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9. 9. 18:36

2019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Jesus departed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night in prayer to Go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self,
and from them he chose Twelve,

 


The Mission of the Twel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모기떼와 원숭이 무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모기떼는 서열이 없습니다. 그냥 피가 있는 곳으로 몰려다닐 뿐입니다. 그러나 원숭이 무리는 서열이 있습니다. 위계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원숭이는 그 무리에 낄 수 없습니다. 모기와 원숭이 가운데 어떤 집단이 더 진화되었을까요? 원숭이 무리입니다. 모기떼는 피가 없으면 자동적으로 흩어집니다. 그러나 원숭이 무리는 바나나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무리 생활 자체에 의미를 둡니다. 질서가 곧 공동체의 결속력이고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별 없고 서열 없는 평등한 공동체가 더 발전된 공동체라 믿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교회 성직자들의 서열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물론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질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위계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땀과 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뽑으시려고 밤새 기도하십니다. 그만큼 신중을 기하여 사도들을 뽑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서시니 그곳에는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와 제자, 그리고 군중을 구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시려고 먼저 질서를 만드신 것입니다. 질서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싸움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고 교회 내에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니 질서에 대한 존중은 곧 그 질서를 세우신 분에 대한 존중입니다. 교계 제도에 대한 존경과 순종은 그것을 만드신 예수님에 대한 존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듯,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는 더 높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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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님께서 오랫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과 모임에 참석하면 늘 마음이 무겁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학창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왜 이렇게 잘난 친구들이 많은지, 또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를 듣다 보면 자존감이 낮아지면서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비교하면서 너무나도 초라한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자기 자신 역시 그들보다 더 나은 부분이 있는데, 내 장점은 보지 않고 단점만 그리고 부정적인 부분만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과 비교를 하려는 마음이 드는 순간 얼른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저 역시 신학생 때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과 비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 운동 잘하는 사람, 그 밖에 여러 곳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모두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면서 저의 형편없음에 대해 한숨을 내쉬곤 했지요. 이런 부분을 영성 지도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이런 방법을 하나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비교하려는 마음이 들 때 얼른 멈춰라.”

숨을 멈추든, 복식호흡을 하면서 숨을 고르든 그 마음을 멈추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 자신을 느낄 수 있고, 내 삶에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노력을 하다 보니 남과 비교하는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발하십니다. 선발하시기 전,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라고 복음 사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사숙고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심사숙고해서 뽑은 열두 제자는 소위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최고라고 여기는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부, 세리, 열혈당원, 심지어 당신을 배반할 사람까지 특별히 선택하십니다.

하느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사람들을 열두 사도로 뽑으셨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선택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기준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비교하면서 힘들어합니다. 그 순간에 잠시 멈춰야 합니다. 주님처럼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비교를 벗어나, 주님의 관점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적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한다(에피쿠로스).



주님 알기.

성지 미사 후에 어떤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께서 제가 쓴 묵상 글을 카톡 메시지로 보내 주셨는데, 너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하더군요. 하지만 그 뒤에 계속해서 묵상 글을 받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묵상 글을 보면 머리가 아파지고 눈도 침침해진다는 것입니다.

‘벌써 노안인가? 하긴 요즘 스마트폰을 많이 하다 보니 이른 나이에도 노안이 온 사람이 많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노안이 오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로 보였습니다. ‘혹시’라는 의문이 생기면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지요.

“평소에 책 안 읽죠?”

맞았습니다. 평소에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A4용지 1장 이상의 묵상 글을 읽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너무 길다고 느껴졌고, 재미를 못 느끼니 머리가 아프고 눈도 침침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언을 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이 읽어야 해요.”

어떤 것에 재미를 느끼려면 우선 많이 알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니 신앙생활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재미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성당에 갈 일만 생기면 머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조금만 더 알려고 노력해보세요. 이 세상에 느낄 수 있는 기쁨과는 비교도 안 될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관계의 꼬챙이

-전삼용신부-


중매로 결혼한 사람들이 이혼율이 낮을까요, 아니면 연애 결혼한 사람들이 이혼율이 낮을까요? 혹은 중매 결혼한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연애 결혼한 사람들이 더 행복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수많은 조사에서 모두 중매결혼한 사람들의 이혼율이 더 낮고 부부간의 애정도 더 깊다는 것입니다.

      미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엡스타인 박사는 100쌍이 넘는 중매결혼을 한 부부와 연애결혼을 한 부부들을 대상으로 8년 간 관찰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엡스타인에 따르면 연애결혼을 한 부부의 애정도는 18개월마다 절반 정도로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중매결혼을 한 부부의 애정도는 신혼 초에는 연애결혼을 한 부부보다 낮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져 결혼 후 5년 정도 됐을 때부터 연애결혼을 한 부부보다 높아지기 시작했고 결혼 10년 후에는 연애결혼을 한 부부보다 두 배 정도에 달했습니다.

      왜 중매결혼이 연애결혼보다 부부사이가 더 좋고 이혼율도 현저하게 낮은 것일까요?

      닭 꼬치 집에 가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잘게 썰어진 꼬치들이 서로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서 꼭 붙어있을 수 있을까요? 꼬치들이 하나로 엮이려면 자신들을 뚫는 막대기가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그 관계를 하나로 엮는 꼬챙이를 필요로 합니다.

      물론 사랑이 그 꼬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 사랑이 그저 호르몬 분비물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연애결혼은 그 꼬챙이를 자신들 몸에서 나오는 호르몬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파민이란 호르몬은 환각물질이기 때문에 계속 분비되면 인간의 사회생활에 장애를 주게 되어 계속 분비되어서는 안 됩니다. 1년 정도 증가하다가 3년이 되면 거의 분비되지 않게 됩니다. 그런 꼬챙이로 지지대를 삼은 관계는 그래서 길어야 3년인 것입니다.

      반면 중매결혼은 중매를 통해 상대의 조건들을 봅니다. 집은 있는지, 직업은 좋은 지, 가정환경은 어떤지를 먼저 살핍니다. 그런 조건들을 보고 결혼을 하니 처음 시작할 때는 큰 애정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그런 조건들의 중요함을 알게 되어 상대가 더욱 고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집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까요? 만약 직업을 잃게 되면 어떻게 할까요? 알고 봤더니 시댁 식구들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면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중매결혼도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가 영원하려면 영원히 지속되는 꼬챙이를 찾아야합니다. 영원하신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그렇다면 관계의 주체가 내가 되지 말고 하느님이 되시게 해야 합니다. 호르몬이나 조건 등을 따지는 관계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런 관계들의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관계에는 항상 ‘의심’이 끼어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내 선택이 틀렸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저 사람과 왜 결혼했지?’라고 선택을 자신이 했다고 믿으면, ‘저 사람 혹시 ... ’라며 의심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절대 당신의 관계를 당신이 주체가 되어 정하시지 않으십니다. 항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물어보십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수장을 정하실 때부터 그러하셨습니다.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실 때도 밤새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물어보셨습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도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도들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습니다.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마티아 사도를 뽑을 때도 자신들이 협의하여 뽑지 않고 그 선택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사도 1,26)

      기도하고 제비를 뽑게 한 이유는 사도들이 자신들의 선택이 아닌 주님의 선택에 모든 것을 걸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사람을 선택하는데 개입시켰다면 당신을 배반할 유다는 뽑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선택이니 옳은 것으로 믿고 그대로 뽑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어느 꼬챙이를 선택해서 쓰고 있나요? 그 꼬챙이의 유효기간은 얼마인가요?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영원합니다. 관계를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맺을 수 있고 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십시오. 그들에게 아무리 잘해줘 봐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지 않을 때는 쉽게 버려질 수 있습니다. 관계의 주체는 늘 주님이 되어야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봉사할 사람들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자신이 뽑는 것보다 이미 뽑혀있는 봉사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항상 자신의 선택을 믿지 말고 하느님의 선택을 믿어야합니다.


-조재형신부-


요즘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힘든데 오셨네요. 한국에서는 어디에 계셨나요?’ 몇 개월은 이런 질문을 받을 것 같습니다. 걷는 걸 좋아해서 여기저기 다니고 있습니다. 한국 음식점이 많아서 먹는 데에 어려움도 없습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체계적으로 운영하였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경험이 많고 성실하셔서 신문 발행에도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거주자 등록증이 나오고, 면허증이 나오면 발품을 팔아야겠지만 새로운 만남을 가지는 즐거움이 생길 겁니다. 어린아이가 힘든 줄 모르는 건 힘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모의 보살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세상의 쓴맛도 보고,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기쁨도 알게 됩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제게도 바람은 불어올 겁니다. 그때는 ‘Carpe Diem’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겁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절망 중에 삶을 포기할 수도 있고, 정해진 삶이기에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은 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배고프다고 미리 밥솥을 열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의 상처도 아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급한 성격에 상처를 만지거나 뜯어 버리면 상처가 더 커질 수도 있고, 덧나기도 합니다. 약간 보기 싫어도, 상처 난 부위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즐겨보는 스포츠도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재미가 있고, 긴장이 있고, 흥미가 있기 마련입니다. 짜릿한 역전의 묘미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어서 스포츠는 한 편의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걱정이 앞서고 지금 눈앞에 있는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외모도 세월 앞에 주름이 늘어가고, 건강도 자신이 없어지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죽음에 대한 걱정도 있습니다. 일이 많아지면 바빠 죽겠다고 합니다. 일이 없으면 따분해서 죽겠다고 합니다. 변하는 걸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꽃놀이가 아름다운 것은 불꽃이 금세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불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불꽃의 화려함과 불꽃의 섬세함을 느끼기 어려울 겁니다. 시들지 않는 꽃은 아름답겠지만 꽃과 나비가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화(造花)이기 때문입니다. 꽃은 피었다가 지게 마련입니다. 벌과 나비는 그런 꽃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생화(生花)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많아지면 밥값을 해서 좋다고 합니다. 일이 적으면 책도 읽고, 친구를 만날 시간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제자들 모두는 각자의 능력과 재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능력과 제자들의 힘은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바로 그 점을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사도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청소년 복지 시설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때였습니다. 당시 시설 운영비며 인건비가 언제나 쪼달렸기에, 연중 치러지던 가장 중요한 행사는 기금 마련을 위한 축제나 바자회였습니다. D-day 1주일 전부터는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같이 살고 있던 초등학교 꼬맹이들이 하교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저를 보고는, 자기들도 돕겠노라고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거의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함께 돕겠다는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 사업, 당신 홀로 충분히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없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도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엄청나고 위대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 시기로 접어드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일이 지속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를 사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절로 부르셨습니다.

 

 그 누군가의 사절은 곧 그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다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합법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에 따르면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파견된 사람’(Apostolos)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목격 증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파견 된 사람’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힘과 개인적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기에 앞서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겸손한 신원 의식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암부르시우스 교부)

 

 오늘도 별 도움 안되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과연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품이 커서 스승이다

 -반영억신부-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죄도 허물도 많고,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도구로 쓰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감사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가6,12)나서 제자들을 선택 하셨는데 그 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격정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에 의해 온화해 질 것입니다. 겁이 많은 필리보와 바르톨로메오,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격이 우울하고 회의적인 토마도 있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사도들 중에도 배교자가 있었습니다. 뽑힌 이들 조차도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남들보다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품이 커서 스승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특별히 기도하신 예수님 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입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오늘 날 우리 사제들도 다양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사제들을 일치시키는 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주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거기에서 기적의 힘이 나왔습니다. 기적의 힘은 사람의 유능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 온전한 의탁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거기에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응답은 곧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을 무릎 쓰고 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10,1).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군중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7-19).”

여기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라는 말에 있는 ‘그들’은 열두 사도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라는 말의 ‘제자들’은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을 이룰 정도로 ‘신자들’이 정말로 많았을까?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이, 즉 신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거의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나버립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이 말에서 ‘이 일’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 때문에 생긴 논쟁을 뜻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면서(요한 6,60) 신자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버린 일은, 즉 신앙을 버린 일은, 오늘날에도 종종 생기는 일입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도, 믿어야 할 교리라면 믿어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온 유다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 지역을 뜻하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은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인 지역을 뜻합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이스라엘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방 민족 사람들까지 많이 몰려들었음을 나타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 빵을 먹은 사람들의 수는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9,14),
예수님의 활동이 처음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인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활동 초기의 인기는 일시적인 ‘거품’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탓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만 찾고 영원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 탓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라는 말을
예수님 입장에서 다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으며 마귀들을 쫓아내셨다.”입니다.
이 말을 간단하게 “예수님께서는 온갖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신 분’입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을 온갖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특히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일을 많이 하셨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가장 많이 괴롭히는 고통이 ‘병고’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자체가 복음 선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은총’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고,
‘치유의 은총’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교회도 명심해야 할 점입니다.
병원이나 여러 가지 복지 시설 등을 운영할 때, 그 일을 선교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되고, 즉 신자를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되고,
그 일들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를, 또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행복을 체험한 사람들이
신앙인이 되는 것은 각자 스스로 선택할 일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었으니 신자가 되어라.” 라고 요구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기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고,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물론 치유의 은총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도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몸의 치유만을 바라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몸의 치유만을 원해서 예수님에게 왔음을 잘 나타내는 말이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쓰기만 했다.”로 해석됩니다.
(그들은 몸의 치유만을 원했고, 그 이상의 것은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쓰기만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권능을 믿긴 했지만,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으로 시작했더라도 참된 믿음의 단계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기복신앙으로 그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복신앙으로는 정말 중요한 것을,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좋은 예가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해서 모두 병을 고쳤는데,
아홉 명은 그냥 가버렸고, 한 사람만 예수님에게 돌아왔습니다(루카 17,11-19).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몸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하는 것으로 그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셔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았습니다.
돌아온 한 사람은 몸의 치유보다 더 큰 은총을,
즉 영혼의 구원을 추구해서 얻은 사람입니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병을 고친 다음에 그냥 떠날 것을 아시면서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좋은 설교와 기도

-이종훈신부-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예수님께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루카 6,18).” 좋은 책을 읽는 것도 그렇지만 좋은 설교를 듣는 것은 기쁨이고 축복이다. 좋은 설교는 머리를 맑게 하고 평화 속에서 가슴을 뜨겁게 혹은 따끔따끔 아프게 한다. 몸 안에 막혀 있던 기의 흐름이 다시 뚫려 힘이 솟는 것처럼 좋은 설교는 영혼에 생기를 돋게 해준다. 다시 도전하고 다시 일어나 걷게 한다.

 

예수님은 어느 훌륭한 선생님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그분의 말씀은 새롭고 권위가 있었으며 치유의 힘이 있었다(마르 1,27). 예수님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있는 설교를 만드셨을까?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9).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그렇게 만나고 그분과 그렇게 가까우셨을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하느님을 얼굴을 맞대고 만나셨을 것이다.

 

기도는 말을 많이 하거나 눈을 감고 오랜 시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친해짐이고 그렇게 그분의 아버지 하느님 안에 머무름이다. 어려운 말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이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우리와는 다른 인격이었지만 그분의 인격은 우리를 당신의 신성으로 이끈다. 그분이 사람이 아니셨다면 그분에게 인격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분과 인간관계를 만들 수 없다. 그분의 인성(人性)은 우리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나아서 친밀하고 사랑하게 한다.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신성(神性)으로 초대한다.

 

좋은 설교는 예수님과의 친밀에서 만들어진다. 그분은 우리가 아니라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친교를 요구하신다. 내가 아니라 그분이 먼저 그러셨다. 그 친밀은 그분이 한국말로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그분 몸의 감촉을 느끼는 것이 더욱 아니다.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사랑해서 나를 잊어버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함이 그것이다. 이를 두고 환각이나 환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용서와 치유와 기쁨의 시간이다.

 

예수님, 좋은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그것은 정신을 맑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고,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며, 어두운 현실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아주 비밀스러운 기쁨을 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무엇이든지 아드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으니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말씀을 잘 알아듣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6,12-19: 열두 제자를 뽑으시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12)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이름 지어 주시기 위해서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를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본보기이다.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로 임명하셨다. 그분은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으시고 어부들(마태 4,18 참조)과 세리들(마태 10,3 참조)을 뽑으셨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재물과 권력과 명예 때문에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사도들은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즉 제자의 신분은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임명하신 다음,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 마귀들을 꾸짖고, 당신께 가까이 오는 환자들을 모두 고쳐주시며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 권능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그분은 영광을 지니신 말씀이셨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19)라고 하고 있다.

 

예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께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뵈올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 실행하여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 12)

-한상우신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세상을
바꿉니다.

기도로
새세상을
엽니다.

예수님의 기도로
탄생된 예수님의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을 선택하여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기도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기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기도의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강렬한 기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도는 희망을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기도의 힘을
진실로 믿습니다.

밤을 세워
기도하는 마음

그 마음이
흐르는 방향에
우리가 있습니다.

기도로 우리를
맞아들이십니다.

기도로 부르시는
그분을 따릅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반에 반드시 거치셔야 할 매우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셨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동고동락할 이들을 뽑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당신 홀로 하시지 않고 사도들과 함께 하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도 선발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첫번째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세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니까 기도는 어디에서나 해도 되지만, 특별한 지향이 있거나 하느님 현존을 장소적으로도 생생히 체험하길 원할 때 의미 있는 장소를 찾습니다. 예수님께는 "산"이 바로 그런 곳이었지요 "산"은 곧 하느님 현존의 장소니까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매순간 우리 곁에 계시니까 언제라도 기도할 수 있지만, 만상이 잠든 고요와 침묵의 순간에 깨어 하느님을 대면하는 "밤"이란 시간 역시 예수님의 절실함을 보여 줍니다. 밤을 꼬박 지새우며 예수님은 하느님 가슴에 기대어 그분의 뜻을 듣고 또 들으십니다.

이윽고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시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는 일시적 또는 간헐적으로 오가는 군중도 있고, 그보다 더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고 배우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 제자들 중에서 오늘 선별되어 "사도"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충만한 완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을 선정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심하며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려 애쓰셨을지 우리는 "산" 그리고 "밤을 새우며"라는 말씀들에서 알아차립니다. 그만큼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기에 공을 들여 숙고하고 경청하고 살피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뽑힌 이들은 하느님과 함께 하신 선택의 열매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됨됨이나 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을 철저히 믿어 주시지요. 심지어 당신을 배반할 이도 그 안에 있고, 또 가장 가까우면서도 위기가 닥치면 나몰라라 부인할 이도 보이지만, 그래도 믿어 주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에 대한 신뢰에는, 당신께서 친히 하신 선택, 당신이 내리신 결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시겠다는 결의 또한 들어 있습니다. 이는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 낸다"(이사 46,4) 하셨던 하느님 목소리의 실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루카 6,17).
하느님 현존 앞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시간을 뒤로 하고 모두 함께 평지로 내려옵니다. 이 위치적 이동은 제도의 꼭대기, 상층부 윗자리에서 다스리기 보다, 같은 눈높이에서, 아니 그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점유한 자리는 사도의 직분이 존재하는한 반드시 고수해야 할 필수 조건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가장 낮은 곳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니까요.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루카 6,19).
격려이고 사랑이고 권고인 그분의 말씀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권위로 군중을 사로잡습니다. 만신창이 생의 밑바닥에서 병든 이들을 끌어올려 되살리는 치유와 구마 기적 역시 군중을 매료시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지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높은 곳에 따로 머무르시지 않고 친히 평지로 자신을 낮추어 내려오신 하느님을 만질 수 있습니다. 접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 역시 기도 안에서 "감히" 하느님을 부를 수 있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위치를 이동하시면서까지 낮은 곳으로 오셔서 이를 허용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이천 년 전 그들처럼 살아계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질 수는 없더라도 기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만질 수 있는 하느님은 물리적 시간과 공간에서가 아니라 부서지고 낮추어진 영혼 안에 들어오셔서 당신을 만지도록 허락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감히 만질 수 없는 죄인인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갈망에 헐떡이며 팔을 한껏 뻗을 때, 우리의 손길이 그분의 터치와 만나 합해지고 일치에로 잠겨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루카 6,19) 우리를 고치시고 씻으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곧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콜로새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콜로 2,10).
세상은 사도를 얻게 되어, 예수님을 눈높이에서 모시게 되어, 하느님을 만질 수 있게 되어 충만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쳐지고 씻겨지고 거룩해진 우리가 곧 예수님의 충만함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몸에 새기는 할례로 하느님 백성이라 자부하지만 우리는 영혼에 선명히 새겨진 "그리스도의 할례"(콜로 2,11)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사랑의 불길로, 갈망의 인두로 새겨진 할례 자국은 그분 안에서 그분과 온전히 하나 되어 누리는 충만함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더,더,더 목마르게 하고 열망하게 들쑤실 것입니다.

오늘 뽑힌 사도의 수처럼 열둘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지파를 상징하는 완전한 숫자이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충만함을 더이상 숫자에 기대지 않습니다. 단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예수님께서 피를 토하듯 고심하며 선택한 우리들은 그 자체로 충만한 열매들입니다. 저 높은 곳에서 온갖 기득권을 고고히 따로 누리며 머물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낮은 곳으로 내려와 비천한 자리를 다투어 점유한다면, 행여 예수님을 놓칠세라 눈길을 떼지 않고 팔을 뻗어 그분을 만지려 애 쓴다면, 우리도 저 약하디 약한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이로서 그분과 충만함에 이를 것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충만해진 사랑하는 벗님, 주님이 밤샘기도로 얻은 귀한 사도인 벗님, 이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그분과 함께 하늘 나라를 선포합시다.


오르고 내려오는 기도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6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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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