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루가 6,6-11)
“I ask you,
is it lawful to do good on the sabbath
rather than to do evil,
to save life rather than to destroy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게 서 있게 하려고 가르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시고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나라에서 영어 공부를 10년을 해도 막상 외국인과 대화를 하려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법 위주로 공부를 하였기에 그렇습니다. 문법보다는 회화에 더 비중을 두는 나라 사람들은 1년만 공부해도 어렵지 않게 영어를 구사합니다. 문법은 영어를 잘하려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평가로 이어질 때는 오히려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법으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율법에 묶어 놓고 다른 사람들도 속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일으키시어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아닌지만 살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좋은지, 죽이는 것이 좋은지 물어보십니다. 안식일 법의 정신과 목적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법의 정신을 잃은 이들이었기에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앞에 세우시고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법에 속박된 이를 해방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자유로우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이미 당신이 누군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율법에 속박되지 않지만 백성은 속박됩니다. 내가 아직 세속의 자녀라 믿으면 율법에 속박되고 주눅 듭니다. 그것을 지켜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 믿으면 율법에서 자유롭습니다. 법을 지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먼저 언어를 익힌 다음에 학교에 가서 문법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라 믿어야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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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매우 불안한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익숙해졌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도 별 이야기 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소리를 지릅니다.
“라이트 켜!”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해가 쨍쨍 내리쬐는 벌건 대낮에 왜 라이트를 켜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졸다가 눈을 떠보니 너무 어두워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초보라서 터널에 들어와도 라이트를 켜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자신만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나의 색안경 색깔은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안경의 색이 어두울수록 세상은 전부 어둡고, 칙칙하게 보일 것이고, 안경 색이 분홍빛이면 세상은 분홍빛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 안경 색이 우리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색깔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뀝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실 기적은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도 마음을 돌이켜 믿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기적의 힘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둡고 칙칙한 색안경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어서 기적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고, 흠집을 찾기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날로, 당연히 좋은 일을 해야 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색안경 때문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는 것은 아주 평범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는 손뿐 아니라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색안경을 끼고서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오그라든 마음을 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데 주저하게 만드는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뻗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분명한 것은 오그라든 손을 뻗듯이, 오그라든 마음을 쭉 뻗을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편지를 쓸 때는, 상대방이 나보다 조금 아랫사람일 경우에 가장 잘 써진다.”
평생 많은 편지를 썼던 것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윗사람에게 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이면 단어 하나에도 신경 써서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도 길어지고 문장 역시 평소보다 더 많아집니다. 하지만 친구나 후배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편안하고 또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에 수다를 떨 듯이 글을 쓰게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윗사람에게는 신경 써서 쓸 글을 보내고 나서도 후회가 들 때가 많고, 편한 사람에게 보낸 글에 대해서는 별로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질 때 잘 알던 사람인가요, 아니면 전혀 모르는 사람인가요? 분명히 잘 알았고 또 친했지만,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인해 틀어지지 않았습니까? 바로 나 자신이 상대방을 무조건 편하고 쉽게만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시작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친하고 편한 사람이라고 해도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더 관심과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어디까지 생각해야 하는가?
-전삼용신부-
우리나라에서 국제기구 수장을 처음 맡은 사람은 반기문 UN 총장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보다 더 빨리 가장 유력한 UN 총장이 있었는데, 당시 세계보건기구(WHO) 총장을 맡고 있었던 이종욱 사무총장이 있었습니다. 2006년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거의 확실하게 UN 사무총장에도 당선되었을 인물입니다.
그분이 가톨릭교회와도 관련이 있는 것은 의학 공부를 할 때 의왕의 라자로 마을에서 나병환자들을 돌본 첫 번째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일본 천주교 봉사자인 레이코 여사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분은 레이코 여사와 함께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인 사모아로 건너가 역시 한센병 치료를 위해 전력투구합니다. 그 곳에서 얻은 별명이 “아시아의 슈바이처”였습니다. 그는 23년간 세계 보건기구에서 활동하면서 서태평양 지역의 소아마비 발생률을 현저하게 줄이는 백신을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덕에 “백신의 황제”라는 칭호까지 얻게 됩니다.
2003년 WHO 사무총장으로 당선되며 자신이 숭고한 사상이 있어서 이곳에 들어왔던 것이 아니고 그저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서였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는 숭고한 사상대신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옳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행동하는 것입니다.
일 년 중 150일 출장 30만 km의 비행을 하였는데,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습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이전의 총장들과는 다르게 항상 이코노미 이등석 좌석을 이용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성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지 결정하는 데까지만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취임과 함께 내건 공약은 2년 내로 3백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원들은 현 예산으로는 불가능한 공약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듯한 핑계가 생기지. 우리는 이 일이 과연 옳은 일이고 인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돼.”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백만 명에게밖에 백신을 공급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때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실패는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
그는 아내에게 아주 작은 아파트 한 채만 남겨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빌게이츠도 그의 이름만 듣고 선뜻 얼마든 지원하겠다고 했듯, 그는 지금도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참조: ‘Man of action’, EBS 지식채널, 유튜브]
현대는 생각중독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위한 생각이 아니라 왜 옳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핑계를 찾는 것에 생각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서 하느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원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이종욱 총장은 생각을 어디까지 쓰면 되는지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판단이 되면 더 이상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행동만 필요할 뿐입니다. 더 이상의 생각은 이제 그 옳은 일을 하지 않게 만드는 핑계를 양산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당 한 가운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그를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그들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쯤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이 거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옳고 그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옳으면 그냥 행동하는 분이셨습니다. 더 이상의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생각이 좋은 데 쓰일 수도 있고 나쁜 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쁜 데 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더 이상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와는 뱀과 계속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계속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해지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옳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아무 생각 없이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연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안 이후의 생각은 다 악한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조재형신부-
검색하니 제가 사는 지역에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상영되는 영화와 상영시간이 검색되었습니다. 조금 멀었지만 걸어서 영화관엘 갔습니다. 오는 중에 비가 내려서 건물 처마 밑에 잠시 서 있었습니다. 유대인 거리여서인지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한 유대인이 제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은 우산이 있으니 버스 정거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습니다. 모자를 쓴 유대인과 처음 대화를 하였고, 친절을 베풀어 준 유대인도 처음 만났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착한 유대인도 있었습니다.
명상하는 사람이 늘 분심과 잡념이 들어서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을 찾아서 명상을 잘하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스승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명상하는 중에 원숭이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자는 명상 중에 원숭이 생각한 적이 없기에 스승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명상을 시작하면서 계속 원숭이 생각이 났습니다. ‘왜 스승은 그 이야기 했을까? 원숭이와 나는 무슨 무슨 관계일까? 원숭이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명상이 힘들어진 제자는 스승에게 찾아가서 다시 질문했습니다. ‘원숭이 생각 때문에 명상이 잘 안 됩니다.’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원숭이만 생각하세요.’ 명상 중에 원숭이 생각만 했던 제자는 스승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명상을 시작하면서 원숭이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세계적인 명상의 대가들도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고 합니다. 명상이 힘들었고, 명상하는 이유를 몰랐고, 명상하는 중에 몸이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명상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명상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몸이 피곤할 때도 있고, 더 자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0년 넘게 새벽에 일어나다 보니 습관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분을 얻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리를 챙기려고 합니다. 명분과 실리를 위해서 다양한 이유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율법준수라는 명분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어기면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릴 수 있는 실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당리당략을 위해서 명분과 실리를 찾는 정치인들과 비슷합니다. 그들의 심중에는 국민은 없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 능력, 직책, 힘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진실과 정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다른 어떤 법과 질서보다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리는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깨닫고,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영원한 곳을 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착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십시오. 악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으십시오. 손을 내밀어 뻗으면 고침받습니다!
-양승국신부-
유다인들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하게, 글자 한자 한자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율법, 특히 안식일법을 준수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자부심을 지니는 안식일 법규는 주로 ‘~하라!’가 아니라 ‘~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나열되고 있습니다.
안식일 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세칙들을 제시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습니다. ‘장로들의 전승’에 따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대표적인 노동 행위는 탈곡 작업이었습니다.
또한 응급환자가 아니고서는 병자에 대한 치료 행위도 엄하게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아파도 안식일을 피해 아파야 하니, 참으로 야박하고 비인간적인 안식일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민족의 영도자,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기회 닿을 때 마다, 자신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법을 보란듯이 침해하고 파기하니, 유다인들의 느꼈던 좌절감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자연스레 예수님을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설교를 마치신 다음,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아니나다를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매의 눈으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존경과 흠모의 시선이 아니라 여차하면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어떻게 하면 그분을 올가미에 옭아맬 수 있을까 고민고민하며,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악한 마음을 즉시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 율법 학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그 말씀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골이 잔뜩 났지만, 말문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댑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복음 6장 8~9절)
이 흥미로운 장면에서는 새포도주이자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권위와 낡은 부대로서 형식과 허울만 남은 율법의 준수가 대결구도를 이룹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판정승이 아니라, 1라운드 KO승을 거두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감하게도 낡고 고리타분한 과거의 안식일 법을 과감히 파기하십니다. 대신 인간성 회복을 위한 새로운 안식일 법을 제시하십니다. 허술하고 약점 많은 과거의 안식일 법을 보완하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원래 유다인들에게 안식일은 손가락 하나 꼼짝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안식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업적과 자비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선행을 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축제의 날이고 잔치를 벌이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안식일의 의미가 아주 소극적인 형태로 희석되고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누리는 날, 자신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한 주간 동안 행한 일에 기뻐하는 날, 사랑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날입니다. 이런 안식일에 고통받고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는 더 없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손을 뻗어라.’ 성한 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손이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자주 손을 뻗으십시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으십시오. 이웃을 돕고, 과부를 보호하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이가 해를 입지 않도록 빼내주기 위해 손을 뻗으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으십시오. 손을 내밀어 뻗으면 고침받습니다. 예로보암은 우상을 숭배했다가 손이 굳었지만, 하느님께 간청하자 다시 펴졌습니다.”(암부로시우스 교부)

굽은 마음을 퍼라
-반영억신부-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가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가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자신의 뜻이 이루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야 하는 것이 삶이고.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이현주).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에 있어서 어느 판단을 따라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입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안식일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여기서 “합당하냐?” 라는 질문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 라는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기를
바라시겠느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시겠느냐?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시겠느냐?
죽이는 일을 하기를 바라시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정답은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마르 3,4).
답을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답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들어 있는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자신이 없어서
침묵을 지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한 답은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입니다.
(좋은 일이든 남을 해치는 일이든, 목숨을 구하는 일이든 죽이는 일이든 간에,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십계명에 있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8-10; 신명 5,12-14ㄴ).”
(“그렇긴 한데,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겠느냐?” 라는 것이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에만 집착해서
정말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율법주의’이고,
하느님께서 그런 계명을 주신 이유를 잘 생각해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탈출기에 있는 십계명에는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
있지만(탈출 20,11), 탈출기 23장을 보면, “너희 소와 나귀가 쉬고,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설명이 있습니다(탈출 23,12).
그리고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4ㄷ-15).”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되는 이유는 종들도(힘없고 약한 소외계층 사람들도)
쉬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가 구약성경의 설명입니다.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쉬어야 ‘나의 종들도’ 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인권을 보장해 주는 날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안식일을 어긴 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킨 일입니다.
< 만일에 어떤 공장의 사장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쉬고,
주일미사 참례하려고 성당에 가면서,
노동자들에게는 주일에도 일을 하라고 지시했다면,
그리고 노동자들은 해고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사장이 지시한 대로 주일에도
일을 했다면, 주일을 안 지킨 사람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그 사장입니다.
(고해성사를 보아야 할 사람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그 사장입니다.)
그 사장이 제대로 주일을 지키고 싶었다면,
전체 노동자들을 모두 쉬게 해 주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노동자들 중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있다면,
또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일을 시켜도 되나?
안 됩니다. 그것은 십계명의 정신에 위배됩니다.
하느님께서 쉬게 해 주라고 명령한 ‘남종과 여종’ 가운데에는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들, 즉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따지지 말고, 그들을 쉬게 해 주라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단 하루도 공장을 멈출 수 없는 사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장도 노동자들도 주일에 쉴 수가 없다면?
그런 때에는 교대근무라도 하든지 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어떻든 사장만 쉬고 노동자들은 쉬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일, 즉 죄를 짓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안식일(주일)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살리는 일도 안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따라서 그것은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주일)을 크게 어기는 것입니다.
주일은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날입니다.
(‘해도 되는 날’이 아니라, ‘해야 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천 여 년 전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기 전에
지금의 우리 자신의 형식적인 신앙생활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주일미사 참례만 하면 그것으로 주일을 지킨 것인가?
미사 후에 하루 종일,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면서 즐기고 놀았다면,
주일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라는 계명을
혹시 “주일 오전 한 시간만 거룩히 지내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주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주일 하루를 자기 마음대로 지낼 권한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렇게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말만 하면,
숨이 막혀서 어떻게 살 수 있나?” 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음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신앙인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결코 고지식한 일도 아니고 융통성 없는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슬픔
-이종훈신부-
몇 해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 오셨을 때 방한기간 내내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셨고,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 중 한 분을 만나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셨다. 정치적으로 아주 예민했지만 그분에게는 그런 것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아보였다. 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 뭉클했지만 교황님을 환호하며 맞았던 이들 중에는 마음 불편했던 교우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상황에서 한 국가의 원수이지만 그 이전에 한 사람의 사제로서 그런 행동을 한 이유로 하신 말씀은 명언이 되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그의 탓이든 남의 탓이든 혹은 우리의 탓이든 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창조주 하느님의 고통이다.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은 그나 나나 하느님이나 모두 하나다. 그 탓에 대한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안식일에는 세상과 인간을 지어 만드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찬미한다. 그분의 쉼은 곧 완성이었기 때문이다(창세 2,2-3). 오그라든 든 손을 보면서 어떻게 창조의 완성을 말하고 하느님을 공경 찬미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러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마태 5,17). 안식일에는 좋은 일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당하다(루카 6,9). 그의 손이 온전해져야 그 안에 시작하신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완성된다. 그래야 하느님은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 좋아하시며 엿새 날 일을 마무리하시고(창세 1,31) 쉬실 수 있다.
인간과 피조물 고통으로 신음하는 모습 앞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어떤 마음을 갖나? 누구 때문인가 묻고 그를 향해 단죄와 심판 나아가 저주의 독설을 퍼붓지는 않나? 그 고통에 과연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어서 그렇게 분노하나? 그런데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이런 율법적인 추론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 그분의 슬픔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한 처음 세상을 하나하나 지어 만드신 그 때처럼 기쁘셔야 했다. 하느님이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회복되어야 했다. 당신의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그래야 했다.
예수님, 아버지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하셨으니 당신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권력자들의 죽음의 위협보다는 아버지 하느님이 슬퍼하심이 당신에겐 더 큰 두려움이고 고통이었을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는 하느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도 뭔가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남은 하느님이 그것을 가장 작은이들에게 거저 주라는 분부라고 알아듣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게 인도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6,6-11: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치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는 율법에는 분명히 금지된 사항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달랐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과 규칙에 매여 있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현재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데 그 판단의 기준이 있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그들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9절)
이 말씀은 사람을 제도라는 법에 묶어놓으려고 하는 그들을 공박하시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참 뜻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관례와 규칙보다 사람의 생명을 돕는 일과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참으로 지혜로운 질문이다. 만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에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3) 그분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기 위해 내밀었던 손(창세 3,6)을 선행의 건강한 힘으로 회복시켜주셨다. 범죄를 저질러 마비된 손이 선행으로 치유되었다.
“손을 뻗어라.”(10절)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든 손을 핀다는 것이고, 이제는 자주 손을 뻗어야 한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고,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사람이 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어야 한다(이사 1,15.17 참조). 손을 내밀어 뻗으면 치유를 받는다.
우리는 삶의 모든 표준을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서로의 인격존중과 자유와 선행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진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나 자신만을 규례와 규정에 매어놓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듯이 지금 오늘을 사는 나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죽이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모상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자.
.손을 뻗어라.(루카 6, 10)
-한상우신부-
들꽃또한
들꽃들끼리
어우러지며
하늘을 향해
꽃잎을 펼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이와같이
뻗어나가고
펼쳐나갑니다.
마주잡아야 할
손이 있지만
아프게
오그라들어 편하게
잡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그라들었기에
아픈 이를
일으켜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손이
서로의 손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그라든
우리의 손을 펴서
주님께로 뻗어
나가는 체험입니다.
마주잡은
주님과 함께
빛 안에서
걸어나가는 변화입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하늘의 시간은
마음을 펴서
주님을 향하는
기도입니다.
닫히고 열리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오그라든
손을 펴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란 어우러지며
펼쳐나가고
뻗어나가는
지금 여기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안식일 논쟁이 이어집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있던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예수님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주변에는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사회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어 가난에 찌들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또 한편으론 손을 내밀어 다른 사람에게 베풀줄 모르고 자기 앞가름만 하는 왜곡된 마음의 소유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예수님께서 그를 가운데로 부르심으로써 율법 학자들, 바리사이들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십니다. '가운데'와 '서다'는 공개적으로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의미의 단어들입니다. 이로써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 뿐만 아니라 예수님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서시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결코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으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예수님께는 그를 위해 무언가 하는 것이 곧 좋은 일이고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안식일이라는 명목으로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이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불행히도 그들은 안식일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로 여기니, 당연히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지요. 예수님께 안식일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날"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안식일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이어져야 하지요. 사랑한다면 멈추고 미루고 외면하고 '음, 다음 기회에...' 하며 뒷걸음질 칠 수 없습니다.
"손을 뻗어라"(루카 6,10).
예수님은 세상 창조 때 아버지께서 하셨던 사랑을 이어받아 말씀으로 그를 재창조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말씀으로 하시지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적극적으로 손을 뻗도록 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치유자의 말씀과 환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사실 그 환자는 손이 오그라든 자신의 신세만 한탄하였지 적극적으로 나눔의 삶은 살 생각조차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른손이 오그라들었던 이에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에게도 유효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손이 불편했던 이는 손을 뻗으라는 말씀에 순명해 치유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언젠가 예수님께 손을 뻗어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 것이니, 결국 이 말씀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자신감 넘치고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내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콜로 1,29).
사도가 목숨을 걸고 전하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느님의 신비이십니다. 말씀이신 그분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콜로 1,26)이십니다. 그 신비가 한때 열혈 유다교 신봉자였던 바오로 안에서 작용하여 "교회를 위해 고난을 겪으며 기뻐하는"(콜로 1,24 참조) 존재로 탈바꿈시킵니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무엇을 함으로써, 곧 그리스도의 환난을 자기 육신으로 채우면서까지 하느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콜로 1,26)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은 규정과 관습이 정해 놓은 금지 명령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언가를 더,더,더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마다 않고 그 사랑을 완수하고자 고분분투한 바오로 사도의 사랑, 인류의 속량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한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세상 구원을 위해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놓으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한계를 모르는 사랑의 속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께서 매순간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답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명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핵심을 찌르시는 주님
-김찬선신부-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이가 저한테 달려와서는 느닷없이
관심을 받고 싶어서 왔다는 뜻으로 얘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약간 놀라며 진심으로 한 말이라면
참 솔직한 아이구나 라는 생각도 했고 걱정이 되어
‘너 지금 관심을 받지 못해서 그러는 거니?’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기에 그러면 집에서 관심을 못 받느냐고 했더니
그것은 아니라고 하고 학교에서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거였습니다.
그때 이 아이를 보면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데도
관심을 받고 싶고 더 받고 싶은 것.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외로움이라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외로움만을 생각기 쉬운데
독거노인과 같은 외로움도 처절하지만 많은 사람 가운데 있어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외로움도 처절하고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어쩌면 이것이 더 큰 외로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관심 가운데 버려질까봐 은연중에 두려움이 있고
그래서 관심 가운데 있어도 관심을 더 받고자 합니다.
그러니 일생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얼마나 불쌍하고 더 나아가 불행합니까?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일생을 산 사람이 불행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불행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행불행에 대해 체념했거나
아무 관심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경지에 오른 것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어쩌면 평생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불구자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고 사람들 가운데 서게 되고, 관심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이 사람은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로 나가 설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도망쳤을 것이며
그 이전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계셨기에 사람들 있는 곳에 온 것이고,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뵈러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무시하지 않을 한 사람만 있어도, 더 나아가
나를 인정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손 불구자는 사람들이 모인 회당에 나온 것인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람들 한 가운데 나오라고 하십니다.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찌 하나 지켜보자
예수님께서는 보란 듯이 그를 가운데로 나오게 하여 치유고자 하십니다.
다른 때는 당신의 치유의 사실을 소문내지 말라고 엄명하시는 분이지만
오늘은 보란 듯이, 아니 보라고 일부로 가운데 세우시고 고쳐주시는 겁니다.
안식일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주객이 전도된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하기보다는 늘 남의 트집만 잡는 교만한 사람들에게
짐을 덜어주기보다는 늘 짐을 얹어주는 가혹한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고집하는 사랑 없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하시려고 핵심을 찌르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늘 핵심을 찌르시는 분이십니다.
자주 핵심을 놓치고 중요치 않은 것에 집착하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우리에게 사람이 안식일보다 중요하고
사랑이 그 어떠한 행위보다 중요하다는 핵심을 콕 찌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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