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Margaret K 2019. 9. 14. 18:47

2019 9 15일 연중 제24주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1-32)

 

There will be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nine righteous peopl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시다가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고 재앙을 거두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박해한 죄인임에도, 사도의 직무를 맡기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시며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서양의 한 인류학자가 남아프리카 부족의 아이들에게 과자 상자를 보여 주며 달리기 경주를 시켜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우분투”라고 말하며 함께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백인 학자가 의아해하며 왜 경쟁하지 않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슬퍼하는데 어찌 나만 행복할 수 있나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분투”란 아프리카 코사어로 ‘네가 있어 내가 있다.’ 또는 ‘함께 있어 내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이웃과 함께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게 창조되었습니다. 이웃과 경쟁하는 것은 독약을 마시며 건강해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인간이 행복하지 않으면 당신도 행복할 수 없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기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혼자 행복할 수 있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회개란 무엇이 참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처음에 작은아들은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임을 깨닫고 아버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의 행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직은 아버지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죄를 이겨 행복할 때 아버지도 행복하십니다. 죄를 짓는 사람이 부러우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죄는 자신과 이웃을 아프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곧 나의 행복임을 아는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죄를 멀리할 수 있는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 내 인생의 모든 것

-한민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참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은, 예수님께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향한 길이며, 제자들에게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부모와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단순히 ‘양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재화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맹목적으로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 말씀에는 ‘전적인 투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그것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삶을 그분께 투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에서 과연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걸 만큼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는 사람이며, 모든 것의 기준을 그분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의 예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필레 9)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셨습니다. 사도의 삶은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했지만, 사실 그 만남은 그가 박해하던 교회 공동체와의 만남을 통해 미리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필리 3,7-9 참조) 그분께는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게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도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의 화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단순히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과 사랑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환상은 금물입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온갖 유혹들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으며, 우리 마음의 눈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두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임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고 따르며 그분을 닮아가는 여정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아는 여정에서 어디쯤 와 있습니까? 그분은 내 인생에서 어떤 분이십니까?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따르느냐에 따라 갈릴 것입니다.


잃었던 행복을 되찾은 기쁨

-김창선 선교사-


오늘은 연중 제24주일입니다. 교회는 광야에서 잃었던 한 마리 양과 집안에서 잃었던 은전 한 닢을 되찾은 기쁨에 함께합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 하늘의 천사가 더 기뻐합니다. 되찾은 아들을 따뜻이 맞아주고 화해의 잔치를 여는 아버지의 집은 자비와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제1독서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의 판(율법)을 받기 위해 40일간 단식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 산기슭에서 벌어지는 금송아지 사건을 전합니다. 백성들은 아론에게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 가시적인 신을 만들어 달라 요구(탈출 32,1)합니다. 그들은 계명을 어기고 모은 금붙이로 풀을 뜯는 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목이 뻣뻣한 백성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진노하신 하느님께 중재 기도(탈출 32,11 이하)를 합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신 당신의 백성이고, 광야에서 그들이 몰살한다면 주님의 구원능력에 불신이 생기며,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과 약속의 땅을 상속재산으로 주시겠다는 성조들과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간청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크리스티안 빌헬름 에른스트 디트리히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주님께 드리는 감사인사(1티모 1,12)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개종하기 전 한때 그는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정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하느님의 교회를 없애려고 박해했던 인물입니다.(사도 26,9-1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회심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선택하십니다.(사도 9,15)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세상의 죄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이라 고백합니다.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그는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1코린 15,9)임을 압니다. 무한한 인내로 대해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한 그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이 세상에 오신 강생의 목적을 밝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된 그는 이민족의 사도로 일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바칩니다.

오늘 복음(루카 15,1-32)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인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망각한 채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기에 죄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반대의 표적이 됩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백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이 그 중 한 마리를 광야에서 잃으면 그를 뒤쫓아가 찾은 뒤 어깨에 메고 돌아와 공동체와 함께 기뻐합니다. 무리를 떠난 한 마리 양도 공동체에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여인이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은전 열 닢 가운데 한 닢을 집안에서 잃으면 등불을 켜고 샅샅이 뒤져 찾아내 이웃과 함께 기뻐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합니다.”

되찾은 은전의 비유.도메니코 페티

되찾은 아들의 비유.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루카 15,11-32)은 나만의 행복을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작은아들과 아버지와 함께한 큰아들의 모습은 바리사이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자기 몫의 유산을 챙기는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태도입니다. 그는 방종한 생활로 재산을 잃은 뒤, 지중해 문화에서 가장 천한 직업인 돼지치기로도 연명이 어려워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곳에는 일용할 양식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그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큰아들 또한 되찾은 아들입니다. 그는 동생이 자기 몫을 챙기는데도 태만했고, 돌아온 아우를 위한 잔치도 거부했습니다. 아버지 호칭 대신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지적한 그는 공동체 앞에 아버지를 모욕하고, 동생은 매춘부와 놀아났다고 모함합니다.

두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잃었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달려가 품에 안습니다. 아들의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은 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손에 가문의 명예인 반지를 끼웁니다. 공동체와 관계회복을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화를 내는 큰아들의 모욕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연민의 정을 보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현세는 ‘우상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돼 돈과 권력과 명예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상들이 사람의 마음을 산란케 합니다. 모세의 기도가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삼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과 화해시켰다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인 성찬례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형제적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감사제사입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삶은 내적 태도입니다. 그 관계는 사랑의 끈이고 내적 태도는 마음가짐입니다. 되찾은 양 한 마리와 되찾은 은전 한 닢을 두고도 함께 기뻐합니다. 작은아들처럼 나만의 행복은 고통이고, 큰아들처럼 아버지를 외면하는 모습은 태만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나의 행복이고, 이웃의 행복이 나의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심장인 미사에서 마음의 회개로 잃었던 행복을 되찾은 오늘은 잔칫날입니다. 


실패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허규신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많은 것은 비유입니다. 마르 코복음은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으셨 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 셨다.”(마르 4,34)고 기록할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하 신 비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당시의 일상 안에서, 사람들의 생활 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을 다룹니다. 오늘 우 리가 들은 루카복음 15장은 하나의 주제에 여러 비유를 담 고 있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되찾은’ 것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입장에서 보면 회개에 관한 것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 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교부 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감탄을 자아냈던 내용입니다. 세 비유는 공통적으로 되찾음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목자를 통해 첫째 비 유를 말하십니다. 목자는 단지 양을 키우는 직업 그 이상 이었습니다. 양 떼와 매일매일의 삶을 같이했던 목자는 양 이 좋은 풀을 뜯도록 안내하고, 더위에 지치거나 아픈 양을 걱정하고 돌봐줍니다. 그에게 양 떼는 식구와도 같습니다. 이런 목자에게 잃었던 양을 되찾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한 가정으로 향합니다. 하 루 종일 거의 집에서 생활하며 집안의 모든 살림을 챙기는 것은 여인들의 몫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인의 삶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최선을 다해 은전을 찾은 여인은 말

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 습니다.” 예전에는 탕자의 비유라고도 불던 되찾은 아들 의 비유는 복음서의 그 어떤 비유보다도 하느님과 우리 자 신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하느님은 되찾고 기뻐합니다. 무엇보다 잃었던 것들은 이미 하느님께 속해 있었습니다. 원래의 자리를 떠나 다 른 자리에 있는, 가던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든, 하느 님 앞에 있었지만 하느님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진 것들입 니다. 이 모든 것을 제 자리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 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를 말할 때, 항상 그 바탕에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은 애써 잃은 양을 찾는 목자나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 은전을 찾아내는 부인이나 집 떠난 아들을 매일매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 분은 애써 찾아 나서고,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되돌아온 이 들을 기쁨으로 맞아주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주 벌을 내리는 것에 실패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탈출 32,14) 실패를 주저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다른 모습은 자비입니다. 그 자비 는 우리에게 주어진, 변화할 수 있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 갈 수 있는, 나의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

-박영봉신부-


오늘 전례의 독서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 서는 당신의 사랑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해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 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올 잠시를 참 지 못하고 송아지상을 만들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백성 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양 백 마리를 치다가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두고 잃은 양 을 찾을 때까지 쫓아가는 목자 같은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양을 찾으면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꾸짖거나 때리고 억지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오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목자의 입장이 되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겠습니까? 저 는 나머지 양들을 몰고 가서 우리에 넣어둔 다음에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설 것 같습니다. 한 마리를 찾으러 간 사이에 다른 양들이 또 없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 고 또 세상의 경제 원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경제 원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 의 손길이 필요한 그 양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그 양을 찾아 나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 차별 없이 당신의 자녀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만일 그분이 누군가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면 그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그런 사랑을 직접 체험한다면 우리의 삶은 온전한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그런 체험을 고백합니다.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큰 죄인이 었지만,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사도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후 바 오로 사도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뻐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 포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나아와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에 올바로 응답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올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양을 찾은 목자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기쁨을 나 누었듯이, 하느님께서 기쁨의 잔치를 계속 베푸실 수 있도록, 우리는 공동체에서 멀어진 이웃들을 찾아 교회로 데려와야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우리의 잔치는 계속될 것입니다


"되찾은 기쁨은 삶의 축제-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비유

-안수일신부-


오늘 우리는 복음말씀을 통해 세 가지 비유를 들었습니다. ‘되찾은 양 의 비유’(3~7절) ‘되찾은 은전의 비유’(8~10절) ‘되찾은 아들의 비유’ (11~32절)입니다. 세 비유는 주제가 똑같습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의 기쁨이 큰 것처럼 죄짓고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 주제는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 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렸다. 예수 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15장 1~3절)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 주변에 모였습니다. ‘세리’는 민족을 거슬러 로마에 충성하는 죄인입니다. 또한 ‘죄인’이라는 말은 훨씬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 도 다 죄인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한 사람들도 죄인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이 런 죄인의 범주에 속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여깁니다. 스스 로 거룩하다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 부정하게 된다 합니다. 이런 사람 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는 건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함께 밥을 먹었다는 것은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는 이들을 어떻게 여기시는가 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 비로우신 마음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당시 율법을 실제 삶에서 구현해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사 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유대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 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보다는 율법주의에 갇혀 있었습니다. 폐쇄적인 신앙의 틀에 갇혀 결국 하느님의 눈이 아닌 왜곡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죄인들과 어울리고 함께 밥을 먹는 예수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되찾은 양 의 비유에서 목자에게는 잃어버린 한 마리가 그의 영혼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는 여인은 찾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 나온 사람도 그랬 고, 소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다시 찾은 기쁨을 삶의 축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죄인의 회개를 하느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죄인은 자신이 인정받 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의인은 반대로 인정받을만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회개의 작은 의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인 의미는 자신의 무능력에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삶의 결단입니다.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하 느님으로 완전히 옮기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은총이고 믿음의 축제입니다. 우 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존재는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을 만날 때 궁극적인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는 분이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분이십니다. 내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찾는 것은 기쁨이며 삶의 축제입니다. 


-이승홍신부-


오늘 제1독서 말씀은 탈출기 32장 소위 황금송아지 경배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 그 모습을 드러내시고,

두려움에 찬 백성은 모세에게 중개역할을 요청,

모세 혼자 산봉우리에 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돌로 된 계명판을 받습니다.(탈출 19,1.6;20,19;19,20;31,18 참조)

이러는 사이 오늘 사건이 일어납니다. 시나이계약 사건처럼 이 역시 의인화하여 한 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진노하신 하느님은 모세에게 ‘네가 데리고 올라 온 너의 백성이 타락…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당신께서 장차 당신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가르치시기도 전에 자기 방식대로 하느님을 규정하고 섬기려는

즉, 주님이신 하느님의 길을 가는 종으로서의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어 하느님을 종으로-복을 내리는 수단으로-삼으려는 이스라엘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 백성은 하느님 당신의 백성이며 그 원천인 주님 약속의 진중함을 치켜세우면서,

과거 그 약속의 파트너들-아브라함 이사악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사 간청하고,

이에 주님은 당신 자비와 당신 약속의 파트너를 향한 믿음(믿어 줌?)으로 그 마음을 돌립니다.
복음 말씀은 루카 15장 되찾은 양, 은전 그리고 아들의 비유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이며,(루카 13,22-23 참조) 구원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대상은 인간 곧 죄인입니다.

 

이에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 들고 예수는 이들을 환대하며 가르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며 천국은 이미 자신들만의 소유라 확신하기에, 이를 허용하지 못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하느님의 입장에서-OO을 잃어버린 주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 아파하고 기뻐하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전하면서, 닫힌 마음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죄인의 구원을 함께 기뻐하자고 청합니다.
제2독서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모두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따라 사도가 된 자신은(I디모 1,1 참조)

소위 거룩한 믿음의 본보기로서가 아니라 죄인의 본보기로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사도 직무까지 받게 되었다 말합니다.

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함이라고…

 

오늘 말씀의 열쇠말은 그래서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 참 쉽지 않지만, 살아보면 또 이보다 쉬운 것도 없습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말씀하신 세 개의 비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양 한 마리를 잃었다가 그것을 되찾아서 기뻐하는 목자, 은전 한 닢을 잃었다가 되찾아서 기뻐하는 여인,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고,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가서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굶어죽게 되자,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영접하는 아버지, 이렇게 세 개의 비유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계기(契機)는 그분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비난에 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예수님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어울리섰습니다예수님의 그런 처신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비웃고, 비난하였습니다그 비난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비극에까지 이르고 말 것입니다.

 

오늘 비유이야기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목자,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단념해야 할 여건에서도 단념하지 않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기뻐하는 인물들입니다목자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온 산을 헤맵니다여인은 잃어버린 은전 한 푼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뒤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 이야기의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들을 단념하지 않고 기다립니다그리고 그들은 모두 잃었던 것을 되찾아서 기뻐합니다세 번째 이야기의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아들에 대해 배신감을 갖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습니다이 세 개의 이야기들이 모두 죄인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조명합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자 유산을 취하고,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그것은 패륜(悖倫)의 시작입니다그 아들은 멀리 떠나가서 재산(財産)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누렸습니다그러면서 받은 유산을 탕진하였습니다재산이 없어지자, 그는 사람들의 냉소를 받으며 굶주려야 했습니다그런 궁지(窮地)에서 그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자기와 같이 굶주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합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옵니다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그는 다만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후,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 알아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줍니다아버지는 아무 것도 탓하지 않고, 아들을 아들로 다시 복권시켰습니다그리고 아버지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아들에 대한 분노도탕진한 재산에 대한 추궁도 없습니다이것이 돌아온 죄인을 맞이하는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연장하여 하느님에 대해 상상합니다죄인으로 하여금 죄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하느님이 당연히 하실 일이라고 우리는 상상합니다.  하느님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기준으로 행동하신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인간 사회는 그 원리를 바탕으로 질서 지어졌습니다교육기관(敎育機關)은 성적과 품행이 우수한 학생을 택하고 그렇지 못한 학생을 버립니다운동시합에서 우승한 선수는 박수갈채를 받고 패자(敗者)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그들의 잘못에 비례한 벌을 줍니다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예수님에게 항의하는, 오늘 복음의 바라사이와 율사들도 하느님은 당연히 그런 질서 안에 살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율법을 못 지키고 성전이 요구하는 제물봉헌을 하지 못하여,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죄인이라 버려진 사람들을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유대교는 병든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죄인이라고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고쳐주며 격려하셨습니다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신 비유들은 한 사람의 죄인도 버리지 않고, 그를 되찾아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완성된 세상을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느님을 향해 가면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완성되는 세상입니다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자식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창세 1,28)고도 말합니다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모습대로 살 사명을 지녔고, 온 땅에 퍼져서 그분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이를 비롯해서 고통당하고 불행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고통과 불행은 퇴치됩니다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원리 따라 행동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가엾이 여기십니다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마음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시면서, 그 가엾이 여김이 온 땅에 실천될 것을 기대하십니다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엾이 여기고 영접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하느님의 일을 우리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든 인과응보의 좁은 공간을 넘어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넓은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기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그는 인과응보의 좁은 원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그는 가엾이 여기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그것은 이웃을 가엾이 여기지 않고, 인과응보의 잣대로 이웃을 버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고 외치는 선교사(宣敎師)들의 독선적 선언에도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하느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사람을 가엾이 여긴 그분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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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피니어스 게이즈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19세기에 미국 버몬트주의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던 중에,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1m가 넘는 쇠막대가 머리를 관통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놀랍게도 생명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한 몸에 어떤 이상도 없었습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말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고, 행동에도 어떤 부자연스러움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적이라면서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습니다.

병원을 퇴원한 후, 사람들은 게이즈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상시에 술을 전혀 마시지 않던 그가 술주정뱅이라고 불릴 정도로 술을 마시게 되었고, 근면했던 그의 모습을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너무나 게으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참을성은 전혀 찾을 수 없고, 변덕이 죽 꿇듯 합니다. 그렇게 선했던 사람이 폭력적인 악인으로 완전히 180도 바뀐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의사들은 다시 검사하면서 뇌의 앞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 부분은 전두엽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사람의 성격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이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음이 아니라 병의 결과임을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두엽의 손상으로 인해 범한 그의 모든 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주님께서 개인의 죄에 대해서는 단죄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불렀던 창녀, 세리, 병자들에 대해서 “너는 죄가 크니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스스로가 구원을 위해 왔다는 것을 밝히면서 용서 가득한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 마리의 양과 은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곧이어 ‘탕자의 비유’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조건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죄에 대해서는 심하게 화를 내셨습니다. 바로 개인의 죄가 아니라, 공동체의 죄였습니다. 한 개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공동체의 죄, 그래서 스스로는 아주 올바른 척하는 당시 종교지도들의 무리를 향해 위선자라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모습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억압이 담겨 있기에 이 공동체를 향해 화를 내신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하신다고 하십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바로 회개하는 사람이고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리를 지어 선이 아닌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너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자기들의 옳음만을 주장합니다. 주님의 선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부르심의 식별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방향을 아는 것이다. 즉, 건강하고 적합하고 올바른 방향 감각을 갖는 것이다. 이를 위해 늘 내 호흡을 살펴야 한다. 



성소

어떤 청년에 제게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하는 말은 조금 어이없는 말이었지요.

“신부님,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평생 하고 싶지는 않고, 딱 10년만 하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사제가 되고는 싶지만, 평생을 사제로 살기란 힘들 것으로 판단했나 봅니다. 그래서 10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제게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성소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변함없이 충실하게 사는 것이 성소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사제, 수도자, 그리고 결혼 성소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충실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지금의 자리에서 내가 맡은 성소에 충실한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 마음의 크기

-전삼용신부-


추석명절이라 본가에 가서 옛날 자라던 고향마을을 좀 걸었습니다. 고향마을은 사실 미군부대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냥 그 동네가 보이는 둑방길을 걸은 것입니다. 둑길은 사람들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냇가 주변에는 떠내려 온 쓰레기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앉아서 쉬라고 만들어놓은 벤치 주위에도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과 플라스틱 커피 잔과 같은 쓰레기들이 여기저거 버려져 있었습니다. 쓰레기통이 없어서 그냥 버린 것 같아보였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선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음식 쓰레기는 주울 수 없었지만 다른 것들은 비닐봉지에 담아 차에 싣고 집 가까이 와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손도 지저분해지고 차에 냄새나는 것들을 실어서 좀 그렇기는 했지만 착한 일을 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전에 같으면 절대 줍지 않았을 쓰레기들을 어떻게 줍게 됐지?’

      그래도 어릴 때 살았던 고향이라고 남들보다는 더 내 집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버린 사람들은 아마 내 집이 아니라 버려도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자신의 방에다 음식 쓰레기나 커피가 흐르는 종이컵들을 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내 마음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안에 있으면 나처럼 사랑합니다. 소중히 다루고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 밖에 있으면 나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더럽히는 행위도 스스럼없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은 그들을 바라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시각과는 매우 다릅니다. 자신들이 아니라 세리들과 죄인들을 더 좋아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세리나 죄인들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고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경쟁자로 봅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탕자 아들을 첫째 아들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당신 마음 안에는 두 아들이 다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아들이 없습니다. 반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과 둘째를 좀 구별해주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아버지에게 불만을 갖고 동생을 미워합니다.

      이런 면에서 마음은 집과 같은 것 같습니다. 나의 마음의 크기가 내 집의 크기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의 크기는 온 우주를 포함합니다. 아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아들처럼 사랑합니다. 모든 인간이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의 마음은 자기 자신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입니다. 동생도 아버지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집 밖으로 쓰레기를 마구 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아버지처럼 넓었다면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해 아버지와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죄인이라도 나 자신처럼 받아들이게 될 때 하느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하느님 마음의 크기는 벌레 하나의 목숨도 소중하리만큼 온 우주를 다 포함하실 것입니다. 심지에 지옥에 있는 사탄과 악마의 무리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당신 집에 살게 하실 분이십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이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품을 수 없게 작아지고 굳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나뿐인 인간, 줄이면 나쁜 인간입니다.

      하느님 마음을 알게 되면 또한 나의 마음도 넓어집니다. 어떤 수녀님은 중학교 사춘기 때 청소부와 결혼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변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는데, 청소부 아저씨가 매일 같은 시간에 청소하는 모습이 참으로 믿음직했던 것입니다. 청소부와 결혼은 못하더라도 청소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장래 희망사항에 ‘청소부!’라고 썼다가 선생님이 어머니를 모셔오라고까지 했습니다. 수녀님은 그럴 것까지 있느냐며 그냥 ‘교사’라 바꾸어서 썼지만 마음은 언제나 청소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수녀원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시킨 일이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밖을 청소할 때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잊지 않고 들어주시는 분이구나!’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던 꿈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꿈도 수녀가 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청소할 때 매우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그분이 사랑하는 것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그분의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젠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청소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아흔 아홉 마리만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이 다다르는 곳의 모든 생명들을 당신처럼 아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은 잃어버린 은전 한 닢도 아홉 개의 은전이 있다고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은전 한 닢도 당신 자녀를 잃은 것처럼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리는 영혼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훼손되는 지구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우리도 상상만이라도 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의 마음처럼 넓혀봅시다. 그러면 지구도 살고 미세 플라스틱 없는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좁아지면 그만큼 밖에 있는 것들에게 피해를 주고 그 피해는 또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느님처럼 마음을 넓히면 모두에게 잘 해 주게 되고 또 그대로 돌려받습니다. 사랑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먼저 어떤 누구도, 어떤 자연의 생명체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조재형신부-


잘 자라던 나무도 옮겨 심으면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뿌리를 새롭게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햇빛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물과 햇빛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 맺습니다. 물을 다시 찾는 일, 햇빛의 방향으로 잎이 움직이는 일이 쉽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 온 지 20일이 넘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은 약간의 몸살을 보여줍니다. 나무처럼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곳으로 잎을 움직이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오신 분들도 다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심한 몸살이 왔을 겁니다. 그분들은 모든 걸 걸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더 비장할 것입니다. 저는 임기가 있고, 돌아가는 저를 받아줄 교구가 있기에 마음 한편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먼저 오셔서 사목하시는 신부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저희도 다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저도 몇 년 지나면 같은 말을 하겠지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으로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받았던 새로운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였고, 모세는 다시금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명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도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금송아지는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걸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결국은 사라지고, 결국은 허망할 뿐인 욕망 덩어리가 금송아지입니다.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던 독재자들도 열정은 있었습니다. 인권이 유린 되었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였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도, 2차 세계 대전도 열정이 있는 제국주의 정권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화의 과정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도 금송아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과학적인 발견과 발명을 단죄하였습니다. 마녀라는 이유로 정당한 재판과정 없이 재산을 몰수하고 처벌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도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금송아지는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저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겁니다. 제안에 거짓된 자아가 참된 자아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금송아지를 만들까요? 열정은 있지만, 방향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금송아지를 만들지도 못 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받아온 십계명은 방향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모세의 십계명은 우리의 열정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만 잘 지켜도 신앙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방향을 알려주십니다. 선과 악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 악이라고 하십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선이 충만한 곳에는 악이 자리 잡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선이 충만한 세상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밤을 새울지라도, 거친 들판에서 사나운 이리를 만날지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를 보면서 오늘의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대를 잘 만나지 못한 작은 형을 늘 걱정하셨습니다. 과묵했던 작은 형은 가끔 집을 나갔습니다. 저는 형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자리가 조금 넓어진 것을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형이 돌아오면 먹을 수 있도록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작은 형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사랑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작은 형이 돌아오면 저는 담담했습니다. 이성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열정은 있었지만, 어머니와 같은 사랑은 부족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큰아들도 열정은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향락에 빠진 동생과 유산을 똑같이 나눠주는 아버지에게 불평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렸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큰아들처럼 살았다면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아버지처럼 돌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랑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방황하는 작은아들처럼 살고 있다면 방향을 돌리면 좋겠습니다.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만이 전부입니다!

-양승국신부-

 

강론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강론하시는 것을 너무 행복해 하시는 한 시골 작은 본당 주임 신부님에 얽힌 사연입니다. 하필 그 주일 복음 내용이 ‘탕자의 귀환’ ‘작은아들의 비유’였습니다. 신부님은 ‘이게 웬떡이냐?’며 일주일 전부터 명강론을 준비하고 또 준비하셨습니다.

 

 드디어 주일 교중 미사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치밀하게 준비하고, 세밀하게 손까지 본 강론 보따리를, 존재 자체로 고맙고 사랑스런 신자들, 95퍼센트가 할아버님·할머님들인 신자들에게 신나게 털어놓기 시작하셨습니다.

 

 작은아들이 얼마나 불효자인지? 그가 아버지를 떠나가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불경스러운 죄인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며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그야말로 감동적으로 풀어나가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강론을 듣고 계시던 신자들은 이제나 저제나 집나간 작은아들이 돌아 오기만을 목빼고 기다리고 있는데, 30분, 50분이 지나 한 시간이 다 되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작은아들은 돌아올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고정된 자세로 한 시간 가까이 강론을 듣고 계시던 신자들은 드디어 슬슬 힘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엉덩이를 들썩이고, 연신 하품을 해대고, 시계를 바라보고, 마침내 이렇게 수군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집나간 작은아들은 대체 언제 돌아온댜?” 그리고 다음 스케줄로 인해 초조하셨던 한 어르신께서 강론 중에 손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신부님, 손주 결혼식도 가야 하는디, 이제 고만 작은아들, 쌩하니 들어오라고 하시요!”

 

 오늘 탕자의 귀환을 주제로 한 복음 말씀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비유로 유명합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이 비유 말씀만으로 수많은 영성 서적들을 저술했습니다.

 

 여러 화가들도 이 비유 말씀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저희 사제들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온 몸과 마음으로 절절히 느껴지는 탕자의 귀환을 주제로 강론하다보면 자연스레 강론이 길어지기 십상입니다.

 

 저는 오늘 그래서 작은아들이 돌아온 이후 상황에 시선을 집중시켜봤습니다. 사실 오늘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의 주인공은 집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언제나 목빼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제목은 ‘탕자의 귀환’, ‘작은아들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라기 보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온 신경은 온통 작은아들이 돌아올 동네 초입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초주검 상태가 되어 터벅터벅 멀리서 걸어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거동도 불편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냥 있지를 못합니다. 아들을 향해 냅다 달려가십니다.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가 저지른 죄와 타락, 배반을 훨씬 능가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은 죄를 고백하는 죄인들보다 앞서 가십니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죄의 용서는 그 어떤 전제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만이 요청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가기 전에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시며, 새 삶을 요구하십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측량이 불가능한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죄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인해 크게 고동칩니다. 참혹한 죄인들을 당신께로 인도하는 그분의 음성은 감미로운 천상음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대죄인인 우리들에게 단 한 마디 질책의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환대하시고 안아주십니다. 등 두드려 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아버지의 그 진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 죄인인 우리들 안에 잠시 긷들였던 짙은 어둠은 사라지고, 그분 찬란한 빛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되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의 자비로 인해 상황은 더 나아졌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는 심각했지만, 결국 그 죄는 복된 죄가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 죄가 나쁜 것이었지만, 그 죄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가 펼쳐졌고, 우리에게 구원이 선물로 다가왔으며, 그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과 위대함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복된 죄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시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회개나 내면과 외면의 변화들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사랑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관한 말씀은 ‘탕자의 귀향’이라고도 합니다. 왜 귀향이냐? 아버지 집을 떠났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비유의 말씀을 ‘자비하신 아버지, 사랑의 비유’로 받아들입니다. 아들을 품는 한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방황하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집의 풍요로움, 즉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의 회개를 불러일으킨 아버지께 초점을 맞춥니다.

 

질문한가지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있었고, 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챙겨 밖으로 나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 작은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구절을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무엘 상권 16장7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 하느님은 속마음을 본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 작은 아들, 큰 아들 둘 다 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면 작은아들이 집을 나갔지만, 마음을 보면 큰아들도 집을 나갔습니다. 큰 아들은 겉으로 보면 착한 아들입니다. 아버지 일을 열심히 돕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완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방황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한마음 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루카15,29)하며 불평을 쏟아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풍요로운 집에서 불행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큰 아들은 흠이 없는 인물이지만 작은 아들의 귀향을 기뻐하는 아버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둠의 권세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속을 부글부글 끌어 오르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분노와 아버지께 대드는 무례함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모습이 송두리째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옆에서 슬쩍 건드려 보면 그 사람 속을 다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담을 것을 잘 담아야 합니다. 쏟아져도 괜찮을 것을 담아야 합니다.

 

 사실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 올바른 사람, 열심한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가운데는 더 많은 원망과 훨씬 더 많은 비판과 저주와 분노,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저 모양일까? 할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것에 불평불만하고 무관심하며 무례한 모습을 통해 우리 안에도 큰 아들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바라는 것만큼의 동정과 만족을 얻어내려는 속셈으로 나의 불평을 늘어놓을 때에는 언제나 그 결과가 항상 내가 얻으려고 했던 것과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집을 나간 아들은 큰아들, 작은 아들 모두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두 아들 모두를 품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잘 잘못을 묻지 않으시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기워주시며 최고의 것으로 작은 아들을 맞이하고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아버지 품에 안기고 한 아들은 화가 나서 아버지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품은 한없이 넓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기지 못하는 아들이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가장 하기 힘든 회심은 바로 집에 머물러 있던 큰아들의 회심입니다.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옆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써 자기 생각의 천박함과 마음의 옹졸함을 감추어 왔던 큰 아들도 귀향을 해야 합니다. 두 아들 다 품으시는 아버지의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곧 하늘 아버지 이십니다.

 

작은 아들은 극심한 고통,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후에야 자기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어둠을 겪고 나서야 밝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하며 품삯을 받는 일꾼으로라도 받아주기를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하느님의 큰 자비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면, 과거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해주신다는 것은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두 아들 다 잃은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 이상 주장 할 수 없었던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베드로는 절망의 와중에서도 자녀임을 주장했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서 으뜸제자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죽음을 택하였지만 베드로는 생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였습니다(로마5,20).

 

따라서 혹 허물이 있다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한없는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혹 큰 아들의 숨은 귀향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살펴야겠습니다.

 

램블란트의 탕자의 귀향에 대해 잠간 설명을 드리면서 묵상에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림 보이시죠?

 

 소련 레닌그라드(세인트 페테르스부르트)의 에르미타즈궁을 위해 1776년에 까뜨린드 대제가 획득하여 현재까지 거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높이 8피트(2.4미터) 폭6피드(1.8미터) 의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모습은 굽은 허리에 눈을 보면 장님에 가깝고 거기에다 사시가 되어버린 눈입니다. 아들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과 사랑 때문에 눈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망토는 넓게 펴져서 아들에게 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큰아들이 입고 있는 망토는 그저 그냥 걸치는 망토일 뿐입니다.

 

 그리고 손을 보면 한 손은 부드러운 어머니 손이고, 한 손은 강인한 아버지 손입니다. 어머니의 손은 위로와 평안을 주고 특히 아버지 손의 엄지를 보면 힘이 들어가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악수 할 때도 그 힘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잖아요. 괜찮아 힘내! 하는 손, 용서와 화해로 상처를 치유하는 축복의 손, 용기를 주는 손을 표현하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의 낡은 속옷 차림과 다 닳아 빠진 신을 통해서 그 고통과 비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서 얼마나 큰 고생을 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얹어진 아버지의 손에 빛이 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너에게 축복을 주노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총은 바로 거기에서 나옵니다. 위안과 희망을 간직한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이 핵심입니다.

 

작은 아들에게 남겨진 위엄의 상징은 덜렁거리며 걸려있는 단검입니다. 그것은 그의 품위가 하락하는 와중에도 아직도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관계의 인연은 끊을 내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큰아들의 모습을 보면 아버지와 작은아들의 모습을 문턱에서 그냥 말없이 서 있을 뿐입니다. 웃지도 않고 손을 내밀지도 않으며 구경꾼이고 방관자의 모습입니다. 몸과 손은 어둠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나마 얼굴에 비쳐진 빛은 차갑고 냉정해 보입니다. 그래도 빛으로 얼굴을 비추는 것은 그 아들도 빛으로 부름을 받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억지로 밀어넣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입니다.

 

옆에 앉아서 가슴을 치며 돌아온 탕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인과 세리를 대표하는 종입니다. 그리고 뒤편의 기둥에 기대고 있는 여자와 피리를 들고 있는 여자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잔칫집을 생각할 수도 있고 방탕한 생활을 하던 작은 아들이 머물던 곳인데 어둠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하게 묵상할 수 있겠으나 빛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포옹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큰 아들이 되었든 작은 아들이 되었든 간에 아버지께서는 큰 사랑으로 모두를 품으십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하겠고 또 우리도 모두에게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오늘 평화의 인사는 ‘당신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송영진신부-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1-2).”

여기서 ‘세리들과 죄인들’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넓은 뜻으로, 그 당시의 소외계층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실제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떤 죄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라는 말은,
모여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회개했거나 회개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죄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예수님을 비난한 것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은 어떤지 반성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죄인 취급한 적은 없는가?
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나도’ 예수님 흉내를 내면서 위선자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꾸짖지는 않는가?
‘내가 먼저’ 나의 위선을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는 말만 한다면,
나 자신도 결국 또 한 사람의 바리사이가 될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아니라 ‘나’입니다.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나’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4-7).”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들’이 아니라 ‘나’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잃은 양’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를 찾아서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잃은 양’은 ‘그들’이 아니라 ‘나’입니다.
(강론이나 설교를 하는 이들이 ‘잃은 양’을 ‘그들’이라고 표현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은 양’과 거리를 두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사실 강론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 자신도 ‘잃은 양’입니다.
그 자신도 회개를 해야 할 존재이고,
목자이신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잃은 양’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우리’ 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나’ 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강론이나 설교를 할 때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회개합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을 상대로 신앙교육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잃은 양’입니다.
아무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모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도 모두 잃은 양이다. ‘잃은 양’이 어찌 ‘잃은 양’을 찾는 목자를 비난하는가?
다 같은 죄인의 처지인데,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는가?”

여기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의인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자칭 의인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의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 말은, “이미 회개했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는 말이 되고,
그 의인들은 이미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자칭 의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 말은, 그들이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것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는커녕, 아픔과 슬픔만 드린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잃은 양’을 되찾았을 때의 큰 기쁨을 반대로 생각하면,
양을 하나라도 잃으면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크게 슬퍼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발현하실 때마다 늘 슬퍼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보면서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슬퍼하고 계시기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이고,
회개하지 않고 있는 ‘나’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잃은 양’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찾고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무가 아니고, ‘자비’ 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를’ 찾아오시라고 예수님께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간청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는 하느님의 의무가 아니고 ‘자비’입니다.
그러니 용서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를’ 용서하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고,
우리는 하느님께 용서를 간청할 뿐입니다.
(용서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것은,
죄 짓는 것을 당연하게, 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고해성사는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용서를 공급해 주는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형식적으로, 또 너무 기계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아닌가?)
회개는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순 시기나 대림시기 때에 습관적으로 하는 회개는
사실상 회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고해성사 보면 되겠지.” 라고 미리 생각하고서
어떤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성사모독죄까지 함께 짓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세 개의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탕자의 비유보다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라고 하겠다.

 

복음: 루카 15,1-32: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복음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내며 찬미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는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된 행위였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들이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시기까지하신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 아름다운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구원의 근거를 어떤 전례행위나 법적 실천 또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에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실천적 행동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실질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지 그분을 식사에 초대하는 세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죄인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구원이 제시되고 있다. 비유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가 단죄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고 호소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마음이 인간의 잘못과 배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순 제4주일에 보았기 때문에 앞의 두 비유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자.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의로운 사람들보다 죄인들에게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은 구약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한다(에제 34,1-31; 예레 23,1-6 참조). 여기서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기쁨의 의미가 강하다. 단지 목자의 기쁨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이웃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커진 기쁨이 애타게 찾으려 할 때에 생긴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잊게 한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보면, 형이 화를 내고 우울해 하는 대신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32) 하신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한”(7) 기쁨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충격을 받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굳어지게 한 역설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알아듣기 힘들었던 하느님의 논리이다. 이 기쁨의 논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보다 큰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함에 있어서 극복해야할 보다 큰사랑에 의해서 성취되는 기쁨이다. 여기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된 의()를 빗대어하신 말씀이다.

 

이 기쁨의 의미는 두 번째 비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난한 여자가 조금씩 돈을 모아 은전 열 닢을 마련하였다. 은전 한 닢은 농부의 하루 품팔이에 해당하는 돈이다.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마음이 아프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에는 얼마나 기쁨이 클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한낮에 등불을 켠다는 것은 창문이 없고 출입문은 낮아서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가난한 집을 연상케 한다. 등불까지도 그 여자의 기쁨을 더더욱 들뜨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내용(마르 1,15)복음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복음이라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관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이 이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교회라고 하는 집안에 사랑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죄를 짓고문을 두드리는 모든 형제들을 기꺼이 맞아들임으로써, 그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데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다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기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간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1) 애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 7)

-한상우신부-

출렁거리는
이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글어가는
이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감사하며
이 순간 이 현재를
살려합니다.

하늘 나라의
가장 큰 기쁨은
분명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로
새로 태어납니다.

익어가야 할
믿음과 성찰이
깊어질수록
회개또한 주님께
가까워집니다.

죄악을 벗어던지니
하늘 나라가 열리고
하늘 나라를 얻습니다.

기쁨 아닌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되찾으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회개로 뜨겁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자녀인지를
절실히 깨닫게됩니다.

생명의 진리는
분명 회개임을
가르쳐주십니다.

회개를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회개를
되찾아주십니다.

하늘 나라의 입구와
몹쓸 죄악의 출구는
다름아닌 회개입니다.

사랑과 회개
믿음과 회개
진리와 회개는
가장 큰 기쁨으로
우리 영혼을
익어가게 합니다.

돌아가야 할
회개이며
찾아야 할
우리 삶의
회개입니다.

회개를
향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말씀들에는 용서하시는 하느님 모습이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심경 변화를 보여줍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사십 일을 지내는 동안 광야에서 백성은 금 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 흥청거리며 놀았다"(탈출 32,6)고 하지요. 이에 분노하신 하느님은 그들을 "너의 백성"(탈출 32,7)이라 부르며 없애 버리려 하십니다.

"너의 백성"... 이 아픈 표현에는 그들에 대한 실망과, 관계를 끊으리만치 소스라치게 고통스런 상처가 자리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의 간청에 산산이 부서진 가슴을 추스르며 이내 마음을 돌리시지요.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탈출 32,14).
성경 저자는 의도적으로 "당신 백성"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다시 관계가 복원되었음을 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저버린 관계가 하느님의 용서로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처지를 꾸밈없이 담백하게 드러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1티모 1,15).
그는 예수님을 박해하던 자신의 오류와, '죄에 묶인 비참한 실존'(로마 7,15-24 참조)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토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6).
죄가 없으면 자비 또한 불필요하겠지요. 건강한 이에게 의사가 필요 없듯 말입니다. 그런데 "한없는 인내"(1티모 1,16)의 모습으로 바오로 사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내리신 하느님 자비는 분명한 목적성을 지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해 주시는 데 그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1티모 1,16)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우리가 얻은 이 용서와 자비의 은총은 특정한 소수에게 일시적으로 베풀고 그치는 특혜가 아니라, 죄인의 실존을 자각할 미래의 하느님 백성을 위한 본보기, 즉 샘플이고 견본입니다.

복음은 세 일화를 통해 하느님 마음을 펼쳐 보여줍니다. 세 개의 비유에는 공통적으로 "잃었다가 찾은"(루카 15,6.9.24.32) 사건과, 찾은 뒤에 벌이는 "기쁨의 잔치"(루카 15,6.9.23.32)가 등장합니다. 잃었을 때 염려와 상실감, 슬픔, 도로 찾으려는 집념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되찾았을 때는 한바탕 축제로 변할 만큼 극적인 반전을 보여줍니다.

"먹고 즐기자"(루카 15,23).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아버지가 외칩니다. (방종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의 기질이 어느 정도 아버지의 흥을 닮은 게 아닌가 잠시 곁길로 새게 되네요.) 잔치는 둘째 아들의 지위를 탈선 이전으로 복원하는 전례적 사건인 동시에 새로남, 새로 받아들임을 공표하는 공식적인 장이 됩니다. 기쁨과 흥겨움, 포식과 흥취는 누구건 그를 인정하고 마음껏 축하하는 이의 권리요 의무(루카 15,32 참조)가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루카 15,29).
동생의 환대를 거부하는 큰 아들의 볼멘 절규가 아버지의 마음을 후벼팝니다. 그 내용이 참 마음 아프게 들리네요. 그는 아버지를 군주나 주인처럼 설정해 놓고 자신을 노예, 종의 위치에 놓은 채 불쌍히 맹종해 왔습니다. 사랑과 신뢰로 다정해야 할 부자 관계를 자기도 모르게 주종 관계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아버지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모습과 비슷하게, 죄 없고 실수 없고 헛점 없고 요구도 없는 완벽한 성실맨으로 틀을 짜고 재단한 또 다른 우상화의 전형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루카 15,18).
오히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에 신뢰와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헤픈 사랑에 대한 기억일까요. 어쩌면 그는 이미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그는 100퍼센트 맞을 자신은 없더라도 그 아버지가 자기를 품팔이꾼으로라도 다시 거둬주시리라 예상하고 기대합니다. 비록 죄는 지었을망정 그는 아버지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요? 물론 형으로서 동생에 대한 단죄와 징벌의 심정이 질투와 뒤섞였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제게는 '혹시 큰 아들은 실망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아버지를 자기 식대로 우상화해 왔기에, 자기가 만들어놓은 우상과는 너무도 다른 아버지 모습, 즉 죄인인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헤프고 절도 없는 태도가 실망스러웠던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또 아버지라는 우상 안에 주입한 자기 모습과 진짜 아버지의 모습이 슬프게도 너무 닮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서 이질감과 괴리감, 소외감까지 든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큰 아들이 잔치 바깥 어둠 속에 머무를지, 실망과 혼돈을 거쳐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앎을 수용하고 낯을 바꾸어 환대의 잔치판에 더덩실 춤추며 뛰어들지 비유의 결말은 열려 있습니다. 분명한 건 그가 자기의 의로움, 자기가 우상화한 아버지의 의로움이 진실과 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옳으셔야 한다.(내 생각과 같으셔야 한다.)
하느님은 항상 정의로우셔야 한다.(내 의견과 같으셔야 한다.)
혹시 이처럼 아버지를 내 틀 안에 가두고 있다면 나는 또 다른 우상숭배자일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께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하며 손가락질하고 궁시렁대며 큰아들의 혼돈 속에서 긴긴 나날을 보낼지도 모를 일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나와 타인을 향해 조건 없이 "달려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시는"(루카 15,20) 아버지의 헤픈 사랑을 믿고, 먹고 즐기는 한바탕 사랑의 축제 안으로 뛰어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첫째가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을 무조건 믿어보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죄의 어둠 속에서 구원을 더듬어 찾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우리를 "본보기"로 삼으시도록 허용해 드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은총은 우리만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들로 돌아가자! 

-김찬선신부-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오늘 연중 제 24 주일의 주제는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이고,
자비란 사랑 중에서도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주님 말씀 중에서 저에게 가장 와 닿은 말씀은
<하늘에서는>과 <잃은 양>과 <내 양>이라는 표현입니다.
< 하늘에서는>은 <땅에서는>과 대비되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 쓴 표현인데
땅에서는 어떤 양이 무리와 같이 있지 않으면 양이 제멋대로 무리에서
이탈하여 <길 잃은 양>이라 하며 포기하는데 하늘에서는 <잃은 양>이라
하며 그런 양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내 양>이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번도 죄를 지으라고 하신 적이 없으니
죄를 지은 것은 분명 우리 인간이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떠난 죄도 한 번도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라고 않으셨으니
오늘 비유의 작은 아들처럼 우리 스스로 하느님을 떠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당신을 싫다고 하며 떠난 죄인을
아무리 괘씸해도 하느님께서는 포기하거나 악마의 자식이라고 내치지 않고
끝까지 당신의 아들, 곧 <내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이 사랑이 대단하셔서 그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 사랑 이전에 근원적인 관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아무리 부자의 연을 끊고 살자고 해도
부모가 부모 아닐 수 없고 자식이 자식 아닐 수 없고,
그래서 나를 싫다고 떠나도 내 자식일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제가 자주 얘기하듯 자식의 모든 죄는 그 원죄가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렇게 낳았고 그렇게 키웠기에 그런 죄를 지은 것이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도
그 죄의 원죄를 지으신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최대 약점입니다.

그런데 부모나 하느님은 죄를 지어도 우리를 당신 자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당신 소유가 아니라는 뜻에서 자식이기를 거부하고 떠납니다.
나는 나지 당신 소유가 아니고 그래서 당신 아들도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떠난 죄를 짓고 그래서 고생을 숱하게 하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하지만 한 번 부자의 연을 끊고 떠났으니
이제는 자기가 아들이 아니고 품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었건 짓지 않았건
작은 아들처럼 당신을 떠났건 큰 아들처럼 떠나지 않았건 당신 아들입니다.

죄를 짓고 당신을 떠난 아들이 괘씸한 것이 아니라 불쌍한 것이고,
그래서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생 면하려고 죄 지은 놈이 뻔뻔하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고 그러므로 죄인의 귀환이 아니라 아들의 귀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인이지만 아들로 복귀해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회개도 아버지께 복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죄인에서 아들로 복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지 않고
늘 아들이라는 신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밥이나 굶지 않기 위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아들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아무리 죄송해도 아들로 아버지께 돌아가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9월 11일 연중 제24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