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Margaret K 2019. 8. 23. 18:45

2019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분으로, 갈릴래아의 카나 출신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요한 1,45-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를 참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  

☆☆☆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45-51)

 

"Do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that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will see greater things than thi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천사에게 이끌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를 부르신 다음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만나시는 장면을 다룹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시리아 전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당시 나자렛 마을에 사는 주민의 상당수는 이교인들이었으므로, 유다인들 사이에서 이 마을은 경멸과 무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필립보는 예언자가 나오지도 않고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없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필립보와 나타나엘은 이미 율법과 예언서를 공부한 사람이므로 생각이 깊습니다. 그런 필립보가 “나를 따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느 누구에게 들은 일도 없으면서 곧바로 그분께 순종합니다. 그는 마치 기쁜 소식을 알려 주는 전령처럼 자기 동생 나타나엘에게 달려가,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서 성경이 말하는 그분이시라고 알려 줍니다.“나자렛 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나타나엘은 의미심장한 반응을 보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 말은 듣는 사람마다 의심으로 또는 확인의 물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들려준 말보다 성경에서 메시아는 베들레헴, 곧 다윗의 고을에서 나와야 한다는 예언서의 말을 존중하고 있었으므로, 불완전하지만 메시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이런 나타나엘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이런 만남으로 나타나엘은 그리스도께 충실하면서 나중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특별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꿈속에서 본 환시,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는 층계처럼,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나친 욕심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널리 퍼져 있는 불만족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욕심은 불만족을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놓습니다. 어떤 형제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주식 투자를 해서 큰 이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도 빌딩 하나씩이라도 마련해주려면 더 공격적으로 투자해야 할 것 같았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아주 최악이었지요. 주가의 폭락으로 오히려 큰 빚까지 떠안게 된 것입니다.

이 상황을 형제님께서는 만족해할까요? 아니지요. 최고로 불만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폭락한 주식의 회사가 미웠고, 주식시장을 움직인다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미웠고, 이런 상황을 국가가 만든 것 같아 미웠습니다. 계속해서 불만족한 대상이 그의 곁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누구는 “많이 벌었을 때 멈췄어야지 누구를 탓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욕심의 끝이 과연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되는 것이 욕심일 것입니다. 자기라는 틀에 매여 있으면 절대로 욕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은 자기를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자기 형 필립보와 마찬가지로 예언서에 정통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언서 어디에도 나자렛이라는 지명도 나오지 않으며, 따라서 그곳에서 특별한 인물이 나온다는 구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식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필립보의 “와서 보시오”라는 말을 따랐다는 사실에서 그의 열려있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형님의 제안이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비록 예언서에 나오지 않는 나자렛 출신이지만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믿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사실 당시 이러한 선입견에 쌓여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바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 밖의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 세상의 기준 안에 갇혀 사는, 그래서 끊임없는 불만족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열린 마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족의 길, 바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미래는 자신이 가진 굼의 아름다움을 믿는 자의 것이다(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상대방의 공간 인정하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많은 공간을 허용해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입니다. 문제는 상대방 역시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나의 공간만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공간으로 들어와. 내 공간이 얼마나 행복한데?”

자신에게 행복한 공간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남에게는 가장 불편한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부부 안에서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웃과의 모든 만남에서 해당하는 말입니다. 싸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행복 공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공간을 인정해주고 허용하는 것이 우리가 함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두렁이를 벗고 성경을 읽자

-전삼용신부-


인도의 제녀 부인은 임금이 사마 부인을 더 사랑하는 것에 질투가 났습니다. 어느 날 제녀 부인은 용기를 다해서 왕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꾸며댔습니다.

      “상감마마, 사마 부인은 자주 절에 출입하는데 아마 중놈과 은정을 통하는가 하나이다.”

      제녀 부인은 왕을 위하는 듯이 그럴듯하게 거짓을 꾸며댔습니다. 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활을 들고 사마 부인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방안에 들어선 왕은 한마디 말도 없이 사마 부인을 향하여 활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첫 화살도 둘째 화살도 맞지 않았습니다. 셋째 화살도 맞지 않았습니다. 왕은 숨을 내쉬며 활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사마 부인에게 비로소 말을 건넸습니다.

“그대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로다. 어찌하여 화살이 맞지 않는가?”

      사마 부인은 왕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상감마마 어찌 별다른 사람이겠나이까. 다만 상감마마를 생각하는 것이 첩의 마음의 전부인지라. 아마 그 화살 사랑에 못 이겨 피한 줄 믿나이다.”

      왕의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거짓말을 한 제녀 부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짓말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자신을 더 높이고 더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어차피 떨어질 위상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솔직함이 믿음과 직결되는지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이 곧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눈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거짓이 없는 사람만이 성경을 해석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우선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앞에서 솔직하지 못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이해해야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하느님과 같아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잘못이 있음을 하느님께서 안다면 꾸중을 듣고 작아져야합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몸을 가립니다. 그러면 높아질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는 이 모습이 곧 하느님과 맞서려는 모습입니다. 잘못을 감춤으로써 자신이 높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사 청문회 때 항상 말썽이 생기는 이유는 잘못을 감추어두었다가 들통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감추고 들키지 않으면 높은 위치에 앉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사람은 에덴동산에 살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마 오늘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런 묵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필립보가 와서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철저한 나타나엘은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율법에 따르면 메시아는 유다지방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엘 쪽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뭐지? 하느님의 백성이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어떻게 아셨지?’

      그래서 묻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아마도 나타나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거짓이 없어야 이스라엘 백성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던 그 나무 밑에서 그 생각을 더 굳게 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신의 속생각까지 다 알아맞힌 예수님께 이젠 믿음이 생겨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죽인 많은 유다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참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만에서 벗어나는 길은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교만으로 시작됩니다. 교만하면 거짓말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높여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용서는 겸손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고해소에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하지 않고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함으로써 죄를 짓기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해성사가 아니면, 야고보 사도가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야고 5,16)라고 하는 것처럼 만인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고해소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듣고 있는 사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깨닫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예수님을 더 깊기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겸손해져야합니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죄를 드러낼 수 있는 솔직함입니다. 우리는 두렁이를 걸친 채 성경을 이해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아닌지 살펴야합니다.


-조재형신부-


거주자 등록을 신청하였습니다. 직원이 제게 강복을 청했습니다. 제가 사제 복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강복을 주었고, 신청도 순조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이 저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저를 알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저를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매일 묵상 글을 읽는 분이 있습니다. 저와 본당에서, 교구청에서 만난 분이 있습니다. 저의 강의를 들은 분도 있고, 저의 실수를 본 분도 있습니다. 저를 가장 잘 아는 분은 저를 위해서 기도하는 어머니입니다. 저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있습니다. 고위직에 오르는 후보자의 자질, 능력, 정책을 검증하는 제도입니다.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한 후보자는 고위직을 수행하지만, 인사청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후보자는 자질, 능력,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도 잘 몰랐던 과거의 허물이 드러납니다. 국회와 언론의 검증 잣대는 매섭습니다. 고위직은 영광이고 기쁨이겠지만 사양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을 찾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본능에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삶의 목적과 가치를 따지지 않는 삶입니다. 감성에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는 삶입니다. 이것은 동물과는 다른 삶의 시작입니다. 이성에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도덕과 계명이 있고, 仁義禮智와 같은 덕을 삶의 가치로 여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부끄러움을 알고, 겸손함을 알고, 자비로움을 알게 됩니다. 오성에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마치 4차원의 세계를 사는 것과 같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참된 나를 알고,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소유와 명예,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삶입니다.

 

운전면허를 취득했다고 곧 모범운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겨우 운전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난폭운전자가 될지, 모범운전자가 될지는 본인의 노력과 의지의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3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세상 속으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보는 것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는 것은 역시 사도들의 노력과 의지의 문제입니다.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저의 작은 아버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작은아버지는 저의 가능성을 알아주셨고, 제가 사제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방송국에서 일하시다가 정년퇴직을 하셨고 지금은 평창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면서 지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알아보신 것처럼 작은 아버님은 저를 알아주셨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길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합니다


내가 보았다

 -반영억신부-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은혜로움을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모범을 통해 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이라는 별 볼일 없는 촌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 메시아는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님을 알아보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되나요?’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들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는 것도 좋지만 꿰뚫어 보아야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안에서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구원을 체험하며‘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 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성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는 분이다. 그는 필립보의 소개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는 평을 들었던 나타나엘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아르메니아와 인도에서 전교하였다고 전해지며 순교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복음: 요한 1,45-51: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그가 만난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나자렛 출신이라고 소개한다(45).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회의를 갖는다. 즉 메시아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결코 대단하지 못했던 촌락이었던 나자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라고 하였던 것이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권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처음에 필립보의 말을 듣고는 회의를 가졌던 나타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대한 관심과 신뢰를 드러냈다. 바로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 압도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게 된다(47-49). 어떻든 이렇게 믿음을 가진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약속을 하신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0-51). 즉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싹튼 그 신앙이 예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통해 커질 것이며, 확고하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정관념에 편견에 싸여있는 그 마음에서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기도로써 열심히 청하면, 우리 안에 있는 고집과 편견을 거두어 낼 수 있다면 주님께서도 그것을 알아주실 것이며, 결국은 우리도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예수님께로부터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하고 칭찬을 들었듯이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면,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 47)

예수님의
기다림 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다림이
우리를 정화시킵니다.

기다림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은
거짓 없는
진실한 길입니다.

사람을
기다려주십니다.

사람의 길은
기다림의 길입니다.

기다림이
거짓 없는 사람을
만나게합니다.

기다림이
하늘에 닿게합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으로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게 하시는
주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기다림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열두 사도 중 하나인 바르톨로메오 성인의 축일입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나타나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요한 1,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22,40)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필립보의 증언과 연결해서 본다면, 바로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기록된 분이시며,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시고, 율법과 예언서에 나타난 사랑 자체, 말씀 자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이렇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알아보십니다. 그분은 나타나엘 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가능성까지 속속들이 아십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메시아를 고대해 온 나타나엘도 자기를 알아보시는 분께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부족하고 찌질한 모습 너머로 하느님 자녀다운 진실을 읽고 우리를 제대로 알아주시는 그분께 어떤 고백을 드릴 수 있을지요.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아니 나타나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당신을 믿고 고백하는 모든 이는 더 큰 일을 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0)
얼핏 창세기의 야곱의 꿈이 떠오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 신성과 인성을 잇는 사다리십니다. 또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던 때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인류의 죄와 하느님의 자비를 엮는 사다리이고, 예수님 죽음의 순간 하늘과 땅이 이를 통해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도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의 환영과 옹위 속에 본래의 자리로 임하시며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셨지요.

제1독서에서는 천상 예루살렘과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요한 사도에게 보여집니다. 언제 만나도 가슴 설레는 대목이지요.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묵시 21,9)
요한 사도와, 요한 사도의 눈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더 큰 일"을 이 환시 안에서 관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과 승천,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더, 더, 더 큰 일은 이처럼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새롭게 신부로 단장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혼인의 순간 완성될 것입니다. 여기서 새 도읍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이면서 동시에 세례받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뿐 아니라 비천한 우리도 그분의 신부로 들어올려져 갖은 단장을 하고 아름답게 꾸며질 것입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묵시 21,11)
광채가 그리 아름답다면 그 빛을 내뿜는 주체, 실체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요! 도성을 감싼 하느님의 영광이 그처럼 찬란하다면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과연 어떠실까요! 온갖 죄와 더러움의 허물을 벗고 흠도 티도 주름도 없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거듭나서 어린양과의 혼인 잔치로 향하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 이처럼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사도 요한과 함께 어린양의 신부인 거룩한 도성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가장 순결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빛으로 감싸인 새신부 안에 놀랍게도ᆢ 우리 각자의 얼굴이 보입니다. 어린양의 곁에 선 신부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보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의 극치가 아닐까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실 가장 큰 일은 그분과의 영원한 일치, 합일로 들어가는 우리를 보는 것일 겁니다.

"당신께 충실한 이들,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이들."(화답송)
그들의 존재, 그 빛과 찬미와 선포는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부족하나마 자기 자리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불타는 영혼들은 어린양의 신부 얼굴에 자기를 새겨넣은 주님 영광의 광채입니다. 그런 자신에게 매일 놀라고 매일 경탄하는 삶이 곧 어린양과의 혼인 잔치를 향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스러운 사도? 

-김찬선신부-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같은 분으로
교회는 여기고 있고 그래서 바르톹로메오 축일에 나타나엘 얘기를 읽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으로부터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극찬을 들은 나타나엘이 이후에는 요한복음에서
부활 후 갈릴래아로 낙향한 제자들의 명단에 한 번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 남은 사도들의 명단에 한 번 등장 한 다음에는
다른 복음이나 다른 서간 어디서건 등장치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열두 사도로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사도는 큰 비중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자리만 차지한 사도였을까요?

어쩌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기에
숨은 사도였는지도 모릅니다.

제게 만일 거짓이 없다면 저는 두 가지로 거짓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죄와 악을 감추지 않는 것이 하나이고,
저의 선과 선행을 뻥튀기 하지 않는 것이 다른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게 위선僞善이 없다는 말로 들리고,
위선이 없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말과 동의어로 들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적인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인위적人爲的이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을 거고,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노자의 표현대로라면 무위자연無爲自然한 것이지요.
인위라는 말은 인간이 한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무위라는 말은 인간이 하는 것이 없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없고 하늘이 하는 것이고,
내가 하는 것이 없고 하느님이 다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숨기지 않고 숨은 사람이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지만 숨기지도 않고
하느님 안에 숨은 사람 또는 자신의 자취를 감춘 사람입니다.

계시면서도 안 계신 것 같고,
안 계신 것 같은데 계신 것이 하느님이듯
있지만 없는 듯이 있는 하느님스러운 존재가 바로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아닌지 올핸 이렇게 뜬 구름 잡는 묵상을 하였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24일 목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