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
(마태오 14,1-12)
"This man is John the Baptist.
He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The Death of John the Bapti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안식년을 일곱 번,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인 희년으로 선언하고 해방을 선포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맹세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건네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50년째마다 지내는 희년의 제정으로 해방과 용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소개합니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사용하고 있는 땅은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손대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희년을 통하여 종살이와 재산 몰수와 강제 노동에 한계를 정해 놓습니다. 희년은 정의의 해입니다. 바로 여기에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라는 원칙이 있습니다.모든 정의는 이런 신적 토대에 바탕을 두며 특히 아버지의 유일한 부성애에서 기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형제 관계가 드러날 때 특별히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죄를 용서하는 희년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 한 부분을 읽으십니다(루카 4,16-21 참조).언뜻 보기에 죄는 하느님의 율법에서 해방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힘든 종살이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요한 8,34)이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더욱더 중대한 죄를 저지르기에 이릅니다.헤로데는 거침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화를 내며 용기 있게 꾸짖는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둔 다음 목을 베어 죽입니다. 그는 초대한 손님들 앞에서 한 맹세와 약속의 종이며, 특히 자신이 저지른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에서 자유롭게 되고, 우리와 세상의 모든 실재가 온갖 억압에서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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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많은 정보가 넘쳐나고 그래서 결정할 것도 저절로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건을 구입할 때, 싸고 좋은 물건, 디자인도 마음에 쏙 드는 물건, 남들이 부러워 할 수 있는 물건 등을 선택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까요? 하지만 최고의 물건을 선택했다고 해서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에게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제가 필기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하나에 몇 십 만원 한다는 최고의 명품 볼펜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볼펜이었습니다. 너무 무거웠고 제 손에 잘 맞지 않아서 글을 쓰기가 힘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 내 기준을 따르는 만족스러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긴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작가는 만족스러운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족스러운 삶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일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일에 시간을 소비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을 떠올려 보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헤로디아와 그 딸은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해서 세례자 요한을 죽입니다. 아마 당시에는 스스로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은 결코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을 때까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죽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나쁜 영주로, 나쁜 여인으로, 나쁜 딸로 기억되어 우리들 가운데 회자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선택은 절대로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젊어 보여요.”라는 말을 들으시면 어떠십니까? 거의 모든 분들이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는 어떤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젊은 마음을 가지려고 늘 노력해요. 그러다보니 외모도 이렇게 젊어 보이는 것 같아요. 호호.”
이분은 50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외모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말투가 너무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요즘의 젊은이들의 말투를 따라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외모를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인다는 말에 마음은 성숙되지 않구나 싶었습니다.
외모. 물론 남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면 좋겠지요. 그러나 마음이 성숙되어 있지 않다면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작은 죄도 짓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영국 성공회는 헨리 8세가 현 왕비와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생긴 종교입니다. 왕이 재혼을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번 혼인하면 그 혼인의 유대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의 연을 끊고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모든 전례나 예식은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따르지만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분열이라는 것이 그의 작은 욕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짓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에 적극 반대하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인물이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 성인입니다. 영국의 대법관까지 역임하고 높은 지위의 정치인이었던 그는 왕의 그러한 행위를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멈추지 않고 충언을 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헨리 8세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모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물론 헨리 8세와 같은 인물은 헤로데 왕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혼은 구원받고 싶어서 믿으려 했던 인물들입니다. 헤로데 왕도 세례자 요한의 쓴 소리를 즐겨 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목을 베게 만듭니다. 죄에 사로잡혀 믿는 하느님은 언제나 우상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부처나 알라신 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을 믿지만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 모습이 그들의 죄에 가려진 눈 때문에 변형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이렇듯 죄를 지으면 믿고 싶어도 눈이 가려져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자아의 판단을 더 믿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라고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하나의 기관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건 죄다, 아니다”만을 말해줍니다. 마치 도로의 중앙선과 같습니다.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책감을 주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자아’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믿느냐, 하느님을 믿느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아를 믿었기에 죄책감이 생겨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다면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아를 믿는 이를 에덴동산에 두실 수 없으십니다. 자아가 또 다른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느님께서 자비롭다고 믿고 싶어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자아에게 더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됩니다. 죄에 자꾸 빠진다면, 자아가 “거봐. 용서해 주면 뭐하니? 또 죄를 짓잖아. 너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위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예수님을 정신병자처럼 이상하게 바라본 것처럼, 죄에 빠진 우리들도 각자가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만들어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이 죄책감은 나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신이 정해주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아무리 행복이 오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 행복을 스스로 차버리게 됩니다. 돈을 주어도 받지 않고, 용서를 해 주어도 화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그들을 지나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도와주면 더 큰 만족이 온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더라도 그들이 정해 놓은 행복은 그저 성전에서 봉사하는 가운데 얻는 보람 정도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그에 합당한 행복을 받을 그릇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이거구나!”라고 외치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 사랑실천을 통해 오는 만족감이 자신이 잘 살아온 상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 “하느님께서 상을 언제 주실까?”라는 마음이어야지 행복이 오는 순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같은 행복을 부어주시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행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준비란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입니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저들의 최후는 비참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예나 지금이나 비열하고 사악한 악인들이 활개를 치며 떵떵거립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끝도 없는 사리사욕으로 가득합니다.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편법과 불의한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비굴하게도 강자 앞에는 바짝 자세를 낮추고, 약자 앞에서는 한껏 거드름을 부립니다. 자신의 약점과 비리를 감추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일삼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가 그랬고, 6백만명을 학살한 히틀러가 그랬으며, 일제 군국주의자들이 그랬으며, 오늘 백주대낮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횡포와 만행을 저지른 군국주의자의 후손 아베가 그렇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그가 보인 처신의 내막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전 세계가 웃을 것입니다. 세상에 개그도 이런 개그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웃기는 일이 확실합니다.
물건을 생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백퍼센트 딱딱 제값 주면서 사가는 고객이 있다면, 생산자의 태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눈만 뜨면 감사하다고, 몇번이고 고개를 숙여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최고의 VIP 고객에게 앞으로 거래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세상에 이런 바보 얼간이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이 오늘 저지른 희극이자 비극은 머지않아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1세기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다고대사’에 의하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이의 인기가 높아지자, 혹시 정치적 선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를 체포한 후, 사해 동쪽에 있는 마케루스 성채에 감금했다가,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최근 동북아 지역에 조성된 화해와 대화의 국면에서 남북한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부상하는 반면, 자국은 소외되는 느낌(Japan Passing)을 받은 아베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타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
극단적 노령화, 오랜 저성장, 성장 동력의 상실 등으로 인해 국가 경쟁력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자국에 비해, 대등해져가는 경제력,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위를 보이는 민주화와 성숙한 시민의식,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한류 문화, 오랜 세월 보여온 굴욕적인 대일외교를 성찰하며, 역사 바로잡기에 애쓰는 노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뒷통수를 치고 있다는 느낌.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사후(死後), 아버지의 유언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가에 따라 16세의 나이에 갈릴래아 지방과 페레아(현재 요르단 왕국의 일부)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해 동쪽에 위치해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결혼했었는데, 머지않아 그녀와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윤리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끝도없이 타락했던 헤로데 안티파스 인생의 결말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가 버린 아내의 아버지, 즉 장인이었던 아레타스 4세가 군사를 이끌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토를 쳐들어왔습니다. AD 37년 그를 영주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며, 칼리굴라 황제는 그를 갈리아로 추방시켰습니다.
사악하고 비열한 혈통을 물려받은 헤로데 가문의 사람들은 다들 비슷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애를 썼으며, 베틀레헴의 무죄한 아기들을 살해했습니다.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갖은 불륜을 다 저질렀으며 세례자 요한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지난 역사 안에서 자신들이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 저지른 만행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매년, 매일, 참회하고 또 참회해도 부족할터인데, 또다시 무리수를 둬가면서 개헌을 획책하고, 군비 확장을 통한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저들이 참으로 사악합니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저들의 최후는 비참할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을 정치적, 경제적 재도약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이 추구하는 정신이 무엇입니까? 지구촌의 평화와 일치입니다. 그리고 페어플레이(Fairplay)입니다.
그런데 동북아는 물론 세계 평화 건설의 암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 나라에서 올림픽 개최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틈만 나면 편법을 일삼고, 죽어도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며, 또 다시 군국주의화를 꿈꾸는 나라에서 올림픽 개최라니 자다가도 웃을 일입니다.

안봉환신부-
오늘 독서는 50년째마다 지내는 희년의 제정으로 해방과 용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소개합니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사용하고 있는 땅은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손대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희년을 통하여 종살이와 재산 몰수와 강제 노동에 한계를 정해 놓습니다.
희년은 정의의 해입니다. 바로 여기에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정의는 이런 신적 토대에 바탕을 두며 특히 아버지의 유일한 부성애에서 기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형제 관계가 드러날 때 특별히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죄를 용서하는 희년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 한 부분을 읽으십니다(루카 4,16-21 참조).
언뜻 보기에 죄는 하느님의 율법에서 해방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힘든 종살이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요한 8,34)이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더욱더 중대한 죄를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헤로데는 거침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화를 내며 용기 있게 꾸짖는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둔 다음 목을 베어 죽입니다.
그는 초대한 손님들 앞에서 한 맹세와 약속의 종이며, 특히 자신이 저지른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에서 자유롭게 되고, 우리와 세상의 모든 실재가 온갖 억압에서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라
-반영억신부-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 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허영심에 함부로 내뱉은 말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기
-이종훈신부-
인생이라는 순례의 끝은 하느님이다. 하느님과 함께 혹은 그분 안에 사는 것은 어떤 권력을 가짐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을 포기한다. 그 대신 거기에는 평화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겨주셨던 당신의 평화이고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는 차원이 다르다(요한 14,27).
권한은 봉사이다. 봉사하는 이들에게 대중은 권위를 준다. 이것을 권력이라고 오해한 이들이 손을 꽉 쥐는 순간 모래알들은 손에서 빠져나간다. 반면 하느님 안에서 살았던 이들은 주어진 권한으로 사람들은 섬겼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대부분 고단했다.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은 진리와 하느님을 품은 권위자들을 함부로 대한다. 폭력과 비폭력의 대결은 언제나 폭력이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뿐이다. 진리가 승리한다. 어둠은 빛을 덮을 수 없다. 오히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밝아진다.
일제강제징용피해자 어르신이 울먹거렸다. 괜히 당신 때문에 나라가 힘들어진 것 같아서 죄송스럽다는 것이었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리지만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일을 정확히 끝까지 기억한다. 그 어르신에게 불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한다. 그래야 하느님 안은 아니어도 최소한 하느님 편에는 서있는 것이다.
헤로데는 체면 때문에 하느님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을 살해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삶을 예언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사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편이 되어주신다. 비폭력 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그것은 거룩한 장소에서는 지시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을 조신하고, 웬만해서는 기도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무지하고 어리석고 오만한 권력자들이다. 가끔 자신에게 부여된 성사권을 권력이라고 착각하는 성직자들이 있어 마음 아프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종처럼 사람들을 섬기고 목숨을 내어 놓으심으로 그분이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셨다. 고달프고 마음 아파도 끝까지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답게 살기를 기도한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4,1-12: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그는 요한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들추어내며 비난을 퍼부을까 불안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일이 없는데 요한의 힘이 예수님께로 들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간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율법에 따라 이방민족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를 함으로써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라고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 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헤로데의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그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 했을 뿐이다. 그는 교활한 사기꾼이며, 능숙한 암살자이기 때문에 속마음은 기쁘면서도 괴로워하는 척 했던 것이다. 헤로데는 참으로 잔인하고 분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괜한 맹세를 하여 소녀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진다. 그래서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무엇을 괴로워했던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우선은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길한 길에 들어섰고,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의 왕위도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 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또한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 14, 8)
-한상우신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너무 많은 것을
탐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지나친
우리마음들입니다.
위험한 욕망은
하느님까지 내쫓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뜨거운 생명은
우리 것이
분명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됩니다.
헤로데의 교만한
권력의 폭력은
결국 요한 세례자를
죽음에 이르게합니다.
작은 생명
큰 생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누군인 줄도
모른채 살아갑니다.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력의 끝은
늘 허무하며
권력의 욕망은
이와같이
끝이 없습니다.
참된 생명의 길은
선한 의지안에서
서로를 살립니다.
생명 중심으로
나가는 길이
서로를 살리는
구원의 길임을
믿습니다.
욕망에 취하지
마십시오.

-오상선신부-
마태오 복음 14장으로 넘어가면서 구약과 신약을 잇는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비보를 접합니다. 이 대목은 어쩌면 바로 앞 13장의 마지막 부분이자 우리가 어제 묵상한,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이야기에 상응하는 듯합니다. 이 모습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하느님 사람들, 예언자들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마태 14,2)
겁에 질린 헤로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지혜가 충만하고 기적까지 베푼다는 한 예언자(예수)에 대한 소문에 그가 기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군중이 예언자로 여기는 요한을 헤로데가 자기 치부를 덮으려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왕명에 의한 죽음이라 마치 사형과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권력자의 무도하고 비겁한 사욕에 의한 살인이었지요.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라 여기는 헤로데의 이 오해는 자기 죄에서 옵니다. 양심에 드리운 그늘이 그를 죄의식 안에 가두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요한은 고행과 설교, 세례를 행했을 뿐 기적은 일으키지 않았는데도(요한 10,41 참조) 예수님의 기적을 요한의 힘과 연결시키는 걸 보면 두려움이 그의 내면에서 왜곡과 착각까지 일으킨 듯합니다. 궁에서 온갖 영화에 둘러싸여 산다 해도 영혼은 죄에 묶이고 상처 난 양심에 갇힌 듯 보입니다. 스스로의 죄가 자기를 고발하기에 그렇습니다.
같은 내용의 병행구인 마르코 복음(마르 6,17-29)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다소 장황한 수식어와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가 정말 원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인 듯 헤로데의 고뇌마저 느껴지지요. 하지만 마태오 복음사가는 냉정하리만치 담담히 골자만을 기술하여 그 판단을 독자에게 넘깁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경솔한 맹세, 손님들의 이목을 앞세워 불의를 저지릅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보다 중요했나 봅니다. 한때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지"(마르 6,20)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상들과 다를 바 없이 예언자의 박해자, 살해범이 되어 버립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일로 시작된 불씨가 끝간 데 없는 죄악의 폭주로 치닫게 된 셈입니다. 안타깝게도 양심의 소리는 그를 정의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복음의 분위기와 사뭇 다릅니다. 바로 기쁨 가득한 "희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정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 골고루 나누어 받은 재산(땅)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사정에 의해 처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견하신 듯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더 확실히 체험하고 있듯이 부의 편중 현상은 권력과 지식의 불균형을 낳고, 이는 동족 간에 불평등과 착취, 억압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약자와 소수자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당한 채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게 되지요. 한 아버지 하느님의 같은 형제 자매로서의 대등하고 공평한 관계가 깨지면서 그 불의한 환경에 익숙해지면 사람에 대해 마땅히 지녀야 할 존중감도 희박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께 대한 경외감마저 사라지게 되지요.
하느님은 이를 바로잡을 기회를 미리 마련해 놓으신 겁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부를 쌓은 이도, 다 잃어버린 이도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본래 하느님께서 주셨던 자리, 땅, 본연의 자녀된 존엄성을 되찾으라는 의미입니다. 잃었던 걸 되돌려 받는 이는 기쁠 것이고, 제 것처럼 소유했던 것을 내놓아야 하는 이에게도 양심의 자유와 기쁨을 선사하게 될 축복의 시간이지요.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은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다 함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경외와 찬미와 순종을 드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까요.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이런 희년 제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제 우리가 들은 나자렛 회당 사건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바가 바로 이 "희년"이었는데(루카 4,16-30), 루카와 달리 마태오는 편집 의도 상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 희년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죄의 빚을 탕감해 주고, 질병과 죽음에서 일으키며, 잡혀가고 갇힌 이들을 해방하는 일, 억압과 착취에서 구해내고 죄로 짓눌린 양심의 무게를 덜어 주는 일, 자기 본연의 자리와 영혼의 아름다운 본모습을 되찾아 주는 일, 눈물을 닦아 주고 어깨를 펴게 하며 무릎에 힘을 실어 주는 일, 죄의 짐을 벗고 하느님 앞에 맑고 밝게 서도록 깨끗이 해 주는 일... 굳이 50년을 세면서 기다리지 않아도 이 모든 기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레위 25,17)
희년의 정신은 하느님을 경외함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뿌리에는 모든 이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이 자리합니다. 하느님께서 눈동자처럼 아끼시는 모든 이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새로 출발할 수 있게 기회와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합니다. 이미 무수한 예언자들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이 이러한 경외심의 절정을 보여주셨지요. 비록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악인의 비겁하고 치졸한 간계로 맞이한 죽음일망정, 모든 의인들의 죽음은 하느님께 소중하고 값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진정한 해방을 맛본 이는 누구일까요? 왕궁 안에서 두려움에 떨며 값싼 체면, 얕은 허세를 부여잡고 멈출 타이밍을 놓친 채 살아가는 헤로데가 아니라, 피로써 하느님 나라를 증거한 세례자 요한일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시는 희년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하느님 자비와 용서의 품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은총의 선물은 물론 죄와 약함의 짐까지도 다 내려놓고 오늘도 새로운 희년을 희년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살아갑시다. 매일이 희년인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희년의 사람
-김찬선신부-
오늘은 희년에 대한 규정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얘기를 마치면서 우리의 주 하느님을 경외해야 함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한다면 이 규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오금 박기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느님께서 규정을 마련해주시고 지키라고 해도
과연 이 희년의 규정을 이스라엘 백성이 잘 지켰을지 의문입니다.
왜냐면 이 규정은 보통 사람은 지키기 어려운 규정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늘은 희년의 규정이 어떤 거기에 지키기 어렵다는 건지 보렵니다.
첫째로 희년은 해방의 해입니다.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종살이에서 다 풀려나는 해인 거지요.
그럼으로써 신원회복, 자유회복, 존엄성회복을 하게 하는 해인 것입니다.
그런데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풀려나려면 주인이 풀어줘야 하는데
어떤 주인이 자기 소유의 종을 풀어주겠습니까?
제 생각에 이런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얼마 되지 않았을 거고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도 1%가 안 될 것입니다.
이거야말로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하느님이 모든 이의 주 하느님임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 하느님께 모든 소유권을 돌려드리는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 김익진과 같은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는 Reddere돌려드린다는 말을 자주 사용했지요.
모든 것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뜻이지요,
그는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표시로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재물보다도 더 귀한 사람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표시로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함으로써 작은 자/낮은 자가 되었지요.
다음으로 희년은 소유지 회복의 해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소유지를 회복키 위해서는 돌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땅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곧
자기가 지주地主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소유지를 돌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땅이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땅을 돌려주는 표시로 가난한 사람에게 소유지를 돌려줄 터인데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 숨겨져 있습니다.
땅이 내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의 것이고,
땅이 하느님의 것이라면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공산주의는 땅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을 부정하기에 국가가
모든 땅의 소유권을 가지지만 그리스도교는 국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땅의 소유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초기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인 김익진 선생은
공산주의자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 된 분이신데
그를 이렇게 바꾼 분이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김익진 선생은 본래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이었지요.
그의 큰 형이 바로 일제시대 유명한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을 건너다 사의찬미를 부르며 자살한 것으로 유명한 김우진이고요.
그는 만석꾼의 아들이었지만 모택동을 만나면서 공산주의에 심취하여
모택동의 홍군에 가담하기도 하였지만 우연히 일본 서점에서
성 프란치스코 전기를 읽고 난 뒤 천주교 세례도 받고 평신도로서
한국에서 첫 번째로 서약을 한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지요.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자기 땅의 일부는 성당부지로 봉헌하고
나머지는 다 소작인에게 나눠준 그가 진정 희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이런 희년의 사람이 된 것은 돼야 한다니 억지로 된 것이 아닐 겁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에서 하느님을 믿게 된 뒤로 진정 하느님을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으로 믿고 경외하였으며 그럼으로써 행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의 마지막 말씀이 깊이 공명되는 오늘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5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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