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8. 26. 19:39

2019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마태오 23,23-26)


You cleanse the outside of cup and dish,
but inside they are

full of plunder and self-indulgen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위선자이며 눈먼 인도자들이라고 하시며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그동안 겪은 역경과 박해에도 그들이 보여 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구한 희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사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를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 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일깨워 줍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불행하여라, 너희 ……들아!”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세 가지 불행 선언은, 각각 하느님 나라, 개종자를 얻으려는 행위, 맹세에 관한 것이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과 종교를 왜곡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오늘날에도 열린 마음과 열정과 기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주변에서 봅니다. 이런 태도는 마음은 멀어지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헛된 예배 행위입니다. 나아가 이는 ‘늘 해 오던 것’만 굳게 지키며, 새로운 바람을 두려워하여 시대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전통주의를 고집하며 오래된 옷과 가구의 냄새를 제거하는 신선한 산들바람에 창문을 닫게 합니다.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면 인간의 대답, 곧 믿음은 행실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삶의 분리,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분리,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잡지를 보다가 ‘손금 보는 법’이라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이 잡지의 설명을 토대로 서로의 생명선을 비교했습니다. 우리 중에서 제가 제일 짧더군요. 남들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짧은 저의 생명선 손금을 보고 친구들은 하나같이 “너 일찍 죽나 보다.”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괜히 마음이 울컥해져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구석진 곳에서 혼자 훌쩍거리며 울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선이 제일 짧은 저는 지금 다른 친구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제 친구들이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 중에 제일 오래 살 거야.”

길게 그리고 짧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최종 목표는 이 세상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니까요. 따라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바로 두 가지의 ‘용기’가 아닐까 싶네요.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를 갖기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끊임없이 연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용기는 이렇게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직접 행동으로 취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브드 소로는 ‘삶이 아닌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라는 말을 했지요. 자신의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과감하게 뒤엎을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좋은 삶’, ‘행복한 삶’을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제에 이어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해서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열심히 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에는 탐욕과 방종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였던 이유는 이 세상의 삶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끝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좋게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잔 속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직접 실천하는 용기를 통해 우리 삶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기 2,10)



나이(김재진)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보고 싶은 사람보다
볼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던 슬픔을 순서대로 만나는 것이다.

세월은 말을 타고 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침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십일조와 미사의 목적

-전삼용신부-


어떤 성당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교중미사 때 제단 앞에 관이 놓여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번 교중미사는 장례미사로 치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강론 때는 그 관 속에 들어있는 사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예수님과 매번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은 그 사람이 누굴까 의아해합니다.

      강론을 마친 신부님은 일렬로 나와서 관 안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라고 합니다. 신자들은 한 사람씩 관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관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신 거울이 하나 놓여있었습니다. 그 거울에는 관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관을 다 본 다음 신부님은 이런 말로 강론을 마무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곧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도 이런 장례식을 치르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강의할 때 거의 항상 미사 때 사제가 성작을 들며 반복하여 외우는,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 ” 이라는 경문을 한 번 신자들도 외워보라고 시킵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외우지 못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내 피다.”라고 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미사를 하면서 가장 집중하여야 할 때 집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심지어는 미사에 왜 나와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미사에 나오면 저절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미사에만 참석하면 되지 사제가 하는 그런 경문은 뭐 하러 신자가 외워야하느냐?”라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경문 내에서 “새롭고 영원한 계약”과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라는 구절은 생각이 나야합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분과의 계약과 연결되지 않으면 미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계약의 갱신식이 미사인데, 그냥 미사만 참석하였다고 하여 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정녕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저 형식적으로 전례에만 참석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 채 성전에 나오고 오래 기도 하고 십일조를 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신들의 뜻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은 물어볼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시러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뜻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자꾸 하느님의 뜻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미사는 내 뜻을 주님께 알려주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들으러 오는 시간입니다. 미사에만 참석하였다고 하여 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도로의 표지판은 그것을 통해 목적지를 가게 하는 것이 존재이유입니다. 십일조나 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자체가 구원을 보증해주지 않습니다. 표지판을 보았다고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해야 했을까요? ‘아, 맞다. 에덴동산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지!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시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선악과를 통해 주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에덴동산의 선악과입니다. 십일조를 내며 내가 가진 모든 것, 나 자신의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석하면 구원 받을까요? 그것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적인 생각입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구원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과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목적을 알고 그 목적지에 도달하려 노력해야합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갱신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기억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미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고 갱신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피를 주시니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따라주어야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심같이 나도 이웃을 위해 피를 흘려주어야 하는 구나! 그래야 그분과 계약이 유지되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구나!’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면 마치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두고 미사에 오는 사제나 레위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채 미사를 하시는 분들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가 확실합니다. 작은 벌레들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기 때문입니다. 먼저 헌금을 하기 이전에 빨리 미운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고 축복의 기도를 해 주어야합니다. 당장은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용서가 될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 줄 것을 결심해야합니다. 그래야 미사의 목적을 알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항상 내가 하는 모든 신앙행위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라벤더의 꽃 이름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향이 은은하고 청초하기에 사랑, 순수, 진실, 우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라벤더의 의미는 의심이라고 합니다. 불신이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이라면 의심은 진리를 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런 뜻이라면 라벤더의 꽃말이 향기와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많은 슬픔과 불행은 의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권력은 의심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폭력은 의심을 두려워합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의 보편적인 을 깨고 여기까지 온 것도 끊임없이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이끌어 온 선각자들은 모두 의심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고통의 의미를 의심하였습니다. 고통은 집착과 욕망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의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아수라의 고통 속에 있을 겁니다. 모든 번뇌는 내려놓으면서 사라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의심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무엇인지 의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을 질책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 비어 있는 사람, 가식과 위선으로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을 질책하십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권력의 달콤함에 취한 사람, 자신의 이익을 먼저 탐하는 사람, 신앙의 이름으로 이방인을 단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겸허하게 교회의 가식과 교회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세상은 그런 교회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지만 모든 권위를 내려놓았습니다. 충분히 보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가진 것까지 나누었습니다. 꽃길이 아니지만, 가시밭길이라도 기꺼이 걸어갔습니다. 겉보기에는 초라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사람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건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고 상처를 주었던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몸으로 전하는 신앙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벤더의 향기와 아름다움은 끊임없는 성찰과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인 의심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신앙을 깨워 줍니다. 어느덧 자기 합리화의 덫에 갇혀 있는 신앙을 깨워 줍니다. 위선과 가식에 쌓여 가난한 이를 외면하는 신앙을 깨워 줍니다. 합리적인 의심은 우리 안에 스며든 악의 세력을 몰아냅니다. 합리적인 의심은 신앙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루하루는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그 사람이 지나온 자리에 표시가 나기 마련입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양승국신부-

 

교회 역사 안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354~430)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신 성인이 다시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소년 시절 그의 방황과 타락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은 다 다녔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니교 이단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충격에 사로잡힌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332~387)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백방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때로 타일러도 보고, 때로 야단도 치고, 때로 눈물로 호소도 해보고, 밤 새워 기도도 해보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썼습니다. 아들 때문에 밤낮없이 울고 다니던 그녀에게 암브로시오 주교님은 이런 위로의 말씀을 건넸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방황하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모니카의 얼굴과 우리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하소연하시는 성모님의 얼굴이 꼭 빼닮았습니다. 문제 청소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와 타락 앞에 취한 어머니의 태도는 참으로 영웅적이었습니다. 달콤한 죄의 유혹에 깊이 빠져든 아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한 가지 전략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장기전(長期戰)’이었습니다. 아들의 변화를 위해서는 오랜 투자와 무한한 인내,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진 아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목숨을 다 바친 기도, 지극한 정성이 담긴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새로운 삶을 지향하며 수시로 단식했으며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모니카가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사방이 높은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방황과 타락의 세월은 점점 길어지고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남편 역시 신앙심은 빵점이고 출세욕구나 야심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고 매일 울고 다니다보니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가족 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16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남편과 아들과 손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요 추앙받는 대 성인으로 거듭났습니다.


마음은 신용장

 -반영억신부-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적이고 참된 의로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가 누구를 속였어도 그것은 내가 빠져 나간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러니 기도합니다.“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삶의 여정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위선

-송영진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3-2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은 무시하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만 한다.
2)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하고, 보이는 일만 한다.
3) 그들은 어려운 일은 무시하고, 쉬운 일만 한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들의 율법 실천은 그냥 ‘위선’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생활입니다(마태 7,21).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취미생활이 될 뿐입니다.
또 그 일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위선자들이 눈에 보이는 일만 열심히 하고,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만 의식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하고 존경하더라도
그 칭찬과 존경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만죄만 더 크게 키우는 일이 될 뿐입니다.

물질적인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가진 것이 있기만 하다면
큰 정성을 쏟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위선자들은 그런 일을 하고서는 열성적인 신앙인인 척 합니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정성을 다 쏟아서 해야 하는
의로움, 자비, 신의를 실천하는 일은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바로 그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문제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경우에도 마음속에 사랑 없이,
또 정성도 없이 겉으로만 실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사랑 실천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여기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그 일도 중요한데, 더 중요한 것은 사랑 실천입니다.)

24절의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라는 말씀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만,
또 눈에 보이는 일과 하기 쉬운 일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낙타는 그냥 삼키는”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일과 하기 어려운 일은 무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이 말씀은, 철저하고 엄격한 정결예식을 통해서 ‘겉’은 깨끗하게 하면서도
마음속은 깨끗하지 않은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게 보이지만 마음속은 거룩하지 않은 경우,
또 겉으로는 열심하고 성실한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마음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 등도 모두 포함됩니다.)
주일미사 빠진 적 없고, 교무금과 봉헌금도 잘 내고,
신심단체 활동과 여러 가지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겉으로만 보면 백점짜리 신앙인으로 보이는데, 과연 그 마음속은 어떨지...
(진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인지, 겉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인지...
마음속으로 딴 마음을 품고 있거나,
또는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떤 불순한 의도로 열심히 하는 척 하는 것인지, 진짜로 열심히 하는 것인지...)
하느님께서는 사람 속을 꿰뚫어보시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위선자 자신도 자기가 위선자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위선을 판단하는 일보다
자기 자신의 위선을 반성하는 일이 더 급하고,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합니다.
“혹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교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인데,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위선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입니다.
그 부부는 재산의 일부를 떼어 놓고서는 전 재산을 봉헌하는 척
했는데(사도 5,1-2), 사람들에게서 칭찬받고 싶은 명예욕도 버리지 못했고,
재물에 대한 소유욕도 버리지 못해서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의 위선을 꿰뚫어본 베드로 사도는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 라고 말하면서 하나니아스를 꾸짖었습니다(사도 5,4).

코린토 교회 신자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만찬’과 관련해서 코린토 신자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그 교회의 부자들은 ‘주님의 만찬’을 거행한다고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먹고 마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라는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도 명백하게 ‘위선’입니다. 


어머니인 교회

-이종훈신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세력을 키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살아갈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평신도는 세상 속에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세상에서 그들을 부르셨고 또 다시 그 속으로 파견하셨기 때문이다. 어깨띠를 두르고 몰려다니며 확성기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침은 선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역효과를 낸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나 성모님 또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은 교리보다는 예수님의 삶이다. 그분의 삶은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1테살 2,7)’ 같았다.

 

세상은 똑똑하고 강력함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함을 더 바란다. 아마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란 말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단번에 찾아들어간다. 지식을 전하는 선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방에서도 만날 수 있다. 비판하고 훈육하는 이들은 곳곳에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도 나에게 그렇게 한다. 그러나 나를 있는 그대로 너그럽고 온화하게 받아주며 신의를 지키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 하느님께 십일조를 바친다. 그것은 교회의 선교활동을 위한 재물보다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이 율법의 핵심적인 요소들이다(마태 23,23).’ 사실 이런 것들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요소이다. 예수님을 참 하느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루의 십분의 일, 30분만이라도 이웃에게 어머니가 되어주는 척이라도 한다면 세상은 정말 평화로울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고 선교이다(1테살 2,4).

 

예수님, 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조금만 더 너그럽고 온화하게 이웃들을 맞이하겠습니다. 속마음까지는 그럴 수 없다면 겉으로라도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다보면 속마음도 그렇게 되겠지요.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셨던 그 믿음과 신뢰를 저에게도 가르쳐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3,23-26: 먼저 속을 깨끗이 닦아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법규였다. 신명 14,22너희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 놓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레위 27,30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성전의 제사와 제관 일을 돌보는 레위지파를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법규, 즉 수확물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보편적으로 다 알고 그대로 행해졌다.

 

그러나 박하와 회향, 근채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정원 같은 조그마한 터에 조금 양념 정도로 심을 뿐이었다. 이것들의 십분의 일이란 아주 소량이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만이 실행하였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런 십일조까지도 드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십일조에 대해서는 철저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불의를 범하고 거만하고 완고하고 잔인하였으며 자비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그렇게 행하면서도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양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23-24) 하시면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즉 자비이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이 십일조나 맏물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을 실천하고 자비를 구하고 사랑하며 네 주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것 아니냐?”(미카 6,8참조).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믿음이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정의롭게 살아가며 다른 이를 자비롭게 대하며 다른 이들에 대해서 신의를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역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겉이야 번들 하지만 실상은 위선자, 현대판 율법학자이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책망을 예수께 듣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좀 더 깨달아 알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율법 조문이 우리를 얽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하느님 공동체의 법은 우리의 영적인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살아가야 하겠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 질 것이다.(마태 23, 26)

-한상우신부-

어머니의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하느님을 향한 길을
그렇게 시작하고
그렇게 배웠습니다.

또 한분의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하늘을 또 울립니다.

자식을 향한 아픔이
하느님 자비를
체험케하는
은총이 됩니다.

맡겨드립니다의
그 한마디를 위해
눈물과 기도라는
아픈 시간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어머니를 거칩니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세상은 따뜻할 수
있습니다.

파도 파도
마르지 않을
어머니의
간절한 사랑이
자식을 회개로
이끕니다.

신앙은 어머니
믿음처럼 뜨겁고
눈물처럼 가득합니다.

자식을 위해 흘린
눈물을 기억합시다.

어머니의 눈물
어머니의 사랑이
흐릅니다.

다시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 뒤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복음에서는 어제에 이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이 계속됩니다.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23)
예수님께서 돌려서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는 겉과 속, 안과 밖, 지향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지요.

기득권을 누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그들이 수익에서 바치는 '십일조'는 가난한 이들의 십일조와 규모가 다를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십일조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도 가지고 있습니다(루카 18,12 참조). 그런데 예수님은 물질로 환산되는 십일조만이 아니라, 세상과 사회에서 많은 혜택을 받고 높은 자리에서 명예까지 꿰어 찬 지도층으로서의 도리와 의무 역시 십일조 바치듯 내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마태 23,23).
자기 권한과 능력을 자기 배 불리는 데 쓰기보다, 가난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백성들이 하느님의 정의(justice)와 자비(mercy)와 신의(fidelity)를 얻어 누릴 수 있도록 자기가 가진 지식과 재물과 힘을 흔쾌히 내놓는 것이 진정 십일조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향과 정신이 깃들이지 않은 물질적 십일조는 자칫 하느님을 기만하는 위선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실 그런 영혼의 가치가 깃들지 않은 물질의 봉헌이 오히려 더 쉬울 수 있습니다. 하누님의 속성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마치 이상적인 추상명사처럼 삶에서 빼내어 깊숙이 모셔놓고, 형식적으로 기계적으로 행하는 봉헌은 사람들 눈에는 폼나는 허세는 될지언정 하느님께는 기쁨도 영광도 되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이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쏟아부었던 사랑과 정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1테살 2,7).
이는 곧 하느님의 마음이지요. 또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마음이지요. 자녀를 품에 안고 누군가를 거칠게 공격하거나 함부로 죄악을 행할 수 없는 것처럼 사도들은 조심스럽고 진실되게 신자들을 사랑하며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 그들을 위해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합니다(1테살 2,8 참조).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찾지 않았습니다"(1테살 2,6).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지요.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41).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을 직접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방종"에서 비롯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허세 가득한 봉헌이 자기 영광을 향할 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것과 대비되지요. 사도들이 거부한 "그릇된 생각, 불순한 동기, 속임수"(1테살 2,3)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지적받은 "위선"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대목에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단죄해버리고 저주하는 내용으로 끝나지 않고 새 희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실 제물을 드리려면 먼저 내면을 살펴 깨끗이 하라고 하십니다. 정화된 영혼이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다해 바치는 봉헌은 제물을 더 가치롭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바치는 이의 존재도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은 봉헌물이 아니라 그 마음과 지향을 보시기에 내면과 행동이 통합된 봉헌이야말로 하느님께 기쁨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사랑으로 그분에게서 받은 것을 도로 바치는 우리의 봉헌은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아멘.

성녀 모니카,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