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6 기도하기를 배우기

Margaret K 2017. 12. 18. 21:22

6

기도하기를 배우기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그가 기꺼이 포옹하길 원했던 것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는 우리가 성인이 되지 않는 이유가 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극복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또한 형제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극복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 다른 이들 안에 있건 간에 가치가 없거나 불결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잘못 판단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를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코의 삶에는 그가 부끄러움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기도가 그런 극복을 통하여 어떻게 올바르게 되었는가를 밝혀주는 두 가지 극적인 사건들이 있다. 첫 번째는 회심의 바로 시작에 일어난다.

 

“그가 계속해서 성 다미아노 성당을 거처로 삼고 있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집요한 정탐꾼처럼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수소문하여 돌아다녔다. 아들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거하고 있음으로 알게 된 아버지는 마음이 극도로 상하여, 이 뜻밖의 상황에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그들과 함께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벌써 그리스도의 새 기사가 된 그는 부모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협박하려 달려오는 그들의 소리를 듣고는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 준비해 둔 비밀 토굴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한 달을 숨어 지냈다. 그 토굴을 아는 사람은 가족 중에서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음식을 남몰래 준비해 두었다가 때맞춰 가져오곤 했고, 그는 숨어서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러한 박해에서 구해 주시며 그의 경건한 소망을 실현하는 일을 어여삐 여겨 도와주시기를 눈물을 흘리며 애절히 기도했다.

 

이렇게 단식과 눈물로 정성을 다하여 그칠 새 없이 주님께 청하면서, 자신의 덕행이나 열성에 의존치 않고, 완전히 주님께만 희망을 두니, 주님은 어둠의 심연 속에 있었던 그를 신묘한 기쁨으로 가득히 채워 주셨고, 신비한 힘의 빛으로 비춰 주셨다. 이리하여 온전한 불이 붙어, 힘차게 토굴을 박차고 아시시를 향해서 굳세게 기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무기로 무장을 하여, 하느님의 불이 붙게 되자, 지금까지의 자신의 나태와 괜한 두려움을 질책하면서 담대히 자신을 박해자들의 손과 채찍에 내맡기기로 하였던 것이다.

 

전부터 그를 아는 사람들이 이를 보자, 미친놈이라는 등, 얼빠진 놈이라는 등 외쳐 대며 무참히 능욕하였으며 길바닥의 진흙을 집어던지거나 돌팔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사는 이러한 모욕에 귀머거리인양 마음이 부수어지거나 동요되는 일이 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세 동료 16-17)

이 이야기는 프란치스코 영성을 말해주는 원형적인 이야기이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사는 그의 삶의 뿌리와 움직임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은신처로 준비한 비밀 동굴 속으로 몰래 걸어가서 아버지의 분노로부터 숨는다. 진실한 자아가 나타나기 시작할 때의 우리 모두처럼 그는 아버지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움추러 들고 숨으며, 아직까지도 진실한 자아가 될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 그는 주님께서 박해로부터 그를 구하고 그의 소망을 실현시켜 달라고 기도한다. 아직까지도 그의 소망이 실현되려면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참고 견디기 때문에, 주님은 빛으로 그의 영혼을 채우시고, 그래서 숨어있는 동굴을 떠나 박해자들의 욕설과 공격을 직면한다. 부끄러움을 극복하면서 그는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박해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는데, 단지 유쾌한 것에 대한 것만 아니라 박해로부터 구해달라는 빗나간 소망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행동 속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결단의 결과를 대면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 삶 속에서 프란치스코는 끊임없이 주님과 자신을 알기 위하여 그래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부끄러움을 극복해간다.

 

두 번째 또 다른 사건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로 가는 순례 길에 회심이 일어나기 전에 벌어진다.

 

“그는 많은 걸인들이 구걸하고 있는 성당의 광장 앞으로 나와서 어느 거지와 아무도 모르게 옷을 바꿔 입고, 다른 거지들과 더불어 계단에 서서 불란서 말로 구걸을 하였다. 그 후 그는 거지의 옷을 벗고 자기 옷으로 갈아입은 후 아시시로 돌아오며, 주님께 자신의 길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세 동료 10)

 

다시 한번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행동이 기도보다 앞서있다. 그는 자신을 사회에서 밀려난 자들과 동일시한다. 그는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는 자신의 의존성과 작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렇게 결말이 난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고 자신의 길을 인도하기 시작하신 하느님과 이야기 하였다.“ 이 마지막 진술은 프란치스코의 기도의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는 우리가 하느님과 맞대면하는 그 깊은 중심, 그 비밀스러운 곳, 하느님과 친밀하게 친교하는 거룩한 그곳을 존경하고 지키는 파수꾼이다.

 

오늘날 인간의 자유에 대해 말로는 많이 부르짖지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에 대한 항복, 그룹에 대한 미묘한 종속, 올바른 자유와는 정 반대가 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공동체”에 대한 순응주의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진실한 공동체의 중심에 놓여 있는 소중한 자율성에 대한 균형을 상기시키는 사람은 프란치스코이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가장 강력한 형제애와 사랑의 결속으로 서로가 밀착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형제의 각각의 보화는 소중히 여겨지며, 형제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소음을 듣지 않게 기도할 수 있도록 한 사람 혹은 몇몇의 형제들의 보호를 받을 정도로 항상 존중되고 키워진다.

 

프란치스코 자신은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의 핵심에 위치하는 참된 관상적인 정신을 육성하는 “은둔소를 위한 회칙”을 쓴다.

 

그리고 오상을 받기 바로 전에 라 베르나에서의 그의 모범을 때때로 오늘날 “나눔”, “그룹 영적지도”, 혹은 “함께 함을 촉진시킴”이라는 구실아래 무례하고 강제로 침해당하는 주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의 거룩한 영역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지혜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친교는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또한 부서지기 쉬운 채로 앉아 있는 그 비밀스러운 동굴을 침해함으로써 촉진되지 않는다.

 

라 베르나의 사건에 프란치스코에 대한 매력적이고 섬세한 이야기가 있다.

 

“그 무렵 마침 성모 몽소 승천 축일이 가까워오고 있었고, 성 프란치스코는 몽소 승천 축일날 시작되는 성 미카엘 대천사의 단식재를 좀 더 혼자 조용히 보낼 수 있도록, 더욱 멀리 떨어져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성인은 레오 형제를 불러 ‘가서 은수처의 기도소 문 옆에 서 있다가 부를 때 오시오’하고 말했다. 레오 형제가 그곳에 가서 서자 프란치스코는 조금 더 멀찍이 걸어가서는 큰 소리로 불렀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레오 형제는 성인에게 갔다. 그러자 레오에게 ‘내 아들이여, 좀 더 멀리 가서 내가 형제를 불러도 알아들을 수 없는 곳을 찾도록 합시다’하고 성인은 말했다.

그 때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돌러 보냈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는 성 미카엘의 단식재를 그 한가한 곳에서 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기가 외쳐도 들리지 않는 곳에다 조그만 움막집을 하나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움막집이 다 지어지자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형제들은 은둔소로 다들 돌아가도록 하고 나를 여기 혼자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마음의 분심이나 장애 없이 이곳에서 단식재를 보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제들, 아무도 나에게 와서는 안되며, 어느 일반인도 내게 오도록 해서는 안됩니다.’“(잔 꽃송이, 오상에 관한 두 번째 고찰)

 

우리는 때때로 고독 속으로 물러날 필요가 있으며 다른 이들 특히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시오, 이곳에 나를 홀로 있게 하시오”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올 때 주님께서 침묵 속에 말씀하신 것을 표현해선 안될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초기 형제들이 공적으로 그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죄를 서로에게 고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각 형제의 개별성이라는 귀중한 보물이 존중되고 프란치스코가 행한 것처럼 주님의 비밀이 보장되거나 최소화되는 분위기 속에서만 일어난다.

 

당신이 형제와 자매들에게 거스른 과오와 죄를 인정하는 것과 당신이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것은 다른 일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어떤 특별한 관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신뢰가 있어야 하며 수년간의 사랑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렇게 다 된다 해도 여전히 위험은 내포되어 있으며 자기표현의 신비를 허용하는 어떤 깊은 만남의 순간이나 강력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여줌은 값싼 노출이 되며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그 중심으로부터 분리되므로 불가능하게 된다. 벌거벗은 자아의 조급하고 불손한 노출에 의해서 우리는 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값비싼 진주를 흩뜨리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 중에 들리는 소리를 결코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는다. 그는 황홀경을 감추기 위하여 두건을 끌어올린다. 그는 비밀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한다.

 

II

 

시인은 그가 시를 짓든 짓지 않든 간에 시인이지만, 저술가는 쓰지 않는다면 저술가가 아니다. 프란치스코는 시인이지만 시를 짓는데 그의 삶을 보내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는 설교하고 가르치고 가난하게 됨으로써 그의 삶을 산다. 하지만 시인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을 시적인 요소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기도할 때 그는 시인처럼 기도한다.

 

프란치스코의 첫 전기 작가인 첼라노의 토마스는 프란치스코의 기도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말하는데, 그것들을 함께 모아보면, 기도하는 시인에 관한 복합적인 그림이 형성된다.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기도했는가에 대한 첼라노의 묘사를 사용하여 나는 프란치스코의 기도에 관한 일종의 모형을 그려보았다:

 

너의 모든 시간을 마음속에 지혜를 새기는 거룩한 여가로 만들어라.

 

방문자들이나 그 밖의 다른 용무가 너를 방해할 때, 너의 기도를 끝까지 하는 것보다는 중단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런 연후에 너는 너의 가장 깊은 중심 속에서 다시 기도로 돌아갈 수 있다.

 

네 영혼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하느님과 함께 쉴 수 있는 고독의 장소로 물러나라.

 

네가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때, 이 숨겨진 만나를 들추어 내지 말아라. 다른 이들이 그 신랑의 만짐을 알지 않도록 하라.

 

네가 주님께 요청하는 한 가지에 너의 온 존재를 다해 주의와 애정을 향하게 하라. 그렇게 하여 너는 너무 많은 기도를 하기보다 네 자신이 기도가 되어갈 것이다.

 

성령의 어떤 방문이든지 경시하지 말아라. 심지어 어떤 일이 압박하거나 여행 중에 있든 지간에 은총의 만짐에 응답할 시간을 가져라. 자주 일어나는 주님의 잡아 올림 속에서 달콤한 만나를 맛보아라.

 

여행 할 때, 비를 맞으며 로마에서 돌아오는 프란치스코의 이야기와 그가 어떻게 말에서 내려 비에 흠뻑 젖은 채 오랜 시간 동안 서 있었는지를 기억하면서 항상 기도하기 위하여 멈추어라,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만일 몸이 그 몸과 함께 벌레의 음식이 될 음식을 평온하게 취한다면, 하느님 자신이신 음식을 영혼이 평화롭고 평온하게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 앞에 이 이야기를 간직하라: 어느 사순절에 프란치스코는 약간의 여가 시간에 작은 꽃병을 만들면서 그 일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고 있던 중에 그 꽃병을 보기 위하여 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내적 자아가 그런 욕구 때문에 혼란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의 목소리가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중단했던 것이 슬펐던 그는 형제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아, 그 내 마음을 뒤틀어 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진 그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가! 나는 주님께 희생을 바치기에 방해가 되었던 그것을 주님께 희생으로 바칠 것이다.”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는 그 작은 꽃병을 집어서 불 속으로 던졌다.

 

기도로 점철된 프란치스코의 전 생애는 동시에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지나가도록 하는 진한 에너지이다. 그는 첫 전기 작가의 말에 의하면 기도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자신이 기도가 된다. 프란치스코의 기도에 대한 모든 묘사들 중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점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나를 늘 사로잡는 묘사인데, 왜냐하면 나는 각 사람의 운명이 어떻든지 살아있는 기도가 되어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고도로 개인화된 약사이며, 각 사람이 나름대로 자신을 형성해 주는 토양을 취하고 그 굳은 토양을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민감한 도구가 된다는 역사이다.

 

라 베르나 산의 은둔소에는 깊은 감동을 주는 성 프란치스코의 상이 있는데, 내가 춥고 비가 오는 어느 날 오후에 처음으로 보았을 때, 그 상은 내 자신이 상상하는 프란치스코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 상은 어떤 격노한 예술가가 눈과 귀와 잎을 도려내고 거칠게 비틀은 팔과 다리와 뒤틀어진 목 그리고 마침내는 그 전체를 땅에 뭉그러뜨린 것과 같이 거칠고 완성되지 않은 한 조각의 진흙을 닮았다. 그러나 조각품 자체는 수동적인 진흙이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며, 마치 조각가의 거친 강타와 찌름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황홀경에 빠진 조각가의 손을 붙잡기 위하여 땅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없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을 뿐만아니라, 안의 어떤 원천으로부터 밀어내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조각품은 항상 내 앞에 있고 나를 그 안에서 모든 인간과 일치시키는 어떤 근원적인 진흙으로부터 내 꿈속에 일어난다. 그것은 홀로 정신과 마음속에서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기도가 되는 진흙 그 자체이다.

 

우리의 전 존재가 영 속에서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무엇인가가 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엄숙한 손이 우리를 십자가 위의 뒤틀어진 그리스도의 모양으로 빚으시도록 허용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오직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기도하기를 멈추고 우리 자체가 살아 있는 기도로 변한다. 기도의 모습은 각 사람이 제각기 다양한 살아있는 기도가 되어 가는 것처럼 개별적이다.

 

 

III

 

나는 13살부터 기도하려고 노력해 왔다. 어떤 때엔 기도가 잘 되었으나, 어떤 때엔 그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기도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나 무능력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나의 일상생활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나의 지식과 연관되어 있었다. 내가 기도 중에 어려움을 체험하기 시작할 때는 보통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나의 현재의 이해를 허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거나 떠오르는 새로운 이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만일 내가 한 편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어떤 이상적인 모습들에 매달리고 다른 편으로 발생하기 위하여 버둥거리는 내 자신의 다른 면을 부정한다면, 그때 나는 진짜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고 있었던 하느님은 더 이상 진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 하느님은 지금 죽어 가는 나의 이상화한 측면으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상화된 자아가 죽으면 그 자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재와 일치하는 신성에 대한 필요로부터 형성된 부적절한 하느님도 죽는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나 자신의 모든 측면들을 포용함으로써 나 자신을 성장케 하고 형성시킬 때 하느님은 다시 가까이 하기 쉬운 분이 되는데, 왜냐하면 진실한 하느님께서 오직 내가 되길 원하는 나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고 긍정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의 진실에 대한 받아들임은 하느님에 관한 진실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그 두 진실들은 그 사람의 기도하는 중심에서 하나가 된다.

 

진실한 기도는 나 자신에게 대해 정직함을 요구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통합된 자아만이 기도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나 자신에게 정직함이 내가 올바로 기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기도할 수 있기 전에 “가치있고”, “완벽하고”,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다면, 나는 아마도 전혀 기도하지 못하거나, 설사 내가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 기도는 하느님과 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자아만족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정직하고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자아가 되지 않을 때에,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상화된 자아는 항상 기도 중에서 죽는데, 왜냐하면 그 자아는 진실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자아를 죽게 놔두고 되어 가는 자로서 기도한다면, 우리가 가진 하느님의 이미지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더 선명하게 이해함에 따라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도도 변한다. 그래서 모든 선이신 하느님께 대한 경배로부터 내가 고통당하게 허용하시거나 어떤 이유 때문에 나를 버리시는 부당한 하느님께 불평을 내뱉거나 그분과 말다툼하는 기도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나를 저버리시는 분으로서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그분이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분이신가를 말한다면 나는 거짓말로 기도하고 있는 것인다. 하느님은 내가 그분을 객관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고 믿으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 하면서도, 그분을 주관적으로 체험하면서 그분께 기도할 때에 비로소 객관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된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느님은 그분이 어떤 존재이신가에 대한 나의 정직하지만 잘못된 표현과 이해를 되잡아주고 고쳐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과의 이러한 정직한 씨름이 프란치스코가 회심의 시작에 동굴에서 보낸 고통스러운 한 해와 일생동안의 다른 때에 경험한 것이며, “태양 형제의 찬가”란 노래를 만들기 전에 지냈던 50일 동안의 암흑기에 그 씨름이 절정에 달했었다고 믿는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졌고 내쳐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참으로 느꼈던 것을 기도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있는 자로서의 당신 자신에게 신실하시고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다는 것을 프란치스코에게 보여 주셨다. 따라서 비록 그 시간에 우리가 그분을 다르게 경험하더라도 하느님은 충실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의심과 절망과 하느님의 불충실을 실제로 경험한대로 인정할 만큼 정직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의 중심에 계신 진실한 하느님이 프란치스코의 인식의 진실성을 인정해주기 위하여 다시 프란치스코의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선 그를 버리셨는데, 그것은 그가 다시 한번 하느님께 자기 지배 밖에서 독립적으로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는 특권을 그분께 돌려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당신 자신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순수한 선물이며,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완벽한” 인간이 됨으로써 얻거나 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일 뿐이며,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완전함이나 성취는 전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하느님이 우리의 정직한 기도에 자유로이 응답하심으로써 우리 안에서 바꾸시는 그분의 작품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게 되면 그 때는 하느님의 일이지 어떤 이상과 일치되는 우리 자신의 성공이 아닌 것이다. 진실한 기도 속에서 변화되는 자아는 우리가 계획했던 자아와 일치되는 때가 거의 없고, 이제는 우리가 빗나간 우리 자신의 이상주의의 작품으로 자각하고 있는 잘못된 자아를 하느님께서 점차적으로 해방시키셔서 만드시는 새롭고도 불가사이한 자아인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자신의 진실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해주신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진실한 얼굴 속에서 우리는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의 영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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