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19. 9. 11. 18:21

2019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27-38)


Be merciful,

just as also your Father is mercifu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잘 압니다. 사과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어 소년에게 돈을 벌게 하고, 가지를 잘라 집을 짓게 했으며, 줄기를 잘라 배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앉아 쉴 곳이 없자 자신의 그루터기도 내어 줍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하십니다. 또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 그 답이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이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용서도 가능하게 만듭니다.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를 받았으니 그것에 감사하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카인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아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미가 없는 사람은 용서는커녕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낌없이 주는 나무에게 감사하는 소년은 자비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거저 얻은 것으로 돈을 벌었고 집을 지었고 여행을 떠났으며 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자신의 것을 가져가더라도 자신도 그렇게 받았기에 단죄할 수 없습니다.받은 것에 감사하는 만큼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감사하니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려 노력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감사하고자 노력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감정이 감사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감정을 주시려고 미사 때마다 아드님께서 끊임없이 당신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사실 제가 성령 기도회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성령 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아픈 사람들도 참 많았는데, 사람들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이상한 말을 외치는 모습이 제게는 큰 충격이었지요. 이 모습을 본 뒤로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면서 피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희소병에 걸렸습니다. 어느 병원에 가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 순간 성령 기도회가 생각났어요. 그러면서 ‘그분들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정말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기도회에 왔던 것이구나.’ 싶더군요.”

그리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간절한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성령 기도회를 이상하게 보았던 것은 제가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안에는 다양한 기도 방법이 있지요. 성령 기도회 역시 다양한 기도 방법의 하나로 너무나 좋은 기도입니다. 따라서 ‘맞다’, ‘맞지 않는다’가 아니라, 이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는 훌륭한 기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절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친 이상함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특기는 ‘사람의 간절함 파악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믿음만을 보고 치유해주시고 여기에 더 나아가 영적 무장까지 시켜주시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주님을 따라 이웃의 간절함을 보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보통 일반적으로 말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세상의 눈으로는 말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모범으로 십자가에서 당신을 중상하는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사회가 점점 험악해지면서 끔찍한 범죄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그 죄는 자기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그 범인을 몽둥이로 직접 처벌한다면 어떨까요? 법적 처벌을 받아서 교도소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정죄하면, 정죄 받는 것은 그대 자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영역이 우리의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역할은 사랑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은 그 보상을 해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크신 주님께서 대신 보상을 해 주신다고 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좋은 집이란 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어야 한다(조이스 메이나드).



불안한 마음.

이제까지 성지 안에서 강의뿐만 아니라 외부 강의도 참 많았습니다. 물론 성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면 부담감이 없지만, 수도권을 벗어나는 성지에서 먼 지방이면 힘이 좀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다음날에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강의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야 할 때는 ‘힘든데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걱정을 안고서 갔던 강의에서는 늘 후회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인해 제대로 된 강의를 하지 못했다는 후회이지요.

불안한 마음은 어떻게든 내 삶 안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것들을 내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으며, 주님의 뜻을 더 많이 이 세상에 펼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교만은 겸손과 사랑이 결핍된 지식

 -전삼용신부-

 

1999년에 개봉된 ‘매트릭스’란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이고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스승 모피어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 세계가 꿈인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결코 스승 모피어스를 이길 수 없습니다.

네오는 그것이 모피어스의 힘과 민첩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숨을 헐떡입니다.

그때 모피어스가 말합니다.

 

“내가 빠르거나 힘이 센 게 내 근육 탓일까?

여기서? (꿈속에서 어떻게 숨이 찰 수 있느냐는 질문)

 

네가 지금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해?

다시 해봐!

생각하지 말고 인식을 해! (여기가 꿈이란 현실을 믿으라는 것).”

 

그때야 네오는 무언가를 깨닫습니다.

자신이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일뿐이라고 믿고는 있지만

아니 믿고 싶지만 지금까지의 삶에서 배운 지식들 때문에,

즉, 자신은 저렇게 힘이 세고 빠른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

사람이 새처럼 절대 날 수 없다는 것,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어야 한다는 것 등이 자신을 사로잡아

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피어스는 계속 말합니다.

 

“그래. 네 마음을 풀어주는 거야.

나는 문까지만 안내할 수 있지.

그 문을 나가는 건 네가 직접 해야 돼.

모든 걸 버려. 두려움. 의심. 불신까지. 마음을 열어.”

 

우리가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 모든 지식이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지식은 오히려 우리가 깨어나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 지식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을 공부하면서 어느 샌가 기쁨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쌓이면 그분을 더 알게 되어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지식이 쌓일수록 교만해져 동시에 내가 배운 지식을 뽐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나 자신을 높이는 도구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로오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신학도 잘못 공부하면 믿음을 잃게 만든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자신의 ‘겸손과 사랑’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교만은 사랑의 반대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다운 가치는 하느님뿐이고 하느님께 가는 길은 겸손과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넘지 못하는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신학대전’을 끝마쳐갈 무렵 하느님을 체험하고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신학대전이

‘지푸라기’와 같은 쓰레기였다며 바로 집필을 멈추고 미완성으로 남겨놓게 된 것입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은 쌓일수록

자신을 겸손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코린토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남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라는 구약의 계명이 지금의 시대에 와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을 꺼리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비록 죄가 아닐지라도 이웃과 약자들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지식만 믿고 살아가는 이들은 오히려 죄를 짓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됩니다.

그 사람의 본질은 지식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이 만드는 것입니다.

 

잔소리는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랍니다.

아무리 옳은 지식이라도 사랑이 결핍되어 있으면 잔소리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다 잡힌 1년 새 14건의 절도를 했던 A양(16세)은

당연히 소년보호시설에 들어가야만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서울가정법원 김귀옥 부장판사는 다정한 소리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라는 말만 재판정에서 A양에게 외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 아이가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결국 이 말을 다 마쳤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전년도에 아이들로부터 집단적으로 폭행을 당했었기 때문입니다.

 

법이 아닌 사랑을 지녔던 판사는 법대로만 하려고 하는 이들보다

법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모든 지식을 완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식을 쌓아가면서도 결코 그것에 겸손과 사랑이 결핍되어 있으면

교만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텔레비전을 바꾸면서 전선 정리를 했습니다. 10년이 넘게 있었던 전선은 뽀얀 먼지가 가득했고, 선들은 엉켜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비디오, 인터넷, 케이블 수신기 등의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먼지를 털고 모든 선을 깔끔하게 정리하니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교통정리를 한 느낌이었습니다. 꽉 막히는 도로에 교통경찰이 수신호로 정리하면 금세 교통의 흐름이 원활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을 정리해 주십니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래하듯이 선행을 베풀지만, 빛의 자녀들은 손해를 볼지라도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십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학대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전선을 정리하면서 필요 없는 것들은 모두 버렸습니다. 아깝다고 필요 없는 선들을 남겨놓아서는 정리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비디오와 연결된 선을 모두 치웠고, 영상과 소리를 전달하는 선도 다 치웠습니다. 요즘 나오는 텔레비전은 그런 선들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교회는 2000년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 내부와 외부에서 거센 도전을 받았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적이 있었고,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으로 교회가 흘러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교회는 내부에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산중에서 기도하던 수도자들의 힘이었습니다. 수도자들로부터 기도의 바람이 불었고, 영성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같은 성인들은 정체된 교회, 꽉 막힌 교회에 기도의 바람이 불게 하였습니다. 가난과 비움의 영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 막힌 혈관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개혁의 바람, 영성의 바람, 성령의 바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피가 흘러야 합니다. 기도의 바람, 영성의 바람, 나눔의 바람은 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살아있는 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너희가 되질하는 만큼 그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반영억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든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포기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납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으십시오!
-양승국신부-


오늘 첫번째 독서인 콜로새서를 읽고 묵상하다 보니, 어찌 그리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명문장인지? 어찌 그리도 감동적인지? 어찌 그리 오늘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인지? 출력을 해서 냉장고문에 붙여 놓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새서 3장 1~10절)

세례 성사를 통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 신자들의 시선은 이제 교정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내다봐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저 윗쪽, 천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신자들을 향해 새로운 시야를 지닐 것을 부단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의지는 하늘나라에, 다시 말해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촛점을 맞춰야 합니다. 더 이상 지상에 있는 것들에 우선권을 둔다든지, 지상 것들에 중심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은 새로운 질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쇄신되고 재창조되었습니다. 이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새로운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듭 아래가 아니라 위를 바라보라고, 지상 것들로부터 초월하고, 천상의 것들 추구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잘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래보다는 저 위의 것, 지상 것보다는 천상의 것을 추구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곡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위의 것, 천상의 것이라는 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매일 당연히 해야 할 담당구역 청소는 하지 않고 줄창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맡은 일은 뒷전인 채, 하루 온 종일 성전에서 울부짖고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와 만남, 사건과 사고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의 진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맡고 있는 직무나 사명에 소홀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시선은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세상 만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만, 현세 생활에서 맡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저 위의 것, 천상의 것, 영적인 삶에 우선권과 고귀함을 크게 강조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상의 삶, 현세적인 것, 인간 조건, 육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평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께서 지적하고 힐난하신 것이 탈선이요 과욕, 죄로 가득한 그릇된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고 고결하신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반하는 악습에서 거듭 죽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어두운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생명의 삶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특별히 과도한 욕심, 탐욕을 경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어느 정도 충족되었으면 감사하고 만족하면 좋을텐데, 어떤 사람들 보면 욕심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충분히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은 그칠줄 모릅니다. 그런 모습은 새로운 백성의 복음적 삶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삶이라서 그리도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는 죄에 대한 죽음의 성사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재창조되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의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자아로 무장한 새로운 인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매일 과거의 악습에 죽어야겠습니다. 수시로 우리를 유혹하는 죄와 탐욕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시시각각 분노와 격분, 악의와 중상에 죽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새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야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송영진신부-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27-31).”

‘사랑’은 율법의(신앙생활의) 완성이고(로마 13,10),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완성입니다(마태 5,48).
그래서 사랑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과 같고,
사랑을 실천할 때 원수 같은 사람들은 제외한다면,
그것은 사랑 실천을 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의 선’으로 ‘인간의 악’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기도’는 원수 같은 그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을 받기를 바라십니다.)
‘회개’는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회개시키는 방법은 ‘선’이어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씻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흙탕물에 젖어 있는 옷을 흙탕물로 빨래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옷이 깨끗해지기를 바란다면 깨끗한 물로 빨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움을 사랑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학대를 기도로 갚는 것은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 깨끗한 물로 빨래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으로 ‘인간의 악’을 극복하려면,
우선 먼저 나 자신이 ‘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하고, 내가 먼저 선행과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어야 합니다.
깨끗한 물로 빨래를 한다고 해도, 나 자신이 깨끗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느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날마다 죄만 짓고 있는 ‘나’ 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정말 원수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가족과 이웃들도, ‘내가’ 무엇인가 잘못을 해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합니다.
내가 주는 사랑은 아주 작은데, 그들에게서 늘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네가 이미 사랑받고 있으니 너도 사랑을 주어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2-36).”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좋아하여라.”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실천하는 ‘선’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나 좀 더 친한 사람이 있고 덜 친한 사람이 있고,
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별로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덜 친한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도,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해야 ‘참 사랑’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악마는 이 가르침과는 반대로, “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너하고 친한 사람만
사랑하여라. 네가 모르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은 외면하고 무시하여라.”
라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악마의 유혹을 따를 것인가?

바오로 사도는, 부자들끼리만 어울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따돌린
코린토 교회의 부자 신자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1코린 11,17-34).
사도들이 직접 다스리던 초대 교회 때에도,
교회 안에서 그리스계 과부들이 차별과 홀대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사도 6,1).
악마가 자주 사용하는 무기는 이간질과 차별 대우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별 대우 때문에 분열이 생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악마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임은 교회 공동체가 아닌, 이기적인 세속 집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는 반성해야 할 모습이 많습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따뜻하게 환영하기는커녕 의심하는 눈빛으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든지, 친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면서 분열을 조장한다든지...
(그런 일들이 ‘냉담’을 하게 되는 주요 원인인데, 사람을 차별하는 신부들과
수녀들의 태도 때문에, 사랑 없고 이기적인, 이웃의 차가운 모습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냉담자’가 많은 것이 사실이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혹시 ‘나 때문에’ 누군가가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뿌린 대로 거둔다.”입니다.
사랑을 뿌리면 사랑을 거두고 미움을 뿌리면 미움을 거둡니다.
(“내가 남에게 주는 사랑은 나에게 오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고,
내가 남에게 주는 미움은 나에게 오는 사랑을 미움으로 바꾸어버린다.”)
물론,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 자신이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것과 같고,
그래서 나 자신을 마치 미움 받는 사람처럼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하느님

-이종훈신부-


이름 모르는 풀벌레 소리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맑은 하늘을 가르며 노래하는 새들이 마음을 맑게 한다. 어미 입에 물려 들려가는 새끼 고양이는 집에 가면 야단을 맞을 것 같다. 지붕이 뚫어질 것처럼 내리는 빗소리와 어두운 방을 순간 환하게 만드는 번개는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한다.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보름달은 낭만을 선물한다. 이 모두가 참 좋으신 우리 하느님 작품들이다.

 

한 사람의 완전한 내어줌과 희생 이야기는 언제나 깊은 감동을 준다.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여도 그렇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는 그에게 마지막에는 앉아 쉴 수 있는 자리까지 되어 주고, ‘키다리 아저씨는 언제나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를 도와준다. ‘워낭소리의 그 듬직한 늙은 소는 마지막으로 주인이 추운 겨울을 날 땔감을 한 가득 해 놓고서 비로소 그 코뚜레를 풀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숙연해지고 그립고 눈물 난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의 생애가 아니라 참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이다. 우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연에서 느끼는 평화와 경외심, 남모르는 희생과 사랑 이야기에서 받는 깊은 감동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내어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하셨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루카 6,28)”고 하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인가?

 

하느님 나라는 이곳저곳에 보이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참 좋으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다. 비폭력, 보답을 바라지 않는 베풀음, 차별하지 않는 사랑, 원수를 용서함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낸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기에(루카 6,36) 완전하시고(마태 5,48) 거룩하시다(레위 11,44.45). 우리 하느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자비로워서 완전해지고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이 불가능한 사랑에 도전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 되어주어 커진 나의 되에 하느님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나에게만 주실 그 선물을 기대하고 또 그리해주시리라 믿기 때문이다(루카 6,38).

 

예수님,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요? 저는 할 수 없지만 제 안에 계신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이지만 주님을 따라 주님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께 불가능이란 없음을 듣고 믿으셨으니 저에게도 그 믿음을 얻어 주소서. 아멘


복음: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욱현신부-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일러주시는 말씀이며, 우리 믿음의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관습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만의 관습이다. 주님의 말씀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굶주리는 사람에겐 참을성을 주고 은총의 상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눈에는 눈.”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29) 이것은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29)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자비를 우리는 스테파노에게서 볼 수 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며 용서를 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인인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30-31) 우리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자비는 더없이 훌륭한 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고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는 복수심을 없애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37-38)라는 말씀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두 자선을 행하여야 한다. 베풀고 용서하여야 한다. 우리도 주님께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악행을 되갚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한상우신부-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삶인
자비의 삶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원수까지 사랑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줍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해줍니다.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악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 줍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비는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자비가 있습니다.
자비를 따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르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자기애와 가족 사랑은 본능입니다. 이웃 사랑은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상식선 안에서 가능한 일이고요. 여기까지는 굳이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미풍양속이 나오고 인간의 도리와 정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한 영성가에게서 들었던 말이 기억납니다. 하느님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마태 22,37 참조) 사랑해야 하고, 이웃은 "너 자신처럼"(마태 22,39 참조) 사랑해야 하지요. 그리고 원수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의 가르침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냥" 사랑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처럼 목숨 걸고 사랑하라 하시지 않고, 이웃처럼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저 사랑하면 된다는 해석이었습니다. 부담이 좀 덜어지기는 하지요.

나를 미워하는 자, 저주하고 학대하는 자, 때리고 착취하는 자를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면 초반부터 숨이 탁 막힐 일입니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도 없어지고요. 하지만 다행히도 주님은 그렇게까지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됨됨이를 너무 잘 아시니까요.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루카 6,35).
이 구체적 지침을 들으니 원수에게 잘해 주는 건 (사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영 못 할 일은 아닙니다. 심장까지 다 동의하지는 않아도 그간 예수님 말씀과 동행하며 쌓은 내공으로 어느 정도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 내주는 것도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할 정도는 아니니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동안 그분과 쌓은 관계를 염두에 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27).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를 "그냥" 사랑하시지 않고, "자기처럼" 사랑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목숨을 바쳐" 사랑하십니다.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증명하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 원수도 아니고 그냥 이웃도 아닌, 하느님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 DNA는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죽어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막지 않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 되어버린 사랑은 스스로 제 힘을 발휘하고 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콜로 3,12).
대상을 보지 말고 우리에게 부여된 자격을 염두에 두면 가능한 일입니다. "... 답게!" 감사하면서도 은근 부담이 되는 이 말씀에는 우리 신원의식과 정체성이 들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콜로 3,15).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아름답과 귀한 덕행들은 결국 "감사"로 귀결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니까 실천할 수 있는 권고들인 것입니다.

아버지께 입은 자비에 감사할 줄 아는 이는 자비를 베풉니다. 아버지가 쏟아 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이는 사랑을 쏟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대상을 보지 말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면 가능한 일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이 모이는 한가위입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떠오르는 인연은 물론 껄끄럽고 아픈 관계들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지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면 너무 잘 하려 하지 말고 또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지 말고, 그저 사랑해도 충분합니다. 대상에 매이지 말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주목하기만 하십시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 나 이런 사람이야~~"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사랑하는 명절 되시길 축원합니다.

도전받고 격려도 받는 오늘 우리 
-김찬선신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너무도 좋은 말은 다 나열해놨는데 아마 주님의 제자이니
바오로 사도도 그 제자답게 이렇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참으로 좋은 말이라고 하지 않고 너무도 좋은 말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제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느낀 것의 솔직한 표현입니다.
다 옳은 말이고 실천해야 하지만 저에게는 너무하다는 느낌이고
너무 과한 요구를 성인이 아닌 제게 하기에 실천할 수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지나친 요구이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성인이 아니니
주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지킬 수 없는 것으로 제켜놓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래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니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잘 생각해야 합니다.

공자가 이렇게 얘기했으면 옛날 너무 좋은 말만 하는 친구보고
‘쟤는 꼭 공자 같은 말만 한다.’고 하며 제켜놓았던 것처럼
제켜놓겠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잘 생각해야겠지요.

주님의 말씀은 도전이며 주문입니다.
죄인들도 그 정도의 사랑은 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너희는
그 정도는 넘어야 하지 않느냐 말씀하시는 것이니 말입니다.

다른 죄인들처럼 죄인으로 주저앉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인 것 사실이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냥 죄인으로 살래!’ 하고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오늘 좋은 말을 많이 나열하여 권고하면서
맨 앞에 ‘-답게’라는 표현을 쓴 다음 이어서 여러 권고를 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과 같은 용서에 대한 권고도 부담스럽지만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 받는 사람답게’는 더 부담스럽고
특히 거룩한 사람은 내가 과연 거룩한 사람인가 의문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는 거룩하다고 영적으로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영적으로 살려는 사람이라면 죄인으로 살기로 주저앉지 말아야 하고,
주님의 제자로서의 신원의식을 굳게 가져야 하고
주님의 사랑 실천을 포기치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따르려고 해야 합니다.

저희 수도자의 경우 수도자가 어떻게 그 모양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못 살 수도 있는데
그렇게 잘못 사는 것보다 더 잘못이 바로 신원의식 없이 사는 겁니다.

왜냐면 신원의식을 가지고 있고 노력을 해도 약하기에 잘못 살 수는 있지만
신원의식이 없는 것은 수도자이기를 아예 포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도복 입을 때만 수도자이고 어떤 행세할 때만 수도자로 살 바에는
자신도 불행하고 남에게도 악 표양이 되는 그런 수도생활,
아예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생활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기 위해 사는 것이기에 그렇게 살지 못할 바에는
포기하는 것이 낫겠지만 주님의 제자 되는 것도 포기해도 되겠습니까?

이런 도전을 받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