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성 프란치스코의 길 (머레이 보도 ) - 서문

Margaret K 2017. 12. 18. 21:18

성 프란치스코의 길

-머레이 보도 지음-



차례

서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서문


1. 가난

2. 평화를 만들기

3. 복음을 살기

4. 프란치스코와 돈

5. 하느님의 집을 재건하기

6. 기도하기를 배우기

7. 기도와 활동

8. 성녀 글라라.

9. 성녀 글라라의 거울

10. 동굴

11. 프란치스코와 동굴의 거주자들

12. 순종

13. 아버지와 아들

14. 수여식

15. 친밀함

16. 사랑의 교환

17. 악

18. 섭리

19. 평화와 정의

20. 로마로의 여정

21. 사막의 여인

22. 성 프란치스코의 길

23. 산의 다른 쪽

24. 큰 바위 사탕산

25. 사회 정의: 대화

26. 오늘낭릐 프란치스코다운 삶

27. 대화의 길

28. 친교의 길

29. 극기의 길

30. 자유의 길

31. 예수

32. 형제인 태양의 찬가

33. 프란치스코: 개인 성찰

34. 안으로 가는 여정


후기 


 

 

서문


나는 18살 때에 처음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옷을 입었다. 그때 이후로 내 속에 있는 것과 나의 주변에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 오늘 내가 아는 프란치스코는 18세 때에 알았던 프란치스코와는 다르나, 그의 가치관들과 그가 어떻게 살았으며 무엇을 말했는지에 대하여 말하는 이야기들은 내가 살기로 선택한 길에 여전히 동기를 주고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나를 계속 도전하게 하고 편안치 않게 하며 내 안과 주위에 있는 가능성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그런 삶을 내게 주었다. 나는 내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받기 위하여 프란치스코와 그의 통찰로 계속 돌아간다.

 

나는 프란치스코와 초기의 프란치스코 형제들로부터 하느님께 이르는 고정된 “길들”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다만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을 만들고 그 여정의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준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글들은 여정의 기록과 같은 것인데, 그것들은 개인적이고 단순하며, 성 보나벤투라와 같은 프란치스코에 대한 위대한 해석자들이 쓰는 것과는 달리 다소 직접적이다. 보나벤투라라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2의 창립자로 불리는데, 그는 프란치스코 영성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중세의 주석자이다.

 

그러나 시인인 프란치스코와 학자인 보나벤투라 사이엔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프란치스코는 직관적이고 비지성적이며 구체적이고도 특정한 것들에 매료되는데 반해, 보나벤투라라는 추론적이고 지성적이며 추상적인 이념과 개념들, 진리에 관심을 둔다. 여러분이 이 두 위대한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면 프란치스코의 「유언」과 신학자 보나벤투라가 쓴「하느님께가는 영혼의 여정」을 읽어보기만 하면 된다.「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은 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께로 올라가게 되는지를 상징적이고 체계적으로 자세히 보여준다. 프란치스코의「유언」은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이 실제로 하느님께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매우 간단하게 기록한다.

 

프란치스코와 보나벤투라 그 둘 다에게 있어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겐 복음을 살아가는데 있어 보나벤투라에게서 보여지는 것처럼, 단계적이고 전체적인 구조가 없다. 단지 무너진 경당을 재건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응답만이 있을 뿐이다. 보나벤투라의 글들은 거대한 고딕풍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면에 프란치스코의 글들은 그가 재건했으며 오늘날에 보내벤투라를 닮은 거대한 대성전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작은 포르치운쿨라 경당과 흡사하다. 이 두 개의 성당들은 모두 다 하느님의 집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나 느낌은 완전히 서로 다르다. 당신이 짓거나 고치는 하느님의 집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바실리카 대성전과 길가의 경당은 둘 다 하느님의 집이다: 다른것은 건설자들인 것이다.

 

내가 어떤 건물을 짓는다 해도 어떤 건설자가 될지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확실히 대성당을 건축하거나 교회들을 재건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성 보나벤투라처럼 프란치스코가 재건한 교회 위에 장엄하고도 보호적인 대성전을 세울 수도 없다. 나는 단지 둘 다 방문하고 그 곳들에서나 그 곳으로 가는 길에서 발견하는 작은 곳들을 사랑하고 그 곳들에서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그 곳들을 빛나게 문질러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반짝이도록 문지르는 것은 아무 것도 숨기거나 덮어씌우거나 보호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문지름은 거기에 이미 있는 것이 빛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나의 몇 가지 문지름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길이나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태양의 노래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 민순 신부 역)

'성 프란치스코의 길-머레이 보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프란치스코와 돈  (0) 2017.12.18
3 복음을 살기  (0) 2017.12.18
2 평화를 만들기  (0) 2017.12.18
1 가난  (0) 2017.12.18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서론  (0) 2017.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