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Margaret K 2020. 2. 21. 19:40

2020 2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먼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마태16,13-19) 


He said to them,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Simon Peter said in reply,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Jesus said to him in reply, “Blessed are you, Simon son of Jonah.
For flesh and blood has not revealed this to you,

but my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맡겨진 양 떼를 사심 없이 돌보아야 하며, 양 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어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적은 수의 사람들과 미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 강론 대신에 각자 나눔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날 복음 말씀은 ‘밭 속에 묻힌 보물’의 비유(마태 13,33 참조)였습니다.
저는 이 복음 말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에게 보물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아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보물이 ‘예수님’이라고 말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날 미사에 초대받은 개신교 신자였습니다.신학생 때 선배 신부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비하여 본당 주일 학교가 활성화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젊은 신부들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아이들의 문화를 성당에 도입하였습니다.
노래방 기계도 가져다 놓고, 댄스 교실도 운영하고, 운동도 마음껏 할 수 있게 하면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처음 1년, 2년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추풍낙엽처럼 아이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선배 신부들이 제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것이 기초가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화려하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도 잠깐은 반짝할 수는 있지만 머지않아 한계에 봉착한다.”바오로 사도는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필리 1,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모퉁잇돌로 삼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기초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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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희망에 대해 전하는 옛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 죄를 짓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과 함께 어떤 벌을 내릴지 회의를 나누다가 ‘희망’을 숨기기로 했습니다. 희망 없이는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예 없애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서 ‘희망’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숨기기로 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희망을 어디에 숨길 것인가였습니다.

오랜 회의 끝에 희망을 인간 마음속에 숨기기로 했습니다. 인간은 모험 정신이 강하고 영리하지만, 마음을 보려 하지 않기에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리 마음을 바라봅니다. 정말로 희망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서 희망을 간직하고 힘차게 살아갈 수도 있고, 그 정반대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라봐야 하지만, 많은 이가 바깥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합니다. 돈과 물질, 명예,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희망 없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희망 없이 무작정 앞으로만 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암울한 시간을 보낸다는 요즘, 희망의 나, 기쁨의 나, 행복의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고, 주님을 통해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곧바로 “너는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내 마음 안에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희망을 주시는 분이고, 그분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사람의 얼굴을 바꿔놓듯이 습관은 인생의 얼굴을 점차적으로 바꿔놓는다(버지니아 울프).



마지막 힘.

마라톤 대회 때 사람들은 보통 시계를 차고서 자신의 기록을 살펴보며 뛴다고 합니다. 일반인이 참가하는 대회를 보면 평균 4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이들의 기록을 살펴보다가 재미있는 결과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질문을 생각해보십시오.

“59분 때와 01분 때에서 언제 더 많은 사람이 결승점에 들어올까요?”

3시간 59분 때와 4시간 01분 때, 4시간 49분 때와 5시간 01분 때...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해 보았는데 놀라운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59분 때는 500여 명이었고, 01분 때는 390명으로 59분 때가 1.5배 더 많은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요? 만약 3시간 59분 때에 들어온 사람은 4시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 마지막 힘을 쏟은 것입니다.

만약 마지막 힘을 쏟아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대의 차이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힘이 시간대의 앞자리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마지막 힘을 쏟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충분히 할 수 있고, 충분히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포기하십니까?                   

<"너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너도 할 수 있느냐?와 같다>

-전삼용신부-


1968년 10월, 유명한 재클린 케네디와 그리스의 억만장자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혼전계약’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부의 침실은 각자 독립적이고, 한쪽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1년에 3개월은 동거 생활을 하되, 9개월은 제각기 따로 생활할 수 있다.”

      이혼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남편이 이혼을 요구할 경우 1년에 10만 달러로 쳐서 결혼기간에 상당한 위자료를 지불하고 만 5년 이상일 경우 종신 연금 1백만 달러를 준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을 경우에도 일시불로 2천만 달러와 그 이후 10년간 18만 달러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이 혼인계약서에는 의상비, 미용비, 용돈 등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부부 각자가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세요?”라고 하면, “당신은 돈입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혼인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인데 그것보다는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시시각각이었습니다. 가장 나쁘게 본 이들은 예수님을 마귀 우두머리라고 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의인으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이 왜 중요할까요? 결국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성혈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룹니다. 마치 혼인하는 것처럼 그분이 나의 머리가 되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됩니다. 그러니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이 내가 누구와 하나가 되었는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예언자셨다고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사람은 예언자처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처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라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라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니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혼률이 가장 낮은 나라는 브라질이라고 합니다. 브라질에는 ‘결혼자격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부기구의 전문교육기관에서 하루 6~7시간씩 10일 동안 합숙하며 결혼생활과 부부관계, 일반위생과 자녀교육을 등등을 배우고 마지막 날에 시험을 봐서 통과하면 ‘결혼자격증명서’를 준다고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도 그리스도와 혼인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성체를 영할 때입니다.

      성체자격시험을 한 번 쳐보시겠습니까? 먼저 “성체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성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대로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성체를 영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저는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당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만약 “예!”하면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은 했지만 자신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말했다면 그 믿음에 일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을 하느님이라 믿으면 나도 하느님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합니다. 이 믿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오늘 베드로 사도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조재형신부-


함께 일하시는 직원들은 저를 사장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제 명함에도 미주 가톨릭평화신문 사장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제가 하고 있는 직책이기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처음 사제서품 받고 본당에 갔을 때입니다. ‘가브리엘 신부님!’이라고 부르면 어색했습니다. 다른 사람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29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지금은 가브리엘 신부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직책과 관계에 따라서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됩니다. 세례를 받으면 당연히 신앙인이 됩니다.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자리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자리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별자리와 같은 겁니다. 별자리는 늘 같은 방향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별자리를 보고 길을 찾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는 별자리를 보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현대인이 자아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것은 별자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믿음의 별, 희망의 별, 사랑의 별이 있다면 우리는 넘어질 수는 있겠지만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둘째는 직책과 직분과 같은 겁니다. 앉을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인의 땀과 노력으로 그런 자리를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문과 배경으로 그런 자리를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을 일컬어 낙하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부탁했습니다. 인격과 품격이 없는 사람이 직책과 직분을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면 그것을 갑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직책과 직분의 자리는 인격과 품격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인격과 품격이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을 낮추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가치와 같은 겁니다. 예전에 강남에 남은 마지막 노른자 땅이란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역이 들어서면 대박이 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임야가 전이나 대지로 형질변경이 되면 재산가치가 늘어 날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장독대에 있던 항아리가 조선 시대의 도자기가 되고, 헛간에 있던 수납장도 유서 깊은 집안의 골동품이 되면 가치가 달라집니다. 세상의 기준은 성공, 명예, 권력에 의해서 가치가 정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치의 기준은 달랐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쓰임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밤을 새우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거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진 자리는 어떤 자리일까요? 목숨을 바쳐서 순교하지만 희망을 간직한 자리입니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는 사랑의 자리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지만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리입니다. 종들의 종이 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다리가 되는 자리입니다. 공동체의 청원을 하느님께 전하는 다리가 되는 자리입니다. 정결과 청빈과 순명으로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는 자리입니다. 지금 내가 얻고자 하는 자리는 무엇일까요? 지금 내가 피하고 싶은 자리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피해야 할 자리를 얻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는 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천국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자리를 외면하는 건 아닐까요?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이토록 엄중한 시기, 우리 모두의 집단적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사이비 이단 교인들로 인해 코로나19 감염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주의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확산 방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는 정부와 관계자들의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전교방식이 워낙 은밀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정체 파악이 힘들답니다. 가족들도 6-70%는 그가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을 모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전교를 위해 다른 일반 교회나 성당에도 스파이처럼 잠입하기에 사태의 심각성은 더욱 위중한 것 같습니다.

 

 백번 천번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자숙해도 부족할 터인데, 사이비 교주는 얼토당토 않은 괘변을 늘어놓으며, 국민들에게 또 한번의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금번 병마 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의 짓으로 안다.”

 

 기본 상식이나 일말의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태연히 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이비 자칭 목사와 그 일당들은 이 위중한 비상 시국 상황에, 이번 주말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예정대로 실시하겠다고 합니다. 이분들에게 나라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나라 전체가 초비상인데,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만일 그들이 집회를 강행한다면 매국(賣國)도 이런 매국이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도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 태세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는 제2의 사이비 꼴이 날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부주의로 집단적 감염이 확산된다면, 하느님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요, 지역 사회에도 큰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상 시국에는 우리 신자들은 교구나 본당, 정부나 지자체에서 그때 그때 발표하는 행동 지침들을 충실하게 준수해야겠습니다. 감염의 주경로는 대인 접촉인 관계로 가급적 외출이나 만남을 삼가해야겠습니다. 저는 요즘 예정된 강좌들에 대해서 주최측을 설득해서 미리미리 취소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 장소에는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왜 이런 예기치 않은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몇몇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처럼 하느님께서 분노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를 처벌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다양한 십자가들 앞에서 우리는 그 십자가를 분류하고 식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신비로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그저 긴 호흡으로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인류에게 다가온 십자가는 우리 인간측의 과욕과 부주의, 악습과 잘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겨난 것에 대해 가슴을 치면서, 확산 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 그것이 필요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확산방지를 위해서 지구촌 전체가 합심하는 것,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예방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엄중한 시기, 우리 모두의 집단적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외부로 향하는 동선을 최소화하고, 대신 우리 각자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보면 좋겠습니다. 멀리했던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서면 좋겠습니다. 멀리했던 성경책을 꺼내들면 좋겠습니다. 이런 기회에 성경 통독, 성경 필사를 하면서 지난 우리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으뜸중의 으뜸

-반영억신부-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더냐?”(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라고 한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시간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 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에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의 병렬구문에서보다도 그리스도의 신비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우선,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밝혀주고 알려주신 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 소유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열쇠는 권한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이제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주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의 축제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권한이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오직 하늘에서 오는 그 매고 푸는 능력으로 모든 형제들에게 믿음을 굳게 해 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과 신앙으로 일치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

-조욱현신부-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베드로 사도좌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지금도 로마에는 성 베드로가 집회 때에 사용했다는 의자가 보존되어 있고 새로이 교황이 선출되면 그 의자에 앉음으로써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권리를 이어받는 표시로 삼고 있다.

 

복음: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이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히 대화를 하실 수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 물으신다.

 

제자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왔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 이렇게 물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하고 물으신다. 그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이적을 행한 제자들의 답은 어떻게 되어야 했는가?

 

베드로는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고 대답하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름으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자체이시므로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음을 나타낸다. 그 육신은 나약하여 죽었지만, 곧 다시 살아났다. 그 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죽음은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 이 반석은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신앙이다. 주님께서는 이 반석이라는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공통적인 이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갖는 열쇠는 바로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그 상속자이다. 여기에 들지 못한 사람은 거룩한 것들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세는 어떤가?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에게 있어 그분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며, 그 답을 각자의 생활과 믿음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답이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바로 당신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교황님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더욱 일치하고 그분으로 하여금 더욱 많은 봉사를 잘 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의 신앙고백으로 이러한 직책을 갖으셨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셨다면, 이제 우리도 올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언제나 하나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으뜸,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 19)

인간의 나약함 위에
풍요롭게 쏟아지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교회의 여정은
주님의 여정입니다.

주님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주님의 사명을 닮아
사람을 살리는 것이
교회의 참된
사명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과 같이
교회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더욱
풍요롭습니다.

주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사도좌의 참된
소명입니다.

참된 소명은
사랑의 기쁜
소명입니다.

가르치고 풀어주며
보살피고 이끄는
사도좌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홀로 가는 길이
아닌 주님과
함께 가는
사도좌의
여정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신비로운
선물은 바로
사랑이라는
선물입니다.

저마다의 소임에서
사랑에 충실한 삶이
바로 교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성 베드로
사도좌입니다.

주님을 드러내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은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반석으로 불리움 받았음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미사의 모든 말씀들이 베드로 사도를 가리키면서 그를 언급하고 있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정작 베드로 사도보다 하느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의 주인공은 베드로 사도보다 오히려 주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내가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입당송).

"돌아오거든"

미사 초입부터 우리는 앞으로 있을 베드로의 실책을 예감합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떠남을 전제하는 표현이니까요. 슬프고 안타깝지만 예수님의 수석 제자인 베드로는 위기의 순간에 스승을 외면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이 모든 걸 예견하셨으면서도 그에게서 희망과 기대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돌아오거든"

이 말씀을 들을 당시에 베드로는 이 말씀을 거부하고 싶었을 겁니다. 속으로 '아니, 나를 어떻게 보시고... 나를 그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으시다니...' 하며 서운했겠지만, 잡히신 스승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도망친 뒤 후회가 밀려왔을 때에는 되려 이 말씀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었을 겁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밑바닥까지 훤히 아시면서도 믿어주는 분이시니까요.

"너는 행복하다 ...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탄복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어마어마한 신비의 진실은 인간의 머리로 짜낼 수 없는 깊이에서 솟아납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 고백한 것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의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것 같습니다. 물질에 파묻혀 살아가는 현대인은 행복이 물질이나 권력, 명예에서 온다고 여기지만, 진정한 행복이란 정작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생각을 나누어 주시는 이들이 영으로 느끼는 기쁨과 충만함입니다.

친밀하지 않고는, 신뢰와 기대로 엮이지 않고는 신비를 알려 주는 사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나누어 주신 신비 한 조각, 생각 한 토막, 마음 한 줌이 이 곧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마태 16,18).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

예수님께서 그를 반석으로 추켜세우시고 또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받침도 되고 문지기도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의 약함을 아시면서 그리 쉽게 하느님 나라를 맡기시다니, 인간적 계산으로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지요. 예, 그래도 됩니다. 하느님은 원래 그런 분이십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원로들에게 목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여러 모로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1베드 5,2)

그의 여러 지침 중 백미는 바로 이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이는 하느님 자비를 입은 이로서 하는 말입니다. 목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비이고, 하느님의 자비는 일개 죄인에 불과한 인간 목자의 자비보다 크다는 걸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산상수훈에서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라 하셨지요(마태 5,7 참조).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입고, 또 자비를 입은 사람은 그만큼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 아름다운 선순환의 시작은 나약하고 비참한 우리의 실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베드로를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북돋워 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그런 분이십니다. 교회처럼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하느님 나라의 받침이나 열쇠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작은 하느님 나라에서 미소하나마 댓돌도 되고 문고리도 될 수 있다고 믿어 주십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니 나약한 인간을 택하시어 당신 나라를 맡기시는 통큰 하느님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배팅을 믿고 따라가 봅시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오늘 베드로사도좌 축일에 특별히 우리 교종 프란치스코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하면 잘못이 없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2011
-김찬선신부-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반석 삼아 당신 교회를 세웠음을
마음에 새기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긴 역사 안에서 그랬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사도 베드로가 과연 반석이 될 만한지에 대해서입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
반석이 될 만하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선택은 실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아니고 반석이 될 만한 다른 사람은 있는가?
야고보 사도나 요한 사도는 좀 나은가?
아니면 바오로 사도는 될 만한가?

좀 나을지는 모르지만 반석 되기에 어림없기는 마찬가지지요.
어느 인간이 주님 교회의 반석이 될 만하겠습니까?
주님 교회의 반석은 주님 자신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전서 3장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다른 반석은 필요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반석 삼으신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이 말씀에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주님은 우선 당신이 손수 세우시겠다고,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 바로 당신 자신임을 강력하게 천명하십니다.
다음은 내 교회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교회이니 당신이 확실하게 챙기실 것입니다.
세우는 분도 당신이시고 유지하는 분도 당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당신이 확실히 교회를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에게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님과 사랑의 결합을 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 교회를 사랑하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 오르시기 전 베드로에게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께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바탕 삼아
당신의 양 떼를 잘 돌보라고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것은
그의 능력이나 완전성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것이고,
사랑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알았기에 교회의 원로들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양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사랑의 자발성과 사랑의 무류성입니다.

사랑을 하면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고 스스로 자진해서 하며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 곧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할 때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나이를 먹으면
마음 가는 대로 해도 하늘을 거스르지 않게 된다고 하였듯이
아오스딩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너는 행복하다 ...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16,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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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리스도께서 예언자셨다고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사람은 예언자처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처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라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라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니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성체자격시험을 한 번 쳐보시겠습니까? 먼저 “성체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성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대로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성체를 영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저는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당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만약 “예!”하면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은 했지만 자신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말했다면 그 믿음에 일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을 하느님이라 믿으면 나도 하느님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합니다. 이 믿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오늘 베드로 사도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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