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31일 화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Margaret K 2007. 7. 31. 03:38

 2007년 7월 31일 화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엔 궁정과 군대에서 생활하다 하느님께 헌신하는 생활로 바꾼 그는 마흔 살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학업을 시작하여 파리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쳤다. 이냐시오는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15년 동안 예수회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특히 종교 개혁으로 상처 입은 가톨릭 교회의 교세 회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많은 저술과 제자 교육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으며, 1622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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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마태오 13,38)

 

 "He who sows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the good seed the children of the Kingdom.
The weeds are the children of the Evil one,

 

  

 

 제자들은 예수님께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청한다. 차근차근 비유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스승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되지 않지만 추수 때가 되면 확연히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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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냐시오 성인은 불꽃같이 살다 간 분입니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귀족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무척 작은 키였지만 그의 생각과 판단은 크고 담대하였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 군인의 길을 걸으며 빠른 출세를 노렸지만 프랑스와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을 입습니다.
결국 군인의 길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독서에 전념하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전투에서 당한 부상이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다시 학업을 시작합니다. 마흔 살이 넘은 나이였으나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공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영적 체험을 하였고, 『영신 수련』이란 대표작을 집필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이냐시오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동료들 가운데 하나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입니다. 이후 이들은 사제품을 받았고, 1540년 바오로 3세 교황에게서 예수회 설립에 관한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냐시오가 설립한 예수회는 선교를 첫 과제로 삼으면서 수도원과 학교를 전 유럽에 세워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교육과 지적 분야에서 그들의 능력을 아낌없이 드러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1556년 그의 나이 65세 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피정과 영성 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2002년 월드컵 때 담배를 과감하게 끊었습니다. 뭐 담배 끊은 것을 가지고 뭐 대단한 것이냐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 스스로도 제가 담배 끊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왜냐하면 하루에 담배를 3갑 이상 피우는 골초였거든요. 잠시도 담배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했던 그래서 비행기 타는 것이 제일 싫을 수밖에 없었던 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담배를 입 근처에 대지도 않고 있습니다.

물론 담배 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담배 냄새가 좋은 것을 보면 완전히 담배 끊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완전히 끊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지금도 느끼게 됩니다.

아무튼 6년째 담배를 끊고 있는 저를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담배를 끊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만큼 담배를 끊겠다는 마음은 조금씩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담배를 끊는 방법을 몰라서 못 끊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저보다 담배 끊는 방법을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체계적으로 금연하는 방법에 대해서 인터넷에만 봐도 수십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끊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지, 금연의 방법을 몰라서 금연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금연을 시작했으나 처음에는 너무나도 힘들지요. 그래서 스스로와 타협을 해나갑니다.

‘이렇게 갑자기 끊으면 정신건강에 더 좋지 않을 거야. 조금씩 줄여 나가면 돼지 뭐.’

맞습니다. 갑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 분명히 정신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나면 곧이어 다시 전과 같은 양을 피우게 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오히려 더 많은 양의 담배를 피우는 경우까지도 생기게 되지요. 이쯤 되면 이렇게 말합니다.

‘안 좋은 담배……. 내가 열심히 피워서 없애겠다.’

계속되는 타협가운데 담배를 끊겠다는 의지는 사라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죄에 대해서도 이렇게 타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우리들의 죄를 곧바로 묻지 않습니다. 즉, 지금 내가 어떤 죄를 하나 지었다고 “너!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지금 너에게 이러한 벌을 내리겠다.”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대신 추수 때 가라지와 밀을 가르겠다고 하셔서 그럴까요? 우리들은 스스로 밀의 위치에 들어갈 기회를 찾지 못하고 계속 가라지의 위치에서 서서 ‘언젠가는 밀이 될 수 있다’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담배를 끊으려면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서 과감하게 지금 당장 끊어야 하듯이, 우리들의 죄에 대해서도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서 지금 당장 끊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께서 인정하는 의인이 되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끊어야 하는데 못 끊고 있는 것. 지금 당장 끊어 보세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빠다킹신부

 

   공범자     

-남상근 신부-


 죄의 첫 번째 속성은 혼자서만 잘못하는 것을 못 견디는 것이라 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교함에 넘어가서 제일 먼저 한 것도 아담을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다 깨끗한데 나만 더러운 것만큼 불안할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범자를 만드는 것이지요. 같이 더러우면 덜 더러운 것 같습니다.
그날이 오면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도 불구덩이에 던져진다 하셨습니다.
공범자를 만들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나 편하자고 멀쩡한 사람을 꼬드겨서
공범자가 되게끔 한다면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려 죄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죄인을 불러 의로운 이로
재창조하셨습니다. 그가 죄 중에 허덕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배려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임인자(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 사무국장)-


 가족과 함께 ‘달려라 허동구’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내와 사별하고, 아이큐가 낮은 아들을 최선을 다해 키우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가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 얼마나 차가운 시선을 가졌는지, 얼마나 차별을 하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함께 이겨내고, 함께 아파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기다려 주고 또 기다려 줍니다. 동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또 가르쳐 주고 또 참아줍니다. 친구와 아빠의 깊은 사랑이 아이를 웃게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웃게 합니다. 동네 골목길을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게 그려집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잘나고 힘세고 멋있는 이웃에겐 잘해 주고 나보다 못나고 약하고 안 좋은 사람에겐 함부로 하는 사회에서는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고 참아주고 기다려 주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이고 사랑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참지 못하는 사회, 나와 다른 것을 당연하게 틀렸다고 표현하는 사회, 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한때 우리나라는 똑같은 옷을 입고 머리길이도 똑같아야 하고, 똑같은 음악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위반하면 감옥에 가거나 쫓겨야 했고, 그것을 못 견디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망령들이 아직도 거리를 활보합니다. ‘왕따’라는 말이 너무 쉽게 입에 오르내리고, 동네에 복지시설이 들어선다면 반대부터 하고 봅니다. 상대방의 큰 불편보다 나의 작은 불편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자랑처럼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마음으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사람이 자신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화를 내고 비난을 하고 외면을 하고, 작은 불편도 참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감싸안고 배려하고 기다려 주는 사람을 보면 그 따뜻함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고, 나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입으로 말하는 사람보다 귀로 듣는 사람이 되자고. 나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에 더 희망이 있다고. 이웃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힘든 것도 나누며 그렇게 살아가자고 다짐해 봅니다. ●


 

 밀밭의 가라지에 대한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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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석 신부 -


오늘의 복음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는 비유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비유도 하늘나라의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밀밭에는 가라지도 함께 섞여있습니다. 밀은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마의 소행입니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죽음이라는 악이 존재하고, 또 하느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때론 악의 존재 때문에 하느님을 향해 원망의 하소연을 하게 만듭니다. 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의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악이 용인되는지, 또 선한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역시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도 분명한 진리입니다. 선과 악이 존재하는 이 알 수 없는 신비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선도 아니요, 완전히 악에서 해방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천사도 아니요, 악에 영향을 받는다 해서 포기할 악마 같은 존재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수 때까지 하느님이 기다리시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당장의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내의 기다림이 우리에게 완성과 또 악마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까닭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해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밀밭의 가라지 비유는 선한 이에게서 선을 배우고, 악을 통해 더욱 선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악을 극복하고, 악마의 세력을 극복하며, 믿음의 생활을 배우는 것이 밀과 가라지의 공존의 큰 이유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은 더욱 빛나게 마련이고, 또한 소중한 것임을 실감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추수 때까지 연장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의 섭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추수 때까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세상을 원망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더욱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으로 완성시켜 나갈 책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힘들여 조각해야 하는 조각품이요, 우리 스스로를 땀 흘리는 조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선을 배우는 중이요, 하느님을 향해서 하느님을 배우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은 우리의 갈 길이 아님을 뼈아픈 대가를 치르면서 배우는 중입니다. 이 과정이 인생이요, 이 과정을 제거한다면 인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똑같이 찍어 낸 생명력 없는 시장의 물건과 우리의 인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배우고 완성해야 할 시간이 길다고 해서, 고통스럽다고 해서 우리의 완성의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며, 내가 이만 하면 됐다고 해서 하느님의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시간을 "빨리 심판으로 결판을 내시오" 하고 하느님께 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이 구원받거나 같이 실패하는 공동체적 운명의 존재들입니다.

악이 세상에 있는 것은 신비입니다. 그 모든 신비의 내용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구약의 욥서는 인간이 겪는 악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과 가족들과 친구들의 외면이 그를 절망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욥은 거기서 절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더욱 깊게 체험하고,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악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원망하고 또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대처하는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를 공연히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끝까지 의심치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서는 기회를 주신다.
-
구경국 신부 -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 어느 학생이 나이가 지긋이 드신, 신앙심이 깊은 교수님을 찾아가 내세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잠시 숙고한 후에 교수님은 몇 분 정도면 충분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자신에게 앞으로 남은 수십 년의 세월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잠시 후 학생이 방을 나가려고 할 때 교수님은 갑자기 학생에게 그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를 아는지 물었습니다. 모른다는 학생의 대답에 교수님은 조용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내가 언제 죽는지를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이전의 며칠을 회개와 보속의 시간으로 비워두고, 나머지 시간에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아도 좋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가 될는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순간순간을 죽음을 대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을 대비하는 삶이란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멀리 하면서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평상시의 삶을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꾸려나가는 것에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을 대비하는 삶이란 종말에 대한 고려를 할 필요 없이 오늘을 주님의 뜻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의 태도는 도무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매 순간을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것 자체 만해도 우리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세상에는 복음에서 밀로 비유되고 있는 착한 사람과 가라지로 비유되는 그다지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신의 이익과 현세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부유하고 잘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현실은 우리를 더욱 더 힘들게 합니다. 이런 마당에 단지 세상 종말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는 말만으로는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밀로 비유되는 착한 사람이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이신 주인은 악인을 지칭하는 가라지를 당장에 뽑아 버리라고 명을 내리거나 스스로 나서서 가라지를 뽑아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라지를 제거하겠다는 종을 만류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우리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눈앞에 두고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을 것이 아니라 종말인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인의 말과 행동은 언뜻 듣기에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수긍할 수 없지만 또 묵상 중에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런대로 이해되어져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어차피 인간을 판단하는 것은 주님 고유의 몫이니 우리가 나설 수도, 나서서도 안 되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손수 가라지를 다 뽑으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고, 또 주인의 말대로 가라지를 서둘러 제거하려다 밀까지 상하게 할 위험도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인간의 눈으로 밀과 가라지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적대적인 계급이나 종족을 근절하여 순수하게 좋은 민족을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위 말하는 ‘인종 청소’라는 방법으로 저지른 범죄 행위보다 반인륜적인 범죄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 동안 밀과 가라지가 섞여있게 두는 것에서 생기는 문제가 가라지를 서둘러 제거하려다 생기는 위험보다도 적은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당장 가라지를 뽑지 않고 주인의 말처럼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좋은 사람이 일순간에 좋지 않게 변할 수 있듯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은총으로 불릴 수 있는 어떤 계기를 통하여 좋게 변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늘 좋은 것을 행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서 항상 좋게 변할 수 있으며 그 좋은 상태를 지속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서는 기회를 주십니다. 주변의 나쁜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마지막 날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효율성과 경쟁력      

-서현승 신부님-

 

 가라지를 솎아내는 일과 그대로 두는 일 중 어느 쪽이 소출을 많이 내는 데
더 유리할까요? 부지런한 농부라면 결론은 뻔합니다. 시간이 지난다 해서
가라지가 밀로 바뀌지 않을 테니, 빨리 뽑아버리는 것이 한 톨이라도
더 많은 곡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발적으로
가라지를 뽑는 수고를 감수하겠다고 나서는 종들을 가로막는 주인이 오히려
이상해 보입니다. 사실 효율성을 따지는 현대 사회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그대로 실천하려다간 도태되기 십상입니다. 변화를 뒤쫓기보다 선도해나가야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FTA 협정을
체결하려고 협상 중인 지금, 우리 농업도 하루 빨리 보다 효율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저가를 앞세운 캘리포니아산 칼로스쌀이
우리 식탁에서 외면당한 반면, 오히려 농약을 전혀 하지 않아 모양도
형편없는 유기농 쌀이 한 가마에 백여만 원씩에 팔렸다는 소식은 과연
효율성만이 정답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경쟁력 확보를 위해 될성부른
떡잎만 놓아두고 나머지는 재빨리 제거하려는 종들보다, 무녀리 같은 밀 이삭
하나라도 다칠까봐 차라리 적은 수확을 감수하려는 주인의 마음이,
우리 농촌과 각박한 우리 사회를 살리는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춘천교구 하화식 신부-

  

 가라지의 설명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을 수도 있다. 나는 가라지가 아니고 또 내 안에는 그런 가라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별 생각없이 듣고 말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제자들이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그 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가르쳐 주시면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또 어떻게 듣기에 그럴까? 의사 전달하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한다. 나는 분명히 이런 뜻으로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은 자기 식대로 알아듣거나 어떤 때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할 때도 있다. 참으로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은 진정 마음으로 듣는 것일 텐데….

그럴 때는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말하는 사람의 중심으로 마음을 옮겨야 한다. 또한 두 귀를 주신 하느님의 창조물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잘 듣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서로 대화 부족에서 오는 오해와 갈등이 급기야 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볼 때 정말 잘 듣는 습관을 가져야 하느님의 말씀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지 싶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보듯이 주님의 말씀은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선택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다. 모든 말씀의 결실을 맺고 안 맺는 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하느님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주셨기에 들을 귀를 더욱 곤두세워야 할 때이다. 오늘 하루도 다른 사람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장동현 신부-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지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살기 바빠 서로를 험하게 대하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대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악이 판치는 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의 어지러움을 하나씩
바로 잡아나가는 정의의 사도들이 있습니다.
서울에 사는 십여 명의 자매들이 일면식도 없는 광주의 우리 학생들을 위해
삼 년째 장학금을 보내옵니다. 장학금을 보내며 내건 조건은 단 하나.
가난한 아이를 도와주고 크게 이름을 내지 마라는 것입니다.
학생 하나가 왕따를 당해 우리에게 왔습니다. 새 학급의 학생들이 똘똘 뭉쳐
그 학생을 받아들이고 보호해주며 친구가 되어주는데 다들 사회사업가 같았습니다.
왕따를 당해 심하게 위축되어 있던 그 학생이 하도 활개를 쳐서 불러다 자제를
시켜야 할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라’(로마 12, 21)라고 권고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선이 판을 치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대구대교구 채홍락 (시몬) 신부-


 오늘은 강론에 앞서 이야기 한편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자면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할까요?’
스승이 대답합니다.
‘성서에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접대를 잘했고 그래서 하느님이 그와 함께하셨다.
엘리야는 기도하기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하느님이 그와 함께하셨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나라를 다스렸고 그래서 하느님이 그와 함께하셨다.’
‘저에게 맡겨진 일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있다. 네 마음속 가장 깊숙이 묻혀 있는 성향을 찾아내어 거기에 따르거라.’』
이 이야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저 자기 자신이 되라는,
다시 말해 ‘진정한 너 자신’이 되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그저 너 자신이 되라”는 말은 작은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대를 다른 누군가로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안간힘을 다하는 그런 세상에서,
그 누구도 아닌 그대 자신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인간이 치를 수 있는
가장 힘겹고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을 치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그리스 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길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데 필요한 세 가지 필수 요소는
‘약탈하고, 거짓말하고, 굽신거리는 것’이라 했고
초기 사막교부 실바누스는
‘가진 재능보다 더 큰 명성을 누리면 너희는 불행하다.’고 경고했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성공지향적이고, 거대지향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돋보이고 인정받고 찬사를 듣기 위해 세상에 영합하는 길을 걷게 되고,
‘그저 너 자신이 되라’는 말은 평범한 말, 별 볼일 없는 말처럼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성을 토마스 머튼은 직설적으로 경고합니다.
“그대가 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되어라.
미치광이, 주정뱅이, 온갖 부류의 잡놈 등 무엇이 되어도 좋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되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성공한 사람이다.”
이 말 속에는 로마서 12,2의 말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복음은 말합니다.
주인이 밭에 뿌린 것은 분명 좋은 씨였음을...
그러나 악마는 밤새 그 밀밭에 가라지도 함께 뿌려놓지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높아지거라. 성공하거라.
하느님처럼 되어라 라고 말입니다.
‘그저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말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를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진정 비범해지는 길이지요.

 

 추수기를 위하여
-부산교구 이시찬 다니엘 신부-


오늘의 예수님 말씀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뒤섞여 사는 세상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려면 거의가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혹은 신문에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매체를 대할 때마다 참으로 두렵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하는 것은 제 혼자만이 아니라 믿습니다.

매일 끊이지 않는 절도, 강도, 강간, 폭력, 살인, 사기, 권력형 부정축재 등등의 범죄를 볼 때마다 서양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이 한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왜 어떻게 선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악과 불행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적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가 살아 있는 한 계속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살면서 어찌 이다지도 악하고 비열하게 변해가는지, 또 하느님은 왜 그런 사람들을 멸하시지 않고 내버려두는지 정말 궁금하고 답답합니다. 이러다가는 이 세상에서 선이 사라지고 악이 만연할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성급한 생각 같아선 악한 무리가 당장 벌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해답을 주십니다. 세상이라는 밀밭에서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살아가지만, 밀밭의 추수 시기가 있는 것처럼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때를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악한 사람은 그때 그때마다 벌하시다가 행여나 착한 사람이 다칠까봐 세상 끝날까지 참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이라도 죽기보다는 회개하여 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배려와 지극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알아두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신앙면에서 보더라도 하느님 말씀의 씨가 우리 각자의 마음과 생활이라는 밭에서 잘 자라도록 도와 주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좋은 씨가 열매를 전혀 맺을 수 없도록 방해하거나 온전히 짓밟아 죽게 하는 세력도 있다는 것을 알고, 심판에 대비하여 우리 자신이 어느 편에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밀과 가라지가 싹트고 성장할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가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보기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좋은 밀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반대의 것도 있다는 겁니다. 꼭 천국에 와있어야 할 사람이 없고, 천국에 있을 수 없다는 사람이 와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전부를 우리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판단하고 평가하고 매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한 가지 행위나 생의 한 기간만이 아니라 전생애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 때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좋은 밀알이 될 수 있는 기간을 충분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훌륭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생각지 않은 때에 큰 죄를 범하고 그의 생애를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판은 우리 각 사람에게 예외없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심판이며 하느님만이 또한 올바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가라지 같은 사람이나 세력이 없어져 살기 좋은 천국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구성원의 한 사람인 내가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도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악인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각자의 마음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으며 무엇을 맺을 것인가를 깊이 살피며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빛나는 얼굴>

-양승국신부-


간간이 엄청 난감한 상황인데도, 주어진 여건이 너무나 열악한데도,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탈출구가 없는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래서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야단법석일 텐데,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로, 평상심을 전혀 잃지 않고 꿋꿋이 견뎌내는 사람들을 봅니다.


가끔씩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 앞에서, 버텨내기 힘겨운 고통 앞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도망가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당당히 직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의 얼굴을 뵐 때 마다 ‘그래 바로 저거였지’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어찌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 지나친 요구도 아닙니다.


시시각각으로 내게 다가오는 다양한 사건들, 특히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 앞에서 심호흡 크게 한번 하는 것입니다. 마음 한번 크게 먹는 일입니다. 한번 크게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하고 넓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최종적으로 추구할 얼굴은 바로 이 얼굴입니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얼굴입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은 어떠합니까?


저는 솔직히 거울을 한참 쳐다보며 엄청 슬퍼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세상살이에 닳아빠져 ‘삭은’ 얼굴, 권모술수를 꾸미는 교활한 얼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광채로 빛나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이 세상의 어둠과 용감하게 대적하기 위한 빛나는 의인의 얼굴, 세상의 악과 싸워나가기 위한 빛나는 의인의 얼굴, 우리 내면의 어둠과 당당하게 직면하기 위한 빛나는 의인의 얼굴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축복과 은총의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주님께 청합니다. 오늘 하루 어둠의 힘에 유혹받지 않기를... 그러기 위해서 나를 늘 빛 속에 머물게 도와주는 공동체로 끊임없이 돌아갈 것을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어둠의 세상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빛을 어둠의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에너지를 전달시켜주는 충전기와도 같은 공동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한 우리에게 더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 추수의 기본원칙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상세한 해설을 담은 대목이다. 무대는 군중을 떠나 야외에서 집안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해설은 오직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해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유 자체만큼 쉽게 이해된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며, 가라지는 악의 자녀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시고, 독을 품은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진 밀과 가라지를 주인이신 하느님은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그것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자칫 밀을 뽑아 낼 수도 있다는 주인의 염려와 배려 때문이다.(29-30절)

추수 때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가을에 잘 익은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뽑아 처분하는 것이 추수의 기본 원칙인즉, 세상의 종말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된다. 세상을 심판하실 인자(人子)는 천사들을 보내어 선인(善人)을 뽑아 아버지의 나라에 살게 하고, 악인(惡人)은 뽑아 모조리 불구덩이에 처넣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읽다보면 제자들이 바로 앞에 있었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31-33절)는 놔두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두고 가라지를 특히 강조하여 예수께 설명을 부탁한 점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왜 그랬을까? 밀과 가라지의 비유말씀이 마태오복음의 고유한 전승인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는 마태오복음공동체 안에 있었던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미 주지하고 있다시피 상당히 빠른 시일 안에 벌어질 세상종말과 최후심판의 도래, 그리고 인자의 재림(再臨)에 관한 기대는 초기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갖고 있었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지체현상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기대를 수정하게 된 것이다. 기대의 수정은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 공동체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완성이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학습하게 되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 선인과 악인이 세상 끝까지 공존한다는 것을, 악인을 섣불리 제거하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악인과 선인의 구분은 공동체의 소관이 아니라 재림하실 인자의 소관이라는 점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구성원의 관점은 자연히 세상종말에 가서 선인과 악인이 각각 받게 될 보상과 대우에 치우치게 된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세상종말에 비유된 추수 때의 일들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듯 하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경에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신앙인을 돌아보면, 우리 각자는 언제든지 좋은 밀알이 될 수도 있고, 가라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가라지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신앙생활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온갖 악의 요소들이다. 이런 악의 요소들은 이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확연히 드러났다.(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산책 참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뿌려진 씨앗을 이렇게 가꿀 수도 있고 저렇게 가꿀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예수께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를 악마로 규정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상 안에 분명히 악의 세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미 경험한 적이 많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악의 세력에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코 악이 선을 이길 수는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J. W. 괴테(1749-1832)가 쓴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를 감상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비유설교 안에서 좋은 밀알은 영원히 좋은 밀알로 남고, 가라지 또한 영원히 가라지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신앙의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성전(聖殿)을 마련하신 성령께서 그 변화를 도와주실 것이라 믿는다.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진 좋은 복음의 씨앗이 좋고 많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씨앗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인내와 끈기로 기다리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누구에게나 철저한 추수의 기본원칙이 적용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 36-43)

-유 광수신부-

 

 하늘 나라란 예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확장되고 건설되어지는 나라이다. 따라서 하늘 나라는 예수님이 현존하는 나라이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상이 실현되어지는 나라이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당신의 뜻과 이상을 말씀해 주시고 그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렇게 살도록 교육시키셨다. 이렇게 당신의 뜻을 전하고 그렇게 살도록 교육시켜 온 이들이 바로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며 이들이 바로 좋은 씨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과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이는 좋은 씨를 만들어 밭에 즉 세상에 뿌렸다. 그 이유는 좋은 씨인 하늘 나라의 자녀들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전하고 당신의 뜻대로 삶으로써 당신의 뜻이 실현되어지는 하늘 나라를 건설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의 뜻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라지라고 말씀하셨다. 밀과 가라지가 분명히 다르듯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목표가 다르고 행동이 다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조장하는 이를 악마라고 말씀하셨다. 악마란 예수님의 뜻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방해하고 훼방을 노는 자이다. 즉 하늘 나라의 건설을 방해하는 자요, 파괴하는 자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밭인 이 세상은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그것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악한 자의 자녀들과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어는 곳이든 그것이 세상이든 교회이든 또 거룩한 이들이 모여 산다고 하는 수도 공동체이든 성직자의 단체이든 또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모인 본당의 어느 단체이든 그리고 가정이든 그곳에는 반드시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법이다.

 

아무리 성인들이 모인 공동체이라도 聖人만 모인 곳도 없고 아무리 악한 이들이 모인 곳이라고 해도 악인들만 모여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밀과 가라지인 선인과 악인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 있다.

 

이런 와중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좋은 씨가 해야할 몫이 있다. 하늘 나라는 이미 건설되어 있는 곳에서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하늘 나라가 건설되지 않고 있는 악한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하늘 나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많은 반대 세력과 부딪쳐야 하고 그 세력들로부터 방해를 받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좋은 씨가 자라면서 겪는 어려움이요, 수고이다. 하늘 나라인 예수님도 이 세상에 하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반대 세력들로부터 많은 박해와 모욕과 저항 세력을 만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요한 15, 18)고 말씀하셨고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도 같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 하늘 나라r라 그들의 것이니.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 나라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12)라고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악한 자녀들 즉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 즉 예수님의 뜻과 이상을 전하고 보살피고 희생을 치루는 이들에 의해서 건설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악한 자녀들의 존재는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짐이며, 어려움이지만 또 한편 그들이 있기 때문에 좋은 씨인 하늘 나라의 자녀들은 더욱 튼튼하게 자랄 수 있으며 자신을 돌보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함께 공존하고 있는 악한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사랑해주고 용서해주고 인내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인 좋은 씨는 더욱 빛나게 자라고 마침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는 의인으로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운동도 어떻게 보면 적인 상대방이 있어야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되듯이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의인들인 하느님의 자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 있다고 해서 즉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하늘나라를 건설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좋은 씨인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 더욱 필요하며 하늘 나라의 자녀들의 존재가 빛나고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자녀들인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세상의 빛이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늘나라의 자녀들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악한 자녀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들 가운데에서 하늘나라의 자녀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돋보이게 하신 말씀이다.

하늘 나라의 자녀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표현한 말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악한 자녀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내가 하늘나라를 건설하지 못한다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만일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악한 자녀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씨를 뿌리시는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늘나라의 자녀로서 존재하기를 포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악한 자녀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고통을 나누며 그들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나의 영적 투쟁이 부족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에 웃는 이가 승리하는 이다. 마지막까지 달리는 자만이 승리의 월계관을 받을 자격이 있다. 마지막 날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의인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어야 한다. 이상이 있어야 한다.

 

한번뿐인 내 인생의 꿈이 없다면 그리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나의 이상형이 없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했다. 물론 완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완성시켜야할 작품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드릴 봉헌물인 선물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인 나의 모습을 하느님을 닮도록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그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악한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선한 행동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나의 모습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의인의 모습이다.

 

바오로는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 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 가짐으로 살아 가야 합니다."(필립 3, 12-15)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