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3,22-30)
“Lord, will only a few people be saved?”
He answered them,
“Strive to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many, I tell you, will attempt to ent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살아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며 시련을 견디어 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시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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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고 묻는 어떤 사람은 시대마다 거듭되어 온 질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당시 라삐 학교들 안에서 제기되었고, 구원이나 멸망에 대하여 몇몇 사람들을 고뇌하게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라삐들은 구원이 유다인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하는 데 일치하였지만, 몇몇 라삐는 선택된 백성에 속하는 모든 이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어떤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열정적으로 권고를 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사방에서 온 다른 이들에게 열려 있는 문의 비유를 드시며, 이민족들에게 나라와 복음이 열려 있음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 그릇된 구원의 확신을 거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와 구원받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며, 메시아 잔치를 예언하는 표상으로 상징되는 구원의 보편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나라로 이끄는 문이 모든 이에게 좁다고 이르십니다.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은 이 사실을 더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고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나중에 온 이들, 곧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대답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신앙이라는 '좁은문'
-한 민택신부-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행길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법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시며,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르는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두 번에 걸쳐 하신 말씀에서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먹고 마시고 당신의 가르침을 들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을 따름이며, 다만 육체적으로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분을 알아가며 그분의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걷기를, 길을 걸으며 함께 당신의 생각을 나누기를, 당신의 고민, 당신이 꾸는 꿈과 희망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나눔과 친교를 통해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그분의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종교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 아버지와 생생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자유로운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를 맺기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에게서 든든함과 위안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힘들고 험난한 세상 여정을 함께 걸으며 아버지께 의탁하고 미래를 그분께 내어 맡길 수 있는 신앙의 자세, 삶의 자세를 얻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신앙의 길이 ‘좁은 문’인 이유는, 그분을 닮아가는 길이며, 변화가 동반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형식적인 겉치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 변화란 자신을 깎고 버리고 포기하고 내어놓는 것이기에, 자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이기에 시련을 거쳐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형식적 겉치레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당장 스스로 찾아 나서기를, 자신의 길을 찾고 궁리하고 모색하기를 말입니다. 그 길은 분명 ‘좁은 길’이며 험난한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이기에, 자신을 포기하고 그분께 맡겨드릴 수 있는 길이기에,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길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신앙의 위대함을 증언하기를 기대합니다. 과학과 기술에서, 경제와 정치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위대하고 가치 있는 길인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피상적인 신앙, 형식적인 겉치레를 뒤로하고, 고개를 들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좁은 문
-서강휘신부-
호리지차 천리지류(毫釐之差 千里之謬). 털끝만큼의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착오를 낳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가갈 수 없을 만큼의 거리로 벌어진다는 뜻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지 적당히 옳고 적당히 그른 것이란 없다. 애초에 털끝의 차이라 해도 차이는 차이이며 극복할 수 없는 간격도 거기서 비롯된다. 그러니 첫발을 어떻게 떼느냐가 그 이후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에 거리끼는 미세한 가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오늘 복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시도하던 자들이 집주인에게 했던 말이다. 언뜻 보면 이들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처럼 보인다. 외견상 주님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서먹함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딱히 뭐라 비난할 구실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주인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그들이 조금 부족하다 해도 늘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하는 말 치고는 그 비난의 수위가 높다. 하지만 그들의 어정쩡하고 방관자적인 삶은 시작부터 이러한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주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주인의 삶에 깊이 동참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주님의 기쁨과 슬픔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던 사람들. 처음의 미온적 태도가 비록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을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인과 항상 함께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 비난받으며 거부된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질문한 그는 아마도 유다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이스라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공허한 이념의 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유사 이래 계속돼 온 이데올로기다.
귀족인가 아니면 평민인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정략적 결혼과 인간적 욕망, 위선, 거짓을 감추기 위한 몇 가지 교양 있는 태도를 익히는 것뿐이다. 구약의 후계자라 자처한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율법을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의 인생을 진심으로 책임지고 한발 한발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을 생략하고 글자와 이념에 숨어 사는 삶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사되는 우아함만으로 내면의 위선과 욕망을 감추는 정도가 그들에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적당한 선에서 단절된다.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에 진정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고고한 자세로 바라보거나 점잖게 훈계하려 들 뿐 참으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던 자기들만의 리그에 할당된 영토는 너무나도 협소하다. 그들은 정말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그들이 사는 세계를 대다수의 평민들은 알지 못한다. 주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스스로 선택됐다는 우월감으로 좁은 문에 서 있던 자들은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렇게나 좁았던 문이 어느새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는 대문으로 변모하는 아이러니를 오늘 복음에서 만난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사방(四方)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란 선민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이스라엘에게서 배척된 이들이다. 소위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잡기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들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잔치에 초대됐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에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는 특정한 자격 요건이 필요하지 않다.
제1독서에서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18)라고 한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만’ 초대됐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 그 문을 스스로 좁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들이 결국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든 원인이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던 문을 좁은 문으로 만든 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신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정말로 좁다는 말이라기보다 너희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좁은 문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분 상승을 어렵게 만든 귀족적 혈연이나 우리사회의 상류계급이 세워 놓은 계층 바리케이드는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좁은 문이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수많은 이방인들과 좁은 문을 통과하기 녹록지 않은 이스라엘의 차이는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삶으로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삶을 이념과 계급에 가둬 둘 것인가의 차이다.
특권 계층에 속해 있다는 이념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복하고 인간적인 삶조차도 보장해 줄 수 없다. 세련되지 않고 투박하더라도 진지하게 일궈 나가는 매일의 삶 안에 구원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좋은 가문과 배경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의 맵시보다 햇볕에 그을린 어머니의 얼굴과 노동으로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마디가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그런 것이다. 계급사다리의 상층부라고해서 그것이 하늘과 가까운 것도 아니요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 위치에 오르지 못하게 한 좁은 문이 스스로를 가둘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천 리나 되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다. 회개를 통한 용서의 은총은 우리에게 허락된 넓은 문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인생은 짧고 하느님 나라의 시간은 길다.

한주일을 시작하며
-최승정신부-
오늘의 첫째 독서는 이사야 예언서 66장의 말, 이사야 예언서의 마지막 장의 말입니다. 첫째 독서 말을 읽으며 ‘광’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구약의 창조 신학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 이유가 바로 창조주의 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 라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도 이스라엘을 통해 하느님 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유배를 한 이유는 하느님 백성이 그 광 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실현하게 될 하느님 나라를 통해 하느님 광이 최종적으로 드러나고,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 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예언자는 자신의 예언서를 마무리합니다. 물론 그 예언은 단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그들의 현재에 대한 예언자의 요청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로 시작 하는 교회의 광송에서 예언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둘째 독서에서는 ‘훈육’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이는 그리스어 파이데이아(ươƩƤƥƟơ)의 번역인데, 이는 아이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교육 또는 훈련을 뜻합니다. 히브리서의 저 자는 (헬레니즘의 파이데이아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닥친
시련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훈육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련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바 른길’을 달려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문’이라는 문학적 표상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좁은 문 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 문을 통해 주님의 집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말 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의를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에 나온 신학적 개념과 문학적 표상을 한데 묶어 요약해 본다면, 하느님의 ‘훈육’에 따라 ‘바른길’을 달려가 그분의 ‘광’을 드러냄으로써 그분 나라 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한 문장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 니다. 어쩌면 신앙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 문장이 삶의 순간순간 무척이나 무거운 말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 우리 교회의 믿음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주일의 삶을 시작하 며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이유이겠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김두찬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 고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회개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치유하시는 것에 분개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회개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들었으며, 죄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에 대한 물음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3-2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답변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효보다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는 것은 근육과 힘의 열렬한 발휘를 뜻합니다. 즉,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도시의 커다란 문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근육과 힘을 발휘하여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좁은 문 으로 들어가는 여정이 바로 회개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회개의 실천적인 삶을 성인의 가르침에서 배워봅시다. “믿음을 견고히 세워 주고 신심을 변함없이 유지해 주며 덕행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는 문을 두드리고 단식은 청하며 자선은 받습니다. 기도, 단식 그리고 자선, 이 세 가지는 한 묶음이고 서로 서로가 의지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기도의 영혼이고 자선은 단식의 생명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서는 제대로 작용할 수 없으므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이는 단식도 해야 하며 단식하는 이는 역시 자선도 베풀어야 합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기도하는 삶’, ‘ 단식하는 삶’, ‘자선을 베푸는 삶’으로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 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히브 12,6)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 성모님의 보살핌과 주님의 축복으로 기쁨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만천성당 진입로
-조철희신부-
네비게이션을 찍고 만천성당에 처음으로 오시는 분이시라면 진입로가 어디인지 몰라 한참을 헤매실 수도 있습니다. 혹시 택시를 타고 오신다면 기사님이 여러 분에게 짜증을 낼지도 모릅니다. 지금 만천성당은 성당에 들어서는 초입에 예배당이 들어서면서 성당으로 오는 입구가 예배당 건물과 대형 문구사 건물 사이의 아주 작은 공간, 승용차 하나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매우 좁은 틈만 남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우리 만천성당은 올라오는 도로가 여러 명이 소유한 개인사유지인 이유로 포장을 할 수 없는 비포장 길이어서 진입로 문제로 많은 고민과 불편함이 있던 터라 성당 오는 길은 더 험난한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당에 거의 도착하셔서 네비 게이션이 잘못 되었나하며 더 넓은 입구를 살펴보는 분이 계신데, 안타깝지만 넓은 입구는 없습니다. 성당에 들어오는 진입로는 차 하나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아주 좁은 길, 그길로 들어오 면 됩니다. 조금만 참고 인내하고 그 좁은 입구를 통과하십시오. 그리고 불평하지 말고 오늘 복음 예수님 의 이 말씀을 묵상하고 올라오십시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조금만 힘쓰고 일단 들어오십시오, 그 좁은 입구를 지나서 울퉁불퉁 길을 통과하면 나무와 산, 그리고 꽃들이 만발한 마치 천국처럼 넓고 아름답게 펼쳐진 만천성당에 드디어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도달하는 길도 아마 이러한 길일 것입니다. 들어가는 입구는 눈에 보기에 작고 좁기만 하고 자갈밭과 십자가로 가득 차 있어 들어가기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좁고 불편한 길을 조금만 감수 하고 힘써 올라온다면 좁은 길은 금방 사라지고 끝없는 낙원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좁 은 문으로 통과해 인내로 시련을 이겨내고 천국에 도착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 나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커다란 문을 통과해 자갈도 없으며 장애물도 이미 제거된 편한 길을 가고자 원합 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길의 마지막에는 허무하게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좁은 진입로이지만 불평하지 마시고 일단 좁은 입구를 잘 통과해서 만천성당에 잘 도착하시길 바랍니 다. 또한 천국에 가고자 하신다면 좁은 문이라고 겁먹지 말고 일단 용기 내어 천국에 들어서는 입구에 잘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조금만 힘쓰면 됩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 아주 조금만 불편하면 됩니다. 그 불편함 은 길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처음에는 인내의 길이고 시련의 길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인내는 열매가 되고 시련은 은총으로 변화됩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 두 개의 진입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편하고 넓은 길 그래서 첫째로 출발하지만 가다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길. 또 하나는 좁고 불편해서 힘들게 들어서서 출발하지만 결국 ‘하늘나라의 잔칫상’(루카 13,29 참조)을 차지하는 길. 여러분은 어느 진입로로 들어서시겠습니까?

하느님 나라 들어가기
-강윤철신부-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가운데서 천당에 들어가기 쉬운 계절은 언제일까요?
답은 여름입니다. 더워서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놓고 있어서 그렇다는 아재 개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에어컨 때문에 문과 모든 창문까지 닫고 사니 옛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까 염려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고 이르셨습니다.(루카 13,24)
베들레헴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동굴 위를 제대로 삼고 웅대한 성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후 헬레나 성녀가 봉헌한 ‘예수 성탄 성당’입니다.
그런데 입구 문이 높이 1m, 너비 40cm로 아주 작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지었는데 언젠가 페르시아 군대가 말을 탄 채 들어온 후에 그렇게 막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고,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겼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겸손한 태도로 의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불의가 곳곳에서 예사로운 게 현실입니다.
신자들이 의로움을 실천하며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많은 시련도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참으로 좁다 하겠습니다.
불의를 멀리하고 시련을 하느님 사랑의 훈육으로 여겨 잘 견디어 냅시다.
나중에는 그것으로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히브 12,11)
올림픽 등 각종 운동 경기에서 메달을 따고 감격에 차 눈물로 환호하는 장면을 종종 봅니다.
그 메달은 엄청난 땀의 결실입니다. 운동선수, 농부, 사업가, 학자, 예술가 등이 피나는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냅니다.
천국 메달을 따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떠해야 할까요?
한편, 세례받고 교우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또 성경과 교리 말씀을 들었다고, 또는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다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교회를 사교의 장소나 사회단체처럼 여긴다면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루카 13,26-27)
복음으로 나의 삶을 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켜, 이 사회가 나날이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애써 찾아야 할 좁은 문이 이 길입니다.
아멘.
-서공석신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 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열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달라는 사람들은 주인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기들의 동네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를 보았거나, 함께 먹고 마신 사실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사람의 삶의 빛깔을 보고, 그 사람의 기원, 곧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삶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부터 사람들은 신(神)에 대해 줄곧 상상하였습니다. 유능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을 모든 일에 유능한 분, 그래서 전능(全能)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보고 신을 높은 분, 곧 지고(至高)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이 법을 주고, 그 법을 따라 심판하여, 잘 지킨 사람에게 상을 주고 못 지킨 사람에게는 벌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높고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공물(供物)을 바치는 것을 보고, 신에게도 제물(祭物)을 봉헌해야 한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신을 가르치면서 신의 이름으로 법을 주고 제물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사람들이 상상한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실천이 있는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고, 그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을 그 본연의 빛깔 따라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분을 맞아들이는 이들은...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사람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이들이다.”(1, 12-13). 예수를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동기로 실천하는 삶의 빛깔이 있다는 말입니다.
2세기 어느 신앙인은 하느님에게서 난 생명이 하는 실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이웃을 탄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재산을 축적하며,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도 아닙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자, 이웃에게 베푸는 자,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주는 자, 이런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진실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디오그네투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실천이 삶의 어떤 빛깔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 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듯이 우리도 베풀어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사람의 삶의 빛깔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가 상상해온 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높고 지엄하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 그 아들과 교섭을 잘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곧 일상생활의 불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재물과 지위를 얻고, 건강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좁은 문이라 불렸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물과 지위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일은 아무나 알아듣고 행할 수 있는 경지(境地)가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연계하여 생각합니다. 그것을 얻으면, 하느님이 우리 편에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잃으면, 하느님이 떠나셨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은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혼동하지 않는 사람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인간이면, 모두가 탐하는 재물과 기적으로 통하는 문은 넓은 문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빛깔을 가진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생명을 살자는 운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합니다. 그런 사람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에게 빌붙어서 기적과 재물을 얻어내어 잘 살아보겠다는 수작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웃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득(得)이 아니라 실(失)을 갖다 주는 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해 열려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득(得)에 목숨을 걸지 않고, 실(失)을 두려워하지 않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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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력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놀라운 정보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는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라는 것입니다. 즉, 정원 미달이 되어도 성적이 낮으면 불합격된다는 것이었지요. 몇 명이 합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점이어야 합격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지원자가 적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점수를 무조건 올려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 것 같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무사히 신학교에 합격했고 이렇게 신부도 되었지만, 만약 그때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습니다. 혹시 신부가 아니라 신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신학교는 어느 정도 정원에 맞추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점수가 되지 않으면 미달이라고 해서 합격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 정원이 몇 명이고 몇 명이나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몇 명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말씀하시지요. 즉, 얼마나 많이 구원받느냐보다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함께 식사했다고 해서 종말의 잔칫상에 앉는다는 보장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미사에 열심히 참석했다고 해서, 성당에 얼굴을 자주 비췄다고 해서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반하는 불의를 일삼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구원에 정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달이라고 불의를 저질러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의로운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성지에 왔습니다. 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무원 시험을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었지요.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데요?“
그러자 ”제일 안정적인 직장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것이고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청년들의 모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정말로 공무원이 최고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을 늘 떠올렸습니다. 소방관이 된다는 꿈을 꾸면 어떤 소방관입니까? 용감하게 사람들을 다 살리는 특별한 소방관 아닙니까? 과학자라는 꿈 역시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연구로 우뚝 서는 특별한 과학자 아닐까요? 이런 식으로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이 어느 순간 보통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열정이 빠져 있다면 특별한 사람은 절대로 될 수 없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직업 자체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괜찮은 직업을 갖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직업이 아니라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진짜 ‘나의 일’ 말입니다.

좁은 문은 힘들면서도 기쁘다
-전삼용신부-
‘봉오동 전투’(2019)는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 정규군에 맞서 처음으로 승리한 감동적인 역사를 그렸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더 잘살게 해 주겠다고 이 집에 들어왔는데 왜들 난리냐고. 그러나 독립군들은 말합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아내 자식 재산 다 차지하고 다 너희를 위한 일이라니 그것에 무슨 말이냐고. 그래서 그 침입자를 몰아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이때 일본 군인들은 마치 여우를 사냥하는 것처럼 교만해있었습니다. 독립군들은 그들의 교만함을 이용해 계속 화를 북돋아 도망칠 곳이 없는 분지 안까지 끌어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큰 희생도 치러야했습니다. 숫자가 부족한 까닭에 몇몇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일부러 포로가 되어 무수한 고문을 받으며 잘못된 정보를 흘려야 했고, 혼자서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총알받이가 되기도 해야 했습니다.
이들 덕분으로 정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인들이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쟁경험과 군사훈련으로 무장되고 최고급 무기를 가진 이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자신들이 미끼가 되어 그들의 열을 바싹 오르게 했던 희생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희생 뒤에는 승리의 기쁨이 서려있었습니다. 그 전투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했고 300여명이 부상을 입어 총 4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독립군 피해는 사상자가 총 1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지는 십자가를 통해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을 기대하던 그들은 십자가를 지는 동안에도 이미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도 실제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 받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을 넘어서서, 또한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동시에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 ‘좁은 문’의 의미를 모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미사에 나오고 봉사와 선교도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도 좁은 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 걸까요?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얼굴 찡그리며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좁은 문은 그 자체로 그 뒤에 에덴동산의 약속이 있기에 그 문으로 가면서도 기쁩니다. 힘들지만 기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했기에 힘들기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러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곧 좁은 문입니다. 그러니 좁은 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가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인데 십자가의 길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다.”는 기쁨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도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상급이기에 노력 없는 상급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은 아직 상은 받지 않았지만 상을 받기로 약속이 된 사람처럼 이미 부활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으로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제물은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에 카인은 기분이 나빴고 아벨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기분이 나쁜 카인은 아벨을 살해하였지만 아벨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벨은 항상 상급을 기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넓고 편한 길로 가려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기분이 나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을 기대하기보다는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의 행실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벨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아주시니 당연히 ‘언제 상을 주실까?’라는 기대에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 한 컵의 선행에도 반드시 상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면 반드시 기분이 좋아야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은 운동할 때 힘들고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것보다 더 큰 기대와 행복이 그를 계속 뛰게 만듭니다. 더 건강해지고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일면으로 고통스러운 마음도 있으셨지만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며 동시에 부활을 말씀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항상 받을 상에 대한 기대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은 주님께서 어떤 상급을 주실 것인가?’란 기대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힘든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기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길이 좁은 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느님의 법칙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나를 기분 좋게 만드시려고 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고 잘 했으면 칭찬해주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자아는 상 대신 벌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엇을 사랑할 때 기분 좋아졌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랑보다 강한 에너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보다 행복한 감정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주님께 상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겨울 풍경화를 마친 화가가 몇 걸음 물러나 자기의 작품을 감상하였습니다.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었습니다. 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아래로 휘어진 듯 유연히 드리워졌고, 오막살이 처마 밑으로 고드름이 우아하게 내려져 있었으며, 또한 땅위에는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신선한 눈송이가 조화 있게 화면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팔리지 않고 몇 개월 동안 화랑에 그대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 화가의 특징은 겨울 풍경화이었는데도, 아무도 그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다른 화가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붓 가지고 계세요?”
그는 대답 대신 붓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붓을 받아들고는 몇 가지 색을 혼합하더니 듬뿍 찍어서 오막살이 창문에 붉은 빛을 덧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회색을 찍어 오막살이 굴뚝 위로 연기를 피워 올렸습니다.
그러자 그 그림은 그 날로 팔려버렸습니다.
우리도 이 풍경화와 같습니다. 내가 차갑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아 더욱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따듯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하면 나도 사랑받습니다.
사랑하십시오. 물론 사랑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나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됩니다. 이 길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고 있다면 반드시 고통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어떤 상을 주실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기쁩니다.

-조재형신부-
외국에 살면서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에는 ‘수업료’를 냈다고들 하십니다. 때로 서러움에 눈물 흘리기도 했고, 왜 정든 땅을 떠나야 했는지 후회했다고 합니다. 이민이라는 좁은 문을 잘 참고 견디었기에 오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고 합니다. 거주자 등록하는 데 1달 시간이 필요하고, 자동차 면허 따는 데 2달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모든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는 곳에서 살았기에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이 또한 뿌리내리는 과정입니다.
25년 전의 기억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교포 사목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을 듣고 기뻤습니다. 인정받았다고 느꼈습니다. 학원도 다니고, 조용히 준비하면 좋았습니다. 들뜬 마음에 술자리를 자주 했습니다. 젊었고, 가슴은 뜨거웠지만 냉철하지 못했습니다. 주교님께서 다시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의 지나친 음주를 걱정하셨고, 질책하셨습니다. 미국 가는 결정도 취소하셨습니다. 반성하고 뉘우쳤으면 좋았겠지만, 원망의 마음이 컸습니다. 저의 음주 사실을 주교님께 알린 사람이 미웠습니다. 분명 같이 마신 사람 중에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습니다.
성당에 돌아와 성경책을 펼치니 욥기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욥은 성실하게 살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깊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가족은 행방불명 되었고, 종들은 강도를 만났고, 재산은 거센 파도에 휩쓸려 가버렸고, 몸마저 병이 들었습니다. 욥은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음에 감사한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쁜 것을 주셔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것도 감사드립니다.’ 욥 성인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가슴에 차오르던 원망도, 분노도 봄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따뜻한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제 마음도 따뜻해졌습니다.
10시면 사제관에 들어오는 좋은 습관이 생겼고, 술자리에서도 과음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일찍 자니,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니 여유가 있었고, 일할 때도 여유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침에는 연락이 오는 경우도 거의 없고, 조용하기에 집중이 잘 되었습니다. 주교님의 견책이 제게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영적인 죽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땀을 흘리고, 노력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더 큰 노력과 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세상의 문은 상대적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상대방이 더 노력하고, 더 능력이 있으면 내가 들어갈 문이 없습니다. 세상의 문은 ‘경쟁 가치’를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메달의 숫자는 한정되어있고, 메달을 원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절대적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나누면 됩니다. 천국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비경쟁 가치’를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랑, 나눔, 배려와 같은 것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모든 것을 나누는 희생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우경식 요셉의원 원장님은 세속의 성공과 명예보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먼저 선택하는 사랑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보면 더러운 일, 힘든 일을 늘 앞장서서 하는 봉사의 열쇠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의 열쇠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신앙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열쇠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에 빛을,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주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도 말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는 자에게 매를 든다.” 그렇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주님의 견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절망과 좌절 속에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방법과 길을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때로 뜻밖의 선물처럼, 한 줄기 바람처럼, 그렇게 깨달음이 찾아온답니다!
-양승국신부--
필요한 책이 있어 서점에 들렀는데, '반일종족주의'가 눈에 띄더군요. 대충 어떤 책인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대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해서 구입했습니다. 책값을 지불하는데, 평소 눈인사를 하고 지내던 청년 직원의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꽤나 복잡했습니다.
할수 없이 제가 그랬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 책을 좋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대체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사는 거예요.” 그제야 청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 사시는 많은 분들, 대체로 저와 비슷한 마음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분노를 넘어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거듭되는 거짓과 왜곡에 솟구쳐 오르는 모욕감을 견뎌내기가 힘들었습니다. 나중엔 손까지 부들부들 떨려왔습니다. 불처럼 화가 나며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이 큰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가’
저는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면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왜곡되고 조작되며 편향된 역사관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마음에 큰 걱정이 앞섰습니다. 만일 순진무구한 우리 청소년들이 이 책을 접한다면...하는 마음에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와 진단은 냉정해야 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을 두둔하고 그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묘하게도 이 책의 많은 내용들이 오늘날 아베와 그 주변에 포진해 있는 극우주의자들의 발언들과 일치합니다.
저자들은 이런저런 편협되고 제한된 통계나 기록물들을 나열하며, 일제 강점기 동안 ‘강제성’은 조금도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당사자의 동의가 전제된 공정한 계약관계였답니다. 강제 징용은 없었고, 보다 높은 소득과 나은 직장을 찾기 위해 건너갔답니다. 조선인이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 조선인을 처벌할 수 없었답니다.
식량 강제 수탈은 없었고, 합당한 가격이 지불된 일본에로의 수출이었답니다. 조선인 광부와 일본인 광부 사이에 차별대우란 없었답니다. 강점기 기간 동안 한반도에 다양한 측면의 긍정적 성장이 이루졌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니 아베나 일본제국주의 공식대변인의 입에서나 나올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교묘하게 논점을 흐리는 수법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집중해야 할 주제는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위안부 문제인데, 미국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조선 시대 기생제, 공창제 운운하며, 일반화시키면서 시선을 흩어버리고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책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 한 가지! 그럼 그분들이 주장하는 바는?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순간이었다? 두고 두고 일본제국주의에 감사해야 한다? 감지덕지하면서 더 이상 강제징용이니 위안부니 껄끄러운 말들은 꺼내지 말아야 한다? 아베와 극우주의자들의 말에 고분고분해야 한다?
다음 구절을 접하고서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말문까지 다 막혔습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 참...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거짓말과 사기가 난무하니 사회적 신뢰의 수준은 점점 낮아지는 추세입니다. 한국은 국제적 비교에서 저신뢰 사회에 속합니다. 이 나라의 국민이 거짓말을 일삼고,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게 된 것은 이 나라의 거짓말하는 학문에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나라의 역사학이나 사회학은 거짓말의 온상입니다. 이 나라의 대학은 거짓말의 제조공장입니다.”
이 혼돈의 시절, 균형 잡힌 역사 의식을 지니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마치 뜻밖의 선물처럼 또는 한줄기 선선한 바람처럼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휴가철에 펼쳐든 책 속 한 구절이 잠자고 있던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웁니다. 넋놓고 바라보던 영화 자막에서 내 삶을 뒤흔드는 명 대사를 만납니다. 별 생각 없이 펼쳐든 시집 속 짧은 싯구절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듭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 한 구절이 내 인생의 역대급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따지고보니 우리가 그리도 간절히 염원하는 깨달음이란 엄청 대단한 것을 통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듯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절절한 하느님 체험이나 회심, 신앙의 진리에 대한 깨우침 역시 엄청 대단한 것을 통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 널러 퍼져 존재하는 모든 존재나 사물, 사건이나 반복되는 장면에 대한 열린 마음과 집중이 필요하겠습니다. 때로 스쳐 지나가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 우리 삶을 완전히 뒤바뀌어놓을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부르는 성가 한 소절이 한없는 위로와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성경 말씀들 가운데, 몇구절도 너무나 은혜롭게 다가오더군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리서 12장 6절)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복음 13장 24절)
주님께서 가끔씩 우리에게 건네시는 훈육과 채찍질이 결국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평탄한 길, 넓다란 길, 빠른 지름길이 아니라 가파르고 험한 길, 좁은 길이 결국 우리를 넓고 푸른 주님의 목장으로 안내할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고통없이 영광없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행복은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집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던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행복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 거미ㆍ개미ㆍ꿀벌의 세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어떤 먹잇감이 걸리면 피를 빨아 먹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이기주의 인간'입니다.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 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개인주의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 없고, 도움을 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꿀을 따다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주는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은 ‘이타주의 인간’입니다. 사회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인은 바로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합니다. 꿀벌 유형을 희망합니다.
인간의 삶을 네 가지로 구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 둘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 살고자 애쓰지 않는 사람. 셋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지만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넷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 아니,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람은 하늘을 차지해서 행복한 사람이고, 둘째는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며, 셋째와 넷째는 매를 맞아도 덜 맞을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7-48).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함으로써 천상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환상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상을 차지하는 것은 ‘따논당상’이라고 생각하고 특권을 휘두를 뿐 신앙 안에서 ‘내면의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둠속에 던져지고 오히려 이교백성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안전감에 빠져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나는 구교신자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만한다면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캐지 않는 유일한 보석은 ‘진주’라고 합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서 생기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극복해서 탄생한 강함을 가진 보석입니다.
‘조개나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re)라고 불리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그런데 이 나카는 아주 적은 양이 천천히 생기기 때문에 작은 진주도 수개월이 걸리고 큰 진주는 몇 년에 걸려서 만들어 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면 나카를 생산하는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래 때문에 상처가 나고 대부분의 굴은 아주 죽어버립니다.
이 굴의 선택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여러 종류의 모래알이 자주 들어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여 차차 곪아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고 맙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며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12,11-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나카를 생산하고 코팅작업을 하여 진주를 만들라는 권고입니다. 분명 시련은 더 없이 귀한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 답은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정말 장차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 살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느냐? 내가 알고 있잖아요! 물론 개중에는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자기는 잘산다고 하는데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하면 여러분 뭘 생각하십니까? 이건 베드로 얘기하는 거야, 마리아 얘기하는 거야! 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건 네 말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 속에 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투신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 쏟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희생 봉사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환호하며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세상은 지금 당장 편하고 쉬운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있는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바 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문은 결코 요행이나 잔재주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실과 인내로, 사랑으로 통과하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친분을 내세워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13,26). 하였지만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13,27) 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을 잘 알고 믿음의 생활을 오래도록 충실히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꼴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터에서 상황이나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시는 첫째와 세상이 인정하는 첫째가 같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줍니다. 지금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천국문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가운데 행복을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깨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하려는 체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처신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마음의 의지를 굳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슬러 행하려 하느냐에 구원과 저주의 판결이 달려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사사건건 따지는 한 젊은이에게 한 어르신이 자네, 명석함과 지혜로움의 차이를 아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어르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의 말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은 명석함이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지혜로움 이라네.” @@@

구원과 멸망
-송영진신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말씀에서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 또는 ‘구원의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고 재미없어도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한 생활이니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이 실제로 좁은 것은 아닙니다.
(적은 수의 사람만 받아들이려고 하느님께서 문을 좁게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그 문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성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민족들의 보화와 보배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5-27).”
누구든지 들어가기를 원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단,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노력의 과정이 쉽지 않다는 뜻에서 ‘좁은 문’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을 보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서 못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들이 스스로 ‘멸망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다음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지만 들어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2) 자기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3)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라시는데,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4)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격만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반대로, “자격이 없으면 아무도 못 들어간다.”가 됩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에서 ‘경쟁률’을 연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하늘나라의 문으로 들어가는 일에는 경쟁률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 일은 ‘정원제’가 아니라 ‘자격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갈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이 다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인 성녀로 공경하고 있는 분들은 그 나라에 이미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보다 못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어느 쪽이 더 많을지는 모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 정도의 뜻일 것입니다.
묵시록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나중에 그곳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들어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못 들어온 경우도 있을 것이고, 못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들어와 있어서 놀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에서 다음 대화가 연상됩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감수하겠느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제 생활이나 수도자 생활이 좋게 보여서,
또는 신학교 생활이나 수도원 생활이 좋게 보여서 지원했다가,
실제로 살아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렵고 재미없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겉으로만 보는 신앙생활과
실제로 신앙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신앙생활은 ‘결과’를 생각하면서 힘든 ‘과정’을 참고 견디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과정’의 어려움만 보고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하늘나라의 문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 재미없고 지루한 주일미사 참례를 하는 것과
시원한 바닷가에서 피서를 즐기는 것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라면 주일미사를 선택할 것입니다.
만일에 주일미사를 포기하고 피서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좁은 문’을 버리고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주일미사 한 번 빠지고 피서 갔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멸망’을 당하겠는가?”,
또는 “살면서 한 번쯤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탄은 거의 항상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에서 작은 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 작은 유혹에 한 번 넘어갔다가 어느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너무 멀리 벗어나 있어서 되돌아가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좁은 문
-이종훈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 당시 율법학자들과 라삐들은 구원의 대상과 그 숫자에 대한 논의를 자주 했었다고 하니 그 질문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 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구원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 라삐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요즘말로 해석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의미 있게 살 수 있나? 인생이란? 어떻게 하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정도가 될 것 같다. 이런 질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한다. ‘예수님을 따라 그분처럼 살면 된다.’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하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시는 초대인 것 같다. 여기서 좁은 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라기보다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곳을 의미하셨던 같다. 그렇지 않다면 유다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몰려야 그 문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루카 13,29). 예수님을 몰라도 그분처럼 사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오직 예수님만 알고 그분만 들어가실 수 있는 하늘나라의 문을 모든 인류에게 열어 놓으셨다.
그렇게 모든 이에게 알려졌지만 아무나 다 들어갈 수는 없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세례가 입장권이 아니고 성당에서만 지내고 성직자와 수도자와 친분이 있다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또 기적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무조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만이 들어간다(마태 7,21-22). 예수님의 삶 전체가 곧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분은 설교만이 아니라 병자들을 무상으로 치유해주셨고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게다가 누가 죄인을 위해 수난과 죽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죄인을 지독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 우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이제 그 문이 우리에게도 열렸고 그 일을 우리도 할 수 있게 초대하셨다. 원수를 사랑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 말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지만 그분을 주님이라고 믿고 따른다고 내 안의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도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어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는 있다. 예수님의 희생, 하느님의 보속과 죽음으로 쌓여진 은총은 무한하다. 그렇다고 죄를 피하려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또한 하느님을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려고 훨씬 더 많이 노력한다. 주님이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 좁은 문이 우리와 온 인류에게 열렸다. 그 문은 좁아서 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다. 여럿이 함께 혹은 나를 대신해서 남이 들어갈 수는 없다. 인간적인 의지만으로는 안 되겠지만 세례로 받은 은총이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닮은 이타성으로 옮아가게 도와준다. 하늘나라의 문이 좁아도 다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그 문은 더 좁아 보이고 들어갈 수 없다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널찍한 길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 멸망하게 된다(마태 7,13).
예수님,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셨던 주님, 이 주어진 짧은 생을 주님처럼 살게 도와주소서. 주님이 지니셨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감을 저에게도 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께 내려 받은 은총을 저에게 전달해주셔서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구원을 위한 과제
-조욱현신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구원에 대한 질문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에나 어려운 문제임은 틀림없다. 오늘 복음은 당시의 신자들과 우리 모두가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라고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루카복음을 보면 9,51~19,28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동안의 말씀과 행적들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고, 이제는 다시 돌아오시지 못할 수 있는 분의 절박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라는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유다인들은 유다인이라는 사실마 가지고도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랍비 메이르(Meir)는 이스라엘에 살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신앙고백문인 셰마(Shema) 기도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아주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의도적으로 멀리 하신다. 즉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도 하시지 않고, 많다고도 하시지 않는다. 다만 구원에로 나아갈 결단을 촉구하시면서 상징적 개념으로서 절박함을 말씀하신다.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고 하신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주인이 문을 닫아버려 문밖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집주인이 갑자기 문을 닫아걸기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고 또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환상에 빠져 선행에 힘쓰지 않ㄷ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선을 행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 앞에서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다. 예수님께서 모르겠다고 선언하시는 그 “불의를 일삼는 자들”(27절; 시편 6,8 참조)과 정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만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오늘 복음 전체를 보면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특권, 즉 율법, 할례, 선민사상을 자랑하며 뽐내던 그 ‘보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여기서 루카는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에게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았다거나, 영성체를 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어떤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에 따르는 의무와 자기 고유의 사명을 수행하여 완수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원받을 사람이 아주 적어 보이지만, 그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음을 말씀하신다.“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하늘 나라는 특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늘 나라를 위한 우리의 결단과 선행의 실천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은총을 통해 인도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사람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차지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질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는 특권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 들어간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봉사하는 교회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만이 분명 이사야가, 바벨탑으로 상징되어 왔던 그 분열의 모습과 대립되는 종말의 시대에 이루어질 구세주의 보편성과 형제적 사랑을 그리며 보여주었던(창세 10장; 이사 66,19 참조) 새로운 사랑의 ‘바벨탑’을 건설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사명감으로 항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
-한상우신부-
말 없이 실천하는
계절의 변화입니다.
좁은 문을 지나고
빠져나온 가을에
감사드립니다.
말은 쉽지만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실천이 없는
우리믿음을 다시금
만나게됩니다.
실천이 없는
죽은 믿음은
그 어떤 문도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좁은 문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반성과 성찰사이에
좁은 문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교만과 아집의
바위돌을 먼저
힘껏 밀쳐냅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좁은 문을 빠져
나갈 수 있습니다.
낮아지고 작아지신
예수님의 삶이
참으로 옳았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실천은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회개는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비우고 내려놓는
실천에 있습니다.
변화하고
성장하고
영글어가는
우리의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연중 제21주일의 말씀들은 선택된 민족이라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도전이 되고 이방인들에게는 희망이 되는 말씀들로 채워집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구원받을 사람의 수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좁은 문"이라는 표현 자체에 답이 거의 들어 있는 듯 느껴집니다. 좁은 문으로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우니까요.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루카 13,25)
게다가 그 좁은 문이 때가 되면 닫힌답니다. 그러면 문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예수님은 구원 상황을 문 안쪽과 바깥쪽으로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뒤늦게 문을 두드리며 주인과의 연관성을 들어 호소하는 이들에게 주인은 매정하게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이 나름 주님 주변에서 제법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주인은 "불의한 자"라고 단언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는 의로움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어지지 않고 믿음으로써 얻어진다고 했지요. 그러니 "불의한 자"란 사회적 도덕적 견지에서 무도하게 해악을 끼치는 자를 가리키기보다 구원을 가져오신 분을 믿지 않는 자, 바로 믿음을 거부한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그런데 그 좁은 문으로 사방 팔방 온 세상에서 물밀듯 사람들이 밀려든다고 합니다. 율법이 보장하는 자들의 경직된 발걸음을 뱉어내던 좁은 문이 입을 한껏 벌려 새로운 백성을 맞아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은 처음 초대받은 자들이 아니라 새로운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이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선포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모으러 오시고, 그들이 와서 주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이사 66,18 참조) 주님이 그들을 보내시면 "그들은 민족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알릴 것"(이사 66,19)이고, 그리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동포를 "주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올"(이사 66,20)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 중에서 사제와 레위인을 뽑아 주님이 현존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의 위엄과 영광이 다시금 이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한 민족의 소유가 아니라 새로운 피로 수혈되고 새로운 잔칫상이 차려질 만민의 도성으로 그 성문을 활짝 열어젖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 12,6)
제2독서는 주님의 훈육이 자녀로 대하신다는 표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당신 자녀로 여기시기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시는 겁니다. 기존의 우상과 관습과 질서를 덮치며 밀려오는 도전이야말로 시련의 얼굴로 다가오는 아버지 하느님의 훈육입니다.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히브 12,12)
주님이 던지시는 모든 시련과 도전 앞에서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바른길을 달려야 합니다. 바른길은 좁은 문으로 이르는 길인 동시에 바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처럼 오늘의 모든 말씀들은 구원의 확장성과 보편성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이제 어느 한 민족을 넘어 온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수혜자인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불의를 벗었고, 맥 풀리고 힘 빠진 존재를 추스러 다시금 좁은 문을 향해 달립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기 전에, 온 사방에서 몰려드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바른길을 달려갑시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지만 애시당초 늦게 출발한 우리에게 등수보다 중요한 건 새로이 초대받은 우리 모두가 남녀노소, 빈부격차, 신분계급, 직업귀천 따질 것 없이 형제자매라는 자각입니다. 그러니 함께 달려갑시다.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기 전에!
저는 그 문앞에서 기다리렵니다. 벗님이 오시면 반가이 인사하고 들여보내고나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따라 들어가렵니다. 그러니 어서 오십시오. 사슴처럼 총총 뛰어 오십시오.

이 세상 배불뚝이들에게는 좁은
-김찬선신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은 그 뜻이 늘 알 듯 모를 듯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닌 것도 같고 그렇다고
이해하기가 그리 쉬운 말이 아닌 것도 같은 거지요.
우선 문이란 어디를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그런데 벽이 없이 사방이 트여있다면 문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이란 이렇듯 벽이나 울타리로 막혀 있음을 전제하며
그렇게 막혀 있는 곳을 통과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문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지만 들어가기가 쉽지 않기에 좁은 문인데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깁니다.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다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정말 구원 받으려는 사람이,
그것도 하느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 구원받으려는 사람이 과연 많을까요?
제 생각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입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는 임금이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사람들이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비유를 들었는데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럼에도 오늘 주님께서 구원받으려는 사람이 많다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이 아니라 자기천국이거나 이 세상 천국인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많아다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어떤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아 왔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니 돌아간 얘기를 들었는데
이 부자처럼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그런 천국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강의 때 자주 이런 고약한 질문을 던집니다.
천국 가기 원하시는 분 있으시면 손을 들어보시라고.
그런 다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시는 분은 얼마나 되는지 손 들어보시라고.
그러면 처음에는 다 손을 드는데 두 번째는 손 든 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 천국 가고 싶어 하지만 지금 당장 천국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니 이 말은 지금 죽는 것은 싫고 어쩔 수없이 죽게 되면
지옥 가는 것보다 천국 가겠다는 거지요.
이런 뜻에서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고 이런 뜻에서 천국 문, 구원의 문이 좁은 겁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은 막혀 있지도 않고 그래서 문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 이사야서가 노래하듯 주님의 산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있고 주님은 모두 그리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은 좁지 않고 그래서 천국 문도 좁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으니
공간이 좁아서 제한을 두시고 그래서 문이 좁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을 너무 좋아하고 이 세상 배불뚝이들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들어가려 해도 문이 좁은 겁니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온갖 나쁜 짓을 하여 자기 배를 불리며
이 세상을 자기들의 천국으로 만들려는 불의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인 천국에 들어오려고도 하지 않겠지만 설사
들어오려고 한다 해도 너무 뚱뚱해서 천국의 좁은 문은 통과불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기도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만 두면 문은 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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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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