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Margaret K 2019. 8. 28. 19:00

2019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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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

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코 6,17~29)


  Herod feared John,

knowing him to be a righteous and holy m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라고 하시며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고 하신다(제1독서).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맹세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건네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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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안티파스, 곧 헤로데 2세의 명령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헤로데 1세의 손녀이며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인 헤로디아가 자기 형제의 아내였음에도, 헤로데는 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인 합법적인 아내와 이혼하고,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헤로디아를 남편과 헤어지게 하여 자기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헤로데는 바로 헤로디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딸이 모욕받은 사실에 분개한 아레타스와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에서 헤로데의 군대는 전멸하였는데, 이는 요한을 죽인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유다 고대사』 18,5,2 참조).“동생(필리포스)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혼인에 관한 성스러운 명령을 폐기한 헤로데를 향하여 대담하게 외쳤던 말입니다. 시대의 예언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헤로데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살인 계획을 세워 실행해 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사람을 보내어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요한을 죽일 기회를 찾던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연회를 베풉니다. 외모를 뽐내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음탕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 손님들의 쾌락과 방탕 속에서 헤로데의 무모하고 경솔한 맹세가 요한의 죽음을 앞당깁니다. 쟁반 위에 담은 요한의 머리가 춤에 대한 상으로 주어집니다. 자신의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는 요한의 머리를 베었지만 그의 소리는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의로움과 마음의 회개를 전하는 그의 소리는 가라앉히지 못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폭력적인 죽음을 당하였지만 오늘도 폭군의 죄악을 침묵하지 않고 고발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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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밤에 자다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릎 쪽에 커다란 통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파서 벌떡 일어나 방의 불을 켜니 이불 위에 지네 한 마리가 보입니다. 지네가 자고 있었던 저의 무릎을 물은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또 물릴 수가 있으니 이 지네를 잡아서 처리하고 물린 부위에 벌레 물렸을 때 사용하는 약을 꺼내어 발랐습니다.

이 지네는 우연히 제 방에 들어오게 되었을 것입니다(아직도 어디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몇천 배나 큰 거대한 인간을 발견해서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저를 물었겠지요. 설마 이 거대한 인간을 처리해서 이곳을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이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저에 대한 억하심정을 가지고 물었겠습니까? 또 그것도 아니면 좋은 먹이인 줄 알고 물었겠습니까? 단지 생존을 위해서 문 것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프기는 했지만, 지네에 대해 억울하지도 않고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지네가 다시는 제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들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상처를 받으면 먼저 상처의 치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상처를 치유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향한 복수를 비롯한 부정적인 생각에만 머문다면 어떨까요? 가장 필요한 상처의 치유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 임금에 대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즐거워서 사람들 앞에서 맹세를 합니다. 이에 헤로디아와 그 딸은 자신의 결혼이 옳지 않다고 주장을 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청하지요. 맹세를 깨지 않기 위해서 소원을 들어주지만, 사실은 그 역시 세례자 요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마음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잘못된 맹세는 깨버리는 일이 더 합당합니다. 잘못된 맹세를 지킴으로 인해서 더 큰 죄악으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세례자 요한의 말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더 큰 죄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맹세를 깨고 올바른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잘못은 바라보지 못하고 맹세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감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혼했던 전처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지금까지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잘못된 왕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해도 입지 않을뿐더러 더 큰 상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그 생활이 단순하다. 그들은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톨스토이).



너 변했어!!!

성지에서 미사를 마친 뒤,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께서 “신부님, 저는요. 신부님 글을 아주 예전부터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 직접 뵙지만, 신부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하지만 맞는 것도 있고, 틀리는 것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9년간 글을 쓰다 보니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 역시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좋아한다고 말했던 음식을 지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고, 예전에는 싫었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 되어있기도 합니다.

사람은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습니다. 그래서 “너 변했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 상대가 사람임을 특히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함은 나 자신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변할 수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남 역시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변화 역시 모두 인정하며 받아주시는 주님입니다. 타인의 변화를 인정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장단에 춤주고 있는지 아는 방법

-전삼용신부-


경아는 고등학교 1학년 때가지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학년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난데없이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경아야, 좀 쉬었다 해봐. 이번 시험 망치면 그동안 애써 쌓아왔던 게 말짱 물거품이 되잖아.”

      시험을 보고 온 경아에게 엄마는 “시험은?”이라고 물었습니다.

      “엄마, 시험이 나보다 더 중요해? 나 지금도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아. 시험 그냥 백지 내고 왔어.”

      엄마는 10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정밀검진을 했을 때 경아는 중증 우울증으로 나왔습니다. 자살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경아는 방에 틀어박혀 이어폰을 끼고 하루 종일 핸드폰만 했습니다. 엄마가 말을 걸라치면 죽어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왓칭의 저자 김상운씨는 이 어머니에게 무조건 아이의 감정에 동의해주고 미안하다, 고맙다, 용서해 달라는 말만 하고 절대 비난조의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엄마는 처음엔 어색했지만 경아보다 공부만 강조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잡은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평소처럼 해. 이상해.”

      엄마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기도 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래. 경아야. 네 말이 맞아. 엄만 맨날 너를 들볶기만 했어. 말 한마디 따듯하게 못했어. 늘 공부하라고만 강요했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아는 쌀쌀한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미안한 짓을 왜 했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꼭두각시 노릇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물어본 적이나 있어? 중학교 1학년 때 기억해? 내가 독감에 걸려 초죽음이 다 됐는데, 엄마는 날 새벽 1시까지 못 자게 했어. 어떻게든 이번 시험에선 1등을 해야 한다며. 그러면서 엄마도 안 마시는 커피까지 마시라고 했지. 1등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 딸의 건강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냐고. 딸의 건강은 망가져도 시험은 망치면 안 되는 거야?”

      엄마가 경아의 손을 다시 잡으려했지만 경아는 엄마의 눈을 노려보며 손을 뿌리쳤습니다. 엄마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체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경아의 손을 잡았습니다. 경아는 이번엔 그대로 있었습니다. 경아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습니다.

      “미안하다. 경아야. 내가 너를 자동차처럼 몰고 다녔어. 세상에 기댈 사람은 엄마뿐이었는데. 엄마가 참 미련하고 못됐었어. 미안하다, 용서해줘. 경아야.”

      “엄마, 나도 미안해. 다 나 잘 되게 하려고 그랬던 거 나도 알아.”

      엄마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딸이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엄마는 그 이후로 딸의 감정에 장단을 맞춰줄 뿐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딸은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어느 날 경아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고마워. 다시 옛날 엄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자신의 욕심이 딸을 망치게 했다는 것을 깨달은 엄마는 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출처: ‘리듬: 상대의 부정적 생각 싹 날려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우리는 상대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죽이며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도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같고 위해주는 것 같았지만 결국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안에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웠고, 그의 딸인 살로메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결국 요한보다는 헤로디아를 택하게 하였습니다.

      경아의 엄마도 두려웠습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자신의 딸이 공부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런 딸을 두었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심지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란 생각으로 자신까지 속여 버립니다. 경아 엄마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았다면 딸을 그렇게 자살 직전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딱 두 장단에 춤을 춥니다. 하나는 자아의 장단이고 하나는 하느님의 장단입니다. 문제는 자아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착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용하고 죽이고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어느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지 자신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자아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다면 반드시 지금 ‘두려운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될 것처럼 부추겼습니다. 그 두려움이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입니다.

      자아의 장단에 따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우리 아이가 공부 못한다는 소리를 들이면 어떡하지?’, ‘내가 중학교밖에 안 나온 걸 성당 사람들이 알면 어떡하지?’, ‘남편과의 사이가 안 좋은 걸 친구들이 알면 어떡하지?’ 등의 걱정을 합니다. 이 두려움이 ‘아이가 공부를 더 잘하면 행복할거야.’, ‘내가 똑똑하게 보이면 행복할거야.’, ‘우리 부부가 다정한 모습으로 미사에 나가는 걸 보면 다들 부러워하겠지?’ 등의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나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을 이용하고 결국 죽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장단에 춤을 추며 살아가는 이들은 ‘이미’ 행복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만약 하와가 감사하고 행복했다면 뱀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아담까지 이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씩 사람을 이용하고 죽이거나, 혹은 살리거나 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지금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은 지금 있는 것으로 감사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바랄 것 없이 그저 주님 때문에 충분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려고 무엇을 더 원하게 된다면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나는 생명을 주려다 목이 잘리면서도 감사한 요한의 삶을 살고 싶은가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생명을 희생시키는 삶을 살고 싶은가요?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능력부터 먼저 키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기자증을 받으러 외신기자 협회에 다녀왔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뉴욕 시내로 갔습니다. 문화의 도시답게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깜빡 잊고 여권을 놓고 왔습니다.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성직자 신분증이 있었고, 경비원은 성직자 신분증을 확인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교구에서 발행한 성직자 신분증이 미국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외신 기자증이 있으면 박물관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뉴욕 시민에게 주는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직자 신분증이나 기자증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거짓에서 진실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고, 많은 사람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둘째는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살아있는 권력의 불의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욕망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비록 권력의 칼에 목숨을 잃었지만, 세례자 요한의 외침과 정신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우리는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는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믿으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밥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옷은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면 됐고, 공부는 밤을 새워 하십시오!

-양승국신부-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셨던 스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법어(法語)로 유명하셨던 성철 스님(1912~1993)의 글을 오랜만에 접했습니다.

 

 1981년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셨지만, 큰 스님께서는 속세로 나오지 않으시고, 가야산 해인사에 딸린 여러 암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백련암에서 엄격한 수행을 계속해 나가셨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자신에게나 제자들에게나 얼마나 엄격하셨는지, 그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초파일이 다가오면 다른 절들에서는 사방팔방에 수많은 연등을 달랴, 가장 큰 대목이자 축제인 초파일 행사 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지만, 백련암은 여느때 처럼 조용했고, 등 하나 다는 법이 없었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백련암만큼은 불자들에게 민폐끼치지 말고,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야 된다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백련암 스님들은 사시사철 언제나 바빴습니다. 농사 지으랴, 김장하랴, 장담그랴, 청소하랴, 공양지으랴, 수행하랴, 하루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답니다.

 

 1973년 당시 백련암에서 수행하던 초짜 스님들은 큰 스님의 생신날을 맞아 속으로 엄청 기대를 했답니다. 큰 스님의 회갑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자비심 많은 여보살님들이 이것저것 보따리 보따리 싸오실 것이고, 오늘만큼은 배 좀 두드리겠지 했답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보살님들은 오지 않고, 어제와 똑같은 산나물 반찬 몇가지 뿐인 보통 메뉴였답니다. 큰 스님께서는 ‘속세를 떠난 사람이 생일은 무슨 생일이냐?’며 절대로 그런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을 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정치인들, 권력자들, 재벌총수들, 언론인들이 큰 스님을 찾아와 가르침 받기를 원했지만, 큰 스님은 그 누구든 당신을 만나려면 법당에 가서 3천배를 하고 올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승려라면 무릇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느 측면으로 보나 나는 그분을 대행할 수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별 도움이 안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늘 말했습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가십시오.”

 

 마치 벼락이나 천둥같은 큰 스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큰 스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가톨릭 수도자들에게도 큰 의미와 깨달음을 주는 주옥같은 말씀을 참 많이 남기셨습니다.

 

 “밥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옷은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면 됐고, 공부는 밤을 새워 하십시오!”

 

 “도(道)의 길은 날마다 덜어가는 길입니다. 덜고 또 덜어 아주 덜 것이 없는 곳에 이르면 참다운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최종적인 지향점을 비록 다르지만, 큰 스님께서 보여주셨던 수행자로서의 청빈하고 소박한 삶과 세례자 요한의 삶이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자신에게나 제자들에게나 엄청나게 강직하고 엄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단 1퍼센트의 에너지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메뚜기나 석청처럼 거친 음식이나 낙타 털옷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가 아닐까?’ 기대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나는 그분에 앞서 와서 그분이 오실 길을 닦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조차 묶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저 분입니다. 따라가십시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불의 앞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대상이 대사제든, 총독이든, 로마 황제든 유다 군주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당장 날아갈지라도, 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진리와 정의, 자기 뒤에 오신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세례자 요한의 삶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우리 안에 그런 열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에 ‘열정’이란 단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열정이 식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시들해집니다. 우리 내면에서 열정이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순식간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열정이 사라질 때 우리 한 평생도 고작해야 쓸모없는 시작과 무익한 종말 사이에서 소모되는 시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세례자 요한처럼 열정이 살아날 때, 아니 활활 타오를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인간으로 참 삶을 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따분한 생존의 연속이 될 것인가, 하느님 안에 하루하루 흥미진진한 충만한 날들이 될 것인가는 바로 이 열정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현명한 바보

-반영억신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면 힘들어 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계산을 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선적으로 챙깁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다가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바보와 함께하면 살기가 수월합니다. 그들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봐도 손해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챙길 줄도 모르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세례자는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더라면 헤로데 왕에게 잘 보여 자기의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는데 해야 할 말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 임금이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결혼을 하였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베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목숨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있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에 바보가 될지언정 하느님을 놓치지 않길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빛이 되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모든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지녔지만 지혜도 없었고 헛 똑똑이입니다.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헛된 맹세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신과 체면을 선택하는 계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멍청한 바보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함부로 맹세를 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올 것인지를 안다면 쉽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는 현명한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우물을 파는 이사악의 얘기가 나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한 부족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길을 잡는 것도 그렇고 또 모래땅에서 우물을 파기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일곱 개나 팠습니다. 열심히 파 놓으면 주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또 파고 그러다 보니 일곱 개나 파게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우물을 파지 않고 파 놓은 우물을 차지하려 머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바보가 되어 우물파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창세26,24).하시며 이사악과 함께 하셨습니다.이사악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그의 종들은 그곳에서도 우물을 팠습니다. 결국 바보 이사악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바보처럼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겼던 이사악은 이미 주 하느님을 차지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죽은 이는 요한 세례자이고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나 이사악이 바보처럼 보였지만 현명한 바보, 진짜 똑똑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고 잘 난 것처럼 보인 사람들은 헛 똑똑이였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현명한 바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송영진신부-


스테파노 순교자가 순교 직전에 했던 설교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사도 7,51-52).”
이 말은, 직접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을 비판하는 말이고,
넓게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일들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도 이 비판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고집이 세다는 뜻이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안 믿는 이교도와 같다는 뜻입니다.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말은, 줄곧 하느님을 거역하고 있다는 뜻인데,
인간들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은 인간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였는데,
인간들은 회개하고 구원받기는커녕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의로우신 분’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죄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인간들에게 ‘의로움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의로움을 주신다는 말은 용서와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들이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구세주를 거부한 일의 예고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까지 죽임으로써,
자기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인간들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다는 말에 대해서, “요한을 죽인 사람은 헤로데인데
왜 ‘인간들’이라고 표현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직접 살인죄를 지은 사람은 헤로데입니다.
그렇지만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도 공범이고,
헤로데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모두 공범이고,
넓게 생각하면 헤로데의 범죄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사람들은 다 공범이고,
더 넓게 생각하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모두 공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들’이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예언자”를 죽였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17-20).”

마르코복음의 표현만 보면, 헤로디아만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한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4,5).”
헤로데가 두려워한 것은 요한이 아니라 군중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여론만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지 못하게 막은 것은,
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론의 움직임을 살펴보다가 적당한 때에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군중의 여론이
두려워서,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적당한 명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고 헤로디아를 설득했다.” 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 라는 말은,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불러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요한의 말
때문에 가끔 입장이 난처해져서 당혹스러워할 때도 있었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헤로데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꼈다는 뜻은 없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둔 것은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을 죽이는 것은 처음부터 헤로데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다음에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나중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뒤에 헤로데와 만나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 헤로데는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 26절의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라는 말도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는 것을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손님들 앞에서 경솔하게 함부로 헛된 약속과 맹세를 한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딸에게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라고 말하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마르 6,23).
그런데 그가 ‘내 왕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왕국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고,
헤로데는 사실은 로마황제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손님들은 그런 사정을 환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헤로데가 딸에게 약속하는 말을 듣고서 속으로 비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또는 예언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원래 예언자들의 숙명은(운명은)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말은 별로 좋은 말도 아니고, 적절한 말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파견하실 때, 살해당하라고 파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임무 수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를, 즉 사람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예언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번번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고,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도, 그렇게 살해당한 것은 원래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인간들의 범죄입니다.
< 오늘날에도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 말씀에 나는 지금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고요한 진리

-이종훈신부-


추석이 다가오니 온 산이 예초기 소리로 가득하다. 이름 모르는 저 풀들은 심지도 가꾸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자랄까? 몇 해 전 강아지들이 사막처럼 만들어 놓은 잔디밭이 그들이 사라지자 1년도 채 되지 않아 제 모습을 되찾았다. 자연의 생명력과 회복력이 너무 놀라워 두렵기까지 하다.

 

진리 안에는 폭력이 없다. 아니 있을 필요가 없다. 진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거짓 안에 온갖 술수와 폭력이 가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진리의 힘을 이겨낼 수 없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흐려놓아 진리의 빛을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거짓들보다 온 산을 뒤흔드는 예초기 소리가 차라리 듣기 편하다. 예초기 소음은 그것뿐이지만 세상의 거짓들 안에는 속임수가 가득해서 귀뿐 아니라 마음까지 시끄럽게 만든다. 진심으로 진실만을 반기고 진리를 따른다면 세상은 참 평화로울 텐데.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 우리를 신약으로 넘어가게 하는 다리였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라고 칭송하신 탓일까, 복음서는 그의 탄생과 죽음을 기록하고 교회도 그 사건들을 기념한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 바로 앞에서 그분이 가실 길을 닦았기 때문이다. 그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까지도 예수님 삶의 예고였다. 진리를 외친 요한도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도 부정하고 야비한 폭력에 희생되셨다. 그러나 폭력을 휘두른 그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두려워하였다(마태 14,2; 마르 6,16; 루카 9,9).

 

진리는 죽지 않는다. 그것을 따르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시끄러운 곳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배웠다. 진리는 고요하지만 거짓은 소란스럽고 폭력적이다. 진리의 빛을 가리려하기 때문이다. 주위가 고요해져야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진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을 감아야 그 빛을 볼 수 있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의 폭력이 아니라 내가 그 고요한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온화한 빛을 보지 못함이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의로움과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았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들이 눈에서 사라지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하느님의 약속이다. 박해받음 그 자체로 그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다.

 

예수님,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 옳고 제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를 바라는 마음을 주님 앞에서 모두 내려놓습니다. 떨리지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정말 제가 두려워해야할 것은 세상의 폭력이 아니라 제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진리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6,17-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이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닦아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자기의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순교하였던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견디어낸 사람들과 수도자들의 아버지이다.

 

고행과 순교의 두 면을 보여준 분이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말하였고,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순교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피로써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다. 헤로데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잡힌 몸이 되었는데, 이제는 헤로데의 만용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그래도 그 예언자적 정신은 항상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이 예언자적 삶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박해를 받아왔다. 그래서 권력은 진리를 외치는 입을 막아 침묵하게 하고, 또한 침묵을 강요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들은 그 권력에 맞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외쳐왔고 지금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예언자적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승해야 한다. 이것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라고 알기도 하였고,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아마 예수님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고 세계를 지배할 승리를 가져다 줄 정복자로서 예수님에게서 엘리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엘리야를 무한히 능가하시고 예언자들을 능가하시는 분이시다.

 

현대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도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 역할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땅의 많은 우리 순교자들도 당시의 사회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널리 펼치기 위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시다가 순교하신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 통념적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교회의 가르침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잃지 않기 위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도와 신앙 안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며,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분을 전해주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죄를 짓고 쫓기는 마음으로 헤로데처럼 말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군중들처럼 현세를 위한 해방자로서만 생각하면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진실한 믿음 안에 생명의 주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만에 빠져 죄 없는 사람을 죽음에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자세를 본받고, 주님을 우리의 참 구세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대하고 모시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 6, 25)

-한상우신부-

살인의 잔인함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폭력 앞에서
점점 더 작아지는
우리의
인격입니다.

이 세상은
극과 극을
치닫고 있습니다.

광기어린
폭력성 앞에서
할 말을 잃게됩니다.

폭력과
살인으로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아픈 역사는
너무나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살인의 역사를
아프게 반성합니다.

나의 지나친
욕심으로
누군가의 목이
달아납니다.

무책임한
인간의 욕망으로
요한 세례자가
수난을 받습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소중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하늘 나라의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위해
수난당한 많은
이들의 소중한
생명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오늘도 제2의
요한 세례자가
치기어린 광기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하고 있음을 아파합시다.

살인과 폭력
광기와 잔인함은
생명의 소중함으로
바뀌어야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정화합니다.


-오상선신부-


주님의 길을 준비한 충직하고 겸손한 세례자 요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미사 말씀들에서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예레 1,17).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십니다.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는 행동은 준비된 종의 자세이면서 분연히 자기의 소명을 다할 태세를 갖춘 태도입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입에 담아 주신 말만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 그의 귀와 마음을 거쳐 입으로 선포되지요. 진정한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에 자기 것을 섞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자기가 전한 말씀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겁니다.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세례자 요한의 비극적 죽음을 다룹니다. 이 대목에는 세 부류의 "말하기"가 등장합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입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마르 6,18).
권력자의 비위를 지적하는 일은 늘 죽음의 위험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외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예언자입니다. 이미 그의 가슴에 하느님의 불덩이가 자리하기에 이를 외면하고 목구멍 아래로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질식해 버리고 말 테니까요.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전하며 칼날이 목에 닿아도 진실을 외칠 때 예언자의 마음은 가장 자유롭고 홀가분합니다. 이 자유로움은 하느님 말씀의 통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증거입니다.

두 번째 "말하기"는 헤로데의 것입니다. 비극적 결말을 초래할 수 있는 속 빈 권력자의 허세 가득하고 경솔한 "말하기"지요.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은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힘을 지닌 자의 가벼움이 초래한 "말하기"는 당장 자기 위신과 체면을 구하려는 만용을 넘어 폭력으로 변질됩니다. 그 결과는 예언자의 죽음, 하느님 말씀의 죽음이지요.

세 번째 말하기는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살로메의 "말하기"입니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 청하였다"(마르 6,24-25).
사람을 해치는 죽음의 "말하기", 악이 주도하는 "말하기"입니다. 그녀들은 개인적 원한을 한 의인의 생명으로 되돌려 받고, 역사에 자기들의 부끄러운 이름을 각인합니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이 세 "말하기"를 두루 체험하며 삽니다. 나의 대화에서 어느 "말하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본인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적 시각에서 비극적 결말을 앞당긴 것으로 보이는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하늘 나라를 소유하는 "말하기"는 오로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께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 임금들 앞에서 당신 법을 말하며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당신 계명을 되새기며 끝없이 사랑하나이다"(입당송).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입과 심장에 담아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올 때 그 말씀을 자기가 미리 판단하지 말고 부끄러움 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곧 말씀이신 분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표시지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 신약을 준비하고 그 포문을 열어 준 세례자 요한의 존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 무엇을 믿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진지하게 묻습니다. 온갖 거짓과 기만, 자괴감이 뒤엉켜 발효된 "말하기"는 또 다른 악을 양산하거나 한풀이에 그칠 뿐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할 힘이 없습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
하늘 나라를 차지한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친히 엄호하시니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지 말고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하루가 되길 축원합니다.

바른말인가, 예언인가?
-김찬선신부-


바른말과 관련하여 우리 중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른말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나 사람하고는 가급적이면 좋은 말만 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깨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에게 불이익이 생길 경우에는 돌변하지요.
그러니까 자기의 불이익과 관련해서만 관여하거나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정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나 사람에게도 뭐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끼어들지 말라 해도 그는 그 사람 때문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 때문에 끼어드는 사람이기에
자기가 생각할 때 옳다고 생각되면 바른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어떻게 보면 이 양 극단의 중간인 사람입니다.
관계를 중시하기에 해야 할 얘기를 못하기도 하고,
사랑의 관계 때문에 다른 사람은 하지 않고
자기도 하기 싫은 얘기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사랑과 관계를 중시하기에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말을 못하기도 하고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하며,
바른말을 하기보다는 필요한 말을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그에게 필요하면 두려워도 바른말을 하지만
그에게 필요하지도 않고 그와 나의 관계에 도움도 되지 않으면
바른말을 굳이 하려하지 않는데 그것은 사랑의 관계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바른말일지라도 다 불필요한 말이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예언자들의 말은 위 세 가지 중 어떤 부류에 해당될까요?

제 생각에 예언자들의 말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은 그저 바른말이 아니고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이기에
그 말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저도 옛날에 경험한 바가 있고 가끔 신자들에게 듣는 말이
사제가 강론을 하면서 복음을 얘기하지 않고
정치적인 얘기를 한다거나 복음과 상관없는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사제 본인은 물론 자신의 강론이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라 하지요.
사회정의를 위해 바른말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사제는 사회정의를 위해 바른말을 해야 하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거라고 생각되면
자기도 하기 싫고 다른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 해야 하며,
그럴 때 사회정의를 위한 바른말은 그저 바른말이 아니고 예언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말도 바로 이런 거였지요.
문제는 어떤 때 그것이 하느님의 말이 아니라
사제 자신의 말이라고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복음이나 성경을 가지고 얘기하는데도
예언이 아니라 자기얘기라고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도 사회정의를 복음에 비춰 얘기할 때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느님을 끌어들여 하는 것은 아닌지.

사실 바른말과 예언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내가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사람 또는 예언자라는 의식이 없으면,
그런 정체의식이 없이 얘기하면 예언이 아니라 바른말일 뿐인 거지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나와 상관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
-하느님도 없고 사랑도 없고 그저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29일 화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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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