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루가 4,38-44)
I must proclai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because for this purpose I have been sent."
The cure of simon's mother in law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이 그들 안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며 인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와 질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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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목숨을 구걸하려고 항소하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말을 아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수 만든 수의를 보내며 그것을 입고 마지막 길을 가라고 하였습니다 .천주교 신자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이란 무엇일까요? 사형을 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일까요? 아닙니다. 사형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니 돈 걱정, 병 걱정, 죽음 걱정 등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기만 하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 멀쩡한 사위가 가정을 떠나 예수님만 따라다니니 장모 입장에서는 열병에 걸릴 만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인의 병을 고쳐 주시고 당신을 시중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병자들도 고쳐 주십니다. 당신은 모든 병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들도 쫓아내십니다. 마귀들이 죄짓게 만들고 그 죄가 우리를 종살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또한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받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죄와 상처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시려고 세상에 파견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살게 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생명까지 잃게 되어도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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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계속 손을 꽉 잡아주었습니다. 이 신체접촉을 느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고 이렇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손을 꽉 잡아준 사람은 당시에 실습 나오는 의대생이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깨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매일 저녁 병원을 마칠 때 들려서 손을 꽉 움켜쥐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작은 신체접촉이 삶을 붙잡는 힘이 된 것이지요.
신체적 접촉은 그 어떤 치료 약보다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손길 한 번이 더 큰 효과를 본다고 합니다. 1960년대, 새끼 원숭이가 엄마의 신체접촉 없이 잘 자랄 수 있는지를 실험했습니다. 비록 엄마 원숭이의 신체접촉은 없었지만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마련해주었지요. 그러나 이 새끼 원숭이는 잘 자라지 못했고 심지어 다른 원숭이보다 빨리 죽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 역시 별 차이가 없습니다. 신체적 접촉은 생명의 영약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치유해주었습니까? 복음은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셨다고 말합니다. 질병을 앓는 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말씀 한마디로 아픈 사람을 충분히 고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시고 또 손을 얹으면서 고쳐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한 번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또 아픈 곳을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도 아니겠지요. 단순히 병이 치유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치유의 손길을 받은 사람이 그 뒤로 어떠한 질병의 고통 없이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질병의 고통도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이 세상의 삶을 마치는 죽음의 고통도 겪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병이 치유되는 것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기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생명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어렵고 힘들 때 당신의 손을 우리가 꼭 잡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손을 꽉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어려움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비관론자보다는 낙관론자를 더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관론자가 낙관론자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80세가 넘을 때까지 비관론자로 살았다면 어떨까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매일 내용을 달리해서 21일 동안 계속하면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평생을 비관론자로 살아왔던 84살의 남자가 이 방법을 통해 낙관론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인간의 성격 구조까지 바꿉니다. 감사의 놀라운 힘을 굳게 믿으면서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해보면 어떨까요?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떠나기 가장 완전한 때
-전삼용신부-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되었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을 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언제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그것은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였을 때일 것입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분들은 학위를 따지 못하고 들어갈까 봐 공부하면서도 노심초사합니다. 결과물이 없다면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닌 것입니다. 선교사는 아직 떠날 때가 아니었음에도 지쳐서 먼저 그 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언제 그 자리를 떠야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고, 병자들을 일일이 다 고쳐주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군중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잡을 때가 바로 떠나야 할 때인 것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영광을 받기 시작하면 이제 남은 것은 교만해지는 일뿐입니다. 나를 받아들이고 함께 머물기를 원한다면 이미 그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일은 다 한 것입니다. 그러면 또 내가 필요한 곳으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첫 본당으로 부임하던 날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이 약간은 저를 맞이할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은 당황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를 맞이하기 위해 먼저 도착한 친구 신부님이 부임 축하를 이미 다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당신이 부임하는 게 아니라고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지만 신자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었던 그 시기는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임할 때 보다는 떠날 때의 느낌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 때는 누구나 똑 같이 환영받지만 갈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년 반 동안 함께 했던 신자들을 떠날 때 신자분들은 많이도 울어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떠날 때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또 나도 가기 싫지만 가야만 할 때가 가장 행복한 이별의 순간인 것 같습니다.
만약 너무 오래있어서 ‘올해는 안 가시나?’라는 신자들의 표정을 본다면 이 얼마나 마음이 안 좋겠습니까? 혹은 아직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해서 떠날 때 신자분들이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슬픈 이별일 것입니다. 떠나기 위해 가장 완전한 때는 바로 서로 눈물 흘릴 수 있는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고 인정받기 시작할 때 떠나야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러 이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나만 울고 많은 사람은 웃었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나만 웃고 많은 사람은 울 수 있도록 사십시오.”
참으로 어떻게 떠나야하는지 잘 말씀해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떠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조재형신부-
중학교 때의 기억입니다. 우연히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읽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단어 하나하나가 제게는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지만 이웃의 아픔, 망국의 아픔을 괴로워했던 젊은이의 고뇌, 그러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는 굳은 결의가 드러나는 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이 경매에 나왔다고 합니다.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시인의 마음은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윤동주 시인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습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박해의 엄중한 상황 속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시련도, 아픔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교우분이 빛바랜 신문 하나를 제게 주었습니다. 1988년 발행된 ‘미주 평화신문’ 초판이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님의 초청 강연 기사가 있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한 사람의 기행문이 있었습니다. 미주 평화신문을 발간하는 이유를 사설로 밝혔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각계각층의 격려와 축하의 글이 있었습니다. 통일에 대한 열망, 인권과 정의의 실현을 촉구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신문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의와 각오가 담겨 있었습니다.
제게 평화신문 초판을 주신 것은 그런 열정과 각오로 신문을 제작하라는 염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 홈페이지에 저의 인사말을 올렸습니다. 인사말이면서 저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에파타(열려라)’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보물을 찾아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충실하게 전하겠습니다. 미주 한인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탈리타 쿰’하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이 ‘탈리타 쿰(일어나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합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나의 삶이, 나의 신앙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면, 타성에 젖어있다면, 열정이 식었다면, 희망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새롭게 신발 끈을 매면 좋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뜨거운 삶, 바오로 사도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의 열정,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환영받고 있습니까?
-양승국신부-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도 모자라 벼랑끝까지 내몰리셨던 예수님이셨는데, 카파르나움에서의 상황은 정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파악한 군중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옵니다. 그분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도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시며, 단 한명도 제외시키지 않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충만한 은총과 자비가 예수님을 통해 당신 백성 위로 흘러넘치도록 퍼부어졌습니다. 은총의 소낙비가 아낌없이 쏟아 부어진 것입니다. 바야흐로 구원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갖은 횡포를 부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던 마귀들은 예수님의 큰 빛 앞에 힘을 잃고 나가떨어졌습니다.
마치 혜성처럼 등장하셔서, 존재 자체로 위로요 기쁨이 되어주신 분, 평생 따라다니던 불치병을 낫게 해주신 분, 자상한 위로의 눈길로 희망을 주신 분,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 머물러 있던 동네를 순식간에 축제의 고을로 바꿔주신 분, 예수님 앞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예수님만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자신들을 세세대대 지켜주실 영원한 보루요 희망이신 분임을 파악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꼭 붙들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놓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떠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제발 떠나지 말아주십사고 간곡히 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때,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겪으셨던 배척과 실망을 돌이켜보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환대는 참으로 큰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례자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간절한 청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미지의 세상을 향해 지체없이 떠나십니다. 예수님의 발길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유다 지방으로, 유다 지방에서 팔레스티나 전역으로,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이방 세계 전역으로...
예수님은 애초부터 좁은 시냇물에서 머물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강으로, 더 넓은 바다로, 온 세상 전체로 나아가셔야 할 크신 존재셨습니다. 그분은 경계나 국경, 민족이나 인종 사이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존재셨습니다. 그분의 복음과 사랑의 메시지는 세상 방방곡곡 인류 전체에게 전해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복음 4장 43절)
혹시라도 오늘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을 나 혼자만, 우리들만 독차지하고자 애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좋으신 분을 어떻게서든 전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우리 공동체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발길 닿는 곳마다 예수님처럼 크게 환대받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 존재 자체로 행복해하며, 어떻게서든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합니까. 우리를 보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옷자락을 붙들고 있습니까? 존재 자체로 환영받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정반대 상황은 아닙니까? 우리가 존재 자체로 부담스러운 존재, 반대 표양으로 민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지요? 제발 우리가 빨리 떠나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깨어있어서
-반영억신부-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 4,38-40).”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신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이기도 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고,
치유나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잘 고치는 의사이신 분’이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사람들이 ‘해 질 무렵에’ 온 것은,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따로따로,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손을 얹으시어’ 라는 말은 안수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는 것은,
양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고, 하나하나를 제각각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만 언급되어 있지만,
목자에게 초점을 맞추면,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다 알아듣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즉 ‘내 이름을’ 알고 계시고, ‘내 사정을’ 알고 계시고,
‘내 기도를’, 또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기도할 때, 내가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가 없고,
내 사정을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 기도를 왜 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도’란, 내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 주님께 그것을 알려 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내가 잘 듣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또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내가 잘 받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이 좋은 예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아파서 누워 있다는 것은
누가 알려 드리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신 것은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고,
시몬의 장모는 식사 준비를 지휘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이 대단히 크고 넓은 집은 아니었을 것이고,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금방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를 위해서 예수님께 청한 것은,
자신들이 시몬의 장모를 걱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즉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함께 받을 준비를 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병자 자신이 청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청했다는 것은,
‘사랑’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40절의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자 자신이 스스로 걸어서 온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병자들은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가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치유의 은총’은,
병자들만 받은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받았습니다.
(치유의 기쁨은 병자들만 누린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병자 치유’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만 하고, 병 자체를 없애지는 않으셨을까?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니까, 병 자체를 없애실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해 주셨다면 인류 전체가 병고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인간이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여전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안 믿는 사람들만 하는 질문은 아니고,
믿는 사람들도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곧장
옮겨 놓으시지 않고, 그 긴 세월 동안 온갖 고생을 하게 하셨을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서서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주셨고, 인도해 주셨습니다(탈출 13,21).
그러나 가나안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여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과 고통이 사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대단히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서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숙제.

주님이신 예수님
-이종훈신부-
질병은 사람을 절대적으로 가난하게 만든다. 의사를 찾는 환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회복되기를 바랄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해서 회복시켜 주셨다. 기적적인 치유를 받은 이들이 얼마나 기뻤을까?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 하느님이었을 것이다. 그런 분이 늘 자신들 곁에 계시기를 바랐음은 당연하다(루카 4,42). 병이 나았지만 다시 아프게 될 테니까.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예수님은 다른 고을로 떠나셨다. 그분은 병도 고쳐주고 마귀도 쫓아내고 쉬운 말로 잘 가르쳐주셨지만 그것이 그분의 사명은 아니었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 곳곳에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루카 4,43). 기적적인 치유보다 더 크고 확실한 기쁨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은혜를 입은 이들이 다시 병에 걸렸을 때 짧았지만 그분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그리며 그분을 찾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지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완성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의 내용을 이해시키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설명해놓았다. 그들의 엄청난 노력에도 그것들은 이해하기 참 어렵고 때로는 억지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혼란을 예상하셨고 잠시만 참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죄인을 위한 하느님의 죽음은 믿음의 대상이다. 보답해드려야 할 호의가 아니라 그저 감사하게 받는 아버지의 선물이다.
예수님은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실 때 그의 열을 꾸짖으시며 내쫓아버리셨다(루카 4,39). 왜 이렇게 열이 오를 때까지 일했느냐고 그를 탓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죄가 나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분은 열을 꾸짖으시고 죄를 없애신다. 그분의 죽음이 그것을 보증한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시몬의 장모가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던 것처럼 당신의 죽음으로 용서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고 초대하신다.
예수님은 억울한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그분은 부활하셨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분은 수많은 위인전 중 하나의 주인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시 병에 걸린 이들이 예수님 그리고 그분과 함께 지내던 시간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찾는다.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신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십니다. 아플 때 오직 회복과 고통에서 해방됨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저를 구원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가 바라는 그것이 진실이고 진리임을 믿게 도와주소서. 아멘.

복음: 루카 4,38-44: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심
-조욱현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병고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육신의 병고를 완치시켜 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통해서 알게 된다. 병의 치유의 의미는 바로 하늘 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궁극적인 의미는 당신이 바로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이 열의 종류도 다양하다. 성을 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이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래서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바라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자신의 병이 완치되자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는 것이다. 즉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의 처지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또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에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한상우신부-
소명과
사명사이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생명과 사람
이 모두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을 원하는
자녀들에게 가득찬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자신이
하느님의 소중한
전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가야할 길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치의 길임을
만나게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사명과 소명의
목적지는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나누고 전하며
선포되는
하느님 중심의
사명입니다.
그 기쁨
그 사명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기쁜 소식은
우리가 만나려 했던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신
기쁜 소식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단면이 보여집니다. 그분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복음 선포의 길, 선교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루카 4,38).
예수님께서 공적인 공간인 회당을 떠나 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집으로 가십니다. 물론 그곳에도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이, 심한 열에 시달리는 시몬의 장모가 있어 예수님의 치유는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루카 4,40).
소문을 들은 이들이 병자들을 데려오니 시몬의 집은 공적인 공간으로 변해버립니다. 물론 제도적으로 회당과 같은 공적인 공간이라 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이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거룩한 만남과 모임의 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매우 개별적이고 친밀한 손길을 내미십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이처럼 공동체성과 개별성 둘 다 중요합니다.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공동체의 공적 예배와 모임도 중요한 동시에, 각자 자신의 인격과 소명에 걸맞게 맺는 주님과의 접촉과 사랑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루카 4,42).
예수님께서 지극히 내밀한 사적 장소를 찾아 외딴곳으로 나가십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머물며 사랑을 나누고 일치를 이루는 침묵과 고독의 시간입니다. 외부를 향해 활짝 열어젖혀진 공간에서 구마와 치유, 설교로 분주한 시간을 꾸려가실 힘은 이 뿌리에서 나옵니다.
"나는 하느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화답송).
하느님과 깊은 만남과 사랑의 일치로 그분께 단단히 뿌리를 내린 영혼의 모습을 시편 저자가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했지요. 사람들 사이에서 활기차게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싱그럽고 생명력 넘치는 젊은 올리브 나무 같은 이유가 바로 이 시간, 이 공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43).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드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반해 그분을 소유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얽힐 수도 있는 순간에 당신 사명의 본질을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서도 안주하거나 고착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에게서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관상하며 그 역설적 아름다움에 매료된 영혼 외에는 결코 그분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다른 고을로 떠나보내면 그분을 그냥 놓치고 마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과 자기 고장의 이익에 갇혀 그분을 독점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과 생각이 열려 발걸음을 합하면 결국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고, 또 영원히 그분을 소유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콜로새 성도들에게 그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치하하며 편지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콜로 1,7).
콜로새 성도들을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인 동시에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사랑을 사도들에게 알려 준 사람"인 에파프라스는 성도들과 사도들 사이의 가교이면서 선하고 충실한 목자임을 사도 바오로가 증언합니다. 성경에 몇 차례 등장하지 않는 에파프라스이지만 우리는 그가 사도 바오로를 닮았고 예수님을 닮았다는 걸 느낍니다.
이처럼 복음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배운 대로, 그분의 마음과 그분의 손길과 그분의 목소리가 될 때 "열매"(콜로 1,6)를 맺으며 퍼져가는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44).
예수님의 동선이 더욱 넓게 확장됩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신앙 선조들, 미약하나마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큰 탄력을 받아 이어집니다. 주님에게서 시작된 동선은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미완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목소리와 발걸음이 그 선을 이어서 온 세상 곳곳으로 연결되고 연장되고 퍼져나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푸르른 올리브 나무처럼 한없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늘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를 위해 작은 기도 올려주시길 벗님께 청합니다. 더욱더 말씀과 성체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도록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늘 벗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구색용이 아닌 진짜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시몬의 장모가 치유되는 얘기와 일련의 얘기들인데
잘 아시다시피 이 얘기는 공생활 초 그러니까 시몬 베드로와 첫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 어느 한 날에 있었던 얘기가 아니라
주님의 반복되는 일상이요 그래서 주님의 시간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활 내내 이런 시간표로 사셨다는 주님 시간표의 예시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간표 안에 식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식사도 않으시고 쉬지도 않으셨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럴 리 없고 그런 것들은 뺀 영적인 시간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것은 신비주의의 수법인가요?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이 사생활을 숨김으로써
신비로운 매력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게 되는 그런 수법 말입니다.
주님을 신비롭게 만들기 위해 루카복음사가가 주님의 일상에서
먹는 것이나 쉬는 것을 뺐다고 보는 것은 너무 세속적인 이해이겠지요.
우리의 일상에서는 먹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고
쉬는 것이 없는 삶은 인간다움을 상실한 삶이라고 여겨지지만
주님의 삶에서 먹는 것이나 쉬는 것은 의미가 크지 않기에 뺀 거지요.
그러니까 영적인 시간표의 특징은 먹거나 쉬거나 노는 것과 같은
나를 위한 시간이 시간표의 중심이 되거나 비중이 크지 않고,
사람들 세상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타적인 봉헌의 시간과
반대로 세상에서 물러나 하느님 안에 깊이 잠기는 관상적인 봉헌의 시간이
중심이 되거나 비중이 큰 시간표입니다.
그런데 세상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과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은
겉보기에는 정반대로 보이고 실제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럴 경우
세상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열심히 정치활동을 하다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은 정치활동을 그만 두는 것이 되지만
우리 신앙인의 경우, 특히 성인들의 경우는 오늘 주님처럼
이웃 사랑을 위해 세상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갔다가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세상에서 물러나기도 하는 것이며
이때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사랑이고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러므로 영적인 시간표와 그렇지 않은 시간표의 차이는
사랑의 비중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자는 시간과 친구들과의 즐거운 친교의 시간과 쉬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이웃을 위한 봉사의 시간이나 복음 선포의 시간이 거의 없다면,
그리고 거기에 신자구색 맞추기로 기도시간을 아침에 10분 저녁에 5분
겨우 얹는 정도라면 그만큼 그것을 영적인 시간표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신자구색용 시간표와 진짜 신자의 시간표는 확연이 다르겠지요?
그리고 진짜 신자의 시간표도 무엇이 더 중시되느냐,
무엇의 비중이 크냐에 따라 시간표가 다를 것입니다.
기도가 복음선포 시간보다 더 많은 관상적 시간표가 있고
복음선포가 기도 시간보다 더 많은 선교적 시간표가 있겠지요.
수도자구색용 시간표도 있을 것이고,
진짜 수도자의 시간표도 있을 것이며
정주적인 시간표와 선포적인 시간표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순례 오셨으니
이 세상에서도 선포를 위한 순례의 삶을 계속 사시겠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아무튼 오늘은 구색용이 아닌 진짜 시간표를 짜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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