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2. 16. 19:46

2020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
(마르8,11-13)


“Why does this generation seek a sign?
Amen, I say to you,
no sign will be given to this genera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고보는 시련에 굴하지 말고 인내로 이겨 내며,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지혜를 청하라고 한다(제1독서). 바리사이들의 불신앙에 실망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가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일곱 개의 빵으로 사천 명을 배 불리신 그 자리에 바리사이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광야와 같은 그곳에서 군중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만나로 굶주림을 채우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늘에서 온 표징이었음에도 그것을 보고도, 그것에 관해서 듣고도 표징이라 여기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내 배우자가 가족들을 아끼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렇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족들과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표현해 달라고 요구합니다.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정녕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나의 배우자가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 정말 없었습니까? 어쩌면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 채 편견과 선입견의 틀 속에 갇힌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때는 글이 한 자도 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리미리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 준비가 바로 메모입니다. 매일 새벽마다 묵상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미리 써 둔 메모가 있어서 가능합니다. 만약 생각날 때마다 써두는 메모 없이, 새벽에만 묵상 글을 쓴다면 아마 1년이면 소재가 없어서 그냥 끝을 맺고 말았을 것입니다.

준비 작업이 중요합니다. 묵상을 적은 메모, 평소에 읽던 책을 통한 메모, 일상의 삶 안에서 체험한 일에 대한 메모 등의 준비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20년째 새벽 묵상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준비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평상시에 공부를 미리 하는 것이 준비이고 운동 시합을 위해 많은 연습을 하는 것이 준비입니다. 자신의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준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빼놓지 말아야 할 준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입니다.

하느님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말로만 그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는 말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없습니다. 선심 쓰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셔야 믿겠다고 말하고, 남이 받은 은총과 사랑에 대해서는 시기와 질투로 마주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이미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고 이에 대한 풀이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또 다른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아마 표징을 보여주면, 또 다른 표징을 보여달라고 계속 요구하지 않을까요? 믿지 않는 데에서는 어떤 표징을 봐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법이니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바리사이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믿음 없는 사람들과 굳이 함께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그 나라에 들어가야겠다는 분명한 목표는 있습니까? 세상일에만 집중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보다는 이 세상을 편하게 살 그래서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할 일만이 이루어지길 주님께 청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함께해야 주님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진정한 여행은 다른 낯선 땅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프루스트).



자신에게 맞는 공간의 소중함

친구 중에 술을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젠가 함께 식사한 뒤에 차 한 잔 마시러 카페에 가자고 하니, “나는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 커피 한 잔 가격이 밥 한 끼 가격이잖아.”라고 말합니다. 하긴 불과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을 ‘된장남, 된장녀’ 등의 표현을 써가면서 혐오했습니다. 저도 이렇게 비판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카페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많이 느낍니다.

강의가 있는 날, 미리 그 지역의 근처 카페를 찾습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서 강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또 약속 시각이 남아 있을 때도 카페에 갑니다. 역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약속 시각 전까지 책을 읽고 또 글도 씁니다.

솔직히 식사가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만남을 위한 술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창의적 활동을 하는 카페도 필요하고, 특히 제게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1시간에 5,000원가량의 비용을 내고 글을 쓰고 강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5,000원을 내고 밥 한 끼를 해결해서 배를 채우는 것보다 더 소중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공간의 소중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에게만 맞는 말이니 굳이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을 자신에게 전달해주면 어떨까요? 

신앙에서는 좋은 의도가 전부다

-전삼용신부-


 왕이 한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신하 두 사람이 죄인을 감옥으로 호송했습니다. 절망감에 빠진 죄수는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이 못 된 왕아!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평생 허우적거려라.”

이때 한 신하가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여보시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죄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소.”

신하들이 돌아오자 왕이 물었습니다.

“그래 죄인이 잘못을 뉘우치던가?”

그때 죄수의 말을 가로막던 착한 심성의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예. 게다가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폐하를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 했습니다.”

신하의 말에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죄수를 살려주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습니다.

그때 다른 신하가 말했습니다.

“폐하. 아닙니다. 그 죄수는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폐하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신하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한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나는 저 사람의 말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폐하, 어째서 진실을 마다하고 거짓말이 마음에 든다 하시는 겁니까?”

왕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사람을 살리고 싶은 좋은 의도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네 말에는 악의가 있구나.”

왕은 결국 죄수의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물론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해서 거짓말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를 판단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진실과 거짓보다는 사람 마음 안의 의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했더라도 나쁜 결과가 나올 수 있고, 나쁜 의도로 했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판단할 때는 외적인 결과보다는 그 사람 안에 좋은 의도가 있는지, 나쁜 의도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그러면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임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그러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실천을 안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좋은 의도만 있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 표징이 부족한 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표징자체이십니다. 표징자체이신 분에게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다 키워놓았더니 아이가 “당신이 내 엄마라는 것을 증명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켜 우리 양식이 되게 해 주신 생명의 양식 앞에서 “당신이 아버지인 것을 증명해 보시오!”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들을 떠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들은 좋은 의도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을 때, 어머니에게 “당신이 저의 어머니임을 증명해보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더 세세히 뜯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 하시는 모든 행위가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하시는 행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어머니를 잘 관찰했던 것은 어쩌면 제가 좋은 자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의도만 있으면 하느님은 그 의도를 채워줄 모든 은혜를 이미 다 주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의도가 있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다른 표징은 요구할 필요도 없게 많은 표징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운전할 때 목적지가 분명하면 그 목적지를 표시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수많은 표징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바이러스로 중국의 도시들이 봉쇄되었습니다. 전세기를 동원해서 자국민을 데려오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도 귀국을 원하는 사람을 전세기를 동원해 데려왔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마스크, 방호복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 나라를 도와주는 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봉쇄된 도시를 향해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치료를 받아야하는 환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위험이 따를지라도 서로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바이러스의 발병원인, 전파과정을 밝히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중국정부도 국제사회와 공조해서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돌아보면 우리도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후 많은 구호물품을 받았습니다. 교회도 외국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정제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유포되는 카더라 뉴스입니다. 사람과 바이러스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치료하고, 도와주어야 할 우리의 이웃입니다. 봉쇄된 도시는 우리 이웃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입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가 만들어지고, 상황이 안정되면 예전처럼 서로 왕래하면서 문화와 경제 교류를 해야 하는 이웃입니다. 지진, 질병, 가뭄, 홍수, 화산폭발은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우리를 찾아오곤 합니다. 지구는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러기에 지구도 몸살을 앓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재난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도전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응전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과학, 기술, 문화, 예술은 도전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위로해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박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박해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에 커다란 화재가 있었습니다. 성난 민심을 돌리기 위해서 초대교회 신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소문, 거짓된 소문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초대교회는 박해와 시련을 받아들였고, 복음은 더 멀리 전해졌습니다.

 

생각의 전환, 인식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땅에 있지만 우리는 우주적인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시간을 향해 나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채만 한 고래도 아주 작은 꼴뚜기도 저마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원하는 바리사이파들을 만났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을 비교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엘리야 보다, 다윗보다 더 뛰어난 분인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으로는, 상대평가를 하는 눈으로는 사랑으로 오시는 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입니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

-반영억신부-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 안에는 수난 받은 성모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매괴성모님상은 루르드에서 제작하여 1930년 대성전 건립당시 제대뒤편 중앙에 안치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성당은 인민군의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인민군이 성모상을 없애려 총을 쏘았는데 7발을 맞았는데도 부서지지 않았고, 그래서 성모상을 없애 버리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끌어내리려 하였으나 성모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힐책하는 모습으로 바라보셔서 인민군들은 성모상을 더 이상 건드릴 수 없었고 그때부터 성당에서 철수 하였다고 합니다. 6,25가 지난 후부터는 이 성모상을 칠고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상 앞에서 기도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치유의 성모님'이라고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모님 앞에서 기도하게 되는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총을 겨누는 것은 하나의 미움이요, 분노, 증오, 시기, 질투, 적개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7발의 총탄에도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모두 가슴에 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총을 맞고도 하늘을 우러러 보시는 모습으로 여전히 두 손을 모으고 계신 모습인데 마음이 천상을 향하고 계셨기에 모두를 품으실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 자비와 한없는 사랑을 권고하며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천상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표징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 덩어리에 매달리고, 삶을 변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신비한 것을 봤다는 것을 자랑삼아 애기하며 교만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하늘의 기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사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많이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며 영원한 삶을 살아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뭘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기이한 현상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표징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와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도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바로 앞 장면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표징을 구하는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불신과 절개 없음을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아멘.

                       

표징 

-송영진신부-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한 일은 ‘사탄의 유혹’과 같은 일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마태 4,6).”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사탄에게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만일에 사탄이 요구한 대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사탄에게 증명해 보인다면, 그것은 사탄에게 굴복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믿고 구원을 받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구원의 반대쪽으로만 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라는 말씀은, “이 세대는 왜
자기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기만 하는가?”로 해석됩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징을 보여주기를,
즉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를 거절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기만 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표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감추려고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필요하다면 표징보다 더한 것도 보여 주실 수 있는 분인데,
표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일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표징이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표징’이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은총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먼저’ 라는 말을,
“믿음만 확실하다면 신앙생활에서 표징은 필요 없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표징은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인도해 주는 일이고,
신앙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표징은 필요합니다.
(항상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표징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이 좋은 예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일을
이야기한 다음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있다가 표징을 보고서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욱 깊이’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표징’에 대해서 말할 때, 또는 ‘기적’에 대해서 말할 때,
일상적인 모든 일이 다 놀라운 표징이고 기적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복음서에서 말하는 ‘표징’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 아니라, ‘특별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는 일과
특별한 표징 덕분에 더욱 깊은 믿음의 단계에 도달하는 일은 다른 일입니다.)
좋은 예가 마르코복음에 있는 다음 구절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서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이(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표징은 제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표징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 아니라 ‘특별하고 놀라운’ 일을 뜻합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이고,
순교의 역사이고, 표징의 역사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과 성인전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은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표징들입니다.
이 표징들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들입니다.

< 표징이나 기적에 대해서 말할 때, 성체성사를 예로 들면서,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변화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또 교리의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긴 한데,
별로 실감은 나지 않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변화의 기적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아도 믿는 것이 믿음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성체성사의 기적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말한 ‘표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구라도 영성체를 한 다음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놀라운 체험을 했다면, 그 체험은 그 사람에게는 표징이 됩니다.
그리고 그 표징을 통해서 더욱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뿐만 아니라 고해성사나 다른 성사의 경우에도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의 증언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 증언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느님(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표징들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은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된 메시아로서 그것을 말씀과 행적으로 드러내셨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의 사실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고 거절하셨다.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메시아적 징표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일로서, 요르단 강물을 갈라놓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길을 낸다든지, 말 한마디로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린다든지 하는 무력적이고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에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떤 곳을 꼭 찾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꼭 배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배운다면, 아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귀의 수준은 높아질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으로 변화되는 기적을 항상 청하고 열심히 노력하자. 주님께 이러한 은혜를 청하며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하자.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한상우신부-

예수님이 바로
이 세대의
참된 표징입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겸손이
참된 표징입니다.

참된 표징은
참된 사랑이며
참된 겸손입니다.

교만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이 세대의
참된 표징입니다.

회개와 표징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또 다른 표징입니다.

표징은 삶을 가리키고
교만은 더 큰 표징을
요구합니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이 표징이며
감사입니다.

들어올려지는
성체(聖體)에서
가장 복된
표징을 만납니다.

우리의 일상이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참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바뀌고 변해야 할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표징'(sign)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치유와 구마, 빵을 많게 하신 기적들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넘치게 보여주셨건만 그들에겐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마르 8,12).

예수님께서 많이 안타까워하십니다. 완고하게 닫힌 그들 마음은 과연 무엇으로 열릴까요?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다가 빛을 만난 이들과 함께 경축하고 기뻐하기에도 모자라건만, 자기들이 원하는 표징이 아닌 다음에야 결코 믿을 수 없다고 버티니 도무지 그들을 수긍하게 만들 재간이 없습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불신을 선택한 이들에게 선고가 내려집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죽은 이가 되살아난다 해도 꿈쩍도 안할 겁니다. 어떠한 표징도 그들에게는 표징이 아닐 것이니까요.

"그들을 버려두신 채"(마르 8,13).

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자애로우신 예수님께서 좀 낯선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을 뒤에 버려두고 떠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과연 어떤 표징을 원한 걸까요? 아니, 우리는 삶에서 어떤 표징을 바랄까요? 그들처럼 우리도 현세적 견지에서 복잡한 일의 해결이나 풍요한 재물, 안위나 평안, 안정과 명예 등의 표징으로 주님과 내 믿음을 거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바리사이들처럼 입맛에 맞는 표징만을 주님께 요구한다면 결국 주님의 부재밖에 남는 것이 없을 겁니다. 햇살만 가득 내리쬐는 꽃길에서는 주님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어쩌면, 오히려, 진짜 표징은 "고통"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표징과 일치하는 유일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복음 환호송).

그래서 복음 환호송의 이 말씀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죽음에 이르는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들립니다.

제1독서는 시련과 구원의 상관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2-3).

세상은 고통과 시련을 악으로 치부해 회피하거나 외면하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값진 도구로 받아들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함으로써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희망이니까요.

"고통을 겪어도 저는 마땅하옵니다"(화답송).

시편 저자의 이 표현은 "나는 그래도 싸다"는 식의 자포자기나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또 고통에 대해서 "왜 하필 내게?"라는 부질없는 물음도 아니지요. 그저 힘을 빼고 "그게 무엇이어도 당신이 주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하는 수용적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겸손은 고통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주님께 이르는 통로라고 자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지울 수 없는 표징을 매일 마주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고통이 우리를 비켜가지 않고 자꾸만 찔러대고 건드린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짜 표징을 직면하는 제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실상 고통과 시련을 통해 우리 믿음에 인내가 싹트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는 다리가 엮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구미에 맞는 곳에서 표징 찾기를 멈추고 진짜 표징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그곳에는 주님이 반드시 계십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십자가를 깊이 바라보며 주님을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지혜가 모자람을 아는 지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1881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2월 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마르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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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좋은 의도만 있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 표징이 부족한 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표징자체이십니다. 표징자체이신 분에게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다 키워놓았더니 아이가 “당신이 내 엄마라는 것을 증명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켜 우리 양식이 되게 해 주신 생명의 양식 앞에서 “당신이 아버지인 것을 증명해 보시오!”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들을 떠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운전할 때 목적지가 분명하면 그 목적지를 표시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수많은 표징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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