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8월 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8. 29. 19:17

2019년 8 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25,1-13)

 

The foolish ones, when taking their lamps,
brought no oil with them,
but the wise brought flasks of oil with their lamps 

 


열처녀의 비유.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시며,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이전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1테살 3,12) 해 주실 것이라고 빌고,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실(“더욱더 그렇게 살아가라.”)에 맞는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바랍니다. 죄를 피하려고만 하면 유혹이 더 늘어나고 부정적이고 암담한 상황에 마주하여 심각한 위험에 빠집니다.그러나 긍정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은 저절로 죄를 피하고 자신의 영성 생활의 역동성에 힘입어 보호를 받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 바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거룩하게 보존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사랑스러운 긴장 관계와 기다림에 대한 충실, 곧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는 자세를 제시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피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노력과 책임이 필요합니다.이 비유의 주인공은 똑같은 숫자로 둘로 나뉜 열 처녀가 아니라 늦게 도착한 신랑입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혼인 관습에 따르면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에 신부와 함께한 처녀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모든 비유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는 오늘도 혼인 잔치로 표현됩니다. 모든 면에서 고유한 의미를 지닌 우화가 아니더라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거룩한 교부들을 통하여, 비유에서 다양하게 등장한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기다리는 신랑은 예수님을 뜻하고, 그분의 지체는 재림의 지연을 뜻합니다. 한밤중에 예상하지 못한 그분의 도착은 주님께서 오실 예견할 수 없는 시간을 나타내고,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는 주님을 기다리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거나 거부당하는 것은 심판의 판결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늘 깨어 준비하고 있습니까?(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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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루에 7권의 책을 각 권당 50페이지 이상, 모두 350페이지 이상을 읽는다고 하면 깜짝 놀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것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책만 보느냐고 하시지요. 정말로 그럴까요? 아닙니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사와 기도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가톨릭 사제이니까요. 가톨릭의 오랜 기도인 성무일도를 바치고 묵상을 합니다. 미사에도 충실하기 위해서 1시간 전에는 고해소에 들어가서 성사도 주면서 미사를 준비합니다. 여기에 많은 글을 쓰고 있고, 매일 운동도 빼놓지 않고 1시간 이상을 합니다. 사람들과 만남도 피하지 않습니다.

누구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을 10년 이상 해왔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특별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성실하지도 않고,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니까요.

저의 비법을 말씀드리면 아주 간단합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컴퓨터를 켜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에 텔레비전을 치워버리고 보지 않으니 오히려 시간이 남아서 모든 것을 다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다음에 해야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넉넉할 때에도 이런 모습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서 ‘다음에 하자’는 말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면서 살아간다면 분명히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기름을 꾸어주지 않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치사해 보이는 그 다섯 처녀를 지혜로운 처녀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코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사한 행동을 옹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확실치는 않지만, 분명히 오시기 때문에, 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이 준비해야 할 부분들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일이 늘 ‘다음에 해야지’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일에 걸림돌이 되는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주어진 것을 최고로 만든다.



만족스러운 삶

커다란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분께서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야지요.”

물론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이 앞선 자매님처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저항하지 말고 체념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운명으로 하느님께서 짊어 준 십자가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또 다른 도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아픔과 슬픔을 겪게 되겠지만, 여기에만 집중하면서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하느님을 통해 평화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이 감정만으로 안 되는 이유

-전삼용신부-


이런 것이 일반적인 이별 공식이라 합니다.

      첫눈에 빠져 서로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면 서로 모든 것이 완벽해서 이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영원히 내 곁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줄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콩깍지가 벗겨지는 때가옵니다. 변치 않을 거라던 영원한 사랑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하지만 원래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일 뿐입니다.

      상대의 변화 때문에 더 빨리 섭섭해 하는 쪽은 일반적으로 여자입니다. 남자는 일과 사랑의 중요성을 50:50으로 여긴다면 여자는 거의 100%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더 빨리 신경을 다른 쪽으로 옮기기 때문에 여자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남자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런 처지에 놓인 자신이 비참하여 변한 남자를 비난합니다.

      남자는 영문도 모른 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여자가 변했다고 믿게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봤던 그 모습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쪽 다 사랑의 마음이 식게 됩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잘 극복해내느냐에 따라 관계가 오래가던가, 거기서 끝나던가 하게 된답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로 따지자면 하느님은 남자이고 우리는 여성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하는 두 가지 부류의 신앙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관계를 잘 유지할 줄 아는 현명한 처녀들이고, 다른 부류는 그렇지 못한 처녀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화를 우리가 잘 이해하여 당신과의 이별수순을 밟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두 부류 모두 등잔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기름이 넉넉히 보충되어 있었고, 다른 처녀 부류는 처음엔 기름이 있었으나 이내 말라버렸습니다.

      만약 기름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한다면 이 두 부류는 이렇게 나뉠 것입니다. 어떤 부류의 신부는 신랑을 위한 사랑의 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또 어떤 부류는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입니다. 좋았다, 싫었다 하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사랑에 변함이 없고 다른 부류는 오락가락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의지’도 있어야합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사랑을 채워 넣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기름은 신랑에게서 채워 넣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신랑을 위해 타는 것이지 신랑에게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주인은 오로지 하느님이고, 그 연료는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려면 기도해야합니다. 그 기도로 사랑이 불타고 있어야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이미 불타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은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과 무관합니다. 상대를 위해 내가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오니 불을 꺼뜨려버렸습니다 사랑이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상대가 잘해주면 좋고 서운하게 하면 화를 냅니다. 결혼했다면 그 결혼은 상대고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어서 주님께서 맺어주셨다고 믿어야 할 텐데, 조금만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질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에 좌지우지 되게 놓아두었다가는 금방 꺼져버립니다. 사랑의 감정은 소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감정이 마르지 않게 규칙적으로 기름을 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하고 싶다면 기도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차에 기름도 소진되기 전에 채워야 하기에 주유소에 가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 안에서 스스로 기름이 솟아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싶다면 규칙적인 기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다면 그만한 의지를 기도시간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감정에 의지가 결합되어 완전하게 됩니다.

      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람을 피워서? 못생겨서? 지겨워져서? 지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등등의 수많은 이별의 이유를 대도 실은 모두 변명일 뿐입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지가 있으면 상대가 어떻든 나의 감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도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이 세상 것들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사랑을 감정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거기에 의지를 결합시킨 사람들이 현명한 처녀들입니다. 사랑하기로 했다면 상대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든 나의 사랑의 불은 그대로 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보충해야합니다.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꾸준히 기도하느냐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조재형신부-


같이 있던 신부님이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갔습니다. 한의원은 매번 광고를 내주시기에 인사를 드릴 겸 함께 갔습니다. 80이 넘으신 원장님은 어린이와 같은 미소로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백만이 넘은 신경이 있으며, 우리의 혈관은 11만 킬로가 넘는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몸은 신비롭다고 하였습니다. 친절하신 원장님은 제게도 침을 놓고, 쑥뜸을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좋으신 분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길을 가다가 낡고 초라한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삶에 지쳐 보이는 부부는 스승과 제자를 위해서 우유와 치즈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부부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은 스승은 어찌 이리 힘들게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부부는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늙은 암소가 있습니다. 암소가 주는 우유를 먹고, 치즈를 만들고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스승은 길을 떠나면서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 집의 소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시오. 제자는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승의 영적인 힘을 믿고 소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제자는 우연히 가난한 부부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은 없어졌고, 번듯한 집이 있었습니다. 집에는 예전의 나약한 부부가 아니라 건강해 보이는 부부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물으니 부부는 대답했습니다. 어느 날, 암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약초를 캐고, 밭을 가꾸고, 기술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번듯한 집에서 남 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깨달았습니다. 젊은 부부에게 늙은 암소가 있으면 암소에 의지해서 다른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암소가 없으니 젊은 부부는 각성하게 되었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문득 우리 안에 있는 암소는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과거의 잘못된 삶으로 가려는 생각이 암소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배웠고, 초대되었지만 욕망에 따라 살려는 마음이 암소입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암소입니다. 엄중한 국제 정세를 외면하고 당리당략으로 싸우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암소입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으면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게으름이 암소입니다. 제게도 분명 암소는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암소입니다.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암소입니다. 스스로 일어서기보다는 누군가에 의지하려는 암소입니다. 저도 암소를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내 안의 암소는 버리고 기름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하나는 거룩함의 기름입니다. 거룩함의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근심하고 걱정하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합니다. 내 앞에 놓인 장애물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 장애물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거룩함의 기름에서는 겸손, 배려, 나눔, 친절, 사랑의 불꽃이 피어납니다.

 

다른 하나는 식별의 기름입니다. 지금 느끼는 기쁨과 행복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기쁨과 행복이라면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됩니다. 지금 느끼는 고독과 아픔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고독과 고통이라면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청하면 됩니다. 지금 느끼는 기쁨과 행복이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느끼는 고독과 아픔이 분노와 원망 때문이라면 그 분노와 원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없다면 알곡을 맺을 수 없습니다.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함식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으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좋은 기름을 준비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양승국신부-

 

사도 바오로의 데살로니카 1서 말씀은 오늘 우리를 거룩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데살로니카 1서 4장 3절)

 

 어떤 사람들은 거룩함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랄까, 더 나아가서 약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옛날 기억이 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안에서 누군가가 조금 거룩하게 사는 분위기를 풍기면 ‘상뚜스’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 여러 그룹 가운데 바리사이라는 나름 잘 나가던 그룹, 자칭 거룩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란 용어 자체가 ‘분리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으로부터의 분리이겠습니까? 죄와 우상숭배, 불결함과 이방인으로부터 분리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스스로를 죄투성이인 인간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거룩하고 고결하며 깨끗하고 무죄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종래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제한적이고 그릇된 거룩함을 날카롭게 질타하시며, 거룩함의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십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함이 더 이상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 사제들이나 레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세리나 죄인들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충분히 거룩한 사람이 될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유다인들 시선으로 볼때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이나 창녀들도, 두 팔 벌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얼마든지 성인성녀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을 고스란히 전수받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함이 교회 만의 것만이 아님을, 교황이나 주교, 사제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통해 명쾌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덕은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살아가고 각자 어디에 있든 날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자입니까? 자신이 봉헌한대로 기쁘게 살아가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결혼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자기 배우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보기가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 올라, 함께 생활하시는 수녀님들과 촛불을 들러, 서울 나들이를 몇번 다녀왔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피드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체 사제요 수도자가 되서 그게 뭐하는 짓이냐? 시국이나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성당 안에서 기도 열심히 하시면서, 거룩하게 살면 좀 좋냐? 정 그러고 싶으면 사제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라!’는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곰곰히 묵상해보니,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존경하는 직속 상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정답이겠구나 싶어, 그분의 가르침을 찾아봤습니다. 고민고민하는 제게 교황님께서는 너무나 간단히, 단칼에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일이 곧 교회의 일입니다.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으로부터 우리 교회가 분리되어, 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서는 절대 안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당연히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서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치자들에게 제공할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누가 보나 보지 않나 한결같아야 한다

-반영억신부-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하루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해서 입니다. 간혹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하는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 하기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

-송영진신부-


방심한 상태로 지내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두 가지 경우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주님께서 한참 뒤에 오실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서,
“준비는 ‘나중에’ 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경우.
마태오복음 24장 48절에 나오는 ‘불충실한 종’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면, 너무 빨리 오셨다고 불평할 것입니다.
2) 주님께서 금방 오실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서,
처음에는(처음에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고 있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으니까 기다리는 것에 지쳐서,
또는 긴장이 풀려서 준비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우.
마태오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라고 불평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오시든지, 너무 늦게 오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언제 어떻게 오시든지 간에 우리는 주님을 즉시,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재림’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마치고 나서 하느님 앞에 서는 일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저를 빨리 부르셨습니까?” 라고 항의할 수도 없고,
“왜 이렇게 저를 늦게 부르셨습니까?” 라고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재림’에 관한 비유 말씀들을 보면,
마치 기다리는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는 듯이 주님께서 일부러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마태 24,50) 오시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꼭 그런 식으로 오셔야 하는가?
(일부러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를 골라서 오시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에 대해서, 반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재림 날을 미리 예고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준비 시간을 충분히 주신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그러면 다들 성실하게 심판 받을 준비를 할까?
미리 예고를 해도, 방심한 상태로 지내면서 아무런 준비도 안 할 사람이
많을 텐데, 사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그랬고(마태 24,37-39),
소돔이 멸망을 당할 때에도 그랬습니다(루카 17,28-29).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은, 만일에 종말과 재림의 날이 미리 예고된다면,
인간 세상의 모든 활동이 그 순간 정지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날만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할 의욕 자체를 잃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자주 생기는데, 테살로니카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신자들 가운데에는 종말이 곧 온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만 끼쳤습니다(2테살 3,11).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하면,
종말과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인생이 끝나는 날을 미리 알려주면,
그것이 각자의 인생에 도움이 될까?”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알게 되면, 또는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되는지 알게 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전에 나온 어떤 영화에 그런 내용이 있었는데, 그 영화를 보면,
앞으로 살날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아무렇게나 막 살기 시작하고,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대로 ‘삶’을 포기해버립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인간 세상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마태 25,1-5).”

만일에 처녀들이 예상한 시간에 신랑이 도착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 명 모두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의 도착이 생각보다 늦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이 예상한 그 시간에
신랑이 도착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슬기로움’은 “내 삶의 기준을 주님에게 맞추는 태도”이고,
‘어리석음’은 “내 삶의 기준을 내 마음대로 정하는 태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믿음 실천과 사랑 실천을 하면서,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충분할까?” 라고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열 명의 처녀들이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은, 기름의 준비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 설정된 상황일 뿐이고,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르 4,16-17).”
어리석은 처녀들도 처음에는 등불을 켜 놓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기쁘게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리석은 처녀들의 등잔 속에 있었던 기름이 떨어지고
등불도 꺼져 가는 것은,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은 있지만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 것,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
생각으로만 믿고 삶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것이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뿌리가 없는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 때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데,
재림과 심판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뿌리가 없는 신앙인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태 7,21).
< “나도 전에는(처음에는)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말은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지 않으면, 전에 잘했다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답과 인정을 바라지 않음

-이종훈신부-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열 처녀의 비유로 알려진 하늘나라의 이 비유말씀은 뜻은 이해하겠지만 마음이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다. 요즘은 신부가 아니라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는데 그것도 예식장에서 고작 1-2분 정도이다. 그리고 버스든 사람이든 언제 약속장소에 도착할지 금방 알아볼 수 있고 거의 약속시간에 도착하니 이렇게 편리해지기 전 약속만 믿고 그 자리에서 마냥 기다리던 마음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의 실제생활은 그렇지만 하느님을 만남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그날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천사도 예수님도 모르시고 오직 아버지 하느님만 알고 계신다(마르 13,32). 그때까지 어두운 밤에 불을 비춰 신랑의 얼굴을 알아볼 그때까지 등불만이 아니라 그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할 기름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고(6,6), 남모르게 선행과 희생(마태 6,3)을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아무런 보답과 인정을 바라지 않고 그것들을 지속해나감은 훨씬 더 어렵다. 전화기로 예수님께 여쭤볼 수도 없다. 지금 잘 하고 있는 건지, 나의 보물창고에는 보물들이 잘 쌓이고 있는지, 혹시 좀과 녹이 쓸거나 도둑이 들지는 않았는지 도무지 확인해볼 길이 없다.

 

주님의 말씀을 믿음은 이런 도전과 시련을 받는다. 이런 것들을 피할 방법을 찾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체가 내가 잘 찾아가고 있고 잘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소화 데레사 성인은 생의 마지막 시간에 주님이 믿어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온 시간들이 헛되었다는 유혹에 시달렸다고 한다. 사실 예수님도 광야에서 겪으셨던 일 그리고 그 동산과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들을 보면 단지 그 때뿐 아니라 공생활 내내 그런 유혹과 시련을 계속 받으셨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그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과 함께 들어 간 그곳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해서 등불을 꺼뜨리지 않았던 그 슬기로운 처녀들이었다. 그날이 오면 시간은 멈추고 공간은 사라진다. 등불도 기름도 필요 없게 된다. 믿고 살든 엉망으로 살든 그날이 와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그 때가 되면 그 만남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인 이들이 있고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이들로 나뉜다. 그 기쁨을 얻기 위해 받는 시련이 바로 보답과 인정을 바라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나의 믿음은 굳건해지고 깊어진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점점 현실이 되어간다.

 

예수님, 늘 기름이 간당간당합니다. 괜한 땀과 시간만 낭비한 것 같고 바보가 된 것 같아 주님의 약속을 의심합니다. 그 때에도 주님은 침묵하시니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등불의 기름은 이웃에게 나눌 수도 빌릴 수도 없음은 믿음은 오직 저만의 몫임을 되새깁니다. 주님은 도와주시겠지만 억지로 믿게 하실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믿음의 길로 인도해주시고 지칠 때 쉬게 하시고 의심이 들 때 위로해주소서. 아멘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신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우리로서 보편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 선행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여기서도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랑이 언제 올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등을 가지고 있던 처녀들 중에서도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고 한다. 무엇으로 그렇게 구분할까? 그 차이는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 사도 바오로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은 모든 액체 위에 뜬다. 기름에 물을 부으면 기름이 뜬다. 또 기름 위에 물을 부어도 기름은 위로 뜬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한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가장 예기치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8)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는 선을, 사랑을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가지고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한상우신부-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
슬기롭고 어리석은
우리가 있습니다.

같은 목적지를
바라보면서도
사뭇 다른 우리들
삶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준비없이 만나는
시간에는 언제나
아픔만 있습니다.

등(燈)은 기름을
기름은 등을
필요로합니다.

주님을 기쁘게
만나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목적입니다.

목적 없이
그냥 살았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어떠한
만남이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남과 마음은
등과 기름처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매순간이
말씀의 기름이
필요한 만남의
여정입니다.

슬기로운 준비의
시간을 걸어가는
순례자의 기쁜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에서 구원의 공동체적 요건과 개별적 요건이 다가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명, 어리석은 다섯, 슬기로운 다섯 등 다수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나름의 공통분모로 묶인 이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들이 '혼인 잔치에 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공동 목표나, 어리석은 이들끼리, 또 슬기로운 이들끼리 비슷한 수준으로 모였다 해도 "저마다"(마태25,1) 갖춰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등"입니다.

하늘 나라를 고대하며 사는 우리는 모두 혼인 잔치에 오시는 신랑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처녀들과 같습니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신부의 행복에 비유하지요. 비유 속 처녀들처럼 우리도 이 같은 목표로 기다림을 삽니다.

교회는 우리가 밤을 밝혀 신랑을 기다릴 수 있도록 저마다 "등"을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등"은 우리가 받은 율법, 계명, 제도, 규범 등 신앙 생활의 아우트라인(outline)일 것입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제시되지만 각자의 실존에 따라 간직하고 가꾸어가는 "저마다의 등"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성소 건립을 명하실 때 "등불이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라"(탈출 27,20)고 하셨듯이, 주님 앞의 "등불"을 각자 보살피고 돌보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다"(마태 25,10).
그렇다면 열 처녀의 운명을 가른 "기름"은 무엇일까요? 물론 등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게 하는 연료지요. 우리가 받은 율법, 계명에 불이 활활 타오를 수 있게 해 주는 '정신'이고 '혼'이고 '사랑'입니다. "기름"이 불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려면 우리가 신경을 써가며 남은 양을 가늠해야 하고, 새롭게 갈아넣고 채워주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지펴진 불은 지속적인 회개와 쇄신, 포용과 개방성을 연료 삼아 계속 타오릅니다. 세상 구석구석에, 교회 구석구석에 드러나지 않게 존재하는 그 빛과 열기가 바로 교회의 밝기, 세상의 온도를 유지합니다.

나름 충분하리라 여겨 여분을 챙기지 않았던 다섯 처녀들은 늦어진 신랑 탓에 혼비백산해서 상인에게 달려가 기름을 사옵니다. 그렇다면 "기름"은 구입할 수 있기도 하네요. 다행히 그녀들은 "기름"으로 환산할 수 있는 비슷한 가치의 재화를 소유하고 있었나 봅니다. 꼭 등잔에 필요한 바로 그 "기름"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그 재화를 "기름"으로 바꾸는데 "때와 장소"에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상인이 있는 "곳"에 가서 기름을 사오는 "사이"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힙니다. "지금 여기"에 있던 이들은 신랑과 만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지금 여기"에 부재하며 다른 곳을 헤매던 이들은 이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그리스도교에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저마다 "등"이 주어집니다. 세례로 받은 성령이 첫 불을 당겨 주셨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이 이 불을 간직하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이에 응답하는 우리의 영적 노력에 따라 불은 맹렬하게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조금씩 사그라들 때도 있지만 적어도 이 말씀 묵상을 만나기 위해 마음을 쓰는 우리의 등불은 아직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거룩한 긴장을 유지합니다. 사랑의 눈물을 모아 기름을 짜고 그릇에 간직했다가 등에 부어 불을 키우다 보면, "그 날과 그 시간"에 이 빛과 열이 신랑을 만나는 우리의 길을 밝혀주고 따사롭게 온기를 부여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우리는 이 말씀의 근거를 구약성경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에서 찾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실천을 부부관계 안에서 이야기하지요.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부여된 십계명의 "간음하지 마라"라는 율법의 한 조항을,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거룩함이라는 보다 엄선된 등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등불은 존중과 신의의 기름으로 유지되고 정결한 향내를 풍기며 타오를 것입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우리는 '주일 미사 지키고 교무금 내고 소임 잘 하는 게 어딘데...' 하며 기본으로 주어진 율법과 계명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조차 제대로 소화 못 해 주님께 죄송할 일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는 받은 등잔만 잘 간직하다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 했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욱더"라는 말씀으로 율법과 계명 이상의 분발을 요구합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더,더,더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충분함'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신랑 향한 열망과 혼인 잔치에 대한 간절함은 더 순수하고 순결하고 향기로운 기름을 마련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합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위해 "지금 여기"에서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본질만 남기고 나머지를 과감히 버리고 떠나고 내려놓게 됩니다. "오직 중요한 하나"를 붙잡는 슬기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6).
이 말씀이 울리는 순간, 가슴 터질 듯한 환희와 열락에 휩싸여 신랑 앞으로 뛰어나갈 수 있도록, 나날이 말씀과 함께 거룩한 기름을 준비합니다.

사랑과 욕망 
-김찬선신부-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로부터 더할 수 없는 칭찬을 듣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오로 사도로부터 배워 알고 있고,
배운 대로 살고 있다는 칭찬을 듣고 계속 그렇게 살라는 격려도 받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바오로 사도에게 크나큰 만족이고 보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 정도에 안주하지 말라는 뜻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며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을 들으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결혼치 않고
동정 서원을 한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이리 잘 알고 있을까 생각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저처럼 부부생활 상담을 많이 했기 때문일까요?

저는 자주 ‘신부님은 결혼도 안 했으면서 어떻게 부부생활을
결혼한 사람보다도 더 잘 아세요.’라는 얘기를 듣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 특히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자매님들을
상담해주면서 여러 얘기를 많이 들어 알게 된 것이지요.

아무튼 사랑이 없으면 부부간에도 강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간이란 상대가 원치 않는데도 자기의 성적인 만족을 취하는 것이니
부부간에도 얼마든지 강간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처럼 상대가 원치 않는데 강간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랑을 원하는 아내를 사랑 없이 오직 자기욕망의 해소만을
위해 대하는 것도 문제이고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것을 꼬집습니다.

남편이건 아내건 상대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 될 때,
다시 말해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상대를 거룩하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오직 욕망의 상대로 대할 때 그 결혼생활은 불행하게 되겠지요.

사랑이 없는 욕망은 서로를 파괴하고 허무만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남녀 간의 욕망뿐 아니라 모든 욕망의 끝은 허무이고 멸망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욕망조차 사랑으로 만들고,
끊임없이 상대를 갈망하며 왕과 왕비로 만들며,
더 나아가서 상대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하느님과 만나게 하고,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하느님처럼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존중하는 사랑을 함으로써 하느님이 되게 하는 거지요.

자주 그렇게 말하잖아요?
상대를 왕비처럼 대하면 내가 왕이 되는 거라고.

그래서 저는 오늘 복음의 비유와 이렇게 연결시키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가 나오는데
왜 슬기로운 처녀는 자기만 등불에 기름까지 챙기고
어리석은 처녀는 그러지 않아 자기만 신랑을 맞이할까요?
왜 어리석은 처녀에게도 권해 같이 신랑을 맞이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부부가 처음에는 서로에게 집중하여 뜨겁게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식으면 원수처럼 미워하는데 더 살고 더 사랑하게 되면
이제는 서로 마주보지 않고 신랑이신 주님을 같이 바라보고
같이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는 사이가 되는 겁니다.

등불의 기름은 사랑입니다.
서로 간에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의 등에 주님을 맞이할 기름을 채워줍니다.
진정 서로 사랑한다면 나를 향하게 하지 않고 하느님을 향하게 해줍니다.
이때 서로의 사랑은 주님 등의 기름이 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1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