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16일 연중 제 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9. 15. 18:24

2019년 9월 16일 연중 제 4주간 월요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의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하였던 신자들을 용서하며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단을 거슬러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하였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훗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하였다.

☆☆☆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거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루가 7,6-7)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Therefore, I did not consider myself worthy to come to you;
but say the word and let my servant be healed.



The Healing of a Centurion's Sla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말을 들으시고 믿음에 감탄하시며 그의 노예를 고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떤 아이가 반찬 투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러려면 밥을 먹지 말라고 숟가락을 빼앗았습니다. 아이는 배고프고 서러워 울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며칠 뒤 아이는 가족을 위하여 노동을 하시는 아버지 손발의 굳은살과 어머니의 거칠어지고 휘어진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투정 부린 그 음식이 부모님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이는 더 이상 반찬 투정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사랑에 대한 확신은 그분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얻어집니다. 보려고 해야 보입니다. 보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이런 노력을 통하여 알게 되듯,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체 성혈이 진정 하느님의 살과 피가 되어 내 삶을 변화시키게 하려면 공부와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체를 모실 때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그만큼 노력한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예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곡히 청하는 로마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방 종교를 믿던 군인이 예수님에 대한 그리 큰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까요?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에 유다인의 원로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밑에 있는 사람에게 시키면 시킨 대로 하듯, 예수님께서도 굳이 직접 오실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하시라고 하는 것처럼, 그는 묵상을 많이 한 경건한 사람입니다.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시며 그를 칭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공정하십니다. 유다인, 이방인의 구별 없이 더 노력하는 사람에게 더 큰 믿음을 상으로 내리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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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도하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좋아하는 책을 읽다가도 졸고 있고, 심지어 고해소에서도 사람들이 없을 때는 저도 모르게 졸고 있습니다. 잠을 덜 자는 것도 아닙니다. 예전보다도 더 많이 자는데도 불구하고 피곤함이 계속해서 밀려듭니다.

저는 이 피곤함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금방 알아챘습니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일이 많아서 그럴까요? 하는 일의 종류는 많지만 그렇게 피곤할 정도는 아닙니다. 어디가 아파서 피곤한 것일까요? 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피곤함을 느낄까요?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운동하는 것이 귀찮아서 한동안 전혀 운동하지 않았습니다. 여름이라 너무 덥다고, 또 장마철에는 비가 온다는 이유로 며칠씩 운동을 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운동하지 않으니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약간의 집중만 해도 피곤함을 쉽게 느꼈던 것이지요.

이런 체험은 처음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도 매일 하던 운동을 하지 않아서 어느 날 갑자기 허리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했던 일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매일 새벽에 25Km 이상의 거리를 자전거로 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더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을 넘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힘들어도 참고 견뎠습니다. 지금 현재 피곤함은 거의 사라졌고 힘차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운동에 대한 믿음이 있으므로 힘든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도 이렇습니다. 그 믿음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도 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크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분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말합니다.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스스로 자격 없는 자라고 고백하는 겸손이 그를 합당한 사람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주님을 모실 만한 곳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그럼으로써 더욱 영예롭고 주님을 모실 만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님 몸소 그의 집으로 가지 않았어도, 그분의 치유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굳은 믿음을 통한 겸손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굳은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방향만을 따른다(에우리피데스).



아이들에 대한 신앙교육.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에 대한 신앙교육을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있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뜻에 맞춰서 강압적으로 교육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부모의 모습에 감응을 받고 주님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최고의 신앙교육이 어디에 있을까요?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하는 교육에서 이제는 벗어나 스스로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하겠습니다. 아이의 모습이 변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 자신들 역시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이웃을 먼저 설득하라

-전삼용신부-


 전쟁터의 바닷가에서 더위에 군복 상의를 벗어놓고 진지를 구축하던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옷을 바다로 날려 버렸습니다. 때마침 적기가 출현하여 공습경보가 울렸고 상관은 즉시 참호로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병은 옷을 건지기 위해 상관의 명령을 뒤로하고 달려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무사히 겉옷을 건져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병사는 명령 불복종 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게 되고 마지막 진술을 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잘못을 시인한 이 사병은 가만히 그 군복 주머니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진은 제게 마지막 남은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제 생명보다 귀한 사진입니다. 명령을 어기는 줄 알았지만 저는 이 사진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를 벌해 주십시오.”

      재판정에 한 동안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재판장이 마지막 판결을 내립니다.

      “어머니를 이토록 사랑하는 병사는 조국도 그렇게 사랑할 것입니다. 무죄를 선고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판사의 판결은 공정한 것이었을까요? 그의 마음 안엔 ‘결국 사랑은 하나다’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께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내가 실제로 하느님을 대할 모습과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로마인들을 싫어했습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접촉을 해서도 안 되고 그 집에 들어가도 몸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을 변호하는 이들이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백인대장이 유다인들에게 얼마나 명망이 높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백인대장을 위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증언을 들이시고 그의 종을 고쳐주시기 위해 길을 나서셨습니다.

      백인대장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속국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종교를 잘 믿도록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 많은 백인대장을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랑과 겸손함의 사람이었습니다. 속국의 백성들을 사랑했고, 주님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시고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이의 청은 주님께서 무엇이든 들어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만은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꼭 한 번만 만나자고 합니다. 저도 시간의 한계가 있는지라 그 사람을 만나야할지, 거절해야 할지 분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스스로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결코 그 사람의 인품을 좋게 판단할 수는 없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했다면 이웃에게도 사랑받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청할 때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부활에 대한 증언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목격한 제자들이의 몫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다녔던 이들의 증언이기 때문에 예수님 본인의 증언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나 자신이 직접 설득하려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증언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 나를 증언해 줄 사람들은 내가 함께 살아온 나의 이웃들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도 큰 태풍이 있었고, 이곳에도 태풍이 있었습니다. 태풍이 불면 나무들이 큰 소리로 웁니다. 전선들도 소리를 냅니다. 바람이 먼저 유리창에 인사합니다. 새들은 모두 안전한 보금자리로 찾아갑니다. 태풍은 지구가 살아있다는 표징입니다. 태풍이 뜻하지 않는 피해를 주지만, 태풍은 살아있는 지구가 큰 숨을 쉬는 겁니다. 태풍이 지난 하늘은 더욱 푸르고, 태풍이 지나면 보금자리에 숨어있던 새들도 파란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아무리 큰 태풍도 이삼일이면 지나갑니다. 태풍은 바람이고, 바람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태풍이 불곤 합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라는 태풍이 있습니다. 작은 근심이 큰 근심으로 자라는 걸 봅니다. 근심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 큰 벽을 쌓게 됩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태풍이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얻으려다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손등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항아리 안에 있는 과일을 움켜쥔 원숭이는 결코 항아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원숭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신기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未得先愁失(미득선수실) 當歡已作悲(당환이작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걱정과 근심으로 기쁨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걱정과 근심의 태풍을 잠재우는 길을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백인 대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삶은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병든 종을 내치지 않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은 피부색, 신분, 학식에 따라서 커지는 것이 아님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시로페니키아 여인, 백인 대장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분들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 해도, 교만과 욕심에 사로잡혀있으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예전에 미사 복사를 서시던 요셉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는 성체를 영하면 몸을 많이 떠셨습니다. 걱정도 되고, 의아한 마음에 어르신 왜 몸을 떠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르신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제 몸에 오시니 몸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저는 어르신의 대답을 들으면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매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매일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면서 할아버지처럼 진한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무능한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의 깊이와 넓이를 잊지 않는 겸손!

-양승국신부- 

 

백인대장 소유 노예의 치유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자주 강조하신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보기 드문 이방인 장교가 한 명 있었습니다. 계급은 백인대장이었습니다. 백인대정은 로마 군사 조직 안에서 나름 힘과 권위를 지녔던 계급이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당시 로마는 스코틀랜드 산악 지방에서 시작해서 오늘 날 이란 동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파르티아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대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경 도시였던 카파르나움에는 세관과 국경 수비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군대 안에 여러 국적의 용병들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시리아인, 트라키아인, 게르마니아인, 갈리아인 등이 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이방인 출신이지만 동시에 로마군의 장교 신분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유다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인대장은 비록 이교도였지만 출중한 성품과 인성을 갖춘 인물로서, 유다인들로부터도 칭송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루카 복음 7장 4~5절)

 

 이처럼 백인대장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지극한 겸손의 덕까지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신원을 늘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부정하고 죄인인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 청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 역시 유다인들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오는 것으로 확신한 나머지, 유다 원로들을 통해 자기 소유 노예의 병의 치유를 청했던 것입니다.

 

 유다 원로들을 통해 백인대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백인대장 집으로 향하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집을 향해 다가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백인대장은 너무나 행복하고 감격했지만, 동시에 크게 황송스러웠던 나머지, 2차 사절단으로 자신의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복음 7장 6~7절)

 

 우리 가톨릭 교회는 이 겸손한 백인대장, 유다 원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신앙을 소유했던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을 미사 전례 안에 수용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매 미사 때 마다, 탁월한 신앙인이었던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을 반복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진정한 신앙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지극히 무익하고 무능한 우리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의 깊이와 넓이를 잊지 않는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광대무변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들이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백인대장이 외친 겸손한 기도 뿐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있는 심연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결국 무능하고 연약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광대무변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상봉하고자 발버둥치는 일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양승국신부- 

 

“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 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한 가지도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내일은 잘해야지’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 불만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제집에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큰 힘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능력은 늘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물론“예수님은 연민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때로는 그자가 믿든지 말든지 일방적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하십니다..그러나 우리 편에서 신앙이 합쳐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창조 역사가 일어납니다”(김정원신부). 그러니 열린 마음과 겸손으로 그분의 능력을 믿고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는 행동하는 데서 맛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송영진신부-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루카 7,2-5)”

이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백인대장’은 분명히 이방인입니다.
원로들의 말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있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귀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믿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혈통 같은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 두 번째 조건은 ‘믿음의 실천’입니다(마태 7,2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할례 받은 이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할례 받지 않은 이들도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로마 3,29-30).”
오늘날의 우리 시각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특별한 일로 안 보이지만,
당시에 제자들 입장에서는, 또는 유대계 신자들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고, 특별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6-10).”

이 이야기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입니다.
백인대장이 자기가 직접 예수님께 오지 않고 원로들과 친구들을 보낸 것은
이방인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존중한 일인데,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라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 말입니다.
여기서 그의 ‘낮춤’은, 자기의 위치보다 더 낮은 위치로 자기를 낮춘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원래 낮은 존재라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 ‘낮춤’입니다.
즉 주님 앞에서 자기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 ‘낮춤’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겸손은 중요한 의미가 있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그리고 그의 겸손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주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할 때에는 그처럼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간청’은 요구가 아닙니다.
말로는 주님께 자비를 간청하면서도, 그 태도는 마치 맡겨놓은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대단히 오만한 일, 옳지 않은 일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은 청원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기본자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백인대장의 ‘믿음’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라는 그의 말은,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 ‘병이라는 것’이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그는 단순히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는데, 사실 그런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이스라엘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없었습니다.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믿은 첫 번째 인물입니다.
(사도들도 그 당시에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성체 직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을 본받아서,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주님은 한 말씀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주님은 하느님이신 분”
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 겸손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겸손이 부각되는 때는 고해성사인데,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고해실에 들어가면 죄인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간청해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 고해사제가 따끔한 훈계를 할 수도 있는데,
훈계를 한다면 그 말을 새겨들어야 하고,
또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성실하게 실행해야 합니다.
고해사제가 자기보다 어리더라도, 학교 후배라도, 집안의 동생뻘이라도,
그런 것들은 일체 생각하면 안 되고, 목자를 찾는 양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고해실에서는 누구든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로 느껴져서 못하겠다면?
그러면 그것은 고해성사의 은총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것이고,
자기가 거부해서 은총을 못 받게 됩니다.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고해사제도
다른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볼 때에는 역시 한 사람의 죄인이 될 뿐입니다.
선배 사제가 후배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면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고, 사제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7,1-10: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 한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로마의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고쳐 주십사고 청한다. 그 종은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쳐주실 수 있는 병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이 종은 치명적인 욕정으로 병들었거나 세속의 노예로 묶여 주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고 계시다. 하느님을 모르는 그래서 하느님과 거리가 먼 이방민족들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백인대장을 칭찬하고 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4-5) 주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정신을 인정해 주셨다. 아직 교회가 탄생하기 이전에 회당을 지어 주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쓸 교회도 더욱 잘 지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회당을 지었지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신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6-7)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

 

백인대장의 이 말은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의로움의 태양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한 줄기 작은 빛살도 어둠을 물리치듯이 이 병도 주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원로들과 그 친구들에게 모두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시고 계시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이방 민족들에서는 첫 번째의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라고 말씀하셨다. 백인대장은 스스로 자격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화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백인대장이 주님께 자기 종을 위해 간청한 이 말은 우리가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기 전의 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한 이방인의 예수님께 간청한 말이 기도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우리도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 7)

-한상우신부-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믿음은
아픈 이들을
향합니다.

한 사람의
귀한 믿음이
더욱 놀랍습니다.

믿음의 관계안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치유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놓쳐서는 안될
매순간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믿고 또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지켜주는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믿음과 믿음이
합쳐지면
치유와 기적이
됩니다.

믿음으로 청하는
믿음의 오늘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독서들에서는 말씀을 대하는 참 중요하고 아름다운 길들이 드러납니다.

복음에는 병든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는 백인대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병행구인 마태복음 (8,5-13)에서 백인 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한 것과 달리, 오늘 우리가 만나는 루카복음에서는 중개인 역할을 할 사람을 보내어 청을 드립니다. 누구의 기억이 더 정확한가의 문제라기보다, 아마 복음사가가 더 의미를 두려는 부분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루카 7,1).
백성에게 당신 말씀, 가르침을 다 전하신 뒤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백인대장이 보낸 유다인 원로들과 마주치십니다. 그들은 백인대장의 병든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간곡히 청하였"(루카 7,4)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동행해 백인대장의 집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또 다른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백인대장의 친구들입니다. 유다인 원로들이 예수님께 자기들 의견을 피력한 것과 달리, 친구들은 백인대장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루카 7,6).
예수님께 누군가를 보낸 것이 짐짓 권위를 행사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 서기 부당한 자기 처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니, 당시 로마 치하의 이스라엘에서 로마인 백인대장이 한 식민지 백성 젊은이에게 한 말이라 믿겨지지 않을 만큼 겸손하고 온건합니다.

백인대장은 오로지 "말씀"을 원합니다. 그 "말씀"이 비록 현장에서 직접 대면해 발설되지 않아도 효력을 발휘하리라는 것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습니다. 군대 조직의 생리를 잘 아는 그로서는 명령, 곧 말의 힘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접 들은 말은 물론이거니와 위임된 말이라도 복종이 곧 생명이고, 불복종은 곧 죽음이니까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십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말씀을 소유한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을 번번이 거부하다가 급기야 육화하신 말씀을 몰라보고 결국 배척하여 살해할 미래를 품고 있는데 반해, 오히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이방인의 입을 통해 고백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감동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겠지요.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10).
눈치 채셨겠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병든 이나 치유에 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인대장이 청한 건 오직 말씀이었는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백인대장의 믿음에 탄복하셨을 뿐인데, 그래도 노예는 나았습니다! 그는 자기에 대한 직접 언급 없이 그저 주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감탄"으로 치유를 얻은 것입니다.

병에게 또는 환자에게 어떤 말씀을 내리신 게 아닌데 치유가 일어난 오늘의 기적을 관상합니다. 말씀만을 원하고 청했는데 말씀조차 없이 그가 나은 것은, 간청을 듣고 움직이신 예수님 마음의 연민, 의지, 방향성이 이미 치유를 지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이 곧 성부께서 발설하신 말씀 자체이시므로 굳이 당신 입을 통해 언명체계를 빌어 표현하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지향만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감탄하고 칭찬하신 자체로 백인대장의 믿음은 보상을 받은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백성에게 직접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님 모습에서 시작해, "그저 말씀만" 원하는 백인대장의 겸허한 간청으로 이어지다가, 소리가 동반된 "말씀"이 아닌, 말씀이신 분의 의지가 완성한 치유로 마무리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에 대해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1티모 2,1)는 권고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고 기도하고 전구하고 감사하는 몫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 유달리 많이 등장한 중개자들, 즉 병든 노예를 대신해 간청한 백인대장이나 그의 대변인이 되어준 유다인 원로들, 심부름 왔던 친구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한 분 중개자이신 예수님! 그분이야말로 마음의 연민과 의지와 지향, 행동으로 하느님을 움직이신 진정한 중개자시지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모든 역사와 시대의 사람들에게 두루 당신을 드러내셨지요. 하느님의 말씀께서 겸손하시게도 인간이 사용하고 이해하는 각 언어의 체계 안에 담기심으로써 사람들과 접촉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그 말씀들이 가르치고 깨우치고 권고하며 다가옵니다. 어떤 때는 많은 말씀들이 아닌 단 한 마디로 영혼을 꿰뚫으며 들어오기도 하시지요. 그리고 어떤 때는 ... 아무 말씀 없는 침묵 가운데 당신의 연민과 의지와 방향성을 감지하도록 당신 존재를 몸통째 내어주기도 하십니다. 발설하신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가 아니라 말씀 자체이신 당신을 터치하게 하심으로써 언명체계에 갇힌 말씀이신 분의 핵심, 정수, 본질에 와닿도록, 당신을 만지도록, 당신을 품에 안도록, 그래서 당신을 알도록 허락하시는 놀라운 겸손이시지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한 분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를 뵐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그분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갈 날을 고대합니다. 이처럼 "말씀" 역시 언어 체계의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말씀에 깊이 깊이 머물고 사랑하고 되새길수록 말씀이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보여 주십니다. 말씀에 담긴 하느님을 직접 감지하고 사랑하고 터치할수 있도록 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하느님께서 왜 보잘것없고 부족한 우리에게 이처럼 어마어마한 신비를 허락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오늘 복음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루카 7,2).
우리 한 명 한 명이 주님께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렇다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을 치유하고 일으키시는 말씀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소유하도록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모두 깊이 깊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 여러분 각자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과 하나되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18일 연중 제 4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