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8,27-33)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Peter said to him in reply,
“You are the Chri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고 밝히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연한 기회로 신학교 동기 신부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보람된 순간, 가장 공허한 순간, 사제가 되어서 좋은 점과 어려운 점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흥미로웠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제라는 사실을 느끼고 이에 대한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것도 성사나 말씀 선포와 연관된 것이고, 어려움이나 공허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사나 말씀 선포와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사건 안에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언젠가 국제적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텔레비전에서 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회사 생활이 어떠냐고 물으면 “아주 좋아요.
저는 즐겁게 일해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되물었답니다.
“힘들지 않은가 보지?”그러나 사실 이와 같은 되물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즐거운 것이 곧 힘들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그 안에 즐거움이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즐거움 안에도 힘든 부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한마디로 고통 안에 기쁨이 있고, 기쁨 안에 고통이 있는 것이 우리 삶의 이치입니다.
그림자 없는 빛, 밤이 없는 낮, 오르막이 없는 내리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꾸중을 들은 이유는 이러한 삶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는 고백하지만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생각은 삶의 이치에도, 하느님의 뜻에도, 구원의 신비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가오는 고난과 역경을 피하려고만 하고 오직 평화와 기쁨만을 추구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나는 오늘 먹을 것이 있고, 또 잘 곳도 있는데 뭐가 불쌍해요? 나는 길에서 살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사는 게 행복하오. 겉모습만 보고 불행하다고 말하는 당신이 더 불쌍해 보입니다.”
먹고 잘 곳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우리 각자는 행복해야 할 각종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집안 조건, 직장 조건, 경제 조건, 친구 조건, 신앙생활 조건... 한도 끝도 없는 조건들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면서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은 한 가지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 로마로부터 멸망된 후 전 세계를 떠돌이 생활을 하며 큰 고통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근대에는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하느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하느님 역시 나의 하느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힘차게 살 수가 있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조건들을 내세워서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제외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누구이고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대해 제자들에게 묻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기를 알아보기 위한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느님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단순히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주님을 평가하면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가 나서서 말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세속적인 판단을 내리며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시지요. 하느님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친구와 함께 서울에 있는 용산전자상가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조립 컴퓨터를 구하기 위해 용산전자상가를 많이 찾았지요. 그때도 친구가 컴퓨터를 구입 한다고 해서 함께 갔던 것입니다.
몇 군데의 가게를 둘러보다가 가격과 컴퓨터 사양이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습니다. 결정하고 계산을 하려는 순간, 이 친구가 주머니를 이곳저곳 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갑이 없어졌다면서 당황해합니다. 이 지갑 안에 컴퓨터를 구매할 현금이 들어 있었는데 말입니다(당시에는 신용카드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돌아다닌 동선을 역으로 따라가면서 바닥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지갑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이 친구가 말합니다.
“됐다. 잊어버렸으면 끝이지 뭐.”하면서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돈을 왜 포기해? 경찰에 신고하자.”
이때 이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게는 정말로 큰돈이지만, 이곳 용산에서 거래되는 돈을 생각하면 내 돈은 그냥 푼돈이잖아. 다시 찾을 수 없다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낫지.”
이 친구의 집이 그렇게 부유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돈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이 꽤 멋져 보였습니다.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다.
-전삼용신부-
영화 ‘조커’(2019)는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악의 화신이 되어 가는지를 담아내었습니다. 광대복장을 입고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게 젊은 아이들은 구타하고 조롱하며 가진 것을 빼앗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시장 밑에서 일할 때 태어난 고담시의 시장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 생활에서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도 어머니의 망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실 아들을 감금하고 폭행하였습니다. 믿을 사람은 어머니 한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을 학대하고 이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조커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 온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던 이들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리고 고담시티의 악의 상징이 됩니다.
이 영화는 조커가 끊임없이 관객을 향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처럼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영화는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다 조커가 될 수밖에 없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악이 정당화됩니다.
우리는 한 평범하고 모범적인 직장인이 어떻게 악의 화신이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유용한 시스템을 고안하여 학살을 도운 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승진하려고 나라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적인 게 그렇게 나쁜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적인 것이 좋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을 사탄이 되게도 만듭니다. 아무리 세상의 많은 악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인간이니까 이럴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자신이 짐승이라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적이라는 말은 거의 사탄이 되는 것까지도 정당화하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에서 “생각하는구나.”의 단어는 ‘프로네오’인데 ‘흥미를 가지다, 관심을 가지다. 애정을 두다.’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에 관심을 가지면 사탄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탄이 되려고 해서 사탄이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사탄이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사탄도 자신들은 영원한 종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분개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질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것이 사람을 사탄도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조커가 ‘나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가졌어도 끊임없이 ‘인간이면 다 이럴 거야!’라는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98)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임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느님이 되라는 악마의 유혹에 이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 안에 하느님과 대적할 모든 요소들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을 누르는 길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죄를 짓는다면 이미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체성혈로 하느님의 본성을 모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성체를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하느님이라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초등학교 때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 중에 성택이가 있었습니다. 성택이는 사는 동네가 가까워서 학교에 갈 때나 집에 올 때 같이 다녔습니다. 말이 별로 없었고, 늘 웃는 밝은 성격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고, 성택이도 그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교실 문 밖으로 나갔던 성택이의 뒷모습이 생각납니다. 담임선생님께서 급식으로 나오던 곰보빵과 우유를 주셨던 것도 생각납니다. 넓고, 크게 보였던 유년시절의 학교 운동장도 생각납니다. 이제는 70이 훌쩍 넘으셨을 선생님께서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친구 성택이도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자국민을 중국 우한 현지에서 전세기로 데려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아산, 진천의 주민들은 중국에서 온 교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2주간 격리생활을 해야 하는 교민들을 위해서 물품을 후원하는 기업도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따뜻하게 맞이해준 성숙한 시민의식도, 자국민을 위험한 지역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국가의 힘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인터넷 뉴스의 국제 면에 난 작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전세기를 동원할 능력이 안 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 5000명이 넘는다는 뉴스였습니다. 자국민을 태우고 위험 지역을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곰보빵과 우유를 주셨듯이, 위험지역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들은 저마다 대답하였습니다.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합니다. 예언자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 특별히 기름부음 받은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힘과 권능으로 표징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께서 불의한 세상에 정의를 바로 세우리라 생각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렸던 이스라엘 왕국처럼 새로운 왕국을 세우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합니다.’ 그리고 이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 안 됩니다. 십자가는 안 됩니다. 고난을 받고, 배척 받아 죽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엄중하게 꾸짖으시며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위험에 처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수난을 피해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인류 구원을 향한 여정은 계속됩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를 향해 가시던 길에 예수님께서는 첫번째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코 복음 8장 31절)
예수님의 수난 예고 앞에 수제자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꽤나 충격적입니다. 절대로 그럴수는 없다는 표시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펄쩍 뛰면서’라는 표현까지 사용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꽤나 많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베드로 사도는 동시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영광과 승리의 왕을 희망했습니다. 헤로데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까지 넘어서는 능력자로서의 왕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반박 안에는 그의 착한 심성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이 꿈꿔왔던 현세적 희망과 기대가 물거품이 된 것에 대한 슬픔도 컸겠지만, 동시에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스승님이 겪으시게 될 수난과 죽음 때문에 크게 슬퍼한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을 거부하고 영광과 승리만을 기대하고 있는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펀치 한방을 날리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반박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이 아주 날카롭습니다. 큰 소리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손짓까지 크게 하시며 썩 물러가라고 외치십니다. 사탄이라는 어마무시한 용어를 사용하시며 나무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코 복음 8장 33절)
하느님의 뜻은 많은 경우 고통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부단히 강조하십니다. 낮아지라고, 작아지라고, 물러서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죽고 부활하라고.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는 스승의 고난과 죽음을 세차게 거부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스승께서는 그런 수제자를 단호하게 비난하시고 꾸짖으십니다. 모든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죽음의 길로 향하는 길을 그만두셔야 한다는 베드로 사도의 요구를 사탄의 유혹이라고 배척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듯이, 수난을 피해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후에 베드로 사도는 놀랄 정도로 변화됩니다. 자신의 미성숙으로 인해 벌어진 ‘사탄 사건’ ‘수제자 세번 배반 사건’등등의 부끄러운 흑역사를 사람들 앞에서 즐겨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과 자신 사이에서 벌어진 수치스런 사건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고백했지만, 자신의 업적이나 자랑거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낮아지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 자신과 능력 등, 모두를 쏟아부어주십니다. 자기 본성과 존재와 생명에 대해 죽음으로서 영혼은 자신의 신성 안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반영억신부-
공자께서는 “아침에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봉헌을 하고 성체를 모시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어야 하는데 돌아보면 후회도 크고 오히려 마음이 좁아질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주님을 모신 감사함을 성당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면 영락없이 주님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맙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로마8,5). 하며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8).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베드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는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반박을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껏 스승을 믿고 따라왔는데 당신이 떠나시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마음도 있고, 당신이 불행한 길을 가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성공적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계획이 바뀐다면 그것은 스승님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실패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스승의 깊은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적인 것에 매이는 것,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인데 그것을 반박하고 그 길을 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방해하였으니 베드로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먼저 하려 한다면 우리도 역시 사탄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나의 잇속을 챙김으로써 얼마나 자주 사탄이 되고 마는지요.
쉽고 편한 일, 쾌락을 즐기며 돈 되는 일을 쫓고, 내 생각이 다 인양 남에게 주입시키려는 사탄의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참고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 사람’ 이란 뜻이다. 왜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약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들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손희송주교).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참 잘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마귀도 압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관계 맺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해도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 그분과 관계를 맺고 따라나설 때라야 신앙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 말과 ‘명백히’(parresia) 라는 말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거쳐야 하고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 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입니다.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 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 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사탄’이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마태 16,22) 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아서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지금 벌어지는 일을 통하여 그분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통하여,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겪는 길입니다.
그것을 어쩔 수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길입니다.
그것은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길이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길입니다.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8,27-3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장소이다. 이 지방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이곳은 ‘바알신’의 예배 중심지였고, 희랍의 자연신 ‘판’의 탄생지이며 산으로 올라가면 세계의 지배자로 자처한 로마황제의 신성을 상징하는 흰 대리석 신전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곳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서 물으신다. 베싸이다의 소경을 치유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의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알아보시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을 치유해 주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알려주셨으나,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당신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를 아시고 고쳐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시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야 할 마지막 일은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사업을 완성하는 일만이 남은 시점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답답한 면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시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셨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셨다. 그래서 먼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신다. 그 대답은 소문과 같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하였다. 그런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하신다. 이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을 칭찬하신다.
그러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즉 사람의 아들이 많은 이들에게 배척을 받고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에 베드로는 펄쩍 뛰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다(32절). 이에 예수께서는 가장 혹독하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고 책망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래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내 생활 속에,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하여도 베드로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세상의 행복을 위한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스스로 신원과 역할을 말씀하시듯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라고 하는 어려운 길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어 모두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분의 삶을 본받아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변화되었다. 나에게 있어 주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보고, 혹시나 내가 만들어 놓은 주님을 내가 따르면서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는 않는가 생각하면서, 진정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신앙인을 기도하자.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 31)
-한상우신부-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여정을
직접 걸어가십니다.
구원의 여정은
끝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충실함의
여정입니다.
고난과
배척을 통해
주님의 길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의 길은
이렇듯 생명을
내어주는 구원의
길입니다.
구원의 길은
고난과
배척이라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십자가를 통해
바라보는
생명과 희망의
새로운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배척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죽음과 배척또한
은총의 길이
되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의 거짓과
교만을 밝히십니다.
진정한 사랑의
힘은 억압이 아닌
생명을 섬기고
내어주는 구원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진실한 관계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저마다의 십자가에
응답하는 은총의
여정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자기 견해가 있습니다. 대개 자신의 지식과 체험으로 걸러낸 의견일 겁니다.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보는 시각 안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내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이 자리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사람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남다른 관계성에 주목하여 그분을 정의하지요. 그렇다면 좀 더 예수님 가까이 머물며 배우는 제자들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그 마음을 알고 싶어하십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 29).
베드로가 답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기적과 표징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자비를 익히 보아온 그의 대답에는 자신의 희망과 꿈 또한 숨어 있습니다. 이민족의 억압 속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중에게 메시아, 그리스도는 단지 종교적이고 영적인 범주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인 해방을 이끌어낼 지도자여야 합니다.
"많은 고난 ... 배척 ... 죽임 "(마르 8,31).
그런 베드로의 속마음, 제자들의 야망을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진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라는 예언자의 소명 뒤에는 모욕과 업신여김과 죽음이라는 예언자의 운명이 반드시 따라붙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권력과 영예를 입은 예언자는 대부분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엄중히 이르셨다"(마르 8,30).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
복음사가는 비교적 단호한 표현을 강도 높게 사용하여 예수님의 심정을 드러냅니다. 온전한 희생 제사를 향해 가는 그분의 비장한 각오와 결심이 담겨 있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르 8,32).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며 걸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소리를 듣자 베드로가 나섭니다.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하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뭔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감히 주제 넘게 이를 바로잡으려 합니다.
잠시 제1독서를 봅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는 이는 부자와 빈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야고 2,6).
엄격한 신분제도와 그에 따른 빈부 격차가 일반화되어 있던 사회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서로 평등한 형제자매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에 대한 차별은 관습의 보호 아래 당연시 되어버린 오점이지요.
복음 속에서 감히 스승을 꼭 붙들고 반박하던 베드로가 단지 사랑하는 스승님의 안위가 염려되어 그랬을까요? 혹시 베드로는 가난이 두렵고 혐오스러워서 그랬던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영광의 주님만을 고대하는 이에게 십자가의 치욕과 죽음은 처절한 실패에 불과합니다. 아직 예언자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스승의 실패가 곧 자신의 실패요 몰락입니다. 그러니 절박히 달려들 수밖에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질서를 잃게 되는 것은 십중팔구 악의 장난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세상을 섬기고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무질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믿고 아끼는 제자 베드로를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악의 농간에는 단호한 대처가 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하느님 시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의 세속적 의미가 전복됩니다. 세상의 가난한 이는 믿음의 부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세상에서 온갖 것을 누린 부자는 자칫하면 밀려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예수님이 부유하고 능력 출중한 성공 모델이어서 좋아합니까, 아니면 자청해 겪어내신 최악의 가난이 벗님 때문임을 알기에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누릴 수 있어서 따릅니까, 아니면 그 모두를 다 잃어도 그분만 얻으면 모든 걸 소유한 것임을 믿기에 따릅니까?
오늘 우리 귀에 울리는 수난 예고가 우리 각자에게 도전인지 격려인지 고요히 머물러 봅시다. 예수님을 뜯어 말리고 싶은지, 어떤 길이 되어도 그저 따르고 싶은지 주님과 조곤조곤 이야기 나눠봐도 좋겠지요.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는 물음에 나만의 답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니?"
사랑하는 연인에게 꼭 확인받고 싶어하는 질문입니다.

아무리 달라도 하느님의 같은 자녀로 사는 우리
-김찬선신부-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같으면서도 달라야 하고 다르지만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름-같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같음을 강조하여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주의도 조심해야 하지만
다름을 너무 강조하여 같음을 부정하고,
그것이 <같이>를 거부하는 것이 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다름을 존중하지 않고 같기만을 요구하는 것도 사랑이 아닌 폭력이지만
다름을 주장하며 같이 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일치를 거부하는 것이고,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같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다르지만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분열적 다름도 문제지만 차별적 다름도 문제입니다.
다른 것이 분열의 이유가 되어서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빈부의 차이가 있어도,
배움의 차이가 있어도,
종교와 문화가 달라도,
언어와 종족이 달라도,
생김새나 성격이 달라도 인간이라는 면에서는 같고,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인간이라는 면에서는 같으며,
같은 인간이기에 존엄성에 있어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고
평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Humanism인본주의와 윤리적인 차원에서 평등이라면
신본주의와 신앙적인 차원에서 <같음>을 우리는 얘기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신앙적으로 같음은 인본주의적이고 윤리적인 평등과
다르다는 얘기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인간이란 모두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며,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같은 사랑을 받으며,
같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서는n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얘기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믿음의 부자가 얼마나 행복한지,
반대로 하느님 사랑을 모르는 세상의 부자가 얼마나 가련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됩니다.
사랑의 만족이 없을수록 돈이든 권력이든 소유를 하려고 하고,
사랑의 기쁨을 모를수록 돈과 권력으로 군림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만족이 없을 때 두 가지의 부정적 상태가 됩니다.
불만이 하나이고 허전함 또는 마음의 허함이 다른 하나인데
불만이 불평이나 심술이나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는 데 비해
허전함은 소극적으로는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달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는 돈과 권력을 소유하는 것으로 채우기도 합니다.
이때 돈과 권력은 앞서 봤듯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차별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되지요.
그런데 이것이 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기에
사랑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8,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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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빛, 밤이 없는 낮, 오르막이 없는 내리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꾸중을 들은 이유는 이러한 삶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는 고백하지만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생각은 삶의 이치에도, 하느님의 뜻에도, 구원의 신비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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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평범하고 모범적인 직장인이 어떻게 악의 화신이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유용한 시스템을 고안하여 학살을 도운 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승진하려고 나라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에서 “생각하는구나.”의 단어는 ‘프로네오’인데 ‘흥미를 가지다, 관심을 가지다. 애정을 두다.’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에 관심을 가지면 사탄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98)
죄는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 안에 하느님과 대적할 모든 요소들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을 누르는 길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죄를 짓는다면 이미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체성혈로 하느님의 본성을 모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성체를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하느님이라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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