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8. 7. 18:27

2019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오 19,3-12)

For this reason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joined to his wife,

and the two shall become one flesh?
So they are no longer two, but one flesh.
Therefore,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man must not separat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모이게 하고 온 백성에게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을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내를 버려도 되냐는 질문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여호수아가 주도하는 스켐 집회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엄숙한 모임으로 진행된 스켐 집회에서 여호수아는 온 백성 앞에서,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집트에서의 해방과 약속된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구원과 호의의 근본적인 행위들을 상기합니다. 모든 일은 하느님의 활동, 그분의 충실과 사랑을 보여 주는 매우 명백한 표징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백성에게 여호수아의 입을 빌려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이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여호수아와 온 백성의 대답은 감사와 신뢰와 충실의 표현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요한 4,38). 이처럼 우리는 선택과 책임 앞에 놓여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이혼에 관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창조주께서 원하신 혼인이 지닌 존엄성을 일깨워 주십니다. 불가 해소적인 혼인만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혼인으로 뗄 수 없는 친교를 맺게 해 주신 하느님 계획과 상통합니다. 이혼장은 사람들 마음이 완고해서 허락된 것이기에 모든 경우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혼인 자체가 절대적인 선익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늘 나라 때문에” 혼인의 가치를 포기하는 은총을 받는 이들도 있고, 복음을 전하려고 온전히 헌신하는 마음의 자유 상태를 지닌 동정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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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무로 만들면 나막신이라고 하지. 고무로 만들면 고무신, 털로 만들면 털신이라고 해. 그렇다면 사랑으로 만든 신은 무엇일까?”

아내가 답을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편은 아내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당신이야.”

맞습니다. 나의 배우자인 ‘당신’은 사랑으로 만든 신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당신’이 되는 것이지, 세상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이분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를 만나면서 고민에 빠졌지요. 내 배우자를 사랑하느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내 삶의 50%로, 나머지 50%로 사랑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일과 남자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얼마 뒤에 “어리석은 생각이었어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사랑은 언제나 100%로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일에 대한 사랑 50%까지 합해져서 내 삶의 지평이 150%로 늘어나는 것이었어요.”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표정이 밝아졌고 일을 더욱더 기쁘게 할 수 있었답니다. 자연스럽게 직장 안에서의 평가도 더 좋아졌습니다. 사랑을 통해 삶의 지평이 늘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지 않나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랑을 늘 강조하셨던 예수님이기에 “안 된다.”라고 말하면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냐면서 따질 것이고, “율법에 있으니 된다.”라고 말하면 “그러면 이제까지 당신이 말한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따질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내를 버리려고 하는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혼인을 해소하는 법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런 법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즉, 바리사이의 질문 안에는 사랑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성실한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배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간직하고 실천하십시오. 내 삶의 지평이 훨씬 더 커집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아이리스 머독).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삶.

컴퓨터 본체를 뜯게 되었습니다. 먼지가 겉에서도 보일 정도로 많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체를 열어서 부품 하나하나를 빼서 먼지를 깨끗이 제거했지요. 이렇게 청소를 깨끗하게 한 뒤에 다시 조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완벽하게 조립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빠졌는지 나사 하나가 남는 것입니다.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컴퓨터 본체를 닫고서 전원을 켰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저의 예상과 달리 듣기에 불쾌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이 나사못이 없기에 제대로 조여주지 못했고 그래서 그 부분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었지요.

그냥 하나의 나사못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작은 나사못도 컴퓨터 안에서는 꼭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스스로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필요 없는 삶은 없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삶. 자신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겸손과 교만이 주는 시각 차이

-전삼용신부-


한 본당의 청년회장이 본당의 청소년 분과장님과 술자리에서 결혼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분과장이 말했습니다.

      “청년회장아,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됐는데, 내가 소개시켜 줄 테니까 이상형인 어떤지 말해봐.”

      “예, 뭐 얼굴은 귀여우면 좋고요, 몸매도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요리도 좀 잘 했으면 좋겠고요, 착하지만 애교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분과장이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넌 평생 결혼 못 하겠다. 그런 여자가 딱 한 명 있었는데 이미 결혼해버렸거든.”

      “그게 누군데요?”

      “내 아내지!”

      “근데 분과장님 사모님은 뭐 그렇게 ... 아!!!”

      그 청년은 그 순간 결혼관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교만해지면 상대가 아무리 완벽해도 그 사람에게서 나의 배우자가 되기에 합당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내가 겸손하면 나와 결혼해 준 것에 감사해서 배우자의 모든 단점들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부관계의 잘못되어가는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하다 보니 상대에게 원망하고, 결국엔 ‘안 되면 바꾸지 뭐’라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시각을 지닌 바리사이들이 오늘 예수님을 찾아와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안 된다고 선을 그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모세가 준 율법이 곧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선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이렇게 그들의 수준에 맞게 법을 맞춰서 준 이유는 더 높은 수준의 법을 줘봐야 반발심만 생기고 실천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젖을 너무 먹고 싶지만 더 먹으면 안 될 때 부모는 공갈젖꼭지를 물려줍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젖도 안 나오는 그것을 빨면서 어느 정도의 만족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었을 때 모세가 준 법이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륜을 저지르는 것 외에는 절대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는 둘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부부는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통하여 한 몸이 되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부부의 결합은 그만큼 신성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상대에 대한 원망이 쌓여갑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습니다. 서로의 탓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상대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부부사이가 안 좋아지는 이유는 상대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어 교만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만으로 잃은 눈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태생 소경에게 눈을 다시 만들어주시고 실로암에서 씻고 새롭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실로암으로 가는 동안 태생소경이 버린 것은 자존심입니다. 자기 자신의 교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의 교만을 없애주시고 당시의 눈으로 보게 하시면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사랑하는 척이 아니라 사랑스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제일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예쁜 연예인은 여러 명의 정말 대단한 남성들과 결혼하고 헤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세가 드신 이후 “나와 함께 산 사람 중에 대단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과 살았는데도 그분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자신의 눈을 먼저 바꾸려해야지 ‘내가 왜 저런 사람과 결혼했을까?’라고만 생각하면 바리사이일 수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가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더 나은 사람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부터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보면 주님께서 맺어주신 배우자만큼 완벽한 사람을 볼 수 없을 것 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저도 질문을 받곤 합니다. 오늘은 질문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에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질문은 몰라서 묻는 것이 있습니다. 길을 묻기도 하고 문제의 해결 방법을 묻기도 합니다. 둘째, 질문은 상대방의 실력을 묻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는 어디까지 했는지, 철학은 어디까지 배웠는지, 수학의 방정식을 묻는 것이 있습니다. 면접이나 시험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질문은 깨우침을 주는 물음이 있습니다. 선불교에서 고승이 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냐?”


산행에서 계속 질문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대답을 듣고 종교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시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질문을 제게 하였습니다. “볼트만은 구약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신부님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저는 구약은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이라는 밭에서 많은 보물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 잠언, 지혜서에는 인류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유물론자라고 하였던 형제님이 저와의 대화를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산행을 마치면서 종교를 가지면 가톨릭을 갖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질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이번 산행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산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면서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시고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도, 사제나 수도자의 삶은 사는 것도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가정을 이루는 것도, 독신으로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포기하지 못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헤어진다는 것

-반영억신부-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8.3%로 나타났습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성격 차’'경제적 이유'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몰아 부치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등을 돌립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을 하였습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 받고 존경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1고린7,10-11).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으로 엮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제 인생철학의 핵심은 절제이며 제 정치철학의 요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요즘 옆 나라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정말이지 백성들이 깨어 있어야겠다는 것, 그리고 리더를 잘 뽑아야겠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기본이 안된 리더, 야욕과 사심으로 가득한 리더, 품위나 양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천박한 리더가 얼마나 국격을 실추시키는지, 얼마나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지? 얼마나 주변국들을 괴롭히는지를, 지금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역사 안에 꼭 독재자나 폭군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더군요. 2015년 2월 우루과이에서는 5년 임기의 대통령이 교체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세간의 이목은 신임 대통령이 아니라 퇴임하는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에게 쏠렸습니다.

 

 임기 내내 지속된 섬김과 봉사의 리더십, 청빈하고 서민적인 삶에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 참 지도자요 현자(賢者)라며 크게 칭송하셨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놓았습니다. 자신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작고 허름한 부인 소유의 농장에서 기거했습니다.

 

 대통령 사저 밖에는 언제나 손수 세탁한 빨래가 내걸려있었고 필요한 식수는 본인이 직접 잡초가 무성한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퍼오곤 했답니다. 폐차 직전의 털털거리는 고물 자동차를 손수 몰고 출근했으며 병원을 이용할 때도 일반 시민들과 똑같이 순서를 기다렸답니다. 대통령 사저를 지키는 사람들은 일개 중대의 무장 병력이 아니라 언제나 한가해 보이는 두 명의 경찰과 다리 하나를 잃은 그의 개 마누엘라가 전부였습니다.

 

 나라로부터 받은 급여는 대부분 기부에 썼습니다. 임기 내내 월급의 90%를 절대빈곤층과 소상공인을 돕는 자선단체에 건넸습니다. 그의 손에 남는 월 소득은 우루과이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 정도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큰 경종으로 다가옵니다.

 

 “제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저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살 뿐입니다. 사람이 사는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제 인생철학의 핵심은 절제이며 제 정치철학의 요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을 버리고 낮춤으로써 국민들에게 신뢰와 권위를 얻었습니다. 부적격한 지도자들, 언행일치가 안 되는 지도자들, 자기관리 등 기본도 안 되는 지도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까?

 

 한 자리 차지하면 갑자기 신(神)이라도 된 듯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아랫사람들을 억압하는 지도자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 백성들을 아끼고 섬기는 지도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는 지도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멋진 국왕이 한 분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975∼1038)입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무척이나 청빈했습니다. 왕으로서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아주 소박하고 단출한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백성의 필요성에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기에 굶주리던 백성들을 위해 왕실의 곳간을 활짝 열어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왕관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자신의 손에 맡겨진 헝가리 왕국 안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생애 안에 잘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신앙과 삶, 기도와 활동 사이에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현대 성인의 선구자요 리더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인과 이혼

-송영진신부-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4-6).”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과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다는 말씀은,
‘혼인’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은 신앙생활의 일부가 됩니다.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을 잘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부부생활과 가정생활도 잘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내 배우자는 내가 선택했고,
내 결혼도 내가 결정했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신앙인의 혼인성사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또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을 잘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따르는 일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말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목숨’은 ‘영원한 생명’의 반대쪽에 있는 허무한 육신의 욕망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세속적인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르반’ 관행을 핑계로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유대인들의 불효를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르 7,9-13).
또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는 혼자 남아 계실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시기도 했습니다(요한 19,26-27).
예수님께서 효도를 강조하신 것은 가정생활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가정이 ‘성가정’을 본받는 가정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앙을 이유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결코 성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가정을 이루려면 한 마음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해야 하고, 함께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가족은 신앙 여정에서 최고의 동반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실 때 하셨던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것을 말렸을 때
하신 말씀인데, ‘몸의 편안함’만 추구하지 말고,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훈계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정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함께 추구해야 할 ‘하느님의 일’은
온 가족이 모두 함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사람의 일’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편안함입니다.
부부생활로 더욱 좁혀서 생각하면, 부부가 함께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어렵고 힘든 길은 피하고, 쉽고 편한 길로만 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결혼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을 통해서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쉽고 편한 길만 골라서 가면,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인생살이와 세상살이가, 또 신앙 여정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도 만나고, 어떤 위기 상황도 만나는데,
그런 일들을 모두 피해버리면, 그 당장에는 편하고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완전한 행복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혼인은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혼인성사의 은총을 완성하려면,
부부가 각자 자신을 버리고,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
(혼인성사는 결혼식을 할 때 시작됩니다.
마지막 완성은 인생의 끝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혼인성사의 은총의 완성은 부부가 평생 함께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결혼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가정이라는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심하는 일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일”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말은 하느님께서 강요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택은 각자 자유의지로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십자가를
죽을 때까지 기꺼이 지고 가겠다고 하느님과 배우자에게 서약하는 것,
그것이 혼인성사입니다.
(물론 순전히 혼자서만 지고 가는 것은 아니고 배우자와 함께 지고 가지만,
그래도 자기 몫의 십자가는 따로 있는 법입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면 참 행복도 없습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려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리가 혼인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혼인과 이혼에 대한 말씀이 나올 때마다 인간 세상의 현실을 언급하면서,
“그게 그렇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라고 반박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 가르침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의 풍조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이천 여 년 전의 이스라엘과 로마 사회는 오늘날보다 더 심했습니다.
아무렇게나 혼인하고 아무렇게나 이혼했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하느님의 일”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는 완전히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풍조를 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절대로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 말이 아닙니다.)   


내어맡김

-이종훈신부-


구약에서 하느님을 만군의 주님이라고 부르곤 한다. 하느님은 막강한 전사이시고, 싸움에 능하신 분이라는 고백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니 우리들은 그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를 일깨워줬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여호 24,12).”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권고를 늘 받는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면 나는 아무 것도 안 하나? 내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모든 문제가 그냥 풀린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하느님도 아무런 도움을 주실 수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도와주실 수 없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김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마음과 관련된 것일 거다. 해야 할 일을 내가 알고 배운 대로 그냥 하는 것이고 일을 다 마쳤으면 기다리는 것이다. 조바심과 걱정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마음을 뒤흔들어도 그것들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힘을 쓰지 못하고 이내 사그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거룩한 일은 생명을 낳고 키움이다. 이는 결혼을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마태 19,12)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위해서 그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혼인을 하든, 수도생활을 하든 혹은 어쩔 수 없이 독신으로 살든 모두가 세상에서 모든 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처럼 거룩해진다.

 

예수님, 스스로 고자가 되면 성적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줄 알았나봅니다. 그런데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을 온 몸에서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 지진은 주님이 제 안에 심어 놓으신 사랑이 딱딱한 마음과 굳어진 몸을 움직이는 소리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를 닮아 언제나 이웃을 도우며 살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남자는 제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리라.

-조욱현신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3)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은 상대의 결점을 느끼지 못한다. 서로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있다면 혼인을 무효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갈라지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둘의 관계는 멀어진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갑작스럽게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태 5,31-32 참조). 갑자기 질문을 던져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율법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거나, 먼저 말씀하신 것과 다른 말씀을 하시게 하려는 술수였다.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하시면, 전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고, 그전과 같이 말씀하시면 모세의 법을 들어 따지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4-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다는 사실만 말씀하시지 않고, 남자는 안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분부하신 것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혼인으로 하나가 된 부부는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더 큰 결합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6)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둘을 결합시키셨다. 하느님께서 결합시키신 이 결합은 사람이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하고 명령하였습니까?”(7)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8)라고 말씀하신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9) 불륜이라는 것은 자기의 배우자가 아닌 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불륜은 하나이신 하느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포함되며, 우상숭배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불륜으로 여겼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녀로 표현하는 부분이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제 발로 이교인들이나 이단으로 넘어가지 않는 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10) 주님은 이 말에 동의를 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11)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12) 이들은 온전한 남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고자가 된 사람들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12) 즉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싸워서 승리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갈림없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 6)

-한상우신부-

세상의 모든
관계는 약속으로
더욱 영글어갑니다.

약속과
약속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지켜야 할
소중한 약속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잘라낼 수 없는
혼인의 관계입니다.

약속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은
약속이 하느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약속이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살리는
혼인서약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혼인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오상선신부-


모세가 먼저일까요, 하느님이 먼저일까요? 너무 뻔하고 불경스럽기까지한 질문처럼 들리겠지만 오늘 말씀들에서는 모세와 하느님 사이의 질서 찾기가 시도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던진 질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들 중 어떤 것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과 합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를 올가미 삼아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잡으려 하는 겁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하고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이들의 친구인 예수님께서 그들의 편을 드는 것이 영 못마땅한 것 같습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마태 19,4-5)
예수님은 이처럼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시고,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마태 19,7) 바리사이들은 이처럼 모세를 앞세웁니다. "명령"이라고 슬쩍 과장까지 하면서요.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8)
다시 예수님은 "처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질서 지워 주실 때의 그 뜻을 생각하라고, 모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희 마음이 완고하게 굳어서일 뿐이니, 모든 이들에게 일반화시켜 적용할 일은 아니라고 재차 인내롭게 초대를 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19,9)
바리사이들이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방패 삼아 붙잡고 늘어지는 모세라는 중개자를 뛰어 넘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고 직접 선포하신 겁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으로서, 전달자와 무수한 해석자들을 거치면서 일부의 편의대로 굴절되고 모호해져 버린 율법 본래의 정신을 바로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잘 아시기에 혼인관계가 한 쪽, 주로 기득권층인 남성의 취향이나 변심, 욕정으로 무너지는 세태를 안타깝게 여기신 듯합니다. 그래도 "불륜"의 경우는 예외를 두셨는데요, 사실 구약 예언서들에 드러난 "불륜"이라는 단어는 신부인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하느님 외의 다른 이방신을 섬기거나 외세의 힘에 기댈 때, 즉 혼인관계로 표현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더럽혀지고 오염되었을 때 쓰는 표현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 "불륜"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하셨을까요? 물론 당장의 꾸짖음과 징벌이 없지 않았지만, 울부짖는 백성의 고통을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없으셔서, 거시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응답은 결국 용서였습니다. 오히려 불륜의 자취를 말끔히 씻어 주시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눈같이 희게 해 주셨지요.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인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크기와 깊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9,10)
그런데 이 가르침이 이번에는 제자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자의건 타의건 이미 율법과 관습에 익숙해 있었으니까요. 불륜의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에게 이혼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면 혼인이 별 의미가 없지 않겠느냐는 볼멘 소리입니다. 이 말을 통해 사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꿈꾸셨던 하느님의 원뜻이 얼마나 변질이 되었는지 감지할 수 있지요. 그러니 예수님은 이 모두를 상대로 하느님의 사랑의 정신을 다시 일깨우셔야 했습니다.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독신이 흔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굳이 혼인하지 않겠다면 제 편의나 권리 행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 나라"를 위해서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건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마태 19,11)고 하시면서요.

세상 일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모든 하느님의 일에는 더더욱 바른 동기와 바른 지향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거나 착취하려 혼인을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혼인하지 않는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인생을 걸고 응답해야 하는 귀한 성소니까요.

제1독서는 여호수아기 뒷부분에 해당됩니다. 약속의 땅 정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 여호수아가 스켐에 집회를 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모아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여호 24,3) 관계를 맺으신" 부르심의 시작부터",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파스카 여정, 가나안 정복 전쟁의 과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선포됩니다. 이스라엘 구원 역사의 요약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전체 내용의 주어인 "나"가 하느님이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모든 업적과 놀라운 일을 이루신 분은 모세도 여호수아도 아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눈에 드러나는 현상과 앞장서 일을 하는 사람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과 일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여호수아가 하느님의 일인칭 고백을 전달하며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섭리, 그분 계획에 따라 질서 지어졌고 진행되는 중입니다.

이 기나긴 역사의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은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여호 24,13)
척박한 광야를 지나서 풍요로운 결실을 손에 넣은 이스라엘의 기쁨과, 이 모두를 베풀고 뿌듯해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신랑이신 하느님께 맞갖는 충실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살아가도록 몸과 마음, 결심과 맹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복음의 혼인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봅니다. 혼인 생활의 어려움들은 몇 가지 사안만으로 카테고리화 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복잡할 겁니다. 다양성의 충돌이니 그럴 수 밖에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십니다. 감정적이었든 호르몬에 의한 것이었든 처음 불꽃이 튀었을 때의 사랑,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관계를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불어넣으신 사랑이 서로에게 끝까지 충실히 베풀어지길 바라시는 겁니다.

오늘 독서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 직접 가꾸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 열매"가 우리에게도 몽땅 무상으로 주어진다면 어떨까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것처럼 엄청난 횡재를 한 셈이니,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몹시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하겠지요. 이스라엘은 오랜 역사의 굴곡을 지나 이처럼 커다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선물에 얼마나 감사하며 주님께 충실했는지 앞으로 우리가 만날 성경 말씀이 알려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겐 서로의 배우자가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내가 낳아 키우지 않았고 공들여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 어찌어찌하시다가 부족한 나에게 보내 주신 선물 말입니다. 혼인한 사람들은 인간적 사랑과 안정감을 채워줄 짝꿍을 하느님의 그런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며 충실히 사랑해 준다면, 하늘 나라 때문에 독신을 선택한 이들은 영원한 짝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충실히 섬긴다면, 우리는 저마다 약속의 땅에서 충만하고 행복한 은총과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교회,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혼인관계를 맺은 신부랍니다. 설령 혼인생활의 상처를 가진 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취가 교회 안에서 움츠리거나 낙심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랑이신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와 충실성으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는 말씀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을 주님은 진정으로 기뻐하실 겁니다.


아주 쉽게 사는 법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5404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3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