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13일 금요일 한가위

Margaret K 2019. 9. 12. 18:28

2019 9 13일 금요일 가위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15-21)

 

‘You fool, this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of you;

and the things you have prepared,

to whom will they belo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고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살아온 조상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도록 합시다.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는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도 나눔을 실천하기로 다짐하며 주님의 잔치에 참여합시다.

☆☆☆

오늘의 묵상

 토마스 사도가 인도에 선교하러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세공과 건축에 뛰어난 기술자였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임금이 자신을 위한 새 왕궁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돈도 다 지불하였지만 토마스는 그 돈을 임금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임금은 토마스 사도를 죽이려 하였습니다.그때 임금의 동생이 찾아와 말하였습니다. “형님, 어제 꿈에 제가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제가 살 집은 매우 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큰 궁궐을 보았는데 천사는 그것이 형님의 것이고 토마스 사도라는 인물이 지어 준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우리는 집을 사기도 하고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집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 집을 하늘 나라에 짓고, 비신앙인은 땅에 짓는다는 것입니다. 땅에 지은 집은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지지만 하늘에 지은 집은 영원히 남게 됩니다.오늘 예수님께서 곳간을 넓히려는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란 이 세상에 큰 집을 짓던 사람입니다. 지상에 큰 집을 지으려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롭지 못하게 되면 하느님 앞에서도 가난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위에는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추수한 것들이 많아 기쁜 날입니다. 이 추수한 것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내가 부유하게 살 집을 짓는 건축 자재들입니다. 이것들을 이 짧은 생애를 위하여 소진해 버릴 것인지 영원히 지속되는 집을 짓는 데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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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지금 자신이 있게끔 해 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간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풍요로움에만 갇혀 있으면 안 됩니다. 추수할 것이 많아 기쁜 날이고, 그 기쁨을 가족과 조상님과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것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에게 원두커피 한 봉지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방에 들어와 커피 봉투를 열자 진한 커피 냄새가 너무 좋았습니다.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셔야겠다 싶어서 원두커피를 분쇄기로 갈고 물을 끓여서 커피를 내렸습니다. 진한 향기를 내는 커피가 제 앞에 놓였습니다. 기분이 좋았고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다가 그만 실수로 손으로 커피잔을 쓰러뜨렸고 책 위에 커피를 쏟은 것입니다. 얼른 책 위의 커피를 종이로 닦았지만 누런 커피 자국이 선명합니다. 짜증이 밀려듭니다. 조금 전까지 커피 한 잔에 큰 기쁨을 얻었지만, 잠시 뒤 커피 한 잔에 짜증과 화가 밀려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모두 그렇지 않을까요? 내게 행복을 주는 것처럼 생각되는 그것이 잠시 뒤에는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생명은 어떻겠습니까?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생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미래를 내다보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마음을 위해 하늘의 보물을 얻는 것은 조금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스스로 정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현재의 것들에 만족하여 “먹을 것이 많으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라는 마음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길, 지금 현재를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승의 삶은 짧고, 누구나 예고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아서는 안 됩니다.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은 본디 우리 것이 아닙니다. 덕행만이 죽은 자의 동반자입니다.”
인생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황이 변화할 것을 기대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변화인 자신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에는 미치지 못한다(비트겐슈타인).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하자.

결혼 생활을 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솔직히 이혼하는 가정이 너무나 많습니다. 분명히 결혼 전에는 서로가 너무 좋아서 함께 살고 싶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결혼 후에는 서로가 자신의 원수라면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요. 제 남편이 결혼 전에는 별로였거든요. 별 볼 일 없어 보이기도 했고, 이 남자에게 과연 나의 미래를 걸어야 할지 참으로 걱정이 많이 되었어요. 그래서일까요? 지금의 제 남편이 과거의 제 남편 모습보다 훨씬 더 좋아요. 만약 10년 전 남편과 지금의 남편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지금의 제 남편을 선택할 거예요.”

대부분이 과거에는 정말로 잘 해 주던 배우자가 결혼 후에는 바뀌었다는 말을 많이 하시지요. 그런데 이 자매님은 거꾸로입니다. 하긴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이 부부는 잘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치고 죽을 둥 살 둥 허우적거리는데도, 제자리만 맴돌고 있다거나 오히려 뒤로만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면 정말로 힘들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서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상대방에게서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서로서로 사랑으로 바라볼 때, 그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고 이로써 좀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전삼용신부-


탐욕의 끝

남미를 여행할 때 잉카인들의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금이 많아서 짐승까지도 금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치장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금은 단지 몸을 치장하는 금속일 뿐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금은 해님의 땀, 은은 달님의 눈물로 불렸습니다.

그들에겐 돈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모든 가치는 노동력으로 측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532년 피사로라는 사람이 엘도라도의 전설을 찾아 잉카를 찾았습니다.

엘도라도는 금으로 치장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금이 가득 찬 연못일 수도 있고 금으로 된 산일 수도 있습니다.


까하마르까 전투를 거친 후, 안데스 산맥의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현재까지 채굴된 은은

62,000톤입니다.


당시 잉카인들은 왜 유럽인들이 금과 은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겐 금과 은은 휴대할 수 있는 권력이며 가치의 저장소이고

계산의 단위였습니다.


스페인사람들은 강제 노동제를 적용하였는데, 포토시에 들어간 사람 8명 중 1명은

살아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약탈당한 잉카인들을 포함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금과 은을 들여온 스페인은 더 부유해졌을까요?

그 당시는 스페인 경제가 살아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경제는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은을 많이 들여오면서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반면

물가는 치솟았기 때문입니다.

이내 은화는 쓰레기처럼 취급되게 되었고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해졌습니다.


탐욕은 타인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종국엔 자신까지 죽입니다.

어떤 탐욕스런 논의 주인이 위에서 내려오는 물을 자신만 받아쓰고

밑으로 흐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논으로부터 물을 받아야 했던 논들의 벼는 약해져서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쌀값이 오를 것을 기뻐하던 탐욕스런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밑에서 시작된 병충해가 자신의 벼까지 모두 죽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더 가지면 그만큼 타인이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폭력입니다.

그런데 탐욕은 결국 자신까지 죽이게 되어있는 자신에 대한 폭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벌어 내가 쓴다는데 무슨 폭력이니 죄이니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게으르고 나는 부지런하고 그들은 흥청망청 쓰고 나는 절약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마존 부족이나 혹은 북한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의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부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부자인 것 자체가 어쩌면 폭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부자일 수는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누군가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재화가 돌아가게 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진 사람은 그만큼 더 나누어야 하는 의무까지 함께 주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내어주는 호수입니다.

자신도 생명으로 가득 찼고 주위도 생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반면 갈릴래아로부터 물을 받아들이는 사해는 그 반대입니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자신도 죽였고 물을 쪽쪽 빨아들이기 때문에 주위도 황량한 소금사막으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많은 돈을 쌓아놓겠다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으면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받아들인 물을 강물을 통해 내어보내야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혼자서 살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지나치게 탐욕을 내어 쌓아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교만이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안에서 부자가 창고를 늘리는 바로 그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쌓아놓는 이유는 내일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기에 내일도 당연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총량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세상 것은 믿을 수 없고, 세상 것을 믿으면서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믿는 것과 한 운명을 맞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으면 영원할 수 없습니다.

가라앉는 배를 꼭 쥐고 있으면 그 배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진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합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많이 채워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밭에 밀알 하나가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내가 나누는 것은 수십 배의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마을의 최 부자 가문은 오랜 세월을 부자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훈이 ‘돈은 똥이다’라는 이유였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썩어서 나에게 해를 입히지만 나누면 거름이 되어

더 많은 이익이 되어 돌아온다는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나누는 사람을 굶게 만드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나무가 참나무라고 합니다.

참나무는 잎도 약으로 쓰이고 나무는 단단하여 목재로 쓰입니다.

그리고 오래 타서 불을 때기에도 좋고 숯은 참숯을 알아줍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면 사람들이 더 많이 베어서 멸종이 되어야할 텐데

어떤 나무보다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어놓는데 있습니다.


가뭄이 들면 더 많은 도토리를 맺는 참나무는

음식이 부족할 때 동물들에게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합니다.

동물들은 그것들을 나르다가 놓치기도 하고 다람쥐는 자신이 파묻어놓은 도토리들을

많이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모두 땅에서 자라나 나무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어주면 더 많이 받게 되어있는 것은 하늘의 이치고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웃들에게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막아버리면 하느님께도 이웃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죽듯이 모든 것도 나에게 들어와 다시 나가지 않으면

썩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한가위, 우리 모두가 풍요롭게 되는 길은 바로 나눔뿐입니다.

풍요를 위해 가두어 놓은 것을 열어 세상을 비옥하게 합시다.


어떤 부자 가문은 돈을 똥으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머물러 있으면 내 안에서 썩어버리지만 밖에 뿌려지면

곡식이 많이 달려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추석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어릴 때 추석이면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돼지고기, 소고기를 신문지에 쌓아 놓으셨습니다. 고모님 댁, 외삼촌 댁에 갖다 드렸습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추석만큼은 배불리 먹으려는 어머니의 배려였습니다. 고모님도, 외숙모님도 제게 작은 것이라도 주셨습니다. 추석은 둥근 달을 보는 것이기도 하고, 추석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저녁이기도 하지만 추석은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진 것을 나누는 날입니다.

 

이제는 추석의 풍속도 많이 변했습니다. 긴 연휴를 이용해서 여행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이 막히니 부모님이 서울로 오기도 합니다. 마트에 가면 사시사철 먹을거리가 풍성하게 있습니다. 내가 직접 가지 않아도 택배가 내 마음을 전해 주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우리의 삶도 변하지만, 추석 본연의 의미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거둔 결실은 나만의 것이 아니니 이웃과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힘들고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찾아가서 위로하고, 나도 한때는 힘든 적이 있었음을 생각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추석을 지내는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주신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의하십시오. 모든 탐욕을 경계하십시오. 아무리 부유하더라고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러합니다.” 경주의 최 부자 집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일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과 사회에 환원한다.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내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가문에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이웃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오늘 제2 독서는 우리가 누려야 할 천상의 영원한 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여러 가지이듯이,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될 때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람들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려고 마음은 먹지만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살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을 하다가도 곧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입니다. 작심삼일인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지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받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시고 행복하세요)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입니다. 자비만이 죽은 사람을 따라갑니다!

-양승국신부-


아무 것도 아닌 우리, 먼지요 티끌 같은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시고,

이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끽하라고 초대해 주신 하느님과 조상들을 기억하고

깊이 감사드리는 명절입니다.


어린 시절, 선친께서 주도하시는 명절 제사에 온 가족이 정성껏 예를 올리고,

수십 번도 더 절을 반복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무릎이 아프도록 절을 계속하고, 마치 조상님들이 제삿상 앞에 앉아계시는 듯,

술잔을 올려드리고, 젓가락을 이곳 저곳 옮겨드리던 기억들도 생생합니다.


조상들의 혼백이 들어오실수 있도록 대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든지,

제사가 끝난 뒤에는 객귀(客鬼)들을 위해 대문 앞에 객귀밥을 내놓던 것을 보고서는

속으로 엄청 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돌아보니 그런 제사 풍습은 우리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전달해 주신

조상님들의 은혜를 기억하는 참으로 정겨운 풍습입니다.

마치 살아 생전 조상님을 대하듯, 따뜻하고 살갑게 지극정성으로 밥 한끼 지어 올리는,

참으로 마음 훈훈한 전통입니다.


소중한 사람이나 존재는 우리 곁을 떠날 때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소중한 무언가를 내게 남겨둔 채 떠나가거나 내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떼어내 가져갑니다.


한 사람을 향해 줄달음치던 감정은 생물과 같아서,

그 사람이 사라지거나 사랑이 소멸해도 곧장 죽지 않습니다.(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달)


잠시 우리 보다 먼저 떠나간 사람들, 때로 가슴 후벼 파도록 보고 싶지만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 사람...

그러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님 자비의 품안에 편히 쉬고 있을테니,

허전하고 아쉽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떠나보내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주님 은총 안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희망하며,

쓸쓸한 마음조차 주님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과하지 않고 소박하게, 서로를 배려하고 수고를 분담하면서 제사상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제사 준비 문제로 서로 마음 불편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친지들끼리 안부를 묻고, 조상님들과의 인연과 추억을 회상하고,

좋았던 모습들을 기억하는, 따뜻하고 정겨운 명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석을 맞아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재물에 너무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자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단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마음껏 먹고 마시다가, 바로 그날 밤 운명을 달리하게 될

부자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부자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세상의 제물 축척하기 뿐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조만간 닥쳐올 노화, 죽음, 영적인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없이 살아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스타일의 삶을 추구하는 부자에게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부자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년 열두 달, 하루 온종일, 게으름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 결과가 엄청난 부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재물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모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웃들의 곤궁함을 외면했습니다.

넘쳐나는 재화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눌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았습니다.

세상의 재물에 눈이 멀어 영적인 눈, 지혜의 눈이 감겨 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꽤나 평범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자주 잊고 삽니다.

어떤 사람들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이

자신만만하고 위풍당당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고도 없이, 우리 측의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나셔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나친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교부)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은 지상의 유산이 아니라 불멸의 유산입니다.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입니다.

자비만이 죽은 사람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의 거처로 인도합니다.”(암부로시우스 교부)


만남과 나눔은 살아있어야 한다

-반영억신부- 

 

추석을 맞이하여 기쁘고 복된 시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추석은 음력 8월15일로 다른 말로는 한가위 라고도 부릅니다.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잘 몰라도 분명 큰 날은 큰 날입니다. 민족고유의 명절이 되어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지니 말입니다. 이 큰 날에 만남과 나눔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옛날, 추워서 추석, 서러워서 설이랍니다. 가을의 넉넉함, 풍요로움을 누려야 하는데 넉넉지 못하니 안타까움이 남고, 하느님과 조상들께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너무 추웠답니다. 그래도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주며 따뜻한 정을 나누는 마음만큼은 한없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명절에 특히 부부 싸움 등 가정불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명절증후근’ 이라는 병도 생겼습니다. 외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속을 보면 어쩔 수 없는 만남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조상의 묘를 찾아 예를 갖추는 성묘는 더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가족이 정성껏 가꾸기 보다는 벌초를 해주는 대행업체도 생겨났습니다. 제사음식도 가족이 함께 모여 만들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사면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예를 갖추는 것까지 대행을 하게 생겼으니 조상과의 만남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떠나보내던 이별은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나 봅니다.

 

 시부모와 장인장모를 차별한다고 불편해 하고, 며느리는 부엌에서 일꾼처럼 부려먹으면서 당신 딸은 친정에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은 결국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위가 청소나 설거지를 돕고 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당신 아들이 하면 사내자식이 부엌을 드나든다고 싫어합니다. 어머니 눈치 봐야죠. 아내 눈치 봐야죠. 정말 남자들도 스트레스 받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명절은 ‘큰 날’이 아니라 ‘큰일 날 날’로 변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큽니다.

 

 한가위 명절은 우리에게 큰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조상을 만나고 부모를 만나며 형제자매를, 이웃을 만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를 하고 마음을 나누며 우리의 미래를 키워갑니다. 중국사람은 만월을 상징하는 월병을 만들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반달모양의 송편을 만들어 계속 자라나기를 희망했습니다. 풍요로움이 커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송편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사랑과 정을 확인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나눔으로써 두 배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루가12,15) 고 하십니다. 명절에 탐욕으로 인해 얼굴 붉히는 일 없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부자가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혼자 궁리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창고를 늘리는 일이었습니다. 혼자 궁리했기 때문에 결국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혼자 궁리했기에 육적인 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궁리했더라면 영적인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8,5-6).

 그러므로 욕심 부리지 말고 만남의 기쁨과 나눔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성 빈첸시오).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만남과 나눔은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조상과 부모형제, 이웃이 서로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며 이런 은혜를 넉넉히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만남 안에 주님의 자리를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차고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쁘고 즐거운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마음이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느님께로 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감사드리는 생활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그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 때에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 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내온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 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들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 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이 참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그분들을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 드리자.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신부-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통해
깨닫게됩니다.

생명과 생명
목숨과 목숨을
이어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생명 안에서
우리의 오늘
한가위는 그냥
이루어진 날이
결코 아닙니다.

감사와 사랑이
최고의 해답임을
다시 배우게됩니다.

풍요로운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이시간에
감사드리는
한가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의 시간
아버지의 시간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상선신부-


가족, 친지들이 한데 모여 조상들을 기억하고 지난 한 해 동안 주님께서 맺어 주신 결실을 나누는 한가위 명절입니다. 교회는 오늘,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도록 초대하는 동시에 우리 모두 각자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도록 촉구합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육신의 생명은 재산에 따라 한시적으로 연명이 가능하기도 합니다만, 영원한 생명은 다른 문제입니다. 생물학적 동력과 움직임이 사그라지면서 세상 질서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지요. 그런데 그곳의 질서는 세상에서 누리던 양태와는 사뭇 다른 듯합니다.

"어리석은 자야"(루카 12,20).
예수님께서 많은 소출을 거둔 한 부유한 사람의 비유에서 그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큰 수확량에 신이 나서 창고를 늘려 지을 생각, 앞으로 즐기며 살 생각에 들뜬 그는 안타깝게도 오늘 밤 목숨을 되찾아 가실 주님께 모든 걸 다 넘겨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부유함"(루카 12,21).
예수님은 허무히 죽음을 맞이할 그 부자를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감히 인간이 부유할 수 있으려면, 움켜쥔 재물과 힘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사실 목숨을 비롯해 재물과 명예와 직분 등 모든 것은 주님 것이니까요. 아무리 버둥대도 세상 일이 내 힘만으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체험으로 어느 정도 압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고, 무엇 하나 더 달라고 요구할 권리조차 더더욱 없는 가련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부유함"
전부이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참 작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지요. 아무리 돈과 물질을 많이 소유했단들 영혼을 빼고 나면 이 세상에서나 효력이 발생할 숫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는 자기를 비운 영혼을 부유하다고 보는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역설입니다. 세상 것을 탐하거나 움켜쥐지 않은 만큼 세상에서는 빈한하고 초라한 삶을 살지 모르지만, 그의 영혼은 전부이신 하느님을 담을 수 있을 만큼 맑고 투명하게 깨끗이 비워졌기 때문입니다.

대 데레사 성녀의 기도처럼,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어설프게 소유한 세상 물질의 수량을 전부이신 하느님과 비길 수 없지요. 자신을 비운 이는 많건 적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변을 둘러보며 나눌 기회를 찾지요. 그에게 나눔은 선택이 아니라 사용 권리를 부여받은 재물에 딸려오는 의무와도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요엘 2,22).
하느님의 은혜로 풍요와 기쁨이 충만해질 이스라엘을 예언하는 제1독서에서는 이를 전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도 한껏 고조되어 있습니다. 푸르름, 열매, 결실, 가을비, 봄비, 곡식, 가득, 햇포도주, 햇기름, 넘쳐흐름, 한껏 배불리... 얼마나 풍요롭고 기름진 표현들로 넘쳐나는지 독서 말씀에 머무르는 마음도 흐뭇해질 지경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세상의 삶이 당장은 상실과 굶주림으로 짓눌려 있을 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실 축복은 그 눈물을 환희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나누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만이 우리의 일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 14,13).
각자의 현실에 따라 위로가 되기도 하고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할 말씀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 갈 때 "한 일"이 따라온다는 것이 그닥 새삼스런 가르침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일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수확의 날, "행복하다"는 덕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평생 그리워하던 주님과 영원히 얼굴을 마주하는 복된 일치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세상에서 이웃과 나누느라 포기한 것들이 오히려 나를 따라와 나를 보증해 준다고 합니다. 버리고 내놓은 만큼 잃은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하느님 앞에서 부를 쌓고 있던 것이네요.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 것이기에 "좋은 것"입니다. 많건 적건 그분에게서 잠시 사용을 허락받은 우리가 얼마나 주인의 뜻에 맞게 선용하느냐에 따라 그 좋은 것은 더 좋은 것, 더더더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고 쌓고 쓴다면 "좋은 것"의 흐름을 끊고 움켜쥐느라 그 좋은 빛을 가두고 질식시킬 뿐입니다.

모두들 잘 하고 계시겠지만, 주님께서 주신 목숨을 되찾아 가실, 언제일지 모를 그 날이 오기 전, 아니 그 날을 기다리며, 모든 주권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이양 작업부터 시작하면 좋겠지요.

"주님, 제가 가진 것은 모두 당신 것이고 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통해 당신께 되돌려 드립니다.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아멘.

계절이 아낌없이 자신을 나누기에 우리가 풍요로운 한가위 축제를 지내듯이, 우리의 작은 나눔들이 송이송이 결실을 맺어 풍성한 하늘나라 잔칫상을 마련하는 그 복된 날을 그려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개같이 벌어서 짐승처럼 쓰기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6325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9월 24일 월요일 한가위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