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19,16-22)
“If you wish to be perfect, go,
sell what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The Rich Young M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을 섬겼지만,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판관들이 다스리는 동안에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을 포기하고 그들의 현실적인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이집트 종살이 탈출과 해방, 곧 구원의 큰 행위를 잊어버리고 늘 똑같은 죄를 저지릅니다. 주님의 진노와 처벌은 그들의 행실에 따른 결과입니다.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다시 억압과 종살이의 상황에 빠집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려고 판관들을 세우십니다. 판관들은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중재합니다. 그러나 판관이 죽은 뒤에 그들은 하느님의 눈에 악한 일을 다시 저지릅니다. 이는 참으로 인간이 저지르는 죄의 단조롭고 슬픈 역사입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회개로 이끄십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상황에서 그리고 저지른 모든 죄악에도 아랑곳없이, 하느님을 믿고 충만한 생명을 회복하려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충실은 인간의 불충실보다 탁월합니다.오늘 복음은, 인간적인 충실은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우리에게 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음에 들어찬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고 전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은 옛 법을 충실하게 지키지만, 복음의 새로움을 향하여 확실하게 뛰어들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참된 보물을 차지하려고 모든 것을 멀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의 비밀입니다. 여기에서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가로막는 온갖 애착을 상징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랑하는 순서가 바뀌면 죄를 짓게 된다.”
이웃 사랑과 돈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사랑의 순서는 이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웃이 아닌 돈 사랑이 먼저가 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먼저이기 때문에 이웃을 속여서라도 돈을 벌려고 한다면 이것이 죄가 됩니다. 또한 돈 사랑으로 인해서 어려워하는 이웃을 외면한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도 생각해보십시오. 친구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고민에 대한 비밀을 지켜달라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인기를 올리기 위해서 그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역시 인기에 대한 사랑이 우정에 대한 사랑보다 더 위에 놓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내 사랑의 순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 아니면 낮은 곳에 있는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에 따라 죄 중에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은총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십계명을 지켜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계명들을 충실히 다 지켜왔다는 젊은이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지요. 주님께서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산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때,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제일 윗자리에 두고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합당한 모습으로 따르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순서를 잘 따져보면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나 선생님들, 그리고 전문강사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저 역시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이곳저곳에서 강사로서 많은 강의를 하다 보니 이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가르쳐야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이해되지 않던 개념들이 정리되고 쏙쏙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지식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는 사랑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종종 내가 먼저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줄 수 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사랑을 먼저 줘야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사랑으로 서로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베푸는 사랑,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사랑을 베풀 때, 내 안에서 사랑의 정의가 분명하게 세워집니다.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
-전삼용신부-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항상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내가 했는데 당신이 왜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영화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보디빌딩에서 전설로 남은 인물입니다. 미국에 이민 온 오스트리아계 유학생이었지만 20살 때에 세계 최연소로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서 우승합니다. 그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 영화배우가 되어 많은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빌딩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잘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니 영양을 보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에 다니며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 5시간씩 대학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것만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는 연기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의 단 1분도 허비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수많은 영화에 출현해 성공작을 만들어냈고 나중엔 캘리포니아 주지사까지 하게 됩니다. 지금은 은퇴하고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강사로 활약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나도 하면 할 수 있다. 근데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 천국 가면 되는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할까요? 예수님이라면 그런 자수성가한 동기부여 강사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 주실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성공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나무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장려하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부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와서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냥 하느님 나라에만 들어가도 좋기는 하지만 더 큰 상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만약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은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은 상을 받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조금은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내가 왜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도 이 세상에서 노력한 것만큼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 격언 중 매우 짧으면서도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공허하다고 말하며 그냥 하루하루 연명하듯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을 허비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목표가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신 이유를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찾았다면 열심히 달려야합니다. 노를 저어야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2-13)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는 지금 가진 돈을 가지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삶을 두려워했습니다. 고통을 받기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을 타고 싶다면 고통을 즐겨야합니다. 무료함과 지루함을 사랑해야합니다. 그것 없이는 어떠한 성취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무하마드 알리에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기자가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알리는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윗몸일으키기를 몇 개나 하시죠?”
알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픔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세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세기 시작한다는 것일까요? 고통이 와서 그만하고 싶을 때부터 세는 것입니다. 힘이 들 때부터 진짜 운동이 되기 때문에 더 많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상을 받고 싶다면 내가 견딜 수 있는 시간보다 10분 더 성체 앞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묵주기도보다 1단만 더 하도록 해 봅시다. 내가 읽은 성경보다 1절만 더 읽으려고 해 봅시다. 이런 ‘조금 더’들이 쌓이면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도 그만큼 더 쌓이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매일 아침 산책하는 것이 취미이며 운동입니다. 성당, 현대시장, 성현동 성당, 봉천 고개, 상도 중학교, 중앙시장, 성당입니다. 1시간 30분 정도 걷습니다. 중간에 운동기구가 있어서 허리, 다리 운동을 합니다. 요즘은 방학이라 학생들을 보지 못하지만, 학생들의 생기있는 모습을 보는 기쁨은 덤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학생이 빨간불인데 건널목을 건너려고 했습니다. 저는 급히 학생을 불렀습니다. 학생은 스마트폰을 보면서 무심결에 건너려고 했습니다. 스마트폰이 좋고, 중요하겠지만 건널목을 건널 때는 신호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삽니다. 옷은 간편하고, 실용적이면 좋습니다. 사제는 사제의 복장을 하면 좋습니다. 스님은 승복을 입으면 좋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품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옷을 입습니다. 체면이라는 옷, 가식이라는 옷, 직책이라는 옷, 욕심이라는 옷, 시기와 질투라는 옷, 책임이라는 옷, 도덕과 규율이라는 옷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지만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마음의 옷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옷’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옷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는 옷으로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 더 내놓아 태양과 바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생명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잊지 말라.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규율과 율법이라는 옷을 잡 입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모범생들은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했고, 법도 잘 지켰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중에도 이런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잘하는 학생들입니다. 그런 모범생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사명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컴퓨터도, 내비게이션도 업그레이드를 시켜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모범생이라 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돈이 다가 아닙니다! 돈 없이도 살만합니다!
-양승국신부-
가끔씩 어깨 너머로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나라, 돈만 좀 있으면 정말이지 살만한 곳이다.” 비록 우리나라 뿐이겠습니까만, 따지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좁은 땅덩어리지만 여기저기 즐기고 누릴 곳 많지, 돈 좀 있으면 어디 가나 대우받지, 치안 안전하지...
그러다보니 돈이라는 것이 점점 위로 치고 올라와 우리네 삶 가운데 가장 윗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한 존재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진 것 없으면 어디가나 홀대받고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과도하게 돈돈! 하다보니 지금 돈은 최고의 자리를 넘어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른바 배금(拜金) 주의, 즉 돈 앞에 무릎 꿇고 절하는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경제적으로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약자들, 빈자들, 노인들, 환우들은 시대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를 향한 기대치가 확연히 다릅니다. 특히 물질적 유산(遺産)이 넉넉한 가정에서는, 그로 인한 갈등과 상처가 빈발합니다. 유산 분배 과정에서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현실과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 집안은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겨주신 물질적 유산이 없으니 그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도 없습니다. 단 신앙이라는 멋진 유산을 남겨주셨으니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합니다. 앞다투어 효심을 발휘합니다, 따지고 보니 유산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네요.
이런 황금만능주의 시대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막중합니다. ‘돈돈!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다!’ 하는 세상 앞에 돈이 다가 아니라고 외쳐야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살만하다!’고 부르짖는 세상 앞에서 ‘돈없이도 살만하다!’고 외쳐야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되면 즉시 다가오는 것이 당혹스러움이요 난감합입니다. 그만큼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에 깊이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돈 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대상들이 참 많습니다. 언젠가 영성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아주 존경하는 한 인물을 만나 차와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만남 한번이 제게는 수억 나가는 금은보화보다도 더 소중했습니다. 그 만남이 제게는 몇천만원 공돈 생긴 것 보다 더 기뻤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생에 한번씩은 체험하는 바입니다. 한 존재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우연히 다가옵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합니까? 뭐라도 있으면 다 주고 싶습니다. 그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상은 돈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지난 인생사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주변 환경을 찬찬히 한번 살펴볼 일입니다. 과연 돈보도 더 우위에 있는 대상, 돈과는 비교가 안되는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한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없을 것 같지만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대상들을 찾아내고, 그 대상들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더 깊이 사랑하는 노력, 그것이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황금만능주의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한 유다 청년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참으로 듣기 거북한 쓴소리를 건네십니다. 그러나 외면하지 말고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 자리에서 주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가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버림과 추종을 주제로 한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분들은 그러실 것입니다. ‘나는 수도자로서 이미 다 버렸고, 이미 주님 추종의 길로 깊이 들어섰으니,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려니...’ ‘나는 팔것도 나눌 것도 없는 사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벅찬 가난한 사람인데, 나는 해당사항 없는 듯!’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재물 못지 않은 것들, 재물에 준하는 것들이 다양한 대상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목숨이 끊어져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대상들이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나만의 달란트, 내 삶 전체...!
그것들을 필요한 이웃들과 공유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아주 좋은 포기요 나눔, 봉헌이요 추종입니다.

나를 옭아매는 것
-반영억신부-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에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 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재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계명
-이종훈신부-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해라는 계명을 주셨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웃사랑도 마찬가지다. 선한 일은 애써 지켜야하는 계명으로 주어지는데 악한 일은 아무런 계명이 없어도 그냥 저질러진다. 원죄에 물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곳저곳에서 다른 내용으로 설교하고 듣지만 내용은 늘 한 가지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는 요구이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해서 지루할 법 한데 새롭게 들리는 게 신비롭다. 수백 번은 읽어서 다 아는 복음서 내용인데도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읽는다. 아니 듣는다. 주님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다.
뉘우치고 결심하지만 또 다시 실패한다. 내 마음과 머리에 나쁜 프로그램이 무한반복 실행되는 것 같다. 그것은 자동실행 되니까 깨어있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을 계속 말해주지 않는다면 언젠가 틀림없이 하느님도 그분의 계명도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계속 세워주셨고 끝내는 당신의 아드님까지 내어주셨다. 하느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 묵상하고 연구해도 여전히 다 이해되지 않는 신비로운 사건, 십자가의 죽음을 남겨 놓으셨다.
하늘 아래 뭐 새로울 게 있겠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을 누군가 늘 말해줘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 선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듣고 내가 흔들리지 않으려고 선포한다.
주님,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당신의 말씀을 잘 따르지 못합니다. 선함은 노력해야 하는데, 악행은 저절로 저질러집니다. 이 가련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게 도와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또 믿게 이끌어주소서. 아멘.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송영진신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19,16).”
여기서 ‘어떤 사람’은 ‘젊은이’이고, 부자이고(마태 19,22),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잘 지켜 왔고(마르 10,20),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십계명을 제대로, 즉 온전히 지키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 두 계명을 다시 하나로 압축한 것이 ‘황금률’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5-36).”
십계명을 지키는 일과 예수님을 믿는 일은 어떤 관계일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
즉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일도 십계명을 지키는 일에 포함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당연히 십계명을 잘 지킵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십계명을 잘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십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잘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0-22).”
여기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는 말은,
“부족한 것이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낍니다.” 라는 뜻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를 “공허감을 느낀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있고,
재산이 많아서 물질적으로 여유 있게 살고 있고,
그런데도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느낌, 허전한 느낌...
그는 그 공허감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인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답변도 그런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채워 넣는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만 영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자기 안에 가득 차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영적인 것으로 가득 채우는 일은, 이 세상에서의 공허감에서 해방되는 일이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만 있으면,
영적인 것이 들어갈 공간을 자기 스스로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젊은이는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은 맞는데, 그 ‘섬김’이 부족합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하느님 사랑’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재물 때문에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갈래로 흐트러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뜻인데,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을 실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재물 때문에 흐트러져 있는 마음과 정신을
바로잡아야 하고, 그 방법은 능동적으로 재물에서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즉 재물을 자기 품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다시 단순하게 정리하면, 그 젊은이의 ‘부족한 점’은 사랑 실천이 부족한 것과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상 하나의 문제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크면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엇이 슬펐던 것일까?
그는 분명히 많은 재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을 느껴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버려야 할 것을 과감하게 버릴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해서
계속 그 공허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슬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슬퍼한 셈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지금 소중하게 여기면서 애지중지하는 것들이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전부 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으로는 버려야 할 ‘쓰레기’일 뿐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9,16-22: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그 젊은이가 생각하는 영원한 삶이란 자신의 만족과 함께 하느님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편안함이었던 것 같다. 이 질문은 율법을 잘 지키고 선행을 쌓음으로써 그 대가로 영원한 삶을 받겠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 준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고 한다.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든지 간에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한상우신부-
가난함과
영원함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생명의 소유권은
언제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삶인 나눔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눔의 삶은
하느님을 향하는
삶입니다.
그냥 생명의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생명의 하루이길
바라십니다.
영원한 오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살리십니다.
끊임없이 내려놓는
여정을 우리는
걸어가야합니다.
하느님 아닌 것에
매달려 살고있는
우리를 반성합니다.
지나가고 사라지는
허망한 욕심이 아닌
쏟아지는 은총
영원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나눔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향합시다.

-오상선신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한 젊은이가 다가와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여쭙고 싶은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미 그 젊은이는 제 안에 대략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답입니다. 다만 자신이 매우 잘 실천하는 계명들 외에 뭐가 더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킬 것 다 지키며 열심히 살지만, 과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갈망을 동시에 감지했기 때문이겠지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지켜야 할 계명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을 하지 말고, 부모님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조항들을 나열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그가 다 잘 지키는 것들입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젊은이는 그 정도라면 자신이 있습니다. 잘 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았으니 만족스러울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불안과 갈망이 더 커져갑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걸 다 잘 하고 있는데도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 미진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서 모세를 통해 받은 열 개의 계명 중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건 쏙 빼시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것들만 말씀하신 겁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하느님과의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까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마태 19,21)
예수님께서 살며시 그의 허를 찌르십니다. 젊은이의 욕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겉으로 표현은 되었으나 실상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루 다 잘 하고 두루 잘 갖춘 괜찮은 사람으로도 모자라 완전해지고 싶은 겁니다. 또 그 완전함을 확인받고 싶기도 하고요. 지상에서 나름 훌륭히 사는 삶은 사후에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야 완전함의 방점이 찍히겠지요.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완전한 사람이 되는 충족 요건 중 하나에 불과했던 걸까요?
그런데 사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지상 삶에서는 물론 사후에까지 그분 곁에서 영원히 그 사랑을 누리고 싶을 때 갈망하게 되는 겁니다. 지옥 가서 벌 안받으려고 반대급부로 바라게 되는 보상적 공간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예수님께서 갑자기 재산 처분 이야기를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그러셨을까요? 워낙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분이시니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겠지만, 지금 맥락에선 좀 뚱딴지같지요. 오늘의 주제가 가난한 이들을 도우라는 쪽으로 흘러가는 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심층으로 들어가면 부자 청년에게 던진 예수님의 결정적 요구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라는 권고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까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지켜야 할 계명들을 나열하셨을 때 건너뛰신 부분, 즉 하느님 사랑과 관련된 부분이 "버림과 따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너도 가난해질 수 있겠느냐? 가난해지면 하느님밖에 믿고 의지할 데가 없을텐데 그렇게 온전히 의탁할 수 있겠느냐? 너는 아직 젊은데, 남은 길고 창창한 생애 동안 그렇게 하느님을 믿고 너를 던질수 있겠느냐?" 즉,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사랑하고 흠숭하며 바라는 삶으로의 초대였던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2)
안타깝게도 부자 청년의 세속적 이점인 "부유함"은 주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됩니다. 그가 흔쾌히 "부"를 포기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부"는 그에게 이점인 동시에 굴레였습니다. 자신의 "부"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사람같지만 실상은 "부"에 묶인 예속 상태, 노예 상태인 것이지요. 이미 젊은이에게는 재물이 포기할 수 없는 우상이 된 것입니다. 완전함을 획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우상!
제1독서는 판관기의 앞부분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염려하셨던 대로 우상에 빠져듭니다. 하느님과 우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가나안 정착 초기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우상숭배 --> 주님의 진노 --> 재앙과 곤경 --> 백성의 탄식 --> 가엾이 여기시고 구원 --> 또 다시 우상숭배 ...이 도식은 지치지 않고 반복됩니다. "그래도"(화답송) 용서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주님과 "그런데도"(판관 2,17) 다시 불륜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의 밀당은 그들만의 문제일까요?
오늘 부자 청년이 드러내놓고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재물에 발이 묶여 결정적인 한 걸음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서는 걸 우리 모두 안타깝게 지켜보았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섬기는 삶으로의 초대는 이처럼 각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 뛰어난 부분,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은, 영혼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며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영원한 삶, 그토록 사랑하는 성삼위 하느님 사랑 안에 들어가 영원토록 얼굴을 마주하며 즐기는 삶은 사후에 갑자기 시작되지 않을 겁니다. 지상의 여정을 걷는 동안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머무르며 자신을 온전히 그분 품 안에 내던지고 의탁해 형성된 끈끈하고 친밀한 일치가, 그동안 충실히 실천해온 "선한 일"들과 엮어지면서 이미 체험한 생명이 영원히 연장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주님 뜻에 따라 실천하고 있는 "선한 일"들에 색채와 온기를 더할 결정적 한 걸음, 저마다의 "재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부르심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선행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5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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