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삶과 시대

Margaret K 2018. 2. 9. 02:06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삶과 시대

  

 

 

역사적 배경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출생지인 아씨시에 관한 몇몇 표현으로 시작해보자면, 신곡에서 '단테 알리기에리' 는 아씨시(Assisi)를 해 뜨는 곳으로서의 '동방'으로 묘사하고, 실제로도 그는 프란치스코를 '뜨는 해'에 비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그의 '작은 나무', 글라라의 삶과 시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우주론의 중세적인 맥락 안에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아씨시는 중세의 대표적인 도시로 소개된다. 아씨시는 이탈리아 중부 내륙지방인 움브리아(Umbria)의 계곡 위에 솟아있다. 움브리아는 면적이 8,456평방미터로 매우 작은 지방이며, 산맥과 구릉과 삼림지대가 특징인 이탈리아 반도의 아펜니노 중부지역에 속해있다. 움브리아 지역은 6퍼센트가 평야이다. 해발 424미터의 아시시에서는 숲으로 덥힌 둥근 지붕 모양의 수바시오산(해발 1290미터)이 솟아올라 평야의 한쪽 면을 내려다 보고 있다. 오늘날 아씨시의 인구는 24,790여명이다. 12~13세기에는 이보다 훨씬 더 적은 인구였다.

 
중세의 세계는 두 개의 막강한 세력이 중심이 되어 돌아갔다. 한 쪽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고 다른 한 쪽은 교황이었다. 양측에는 걸출한 거장들이 있었는데, 프리드리치 바르바로사 황제와 이노첸시오 3세 교황이 그들이다. 신성과 세속으로 통치되고 있는 이 세계는 양측의 미묘한 차이점으로 인해 서로 자주 충돌하게 되었고, 양측 모두 정치와 종교를 함께 아울러 권력을 휘둘러댔다. 그 시절은 (현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인)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시절이기도 했다.

 
12세기의 영주들은 꾸준히 많은 지역의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씨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라고 칭하던 봉건시대 성(省) 모양의 그 요새는 오늘날까지도 그 마을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성은 12세기의 것이 아니다.) 당시 귀족들이 여전히 해당 지방의 공무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중산계층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아씨시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도 귀족들은 'maiores(더욱 큰 이들)' 혹은 'boni homines(착한 사람들)'로 일컬어졌고, 상인들은 'minores(더욱 작은 이들)' 혹은 'homones populi(일반 사람들)'로 명백하게 나뉘어 불리어졌다. 상인들은 귀족들과의 권력투쟁에 맞서 자신들이 충분한 재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의 목적은 옛 봉건제도를 없애고 보다 민주주의적인 '코무네(Comune, 주민자치공동체)'이라는 정권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의 탄생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1182년, 프란치스코가 태어났다. 프란치스코의 생가 여부는 아직도 논쟁거리이다. 아씨시의 여러 곳이 생가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키에사 노바(Chiesa Nova, 새 성당)와 산 프란체스코 피콜리노(San Francesco Piccolino, 어린 성 프란치스코의 경당)가 있다. 이 모든 가상의 생가들은 피아짜 델 코무네(Piazza del Comune, 코뮌의 광장)라고 불리는 아씨시 성읍의 중앙 광장 근처에서 발견된다. 이 광장에는 옛 미네르바 신전과 토레 델 포폴로(Torre del Popolo,시민의 탑)가 가장 높게 솟아 있다. 프란치스코 시대부터 이 광장은 거의 변하지 않았으므로, 성 프란치스코 대성전 상단 벽면에 조토(Giotto)가 그린 피아짜 델 코무네의 그 초기 벽화는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 그림일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포목상 베드로 디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 베드로는 프랑스로 자주 출장을 가곤 했고, 실제로 자신의 부인 피카를 처음 만난 곳도 프랑스 프로방스이다. 프란치스코가 태어났을 때 베드로는 사업차 프랑스에 있었다. 집에 돌아온 베드로는 아들이 요한이란 이름으로 성 루피노 주교좌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프랑스인이란 뜻인 프란치스코(이탈리어 프란체스코, Francesco)로 바꾸었다.

 
11년 후인 1193년, 성 루피노의 주교좌 성당이 보이는 도시의 위쪽 동네에서 또 다른 아기가 태어났다. 이번에는 귀족 가문 출신의 여자 아이였다. 그녀의 이름은 글라라(Chiara), 빛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글라라의 생가는 주교좌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부유한 저택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파바로네 디 오프레두치오(di Offreducio)이고 어머니는 오르톨라나이다. 글라라는 '더욱 큰 이들(maiores)' 계층에 속했고, 프란치스코는 '더욱 작은 이들(minores)'에 속했다.

 
아씨시 내에 충돌이 일어났던 1198년, 그 해 이노첸시오 3세가 교황으로 당선됐다. 훌륭한 정치가였던 교황은 세속적인 면에 대해서도 교회의 수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는데, 이로 인해 1198년 봄, 황제의 명으로 아씨시의 로카 마조레 요새를 관리했던 우르슬링엔(Ursligngen)의 공작 곤라도가 이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스폴레토(Spoleto)의 공작령을 이양하기 위해 스폴레토로 가게 되었다.

 
아씨시의 시민들은 공작의 부재를 기회로 삼아 요새를 포위하여 완전히 파괴했다. 당시 16살이던 프란치스코도 아씨시의 독립을 보장했던 그 시민혁명에 참여했던 것 같다. 아씨시는 이제 자유로운 코뮌이 되었지만, 이에 따른 결과로 인해 성읍의 귀족들과 시민들 사이의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글라라의 가족은 옆 도시 페루자(Perugia)로 피난해야 했다. 페루자는 아씨시에 비해 훨씬 더 강대한 도시였다. 결국 글라라와 그녀의 가족들은 1203년 무렵까지 아씨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해에 아씨시에는 더욱 큰 이들과 더욱 작은 이들의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프란치스코의 세속적 열망
페루자로 피난했던 아시시의 귀족들은 1202년, 콜레스트라다(Collestrada)에서 아씨시의 시민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프란치스코 또한 그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씨시 시민군은 모두 포로로 붙잡혔고 프란치스코도 그 포로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년가량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부자 아버지 덕택에 몸값을 치르고 곧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1204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앓아누운 채로 보내야만 했다.

 
건강을 되찾자 프란치스코는 한층 더 높은 이상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는 기사가 되길 꿈꾸었다.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때는 기사도의 시대였다. 기사도의 정신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 안까지 들어왔고,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는 명성과 더불어 기사도의 낭만은 당시 수많은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프란치스코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204년, 그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목적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아풀리아(Appuglia)로 출정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브리엔느(Brienne)의 월터가 조직한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그 여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사실 그는 스폴레토에서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룬 채, 바로 다음날 아씨시로 돌아가게 되었다. 전기 작가들은 그 결정이 프란치스코가 본 꿈과 환시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친구들의 비웃음을 산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상은 산산이 부수어졌고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유일하고도 실질적인 해결책은 아버지 가게에서 긴긴 시간 동안 옷감 뭉치를 파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프란치스코에게는 별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다. 답답한 옷감가게 안에 겹겹이 쌓아 올린 옷감 꾸러미에 갇혀 있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전혀 아니었다. 사실, 젊은 프란치스코는 예전처럼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닥거리는 편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돈을 아끼지 않던 그는 이미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고 친구들도 자주 프란치스코를 그들만의 향연의 우두머리로 뽑곤 했다. 축제가 있을 때면 그들은 밤늦게까지 놀면서 아씨시의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로 나가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시끄러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씨시 근교 시골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초기 전기 작가들은 이 시절을 프란치스코의 회개 시절이라 일컫는다. 1204년 말부터 1206년까지의 이 기간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프란치스코에게는 매우 깊은 성찰의 시기였다.

 

프란치스코와 나병환자​

프란치스코는 익명의 친구와 함께 외딴 곳으로 가곤 했다. 그는 친구를 밖에 둔 채 지하묘실이나 동굴에 홀로 들어가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다시 친구에게 되돌아 왔을 때 늘 그는 매우 초췌해 보였다. 그러지 않을 때는 아씨시 아래 평야에서 말을 타곤 했다. 그 평야에는 나병환자 요양소가 있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말을 타다가 나병환자 한 명을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그 가여운 사람에게 몹시 겁이 났지만,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갔다.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돈을 건네주고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이 만남은 평생 소중히 여기게 될 만남이 되었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도 프란치스코는 이 만남의 기억을 떠올렸다.

 

성 다미아노 성당
1205년 말 즈음, 프란치스코에게 또 하나의 만남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동기가 되었다. 그 만남은 아시시 바로 밑에 위치해 있는 낡아 쓰러져가는 성 다미아노(San Damiano)의 성당 안에서 이루어졌다. 성 다미아노 성당 주임사제는 매우 가난하여 성당 십자고상 앞을 밝혀야 할 등불 기름조차 살 돈이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오랫동안 그 십자가상의 성화를 바라보았고 그것에 온전히 매료되었다. (그 십자고상은 오늘날까지 아시시 성녀 글라라의 대성전에서 불 수 있다.) 십자고상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살아 계시는 듯 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기 보다는 그를 둘러싼 천사들과 성인들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이셨다. 그분의 눈은 떠져 있고 상처들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지만, 그분은 아무 고통을 느끼시지 않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십자고상이 프란치스코에게  '말을 했다는' 그 십자고상인데, 그것은 프란치스코에게 교회를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표현은 '나의 교회'라는 말이었다.

 
젊은 프란치스코의 눈에는 시급하게 수리해야 될 교회 건물은 당연히 그 성 다미아노의 성당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성당을 수리하기 위해 아버지의 가게에서 값비싼 옷감을 훔친 뒤 옆 도시인 폴리뇨 장터에서 그것을 팔았다. 그렇게 번 돈을 성 다미아노 성당의 가난한 사제에게 전해주기 위해 프란치스코는 기쁘게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사제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가 아들의 행동에 몹시 노할 것을 알아채고서는 그 돈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프란치스코를 그 성당의 봉헌자로 받아들였고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다. 여기서 봉헌자란 어느 특정 성당에서 봉사함으로써 회개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프란치스코의 전환점

아버지와의 충돌 

프란치스코는 이제 공공연하게 아버지와 충돌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아들이 가업과 가문의 명예를 망칠 것이라고 확신했고, 성 다미아노 성당을 복원하려고 돌을 구걸하는 아들의 모습을 그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프란치스코가 거지들과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자유롭게 어울리며 그들과 거리낌 없이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피카 부인은 그저 아들이 반성할 기회가 필요할 뿐이라며 남편을 달랬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노력은 헛수고였다. 베드로는 재산에 관한 아들의 권리 포기를 위해 프란치스코를 성읍의 치안 판사들 앞에 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성당의 봉헌자였으므로 주교의 관할에 속하였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치안 판사들은 그 일에 연루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베드로는 아씨시의 주교인 귀도에게 상고했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응했다. 재판은 아씨시의 성 마리아의 마조레의 성당 근방에서 열렸다. 귀도 주교는 프란치스코를 구슬려 성 다미아노 성당을 고치기 위하여 번 그 돈을 아버지에게 돌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시키는 대로 지체 없이 돈을 돌려줄 뿐만 아니라, 방관하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모두 벗고 그 옷마저 아버지께 돌려주며 말하였다.

  
'저는 지금까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내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이제부터는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창피를 당한 베드로는 집으로 돌아갔고, 프란치스코는 은둔자의 초라한 옷을 빌려 입고 채 아씨시를 떠났다. 길을 떠나는 도중, 노상 강도떼가 프란치스코를 공격하여 프란치스코에게 신원을 물어보자,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위대하신 임금님의 사자라고 대답했다. 강도들은 그를 정신병자로 여겨 눈구덩이 속으로 던져 버렸다. 프란치스코는 그곳에서도 계속 하느님을 노래로 찬양했다. 몇 개월 동안, 프란치스코는 산 베레콘도(San Verecondo)의 베네덱토회 대수도원에서 주방지기로 있다가 구비오(Gubbio)에 사는 프레드리코 스파달룽 (Spadalunga)라는 친구집에서 머무르면서 구비오시의 나병환자 공동체에서 봉사했다.

  

성 다미아노 성당 수리​

1206년 여름, 프란치스코는 아씨시로 돌아왔다. 성 다미아노의 성당을 복원하기로 결심한 그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돌들과 음식 부스러기를 구걸하기를 시작했다. 그는 먹다 남은 음식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도 똑같이 해야만 했다. 프란치스코는 참된 'Minores(더욱 작은 이들)'가 상인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버림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그들의 모든 것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는 가난한 걸인들의 삶의 방식을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로마사도들의 무덤 순례 중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구걸하는 거지와 자신의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는 하루 온종일 그곳에서 거지를 대신하여 구걸했다.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고되게 일하면서도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어머니를 기억해 냈고, 프로방스 사투리로 만든 어머니의 그 노래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지나가던 농부들은 거지가 되어버린 부자집 아들을 마치 사랑스러운 미치광이를 보듯 멈추어 바라보곤 했다. 프란치스코는 그 사람들에게 성 다미아노 성당이 장차 젊은 귀부인들이 하느님을 섬기게 될 거룩한 곳이 될 것이라고 일러주곤 했다. 전기 작가들은 이 이야기가 글라라와 다미아노 성당의 가난한 귀부인들(Povere Dame di San Damiano)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한다. '성 다미아노 성당의 가난한 귀부인들'은 글라라회의 초기 명칭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의 성당을 모두 수리했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성당들도 수리하기 시작했다. 성 베드로의 성당과 '포르치웅쿨라(Portincula, 작은 몫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천사들의 성 마리아의 성당이었다. 이 작은 성당은 프란치스칸 운동의 발생지가 되었다. 포르치웅쿨라 성당은 아씨시 아래 움브리아 계곡에 위치해 있고, 프란치스코가 그곳을 발견했을 때에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성당의 주인은 수비시오산의 베네딕토 수도승들이었으나, 프란치스코는 그들이 기꺼이 그 성당 사용을 허락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그곳은 프란치스코에게 너무나 소중한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들 중 하나로 포르치웅쿨라를 형제들에게 추천하곤 했다. 그리고 이곳은 그가 1226년에 스스로 죽기를 희망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전에 이미 그곳은은 프란치스코 인생에 있어서 수없는 중요지가 되었다.

 

복음에서 찾은 생활양식
1208년 2월 24일, 획기적인 사건 하나가 성 마티아의 축일 미사 중에 발생했다. 프란치스코는 미사 중에 복음을 듣고 있었다. 그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설교를 위해 당신의 사도들을 파견시키는 마태오 복음의 말씀, 즉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사명을 받은 사도들이 방랑자들과 순례자들처럼 지팡이도 돈주머니도 없이 맨발로 돌아다녀야 한다는 바로 그 말씀이었다. (마태오 10:7-19) 그것은 그가 여태껏 찾아왔던 생활양식이었고, 이에 그는 아무런 지체도 없이 곧 바로 그 복음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신발과 지팡이를 한쪽으로 내팽개치고 은둔자의 가죽 띠를 끌러 버렸다. 그리고는 타우 십자가 모양의 수도복을 입고 허리에 새끼줄을 맨 채로 맨발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생활양식도 바꾸었다. 회개하는 은둔자의 생활 대신에 열 두 사도들처럼 설교자의 생활양식을 따르게 되었다. 그것은 프란치스코의 제자들 특유의 고귀한 삶의 양식이 되었다.
 


초기 형제들 

몇 주 만에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웅쿨라에서 그의 첫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들 중 첫째는 아씨시의 젊은 부자인 퀸타발레(Quintavalle)의 베르나르도였다. 어느날 그는 프란치스코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날 밤 프란치스코가 그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베르나르도는 잠을 자는 척 하면서 자신의 옛 친구가 밤새도록 기도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다음날 아침 베르나르도는 담대한 결정을 내렸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씨시 순례자들은 아직도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의 집을 볼 수 있다. 같은 해인 1208년 4월, 또 다른 두 사람이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도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한 사람은 주교좌 성당의 의건사제였던 베드로 카타니이(Catanii)였고, 또 다른 이는 문맹의 농부, 아씨시의 에지디오였다. (에지디오 형제는 1208년 4월 23일, 성 지오르지오의 축일에 입회했다.)  

 
이렇게 넷은 아씨시 광장에 있는 성 니콜라우 성당으로 가서 함께 복음서를 펼쳤다. 그들은 세 번 책을 펼쳤고, 그곳에 적힌 성경 말씀을 읽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19,21),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루카 9,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이 복음의 구절들은 프란치스코에 의해 창설된 그 복음적 운동의 생활 양식과 회칙의 근거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형제처럼 마지막 두 사람도 광장에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에지디오 형제는 재산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리하여 프란치스코와 작은 무리를 이룬 이 네 명의 형제들은 둘씩 짝을 지어 설교 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와 에지디오는 안코나의 마르케 지역으로 갔다.

 
이 작은 형제단은 착실하게 인원이 늘어나고 있었다. 1208년 가을, 형제들은 설교하기 위해 리에티 계곡으로 갔다. 그들은 프란치스코가 "Buon giorno, buona gente!(좋은 사람들이여, 좋은 아침이 되기를!)"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던 포지오 부스토네(Poggio Bustone)라는 작은 마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용서와 자기와의 화해를 깊이 체험했다.

최초의 회칙 
1209년,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하여 짧은 회칙을 기록했다. 그 회칙은 주로 위에서 인용된 복음 구절들로 작성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로마로 가기로 결정했다. 이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서 형제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교황의 인준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노첸시오 3세 교황은 이 평신도 설교자 단체를 분명 의혹에 찬 눈으로 보았다. 그는 이미 이러한 단체들을 충분히 봐 온 상태였고 대부분 이 단체들은 이단 사상에 빠져있는 경우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계와 정확히 반대되는 복음의 가치들을 선포 하며 교회 체계의 비도덕적이고 불미스런 관행들을 공격하곤 했다. 특히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 등지에 많은 이단 단체들이 있었고 그 중 카타리파(Cathari, 순결파)가 제일 위험했다.

 
어쨌든 그 평신도(프란치스코와 형제들)들 또한 교회 제도에 반역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노첸시오 3세 교황은 교회 최고의 으뜸인 것은 물론이고 슬기로운 정치꾼이었다. 교황은 성 바오로 대성전의 요한 추기경이 소개한 이 걸인 집단에 대한 오랜 고심 끝에, 프란치스코가 이단 사상에 빠질 위험 없이 평신도와 성직자들 사이에서 진정한 개혁을 제시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노첸시오 교황이 프란치스코를 꿈에서 보았는데, 프란치스코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교황은 '더욱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 즉 '작은형제회'의 회칙과 생활양식을 구두로 인준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에 따르는 참된 형제들로서, '참된 더욱 작은 이'들로서 살아야 될 굳은 신념 때문에 자신의 수도회에 그 이름을 붙였다.

 

가난한 생활
12명의 형제들은 기쁨을 가득히 품고서 아시시로 돌아갔다. 오르테(Orte)에 잠시 머문 형제들은 포르치웅쿨라에서 가까운 리보 토르토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한번은, 차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오토 4세가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에 참여하기 위해 인근의 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 하나를 보내어 황제의 영광이 오래가지 못하겠노라고 과감히 선포하라고 했다. 그 불쌍한 형제는 곧바로 황제 경비병들에 의해 묵살당하고 내팽개쳐졌지만, 자신이 프란치스코의 명령을 이행한 것에 크게 기뻐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느 한 농부가 형제들의 초라한 거주지를 자신과 자신의 당나귀가 사용하겠다며 무례하게 요구를 해왔다. 이에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리보 토르토를 떠나 포르치웅쿨라로 돌아갔다.

사라센 선교에 대한 열망 
프란치스코와 그의 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보편적인 대화에 대한 열려있음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단자들이든 이슬람교도 사라센들이든 강도들이든, 모든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길 원했다. 1212년 봄, 그는 사라센들의 영토로 길을 나섰다. 십자군을 통한 영광스러운 그의 옛 기사도의 꿈은 이제 사라센들에게 설교하기 위한 평화로운 '십자군 원정'에 대한 진심어린 열망으로 바뀐 것이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탄 배가 풍파를 만나 달마티아의 해안에서 난파되고 말았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안코나로 밀항하여 되돌아와야만 했다.
   

글라라의 전환점


글라라의 탈출​

1211년, 포르치웅쿨라의 경당은 또 한 번 초기 프란치스코회 역사의 중요한 사건 현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18과 19일 사이의 밤, 글라라는 가족에게서 탈출하여 간신히 마을 성문을 통과한 다음 포르치웅쿨라로 이동했다. 그 일은 그 지역 주교인 귀도 주교의 동의 아래 그녀와 프란치스코가 세운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른 일이었다.  

 
성지주일인 18일, 글라라는 일찍이 주교좌성당에서 치러지는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전례 예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글라라는 집안 모든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자신의 탈출 계획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수개월 동안 프란치스코의 운동에 참여하는 결정 여부에 관한 얘기로 프란치스코와 비밀리에 만나온 상태였다. 결국 두 사람은 그 계획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글라라는 포르치웅쿨라에서 프란치스코를 만났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제단 앞에서 자신의 긴 금발머리를 프란치스코에게 자르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 의복을 회개자의 수도복으로 맞바꿔 입었다.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형제들의 호위 아래 안전한 피난처인 '아바티사들의 성 바오로(San Paolo delle Abbadesse)'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으로 보냈다. 그곳은 바스티아 움라(Bastia Umbra)에 위치해있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요구하러 갔으나, 외부인이 수녀들의 숙소를 출입하면 파문 당한다는 교황의 명령 때문에, 글라라는 그 수녀원에서 최소한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부인들의  수녀회 

그 후, 글라라는 수바시오산 기슭의 작은 산들 사이에 위치한 '산탄젤레로 인 판자(Sant' Angelo in Panza)'라는 베네딕토 수녀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글라라는 그녀의 동생 카타리나와 합류했다. 그녀들의 삼촌 모날도가 카타리나를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지만 그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카타리나는 아녜스라는 수도명으로 이름을 바꾸고, 프란치스코의 초대로 언니 글라라와 함께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이동했다. 프란치스코의 예언대로, 그곳에서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부인들의 수녀회'가 창설된 것이다.

  
글라라와 그녀를 따르는 동료 자매들은 아무런 재산이나 소유 없이 그 작은 경당에 딸린 수도원에서 봉쇄의 삶을 살았다. 글라라가 죽는 1253년 6월 11날까지 그녀는 결코 성 다미아노의 수도원을 떠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자매들을 위하여 두 교황에게 가난의 특권을 추인하도록 요구했다. 나중에 글라라의 어머니 오르톨라나와 또 다른 여동생 베아트리체도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부인들의 수도회에 입회했다. 글라라는 성 다미아노의 수도원에서 더욱 작은 형제들의 회칙에 근거된 자신의 회칙을 최종 인준을 받았다. 이틀 후, 글라라는 자신을 창조해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며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글라라와 가난한 부인들(글라라회 수도자들)의 관상생활은 프란치스코와 더욱 작은 형제들(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사도적 활동과 상호 보완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란치스코가 관상생활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큰 오산일 것이다. 사실 프란치스코는 거의 매년 몇 개월씩 몇몇 형제들과 함께 운둔소에서 보내곤 했다. 그가 만든 프란치스칸 은둔소들은 이탈리아 아펜니노산맥 여기저기 분포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씨시 상단 소바시오산 비탈에 있는 카르체리(Carceri) 은둔소이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은둔소에 머무는 형제들을 위하여 짧은 회칙을 쓰기도 했다.

 
1213년 5월 13일, 프란치스코가 산마리노 공화국 근처 산 레오(San Leo)의 중세기의 성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토스카나 출신 키우지(Chiusi)의 오를란도 백작이 카센티노 계곡에 있는 라베르나I(La Verna) 산에 대한 사용권을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에게 주었다. 베르나는 은둔소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훗날 1224년 9월 13일, 이 산은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는 기적을 목격하게 되었다. 
 


주님을 위한 여정

설교 사도직​

1213년과 1214년 사이, 프란치스코는 또 다른 설교 사도직 여정에 착수했다. 이번에 그는 에스파냐로 갔다. 모로코에 있는 세라센 이슬람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선교 원정도 실패로 끝났다. 에스파냐에서 병에 걸리게 된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로 귀향해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포르치웅쿨라에서 몇몇 유식한 형제들을 입회시켰는데, 이들 중에 프란치스코의 새 권의 전기와 글라라의 전기를 쓰게 될 첼라노의 토마스가 속해 있었다.

  
1215년 11월, 프란치스코는 교회 역사상 매우 중요한 행사인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했다. 교회 내 중요한 개혁들을 위해 이노첸시오 3세 교황이 소집한 것이었다. 공의회 동안 프란치스코는 아마도 또 다른 사도적 수도회, 설교자들의 수도회의 위대한 창설자, 도미니코 구즈만(Guzman)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의 회칙 외에) 더 이상 새로운 수도원 회칙을 인준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 공의회의 주요 결정들 중 하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223년 프란치스코 회칙이 인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노첸시오 3세 교황이 1209년에 이미 그 회칙을 구두로 인준했었기 때문이다.

 
1216년 7월 16일,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페루자에서 별세했다. 이 시기에, 성지의 아크레(Acre) 주교로 당선된 야고보 데 비티리가 제노바에서 쓴 편지에서 작은 형제들과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귀부인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기록은 아씨시 프란치스코의 운동을 언급하는 첫 번째 비-프란치스칸의 자료이다. 호노리오 3세 교황이 이노첸시오 3세 뒤를 이었고, 1216년 여름, 프란치스코는 호노리오 교황으로부터 포르치웅쿨라 대사의 특권을 받았다. 이 대사에 관한 가장 최근의 기록은 1310년의 자료에서 비롯되나, 믿을 만한 연구는 그 대사의 역사성과 프란치스코가 그것을 청했던 특유의 방식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천사들의 성 마리아 포르치웅쿨라 성당은 총회(Capitulum Generale)의 장소가 되었다. 이 총회는 일반적으로 5월이나 6월 중인 오순절(성령강림 대축일) 즈음에 열리곤 했다. 1217년부터 주요 총회의 자료가 기록되었는데, 예를 들면, 1217년의 총회 때, 형제들이 알프스 북쪽 지방과 중지해 건너편으로 선교 원정을 조직하기로 결정했고, 에지디오 형제는 튀니지로, 엘리아 형제는 성지로 파견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프랑스로 가려 했지만, 그가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교황 특사인 우골리노(Hugoliono) 추기경아 그를 이탈리아에 머물도록 설득했다. 우골리노 추기경은 수도회를 조직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회칙의 최종안을 작성하는 데에 프란치스코를 도와주었고, 1220년에 수도회의 보호자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프란치스코와 맺은 친교는 아마도 1228년 프란치스코의 시성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죽은 지 2년 후, 우골리노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도회가 여러 관구로 나뉘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된 것도 1217년의 총회 때이다.

 
1219년의 총회는 독일과 프랑스, 헝가리와 에스파냐 그리고 모로코로 새로운 선교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1220년 1월 16일, 모로코로 떠난 형제들이 마라케시에서 순교했다. 그곳에서 순교한 성 베라르도와 동료들은 최초의 프란치스칸 순교자들이 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영웅적인 형제들의 명단에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

 

술탄과 프란치스코

같은 총회 때, 프란치스코는 자진하여 다미에타(Damietta)라는 이집트의 항구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곳은 십자군이 다섯 번째 정복하려 했던 곳이다. 다미에타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1219년 가을, 교황 특사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라센들의 진영에 접근할 허락을 청했다.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그는 세라센 진영으로 들어갔고, 이슬람 군대의 지도자, 멜렉-엘-카멜(Melek-el-Kamel) 술탄과 직접 만나게 되었다. 술탄은 쾌히 프란치스코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나라에 언제든 방문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곳은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다.

 
1220년,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정복할 때, 프란치스코는 당시 사라센군 수중에 있던 여러 그리스도교 성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는 아크레로 갔다. 그때부터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은 줄곧 성지에 머물러 왔다. 중동 여행에 관한 프란치스코의 역사적 사실은 1220년 다미에타에서 보내 온 비트리의 야고보 주교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이탈리아를 떠나있는 동안 수도회의 통치권을 나르니의 마태오 형제와 나폴리의 그레고리오 형제, 이 두 명의 형제 손에 맡겼다. 그러나 1220년 봄 즈음, 프란치스코는 자신에게 크나큰 골칫거리가 될 수도회의 갈등에 대한 정보를 듣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 카타니이 형제와 엘리아 형제와 스파이어의 카이사르 형제와 함께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프란치스코가 수도회의 보호자로 임명된 우롤리노 추기경에게 도움을 청한 때가 바로 이때였다.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수도회의 총봉사자 직무에서 물러났고, 자신의 대리로 임명한 베드로 카타니이 형제에게 수도회의 통치권을 맡겼다. 베드로 형제는 1220년 9월 22일, 그가 죽는 그날까지 그 직무를 계속 맡았다. 1221년 총회 때, 엘리아 형제가 새로운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 사이, 호노리오 3세 교황은 쿰 세쿤둠 콘칠리움(Cum secundum consilium)이라는 교황 칙령으로 수도회 내의 수련기 설립을 명령했다.

 

돗자리 총회
수도회 역사에 있어서, 1221년 5월 31일자 총회는 수도회의 가장 유명한 총회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그 총회는 돗자리 총회라고 불린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총회의 정확한 연도에 관하여 이견이 있는데, 우골리노 추기경이 1219년 5월 베네토 지역의 특사였던 이유로 돗자리 총회가 1221년 아니라 1219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 총회가 유명한 총회로 남아있는 이유는 총회에 참석했던 형제들의 수가 많았다는 점과 형제들이 포르치웅쿨라 주변에 지은 간소한 오두막 때문이었다. 그 오두막들이 돗자리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총회는 돗자리 총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돗자리 총회의 역사적 중요성은 그것이 제1회칙(인준 받지 못한 회칙)이라고 불리는 회칙이 승인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회칙은 교황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 1221년 총회는 스파이어의 카사르 형제와 첼라노의 토마스 형제의 지도 아래 새로운 독일행 선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지아노의 요르단 형제가 이 선교단에 속했는데, 나중에 그는 선교단에 관한 전기를 쓰게 되었다.

 
1221년은 또한 '회개자들의 회' 혹은 '3회'의 첫 회칙인 Memoriale propositi라는 회칙을 인준 받은 해였다. 이는 현재 재속프란치스코회와 율수삼회라고 불린다. 사실  평신도 프란치스칸 가족의 시초가 된 이 사건은 아직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복음적 이상을 받아들이려는 평신도들에게 생활 규범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그 실은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 생활 규범은 후일 교회의 승인을 받았다.

 
1221부터 1222년 사이,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설교 여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1222년 8월 15일, 대학 도시로 유명한 볼로냐의 주 광장에서 설교를 했다. 아마 그 당시 형제들은 그곳에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프란치스코가 1223년에 파도바의 안토니오에게 쓴 짧은 편지 내용을 미루어볼 때, 그 유명한 교회학자인 안토니오 성인이 이미 볼로냐의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토니오는 당시 북 이탈리아의 로마냐 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레치오의 성탄절  

회칙이 교회 인준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로 프란치스코는 다시 한 번 은둔소로 가야 했다. 1223년 그는 레오 형제와 볼로냐의 교회법과 국법 전문가인 보니치오 형제와 함께 폰테 콜롬보(Fonte Colombo) 은둔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프란치스코는 회칙의 최종안을 작성했고, 수도회의 유식한 형제들의 반대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회칙은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1223년 11월 23일, 호노리오 3세 교황은 솔레트 안누에레(Solet Annuere)라는 칙서에서 인준 받은 회칙(Regula Bullata)라고 부르는 작은 형제들의 회칙을 정식적으로 인준했다. 1223년 12월 24일 밤,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리에티 계곡 근처에 있는 그레치오(Greccio)의 또 다른 은둔소에서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성탄절을 지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상기하기 위해서 그들은 살아 있는 당나귀와 황소, 그리고 건초와 지푸라기가 뿌려진 구유 앞에서 성탄절 밤 미사를 거행했다.

 
1224년 총회에서 또 다른 선교단, 이번엔 영국 행 선교단을 조직했다. 그 해 9월 20일, 피자의 복자 아녤로가 지도한 첫 선임 형제들은 도버(Dover)에 도착하여 대규모 정착촌들인 캔터베리와 런던과 옥스퍼드로 이동했다. 형제들은 즉시 그곳에 거주지를 얻어 대학교 주변에서 순회 설교를 했다. '작은 형제들의 영국 진출(De adventu Fratrum Minorum in Angliam)'이라는 전기에서는 영국에 처음 진출한 형제들의 생활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영국에서 프란치스칸 형제들이 그레이 프라이어스(Grey Friars)라고 흔히들 불렀다. 이는 '회색 형제들'이란 뜻으로 원래 초창기 프란치스칸들이 입고 있었던 회색 수도복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지상 여정의 끝



그리스도의 오상 

프란치스코 자신이 성 미카엘의 사순절이라고 불렀던 1224 8 15일부터 9 29일 사이,그는 단식 기도의 시간을 라베르나 산에서 보내고 있었다. 십자가의 현양 축일인 9 14일 즈음, 이 기간 동안,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세라핌을 신비로운 환시로 목격했고,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오상 성흔을 몸에 입게 되었다. 이 사건은 프란치스코에 관한 중세의 믿을 만한 자료들에 의해 잘 입증되고 있다. 피정이 끝난 후에 프란치스코는 보르고 산 세폴크로(Borgo San Sepolcro)와 몬테 카살레(Monte Casale),그리고 치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를 거쳐서 프로치웅쿨라로 돌아왔다. 프란치스코는 몸이 약해져 건강이 무척 안 좋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당나귀를 타고 1224년과 1225년 사이의 겨울, 움브리아와 마르케 지역으로 설교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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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노래​
1225년은 프란치스코가 목숨을 잃을 병에 걸린 해로 기록된다. 그는 사실상 눈먼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고, 글라라 자매의 간호를 받기 위하여 봄에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이송되어야 했다.엘리아 형제가 프란치스코의 치료를 강력히 요구했지만, 끝내 치료는 연기되고 말았다. 성 다미아노 성당의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밤, 프란치스코는 태양의 노래(또는 피조물들의 노래)의 첫 부분을 작성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아씨시의 시장과 주교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용서에 관련된 몇 구절을 더 붙였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할 때, '죽음 자매'를 기리는 마지막 구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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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7, 프란치스코는 교황 담당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리에티로 가기로 동의했다.그 복된 사람은 리에티에서 우골리노 추기경과 교황청 인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런 다음 그는 엘리아 형제의 강력한 권유로 폰테 콜롬보로 가서, 관자놀이를 지지는 고통스러운 눈병 치료 수술을 겪어야 했다. 그 수술은 완전히 실패했다. 1225 9, 프란치스코는 리에티 근처에 있는 산 파비아노 델라 포레스타(San Fabiano della Foresta, 숲의 성 파비아노)로 가서 또 한 번의 추가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를 병문안 온 많은 사람들이 성 파비아노 성당의 가난한 주임 사제의 포도밭을 밟아버렸는데, 프란치스코가 기도하자 망가진 그 포도밭에서 풍성한 열매가 맺혔다.

 

유언
1226년은 프란치스코의 지상 삶의 마지막 해가 되었다. 그 해 봄, 프란치스코는 추가 치료를 받기 위하여 시에나로 실려 갔다. 어느 날 밤 프란치스코는 몹시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우려에 시에나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작별의 말을 받아쓰게 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첼레 디 코르토나(Celle di Cortona)의 은둔소에 실려 가게 되었고 그곳은 그의 유언을 받아쓰게 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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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년 여름, 프란치스코는 노체라(Nocera) 근처 경사로에 위치한 바냐라(Bagnara)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고, 그는 아시시 주교의 관저로 옮겨지게 되었다.9월이 되자, 프란치스코는 죽음 자매가 빠르게 다가왔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 차렸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에게 자신을 포르치웅쿨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귀도 주교는 이탈리아의 최남단 가르가노(Gargano) 산으로 순례를 간 상태였다. 포르치웅쿨라로 내려가는 길에서 프란치스코는 그의 고향을 향하여 마지막 강복을 해주었다.

선종 ​

포르치웅쿨라, 1226 10 3일 토요일 해질녘,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예수님의 최후 만찬에 관한 요한복음 구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그러고는 스스로 141편의 시편을 낭송한 뒤 숨을 거두었다. 그 다음 날 일요일 10 4,프란치스코의 시신을 아씨시로 이송하는 장례 행렬은 행렬 도중에 성 다미아노에 멈추어 서서 글라라와 자매들에게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를 추모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어렸을 때 주교좌성당이 운영한 성 조르지오 성당 학교에 다녔었는데, 바로 그곳이 그가 안치될 성당이 되었다. 수도회의 대리 엘리아 형제는 부고를 내어 수도회의 형제들에게 프란치스코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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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3 19, 우골리노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그레고리오 9'라는 즉위명을 얻었다. 그리고 1227 5 30일자 오순절 총회 때에 요한 파렌티(Parenti) 형제가 프란치스코 뒤를 이은 첫 총봉사자로 당선됐다. 새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우선 계획 중의 하나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이(Poverello)를 시성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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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
1228, '레콩엔테스(Recolentes)' 교황 칙서는 프란치스코를 안치할 특별한 성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7 16,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시복시키기 위해 직접 아씨시로 왔다. 그리고1228 7 19일자 '미라 치르카 노스(Mira circa nos)' 교황 칙서에서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성인임을 선포하였고, 교회 보편 달력에서 10 4일을 프란치스코의 축일로 제정했다. 시성식을 맞이해 아씨시를 방문했을 때,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도시 서쪽에 위치한 '콜리스 인페르니스(Collis Infernis, 지옥 언덕이라는 뜻)'에 자신이 이미 건축하도록 지시한 대성전의 초석을 놓았다.교황은 스스로 그 언덕을 '콜리스 파라디지(Collis Paradisi, 낙원 언덕이라는 뜻)'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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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형제의 감독 하에 그 대성전은 기록적인 시간 내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성인의 묘실과 서로 겹쳐진 두 개의 대성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층 대성전은 성묘 성당이며 이층은 대수도원의 성당이다. 1230 5 25일자로 성묘 성당은 성대한 성인의 유골 이장을 맞이하여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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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의 국가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980,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출처: http://capuchin.kr/kr/?page_id=4593&ckattemp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