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5 하느님의 집을 재건하기

Margaret K 2017. 12. 18. 21:21

5

하느님의 집을 재건하기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확실한 응답을 희망하며 계속 반복해서 이런 기도를 하곤 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

 

이 기도는 아마도 그가 23세 때인 1205년과 1206년 사이의 것으로 성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기술된 첫 번째 말들이다. 그것들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 하는 기도이며 그의 여생동안 내내 계속 쓰게 될 말이다. 그러한 그의 첫 말들은 앞으로 오게 될 모든 것에 대한 분위기와 방향을 잡아주는 기도인데, 항상 그의 첫 번째 관심은 기도의 정신, 기도의 신심이 될 것이며,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소멸시키는 어떤 인간의 행동도 나무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글에 나타난 “신심”이란 말은 오늘날 자주 연상되는 경건한 태도나 행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데서 오는 열심함과 명랑함을 의미한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 말씀을 실천하기까진 쉴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의 어두움을 비추는 빛; 믿음, 희망 사랑; 그가 기도하며 바라는 지각과 인식은 그가 항상 하느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기도는 지고하신 분이 자신에 대해 주도권을 취하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도적이고 궁정식의 찬미가로 시작한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항상 찬미가로 시작되고 끝난다. 그의 기도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인정하는 찬양의 기도인데, 가장 높으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한다.

 

이런 보잘것없음이나 작음은 신학적인 진술이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심리적인 진술이 아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경멸하거나 천하게 여기지 않으며 전혀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을 보고 있으며 그에게 사실인 것을 단순히 진술할 뿐이다: 즉,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되려하는 모든 것과 그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물들일 것이다.

 

필시 그가 위에 언급된 기도나 비슷한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을 때 또 다른 전환이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일어났다. 그가 성 다이마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상 앞에서 기도하는 동안에 한 부드럽고 연민에 가득 찬 음성이 그에게: “프란치스코야, 너도 나의 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 가서 나의 집을 수리해 다오.” 프란치스코는 경외심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응답하였다. “주님, 기꺼이 하오리다.”

 

“이 때부터 그의 마음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생각에 상처를 입어 녹아 내렸다.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늘 주 예수의 성흔을 마음에 지고 다녔다.”(세 동료 5, 13-14) 이러한 말들은 마치 성배 전설을 거꾸로 말하는 기사도와 사랑의 내용들이다. 성배를 찾으러 신나게 떠나가는 젊은 용사 대신에 거룩한 성배가 그에게로 오심으로 해서 남은 생애를 그는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데 써야 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것이 프란치스코 자신의 양심의 투영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는데, 즉, 죄책감을 표현하고 아버지의 탐욕과 폭력에 대한 보상의 필요를 드러낸다고 해석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탐욕과 폭력이 자신 안에도 있음을 프란치스코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식의 설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설명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프란치스코에게서 정지하고 나머지 이야기를 듣는 것을 거절 하거나, 혹은 하느님께서 자아를 통하여 그리고 자아의 심연으로부터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성배가 어떤 사람에게 오거나, 하느님께서 진실로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지 자아가 자아자체에게 말하는 것만이 아니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말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 다미아노의 작은 성당에서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난 계시도 마찬가지이다. 프란치스코가 재건할 집은 처음에 프란치스코가 단순하게 믿듯이, 단지 그 허물어지는 경당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더 큰집, 즉 교회 자체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난 가장 중요한 계시, 하느님의 집을 복원시키라는 “공현”은 바로 하느님이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인간이며 고통당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첫 형제들이 교회에 보여주고 되살린 것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다.

 

프란치스코가 그의 눈으로 본 그 시대에 하느님은 백성들로부터 비잔틴식 모자이크의 황금빛 내세 속으로 격리되었다. 엄격하고 규격화되고 먼 곳에 계신 분으로 말이다. 그리고 지금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다시 육화하신다. 프란치스코는 주님과 주님의 힘을 구하고 항상 주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기도를 시편작가와 함께 기도한다. 그리고 그에게 보여진 얼굴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얼굴이다. 그분은 온화하고 부서지기 쉬운 분이시다. 그분은 그레치오 산 암자에게 거행된 성탄 미사 때에 프란치스코에게 아기 예수로 나타나신다. 그분은 입술이 부드러워져 인간의 말을 하기 시작하는 비잔틴양식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이시다. 그분은 그분 자신의 상처로 프란치스코의 육신을 관통하신 연인이다. 그 분은 프란치스코에게 인간적인 응답을 불러일으키시는 인간적인 구세주이시며, 프란치스코는 고통받고 살과 피가 되신 하느님께 자신의 육신의 상처로, 그의 주님과 일치되는 부분인 육체적 고행으로 응답한다. 견습기사나 종처럼 프란치스코는 그의 스승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은 마음 전체와 종교의 양상을 변화시키는데, 그것은 프란치스코 운동에 따른 예술 분야에서 반영된다. 하느님은 더 이상 이콘의 엄격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제 그분은 인간의 모형들로부터 그려진 육체의 색깔로 그려지며, 그래서 르네상스가 가능하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집을 재건한 길은 하느님께서 신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는 육화되신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인 응답을 하며 살아감으로써 이러한 일을 수행한다.

이리하여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가 살아가는 이야기는 다시 지상으로 하느님을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다음과 같이 일어났다: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피에뜨로 베르나르도네에게 그의 모든 소유물을 되돌려주고 모여든 아시시의 시민들 앞에서 다음처럼 선언함으로써 지상의 아버지를 하늘의 아버지와 바꾼다. 지금부터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는 계속 되는데, “프란치스코는 기쁨의 열정에 휩싸인 채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와서, 은수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다시 시내로 들어가, 그는 시내 한 복판과 마음을 누비고 다니며 하느님을 흔연한 마음으로 높이 찬미하였다. 이렇게 주님의 찬미를 마치고 난 다음, 그는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 위하여 구걸을 시작하였다: ‘제게 돌 하나를 주는 사람은 그 만큼의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돌 둘을 주는 사람은 두 배의 갚음을 받을 것이며, 돌 셋은 또 그 만큼의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무수한 말들이 그의 뜨거워진 전신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하느님께서 배움이 부족한 단순한 사람이라서 그를 뽑으셨다. 그는 모든 일에서 인간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유식한 말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단순하게 자신을 나타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기며 업신여겼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를 보며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세 동료 7, 21)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응답은 그런 식이었으며, 그는 다른 시대 다른 때에 살았던 사람이다.

 

우리가 성 프란치스코를 기본적으로 중세 지향적인 마음 자세로 따른다면, 우리는 그가 그의 삶에서 했던 것을 우리의 삶 안에서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공의회 이후의 사람이었으며, 제 4차 라테란 공의회의 교령을 실천에 옮겼고 구체화 시켰는데, 그 공의회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개혁 공의회들 중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복음이 진실하다는 소리를 냈는데, 바로 그 점이 교회 안의 모든 쇄신이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바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현재적인 육화를 재발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 시대 속으로 고통스러운 여행을 하지 않았던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그의 시대에 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시대 속에서 주님께 귀 기울이는 것보다 프란치스코를 그대로 모방하려고만 한다면 이것은 시대를 멈추게 하는 것이고 다시한번 폐허가 되어가는 하느님의 집을 재건하는 작업으로부터 우리를 멀리하게 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집을 재건할 돌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귀 기울이고 구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하느님의 집은 무엇일까? 우리가 단지 과거만을 보고 있지 않고 우리 주위와 우리 속을 바라봄으로써 이 질문들에 답하려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와 자리에서 살기 시작하는 것이며,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한다. 그것은 명확하고 틀림이 없다. 그것은 우리 세계 속에서 살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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