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1일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58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투아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오 10세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다. 또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1914년에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은 1954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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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The workers in the vineya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켐의 지주와 벳 밀로의 주민이 모여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우자 요탐은 가시나무의 우화를 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준 포도밭 임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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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기드온의 아들 요탐이 들려준 우화를 통하여 아비멜렉이 시도한 군주제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군주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임금이신 하느님과 경쟁 상대처럼 불신하는 자세로든, 임금 자신들이 부당한 수단을 동원하든 시작될 것입니다.정권에 야망 있는 사람들에게 이 우화는 겸손에 대한 큰 교훈입니다. 명령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일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명령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오늘 복음은 포도밭 주인의 선함을 강조합니다. 밭 임자는 자기 포도밭에 일하러 온 다양한 일꾼들(이른 아침, 아홉 시쯤,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과 계속 합의합니다. 그러고는 저녁때가 되자 일꾼들에게 모두 똑같은 품삯을 지불합니다.맨 먼저 온 이들은 주인의 대우가 부당하다며 불만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주인은 저마다 계약을 맺은 품삯을 주었기에 부당하지 않고, 맨 나중에 온 이들에게 맨 먼저 온 이들과 똑같은 품삯을 주었으므로 선하다고 말합니다.하느님 나라와 비교 대상은 주인도, 일꾼도, 포도밭도 아니고, 통상적인 하루 노동의 품삯이며 모두가 똑같이 받는 한 데나리온입니다. 선한 주인은 거저 주시는 하느님을, 일꾼들은 사람들을 나타내고, 포도밭의 일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나타냅니다.이 비유는 대부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마태오 복음사가의 교리 교육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새 백성은 포도밭에 맨 먼저 부름을 받은 이들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맨 나중에 부름을 받은 이들인 이방인들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하였습니다. 이것은 열려 있는 선교의 결실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많은 이가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지금의 상황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곳에 올라야 충분하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남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그들과 비교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충분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이유를 제거하지 않는 한 충분하다는 생각을 절대로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한 명 살고 있다.’
언젠가 마트에 갔다가 마트 바닥에 누워서 마구 울고 있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고, 엄마는 집에 똑같은 것이 있다면서 혼을 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너, 계속 철부지처럼 굴래?”
아이가 철부지인 것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른이 계속해서 철부지 모습을 보이면 어떨까요? 그런데 만족하지 못하면서 남들과 끝없는 비교를 하면서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철부지’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밭 임자가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고용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있었고, 9시에 계약을 맺어 일한 사람이 있었고, 또 12시, 3시에 계약을 맺고 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시에 계약을 맺고 일한 사람이 있었지요. 이제 저녁때가 되어서 품삯을 주는데,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나와 잠깐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주지요. 불공평해 보입니다. 이 불공평함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똑같이 품삯 받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받는 품삯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한 다른 이들과 비교를 해서 품삯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판단은 세상의 기준을 떠나 똑같이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이 하느님 판단에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철부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는 삶, 그래서 늘 감사하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덴마크 철학자로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쇠렌 키르케고르의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비교는 행복의 끝이자 불만의 시작이다.’
비교하는 순간,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대신 끝없는 불만이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러한 방법을 제안하더군요. 즉, 자신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는 이유
-전삼용신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김준호씨의 자서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기술병으로 군대 입대했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불행이 그에게 덮쳐오게 되었습니다.
탱크 위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거꾸로 땅에 떨어져 목을 다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손발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그는 식사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을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부산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다시 육군통합병원에 가서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자 결국 원호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한참 활동할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몸밖에 움직일 수 없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매일을 절망과 슬픔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또한 너무 오래 누워 있어야 했기에 엉덩이와 어깨 죽지 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욕창으로 피부 이식 수술까지 받아야했습니다. 목 아래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혀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마취하지 않아도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침부터 캄캄한 저녁을 맞기까지 오직 천장만 쳐다보면서 자신을 저주하고 자살할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나 손 발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그였기에 자살도 불가능했습니다. 자살조차 할 수 없는 신세, 그는 늘 이런 자학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휠체어를 탄 여 전도사 두 분이 찾아와 예수님을 믿기를 권했습니다. 그들의 눈물어린 기도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셔 들였습니다. 그리고 입에 젓가락을 물고 책장을 넘기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자 칠흑처럼 어두운 그의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의 빛 생명의 빛이 비춰오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희열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고 탄식과 눈물이 기쁨과 웃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곧 그는 원호병원에서 아리따운 간호 실습생 아가씨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자니 입술이 부르터서 몇 번이나 좌절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아내의 격려와 설득으로 그는 다시 붓을 물게 되었고 조금씩 남들이 감탄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린 동양화와 서예 수십 점을 모아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참조: ‘구필화가 김준호씨’, 꿈을 짜는 세례, 다음 블로그]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같은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은혜에 감사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평합니다. 이 감사의 정도가 하늘나라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꼴찌가 아니라 첫째가 되도록 감사의 마음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주인이 일꾼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포도밭이 아니라 그 포도밭으로 일꾼들을 불러드리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곧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비가 새는 집에 새우잠을 자도 사랑하는 임과 함께 있으면 그 곳이 천국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최고급 호텔에서 식사를 한다고 해도 같이 먹는 사람이 미운 사람이거나 두려운 사람이면 그 자리는 행복한 곳이 못 됩니다. 천국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한 이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친밀도는 어떻게 측정이 될까요? ‘감사의 정도’로 측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한 시간 일 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아홉 시간 일한 자신들에겐 더 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 데나리온 받기로 약속했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주인에게 더 해 주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교만함이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고 결국 하늘나라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되게 합니다.
반면 한 시간 일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것이 없는데 아홉 시간 일한 사람만큼의 돈을 받으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과의 관계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첫째와 꼴찌는 주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성체를 영하면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다만 감사한 마음뿐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성체를 영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듯 다른 무언가를 청합니다. 자신은 그것 이상으로 이 세상 것도 더 받아야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사람은 하늘나라와 멀리 있게 됩니다.
포도밭 주인이 주는 한 데나리온은 그 포도밭 주인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만으로 무한 감사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일을 시키십니다.
이런 은총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해서 아무 것도 청할 수 없는 상태, 다만 찬미만 올릴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가톨릭 평화신문 미주 지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문을 배달한 적은 있지만, 신문 제작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신문의 홍보, 유통, 판매는 알지 못합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28년 사제 생활을 돌아보면 본당이 아닌 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사목국, 캐나다 연수, 용문 청소년 수련원, 성소국은 처음으로 맡았던 소임이었습니다. 이번에 맡겨진 소임도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일의 성격과 규모는 달라도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다림입니다. 6개월 정도는 지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과정과 지금의 결과는 누군가의 고민과 성찰의 결과입니다. 지금 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족하고, 틀린 것 같지만 그런 것에도 다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성급하게 고치고, 바꾸고, 없애기 때문에 갈등과 오해가 생기곤 합니다.
둘째는 받아들임입니다. 씨를 뿌리는 분의 수고와 헌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는 분의 땀과 눈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건물, 내 앞에 보이는 성과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의 기도와 땀방울이 모인 것입니다. 작은 허물에 대한 비난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입니다. 제도와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법과 제도를 집행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는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가 아주 높습니다. 공무원들에 대한 신뢰가 아주 높습니다. 부정과 불의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내고, 적게 가진 사람은 적게 냅니다. 모든 사람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천길 물길은 알아도 한길이 안 되는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와 재물로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안경을 쓰고 사람들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신앙은 길이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마음으로 평가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수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하느님을 알았는지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평가하고, 비난하기 전에 나에게 맡겨진 역할과 사명을 먼저 충실하게 이행하여야 합니다. 평가와 비난은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두어도 괜찮습니다. 하나하나 배우면서 기다리면 새로운 것을 보게 되겠지요. 길도 알게 되고, 사회의 흐름도 파악하게 되고, 궁금한 것이 풀리겠지요. 지금 내 앞에 놓인 꽃과 열매는 먼저 씨를 뿌리고 가꾼 분들의 땀과 열정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일의 능력과 업적, 재능과 성과도 중요하겠지만 좋은 만남을 기대하면서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믿습니다. 부족한 제가 맡겨진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느님의 계산법은 인간의 계산법과 철저하게 다릅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언젠가 한 피정에서 명예나 청춘, 재물이며 목숨까지 다 주님께 봉헌하며 살아오신 분, 평생을 뒤돌아보지 않고, 달릴 곳을 다 달려오신 분께서 제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강의 중에 <우리가 만일 구원된다면, 우리가 그간 쌓아온 선행이나 업적보다는, 우리 인간 측의 죄와 나약함,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우리를 향한 측은지심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라고 하신 말씀 들으며, 조금은 혼란이 오고, 또 많이 서운했습니다. 그렇다면 작지만 그간 제가 평생토록 목숨바쳐 실천해온 이웃 사랑의 실천은 별것도 아니네요. 아무 소용도 없네요.”
뜨끔해진 저는 부랴부랴 해명을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게 아니고요!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인간 측의 노력도 아주 중요합니다. 죄와 악습을 멀리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는 노력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이 더 우세하다는 것이지요. 그간 쌓아오신 여러가지 공덕을 보시고 그분께서 아주 기뻐하시고, 크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저는 열심히 이런 저런 격려의 말씀 드렸지만 무척이나 궁색한 답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 역시 조심해서 접근해야 하고, 심오한 가르침의 배경에 대해서 잘 새겨 들어야겠습니다.
오전 9시에 포도밭에 도착해서 저녁 6시까지 열심히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들은 일당을 지급하는 주인의 처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전부터 하루 온 종일 뙤약볕에서, 그야말로 뼈빠지게 일한 일꾼은, 오후 5시에 도착해서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이 빳빳한 오만원 짜리 신권을 한 장 받는 것을 보고 머릿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오만원 받았으니, 가만히 있어보자, 9시간동안 일한 우리는 45만원을 받겠구나. 갑자기 이게 웬 떡이냐!’
그러나 웬걸! 주인이 건네는 일당 봉투를 조심스레 열어보니, 에게게!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은 5만원 짜리 딸랑 한 장이었습니다. 화가 벼락같이 난 그들은 크게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1절)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위와 비슷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신앙을 고백한 직제자들, 그리고 오랜 세월 충실히 그분을 섬겨온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뒤늦게 공동체에 편입된 사람들, 우상을 섬기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바라보며, 나름 우월의식이랄까 특권의식을 조금 지니고 있었겠지요.
“우리는 너희들과 격이 다르다. 우리는 직제자들이다. 우리는 원조 멤버들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상급도 당연히 차등 지급될 것이다.”
그들은 쓸데없는 우월감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새로운 신자들에게 텃세도 많이 부렸겠지요. 종말에도 당연히 뒤늦게 공동체에 가입된 사람들이나 이방인들과는 확연하게 차이나는, 급이 다른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와 교회 안에서도 버짓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생이나 신앙의 선배들은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찬 새로운 멤버들을 활짝 팔을 벌려,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단체 안에서 선배라는 이름으로 보잘 것 없는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나 걱정됩니다. 이런 상황을 미리 내다보신 예수님께서 아주 강한 어조의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삮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20장 13~15절)
하느님의 계산법은 인간의 계산법과 철저하게 다릅니다. 크신 하느님의 생각을 인간의 머리로 헤아리기가 벅찹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칩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야겠습니다.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측의 공덕에 비례해서 보상하시기도 하지만, 공덕과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바리사이들의 생각과 완전 다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공부한 사람,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만 구원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리나 창녀,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신앙생활의 길고 짧음에 상관하지 않고, 만백성들을 향해 세세대대로 베풀어집니다.

하느님의 것을 세상 것처럼 생각하지 마라
-반영억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 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 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송영진신부-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마태 20,1-2).”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6-7).”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9-12).”
일꾼들이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은총을 누리는 생활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일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일꾼들이 품삯을 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상징합니다.
(품삯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가 얻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실제로는 신앙생활에 대한 품삯이 아니라, ‘은총의 열매’입니다.)
맨 처음에 온 사람들과 맨 나중에 일한 사람들이,
또는 온종일 고생한 일꾼들과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 것은,
신앙생활을 언제 시작했든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했든지 간에
얻게 되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똑같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신앙생활 기간과는 상관이 없고,
또 각자 맡은 직책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교황으로 살았든지 성직자로 살았든지 수도자로 살았든지 평신도로 살았든지 간에
얻게 되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똑같습니다.)
맨 먼저 온 이들이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라고 생각한 것은,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오래 한 사람들이,
또는 교회에서 남들보다 더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이들이,
또는 남들보다 더 큰 업적을 남긴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보상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아무런 차별도 차이도 없습니다.
받느냐, 못 받느냐? 만 중요할 뿐입니다.
이것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로 바꿔서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만 중요할 뿐이고,
더 좋은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도 더 좋은 자리와 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시민이 됩니다.
처음에 사도로 뽑힌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사도로 뽑힌 마티아 사도 사이에,
또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고생한 사도들과
박해자였다가 회개한 바오로 사도 사이에 은총의 차별은 없습니다.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어른이 되어서, 또는 늙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짧은 기간 동안만 신앙생활을 한 사람 사이에도 은총의 차별은 없습니다.
다 똑같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나라에서 누리는 생명과 행복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렇다면 남들보다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할 필요가 없겠다. 사는 동안에는 마음대로 막 살다가 죽기 전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도 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게 회개일까?
(“지금은 내 마음대로 살고, 회개는 나중에 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로 있다면, 그리고 정말로 자기가 정한 때에 회개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회개는 진정성이 없는 회개, 즉 회개로 인정받지 못하는 ‘위선’이 될 뿐입니다.
실제로 “이번 주일에는 미사 빠지고 놀러가고, 다음 주에 고해성사를 보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는 고해성사에 과연 진실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따라서 그 경우는 주일을 지키지 않은 죄와 성사모독죄가 합해진 큰 죄가 됩니다.)
비유 속에서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사람’이 한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은,
일하고 싶어도 일꾼으로 사는 사람이 없어서 그때까지 계속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참 종교와 참 신앙을 갈망하면서 살았는데,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고,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시간만 일하게 된 것은 그들 자신들의 탓이 아닌 것입니다.
< 만일에 어떤 사람이 오후에 한 시간만 일해도 똑같은 품삯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서, 다른 곳에서 실컷 놀다가 다섯 시쯤에 장터로 가는 것으로
비유 내용을 바꾼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포도밭 임자를 만나지 못하게 되고,
품삯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날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회개를 언제 해야 하는가?는 ‘내가’ 정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과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24,50).>
“그래도 포도밭 주인이 한 일은 불공평하게 보이고, 온종일 고생한
일꾼들의 항의는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실제 ‘노동’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의 표현들은 가르침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
표현일 뿐이고, 신앙생활은 결코 ‘노동’이 아닙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은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남들보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은총을 받는 복된 일입니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면서 박해도 받고 고난도 겪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신앙생활은 틀림없이 은총의 생활입니다.
박해와 고난을 겪는 기간 중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
-이종훈신부-
우리 하느님은 참 부자시다. 우주만물이 당신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후해서이다. 너무 후해서 우리는 그분이 셈이 흐리거나 공정하지 못하다고 오해하고 불평한다(마태 20,8-12).
우리가 아는 정의(正義)와 하느님의 그것은 다르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끝까지, 우리가 잘 지키지 못해도 지키신다. 아드님까지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면서 그 약속을 지키셨다(로마 3,25).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요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러니 당신의 백성이요 자녀인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를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이해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라고.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다. 우리는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일군 밭에 가라지가 왜 생겼는지, 게다가 밀과 가라지도 구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웃을 함부로 심판할 수 있겠나. 사실 이웃을 심판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지고 그 무게에 눌려 쪼그라든다. 그러니 하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춘기 자녀는 자신이 부모에게 못되게 굴어도 그에 대한 부모의 벌과 보복은 상상도 하지 않는다. 부모를 마치 그의 종처럼 여기니 그럴 것이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그 이상이다. 당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죄인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내어 놓으셨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충실하심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온 세상에 선포되었다. 그분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도 똑같이 그렇게 사랑하신다.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야 한다. 내가 하느님의 그런 사랑을 받을만하지 못함을 잘 아는데 유독 나만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주장은 헛된 상상이 될 것이다.
주님, 저는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뒤에서 비난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았음을 기억하고 백 데나리온의 빚을 갚지 않는 이의 멱살을 잡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주님께서 바라시니 있는 힘을 다해 이해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 익히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0,1-16: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에서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시에, 아홉시에, 열두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포도밭은 하느님의 계명들이고, 이곳에서는 온갖 덕이 포도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있다. 즉 친절, 순결, 온유, 인내, 고결함 등이다.
교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그들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6절)라고 묻는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들은 모두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였다.
저녁에, 즉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내주라고 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을 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라고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 보수, 노임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마태 20, 15)
-한상우신부-
우리 삶은
어디만큼
가고 있습니까?
이른 아침입니까.
아홉 시입니까.
열두 시입니까.
오후 다섯 시입니까.
구원의 계획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무능한 우리를
나약한 우리를
가장 알맞은 때에
당신 포도밭 일꾼으로
초대하시는 넉넉하고
후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약속한
한 데나리온처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상황과
처지가 다른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행복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시기와 질투
비교와 불평은
주님께 있는
행복을 놓치게합니다.
주님을 향해
가고 있는
삶입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묻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이
빠져버린
삶은 언제나
삶의 원천이신
주님을
벗어나게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감사와 행복을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주님을
만납시다.

-오상선신부-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밭 임자에 비유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와 일꾼들을 직접 찾아나서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존재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하루에 다섯 차례나(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시, 오후 다섯 시) 인력시장이 있는 장터에 나갑니다. 이쯤 되면 일을 얻으려 나온 사람들 버금가는 정성입니다. 그렇다고 포도밭에 일이 넘치고 일손은 부족해서 조바심 치는 게 아닙니다. 그랬다면 애초 이른 아침에 더 많은 수의 일꾼들을 뽑아갔으면 되었을 테니까요. 하늘 나라의 수고는 일하고 싶어하는 이들과, 그들의 일들이 있는 한 계속됩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은 사랑의 의지이고 자애를 베풀려는 열망입니다. 당신을 바라는 이들을 당신 나라에 참여시키고 싶어하는 허용성이고, 갈망하는 이는 누구도 가리지 않는 관대함입니다. 특히 온종일 오늘 하루도 공칠까 불안과 절망으로 떨며 기다린 이들의 마음의 노고까지 헤아리는 자애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공정성이고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더 일하고도 덜 일한 이들과 동일한 품삯을 받은 이들이 투덜댑니다. 그들은 애초에 대가를 합의했다는 사실은 잊고, 나보다 덜 고생한 이와 자기가 같은 보상을 받은 것이 못마땅합니다. 이처럼 비교가 끼어드니 처음 동의했던 품삯에 대한 만족감이나 선택되었을 때의 감사는 희미해집니다.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에 몰입하기보다 타인과 하느님의 관계에 더 관심이 쏠립니다. 비교의식은 만족과 감사의 질을 떨어뜨리게 마련입니다.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더 가지려는 욕망이 좌절되자 그 욕망을 공정성으로 포장해 항변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늘 나라의 공정성이란 하느님 마음에 달린 일입니다. 더, 더, 더 사랑하려는 하느님의 의지가 곧 그분의 공의로움으로 표현되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의 논리인 사랑은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각자에게 맞는 사랑의 종류와 수량, 방식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늘 나라에 참여하길 꿈꾸는 이들은 마음의 논리도 변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물질적으로 더 받고 더 소유하고 더 누리는 삶이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가에 집중하면 참여 자체가 주는 은혜로움을 놓치게 되고, 남이 받은 은총을 힐끔거리다 마음의 풍요를 잃을 수 있습니다. 남보다 더 받지 못해 슬퍼하는 것으로 하루종일 하늘 나라에 참여한 행복을 잃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제1독서는 판관 기드온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자리 다툼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라는 판관기 마지막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이스라엘에는 왕정 제도가 서지 않았고 고난을 겪을 때마다 주님께서 세워주신 판관에 의존해 위기를 넘겨갔는데 그러다보니 혼란이 컸지요.
판관 기드온의 아들들 중 하나인 아비멜렉이 스켐 외가의 힘을 빌어 형제들을 살해하고 임금이 되었을 때 막내 요탐만 홀로 살아남습니다. 그가 스켐의 지주들을 향해 외친 이 비유에는, 훗날 하느님의 다스림보다 임금의 다스림을 선택했던 이스라엘의 미래가 담겨 있고 권력과 이권 놀음으로 변질될 "다스림"의 폐혜가 암시됩니다.
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과 세상에 유익을 주는 올리브, 무화과, 포도의 생산 주체들은 자기를 다른 존재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받은 은혜와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며 오롯이 소명에 충실하길 원할 뿐 권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지요.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 삼켜 버리리라."(판관 9,15)
오히려 가시나무는 미약한 자기 인식과 공격성으로 임금의 자리를 탐냅니다. 임금을 원한 나무들은 풍성하고 싱그러운 잎이 드리워준 그늘 밑이 아니라 메마르고 거친 가시나무 줄기들의 빈한한 그늘로 몸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인간의 다스림을 선택할 이스라엘이 아프게 겪으며 갚아나가게 될 권력의 뒤안길에는 하늘 나라의 논리 대신 세상의 논리가 들어차게 될 것입니다.
"꼴찌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른 아침부터 뽑혀 신나게 수고하며 하늘 나라에 참여했다는 뿌듯함에, 타인에게 쏟아지는 하느님의 후한 사랑을 함께 축복하는 기쁨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의 논리에 훨씬 가깝게 있는 겁니다. 비록 세상에서 크게 한 자리 차지하지 못해도 이 감사와 행복만으로 하느님 안에서는 충분히 첫째입니다. 주인의 선한 다스림에 만족하는 사이 어느새 주인의 관대함을 닮아가고 있으니까요.
늦었다 생각하지 말고, 오늘부터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어디서 일하건
-김찬선신부-
“내 것을 가지고 나가 하고 싶은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로
일한 시간이 다름에도 같은 품삯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얘기인데
이것은 일한 시간이 다르면 품삯이 다른 이 세상 셈법과
하늘나라의 셈법이 다름을 얘기하고자 든 비유이지요.
이 비유를 묵상하다가 올해는 이런 생각이랄까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어떤 포도밭에서 일하고 싶은가?
하늘나라 포도밭인가, 세상 포도밭인가?
하늘나라 포도밭에서 품삯은 무엇인가?
그러면서 얼마 전에 저의 누나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저의 종신서원식에 참여한 저의 매형이 서원식을 보고 나오면서
‘나도 진작 알았으면 수도자가 되는 건데!’라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그때는 ‘어떻게 자기와 결혼해 살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했다는 얘기인데
사실 저는 그런 얘기, 곧 수도생활을 진작 알았으면
시집 또는 장가 안 갔을 거라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 들으면 속으로 웃습니다.
수도원에 일찍 들어온 사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가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처럼 바깥세상에서 신나게 그리고 실컷 놀고 들어올 걸
괜히 일찍 들어온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늘나라 비유는 하늘나라를 위해 일찍 일한 사람이나
늦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얘기인데
만약 수도생활이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거라면 일찍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이나 늦게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세상 포도밭의 품삯은 돈인데 하늘나라 포도밭의 품삯은 뭡니까?
그것은 천국의 행복이고,
천국의 행복이란 하느님을 뵙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늘나라를 위해 봉헌했다는 사람들 곧 수도자들이
수도원에 일찍 들어와 오래 수도자로 살았지만 실제로는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고 안주하거나 자기성취를 위해 일한다면
시집장가 갔지만 늦게라도 하늘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어찌 하늘나라 포도밭에서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아무리 일찍 수도원에 일찍 들어와 살고 있어도
하늘나라를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품삯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지요.
세례를 받았다고 하늘나라를 위해 다 일하는 것이 아니고,
수도원에 들어와 산다고 다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일하건 언제부터 일하건 참으로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기만 하면
거기서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살게 될 것이고
일찍 일하기 시작하면 일찍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늦게 일하기 시작하면 늦게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늘나라 포도밭의 품삯은 불공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일찍부터 일하여
하느님을 일찍부터 뵙는 행복을 누구나 누리면 되는데
주님께서 이 포도밭에 우리를 오늘 초대하고 계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23일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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