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31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오 25,14-30)
‘Well done, my good and faithful servant.
Since you were faithful in small matters,
I will give you great responsibilities.
Come, share your master's jo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하시며 탈렌트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계명을 받아 잘 실천한다고 칭찬하면서 더욱더 그렇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은총은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해 주는 생명의 씨앗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하여 탈렌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멀리 떠나는 부유한 주인이 자기 재산을 세 명의 종에게 맡겨 저마다 제 능력에 따라 벌어들이게 합니다. 분명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을, 주인의 여행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주인의 돌아옴은 주님의 재림을 나타냅니다.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하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냅니다. 셈을 하는 것은 심판의 심사를, 판결은 다시 한번 축제의 관례적인 모습으로 상징되는 하늘 나라에 함께하거나 거기에서 내쳐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실수하는 죄인임을 살펴보고 깨닫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과도한 안전의 열매인 무책임과 무관심, 게으름과 편안, 이기주의와 경직된 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이 오늘날에 저지를 수 있는 사회적인 대죄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탈렌트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하였는지 물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탈렌트는 당신 나라의 재산과 재물, 곧 구원, 믿음, 당신 사랑과 우정 ……, 그다음에 자연적인 선물, 곧 생명과 건강, 지식과 의지, 가족과 교육, 계획과 노동 등이 있습니다.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교 성소는 다른 모든 것을 요약하는 큰 탈렌트입니다. 이 모든 선물과 탈렌트는 우리가 개인적이고 독점적 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선물과 탈렌트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행사를 마치고 며칠 뒤에 본당 신부님과 사목 위원들이 모여 이 행사 결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홍보분과장이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구역분과장이 연락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신자들의 참석이 적었다.’, ‘총무부장의 진행이 미숙했다.’, ‘재정분과장의 예산 집행이 잘못되었다.’ 등등의 말이 나오면서 상대방에 대한 질책과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변명만 가득한 회의였습니다. 그러자 이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본당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총책임을 맡고 있었던 저의 잘못입니다. 전체적으로 점검을 잘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저의 책임입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책임을 회피하려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웠기 때문이지요.
사실 서로에 대한 질책이 계속되면 안 좋은 마음만 가득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따라 발전의 가능성도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지는 말이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 이 안에서는 긍정적인 말, 발전 가능성의 말이 나오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한 탈렌트가 얼마나 되는지 낯선 돈의 단위라서 감이 잘 오지 않겠지만, 한 탈렌트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한 달란트는 성인 노동자의 약 20년의 임금에 해당했으니까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셈을 합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다섯 탈렌트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는 두 탈렌트를 더 벌어오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땅을 파서 돈을 숨긴 뒤에 주인이 왔을 때 받은 한 탈렌트를 그대로 내놓습니다. 그렇다면 수익을 냈기 때문에 칭찬을 받고,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둠 속으로 내던져진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핑계만 대는 모습에 화를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핑계와 이유만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으려면 무엇이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나는 성공하고자 힘을 구했지만, 신은 겸손과 순종을 배우도록 나를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큰일을 이루고자 건강을 구했지만, 신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에게 병약한 몸을 주셨습니다.
나는 행복해지고자 부를 구했지만, 신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에게 가난을 주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는 권력을 구했지만 신은 당신의 존재를 알도록 나에게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나는 인생을 즐기고자 모든 것을 구했지만, 신은 나에게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주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망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신은 나라는 아주 작은 존재의 하찮은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신이시여,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고 있나요?

감사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전삼용신부-
‘니모를 찾아서’와 ‘토이 스토리’를 제작한 픽사(3D 애니메이션 업체)의 에드 캐트멀 회장은 픽사가 다른 회사에 인수되었을 때 직원을 해고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상사가 그를 불러 다음 날 아침까지 해고해야 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상사의 사무실로 가서 말했습니다.
“여기 두 사람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곤 자기 이름과 다른 고위직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해고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해고하고 싶다면 나를 해고하세요.”
이렇게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먼저 해고되기를 바랐던 인물은 그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29세 때 와튼 스쿨 최연소 종신교수가 된 애덤 그랜트의 ‘Give and Take’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그는 베풀 줄만 아는 사람이 실패도 많이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있는 많은 이들이 또한 잘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베푸는 자가 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요즘 시대는 협업을 해야 하는 시대인데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풀지 않으면 혼자가 되고, 그래서 혼자 노력해서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더 기분 좋게 베푸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실패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너무 베푸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기쁘게 베푸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베풉니다. 종교의 신념 때문에, 혹은 다른 사람의 평가 때문에 베풉니다. 두려움 때문에 베푸는 사람은 진정 베푸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공하는 베푸는 사람들은 기쁘게 베풉니다. 보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베푸는 게 좋아서 베푸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땅에 한 탈렌트를 묻어둔 게으른 종은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여겼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두 종들은 하느님을 무섭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 그러니까 하루 품삯을 10만원이라고 한다면 6억 원 정도 됩니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다른 종들에겐 더 주는 것 같으니 하느님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미워한 결과는 하느님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돈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는 핑계로.
하지만 나머지 두 종들은 주인의 돈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쯤 잃어도 주인은 야단치지 않을 것을 아니까 맘대로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은 창의력을 갉아먹습니다.
감사하는 종들은 베풀 줄 아는 종들입니다. 장사를 하다 잃어도 주인이 크게 노하지 않을 것을 압니다. 하느님을 무한히 자비하신 분으로 보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게으르고 못된 종은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도 무자비한 사람이 됩니다. 그 돈을 잃지 않으려고 땅에 묻어둡니다. 혹 장사를 하다 잃으면 주인에게 혼날까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자비로울 수 없고 절대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많은 업적을 내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까짓거 다 잃어도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할 사람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 같은 경우는 배 열 두 척을 가지고 3백 척과 맞서 싸우러 나가는 것입니다.
다 잃어도 됩니다. 어차피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밖에서 돈을 다 쓰고 들어와도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녀에게 좋은 경험이 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니까 잃는 것이 두려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무자비하게 보는 이유는 자신이 무자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하느님도 무섭고 이웃도 무섭기 때문에 경직된 삶을 살게 됩니다. 정글 속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살아남아야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남에게 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홀로 남겨져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실패가 두려워 시도도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께 덜 받았다는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 현명하고 착한 종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해합니다. 감사가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감사해야 가진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종은 딱 두 부류로 나뉩니다. 감사하는 종과 그렇지 못한 종입니다. 재능을 진정으로 발휘하고 싶거든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재능을 땅에 묻어놓는 종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기쁘게 자비로울 수 있고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자비롭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새로운 곳에 온 지 10일이 지났습니다. 거주자 등록증을 받고 운전 면허증을 따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꿈속에서 유격 훈련을 받았습니다. 장애물을 넘어야 하고, 구보를 해야 하고, 동료가 실수하면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제대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유격 훈련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제 앞에 놓인 새로운 업무가 무겁게 느껴져서 그런가 봅니다. 신문을 홍보하고, 광고를 유치하고, 신문을 발행하는 일입니다. 비행기도 타야 하고, 운전도 해야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능력을 믿으며 장애물이 있다면 넘어가려 합니다. 부족함이 있다면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려 합니다.
사제생활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사목했던 성당에서는 ‘태권도’를 시작했습니다. 7명이 시작한 태권도는 사범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수녀님의 따뜻한 미소가 있어서 인원이 늘었습니다. 수녀님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교리를 받은 아이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태권도를 통해서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자기의 몫을 다 하고 있습니다. 20년 전의 일인데 지금 생각해도 흐뭇한 기억입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로 있던 성당에서는 ‘마당’을 만들었습니다.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성당 앞 아파트의 축대벽이 밀려났습니다. 방송에도 보도가 되었고, 당시 서울 시장도 방문했습니다. 성당 앞의 동산이 높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서울 시장, 구청장과 상의했습니다. 성당 앞의 동산을 깎아내리자고 제안했습니다. 대형 덤프트럭 1,200대 분량의 흙을 퍼냈습니다. 성당 앞에는 모든 신자가 함께 지낼 수 있는 마당이 생겼습니다. 그 마당에서 윷놀이대회를 하였고, 그 마당에서 성모의 밤을 보냈고, 그 마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뛰놀았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태풍 속에서 춤추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1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감사할 기억입니다.
10년간 신학생을 위한 ‘영신수련’에 함께 했습니다. 30일 피정에 함께한 것은 부족한 저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며 변화되는 신학생을 보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원리와 기초, 두 개의 깃발, 겸손의 3단계, 3가지 유형의 사람’은 사제 생활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심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면서 신학생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삶은 모든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할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 나눔과 봉사는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 욕망과 욕심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은 늘 푸르고 많은 생명이 살아갑니다. 이는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모래에는 생명이 살기 어렵습니다. 이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곁에서 듣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늘 생기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합니다.

하늘나라는 은총인 동시에 요청, 선물인 동시에 사명입니다!
-양승국신부-
열 처녀의 비유에 이어 곧바로 탈렌트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탈렌트의 비유 역시 열 처녀의 비유처럼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주인(예수님)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들(그리스도인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5탈렌트, 2탈렌트, 1탈렌트를 건넸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화폐 가치에 따르면, 1탈렌트는 어마무시한 금액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는데, 1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탈렌트는 3~4억원 정도?!
주인이 이토록 엄청난 거금을 종들에게 맡긴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돈을 불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넉넉한 시간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주인이 돌아와 보니, 두 명은 나름 선방을 했습니다. 그래서 후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비전도 없이, 게을러 터지기만 했던 마지막 종은, 주인으로부터 무서운 질책을 당하고, 상은 커녕, 가지고 있던 한 탈렌트마저 빼앗깁니다.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져, 울며 이를 갈것이라는, 조금은 두려운 가르침입니다.
탈렌트의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여러 교훈 가운데 으뜸 교훈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은총인 동시에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선물인 동시에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1년이나 2년, 10년이나 20년이 아니라 꽤나 많은 시간, 오랜 세월, 충분한 시간을 선물로 주십니다. 동시에 우리 인간 각자 안에 진귀한 보물들을 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번 생애 동안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동료 인간들과 교회 공동체와 주님을 위해 선용하고 봉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때 까지, 아니면 우리를 당신 앞으로 불러주실 때 까지, 그분으로부터 받은 소임에 매일 충실해야겠습니다. 기도나 선교, 가르침이나 이웃 사랑의 실천 등등, 우리 각자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과제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야겠습니다.
하늘나라는 주님 홀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적극적인 협력에 의해 창조되고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 인간 측의 노력이 아무리 하찮고 미력해보일지라도, 하늘나라 건설에 기여하게 된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는 하루 하루가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준비해야 하는 결단의 시기임을 무시하고, 게으름과 안일함 속에 푹 빠져 살아가던 어느 순간, 갑작스레 등장하신 주님의 무서운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저 쓸모없는 종은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26절, 30절)
여차하면 드러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일 절친같은 소파와 안락의자, 티비나 모니터와 과감히 결별하고, 부단히 일어서야겠습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을 하늘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겠습니다.
하늘나라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나른한 꿈이나 공상을 통해서 절대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잠에서 과감히 깨어나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매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간과 기회, 재능과 에너지를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함을 통해서, 우리 앞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반영억신부-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바탕으로 나의 노력을 더해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재대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뭔가를 기대만 하는 사람은 불평불만, 합리화를 꾀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투덜댈 여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며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순례
-이종훈신부-
어느 날 보니 내가 있었다. 나는 아무런 바람과 의지가 없었는데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다. 그러니 나는 만들어졌고 누군가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생명이 주어졌으면 그와 함께 시간도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이 나에게 생명과 시간을 주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은 하나의 긴 순례이다. 순례목적지는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이다. 오늘날은 목적지로 가는 길은 물론이고 지금 자신에 어디쯤에 있는지 알아 실패하는 일이 매우 적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묻고, 믿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다시 묻고, 또 믿고 가야 했다.
내 생명의 주인님은 나에게 아주 많은 돈을 선뜻 맡기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맡기셨다. 한 탈렌트는 약 10억 원쯤 될 것 같다. 어떤 조건도 분부도 없이 나를 믿고 맡기고 멀리 떠나가셨다(마태 25,15). 주인님이 더디 오셔서 맡기신 그 돈이 내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그것은 엄연히 주님 것이다. 때가 되면 돌려 드려야 한다.
어떤 이는 보관하는 게 부담스러운 지 아무도 찾지 못할 땅 속에 묻고, 어떤 이는 호기롭게 그 돈으로 무엇을 한다. 주인님의 그 돈을 땅 속에 묻는 마음을 아주 잘 안다. 반면 그 큰돈을 막 사용하는 마음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걸까, 아니면 너그러우신 주님을 믿는 걸까? 주님은 나를 믿고 그 큰돈을 맡기셨다. 맡길만하니 맡기셨겠지. 잘 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해보라고 그러셨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어김없이 돌아오시는 주님께 그대로 돌려드리는 게 더 안전할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를 통해 또 하나 좋은 것을 배우고 주님이 넉넉하게 주셨으니 잃어버린 것은 잊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예수님, 이렇게 큰돈과 시간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잘은 못해도 무엇인가 해보려고 합니다. 주님의 성령을 보내주시어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게 이끌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길의 인도자이시니 가벼운 짐과 편한 멍에를 지워주시는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주소서. 아멘.

복음: 마태 25,14-30: 탈렌트의 비유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탈렌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누구를 도와주는 일일 수도 있고, 돈이나 가르침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자신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
집주인은 만물의 주님이신 창조주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산을 맡기신다. 이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적 선물을 주신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맡겼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액수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 탈렌트를 받았다고 결코 적은 액수를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한 탈렌트도 엄청나게 큰돈이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 탈렌트를 이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리고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이와 같이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의 돈을 땅에 묻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세속적인 것에서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영적인 이익을 구하는 데 쓰지 않고, 세상일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
“오랜 뒤에”(19절) 주인이 와서 종들과 셈을 하게 된다. 첫째 종은 자신감에 차서 주인에게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20절) 주인은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절) 이 말씀은 온갖 축복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두 탈렌트를 더 벌은 사람에게도 같은 칭찬과과 함께 영원한 보상으로 인도되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물러가서 “탈렌트를 땅에 숨겼다.”(18절) 이 종은 자신의 것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볼 마음이 없었다. 교회 안에도 게으른 삶을 살면서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탈렌트를 주인에게 돌려주려하자,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하면서 종을 꾸짖은 다음, 그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주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고 한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선물들도 받는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가 받은 것처럼 보이는 선물들마저 빼앗긴다. 자기 능력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지도 모르며,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빼앗겨도 빼앗긴 줄도 모르게 된다. 그 때에 주인은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30절)하고 선언할 것이다. 우리의 탈렌트를 늘리려 노력하는 삶을 살도록 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태 25, 21)
-한상우신부-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탈렌트의 여정입니다.
탈렌트를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탈렌트를 잘
활용하길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이며
기쁘게 돌려드려야 할
탈렌트입니다.
탈렌트는
결코 내 것으로
숨겨둘 수 없습니다.
활용하고
나누어야 할
주님의
은총입니다.
꼭 쥐고 있는
탈렌트는
탈렌트가 아닙니다.
나누는 것이
삶에 성실하고
충실한 탈렌트의
기쁨입니다.
저마다의
탈렌트와
함께하는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탈렌트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기꺼이 삶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은총과 봉헌의
탈렌트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제자들이(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종들이 거둔 성과나 과오는 각자의 하느님관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 두 탈렌트, ...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인(주님)은 이미 종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탈렌트의 한도 또한 정해줄 수 있었지요. 그리스 화폐 단위인 한 탈렌트는 6,000 드라크마인데, 1 드라크마는 히브리 화폐로 1 데나리온입니다. 1 데나리온은 우리가 알다시피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우리 식으로 환산해서 보면, 일꾼의 하루 품삯을 최저임금, 8시간 노동으로 7만 원이라 볼 때 6,000 데나리온(드라크마)인 한 탈렌트는 420,000,000원입니다. 제 계산이 맞다면 한 탈렌트가 4억 남짓한 돈이니, 20억, 12억, 4억을 종에게 맡기고 여행을 떠나기엔 통 큰 액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각 종들에게 부여된 탈렌트의 수량이 공정치 못하다고, 차별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각자의 능력을 잘 "아는" 주인의 역량과 재량을 볼 때 틀린 판단이 아님을 믿게 됩니다 또 탈렌트는 잘 활용해서 주인에게 유익이 돌아가도록 종에게 맡겨지는 것이지 각 개인의 소유나 전유물이 아님을 전제해야 하지요.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받은 종들은 이를 활용하여 그만큼의 액수를 더해 주인 앞에 내놓습니다. 대단한 능력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준 주인의 뜻을 신뢰하고,자기를 믿어준 만큼 최선을 다해 결과를 낸 것이지요. 참 단순하고 담백합니다. 자기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 믿어주는 주인처럼, 주인이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 그분을 인식하고 신뢰한 결과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물론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탈렌트의 양은 그리 적은 액수가 아닌 듯한데, 주인은 "작은 일에 성실"하다고 칭찬합니다. 당신이 맡긴 일을 "작은 일"이라 칭하는 주인의 겸손입니다. 사실 주인 입장에서 볼 때 액수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신뢰, 순종이 주인을 기쁘게 합니다.
두 종들에게는 이제 "많은 일"이 맡겨질 것입니다. 이는 세속적 시각에서 쏟아질 일의 분량을 가리키기보다 주인과 더 자주 통교하며 접촉하는 친밀한 관계, 신뢰가 요구되는 일의 성격을 의미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 종들에게 맡겨진 첫째 일은 주인과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받은 한 탈렌트를 숨겨 두었다 고스란히 되돌려준 마지막 종의 모습에서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 짠한 마음이 듭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마태 25,24-25).
그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한 대로 행합니다. 복잡하고 부정적이며 왜곡된 그의 앎은 두려움을 일으켜 진취적 사고를 멈추게 하고 가능성을 묻어 버립니다.
그런데 주인(주님)은 자신의 모습을 절대화해서 고정시키거나 그 모습을 우격다짐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종이(우리가) 아는 대로, 믿고 고백하는 대로 당신을 드러내고 그에 맞갖게 대해 줍니다. 주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면 긍정적으로, 부정적이면 부정적으로 열매를 내줍니다. 사실 그런 시각에 고착된 종이, 우리가, 인간이 그런 결과를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부정적일 경우, 썩 유쾌하진 않아도 이미 내면에 새겨진 상이 익숙할 테고 적어도 자기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보상이 되니까요.
제1독서에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내는 바오로의 칭찬과 권고가 이어집니다.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1테살 4,11).
주님 뜻에 순종하여 동요 없이 살고, 맡겨주신 일에 자기 일처럼 전념하며, 스스로 성실히 임하라는 뜻일 겁니다. 주인을 바로 알고 신뢰하는 종의 자세지요. 이미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이 본을 보여준 그대로입니다. 이런 삶의 모습에는 주인에 대한 바른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탈렌트라는 것이 단 하나일지라도 어마어마한 가치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저 소박하고 소소한 능력, 재능 정도로 여겨왔는데, 실제로는 그 안에 우리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앎과 신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탈렌트 중 그 어느 하나도 자기 것은 없다는 것, 하느님의 영광과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잠시 맡겨진 것임을 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그리고 탈렌트의 충실한 활용은 하느님과 기쁨을 나누는 선물로 열매가 맺힙니다.
비교의식, 우월감, 박탈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무기력, 게으름은 하느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산물입니다. 있는 그대로 나를 알고 믿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알아드리고 믿어드리고 사랑해 드리는 것이 아무 공로도 없이 엄청난 탈렌트를 부여받은 우리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조용히...
8월 한달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능력은 꼭 사랑과 만나야
-김찬선신부-
“사실 여러분은 모든 형제에게 형제애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더욱더 그렇게 하고,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오늘 독서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형제애를 잘 실천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고 그렇지만 더 잘 실천하기 위해 몇 가지를 덧붙입니다.
곧 조용히 살고, 자기 일에 전념하며,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라고 하는데
이 말은 형제애를 잘 살긴 하지만 시끄러운 문제도 있었나 봅니다.
조용히 살라는 것은 시끄러운 일이 있으니 조용히 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자기 일에나 전념하지 않고 괜히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을 하거나
자기 일을 자기 스스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해주기를 바라고
그런데 그리 해주지 않을 때 갈등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적어도 요즘 사람들처럼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식으로 서로 무관심하며 살지는 않았고,
그런 면에서는 정말 형제애를 잘 살고 있었나 봅니다.
사실 요즘은 서로 무관심하고 관심을 끄라고 할 정도로 부담스럽게 여겨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시듯 기쁨과 슬픔도
함께 나눌 수 없는 극심한 고립의 불행을 살고 있는데 이에 비하면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형제애는 칭찬받을만하고 계속 살아야 할 삶입니다.
그런데 이 형제애를 오늘 복음의 비유와도 연결시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탈렌트란 형제애를 위해 이웃과 나누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자라게 해야 할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것은
그것을 썩히거나 자기만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고,
이웃과 나눠 하느님의 사랑이 자라게 하라고 주신 겁니다.
그런데 재능이 사랑을 만나지 못하면 똥과 같이 썩습니다.
저의 경우 오늘 복음의 비유를 깨닫기 전에는 능력을
하느님께서 주신 게 아니라 내 거라고 생각을 했고,
저의 음악적, 문학적 능력에 열등감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작곡도 하고 소설도 쓰곤 했는데
모차르트와 비교하며 작곡을 그만두었고,
괴테와 비교하여 쓰던 장편소설을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오늘 복음의 비유를 들어 깨닫게 되었고,
능력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느님 뜻대로 써야하고,
하느님 뜻이란 이웃을 위해 능력을 쓰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는
음악적 재능으로는 성가를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고
문학적 재능으로는 매일 강론을 올리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주신 능력을 사장하거나
형제애를 위해 쓰지 않고 자기 배 불리기 위해서만 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좋은 머리와 능력을 자기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만 쓰고,
어떤 사람은 지위와 능력을 자기 이름 날리는 데만 쓰며,
어떤 사람은 돈과 시간과 건강을 먹고 즐기고 취미생활 하는 데만 씁니다.
이에 비해 재능을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며
사랑을 위해 쓰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제 주변에 그런 분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의료인들이 <여기 선교 협동조합>이 추진하는 이주민을 위한
무료진료 계획을 듣고는 자진해서 참여하겠다고 오셨고,
음악적 재능을 가진 분들이나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던 분들도
당신들이 쓰일 곳이 없냐며 스스로 찾아오셨는데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고,
주님 말씀대로 가진 것에 더 갖게 되고 복도 받은 것에 더 받을 분들입니다.
능력은 꼭 사랑과 만나야 하고 그래서
형제애와 하느님 사랑을 증진하는데 쓰여야 하고 그럼으로써
너와 나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쓰여야 함을 깊이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3년 8월 31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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