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클라라

성녀 글라라의 생애와 영성

Margaret K 2018. 1. 19. 05:25

성녀 글라라의 생애와 영성

 

1193년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 아름다운 소도시 아씨시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

 

깊은 믿음을 가진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시절 부터 신앙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였다.

 

1210년 루피노 성당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처음 만나셨고

1212년 3월 성지주일에 같은 성당에서 프란치스코의 강론을 들으시고

가난, 정결, 순명으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1212년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수도복을 입고 순명을 서약하신 후

"가난하게 구유에 누으신 분,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에 대한

강열하고 헌신적인 흠숭과 사랑은 극도의 가난 속에서

42년을 "사랑의 일치를 위한 봉쇄생활"을 사시었다.

 

성글라라 수도회의 창립자이시며 여성으로서 제일 먼저 수도회 회칙을 쓰신 분이시며

1216년 유래가 없는 "가난의 특전"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 부터 허락받으셨고 

1253년 인노첸시오 4세 교황으로부터 "가난특전" 인가를 받았다.

 

1253년 8월11일 돌아가신후 1255년 교황 알렉산델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유해는 아씨시 성글라라 대성당에 모셔져있다.

 

1958년 교황비오 12세가 텔레비젼의 주보성녀로 발표하셨다.

 

가장 큰 축복은 우리의 성소라고 말씀하신 글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회의 사모이시며  빵의 기적과 성체의 기적은 주님께 대한 신뢰에서 극도의 가난을 기쁘게 사신  성녀께 대한 주님의 응답, 사랑으로 생각되며 

성프란치스코께서는 세상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순례자와 나그네의 생활로 주님을 증거하시였고, 성녀 글라라는 하느님만을 위한 관상 봉쇄 생활로 주님을 사랑하며 한 생을 받으신 분!

 

성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이시며 이름 그대로 반짝이는 영롱한 영혼으로

믿는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계심을 믿는다. 

 

 

성녀 글라라 서거 750 주년을 기념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메시지                                                번역: 제주 성 글라라 수도원


지극히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  
1. 1253년 8월 11일은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께서 이 지상에서의 순례의 여정을 마친 날입니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이며, 오늘날 다섯 대륙에 다양한 모습으로 900여개에 달하는 수도원들이 퍼져있는 가난한 자매들의 회(會), 또는 글라라회(會)라 불리는 여러분 수도회의 창설자입니다.

글라라 사후 7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 위대한 성녀에 대한 기억은 신자들 가슴 속에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저는 이런 특별한 기회에 여러분의 수도 가족에게 진심어린 마음과 애정어린 인사를 전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토록 중요한 대희년 거행의 시기에 맞추어서 성녀 글라라는 열매를 맺어야 할 하느님의 선물인 우리 성소의 가치를 아주 심오하게 이해하기를 모든 사람들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글라라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우리가 받았고 또한 매일같이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은혜 중에 가장 큰 것은 우리들의 성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느님께  은총의 실천적인 삶을 더욱더 깊은 감사로 되돌려 드려야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성소입니다.  이 부르심이 보다 완전하고 큰 것인 만큼 그분께 더욱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권고 합니다; 그대가 받은 부르심을 잘 알고 있으십시오”(유언 2ㅡ4절).

2. 1193년∼1194년경 아시시의 저명한 오프레듀치오 파바로네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성녀 글라라는 모든 것에 앞서 그녀의 어머니인 오르또르라나로부터 철저한 그리스도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빛을 받게 된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시작한 새로운 양식의 복음적 삶에 매료되어, 이제는 자신도 그리스도를 더욱 철저히 따르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녀는 1211년(또는1212년) 성지주일과 성주간 월요일 밤 사이에 집을 떠나 성인의 충고대로 프란치스칸 체험의 요람인 뽀르치운쿨라의 자그만 교회로 향했습니다. 그곳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제단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부(富)를 모두 벗어버리고 가난이라는 십자가 형상의 참회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녀는 머물 곳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성 다미아노의 작은 수도원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의 여동생 아녜스가 곧 그녀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관상 안에서 복음을 따르기를 열망하는 다른 동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수도 공동체가 엄청난 영적 기쁨을 가지고 가난과 수고, 시련, 굴욕 그리고 세상에 대한 멸시를 이겨내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결단력을 보고 감동을 받은 성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왕,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딸이자, 여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혼인한 여러분은 완전히 거룩한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나의 바람은 나와 내 형제들의 입장에서와  같이 여러분에게도 세심한 보살핌과 특별한 배려를 해 줄 것을 약속하고 희망합니다. (성녀 글라라의 생활양식 6장 3-4절)

3. 글라라는 이 말씀들을 그녀의 회칙의 중심 장(章)에 넣었습니다. 그녀는 그 말씀들을 그녀에게 있어서 단지 성인으로부터 받은 가르침들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예수 탄생 예고와 관련된 복음서의 삼위일체적, 마리아적 맥락에서 나오는 그녀의 카리스마의 근본 핵심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사실상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자매들의 성소를 성령의 감도를 받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주님의 겸손한 여종 동정 마리아의 광채 속에 두었습니다. 이 주님의 겸손한 여종은 교회와 동정녀, 정배, 그리고 어머니의 본보기입니다.

글라라는 자신의 성소를 그리스도와 그분 신비체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성령의 역사에 자신의 동정성을 봉헌한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라는 소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매우 밀접하게 일치되어 있음을 느꼈고, 이 때문에 가난한 글라라회원이 된 보헤미아의 공주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이처럼 권고 했습니다.
“감미로운 어머니 곁에 바짝 다가가십시오. 그분은 하늘도 담을 수 없는 분 이셨지만 동정녀께서 그 위대한 분을 작고 은밀한 거룩한 태중에 품었습니다.”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3편지, 18-19절)

성모 마리아는 이 아시시 출신 성녀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소명을 실행해 나갈 수 있도록 동행해주었습니다. 시성절차서에 나오는 한 의미 있는 증언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글라라의 임종침상으로 다가와 그녀 위로 자신의 얼굴을 숙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글라라의 삶은 마리아의 빛나는 삶의 반영이었기 때문입니다. 

4. 글라라가 열렬한 사랑을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극히 높은 가난”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 그녀의 결단력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가난으로 표현된 의미에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화를 통해서 사셨던 포기의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자신을 경이로 가득 차게 한 한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사건이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사건입니다. 

성녀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렇게 위대하시고 선하신 주님께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내려오셔서 이 세상에서 멸시 당하시고, 궁핍하시며, 가난하게 사시기를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극도로 가난하고 곤궁하며 천상양식에 한없이 굶주린 사람들이 그분 안에서 하늘나라를 소유함으로써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프라하의 안녜스에게 보낸 1편지  19-20절). 

그녀는 이 가난을 예수님께서 하신 지상에서의 모든 체험, 즉 베들레헴에서부터 “십자가 위에 벌거벗긴 채 못 박히신” 갈바리에 이르기까지 하신 체험 안에서 이해했습니다. (유언 45절)

그녀에게 있어 우리의 길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벌거벗겨지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겸손과 극도의 가난 체험 안에서 그분과 하나 되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겸손과 가난 체험은 인간 체험의 모든 측면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성녀 글라라에게 있어서 가난의 선택은 복음에 대한 충실성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시작한 수도생활 양식에 대한 보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가난의 특전”을 교황님께 강력하게 요청하고자 결의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일생동안 강인하게 수호해 왔던 그러한 “특전”을 회칙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칙은 그녀가 죽기 이틀 전인 지금으로부터 750년 전 1253년 8월9일, 교황대칙서(Solet Annuere)를 받음으로써 인준을 받게 되었습니다.

5. 글라라의 시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아드님의 신비를 중단 없이 관상하면서 그분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늘 더욱 완전하게 나누고자 하는 소망으로 가득 찬 신부의 사랑스런 바라봄이었습니다. 

그녀는 특별히 십자가의 높은 곳으로부터 그녀를 부르고 끌어당기신 그리스도의 수난을 관상하는 열정적 묵상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오 여러분 모두, 길을 지날 때, 멈춰서 나와 비슷한 고통이 있는지 둘러보십시오!’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의 마음으로 울며 신음하며 그분께 응답합시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대를 계속해서 기억할 때 내 영혼은 몹시 괴롭도다!”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4편지 25-26절) 그리고 성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한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 사랑의 불로 당신을 항상 더욱 열렬하게 태워버리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는 사랑과 갈망을 모두 동원하여 외치십시오: 나를 당신 곁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오! 하늘의 신랑이시여!”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4편지  27, 29-32절)

이런 그리스도의 신비와의 완전한 일치는 그녀를 삼위일체의 내재적 삶에 대한 체험에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 삼위일체의 내재성 안에서 그녀의 영혼은 자신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매순간 더욱 크게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도 넓은 하늘도 그들의 창조주를 담을 수 없고 오로지 믿는 이의 영혼만이 그분의 집이 되고 거처가 되며, 이것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부족한, 사랑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3편지 22-23절) 

6. 글라라의 인도를 받아 성 다미아노에 모인 공동체는 “거룩한 일치의 양식”을 따라 특별한 방식으로 “정신과 마음의 일치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성녀 글라라의 생활양식, 서문 5절)의 봉쇄와 관상의 차원을 거룩한 복음의 생활양식에 따라 살아갈 것을 선택했습니다. 

형제성 안에서의 일치의 가치에 대한 글라라의 독특한 이해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그녀의 성숙한 관상체험에서 발견된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참된 관상이란 자신을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의 진리를 실현시켜 주는 것입니다. 

글라라는 자신의 회칙에서 서로간의 봉사와 참여, 그리고 함께 나눔의 가치들을 위에 형제적 삶의 기초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상호사랑과 평화의 일치” 위에 견고하게 건설되기를 갈망했고(성녀 글라라의 생활양식 4장 22절) 또한 자매들이 완덕의 유대인 상호사랑의 일치를 자신들 안에서 열심히 보존해 가기를 갈망했습니다.(성녀 글라라의 생활양식 10장 7절)

그녀는 실제로 상호사랑이 공동체를 교화(敎化)시키고 우리의 성소를 성숙시켜준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유언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서로를 사랑하며, 여러분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 사랑을 밖으로 표출하십시오. 이것은 자매들이 언제나 주님 사랑 속에서, 그리고 성숙한 애덕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유언 59-60 절)

7. 글라라는 이 일치의 가치(價値)를 더 넓은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봉쇄수도공동체가 교회 안에 완전하게 소속되어, 순명과 자녀로서의 예속감이라는 유대를 통해 교회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기를 원했습니다. (성녀 글라라의 생활양식 1장, 12장) 

그녀는 봉쇄를 살아가는 자매들의 삶이 같은 소명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은 다른 자매들에게 거울이 되어야 하고 또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빛나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40여 년 동안 성 다미아노의 작은 수도원에서의 봉쇄의 삶은 그녀의 마음의 시야(視野)를 좁히지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의 역사 안에, 구원사업을 행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그녀의 믿음을 더욱 확장시켰습니다. 두 편의 에피소드가 잘 알려져 있는데, 글라라는 성체에 대한 믿음의 힘과 겸손한 기도로  닥쳐오는 위험 속에서 아시시와 수도원을 구해냈습니다.

8. 이처럼 교황의 인준을 받은 이후 750년간 글라라의 회칙이 그 영적인 매력과 신학적인 풍요로움이 본래 그대로 고스란히(comserva intatto) 간직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강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천년기(terzo millennio)를 살아가는 사랑하는 가난한 글라라 자매들이여, 인간적인 가치와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들이 완벽한 일치를 이루게 하고, 관상의 열정과 복음적 열의를 조화시키는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상을 따르지 않으면서 따라야 할 곧은길을 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글라라는 여러분 각자에게 그녀가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여 온 마음으로 그분께 매달릴 수 있는 여인은 참으로 복됩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은 하늘의 복된 천사들의 무리가 끈임 없이 경탄하고 있습니다.”(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4편지 9절) 

이번 750주년은  가난한 글라라의 자매들로서 여러분의 성소가 지니는 특별한 은사를 숙고할 기회를 여러분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 은사는 그 첫 자리로 우리 삶의 유일하고도 참다운 프로그램이신 그리스도를 결정적 기준으로 삼아 거룩한 복음의 완덕을 따라 살아가라는 부르심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이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남녀들에 대한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오늘날 세상이 보여주는 불만족과 외면치중 문화에 대한 대안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그 본래의 고유함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더 이상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세상과의 영원한 친교를 이루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글라라 자매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것을 혼인의 차원에서 성취하십시오. 성령의 신부이자, 완벽한 여인인 성모 마리아가 지닌 다산의 동정성의 신비를 늘 새롭게 하면서 말입니다. 

관상의 삶에 온전히 봉헌된 여러분들의 수도원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에도 정배인 그리스도의 오심을 끈임 없이 간구해 주시는 성령께 대한 절실한 갈망으로 가득 찬 “교회와의 부부적 사랑을 상기시켜 주는 것”(memoria del cuore sposale della chiesa)(말씀의 신부, 1)이 되길 빕니다. (참조. 묵시록 22,17)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약속을 쇄신시킬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성녀 글라라는 성덕에 대한 가르침의 본보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가르침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성장되는 것으로서 복음의 긴박성에 의거하여 인격 전체와 정신, 마음, 그리고 행위를 변모시켜 주시는 주님의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하느님 얼굴을 관상하는 이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9. 제가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 여러분께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바는 계속해서 여러분들의 수도원들이 영성과 기도에 대한 갈망이 널리 퍼져 있는 오늘날의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구원하는 현존을 발산해 줌으로써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 대한 완전하고 참된 체험의 모습을 긴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들음의 동정녀 마리아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길 빕니다. 성녀 글라라와 여러분 수도회의 성인들과 복자들이 여러분을 위해 전구해 주시길 빕니다.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이 의미 있는 대희년의 은총 속에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정성스럽게 기억할 것을 약속하며, 마음으로부터 특별한 사도적 축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드리는 바입니다.

                                           
                         바티칸에서, 2003년 8월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