

 

프란치스카 디 까삐따네오 수녀와 릴루미나따 다 삐사 수녀에게 몸을 의지하여 식당문 앞으로 옮겨 온 성녀는 식당문과 자기 사이에 상하와 금은세공의 성합에 모셔져 있는 지존하온 성체를 정중히 안치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땅에 엎디어 엄위하온 성체 대전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성녀를 부축해야 했던 두 수녀는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주님, 보시다시피 당신의 이 여종들을 보호하기에 제 힘이 미진하오니 의지가지 없는 당신 여종들을 굽어보사 지켜주소서." 그러자 거룩하온 빵의 형상으로 당신 모습을 감추고 계신 그분께서 작은 성합 안에서 대단히 부드러운 아기 음성으로 낭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대한 사랑으로 내가 너희를 항상 지켜 보호하리라."

 

성녀는 이어서 위기에 처한 아씨시 시민들을 위하여도 기도하였습니다.

 

"주남 이 도시에도 자비를 베푸시어 위험에서 구하소서."

 

이에 앞의 그 음성이 다시 대답하였습니다. "시는 갖가지 위험을 당하게 되겠으나 내가 그를 보호하리라."

 

주님과 글라라간의 이 짧은 대화가 오간 후 식당문 뒤에서 들리던 소란이 갑자기 멈추고 산 다미아노는 다시 그 특유의 고요 속에 밤겨 들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동정녀

 

지나가고 말 세속사정에 급급하여 온 관심이 거의 쏠려 있는 마르타와는 반대로 주님의 발치에 조용히 앉아서 그 말씀에 귀기울이는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로부터 관상의 전형적 인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대접하느라 바쁜데 도와 주지도 않는다고 마리아를 힐난하는 마르타에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하고 그것을 빼았기지 않을 것입니다.

 

더 좋은 몫, 유일하게 좋은 몫인 사랑, 관상 안에서조차 풀리지 않는 기갈로 남을 이 사랑이야말로 영원합니다.

 

이 더 좋은 몫, 관상을 체험하고 살도록 성녀 글라라는 불리움 받았습니다. 성녀는 삶의 매순간을 일할 때나 기도할 때나 고통의 순간과 환히의 순간도 하느님을 향하는 관상의 여정, 겸손하고도 지속적인 신비로운 사랑의 체험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관상의 체험은 성녀로 하여금 무궁무진한 하느님 신비의 심연에 젖어들어 침묵과 담화, 고독과 공동체 생활, 이별과 만남 이 모두를 함께 잇는 참된 삶의 조화를 이루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바로 삼위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신간에 오가는 사알에의 체험이며 이 사랑에 한 몫을 누림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되신 그분의 말씀, 동정 마리아로부터 혈육을 취하사 가난하게 구유에 누우시고 헐벗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하느님의 그 사랑에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동참하고 체험하는 삶입니다.

 

성녀 글라라의 삶은 영원히 낡지 않고 변함없는 복음에 기반을 둔 비움과 가난의 순간들입니다. 이 삶은 주님을 향해 깨어 있음이며, 그분이 허락하시는 모든 상황과 사물에 마음 깊이 동의하고 승낙하는 삶입니다. 그분과 한마음 한뜻으로 깊이 결합되어 친밀한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 변화무쌍한 현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분이 이루시는 놀라운 업적에 깊이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이 삶은 또한 고독하신 그분과 같이 고독과 침묵으로 하나되어 매순간 그분과 함께 하고 그분의 삶에 한 몫을 누림입니다. 한마디로 성녀의 삶은 하느님의 모든 계획을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 그분이 구원을 이루게 해드림으로써 온 인류에 대한 그분의 구원계획이 주님을 통하여 교회 안에 완성되게 하는 삶입니다.

 

관상은 세상과 교회를 위하여 주님의 영께 자신을 무한정 개방하는 영혼의 태도, 온 마음과 혼을 다하여 온전히 하느님께만 매달리고 좌우되기 위하여 성부의 품안에서 그 아드님이신 주 예수님과 함께, 그분으로 인하여 그분의 부활을 즐기기 위해 세상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가운데, 존재에서, 물질에서, 그리고 스스로에게서조차 가난하고 비워져서 하느님 홀로 자기 안에서 자유로이 노니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무너져가는 하느님의 집인 인류를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성녀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행위로서 보다는 존재로 이루어지는 이 소명은 세상을 대신하여 스스로를 매순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데 있습니다. 순간순간 반복하여 자신을 버리고 비워 하느님 홀로 그 안에 드셔서 계실 자리를 내어드림으로써 그분의 구원계획이 온 인류 안에 완성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한없이 감미로우시고 사랑하올 주 하느님, 당신이 누구시옵고 가련한 버러지인 이 미천하고 쓸모없는 당신 종이 누구이길래 이토록 큰 은혜를 베푸시옵니까.' 라고 반문할 뿐이 가난 안에서, 무한히 크오신 그분 앞에 겸손되이 비천한 자기 처지를 알고 받아들이는 가난으로 이 소명은 응답됩니다.

 

이러한 겸손으로 자기를 바르게 인식하는 영혼의 관상은, 마치 한줄기 번갯불이 짙은 밤의 어둠을 가르듯 믿음의 어둔 밤을 찢습니다. 이 빛은 하느님께 귀의하는 가난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붙여 조명하면서도 활기차게 타오르게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동정 성모의 태중에 들어가셔서 머무신 것처럼 믿는 영혼 안에 들어오셔서 그 안에 머무시기를 원하십니다.

 

실로 진리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 또한 그를 사랑하고 우리가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녀의 모든 말씀은 관상으로 이어지고 관상으로 귀결됩니다. 온 마음과 생각이 그 얼마나, 그리고 항상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그리스도께 향하고 있었는지 알아 보려면 성녀가 남긴 얼마 되지 않는 문헌 중에서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보낸 네 통의 편지와 가난회칙과 유언을 잠시 들추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은 인간의 아들네보다 짝없이 아름다우시지만 그대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 중에 가장 비천한 사람이 되셨고, 멸시를 받았으며, 얻어맞고, 온몸에 수없이 매를 맞아 십자가의 참혹한 괴뇌 중에 돌아가셨으니 이러한 그대의 정배를 우러러뵙고 깊이 묵상하고 관상하며 닮아가기를 열망하소서.

 

그대가 그분과 함께 고통을 당하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옥좌에서 다스리게 될 것이고, 그분의 아픔에 동참하면 그분과 함께 기뻐 용약하게 되며, 그분과 함께 비통의 십자가에서 죽으면 성인들의 영광으로 빛나는 천상거처를 소유하게 되리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글처럼 성녀 글라라가 남긴 짧은 글들도 그 영적 체험의 소중한 열매입니다. 고요의 베일이 드리워진 성령의 신방에 드신 동정 성모님처럼 하느님 현존 가운데 머무름으로 영글어진 영적 체험의 결실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언니 죽음의 도착이 가까워서야 이 베일이 약간 들춰져서 성 프란치스코가 바란 대로 그녀를 지존하신 아버지의 딸이며 여종으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 놀라운 영적 어린이의 길, 어린이 같은 영적 위탁의 자세는 언니 죽음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축복받은 내 영혼아, 착하신 안내자를 따라 안심하고 네 길을 가렴, 너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널 먼저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사 아가를 보살피는 엄마의 사랑으로 널 언제나 아끼고 돌보아 주셨으니 이제 기쁘게 그분께로 가자 ---- 저를 지어내사 이 삶으로 부르신 주여, 찬미받으옵소서." 그리고 이어서 성삼위 하느님에 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하도 심오해서 수녀들에게는 이해가 곤란하였다>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던 수녀들은 증언하였습니다.

 

성녀 글라라는 기도의 무지개, 지존께 드리는 영원한 사랑의 산 언어입니다. 삶의 하찮은 순간, 그래서 가장 본질적인 그 순간에 기쁨에 넘친 아가의 순진무구한 감사의 찬가마냥 피어올라 아버지 하느님의 천상거처를 가득 채우는 관상이라는 이름의 끝없는 메아리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과 기회들은 성녀 글라라에게 하느님의 크신 사랑, 그분을 사람이 되게까지 한 그 크신 사랑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연계의 온갖 피조물은 성 프란치스코에게처럼 성녀에게도 주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하는 고요한 음성이었습니다.

 

외부수녀들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성녀는 신록이 무성한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들판과 길을 지나거나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거나 어떤 피조물을 대하게 되든간에 이 모두에게 창조주 하느님을 뵈옵고 오로지 그분 때문에 이에 대하여 주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간곡히 타일렀습니다.

 

성녀 글라라에게 있어 봉쇄의 담장은 세상과 그 안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도피하거나 그들과의 격리를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수도원의 고요와 침묵 중에 피어오른 기도의 메아리가 하느님 자신 외에는 아무 중개자도 거치지 않고 오롯이 그분께 이르게 하는 필수불가결의 수단이었습니다. 이 침묵의 소리는 인간적 사리사욕에 때묻거나 더렵혀지지 않은 채 티없는 순수함으로 그분께 도달해야 합니다.

 

봉쇄 담장 안의 고요 중에 울려나는 이 메아리는 그분을 찬미하고 온 인류의 희노애락을 그분께 아뢰는 것이어야 합니다.

 

산 다미아노의 봉쇄 안에서 성녀는 담장 너머의 모든 피조물들을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나고 그분 안에서 삼라만상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숱한 애착심에서 자유로워진 그녀는 그 모두를 하느님이신 맑고 투명한 거울을 통하여 보았으며 이렇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만물의 참 의미, 그 참가치를 그들에게 되찾아 주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참 존재 이유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음을 성녀는 침묵의 소리로 선포합니다.

 

<어느 곳에서도 그토록 철저히 침묵을 준수할 수가 없었다>고 성녀의 천 전기작가는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오직 침묵 가운데, 고요 속에서 기도는 성장해 갑니다. 그러나 이 고요와 침묵은 봉쇄의 담장 안에서만 가능하거나 거기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뭇 꽃들과 신록이 우거진 숲과 온갖 피조물과 모든 사람 안에서, 우리가 지나는 산과 들, 거리에서도 하느님은 뵈올 수 있고 찬미받으시며, 이것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성녀는 확신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세상에 끌어 내리기 위하여, 이렇게 세상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성녀 글라라는 봉쇄의 담장 안으로 숨어 들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세상을 떠나 봉쇄 안에 숨어서 하느님의 신비 안에 온전히 젖어들어 그 신비를 살기에 성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세상 모든이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성녀처럼 숨어서 기도하는 관상수도자만큼 이 세상의 슬픔을 같이 울며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고뇌에 찬 세상과 인류와 가장 가까이 있어 주고 그들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 안에서 함께 나누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성녀는 딸들에게 자주 일러주었습니다.


"자매는 하느님의 협조자, 그분의 구원성업을 거드는 짝이며 그분의 연약한 지체인 교회를 떠받치는 버팀목임을 명심하십시오.

 

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려면 아기를 품을 어머니가 있어야 하고 그 역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더 잘 알 듯이, 성녀의 모범을 따르는 관상수도자도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세상과 인류를 자기 품에 안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녀 글라라의 기도는 순수한 관상이면서 동시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청원기도였습니다. 스뽈레또의 마티아 아기, 수녀원의 후견인 죠반니공의 아들, 환자 수녀들, 악령에 사로잡혀 고생하던 삐사의 한 부인, 아씨시 시민 모두, 교회와 세상, 온 인류를 위한 끊임없는 기도로 점철된 삶이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동정녀, 성녀 글라라의 삶이었습니다. 

 

 

꽃피는 기적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가난한 동정녀의 삶은 기적을 꽃피워 냈습니다.

 

스뽈레또의 세 살배기 마티아는 작은 돌맹이를 가지고 놀다가 코에 그 돌멩이가 들어갔는데 도저히 빼낼 수 없도록 비강 깊숙이 들어가 아기는 질식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막은 돌멩이로 호흡이 곤란해지고 아기의 목숨은 경각에 달하였으나 누구도 아기를 도와줄 수 없게 되자, 다급해진 사람들은 산 다미아노의 수도원장에게 아기를 데려와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성녀가 아기 이마에 십자성호로 강복하자 돌멩이는 아무 어려움없이 빠져나왔습니다.



 

아씨시 시의회 의원이며 수녀원의 후원자인 죠반니공의 어린 아들은 임파선염에 의한 심한 고열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다미아노의 행정적 업무에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가까이 지내와서 수도원장의 뛰어난 성덕을  알고 있던 아버지가 다섯   아들을 수도원으로 데려왔습니다. 성녀의 기도와 강복을 받은 소년은 완전히 쾌유되어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있었습니다.

 

뻬루지아에서도  아기를  다미아노로 데리고 왔는데  아이의 눈동자는 백태로 덮어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녀가 아이의 눈을 어루만지며 십자성호로 강복한  아이를 자신의 어머니인 오로똘라나 수녀에게 데리고 가서 강복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오르똘라나 부인은 파바로네경이 세상을 떠난   다미아노에 와서 딸들과 함께 작은 형제들의 보속의 수도복을 입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글라라의 지시에 순명하여 오로똘라나 수녀가 아이에게 강복하니, 눈동자를 가리웠던 백태가 걷혀지고 아이는   있게 되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괴로움을 당하던 삐사의  부인은  다미아노에 와서 기도를 부탁하고 귀가길에서 완전히 치유되어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감사하였습니다.

 

성녀는 여기서 예로  사람들, 생명이 위독한 아이들이나 앓는 수녀들과 삐사의 부인만을 위하여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다미아노에 몰려온 사라센 폭도들로부터 수도원과 수녀들을 지켜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구할 적에 같은 위험에 직면한 아씨시를 위하여 기도하기도 잊지 않았던 성녀를 우리는 앞장에서 보았습니다.

 

 

위험에 처한 아씨시

 

하느님 옥좌에 이른 성녀 글라라의 힘찬 기도를 웅변해 주는  한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아씨시 일대를 공격한 사라센 군대가 성녀 글라라의 기도로 참패한  다음해 1241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비딸리스 아베르사의 지휘 하에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는 다시 아씨시를 포위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완전히 함락될 때까지 공격을 그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시는 있는 힘을 다하여 막강한 황제의 군대에 대항하였으나 마침내 점령의 위기에 놓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을 전해들은 성녀는 모든 수도가족을 불러 모았습니다. 목격 중인인 프란치스카  까삐따네오 수녀의 입을 통하여  사실을 들어 보기로 합시다

 

원장어머니는 수녀들을 자리 앞으로 불러모아 말씀하셨습니다.

 

"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착하게도 우리를 항상 돌보아  우리 고향 도시에 중대한 위험이 임박하였으니, 하느님께 우리 모두 기도드립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수녀들이 어머니의 명령에 순명하여 성녀의 침상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딸들이  모이자 수도원장은 재를 가져오게 하여 먼저 자신의 머릿수건을 풀고 맨머리를 드러낸  자매들에게도 따라하라고 하였습니다. 새로 삭발한 자신의 머리에 가장 많은 양의 재를 뿌리고 수녀들의 머리에도 재를 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성당으로 가서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기도와 보속의 날에  다미아노의  수도가족은 마른 빵과 물로만 요기하고 체력이 허락하는 수녀들은 이마저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대어 주는 은인들의 사랑에 기도로 보답한  다임아노 수도가족의 사랑보다  적절한 사랑의 응답과 나눔이 있을까요?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을 후하게 도와  아씨시 주민들의 인심에 성녀는 기도로 은혜를 갚고자 하여서, 하느님은 그들을 적군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셨습니다

 

 

 

숨은 생활의 사도직

 

성녀 글라라의 관상기도는 세상을 향하여 언제나 마음을 열고 있는, 세상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는 기도를 통하여  다미아노의 봉쇄담장이 활짝 열리고  안의 성녀와 세상,  인류 사이는 뗄래야 뗄수 없는 깊은 관계가 맺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성녀는 갖가지 인간적 어러움과 문제점을 깊이 이해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성녀는 봉쇄 안에서도, 아니 바로  안에서 누구보다도 인류와 온갖 피조물 가까이에 있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과 피조물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성녀를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신 하느님, 우리 인간에 대하 극진한 사랑에서 사람이 되신 그분에 대하여 성녀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녀 글라라의 기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인간에게서 하느님께로 오가는 사랑의 순환입니다.

 

봉쇄의 담장은  사랑의 회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시키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목적은 무엇이냐고 그대는 의아해 하십니까? 우리  대답을 전례에 사용하는 향의 의미를 묵상한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님의 이야기에서 찾아볼까요?

 

<내가 보니 천사 하나가 금향로를 들고 제단 앞에  섰더라. 향을 받아   천사의 손으로 향연기가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는데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묵시록은 말한다.

 

맑은 향을 숯불에 얹어 향로를 흔들  피어나는 향의 연기에는 매우 청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선율과 향기 그윽한 가락과도 같다 목적을 따로 두지 않는 노래처럼 순수하다. 귀중함의 아름다운 낭비이다. 선심으로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처럼.

 

주께서 베타니아에 앉아 쉬실 적에 마리아가 값진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서 거룩하신 발에 붓고는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려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던 것이나 같다. 속이 좁은 이들은 이게  낭비냐고 투덜거렸으나 천주 성자는 "가만두어라. 이것은 내가 안장될 날을 두고  일이라"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죽음과 사랑과 향기와 봉헌의 신비가 담겨 있었다.

 

향을 피우는 일도 그렇다. 아무런 목적도 따로 두지 않고 그저 자유로이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의 신비가 여기 있다. 타고 태우면서 죽음을 지나가는 사랑의 신비가 여기 있다. 답답한 이들은 여전히 이게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게다.

 

이것은 향의 제헌이다. 성서에서는 이를 성도가 올리는 기도라고 하였다. 향연은 기도와 표상이다. 특히 아무런 목적도 두지 않는 기도, 시편의  편이 끝날 때마다 이어지는 영광송처럼 그저 아무 소원도 없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기도, 오직 그토록 훌륭하시기에 하느님께 흠숭과 감사를 올리는 그런 기도의 상징이다.

 

물론 이러한 상징을 너무 찾다 보면 지나칠 수도 있다.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향구름을 보고 신비로운 분위기에서라도 젖으려 할지 모른다. 그것은 종교적 감상이라 하겠다. 감상을 거슬러 기도를 정신과 진리의 길로 다시 이끌려는 크리스천 양심의 소리는 옳다. 우리에게 순박과 양식을 권유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좁은 소견과 메마른 마음에서 오는 무작스럼도 종교에서 찾아볼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터뜨린 불평 따위가 그렇다. 그런 태도로는 기도도 한갖 정신적 실요성에 그치고 만다. 기도마저 따져 해아려야 하고 통념적으로 납득이 가야만 하게 된다.

 

이런 마음으론 기도에 있어 한껏 주고만 싶어하는 여유의 대도를  까닭이 없다. 그윽한 흠숭도 알아들을  없고,  무엇하려 하느냐고 물을 생각조차 않고, 그저 사랑이며 향기이고 아름다움이기에 마냥 오르기만 하는 기도의 진수를 깨달을 리는 더욱 없다. 하지만 기도하는 마음이 사랑으로 찰수록 또한 제현되고, 따라서  향기도 타는 불에서 솟아 오른다.>

 

 

 

 5

지극히 소중한 가난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 돌아간 1226 전후 성서 글라라의  관심은 성인의  이상인 가난을 순수히 보존하는데 있었다.

 

 무렵에는  다미아노의 수도가족도 눈에 띄게 불어났습니다. 1229년에는 파바로네가의 막내딸 베아뜨리체가  다미아노의  식구가 되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의 타계로 혼자가  어머니 오르똘라나도  다미아노에 입회하였습니다. 동시에 수도회는 아씨시 이외의 지방인 이탈리아 전역과 외국으로도 뻗어나가기 시작하여, 1234 성신강림절애 보헤미아왕 오또까르의 공주 아녜스는 자기가 설립해  프라하의 가난한 자매 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성녀 글라라와 성녀 아녜스의 깊은 우정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통의 편지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미 자주 인용하였듯이  편지들은 아씨시의 위대한 성녀를 이해하고  영성을 아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 중에 하나입니다.

 

아씨시의 성녀는 프라하의 성녀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가난한 사람에게만 주님이 하늘나라를 약속하시며 주신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으리이다. 반면에 현세를 사랑하면 사랑의 열매를 잃게 되오니----

 

너를 사랑하고 포옹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풍요를 부여하는 , 복된 가난이여!

 

너를 소유하여 가지기를 열망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를 약속하시고 의심할 여지없이 영원한 영광과 복된 생명을 주시리니,  거룩한 가난이여!

 

말씀만 하시자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렇게 존재한 하늘과 땅을 다스리셨으며, 지금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황송하옵게도 무엇보다 특별히 사랑하사 품에서 놓지 않으신, 하느님의 굄을 받은 사랑스런 가난이여!

 

그분은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  당신께서는 머리  곳조차 없다 하시며 가난한 이로 십자가상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토록 위대하시고 높으신 주님께서 동정녀의 태중에 임하시여 극도로 가난하고 곤궁한 세상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소유함으로써 그분 안에 풍요로워지도록 가난한 이로 세상의 괄세와 천대를 받으려 하셨으니 사랑하는 자매여, 한없는 기쁨과 영적 환희로 가득차 즐겨 용약하소서.

 

그대는 이승에서 영예보다 멸시를, 지상의 부보다는 가난을 선택하시어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하는 하늘에다 보물을 쌓기로 하였으니, 그대가 하늘에서 받을 상급은 많고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는 지존하온 성부와 영화로우신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성자의 정배요 누이이며 어머니라고 불리움이 지당하리이다.>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

이 편지는 거룩하고 소중한 가난에로 격려하는 성녀 글라라의 수많은 글 중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글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성녀가 가난에 이어서 곧장

관상으로 넘어가며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관상하라는 권고를 잊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녀에게 있어서 가난은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안에서 가치가 있을 뿐, 고행과 수덕의 한

방법에 불과하다거나 영성생활의 목적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오로지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만이 그 의미, 완벽한 의미와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 머리 누일 곳도 없이 가난하셨기에 성녀 글라라 역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머리 누일 곳도

없이 가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머무르실 곳도, 재산도 없이, 심지어는 의복도 소유하지 

않으셨기에  ---   십자가에 못박히실 제 그분은 입고 계시던 옷조차 벗기움당하였습니다.  ---

성녀 글라라는 집과 재산은 물론 의복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신 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필요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매순간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성녀는 진실로, 문자 그댈 가난한 동정녀였습니다.  성 프란치스꼬가 인도하는 

하느님만을 위한 성녀의 삶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도 가혹하리만큼 힘들고 괴로우며 무미건조한

가난에의 철저한 체험이었습니다.  스스로 그 회칙에서 누구나 오해의 여지가 없이 수긍할 수 있도록

수차례에 걸쳐 설명하듯,  성녀와 산 다미아노의 자매들은 가난과 수고, 고생과 모욕,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성 프란치스꼬에 의하여 복음적 성소의 시험을 제안되었던 이 초기 수도생활의 체험은

성녀의 생애 끝날까지 계속되어 하느님이외의 안정보장은 멀리하고 홀로 주 하느님께 신뢰를 둘 뿐

다른 모든 애착이나 기대와 착가으로부터 성녀를 해방시켰습니다.  이 체험은 또한 가난하고 

겸손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하느님 앞에 펼쳐 보이며 아버지의 신비 속으로, 사랑 그 자체인 

기도에 자신을 개방하며 그분께 매순간 내어 드리는 성녀의 마음을 기쁨으로 넘쳐 나게 했습니다.

"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붙입니다.  님에 대한 관상은 우리를 가득채우고 님에 대한 생각은

부드럽게 빛납니다."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하늘나라는 가난한 이들의 소유입니다.  온갖 좋은  것으로 채워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 수용할

비워진 존재만이 요구됩니다.  성녀 글라라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가난은 삶의 구석구석뿐 아니라

마음의 가장 내밀한 곳에 이르기까지 빈방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가난과 겸손, 굴욕에 대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이 자기비움은 지존하신 아버지께 자기의 인격만이 아니라 자존심이라는 교만이

자주 덫을 놓는 인간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마저도 무릎  꿇게 합니다.

가난과 수고, 고생과 모욕, 세속의 멸시를 다 맛보지 않고서는 이러한 삶의 유산인 더없은 즐거움에 

이르지 못합니다.  또 성녀 글라라처럼 이 즐거움의 체험없이 자신으로부터 가난해질 수도, 겸손해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자의 그분의 가난하신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누린 유일한 몫이었고

또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되는 사람들이 누릴 몫입니다.

성 프란치스꼬가 말한 대로 진정 마음의 가난한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뺨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생활앙식을 받아들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오직

안팎으로 기운 수도복 한 벌과 띠와 속옷 하나로 만족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 형제들을 위해 지어진 성당이나 초라한  집이나 다른 건물들이 회칙에 따라 서약한

우리 가난에 맞지 않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형제들은 명심할 것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형제들은 항상 나그네나 순례자같이 기거하십시오."

"모든 형제들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도록 힘쓰며 먹고 입을 옷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사도가 말하는 대로 그 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입니다." 라는 유언과 회칙을 형제들에게 남긴 성인은 성녀 글라라에게도 이러한 가난에 대해

분명히 일러주었을 터입니다.

가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성 프란치스꼬의 기준은 사랑하난 성녀

글라라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삶을 통한 표양으로 성인은 그의 여린 풀포기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따르는 일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며 가난한 이의 소유인 하늘나라 외에 사람이 더 애써 구할 것은 없음을 보여 주었으므로

성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성녀는 이를 그때그때 배웠습니다.


"까마귀들을 살펴 보시오.  씨를 뿌리지도 추수를 하지도 않을 뿐더러 곳간도 창고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저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

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 보시오.  수고하지도 물레질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그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했습니다.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이며 아궁이에 던져질 풀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여러분이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아!  그러니 여러분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찾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시오 ------   여러분의 아버지께선는 이 모두가 여러분에게 필요함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복음은 말하기 때문입니다.

정통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성녀 글라라의 가난은 가난한 사람에게 언약된 복음에 대한 끝없는

신뢰로 아버지께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고 위탁하는 철저하고도 깊은 믿음의 삶입니다.  그리고

온갖 좋은 것을 매일같이 베푸시는 자비로운 아버지께 이 여러가지 은혜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와

고마운 마음을 지니며, 의탁하는 한없고 계산하지 않는 봉헌이며 하늘의 새를 먹이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두신 지존하신 아버지 손 안에 들어 인간적인 걱정일랑 다 떨쳐 버리고 무엇에도

마음 졸이지 않는 고요한 마음입니다.

산 다미아노의 담장 밖에서 성 프란치스꼬는 한평생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거친 수도복을

동아줄로 묶고 문전걸식하며 가난하지만 평화로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산 다미아노의 봉쇄 담장

안에서 성녀 글라라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누이, 어머니요 정배이게 하는 지극히 거룩한 가난으로

부터 절대로 떠나지 않고 임종의 순간까지 이를 지키고 변호하였습니다.


가난하게 살 특권

산 다미아노에 입회하자마자 성녀는 자기 유산 전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회개 직후 무엇보다 먼저 동정녀 글라라는 자기 몫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유산 전부를 처분해서 

얻게 된 돈을 자신이나 수도원을 위하여서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세상의 

온갖 것을 다 떠나 내적으로 풍요롭게 된 그녀는 온갖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리스도를 뒤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15년에서 1216년 사이에 성녀가 성청에 청원한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이 산 다미아노에 허락

되었습니다.  교황 인노친시오 3세가 허락한 이 증서는 전례가 없는 독특한 특전으로서 성녀 자신과

그 후계자인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수도원장과 자매들에게 어떠한 재산도 증정받기를 강요할 수

없다는 문서입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이어 1228년 확인한 가난의 특전 증서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복음의

산 체험에 대한 성녀 글라라의 기본 자세를 잘 표현하였습니다.

"가난을 향한 그대들의 굳은 결심은 생계 유지에 곤란을 당하더라도 결코 흔들리수 없으리다.

왜냐하며 사라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규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을

지탱하기 위하여 임께서 그왼손으로 머리받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을 입히시는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 없게 보살피시리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떠나지 않기

위하여 아무런 재산도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성녀가 생애 마지막에 고백한 대로 하느님 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피듯

그녀를 사랑하시고 아껴 주셨습니다.  언니 죽음이 가까이 오자 전부를 무상으로 받은 가난뱅이로서

그분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찬미드렸습니다.  저를 창조하신 주님,

찬미받으옵소서.


성녀와 자매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약간의 재산과 부동산으로 최소한의 정기적 수입을 확보하기를

끊임없이 주장해 온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까지 성녀는겸손과 존경을 다한 불굴의 정신으로

맞서서 이 호의를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그대가 서원 때문에 재산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망설인다면 내가 관면해 줄 터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키기 까지 배려하시는 교황께 성녀는, "거룩하온 아버지, 그리스도를

따르은 특권에서 저는 영원토록 절대로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성 프란치스꼬의 "인준받지 않은 회칙"과 1223녀에 "인준받은 회칙"을 기초로하여 1253년 성청의 

인준을 받은 성녀의 가난 회칙은 이렇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이 생활을 받아들이려고 우리를 찾아오면 ----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록 힘쓰라는 복음 말씀을 그에게 들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세상에 오시어 가난하게 구유에 누어 계셨고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알몸으로 매달리시까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성녀의 회칙 제 6장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는 듯한 수도회 초창기의 추억을 자전적으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칸적 색채가 짙은 이 회고에서 성녀는 자매들에게 항상 주지해 온

자신의 이상을 다시금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지존하신 아버지께서 지극히 복되신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꼬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회개

생활을 하도록 당신의 은총을 통하여 황송하옵게도 나의 마음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부님이 회개하시고 조금 지난 후 나는 우리 자매들과 함께 그분에게 자원하여 순종을 약속했습니다.

복되신 사부님은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없는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 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지겨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감으로 거룩한 복음의 완덕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니

여러분은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딸이며 여종일 뿐 아니라 성령의 정배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우리 형제들과 꼭같이 여기고 내가 직접 혹은 형제들을 통하여

항상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보살펴 드리기를 바라며 이 점을 스스로와 형제들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살아 계실 때 그분은 이 약속을 충실히 지키셨고 형제들도 지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론 우리 뒤에 들어올 자매들도 우리가 받아들인 지극히 거룩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의 마지막 뜻을 또다시 밝히셨습니다:  아주 작은 형제인 나 

프란치스꼬는 지극히 높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생활과 가난을 따르고 끝날까지 그 생활에 항구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주인이신 자매 여러분께 

간청하며 권고하노니,  지극히 거룩한 이 생활과 가난 안에서 항상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어느

누구의 가르침이나 권고를 받더라도 이 생활양식을 무슨 형태로이건 절대로 떠나지 않도록 조심을

다하십시오.

주 하느님과 복되신 프란치스꼬에게 약속한 거룩한 가난을 내가 우리 자매들과 함께 지키려고 항상

열심히 애쓴 것같이, 나의 후임자가 되는 수도원장과 모든 자매도 끝날까지 어김없이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직접 혹은 간접으로도  소유권의 양상을 갖는 재산과 땅이며 수입은 받아들이거나

소유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수도원의 정숙과 격리를 위해 요구되는 정도의 토지는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땅도 자매들이 꼭 필요로 하는 야채밭 외에는 경작하지 말고 묵혀 둘것입니다."

가난이 곳곳에 배어 넘쳐 흘러야 하느님께서 가난한 자매들을 기꺼운 눈으로 보시고 흡족히 하실

것이며 아울러 지극히 높은 가난의 성탑이 튼튼하고도 굳건히 서 있을 때만이 공동체는 흔들림

없이 지속되리라고 동정녀 글라라는 자주 수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성녀의 회칙은 그 첫머리에 수도회 명칭을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 일컫는 것으로 시작하여 

수도공동체의 사소한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가난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지극히 거룩하고 사랑하올 아기와 그분의 어머니께

대한 사랑으로, 내사랑하는 자매들이여,  그대들에게 간청하고 격려하며 권고하노니 남루한 옷을 

항상 입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회칙의 끝에서 성녀는 복음과 교회에 자매들의주의를 환기시키며

회칙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거룩한 교회의 발아래 우리를 온전히 내맡기고 예속되어  순종하며 가톨릭 신앙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 스스로 굳게 서약한 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어머니의 가난과 겸손, 거룩한 복음을 항상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녀는 결코 입으로만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삶으로 가난을 옹호한는 데 있어 지칠 줄을 몰랐습니다.

형제들이 가난한 자매들을 위하여 거두어온 애긍도 성한 빵덩이 전부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랑으로 조금씩 나눈 한 두쪽의 빵을 더 기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집집마다 모아들인

빵조각들로 생계를 이어가는 생활이 성 프란치스꼬가 선택하고 자기들이 지원하여 받아들이 가난에

더 합당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난의 삶과 그에 대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격려할 때만큼 성녀의 음성이 생기에 넘치고

부드럽게 울려올 때도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 때만큼 성녀는 반대에 부딪친 적도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소한의 재산은 고사하고라도 내일의 끼니에 대한 걱정까지도 하느님앞에서

감당 못할 큰 짐으로 여기는 성녀의 그 절대적 가난과 고집스러워 보이기기까지 하는 가난에의

사랑을 이해하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성녀의 이러한 면은 오직 하는님께서 마련해 두신 영적 질서에 자신을 내맡기며 그 삶의 목표를 

하느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데 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게으른 거렁뱅이의 동냥질이 아닙니다.  소유하기에 급급하여 구차스럽게 손을 내밀며 소유를

위해서라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는 사람은 많이 소유하였지만 재산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보다

더 가난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얼마되지 않는 재산을 훔쳐가는 사람을 죽도록 증오하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소유의 한 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죽일 듯이 덤벼들어 방어하는

불쌍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또 세상이 가난한 측에 끼어줄지 모르지만 실상은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반대로 진정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재물을 갖거나 갖지 않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그분을 찬미하도록 그분께로 부터 받은 몫이 어느 처지에서도 충분하여 늘 행복한 사람이 바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이는 매순간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안 만족하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지금 자기가 가진

바를 활용하며, 이 순간에서 빗나가거나 이 때문에 골머리 썩히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공중누각을 세우지도 않으며,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 위에 굳건히 서서 하느님이 주시는 모두를 

충분히 다 이용하여 매순간 그분께 영광드리는 이들입니다

"당신이 완전해지려고 하면 가서 당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백배로 받을 것이요.

또한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라는 성서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난, 관상생활의 전제조건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는 -----" 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분명 초대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초대는 사랑의 요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스승께서는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 라고도 말씀하기시 때문입니다.

가나의 본질적인 의미는 소유하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모든 삶에게는 그 소유가 감당할 수없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에게

소유물은 주께서 영혼을 인도하시려는 그곳으로 주님을 따라갈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장애거리이며 

쇠사슬이 되어 영혼을 구속하는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난의 가장 큰 열매이니, 가난은 영혼을 무한정 자유롭게 하여 온전히 그분 소유가 되게하고 하느님의 마음대로 영혼을 쓰실 수 있게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드리게 합니다.

비워져 갈수록 --- 가난을 통하여 남김없이 비워지고 자신을 포기하는 가장 지고한 표현인 순명으로

이 비움이 드러나기 시작할수록 --- 하느님의 은총이 영혼 안에 점점 번져나가 그분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 질수록, 하느님이 아니 모든 소유에 대해 영혼은 점점 더 짐스러워합니다.

지극히 소중한 가난은 이렇게 하느님만을 목말라하는 영혼이 그분께 나아가는 전제조건임과 동시에

영혼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존재하고 역사한는 증거, 점차적으로 은총이 영혼을 완성해 나가는 

중거가 됩니다.

사랑이 서로간의 결합을 추구하기 마련이듯,  하느님을 마음과 영혼,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외에도 그 무엇도 원하지 않고, 그분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것은  무엇이든간에  참을 수 없는 방해로 여깁니다.

성녀 글라라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인위적인 뒷받침이 전혀 없을 때 성녀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이 정돈되고 열려진 마음으로 마치

자비로운 아버지의 성심에서 샘솟아 흘러내리는 맑은 물과도 같이 넘치는 선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성숙해 나갔으며 그 마음은 하는님께서 당신의 벗들을 위해 태초부터 몸소 마련해 두신

숨겨진 당신 사랑의 감미로움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이 충만한 선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그 마음은 설레고 뛰놀았습니다.  님에 대한 생각은 우리 마음을 밝게 빛내 기쁘으로 넘치게 하고,

어떤 부담도 없이 성 프란치스꼬처럼 온전히 선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에 모셔들이고 받아

들이기 위하여 항상 더 가난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깔지 않는 맨바닥이 오랫동안 성녀의 잠자리였습니다.  냇가에서 주워온 돌이 베개였으며

작디작은 빵 조각이 음식의 전부였습니다.  설비도 제대로 안된 누유한 거처에서 42년의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무슨 실내장식은 고사하고라도 꼭 피요한 시설조차 없는 산 다미아노의 초라한 담장

안에서 성녀는 차음으로 가난이 무엇이며 추위 떤다는 것과 배고픔, 노동으로 피로에 지친다는 것의

의미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녀는 이 모두를 더할 나위 없이 큰 영광이요 재산으로

여겼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대로 가난이 은총의 삶으로 들어서는 문이 되어 주지 못하고 그 모든 희생에 넘치는 

갚음이 없다면 이런 생활양식을 자원하여 선택한다는 사실은 이해하기가 대단히  곤란할 것입니다.

성녀는 가난으로 인한 생활의 내외적 결핍과 참아받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자매들이 사는 이 무소유의 생활양식을 성교회로부터 동의를 얻고 확증받고 싶었습니다.

뻬루지아의 벤베누따 수녀는 시성조사 과정에서 "가난에 대한 동정녀 글라라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서 약간의 재산이라고 갖기를 종용하는 그레고리오 교황성하나 오스띠아의 주교님의

권유조차 결코 동의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종내에는 그분들도 뜻을 꺾을수가 없었다."고

증언하였고 빠치삐까 디 겔푸초와 필립빠 디 레오나르도 역시 이증언을 확인하였습니다.

성녀 글라라가 한결같이 온 힘을 다하여 저항한 것은 다음날의 생활대책을 미리 강구해 둠이었습니다

매일매일의 양식을 해결할 최소한의 수입이라도 보장되면 수도공동체의 기도와 관상의 삶에 안정과

질서가 있으리라는 그럴듯한 구실도 세상의 눈으로는 합당할 것입니다.  또 어쩌면 이 점은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당신을 위하여 모두를 버리면 이미 이 세상에서 백 배의 상급을 

받고 영원한 영광까지 약속하시는 그분의 섭리에  한계를 지우는 것이 됩니다.  장래에 대한 

안전보장책의 강구는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섭리의 배려보다 힌간적 수단에

더 의존하고, 넘치도록 안겨 주시는 그분의 손길을 뿌리치고 찬밥 한 덩어리나 철 지난 시래기 한 웅큼

을 더 우선적으로 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본질인, 하느님께의 신뢰를 가늠함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위탁하는 믿음이 없을 때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언약을 믿고 바라며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은 곳간에 가득 쌓아 둘 필요도 느끼지

않고 내일 일을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성녀 글라라에게 있어 내일에의 보장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이었으며 그외의 대책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성녀의 가난은 신앙 길에의 순례자로서 그 출발에서부터 언약의 땅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처럼 인간적 보장도, 상주하는 지비도, 머리 누일 장소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일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성녀는 성 프란치스꼬와 함께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되뇌어 대답할 뿐입니다.


산 다미아노의 봉쇄 담장 안 그 비좁은 공간에 숨은 채 성녀는 믿음과 가난의 나그네길을 갑니다.

이 삶은 세상에서늬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없고 더달하지도 않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향해 길을 가는 사람들의 여정이며, 바쁘고 급박하게 내닫는 빠스카의 밤을 매순간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동정녀 글라라는 거룩한 가난과 얼마나 깊이,  그리고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사랑하였던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소유를 단연코 거부하여 자기의 영적 딸들에게도 무엇하나 가지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녀 글라라는 회칙에서 자매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자매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이렇게 이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같이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을 섬기십시오. ----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수바시오 산 줄기 아래 올리브 숲에 싸인 성 프란치스꼬가 재건한 아름다운 추억의 산 다미아노도,

평생을 떠나지 않은 엄격한 봉쇄의 높은 답장도, 이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로 영적 유랑의 길을

가는 성녀를 방해하거나 붙잡아 두지 못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꼬와 마찬가지로 성녀는 믿음과 가난의 나그네길에서 오직 주 예수님과 그분의 거룩한

어머니의 가난으로 옷입고,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집만을

자기 소유로 가지기 위해 진력하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부여잡고 그분께 매달린 가난한 동정녀로 복음에서도 말하듯 이 길을 더디게 하는

거추장스러운 짐이나 여벌의 옷이나 돈지갑, 지팡이도 갖지 않고서, 성녀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고난 당하신 그분의 인성과 하나되어 좋으신 아버지로 인하여 기쁨으로 충만하였고, 인간적으로

보아 고통의 기나긴 밤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느 

누구에게도 한 치의 양보 없이 굳세고 확신에 찬 채, 여리고도 강하게 홀로 가난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던 그 신비가 샘솟는 원천이며, 임종의 순간에  "축복 받은 내 영혼아, 안심하고

떠나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성녀 글라라 본연의 신비입니다.


섭리의 응답

한편 이런 가난에의 오롯한 사랑에 하느님 측에서도 복음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여 가난한 자매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당신의 사랑 깊은 배려를 표현하시는 데

기적적인 수단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주방 책임 수녀였던 체칠리아 디 괄티에리 자매는 이러한 예를 시성조사 과정에서 증언

하였습니다.

어느 날 식사 시간이 가까워서 모두들 시장기를 느끼는데 50명의 수녀들에게 양식이라곤 작은 빵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는게 아닙니까!  그동안 이렇게 수도가족이 불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뿐인가요, 자매들의 영적 사정과 가난생활을 도우려고 객실에 거주하고 있는 작은 형제들에게도 식사를

내보내야 하였습니다.

성녀는 체칠리아 자매에게 그 작은 빵을 둘로 나누어 반은 형제들에게 내보내고 나머지 반으로는

50등분을 내어 이미 식사를 기다리며 식당에 자리하고 있는 수녀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명령에 수녀는 놀란 눈으로 원장어머니를 바라보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 이러한 일을 하자면 주님의 빵의 기적이 다시 한번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작은 빵 반조각을 다시 50등분으러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무 염려 말고 내 부탁을 들어주어요.라고 성녀는 조용히 대답하였습니다.

체치리아 수녀는 어머니 뜻대로 빵을 잘라 빵광주리에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빵을 자르는

동안 불어나기 시작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빵덩이 쉰 개가 빵 광주리에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 날도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은 하느님의 식탁에서 그 섭리의 빵으로 배불릴 수 있었습니다일요할 양식은 이렇게라도 해결되겠지만 그 외의 필요는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갖가지 안정보장제도에 익숙한 현대인은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각이 감히 미치지 

못하리만큼 섬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한 외부수녀가 중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착한 어머니와도 같은 성녀가 손수 간호를 도맡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 수녀는 하도 쇠약하여 오래전부터 전혀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매님, 무엇을 좀 잡수실 수 있는지, 혹시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라도 있으면 말씀하시지 

않겠어요? " 라는 수도원자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지극한 사랑과 염려가 가득한 물음에,

"어머니, 토피노 강의 숭어와 노체라의 과자는 먹을 수 있겠어요."

라고 식욕이 떨어진 지 오래인 중병환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원장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하여 대답은 했지만 이 음식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니 못하였습니다.  노체라와 토피노 강이 얼마나 먼 곳인가를 외부수녀인 그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저도의 어려움에 뒷걸음 칠 만큼 자기 않았습니다.  성녀는 즉시 앓고 있는 딸의

필요에 선처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지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날은 저물고 저녀녘에는 주룩주룩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는

어둠을 뚫고 누군가 다급하게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외부에 있는 형제들이 급하게 필요한 것이 

있음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하며 문을 연 수녀 앞에는 급한 볼일을 보러 왔다는 듯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용건을 물으려는 수녀에게 한마디 설명도 없이 보퉁이 하나를 건네었습니다.

즉시 보자기를 되돌려 줄 양으로 잠시 기다리게 한 후 수녀는 원장어머니에게 꾸러미를 전하였습니다거기에는 오전에 환자수녀가 원했던 숭어와 과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수녀들의 연락으로 형제들이 

나와 자기들과 식사라도 하고 묵어가기를 권하였으나 젊은이는 궂은 날씨와 늦은 시간을 이유로

재빨리 주도원을 떠나갔습니다.

성녀는 생계유지의 필수품 외에도 그이상의 섬세한 사랑으로 간난한 자매들을 돌보시는 자비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릴 따름이었습니다.


가난과 노동 

성녀 글라라와 가난항 자매들이 선택한 극단적  가난이 맹목적으로 이웃의 도움에만 의존하는 

무위도식이라고 믿는다면 크나큰 오류입니다.  오히려 아씨시의 위대한 성녀는 자신과 딸들이 

열심히 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권하였으며 이를 표양으로 보이기에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은인들의 도움은 자신들의 변변치 않은 노동만으로 끼니를 이어가지 못할 만큼 곤궁에 처한 경우에만

한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꼬가 유언에서 밝힌 바를 글라라는 가르침이 없는 가르침으로 사사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나는 손수 일하였고, 또 일하기를 원하며 다른 모든 형제들도 올바른 일에 종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할 줄 모르는 형제들은 배워야 하고 일의 보수를 받을 욕심으로 일하지 말고 세상의

모범이 되고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식탁으로 달려간다"고 표현한 동냥이나 은인들께의 도움요청은 오로지 일의 보수를 거절

당하였을 때에 한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은 기도의 정신을 촉진해야지,  혹은 기도를 방해한다든지 그 정신을 꺼버려서는 

안되었습니다.

만약 노동이 하느님과 영혼의 결합을 방해한다면, 은총의 작용에 영혼을 온전히 내맡기기 위해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가난 본연의 목적은 이미 상실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영성 생활의 탁월한 스승인 산 다미아노의 수도원장은 자매들이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일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열심한 기도로 주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을 언제나 마음에 지녀서 거룩한 사랑을 

자주 불러일으킴으로 영적 냉담과 게으름을 이겨내며 하느님께의 완전한 봉헌에 장애가 되는 태도나

마음가짐에서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회칙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일할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자매들은 성무일도 3시경을 기도한 후, 하느님께 봉헌된

자답게 성심껏 일하십시오.  일의 종류는 수도공동체에 유익하고 자기가 순명으로 받은 소임에 

맞갖은 것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매들은 영혼에 해가 되는 게으름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할 때에는 거룩한 기도의 정신과 하느님께의 봉헌심을 끄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시오.

왜냐하면 이 정신은 현세의 모든 것과, 수도생활의 전반에 걸쳐 그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노동에 대해 성녀 글라라는 정확한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성실히 준수하였습니다

노동은 기도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기도의 도움이 되어야지, 절대로 돋등한 위치에 둘 수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노동은 또한 수도원의 생계를 이어가는 데에  그 유일한고도 중대한 목적이 있지도

않습니다.   아씨시의 위대한 성녀에게 노동은 이웃 사랑의 당연한 발로로서 기도로 불지펴져서

저절로 행실로 옮마가기 마련이며 도한 그러해야 하였습니다.  마치 물줄기 아래 받쳐 놓은 그릇에

물이 차면 넘쳐흘러 그 주위의 땅을 물로 적셔 주듯, 하느님 사랑이라는 물줄기 아래 놓여진 영혼이

그릇이 그득 차면 자기 주위를 그 구원의 약수로 축여 주면서도 스스로는 고갈되거나 기진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녀 글라라에게 노동의 그 첫째 목적은 관상 중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일이라는 행위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더 나아가서 성녀에게는 기도와 노동 사이에 구분이 없었습니다.

기도와 일 모두는 관상적 사랑에서 우러나오고, 관상적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질 뿐입니다또 노동은 적당한 보수에 가치기준을 둘 수도 없습니다.  아씨시의 우리 성녀에게 있어 일은 공동체의

생계유지비 마련의 목적보다는 오직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 기도를 촉진시킨다는 데 주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기도  그 자체 때문에 기도하듯이 노동 역시 보수

때문이 아니라 일 자체 때문에, 즉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을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꼬는 형제들이 어느 곳에 머무르든간에 보수를 요구함 없이 일하기를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형제들을 어떻게 대접하는 무엇을 보수로 받든 주어지는 그것에 만족하며 일의

보수는 당연한 권리로 받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랑에 의한 애긍으로 생각하기를 권하였습니다.

성인의 여린 풀로기인 성년도 자기 딸들이 일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배려하였으나 재산을 늘리거나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보수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일한 후에는 

진정 가난한 자답게 이웃의 사랑과 동정에 호소하며 겸손되이 필요한 바를 부탁하기를 원했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섭리와 돌보심은 들의 백합을 입히시고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는 이상으로

당신 자녀들을 돌보실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노동할 수 있는 은총

성녀 글라라는 말보다 실천에 앞선 스승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로서 일하는 의무에서는 중병으로

병상에 누워 지내야 할 때도 관면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결코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던 

성녀는 수녀들의 힘을 빌려 침사에 앉아서 실을 켰습니다.

이 말은 침사에 누워서만 지내야 했던 성녀가 수녀들에게 상반신을 일으키게 하여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실을 켜서 천을 짜 성체포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녀가 만든 성체포가 

쉰 장은 족히 된다고 프란치스카 디 까뻬따네오 수녀는 증언하였습니다.  이 성체포들은 역시

성녀가 손수 만든 비단주머니에 넣어 작은 형제들에게 주면 그들은 수바시오 산 골짜기 가난한 

교회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녀의 입술이 기도하기를 잠시 그치는 순간에 손은 일하기 시작하였고 그 입술과 손길은 무하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온누리에 선포하고 증거하는 사랑의 물줄기 아래 놓인 그릇이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제 6장

축복 받은 내 영혼아


성녀 글라라의 말년은 가난의 완덕을 지키고 옹호아는 데 꽉 짜여진 일정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는 생애 마지막, 아니 임종의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224년에 시작된 지병이 1251년에 이르러 악화 일로를 치닫자 모두들 성녀가 주님께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음을 예견하며 대단히 근심스러워 하였습니다.

무한한 힘은 연약함 안에서 완성에 이릅니다.  동정녀 글라라의 성덕의 경지는 모두들 경탄해마지

않을 만큼 굳세게 병고의 십자가를 지고 간 사실에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28년간의

오랜 병상생활에서도 불평이나 탄식의 소리는 커녕 그 입술에서는 언제 어느때나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 이웃을 감화하고 격려하는 거룩한 이야기만이 흘러 나왔습니다.

긴 병상생활에서 성녀는 한순간도 쉬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수녀들에게는 보다 완전히 회칙을

지키고 가난을 사랑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뽀르찌웅꾸라에서의 착복 후 성녀가 잠시 머물던 성 바로오 수도원의 한 베네딕도회 수녀는 다음과

같은 현시를 보았습니다.

이 수녀는 어느 한순간 갑자기 자신도 산 다미아노 수도원의 수녀들과 성녀의 침상 주위에서 그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성녀는 대단히 호화로운 침상에 누워 있는 듯하였습니다.  모든

수녀들이 울며 성녀의 떠나심을 서러워하는데 아주 아아하고 기품있는 귀부인이 발현하시어

수녀들을 달랬습니다.


"사랑하는 딸들아,  너무 슬퍼 마라.  주님이 그 제자들과 함께 여기 오시기까지 그녀는 죽지 

않으리라."


귀한 손님

그 해도 이미 저물어 가는 1251년 11월 5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성청 각료와 수행원을

거느리고 뻬루지아에 도착하였습니다.

교황을 수행하여 뻬루지아에  온 오스따이와 벨레드리의 주교이며 수도회의 보호추기경인 세니의

라이날도께서 성녀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1252년 9월 8일 산 다미아노를 방문하였습니다.  라이날도 추기경은 성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셔서 두 분은 서로 각별한 친분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성녀에게 성체를 받아모시게 해주고 전수도가족

에게 강론하는 등 자별한 관심을 표했습니다.  이 기회에 성녀는 자신이 적성한 가난한 자매들의 

생활양식이 교황님의 인준을 받아 자기의 뒤를 이을 자매들이 영원히 교회 안에서 거룩한 가난을

지킬 수 있도록 교황께 중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그 무렵 교회가 성녀와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에게 준 수도규칙은 성녀가 지금과 앞으로

이 생활을 받아들일 자매들에게 영원한 생활양식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중병이 짙은 몸으로 성녀는 마지막 힘을 다 모아 스스로 회칙 작성에 손을 댄 것입니다.  이 회칙에서는 성녀는 성 프란치소꼬가 초창기의 자매들에게 준 생활양식인 첫 회칙을 토대로 성인이 후에

구두나 서면으로 준 권고는 물론, 가난의 특전을 포함시켜 가난한 자매들이 영원히 교회 안에서

복음적 가난을 지킬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 회칙을 교회의 최고권위로부터 인준받는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으므로 이것만이 언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심중을 추기경에게 토로하며 교황께 중재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한 것입니다.

그해 9월 16일 "Quia vos" 칙서의 반포로써 회칙을 인주한 추기경은 죽음을 앞둔 산 다미아노 

수도원장의 마지막 dud원을 성취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1253년 8월 9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Solet annuere" 칙서를 반포하여 최종적으로 인준한 성녀의 가난회칙에 포함되었습니다.

1252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뻬루지아로부터 아씨시로 옮겨와 성청의 업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성녀의 임종에 관한 베네딕도회 수녀의 환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수십 년간의 병상

생활로 쇠약하기 이를 데 없던 성녀의 병세는 더 위중해져서 점점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교황이 추기경들과 함께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를 서둘러 찾아왔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켜져 오는 성녀 글라라의 가난의 생활양식을 인주하신 교황께서는 성녀의

생애 마지막을 더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누추한 병석을 친히 찾아보시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교황님은 지체없이 성녀의 병실을 찾아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환자의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하여 손을 입술에 대어 친구토록 하였습니다.  감격한 성녀는 기쁨에 넘쳐 온

정성을 다해 그리스도의 대리자께 맞갖은 공경을 표하고 그 발에도 친구할 은혜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교황은 의자에 올라서서 환자의 입께로 발을 내밀자 성녀는 지극한 정성과 존경으로 발등과

발바닥에 친구하고 얼굴을 살며시 기대어 그리스도의 대리자께 대한 흔들림 없는 신의를

드러냈습니다.

이어서 성녀는 교황께 청하여 자기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의 사함을 받은 후에 성체까지 모시게

되자 그 얼굴은 기쁨에 넘쳐 형용할 수 없이 밝게 빛났습니다.

"더 많은 용서를 필요로하는 내가 이 영혼에게 죄사함을 내리다니  -----" 라고 교황님은 성녀의 

겸손된 청을 받고 탄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성녀에게 전대사와 교황강복을 내리셨고 작은 형제회의 관구장인 안젤로 형제가 성녀

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이 귀한 손님이 떠나가시고 산 다미아노에 평상시와 다름없는 고요와 적막이 되찾아진 후 성녀는

자매들을 불러 모으고 두 손을 고이 합장하여 걱룩한 감격이 채 가시지 않는 모습으로 말하였습니다.

"내 사랑하는 따님들이여, 우리 함께 주님을 찬미합시다.  오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을 모두 

준대도 맞바꿀 수 없는 큰 은총을 베푸셨어요.  나는 오늘 지존하신 그분을 받아 뫼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지상 대리자를 직접 만나 뵈옵지 않았던가요!"


기다림

드디어 주님이 아주 가까이 오시어 문지방을 넘어 드셨습니다.  긴 임종의 고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녀는 고통이 하도 심하여 벌써 17일째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기진해 갈수록

영적힘은 더 솟아나는 듯, 환자는 병상을 찾는 모든이들은 자상하게 위로하였습니다.

마치 하늘로 곧 오를 거룩한 분에게서 필요한 은총을 마저 얻어 가려는 듯이 날로 늘어나는 

추기경들의 방문으로 산 다미아노 봉쇄문의 여닫음이 일찍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만큼 

잦아졌습니다.

계절은 8월 한여름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산 다미아노의 병석에서 보낸 동정녀 글라라는 임종길을 도우려 와 있는 작은 형제들

에게 주님의 수난 복음을 들려달라고 거듭 청하였습니다.

하염없는 눈물을 훔치며 침상가에 둘러선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꼬의 허물없는 친구요 동료이며

고백신부요 영적 지도자였던 레오 형제, 흐르는 눈물을 주체치 못하면서 오히려 자매들을 위로하는

성인의 첫동료였던 안 젤로 형제, 하느님의 악사로 알려진 주니빼로 형제었습니다.

주니빼로 형제를 알아 본 동정녀 글라라가 크게 기뻐하며 주님께 관해서 새로운 것을 아느냐고

묻자, 주니빼로 형제는 이글거리는 용광로와도 같은 마음에소 불화살을 쏘아내듯 열띤 말로 

주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이같은 형제의 이야기에 임종을 앞둔 환자는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1253년 8월 8일 금요일의 한밤중에 병석을 지키던 수녀는 환자가 오랜 침묵을 깨고 나즈막하게 

조용조용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착하신 안내자를 따라 안심하고 네 길을 가렴.  너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널 먼저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사 아가를 보살피는 엄마의 사랑으로 널 언제나 아끼고 돌보아 주셨구나!"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저를 지어내사 이 삶에로 부르신 주여, 찬미받으소서."라고 속삭였습니다.

그외에도 너무 심오하여 당장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깊이있게 지극히 거룩하온 삼위일체

하느님께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머리맡에서 간호하고 있던 수녀들은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머니가 누구와 말씀을

나누시는가" 의아해 하셨습니다.

한 수녀가 침상에 바싹 다가가 "어머니, 누구와 발씀을 나누셔요?"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축복받은 내 영혼과 이야기하지요."라고 어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그 임종은 환희의 순간이었습니다.  누나 죽음을 고대하던 성 프란치스꼬처럼 성녀도 자기 둘레에

모인 형제들에게 태양의 찬가를 거듭 청하였습니다.

성녀는 자기를 빚어 만드시고 삶의 길목마다 지켜 인도하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가장 애지중지하는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의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신 주님을 이노래로 찬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그 순간들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한 시간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제 온 수도가족이 울고 탄식하며 성녀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오, 내 사랑하는 따님들이여, 내가 뵈옵는 저 영광의 하는님을 보시나요?"  하고 침상 가까이의

수녀들에게 반복하여 물었습니다.


거룩한 동정녀의 방문

이 때 우연히 방문께로 눈길을 돌린 벤베누따 수녀에게는 황금 화관을 쓴 백의의 동정녀 무리가

병실로 들어는 정경이 보였습니다.  그 중에서 유독 돋보이며 더 큰 광채에 싸인 동정녀가 이 무리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동정녀는 아름다운 사과 모양의 화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화관은 마치 향연기를 뿜는 향로처럼 거기서 나오는 빛살로 온 집안을 환히 비추어 주었습니다.

함께 온 모든 동정녀들의 옹위를 받으며 동정녀 글라라의 침상으로 다가온 이 동정녀는 아주 고운

천으로 침사을 덮었습니다.  천이 얼마나 곱고 투명하던지 천으로 감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녀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동정 중의 동정이신 그 귀부인께서는 몸을 살며시 

숙이시고  동정녀 글라라를 가만히 다독인 후 모든 동정녀들과 함께 떠나가셨습니다.

토요일인 8월 9일 하루 종일을 동정녀 글라라는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필립빠 수녀의 증언대로 지금과 앞으로 올 모든 딸들에게 엄격한 가난을 보장할 회칙이 교황으로부터

인준받음을 보려는 일념과 의지만이 성녀를 이 세상에 분들어 두는 듯하였습니다.  수도회칙이 

교황 성하의 칙서로 인준되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소망이고 그 칙서에 친구한 후에야

죽을 수 있다던 성녀의 말을 필립빠 수녀는 시성조사 때 증언하였습니다.


거룩한 규칙

간절한 소원이 마침내 성취되어 8월 10일 교황청이 주둔하고 있는 성 프란치소꼬 대성당으로부터

한 형제가 그토록 원하던 교황의 칙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죽음에 이르도록, 아니 언니 죽음의 

초대로 미루며 기다린 성녀가 자신과 자매들이 영원히 지키기를 바란 수도규칙에 교황 인노첸시오

4 세는 1253년 8월 9일 인준을 확인하는 칙서 "Solet annuere"를 첨부한 것입니다.

크나큰 고통으로 핍진하였음에도 칙서가 첨부된 회칙을 자져오자마자 성녀는 곧 생기를 되찾고

감격에 넘쳐 정성을 다하여 공손이 그 회칙에 친구하였습니다.

다음날 동정녀 글라라는 죄악의 어둠이라곤 한 점 없이 맑고도 밝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찬란한 빛 속으로 옮겨 갔습니다.

1253년 8월 11일 저녁은 온 아씨시가 주보성인인 성 루피노를 기억하며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이 날 동정녀 글라라는 복된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히 엄마가 아기를 사랑하듯

자기를 아끼고 보살펴 주신 그분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이 고요하고 복된 죽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녀의 본질

동정녀 글라라가 하느님께로 옮겨가고 불과 몇 개월 후인 그해 11월에 이미 교황의 명령으로 

시성조사가 시작되어 2년 후에는 시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성녀의 공로와 전구를 어여삐 보신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수많은 기적들을 살펴봄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작은 책자를 펴낼 때의 애당초 계획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보다 친근한  성녀의 있는 그대로를, 무엇보다 그 성덕을 중심으로 한

성녀 글라라의 모습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성덕의 본질은 기적에 의해서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기적이 그 증거는 되겠지만 오직 기적이란 

하나의 통로에 의해서만 성덕의 향기가 풍겨 나가지는 않습니다.

성덕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온전히,  마음으로부터 매순간 거기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성녀 글라라의 경우처럼 봉쇄의 담장 안에서 기도와 보속의 삶으로, 혹은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해야 할 활동의 삶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 때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오롯이 따르고 응답하는 일이 성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질적 가치기준을 뒤바꾸지 않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영광을 첫자리에 두고

자기를 맨 끝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사실은 자신을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성업에 온통 내어드리는 데 있습니다.

한계를 두거나 몸을 사리지도 않고 자기 전존재를 그 분께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사랑함,  오직 이 한가지만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노라면 그분 약속대로 나머지는 저절로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 프란치스꼬에게서 아무도 빼앗가 가지 못하는 기쁨의 비밀을 배운 가난한 동정녀,

아씨시의 위대한 성녀가 우리에게 주는 큰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