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클라라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의 글/머릿말

Margaret K 2007. 5. 24. 00:26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의 글

머릿말

글라라는 회칙과 유언과 축복 그리고 5통의 편지만을 남겨 놓았다. 이처럼 얼마 안 되는 글라라의 글들은 가난과 겸손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그녀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글라라의 글들은 프란치스칸 유산(遺産)에 있어서 크나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회칙만 보더라도 글라라가 그녀의 수도생활에서 프란치스꼬의 이상을 얼마만큼 받아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글라라가 쓴 회칙에서 우고리노와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지만, 글라라의 회칙은 분명히 프란치스꼬의 가르침과 모범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사실 교회에 대한 순종과 절대적인 가난의 생활과 형제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영신지도에 있어서 글라라는 세 번씩이나 프란치스꼬를 그 동기(動機)로 내세우고 있다. 더 나아가 글라라는 작은 형제들의 회칙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글라라는 우고리노와 인노첸시오 4세의 회칙으로부터 문지기 자매, 면회실 그리고 지도사제 등의 규정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2차적인 요소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글라라가 쓴 회칙은 프란치스꼬의 회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글라라 회칙과 프란치스꼬 회칙과의 중요한 차이점은 봉쇄 규정에 있다. 「가난뱅이」 프란치스꼬는 제2회칙 3장 이하(以下)에, 자기의 생활을 세상에 살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순례자와 나그네 생활로 특징지었다. 이에 반(反)하여 글라라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 서로간의 사랑의 일치를 항상 유지”하기 위하여 봉쇄생활을 택하였다. 가난한 자매들의 생활은 각 자매의 영적인 생활과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의 생활로 표현된다. 이 생활의 특수한 점은 자매들의 단순한 노동과 애긍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극도의 가난에 있다. 이와 같이 글라라의 회칙은 프란치스꼬의 회칙보다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나 깊은 영적 생활이 없으면 이 생활을 할 수 없다.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의 깊은 영성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들은 19년에 걸쳐서 씌어졌기 때문에 글라라의 수도생활에 관한 성숙의 과정을 볼 수가 있다. 첫째 편지에서는 세속생활과 영성생활의 차이를 대조시키고 있으나, 둘째 편지에서는 가난가 관상을 취급하기에 이른다. 셋째 편지에서는 엄격함과 어려움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아녜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가난과 관상의 생활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 편지에서는 죽음에 임박한 글라라가 자기가 체험한 기쁨과 평화를 넘치도록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넷째 편지는 아름다운 영성 문학 작품 중의 하나이다.
유언은 글라라의 심오한 이상을 반영해 주며 그녀의 정신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글라라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 특히 성소에 대해서 벅찬 감사를 표하는 첫 부분에서 이 글의 주제를 설정하고 있다. 다라서 유언을 읽을 때는 감사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이 글에 담겨진 권고들과 격려의 말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돌보심 그리고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 자기의 자매들도 같은 체험을 하기를 열망하는 한 여인에게서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글라라도 유언에서 프란치스꼬의 유언과 같이 넘치는 감사를 느끼고 있을 뿐이다.
또한 글라라의 유언을 여성다운 감수성과 직관과 상냥함을 드러내고 있는, 여성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글라라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비록 교황청으로부터 회칙을 인준받기 전에 이 유언을 작성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그녀가 지닌 힘과 지금까지 자신이 영위해 온 생활에 대한 신념과 깊은 신앙심을 발견할 수 있다.


글라라의 영성

글라라 사후(死後) 7년이 채 못 되어 프란치스꼬의 위대한 제자였던 세라핌적 학자인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칸의 독특한 이상을 정립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작은 형제회의 총봉사자와 글라라회의 가난한 자매들의 보호자가 된지 2년 후 보나벤뚜라는 평화를 찾고자 라베르나 산에 갔고, 거기에서 아씨시의 가난한 자매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편지를 썼는바, 거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작고 가난한 사람이었던 성 프란치스꼬를 도구로 삼아 성령께서 글라라를 가르치셨으니, 여러분도 여러분의 거룩한 어머니(글라라)의 발자취를 성실히 따라가기를 바랍니다”(성 보나벤뚜라 전집 Ⅷ, 둘째 편지)). 이 문장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에 있어서 프란치스꼬와 글라라의 관계와 위치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프란치스꼬도 글라라도 이끌어 주신 분이 성령이시기에, 아씨시의 이 두 위대한 성인들이 지닌 전적인 일치성을 성령의 신적인 힘을 이해함으로써만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그들은, 아버지와 아드님의 내적 생명에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또한 인간 상호간 및 피조물에 대한 심오한 사랑에로 우리를 강하게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 하심을 분명히 증거해주는 상징들이 되었다.
그렇지만 글라라가 한 여성으로서 도한 사부 프란치스꼬의 충실한 제자로서 프란치스칸 이상을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표현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글라라는 프란치스꼬의 카리스마를 받아들여 여성들에게 적용시켰으며, 또한 그 카리스마의 풍요롭고 영구한 가치들을 증대시켰다. 프란치스칸 전통에 끼친 그녀의 위대한 공헌은 자기가 이 「가난뱅이」로부터 받았고 또 세속에서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이 도전했던 그 가난의 카리스마를 지칠 줄 모르고 방어한 데에 있다. 사부님을 잃고 그의 강력한 현존을 그리워하던 때, 글라라는 형제들에게 프란치스칸 정신을 전수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글라라가 프란치스칸 영성에 끼친 독특한 가치는 다음의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1)세속과의 실질적인 별리(別離)인 봉쇄, 2)극단적인 가난의 추구, 3)서로간의 사랑의 일치를 유지하려는 노력. 이 요소들은 프란치스꼬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글라라의 글에서 더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세속과의 실질적인 별리(別離)인 봉쇄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 봉쇄생활을 하도록 한 규정이 실제 언제 생겼는지 분명치가 않다. 13세기 초 수도생활을 택한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세속과 떨어져 살게 되어 있었다. 글라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글라라의 글을 세밀히 검토해 볼 때 성 다미아노 수녀원은 시초부터 엄격한 봉쇄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글라라는 그곳에 살게 되자마자 봉쇄생활에 들어갔고, 그 생활을 받아들인 다른 자매들도 봉쇄생활을 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봉쇄에 관한 규정이 1218년 아니면 1219년 우고리노 추기경의 회칙에서 공포되었다. 교황이 그녀의 복음에 대한 자신의 이상(理想)에 어긋나는 다른 규정을 제시했을 때 그 교황에게 도전할 만큼 강했던 글라라가 엄격한 봉쇄를 명하는 회칙을 기꺼이 수락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실상 글라라는 우고리노 회칙에 담겨 있는 같은 규범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수도생활 시초부터 지켜 왔던 그 봉쇄규정을 자기 자신의 1253년의 회칙에다가 도입시켰다. 가난한 자매들의 보호자 추기경이었던 라이날도 추기경이 “봉쇄 안에 머물고 또한 최고의 가난 안에서 주님을 섬기기로 선택한” 글라라의 결심을 인정하면서 글라라의 회칙 서문에 삽입시킨 자신의 편지에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다.
수도생활의 역사를 통해서 봉쇄의 시학이 점차로 발전하였다. 글라라는 수도원 세계의 봉쇄신학을 이어받은 사람이었고 또한 13세기 초기의 여성으로서 이전(以前)의 창설자들이 지녔던 봉쇄에 관한 이상과 순수성에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글라라는 이전 수도자들이 겪어야 했던 많은 어려움 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의심치 않고 봉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가난과 관계되는 동산(動産) 및 부동산(不動産)의 수용이라는 악습을 수도원 전통에서 정화시켰다. 가난한 자매들의 봉쇄는 모든 선이 연유하는 그 하느님께 뿌리를 두지 않는 온갖 망상과 매력과 기대를 포기하는 특징을 지녔다.
역사상 프란치스칸 가난을 방어하려는 피나는 노력에 있어 첫 자리를 차지했던 글라라는 이전(以前)의 규정들이 지니지 못했던 열과 힘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봉쇄를 자신 및 자매들의 수도생활에 있어서의 필수적인 요소로 비중을 두었다는 것의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우고리노가 자신의 회칙에서 그들에게 대해 언급한 바와 같이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봉쇄 수녀들”의 생활은 새로운 요소인 극단적 가난의 삶을 봉쇄의 신학에 주입시켰다.


극단적인 가난의 추구

이렇게 볼 때, 글라라가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편지를 써 보내어 현세의 왕국이 지니는 영화를 버리고 봉쇄생활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글라라가 생각한 바대로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원 봉쇄는 영원한 부요와 영광과 영예를 담고 있는 천상낙원의 상징이다.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글라라가 지니고 있는 지칠 줄 모르는 신앙을 명백히 그러내 주고 있다. 글라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난을 사랑하고 포옹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부(富)를 부여하는, 오 복된 가난이여!

그녀는 다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그대는 영예보다 이승의 멸시를, 지상의 부(富)보다 가난을 택하였고 또한 이승에 보다는 ‘좀 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하는 하늘에다 보물을 쌓기로 하였으니’(마태 6,20), 그대의 상급은 하늘나라에서 엄청나게 클 것입니다.”

글라라가 아녜스에게 “오직 가난한 이에게만 주님이 하늘나라를 약속하시고 주신다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라고 상기시킬 때, 이러한 확신이 더한층 강력하게 서술되고 있다.

프란치스꼬의 글과 글라라의 글 사이의 흥미로운 차이점은 가난에 대한 강조 점이다.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시려는 것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을 비우시게끔 했다(참조 : 필립 2,6-11 ;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Ⅱ). 이와 같이 프란치스꼬는 가난의 실천보다 순종의 실천에 대해서 더 많이 썼다. 한편 글라라는 자신의 관심을 늘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고정시켰기 때문에 가난의 중요성을 더없이 강조했다. 인류가 “영적으로” 빈궁하여 영원한 가치들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육신적으로”가난하고 무력하게 하시어 영적인 부요를 가져다주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은 지극히 완전한 가난을 지킴으로써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다. 글라라는 가난을 삶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자매들이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는 그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택했다고 주장한다.
글라라는 회칙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가난을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가난은 입회의 기본 조건이며, 가난은 프란치스꼬가 그들을 위해 써 준 생활양식의 핵심이며, 가난은 하느님과의 일치 및 서로간의 일치를 이루고 유지하는 수단이다. 글라라의 회칙을 표면적으로 훑어보더라도 가난이 성 다미아노 수녀원의 전 생활에 얼마나 침투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글라라는 프란치스꼬가 지닌 가난의 카리스마를 깊이 이해했고 프란치스꼬와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에게 이 카리스마가 지니는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1228년 9월 17일에 글라라에게 베풀어 준 “가난의 특전”에서 그녀의 가난에 대한 헌신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

“명백히 드러난 바와 같이 여러분은 하느님께만 헌신코자 하는 갈망에서 현세의 물질에 대한 욕망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 되시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요한 14,6) 그분의 발자취에 만사에 있어 매달리기 위하여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고,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해서 여러분은 그러한 결심을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천상 신랑의 왼팔이 여러분의 머리 밑에서, 여러분이 질서 있는 사랑으로 영의 법에다 종속시켜 굴복케 한 여러분의 그 육신 안에 있는 약점을 부축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새들을 먹여 주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그분께서 음식과 의복에서 여러분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마침내 그분 친히 오셔서 영원히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을 바치실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분의 오른팔이 천국에서 복되게도 여러분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으로 하여금 재산을 소유하도록 강요하지 말게 해 달라고 여러분이 요청한 대로, 우리는 지극히 높은 가난에 대한 여러분의 결심을 사도적 은혜로 견고히 하고 이 칙서의 권한으로 확인하는 바입니다.”


서로간의 사랑의 일치를 유지하려는 노력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이토록 극찬한 이 가난은 글라라에게 하느님께 대한 한없는 넓이와 그분의 현존에 대한 개방성을 가져다준다. 이 가난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소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악습과 죄악을 알게 하는 외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성사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므로 절대적 가난의 이러한 추구는 글라라와 그의 자매들이 포옹한 공동생활에는 물론 관상적 이상에도 완전하게 연결된다. 글라라 회칙에 대한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칙서에 “거룩한 일치”와 “지극히 높은 가난”의 개념이 연결되어 반복되는 것을 수도생활이 지니는 이들 두 측면의 연관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 두 개념의 중심에는 주님의 영이 자리하고 계시다. 프란치스꼬가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Ⅰ에서 이것을 분명히 증거 한다 : “주님의 영이 그들 위에 내리시어…, 그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들이요 형제들이요 어머니들이 됩니다.” 글라라는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내신 편지 Ⅰ에서 이 주제를 반향시키면서, 가난을 하느님과의 관계에로 인간을 이끌어 주는 도구로 보고 있다. 이미 그리스도와 정혼하여 그분의 정배 되었으므로 글라라는 아녜스로 하여금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가난을 사랑하는 데에 더욱 매진하도록 격려해 주고 있다. 그래서 글라라는 이 편지에서 가난과 관상을 연관시키고 있다 : “ 그대는 지극히 거룩한 가난에 열광적이고 … 그분과 영적인 혼인으로 결합했습니다.”
아씨시의 「가난뱅이」프란치스꼬를 따르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글라라가 가난하고 관상적인 여인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쓴 편지들은 자신의 생활이 지니는 이 요소들을 명확히 드러내 주고 있으며, 또한 그녀가 이 요소들을 어떻게 강화시켰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글라라는 아녜스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주님의 영이 그대를 부르신 그 완덕 안에 그대의 서원을 지존하신 님께 채워 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그대의 길에다 장애물을 놓거나 그대의 생활양식을 거두게 하는 자를 아무도 믿지 말고 그런 자들에게 동의하지 마십시오.” “가난한 동정녀여,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포옹하십시오… 그대의 정배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바라보며 깊이 생각하고 관상하십시오.” 이러한 노력의 골과는 그리스도안에 찾게 되는 하느님의 계시에 초점을 두는 놀라운 그리스도론 이며 이는 프란치스꼬의 삼위일체 영성을 진일보시키는 것이다. 한편 프란치스꼬 천상의 아버지와의 영적인 관계를 강조함에 비해, 글라라는 우리를 부유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을 택하신 사랑하는 아드님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정배이신 하느님을 강조한다.
글라라의 글에는 주님의 영께서 이루어 좋으신 그 일치의 유대를 보존하려는 계속적인 노력과 갈망이 들어 있다. 만약 가난이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신과 글라라와의 관계를 이루는 데 있어서 선결 사항이 된다면, 관상이란 평화가 충만한 가운데 삼위일체를 누리는 것이고, 또한 프란치스꼬가 보여주는 그 생활이 지니고 있는 카리스마를 보다 강렬하게 생활하는 수단이 된다.
글라라 회칙에는 진일보된 차원을 지니는데, 그것은 영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자매들을 한데 묶으시는 강렬한 공동생활인 것이다. 글라라는 회칙 10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 서로간의 사랑의 일치를 항상 유지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말은 아씨시의 「가난뱅이」를 따르는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이 은총의 선물인 형제애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자매들을 하느님의 내적 생명 안에 존재하는 그 심오한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서로 떠받드는 공동체를 넘어서서 하나의 구원의 도구로 나타난다. 글라라의 영성생활에서의 이 관점이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내신 편지Ⅳ에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 “영혼의 혀가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제 육신의 혀는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 안에서 침묵토록 하겠습니다. 오 복된 딸이여, 그대에 대하여 내가 지니고 있는 사랑을 육신의 혀는 말로 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었지만, 이 글에 반쯤은 표현되었습니다.”
영성생활을 인식함에 있어서의 글라라의 천재성을 그녀의 회칙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글라라는 프란치스꼬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의 공동체로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 계시의 그 놀라운 신비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성 다미아노 수녀원의 봉쇄생활에서 자매들이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일치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매일매일 무진 애를 썼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기가 없다.


결론

현대의 많은 전기작가들이 프란치스꼬의 제자들 중에 가장 헌신적으로 그를 따랐던 아씨시의 글라라와 프란치스꼬와의 관계를 상상하여 낭만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들은 프란치스칸 영성에 있어서 글라라의 중요한 역할을 너무 그늘 속에 두는 경향이 있다. 주님의 영은 프란치스칸 이상을 이 고결한 여인을 통해서 순수하고도 찬란한 방법으로 표현하셨고 성녀의 동시대인들이 그녀의 이상을 깊이 숙고하도록 하였다.
여성들이 봉쇄 안에서만 수도생활을 해야만 했던 13세기에 왜 글라라가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상상할 수가 없다. 아마도 글라라가 몇 세기 후에 태어났다면 활동과 사도직의 생활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활동적인 여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섭리는 그녀를 역사 안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의 이상을 강하고도 빛나게 표현하는 인물로 내세우셨다. 성 다미아노 수녀원 봉쇄 안에서의 글라라의 긴 생애는, 그 작은 성당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 기도할 때 교회를 재건설하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들은 프란치스꼬의 영성의 핵심을 고유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녀 글라라의 자매들이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봉쇄생활을 하면서 글라라의 이 유산을 지켜 왔다. 작은 형제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며 도 그 때문에 고통을 겪어 왔다면, 글라라회 자매들은 프란치스칸 이상의 핵심에 있는 가난과 관상의 견고하고도 겸허한 횃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