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19. 8. 4. 19:03

2019 8 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마태 14,13-21)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aid the blessing, broke the loaves,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who in turn gave them to the crowds.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고 하자 주님께 하소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평과 모세가 취한 태도를 들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약속된 땅을 향한 여정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십니다.그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주신 만나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 만나는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울부짖는 백성의 불평은 현재의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 대한 한탄과 더 안전한 상태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입니다.“너무나 무거운 짐”이 된 이런 상황에 부담과 위기를 느낀 모세도 주님께 불평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여 달라고 주님께 청할 만큼 실의에 차 있습니다. 이런 부담은 때때로 우리의 의욕까지 잃게 하기에 충분합니다.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엾은 군중을 보시고 빵을 늘리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군중은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모세가 취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예수님께 제안하면서 모든 책임을 면하려고 애씁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해결을 거부하십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맡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고 실제로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라도 군중과 함께 나누려는 뜻을 드러내십니다.예수님께서는 모세를 본받지 않으시고, 불평하지도 않으시며, 다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불평은 모든 해결 가능성을 막고 상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갑니다. 반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는, 온갖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기쁘게 극복하게 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혹시 ‘인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즘 젊은 학생들의 언어입니다.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아웃사이더와는 다르게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싸’는 무엇일까요? 신났을 때 외치는 추임새가 아니라,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요즘 학생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인싸’일까요? 아니면 ‘아싸’일까요?

‘인싸’라고 합니다. 무리에 잘 섞여서 노는 인기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싸’가 되기 위해서 인싸템을 구입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인싸가 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관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싸’가 되어 사람들과 함께 잘 어울리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을 통해 진정한 ‘인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만을 쫓으면서 겉으로만 ‘인싸’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남이 ‘인싸’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예외가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데 죄 지은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제외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모두가 예외 없이 ‘인싸’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신 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외딴 곳까지 쫓아옵니다. 한 두 명이 쫓아온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자그마치 5,000명이 넘는 사람이 쫓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쫓아 이 외딴 곳까지 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병자들은 병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진리에 목말라 하는 이들은 참 진리를 보기 위해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기쁨과 위로를 얻기 위해 여기에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외딴 곳이라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으면 저절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어떤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주님께 식사 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님께서 이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계속되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부족해 보이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주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많이 소유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장소에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가가 제일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십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기적을 소망하라. 그러나 기적에 의존하지 마라(탈무드).



부모님의 사랑

저는 강아지 3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세 마리가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저를 보면 꼬리를 신나게 흔들면서 다가오는 강아지들의 모습이 정말로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예쁜 강아지들이 때로는 짐이 되기도 합니다. 어디 외출을 하게 될 때, 꽤 긴 기간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때에는 밥 주는 것, 산책 시키는 것 등으로 인해 신경이 보통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는 저의 짐이 됩니다.

바로 이 순간, 부모님의 사랑을 헤아리게 됩니다. 저 때문에 어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애쓰셨던 그 모든 모습들, 어쩌면 저 또한 부모님께 큰 짐이었구나 싶습니다.

이 사랑을 보지 못하고 늘 당연하게 여겼던 철부지 때문의 모습을 반성합니다. 지금이라도 그 사랑을 갚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 부모님이 너무 늙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죄송한 마음입니다.                   

외딴 곳,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 곳

-전삼용신부-


 ‘테니스의 내면 게임’의 저자 골웨이는 하버드대에서 수십 년간 테니스 코치로 일하면서 신기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학생들에게 “자세가 틀렸어”,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해야 돼” 등의 잔소리를 많이 할수록 실수도 더 많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 자신이 내뱉는 잔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컨대 ‘오늘은 왜 잘 안 되는 거지?’, ‘또 실수했네’, ‘팔의 각도가 틀린 것 같아’,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등 자신을 비판하는 잔소리가 많아져도 역시 실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테니스를 하다가 공이 라켓 한가운데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지요. ‘공이 잘 안 맞는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그럼 공이 더 안 맞게 됩니다. 뭘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공이 라켓의 어느 부분에 떨어지는지만 그냥 관찰해보세요. 그럼 공이 저절로 라켓의 한가운데에 맞게 됩니다. 공이 라켓에 맞는 순간 낮게 날아오는지, 높게 날아오는지, 평행하게 날아오는지 주의를 기울여 관찰합니다. 뭔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오로지 공이 어떻게 날아오는지만 관찰하세요. 공을 잘 쳐야겠다는 생각을 멈춰야 해요. 생각이 시야를 가리는 겁니다.’”

[참조: ‘왓칭 2: 텅 빈 공간이 부리는 요술’, 김상운, 정신세계사]

      운동을 하다보면 운동은 상대편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자신과 싸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가 일부러 나의 감정을 자극하는 때도 있는데 그때 화를 내거나 어떻게 보복해야 하는지 생각하다가는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나의 능력을 방해하는 장본인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알 때 운동실력도 향상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운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는 모든 능력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저와 같은 경우는 강론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 이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강론을 쓰려고 하는데 잡생각이 많이 들면 몇 시간을 앉아있어도 강론이 쓰이지 않습니다. 강의를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튀어나와 모든 것을 망치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강론을 쓰건, 강의를 하건 반드시 먼저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뿌옇게 흐려진 흙탕물과 같은 정신을 가라앉혀 머리를 맑게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주님이 보입니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보이거나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강론을 쓰거나 강의를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강론이 안 써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도할 때, 온갖 잡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집중을 하려고 해도 수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연출되고 그 장면들을 쫓아버리느라 기도시간을 다 소비해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머리가 아주 비어버린 것처럼 컴컴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으로 채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면 강론도 잘 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외딴 곳이란 잡생각이 끼어들 수 없는 곳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마음이 혼란하실 텐데도 예수님은 당신을 쫓아 외딴 곳으로 함께 들어온 이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먹이십니다. 제자들은 감히 그들을 먹일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감사와 찬미만 남는 곳이 ‘외딴 곳’이고 그 외딴 곳에 머물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또한 그런 고요함 가운데로 초대할 수 있고 하늘의 양식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내가 먼저 평화스러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만 외딴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도 외딴 곳에 머물 줄 알아야합니다. 마음은 평화라는 외딴 곳으로 향하고 정신은 잡념이 사라져 감사만 남는 곳으로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외딴 곳에 머물 줄 알아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양식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왓칭 2’에서 김상운 저자의 지인이 항상 위통을 앓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김상운 저자는 식사할 때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라고만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이었기에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항상 TV로 뉴스를 보았고 또 동시에 신문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TV와 신문을 번갈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식사 할 때는 식사만 하게 되었고, 그러자 점점 위통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신을 혼란시키는 매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저도 유튜브를 한참 보다가 기도하러 가면 그런 장면들만 머릿속에서 맴돌다 기도가 끝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에게 줄 것도 없어집니다.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외딴 곳’에서 이루어졌음을 잊지 말고,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주님과 감사만 있는 외딴 곳에 머물 줄 아는 연습을 자주 해야겠습니다.


간절한 마음·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협조자들인 사도들의 존재가 유난히 부각되고 있습니다. 난감한 현재 상황을 최초로 스승님께 보고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오 복음 14장 15절)

 

 또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스승님께,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알려드린 사람들 역시 사도들이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오 복음 14장 17절)

 

 뿐만 아니라 스승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신 후, 그것들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준 사람들 역시 사도들이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오 복음 14장 19절)

 

 동시에 군중들의 식사가 모든 끝난 후 돌아다니면서 남은 조각을 모아들인 사람들 역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은 조각을 한 군데 모아 보니 총 12광주리였습니다. 이는 곧 12사도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오 복으 14장 20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날의 사도들이(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매개자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백성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거나 갈라지게 하는 존재가 되어서 참으로 곤란합니다.

 

 사제들은 백성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주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백성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들은 대신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청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목자는 매일 주님께서 건네시는 생명의 빵, 즉 말씀을 정성껏 봉독하고 공부합니다. 진지하게 묵상하고 풀이하여, 백성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사제는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도 나누어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지상의 빵·물질적인 빵도 골고루 분배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누가 너무 많은 빵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설득해서 내어놓게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 못 가진 이들이 어디 있는지 잘 살펴보고, 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보살펴야겠습니다.

 

 사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 자세 하나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바처럼, 주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께 간절히 청할 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사제들은 우리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힘만 믿는 사도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은총과 기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존재임을 파악한 사제들, 주님의 권능을 굳게 믿는 사목자들, 나는 그저 나약한 한 피조물이요, 중재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겸손한 봉사자의 삶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올려놓아야 또 올려놓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기아문제는 해결됩니다. 유엔난민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2018년, 8억 2,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결핍을 겪고 있고 매년 1천만 명이 기아 또는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아동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교회의 얼굴은 사랑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연민과 신성

-이종훈신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이며 동지였으니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허망한 죽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무겁게 했을지 충분히 짐작한다. 그래서였을까,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배를 타고 홀로 외딴 곳으로 떠나셨다(마태 14,13).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고 그분이 도착할 곳에 미리 가 그분을 기다렸다. 그분을 맞은 것은 위로나 환영이 아니었다. 가난과 아픔에서 나오는 수많은 청원이었다.

 

그런데 그 만남은 예수님의 무겁고 어두운 마음이 연민으로 바뀌는 시간이었고, 하느님이 일하시게 되는 시작점이었다(마태 14,14).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 아드님은 땅에 계셨다. 예수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섞지도 나누지도 말라고 교회는 가르치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도대체 참 사람이며 참 하느님이신 존재는 어떤 분이셨을까?

 

어떻게 병을 치유하셨는지 또 어떻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며 겪으셨을 육체적인 피로와 세례자 요한의 허망한 죽음으로 무겁고 어두워진 당신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무겁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자 생긴 당신의 연민은 알 듯 모를 듯하다.

 

연민,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인간의 마음이다.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연민으로 죄인들을 회복시켜 낙원으로 데려오신다.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지 말고 그분의 신성은 그분의 인성 어디에 담겨 있는지 찾아보자. 가장 찾기 쉬운 곳은 역시 연민이다.

 

예수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창자를 끊는 것 같은 아픔이라서 불쌍한 이를 보면 도저히 못 본 척 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 아픔과 그를 도와주는 수고스러움이 싫어서 애써 못 본 척하니 주님의 인성 안에 담겨있는 신성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주님도 하셨으니 저도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용기 내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 뒤를 따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십자가를 잘 짊어져서 제 안에서 구원의 신비가 드러나게 도와주소서. 아멘.


-안봉환신부-


오늘 독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평과 모세가 취한 태도를 들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약속된 땅을 향한 여정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주신 만나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 만나는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울부짖는 백성의 불평은 현재의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 대한 한탄과

 더 안전한 상태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입니다.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된 이런 상황에 부담과 위기를 느낀 모세도 주님께 불평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여 달라고 주님께 청할 만큼 실의에 차 있습니다.

이런 부담은 때때로 우리의 의욕까지 잃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엾은 군중을 보시고 빵을 늘리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군중은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모세가 취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예수님께 제안하면서 모든 책임을 면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해결을 거부하십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맡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고 실제로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라도 군중과 함께 나누려는 뜻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본받지 않으시고, 불평하지도 않으시며, 다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불평은 모든 해결 가능성을 막고 상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갑니다.

반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는, 온갖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기쁘게 극복하게 해 줍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배를 타고 가셨다. 이렇게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행동으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 만족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역시 외딴 곳에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떼어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 14, 16)

-한상우신부-

먹을 것과
나눌 것 사이에
배고픈 우리
이웃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은 많아도
나눌 것이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는
우리들 마음을
먼저 보게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실은 나누어야 할
주님의 것들입니다.

주님안에서는
빈곤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풍요로운 시작입니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 가져가고
주님께
내어드려야 할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우리에게
올 수 없는 생명의
양식들입니다.

생명은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오늘도 생명을
나누어 주시고

생명을 배부르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생명의
본질로
초대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언제나 사랑과
나눔입니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우리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참된
신비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먹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당장 육신의 욕구를 채워 줄 만나(제1독서), 적은 양으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예수님의 빵의 기적(복음), 그리고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에게 내리신 말씀이라는 양식(복음 환호송),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 성체(영성체송)까지 인간의 영육의 목숨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모든 양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제1독서는 다소 험악한 분의기로 시작됩니다. 척박한 광야의 떠돌이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평은 진실보다 왜곡과 비약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이 생각나는구나!"(민수 11,5)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종으로 살았기에 당연히 대가 없이 "공짜로" 노동력을 착취 당했지요. 거기서 얻어 먹었던 음식은 노동을 위한 생존적 지급분이었을 뿐 그들의 미각이나 취향, 건강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그 모두를 "공짜로" 대접받아 누린 듯 과거를 각색하고 있습니다. 이 왜곡은 불평의 강도를 높이면서 자기 주장을 정당화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를 진실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고, 스스로의 빈곤감과 박탈감을 가중시킬 뿐이지요.

불평의 전염성이 얼마나 큰지 이미 불평은 씨족끼리 모여 우는 소리를 할 만큼 퍼졌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모세까지 하느님께 달려가 불평을 터뜨립니다.
"어찌하여 제가 당신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민수 11,11)

아, 그런데 슬프게도, 모세의 항변 안에도 왜곡이 끼어들었습니다. 본인이 주님께 가장 친밀한 친구 같은 존재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눈 밖에 나서"라고 단서를 붙인 것입니다. 홧김에, 너무 힘들어서 내뱉은 말임을 알긴 하지만, 모세 자신에게도 하느님께도 너무나 아플 표현입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무겁습니다."(민수 11,14)
모세에게 연민이 느껴집니다. 얼마나 벅차고 외로웠을지 감히 짐작이 갑니다. 하느님과 각별한 사이긴 했지만 그 역시 오롯한 인간일 뿐이니까요. 제발 죽여 달라는 애원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뇌에 백 번 공감하면서도 이제는 되물릴 수 없이 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 자손들을 "짐"이라 부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복음도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언급하며 무겁게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4,13)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이기도 하고, 신뢰하는 예언자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도반이기도 하고, 서로를 알아 봐 준 동지입니다. 그러니 그런 그의 죽음이 슬프셨을 것이고, 또 시시각각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예언자의 운명을 견인하는 듯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단 "외딴곳"을 향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마주해 사랑에 머무르며 위로와 힘을 받고 싶으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는 아버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녹록치 않게 됩니다.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그분을 따라나섰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마태 14,14)
예수님의 발목을 잡은 건 마음의 연민, 즉 연민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신 위로는 잠시 미뤄두시고 그들과 머물며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모세가 애써 받아들인 소명의 의무감과 자기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동족의 일탈이 안타깝게도 그로 하여금 동족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게 한 것 같습니다. 반면 사랑, 자기를 버리는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으셨기에, 그분 눈에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군중이 짐이 아니라 가여운 어린 양, 도움이 필요한 작은 양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무거워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처럼)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불쌍히 보시며 먼저 해결책을 찾으십니다. 기꺼이 말입니다!

"스스로" 먹을 것을 찾게 하자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주라고 뚱딴지 같은 요구를 던지신 예수님. 그분은 "하늘을 우러러 찬미의 제사를"(마태 14,19) 드리시는 것으로 모든 인류의 필요를 하느님 발 앞에 펼쳐 놓으시고 아버지께서 직접 개입하시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지요. 그 빵은 곧 "군중"에게 전해져 그들을 배불리고 원기를 회복시킵니다.

스스로(군중)>너희(제자들)>예수님 손>하늘(아버지)로 이어지는 이 상승의 흐름은 다시 예수님>제자들>군중으로 이어지는 하강의 흐름을 타고 땅 위에 내립니다. 육적인 음식이 영혼을 배불릴 선물, 곧 은총으로 변모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 사가는, 오천명을 훨씬 넘는 군중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20)고 덧붙입니다. 이 몫, 완전한 숫자 열둘로 남겨진 이 몫은 바로 미래 세대인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기름진 참밀, 바위틈의 석청은 최고의 음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살아있는 빵 진리이신 예수님, 바위이신 하느님께 맺힌 석꿀인 성자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살리고 위로하고 일으키는 진정한 빵이십니다. 말씀으로,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서 광야살이로 지친 우리의 원기를 돋우고 생명을 수혈할 진정한 양식이십니다.

오늘 자식들 때문에 지쳐 힘들어하는 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오늘 사업 때문에 지쳐 힘들어하는 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와 공동체의 수많은 문제들로 지쳐 힘들어하는 교황님과 교회의 장상들을 생각합니다.
오늘 영적인 양식을 배불리 먹이려 온갖 힘을 다 쏟아부어 지친 예수님같은 그런 착한 목자를 생각합니다.

모두 참 생명의 말씀이요 빵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원기를 회복하시도록 기도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