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루카. 4,16-30)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죽은 이들이 살아나고 산 이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둑이 10급인 사람이 훈수를 두면 실력이 두세 등급 올라 8급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사실 그 사람의 실력은 8급인데 자신이 직접 경기를 하다 보면 생각이 좁아져 10급의 실력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와 훈수 두듯 경기를 한다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삶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빠져나와 훈수 두듯 살면 훨씬 실수를 줄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생각 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생각을 믿습니다. 그러니 나를 제3자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마치 하와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뱀의 유혹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선악과를 따 먹게 된 것과도 같습니다. 생각이 많은 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이처럼 단순해지기를 바라십니다.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굳게 믿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놀라워하면서도 결국에는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며 다시 그들의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며 고향 사람들의 경직된 마음을 나무라십니다. 나의 생각만 절대적으로 따르면 하느님의 뜻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나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와도 뱀과 대화하면서 하느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뱀과의 대화에 너무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사춘기 아이처럼 되기 쉽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어 자신이 만든 방에 갇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 밖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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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나의 논리로는 우리의 작은 뇌를 사용해서 밝힐 수 없는 진실이 많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믿는 사람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을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내 존재를 뛰어넘는 분이신데, 자기 생각을 벗어나면 이해할 수 없다면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고 전합니다. 실제로 주시한 사람은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주시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갖는다면 어떨까요? 반면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자신들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언제나 뛰어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주시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그분 안에서 희망과 기쁨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혹시 좁기만 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믿을 수 없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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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교육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억압과 방임을 통해서 갈등이 더욱더 심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최초의 자기주장을 펼치는 시기인 사춘기 때 30%를 놓아주십시오. 그리고 성인이 되면 또 30%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 30%를 가정을 이루었을 때 놓아주어야 합니다.
이제 몇 %가 남았나요? 10%가 남았지요. 남아 있는 이 10%의 끈으로 장성한 자녀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90% 이상을 통제하고 있다면 갈등이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아직 사춘기도 되지 않았는데도 자유를 주겠다고 90% 이상을 풀어놓았을 때도 나중에 성인이 되어 어렸을 때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서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갈등. 이 갈등을 풀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기억하면서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실천한다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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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하고 교만하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전삼용신부-
빌립보 네리는 16세기의 아주 훌륭하고도 지혜로웠던 성인입니다. 어느 날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성녀로서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놀라실 것 없습니다. 거기는 성녀가 없어요.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믿음이 강할 수 있을까요? 겸손한데 내어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내어주지 못하면 겸손하지 않은 것이고 겸손하지 않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과 사랑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시어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당신 소명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보아오던 예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 안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선입관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변해야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도 스스로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행동하는데도 남은 자신들의 틀에 맞히려는 모습이 교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큰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서 박사를 따도 믿음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을 증가시키려면 공부와 함께 겸손도 증가시키려 노력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이 왜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엘리야 예언자를 받아들인 사렙타 과부의 예와 시리아 장수 나아만의 예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엘리야는 삼년 반 동안 기근이 들어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시돈지방의 한 과부를 찾아갑니다. 그 과부는 자신도 먹을 것이 없었지만 엘리야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누어줍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는 것은 겸손의 표현입니다. 어차피 내 것은 없다는 믿음이 있어야 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까지 자신들의 것이라 여겼습니다. 나의 것이라 여기는 것은 교만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것입니다.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시골의 한 예언자 엘리사의 말에 순종할 줄 알았습니다. 요르단 강 물에 일곱 번 몸을 담글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물에 일곱 번 담근다고 나병이 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믿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은 자존심 하나뿐입니다. 따라서 자존심이 꺾이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겸손이 그의 나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평생을 흑인들을 위해 수고한 슈바이처 박사가 밀림에서 처음으로 병원을 지을 때 한 번은 옆에 서서 구경만 하는 흑인 청년에게 서 있지만 말고 같이 일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이 흑인 청년은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 일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학생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그러나 공부를 더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하게 되었다네.”
공부의 목적은 겸손을 증가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공부를 하고 궁극에 가서는 믿음을 잃게 됩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만함을 없애는 방법은 내어줄 줄 아는 마음, 순종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잘 내어줄 줄 알고 겸손했다면 예수님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어주는 연습, 순종하는 연습은 그래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통해 더 큰 믿음을 갖게 만드는 열매가 맺힙니다. 왜 십일조를 해야겠습니까? 그것을 하다보면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죄가 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순종해야겠습니까? 그 겸손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꼭 공부만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공부는 오히려 교만을 부추깁니다. 그러니 모든 노력의 지향을 겸손에 두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이 배워도 손해 보는 것입니다. 공부보다 자선이 더 중요하고, 공부보다 순종이 더 중요합니다. 공부는 진리를 얻고자 하는 것일 진데, 정작 겸손한 자만이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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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시작은 철저하게도 밑바닥에서부터 였습니다. 무(無)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랜 준비 기간을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인 공생활이자 사목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당신 사명의 서막이 최초로 시작되는 장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 같았으면 아마도, 당대 제일 잘 나가던 도시, 로마나 아테네, 예루살렘이나 안티오키아 같은 대도시에서 거창하게 시작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창당 대회 하듯이 멋지게 무대도 꾸미고, 각계 주요 인사들도 초대할 것입니다. 프로그램도 알차게 짜고, 사회자가 진행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포부도 밝히고...
그러나 웬걸,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는 당시 유다 주류 세력들이 멸시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던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사실 갈릴래아는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외침이 잦았습니다.
틈만 나면 이민족들에게 점령당하고 착취를 당해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오 복음 4장 15절)라고 까지 불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릴래아는 잦은 민중 봉기로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갈릴래아는 유다 고위층 인사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지역이었던 것이지요.
갈릴래아에는 비옥한 농토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의 삶이 윤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작농이거나, 하루하루 일당 받아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첫 발걸음은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지역 갈릴래아 지방, 그 중에서도 나자렛을 선택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동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으로부터 첫번째 선택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일 앞에 감사하고 환호해도 부족할터인데, 예수님의 신원을 의심하고, 그분의 말씀에 화를 내고, 그것도 모자라 그분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벼랑 끝까지 끌고가 밑으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동시다발적으로 가지가지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지독한 선입견과 고정 관념으로 인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살기등등한 얼굴로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작은 철저하게도 밑바닥에서부터였습니다. 무(無)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최초로 마주한 광경은 동족과 고향 마을 사람들의 불신앙이었습니다. 죄와 배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의 안식일 집회는 주로 오전에 행해졌습니다. 집회는 주로 기도와 성경 봉독, 해설로 이루어졌습니다.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은 들으라) 기도로 시작되어, 18기도문 암송, 성경 봉독으로 이어졌습니다.
성경 봉독은 첫번째 독서로 율법서 한 부분을, 두번째 독서로 1독서에 상응하는 예언서를 발췌해서 읽습니다. 성경 봉독이 끝나면, 그에 따른 설교가 뒤따랐습니다. 유다인 남성은 누구나 설교할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나자렛 회당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신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설교(성경 해설)를 하실까,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설교는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의 명설교였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짧고 간결했습니다. 또한 힘이 있었고 의미심장했습니다.
저같았더라도 고향 마을 사람들 앞에 금의환향했겠다, 감사의 인사도 전하고, 앞으로의 포부도 먼저 밝히고, 봉독한 이사야 예언서에 대한 명쾌하고 감동적인 해설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저 딱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복음 4장 21절)
예언의 성취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계심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종말론적인 예언자요 하느님으로부터 도유된 분 곧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구원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분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해, 그분에게 흡족한 해, 주님의 은혜로운 해, 희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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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전임 신부님이 인수인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드리고, 앞으로 한국에서의 사목에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저도 언젠가 인수인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겁니다.
차량 이동이 많기에 미국의 도로체계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Street, Avenue, Turnpike, Broadway, Boulevard, Parkway가 있다고 합니다. 설명을 들었을 때는 이해가 되었는데 거리에 나서면 잘 모르겠습니다. 전체 지도를 놓고 보면 이해가 쉽다고 합니다. 다행인 것은 길의 이름을 잘 몰라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로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도로체계도 눈에 들어올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선포하십니다. 그 길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오늘 복음에서 선포한 원칙을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으로 들어가셨고,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선포를 놀라워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류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떠 빨리 달릴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만들었습니다. 더 많이 열매 맺는 품종을 개발했습니다. 도구, 기계, 로봇은 인간을 노동의 수고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교육은 인간의 지성을 넓혀 주었습니다. 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늘려주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풍요와 발전에도 그늘이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2번의 세계 전쟁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간의 품위에 큰 상처를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전쟁, 폭력, 이념의 갈등, 종교의 대립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가난한 이웃이 곳곳에 넘쳐납니다. 아직도 억울하게 잡혀간 이웃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이 약물에 의지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작은 배에 의지해서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선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교자 성월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목숨을 바치면서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따랐습니다. 깊은 산속에 있던 교우 촌은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였습니다. 함께 기도하였고, 가진 걸 나누었고, 신앙의 열정은 뜨거웠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성지순례를 가면 좋겠습니다. 순례의 길이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보는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교자들께서 걸어가신 신앙의 길을 우리 또한 함께 따를 수 있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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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반영억신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 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발전의 기회를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지니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고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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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송영진신부-
마태오복음에는 예수님의 첫 선포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마태 4,17),
마르코복음에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15).
그런데 루카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표현은 다르지만 세 복음서의 복음 선포는 사실상 하나의 선포입니다.)
“하늘나라(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고, 이 말씀은 루카복음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구원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오늘’이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 복음을 듣고 있는 ‘지금’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이천 여 년 전의 어느 날이지만,
영적으로는 항상 오늘이고, 항상 지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 주제는 ‘해방’입니다.
복음 선포는 곧 해방 선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은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는
열쇠와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열쇠를 받아서 우리를 가두고 있는 죄와 죽음이라는 감옥 문을 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열쇠를 주신 다음에,
앞장서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열쇠로 감옥 문을 열고(회개하고), 문 밖으로 나가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인류 공통의 ‘죄와 죽음이라는 감옥’ 외에도 자기 자신만의 감옥에도
갇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무지(無知)의 감옥’이었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만나서 당신을 계시하신 일은(사도 9,3-6),
‘무지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그에게 주신 일과 같습니다.
그 열쇠를 받아서 감옥에서 벗어난 것은 그 자신이 한 일입니다.
< 예수님을 만난 뒤에 바오로 사도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고,
그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는데(사도 9,9), 앞을 보지 못한 일을,
그 자신의 ‘무지의 감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그가 한 일은 ‘기도’였는데(사도 9,11),
그 기도를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열쇠를 받지 않고 그냥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감옥 안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열쇠를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냥 그렇게 끝나버릴 것입니다.
루카복음 8장에 나오는 ‘게라사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나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들이 떨어져 나간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은 마귀 들렸던 이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알려 주었다.
그러자 게라사인들의 지역 주민 전체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주십사고
요청하였다.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 되돌아가셨다(루카 8,35-37).”
게라사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는 것을 알았고, 마귀 들렸던 이가
구원을 받은 것도 알았지만, 예수님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떠나 주십사고 요청하였다.’ 라는 말은,
실제로는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즉 예수님을 쫓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거부했고,
그냥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자기가 감옥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해방되기를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가 진짜 열쇠라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열쇠를 주어도 받지 않고,
그래서 감옥 문을 열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만 생각하고서(루카 4,22)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의 열쇠를 받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그들은 ‘교만과 어리석음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자신들을 가둔 사람들입니다.
감옥에서 해방되기를 원해서 자기 발로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받지 않고 그냥 되돌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루카복음 18장에 나오는 부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루카 18,22).”
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의 경우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선 먼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그런 애착심과 집착을 버리는 일은 누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부자는,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하는,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낙타일 뿐입니다.
낙타가 낙타인 채로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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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그런 것
-이종훈신부-
일상은 중요하다. 늘 그렇고 그래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일상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체험을 하려고 특별한 곳을 찾아가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곳의 삶은 그들의 일상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사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사신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계신다.
기도가 주님과 나누는 대화라면 나의 일상이 그 대화의 소재이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매 번 특별한 곳을 찾아갈 수는 없다. 그분은 일반 서민으로 사셨으니 우리가 매 번 그럴 수 없음을 잘 아신다.
하느님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내가 사는 그곳에 계신다. 특별한 체험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는다. 그분은 나의 일상 속에서 나와 함께 사신다. 그래서 그분의 현존을 자주 잊어버리는 지도 모른다, 함께 사는 이들의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처럼.
주님, 주님은 저희와 함께 그리고 제 안에 사십니다. 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임을 다시 새깁니다. 주님은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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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4,16-30: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구원 시대가 지금 당신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시한 이사 61,1을 읽기 위해 나자렛 회당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시며 하신 첫 발언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삼위일체적 구원 계획에 대한 언급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 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이 말씀은 이사 61,1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또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성서 말씀을 읽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고 하셨다. 그 순간 그분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하면서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신기해 주시하지만, 은총의 말씀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지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받을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나자렛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 몰았다. 그들의 난폭함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질투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주님을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는데 신앙의 눈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눈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가? 우리의 정신, 주어진 시간, 가진 능력을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처럼은 다 못하더라도 우리의 처지에서 내 능력껏 찾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이들 앞에 작은 구세주, 제2의 구원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항상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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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 22)
-한상우신부-
너를 부정한다는 것은
또한 나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모두는
사랑받고
존중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중요하듯
남도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고정관념의 칼날을
거두어야 합니다.
판단은 언제나
무질서를 내포합니다.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참된
복음의 삶입니다.
모든 판단에서
벗어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서로의 현실을
격려와 희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남의 삶을
남의 역사를 결코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판단을 멈추면
가을 햇살과
소중한 이웃들이
얼마나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인지를
알게될 것입니다.
바라보는 일이
복음의 기쁜
시작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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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진정 희망하는지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루카 4,16).
오늘 복음의 대목은 예수님 지상 삶의 축소판입니다. 복음사가는 고향 나자렛에서 벌어진 긴박하고 험했던 순간에 예수님의 사명, 출생과 공생활 언급, 배척과 죽음(의 위협), 떠나가심까지 담아 기술하면서 하나의 사건에 복음 전체를 개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의 오심으로 자유와 해방의 포문이 열렸습니다. 이 선포는 말씀이 소리내어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선포된 그 자리 그 순간에 완성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의 현존이 곧 사명의 완성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또 지금 여기 계신 말씀이신 분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루카 4,23).
예수님은 당신의 출생신분 때문에 의구심을 갖는 동향인들의 마음을 읽고 계십니다. 그들은 방금 선포된 메시아의 해방을 당장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결과가 도출되어야 희망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엘리야, 엘리사 예언자 시대의 일화를 들어 그들의 기대에 제동을 거십니다. 메시아의 도래로 완성될 진정한 해방을 당장 그들의 환심을 살만한 기적으로 거래할 수 없으니까요.
궁극적인 해방이란 가난과 질병, 억압과 불평등의 근원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시작되지만, 종래에는 온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 정복해야 완성된다는 걸 예수님 친히, 직접, 몸소 겪어내심으로써 보여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이해할 리 없는 동향인들은 화가 잔뜩 나서 그분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입니다. 단 한 명의 손끝만으로도 떠밀려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지경까지 이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부활의 전조라 할까요. 이미 동향인들의 증오와 살의로 죽음을 당한 것과 진배없는 순간까지 맞으시지만 담대히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미움도, 배척도, 죽음도 멈출 수 없는 예수님의 발걸음에는 사랑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재림과 부활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1테살 4,14).
이 믿음이 곧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한때 사회 문제까지 되었던 휴거 사건이 말해주듯, 문자 그대로 공중에 들어올려질 날을 기대하는 심중에는 근시일 내에, 당장 눈앞에서 결과를 보려는 미숙한 실증주의와 조급증이 뒤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손에 잡힌다면 희망이 아닙니다.
해방은, 지금 각자 겪는 어려움과 고통, 장애, 질병에서 벗어남은 물론 미지의 때가 예약되어 있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생으로 시작하시고 파스카로 완성하신 그 해방은 어느 날 어느 시로 국한된 사건이기에 앞서, 희망하는 이라면 누구나 선취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믿고 희망하기에 영원한 생명을 사는 은총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므로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기적과 이변과 신비를 꿈꾸며 맥없이 손을 놓고 주저앉아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당장 뭔가를 주시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돌아서는 존재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희망을 붙들고 믿음을 다하여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이들입니다. 그 사랑이 곧 구원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4,17). 아멘.
정당함으로 당당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59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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