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2. 18. 20:07

2020년 2월 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그는 눈을 뜨면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가지 마라.”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마르8,22-26)


Looking up the man replied,

“I see people looking like trees and walking.”
Then he laid hands on the man’s eyes

a second time and he saw clearly;
his sight was restored

and he could see everything distinctly.
Then he sent him home and said,

“Do not even go into the villag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말씀은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으므로, 이를 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제1독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눈먼 이를 낫게 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보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 몸에 이상이 있으면 엑스레이(X-ray)나 엠아르아이(MRI), 또는 시티(CT) 촬영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들은 바로는 촬영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촬영된 사진을 잘 판독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실력이 좋은 의사는 그 사진을 제대로 판독하지만, 그렇지 않은 의사는 사진을 보고도 올바른 진단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신앙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똑같은 현실 앞에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방황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그 현실에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할 줄 압니다.
곧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오늘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적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데리고 벳사이다에서 떨어진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왜 외딴곳으로 가셔야만 하였을까요? 벳사이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고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1,21 참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입니다.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어 주십니다.
여느 때처럼 사람의 가장 약한 곳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런데 당장 낫지는 않았습니다.
눈먼 이에게 사람이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식물처럼 보였습니다.
아직 사람을 볼 만한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더 특별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곧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두 눈에 손을 얹어 눈을 가리십니다.
빛을 주시려고,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워 주십니다.
참세상을 보려면 어둠 속의 시간이 필요합니다.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으시어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나와, 당신의 거룩한 곳으로 데리고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가리신 다음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다른 신부의 사제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서재입니다. 이 서재를 보면 이 신부님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단순히 책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이슈가 되는 책을 보고 있는지, 또 공부하고 있는 책이 있는지가 보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저 자신도 책을 그렇게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책만 많아도 ‘와 열심히 공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다른 사목에도 열심히 하시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많은 책을 읽다 보니 이제야 보입니다.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내 눈이 가는 곳이 곧 나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관심에 대해서 묵상을 해봅니다. ‘주님, 주님!’ 하며 매일 기도하고는 있지만, 그분 뜻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서 세상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책이 눈에 곧바로 들어오듯이, 주님께 관심을 두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눈에 곧바로 들어올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손을 대 주십사고 청합니다. 앞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염원대로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사물을 똑바로 볼 수도 있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앞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제대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차례에 걸쳐서 그에게 손을 얹으셨습니다.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우리도 주님의 손길에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알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누군가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하십니다. 조금 이상한 말씀입니다.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다니요. 여기는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의 집에 연연하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었지만, 복음의 은총으로 치유될 수 있었음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품에 늘 머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눈이라는 자세로 나간다면 온 세상의 눈이 멀어버릴 것이다(마하트마 간디).



죄에서 벗어나기.

요즘에는 우울증이 마치 감기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삶을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겠지요. 언젠가 어떤 형제님을 만나 자신이 느끼는 우울한 감정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 남이 알면 부끄러운 일, 그런 일을 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우울한 감정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졌고, 만사가 시들해지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추락하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하시더군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느님을 피해 숨은 것도 이런 감정 때문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순간에서도 하느님은 우리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알아도 찾으십니다. 회개해서 다시 돌아오는 한 사람을 더 원한다며, 사랑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죄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대신 내 죄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 안에서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이 나의 시력을 결정한다

-전삼용신부-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을 때 라이언 긱스라는 전설적인 공격수가 있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박지성 선수도 한국 대표팀에 한 명만 데려오라면 누구를 데려오고 싶으냐는 질문에 라이언 긱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긱스는 월드컵에서 뛰는 것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조국 웨일스가 월드컵 예선을 단 한 번도 통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아무리 혼자 잘 해도 나머지 10명의 평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오는 복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해주시는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눈의 치유와 소경이 머무는 장소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바로 볼 수 있고, 또 시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하여 속한 가톨릭교회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곧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다면 성탄트리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경의 첫 번째 눈을 띄워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한데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는 행위나 그에게 안수하시는 행위가 다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밝아져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며 우리가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음을 입증합니다. 예로부터 성탄트리 맨 위에 별을 달아 다윗의 별인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불을 밝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임을 보여주었으며, 둥그런 밀떡을 달아 이 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죄의 동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공동체에 속하던 그 속한 사람은 그 공동체의 시력을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성탄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성체와 성혈로 볼 수 있을까요? 그 공동체는 성체성혈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가졌던 믿음의 눈을 다시 잃게 됩니다. 그 영적인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는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수령이 2,3천년쯤 되며, 높이가 100m를 넘고 둘레도 8-9m나 되는 큰 참나무 숲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 덩치 큰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그 뿌리로 다른 나무들과 서로서로를 연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란 이와 같습니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각자의 믿음이 있습니다. 혼자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그 공동체를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머물면 그 공동체의 평균정도는 자랄 수 있습니다.

      한 오케스트라에 속해있으며 혼자 다른 곡을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면 다른 믿음엔 다다를 수 없습니다. 각 공동체가 제공하는 시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벗어난다는 뜻과 같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 내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결국 나의 영적인 시력을 결정함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의 치유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함께 이끄셨습니다.


-조재형신부-


199030년 전의 일입니다. 지리산으로 주일학교 학생들과 여름 수련회를 갔습니다. 백무동에서 장터목까지 먼저 가서 텐트를 치고, 식사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학생들 중에 자원자를 신청 받았습니다. 눈이 초롱초롱한 학생들이 자원했습니다. 텐트, 쌀과 부식을 들고 선발대는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으니 후발대가 올라왔습니다. 무더운 여름 땀은 흘렸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지치고 힘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주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지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할 수 있었습니다. 기꺼이 손을 들고 자원해서 텐트를 들고, 부식을 들고 산을 올랐던 학생들은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짐을 들어주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신종바이러스를 대하는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스크의 가격을 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를 정쟁의 도구로 삼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짜뉴스로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친 공포와 걱정으로 감염되지 않은 사람까지 출입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우한에 고립된 국민을 데려오지 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가는 위험에 처한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데려올 책임이 있습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도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착용하면 큰 위험 없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보건당국과 국가의 대응능력을 믿고, 안전수칙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원해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가는 의사와 간호사도 있습니다. 80이 넘은 의사도 자원했습니다. 보호복을 빨리 입고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 머리를 삭발한 간호사도 있습니다. 고립무원의 우한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시민도 있습니다. 우한으로 가는 전세기에 자원해서 탑승한 승무원이 있습니다. 자칫 감염의 위험도 있고, 2주간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웃을 데려오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들입니다. 항공사의 대표도 승무원들과 함께 전세기에 탑승했다고 합니다. 자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오는 교민들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눈이 먼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온 이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눈이 먼 사람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눈이 먼 사람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눈이 먼 사람과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을 가진 이웃을 보았고, 눈이 먼 사람의 눈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표징은 욕망과 시기가 만나면 결코 드러나지 못합니다. 표징은 사랑과 사랑이 만나면 드러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사랑의 눈을 가진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서너살 된 아이들은 무서울 때 꼭 눈을 감습니다. 그때 엄마는 아이를 가슴에 꼭 안아주고, ‘괜찮다’며 등을 두드려줍니다. 그런 엄마의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아이는 다시 눈을 살짝 뜹니다. 공포는 조금씩 사라지고 현실을 직면하는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사람들이 한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치유의 은총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예수님의 반응과 태도가 특별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려 나가십니다.

 

 본격적인 치유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함께 걸으면서, 그와 친밀해지는 시간을 갖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십니다.

 

 침을 바르시고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는 예수님 시대 당시 치유자들이 사용했던 전형적인 모션이었습니다. 이날 치유는 한번에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환자의 증세가 얼마나 중증이었던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가련한 인간을 향해 보여주시는 친밀함이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안그래도 계속 밀려드는 군중으로 인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바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냥 말 한마디면 치유가 가능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측은한 인간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동행해주시고, 따뜻한 스킨십을 나누시고, 배려해주시고,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에 눈먼 사람은 큰 용기를 얻습니다. 오랜 세월 지니고 살아왔던 두려움과 낙담, 외로움과 서러움이 눈녹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 마음의 치유, 전인적인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만왕의 왕 하느님께서 한없이 부족하고 부당한 죄인, 두려움에 떠는 한 나약한 인간과 일대일로 접촉하시는 모습,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니 사목이란 양떼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측면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살아가는 일상적인 고통과 깊은 상처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이 사목이 아닐까요?

 

 같은 처지의 인간으로서 뭐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함께 아파하고, 그저 함께 있어주고, 그저 함께 동행해주는 일, 그저 함께 울어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참된 사목이 아닐까요?

 

 벳사이다는 ‘어부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벳사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요르단 강의 하구 동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분봉왕 필립보는 이 마을을 도읍으로 승격시켜 아우구스토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이 마을을 황제의 딸 이름인 유리아하고 불렀습니다.

 

 사실 벳사이다에는 그 눈먼 이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눈먼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들이었고, 어쩌면 오늘 우리들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이들 말입니다.

 

 줄곧 예수님 곁에 머물며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눈먼 사람이나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겸손하게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그냥 눈이 아니라 혜안(慧眼), 영안(靈眼)을 제게 주십시오.”


무엇이 보이느냐?

-반영억신부-    

 

눈 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침은 생명의 힘인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은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손을 얹은 행위는 치유의 능력, 성령의 힘이 전달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 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 는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치우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현상을 보는 눈도 중요합니다. 검은 것은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도 필요합니다.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우리는 각자의 직분에 맞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마음을, 제자는 제자로서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마음을,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말씀을 통하여 능력과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 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을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주신 다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8,26)고 하셨습니다. 저 마을이 무슨 마을일가요?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 만연하는 마을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진 곳입니다. 그 마을로 들어가면 또다시 예전처럼 죄에 물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마을로 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이 하신 일이 마음이 굽은 사람들의 눈에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늘의 뜻에 따라 하였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냥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보기는 보되 가려져 있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마치, 장미꽃을 그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뿐, 그 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불이 자신을 뜨겁게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 알뿐, 주변을 환히 밝혀준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정녕,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대체 무엇이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


그러기에,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입니다. 영의 눈은 신앙이 깊어가면서 밝아지는 눈입니다.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성령의 도유를 말합니다. 곧 영으로 도유되어 치유된 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것을 똑똑하게 뚜렷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고, 나아가서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보며, 그분의 말씀에서 하느님 나라와 사랑을 보는 눈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는 눈 말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송영진신부-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여기서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 청했다는 뜻이고,
다시 이 말은 눈먼 이의 눈을 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눈먼 이 자신이 청했을 것입니다.
(그 눈먼 이는 자기가 예수님께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자기 눈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사람들에게서 그를 떼어 놓으신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과거의 삶’에서 그를 분리시키신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시력이 한 번에 회복되지 않고, 단계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신앙이 단계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일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사람에 따라서,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한 번에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온전히
깨닫는 경우도 있고, 어떤 강렬한 체험을 함으로써 신앙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계적으로 조금씩 발전하게 됩니다.
<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을 직접 뵙는 단계입니다(묵시 22,4).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그때’는 그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진리’가 너무 막연하게 생각되더라도,
또 성경 말씀과 교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초조해하지도 말고, 답답해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앙이 미숙하게 느껴지고, 자기의 기도생활이나 영성생활이
어설프다고 느껴지더라도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은 저쪽 세상에 가서야 이루어질 수도 있고,
살아 있는 동안 이쪽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그에게 ‘새 인생’을 살 기회를 주신 일입니다.
(‘새 인생’ 자체를 주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살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생각하면, 그 마을은 과거의 낡은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는 구원과 생명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현세의 삶만 신경 쓰면서 사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된 것은, ‘새 인생’을 살 기회를 얻은 일입니다.
이 ‘새 인생’은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의 인생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생명과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삶’은 ‘신앙을 갖기 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고,
세속 사람들의 삶과도 완전히 다른, 글자 그대로 ‘새 삶’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새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만으로 새롭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이 합해져야 합니다.
(새롭게 되려는 노력은, 새 인생을 살 기회를 주신
예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또 예수님의 은총은 새 인생을 살기를 희망하는 우리를 도와주는 힘입니다.)
만일에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세례 받은 후의 삶과 세례 받기 전의 삶에
다른 점이 없다면, 믿음 없이 살던 때의 모습 그대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세례성사의 은총을 스스로 버리는 일과 같고,
주님께서 주신 ‘새 인생을 살 기회’를 잃어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10).”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콜로 2,6-8).”
여기서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이라는 말은,
‘진리’인 것처럼 위장한 이단 사상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과학과 철학의 탈을 쓰고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실상 미신일 뿐인 헛된 이론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론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믿음을 흔들어 놓고,
또 우리가 새 인생을 향해서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막고,
하느님의 반대쪽으로 나 있는 길로,
즉 옛날부터 사탄이 만들어 놓은 낡은 길로 걸어가라고 유혹하는 이론들입니다.
(요즘 티브이 채널 가운데에는, 그럴듯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마치 과학인 것처럼,
또 진리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임으로써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채널들이 많습니다.
홍수처럼 넘쳐 나는 인터넷의 많은 정보들도 잘 식별해야 합니다.
인터넷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닌데, 악용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수많은 매체들이 다 자기가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현대 사회는,
대중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보다 더 많은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8,22-26: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시는 기적을 들었다. 좀 특이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신 기적(7,31-37)과 비슷하다. 먼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온다(7,32=8,22).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7,33a=8,23a). 그리고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7,33b=8,23b)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 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옛날 어른들이 하던 일들이 생각난다. 아픈 상처에 침을 발라주는 예가 있었다. 잠침을 발라준다고 하는데, 자고 일어난 후 어머니들이 침을 아픈데 발라주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적사화와 좀 다르다고 하겠다. 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자세와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 즉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를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 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에 있다. 이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 주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 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에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을 가지고 있으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마르 8, 25)

-한상우신부-

삶이라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고
똑바로
사랑할 수 없어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찾는 것이
다시 똑바로 보는
빛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똑똑히
보게 하십니다.

치유는
주님과 함께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제대로 볼 때
제대로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회복된
건강한 눈으로

제대로 보고
제대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우리는 진실로
똑똑히 분명히
보며 살고 있는지요.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눈먼 이가 눈을 뜹니다.

복음 내용의 배경이 되는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고을 중 하나입니다(마태 11,20-24 참조). 그곳 사람들은 놀라운 기적을 목도하고도 예수님께 돌아서지 않았지요. 그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이사 6,9-10 참조) 이들입니다.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마르 8,23).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손을 잡고 마을을 벗어나십니다. 벳사이다 안에서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들 고을 사람들에게는 값싼 소문거리로 술렁대다 사라질 스캔들 정도에 불과할 터입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마르 8,23).

흡사 창조의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태초에 인간의 코에 불어넣으신 숨처럼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닫힌 눈 위에 침을 바르십니다. 그리고 손을 얹으시는 축복의 행위가 차례로 이어집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 8,26).

예수님은 눈을 뜨게 된 이를 다시 한 번 벳사이다 고을과 분리하십니다. 그의 치유가 벳사이다 고을의 죄를 더할 뿐이라는 걸 아시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견디고 버티는 인내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단절과 결별이 필요한 순간도 오기 마련이니, 머무를 때와 떠날 때를 잘 식별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변모시키는지 보여 줍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야고 1,21).

우리는 다가오신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 내리고 자라도록 유연하고 부드러운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결을 헤집거나 꺾지 않도록 공손히 품어야 합니다.

"거기에 머물면 ... 실천에 옮겨 ...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5).

말씀에 머물면 그 말씀은 우리 존재 밖으로 흘러나와 주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또 주님의 분위기가 됩니다. 말씀이 선하고 진실된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은 흡사 잉태한 말씀이 선행으로 세상에 출산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혜택을 받는 이보다 베푸는 이가 더 큰 행복을 체험합니다.

말씀과 결합되기로 결심한 이에게는 오늘 복음 속 눈먼 이처럼 결단이 요구됩니다. 먼저 자신을 예수님 앞에 데려가는 이들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이끄시는 예수님께 몸을 맡겨야 합니다. 설령 익숙한 곳을 벗어난다 해도 믿음을 다해 의탁해야 합니다. 말씀에 머무를 때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니 길을 잃을 염려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터치와 손길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경청하고 내 목소리로 응답해야 합니다. 아직 미완의 상태여도 굳이 숨기거나 괜찮은 척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어야 합니다. 과정 안에 있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고 하지요. 지금 깨닫지 못한 것이 언젠가 선명해질 때가 올 것이고, 지금 알아들은 말씀도 언젠가 우리 실존에 따라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우리는 말씀을 듣고 행하기 전에 기거했던 낡은 집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의 말씀을 만나서 머무르고 사랑하고 실천까지 이르면 어느새 나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 과정에서 새 창조의 치유와 축복이 일어나기에, 눈먼 시절 기거했던 토굴로 다시 기어들어가기엔 너무 밝아졌고 너무 커버렸습니다. 말씀과 함께 사는 이는 끊임없이 허물을 벗고, 또 끊임없이 껍질을 뚫고 나옵니다. 그러니 다시 옛 마을로 되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기적에도 벳사이다 고을은, 세상은 꿈쩍하지 않겠지만,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일으키신 기적의 수를 실적 삼아 헤아리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중요한 건 눈이 멀었다 눈을 뜨게 된 이, 말씀을 만난 이의 회개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눈을 뜬 이, 말씀으로 변모된 이가, 자신이 누구였고 어떤 만남과 과정을 거쳐 지금의 자기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믿는다면 오늘의 기적은 완성입니다. 이 기적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말씀께 손이 잡혀 끌려 나가는 순간마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고 무한하며 매혹적인 말씀을 소유한 벗님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요!!! 그런 벗님을 축복합니다.

우리의 말에 관하여  
-김찬선신부-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은 우리의 말과 관련된 것으로서
우선 듣는 것과 하는 것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말과 관련하여 흔히 듣기는 많이 하고 하는 것은 적게 하라고 하고,
침묵은 금이라고 하며 가능한 말을 줄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도 갈수록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옆에는 가기도 싫고,
많은 얘기를 그가 해도 거의 듣지 않는데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이 듣기 싫어하고 듣지 않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할 때의 그 말이란
모든 말을 의미하거나 무엇보다도 좋은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좋은 말은 해야 할 뿐 아니라 자주 또 많이 해야겠지요.

예를 들어 저는 격려의 말은 잘하는 편이지만 칭찬의 말은 너무 인색하여
저에게 충고해주시는 분들은 칭찬을 좀 많이 하라고 얘기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말과 관련하여 최악은 듣지는 않고 줄곧 자기 얘기만 하고,
좋은 말은 하지 않고 나쁜 말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야고보서는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합니다.
"듣기는 빨리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뭉뚱그려 나쁜 말이라고 하지만 나쁜 말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자기를 강하게 주장하는 말이나 남을 흉보는 말이나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이
있고 더 나아가서 함부로 말하거나 상처 주는 말이나 폭력적인 말도 있는데
오늘 야고보서는 그중에서도 분노의 말을 특히 꼬집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하기를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하라는데 사실
더디 말하는 것 중의 제일 어려운 것이 분노의 말일 것이고
분노의 말을 더디 하는 것은 어려운 정도를 넘어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애를 쓴다면 분노의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나을 것이고 그래야 성공적일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습니까? 가능하기는 한 겁니까?

쉽지 않지만 이미 생긴 분노를 터트리지 않는 겁소다는 쉽고 가능합니다.
왜냐면 분노 또는 화는 자기 뜻대로 안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에 뭣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사람 때문에 화가 나고,
누구와 상관없이 뭣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대상 없이 화가 납니다.

그러므로 화는 자기 중심성의 결과이고 그래서 교만한 사람, 원든지
자기 뜻대로 되고 자기 주장대로 되어야 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화를 내기 마련이기에 이 자기 중심성을 다스리면 됩니다.

그러니까 일상을 살면서 수시로 나 중심적인 면을 들여다보면서
그 싹을 원천 차단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대화를 할 때에도 적극적으로는 상대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고
소극적으로는 나의 주장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됩니다.

나의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너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더 큰 사랑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큰 사랑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랑입니다.

그리고 분노는 내 뜻대로 한 것이 그렇게 안될 때 생기는 것이기에
분노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이룰 수 없겠지요.
내 뜻대로 하느라 하느님의 뜻을 생각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야고보서는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도 하라고 하면서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하십니다.

듣고 실행까지 하는 것은 말씀하신 주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데 만일 듣고 실천치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음식을 먹자마자 뱉어버려 결국 아무 영양섭취가 되지 않는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듣기만 하고 실천치 않아 말씀이 내 삶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말씀을 유념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4년 2월 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는 눈을 뜨면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가지 마라.”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마르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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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선택하여 속한 가톨릭교회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곧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다면 성탄트리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경의 첫 번째 눈을 띄워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한데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는 행위나 그에게 안수하시는 행위가 다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밝아져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며 우리가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음을 입증합니다. 예로부터 성탄트리 맨 위에 별을 달아 다윗의 별인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불을 밝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임을 보여주었으며, 둥그런 밀떡을 달아 이 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죄의 동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공동체에 속하던 그 속한 사람은 그 공동체의 시력을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성탄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성체와 성혈로 볼 수 있을까요? 그 공동체는 성체성혈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가졌던 믿음의 눈을 다시 잃게 됩니다. 그 영적인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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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눈이 먼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온 이웃을 보았습니다그 사람들은 눈이 먼 사람의 고통을 보았습니다눈이 먼 사람의 희망을 보았습니다눈이 먼 사람과 함께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을 가진 이웃을 보았고눈이 먼 사람의 눈을 치유해 주셨습니다표징은 욕망과 시기가 만나면 결코 드러나지 못합니다표징은 사랑과 사랑이 만나면 드러납니다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사랑의 눈을 가진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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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자세와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즉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를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 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에 있다이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 주신 것처럼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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