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8월 1일 수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Margaret K 2007. 8. 1. 05:04

  2007년 8월 1일 수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알폰소 성인은 17세기 중엽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왕궁의 배를 모는 선장이었다.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약하던 알폰소는 큰 실수를 체험한 뒤 변호사를 포기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30세에 사제가 된 그는 선교 사제로 일하다가 훗날 일생을 헌신하게 될 수도회를 창립하여 설교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알폰소 성인은 주교가 되었으나 곧 수도회로 돌아가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성인은 특히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고 있다.

☆☆☆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13,44)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treasure buried in a field,
which a person finds and hides again,
and out of joy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that field.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러나 정보를 입수한 자만이 그 밭에 관심을 가진다. 숨겨진 보물이 엄청난 것임을 알게 되면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밭을 살 것이다. 우리 역시 신앙의 보물에 대하여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되는지 깨닫는다면 정성을 다하게 될 것이다

 

☆☆☆

 

 ‘억대 거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찰은 없지만 가진 땅이 억대를 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특히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지나 공장 부지로 선정되면 살 사람이 줄을 섭니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사람은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재빨리 사려고 합니다.
요즘은 부동산뿐 아니라 골동품이나 미술품에 투자를 하여 큰돈을 버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투자의 귀재’라 부르며 부러워합니다. 그들의 재주는 다름 아닌 정보입니다. 추측이건 과학적인 분석이건 그들은 자신의 정보에 확신을 가집니다. 그러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쏟는 열정과 노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합니다. 복음은 엄청난 정보를 알려 주므로 빨리 그 밭을 매입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삶이 결코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보물이 숨겨진 땅을 지녔으니 사는 것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도 내 삶의 보물이라는 확신을 가지도록 노력합시다.

 

 

새벽을 열며

 

 1+2는 얼마일까요? 3이지요? 그러면 1+2+3은? 6입니다. 이제 1+2+3+4는? 10이지요. 그렇다면 1부터 10까지 차례로 더하면 몇 일까요? 조금 복잡합니다. 하지만 금방 55라는 답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제 1부터 20까지를 더하면 몇 일까요? 시간이 좀 걸리지요? 답은 210입니다. 그러면 1부터 40까지 더하면? 이것을 언제 다 더하냐고요? 답은 820입니다. 이제 마지막 문제. 1부터 200까지 더하면 몇 일까요? 답은 20,100입니다.

제가 차례대로 더해서 이 답을 찾았을까요? 아니면 책에 나와 있는 정답을 그대로 적었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약간의 법칙을 생각하면 누구나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1부터 10까지를 계산한다면 ‘1+2+3+……+9+10=55’식으로 계산하겠지요. 그러나 유명한 수학자 가우스는 그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10=11, 2+9=11 …… 5+6=11 이기 때문에 11을 다섯 번 더하면 55가 된다.’는 보다 경제적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이 방법을 적용하면 1부터 200까지 더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201을 100번 더하면 되니까 201 X 100 = 201,00 이라는 답이 쉽게 나오게 되지요. 이처럼 뒤의 숫자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이 법칙만 잘 응용하면 쉽고 빠르게 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차례대로라는 방법만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그 뒤의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겁을 먹고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레 겁먹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들은 온갖 걱정들 사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겁먹지 말라고, 장차 우리가 추구할 미래에 있을 하느님 나라는 걱정만 한다고 얻어지는 나라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을 찾은 사람, 좋은 진주를 찾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비유 말씀을 보면서 과연 이들이 의로운 사람일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정직하지 않은 그래서 불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보물을 찾았으면 그 보물이 묻혀 있는 밭주인에게 말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진주 하나 사겠다고 자신의 전 재산을 처분하는 허영심은 버려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 허영심이 많은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보물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걱정만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들, 특히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법칙을 지금 당장 실천할 때에 하느님 나라는 쉽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이 미룹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레 겁먹고 걱정하면서 뒤로만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잠시 뒤에, 내일에, 다음 주에, 내년에…….' 라는 식의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는 사이에 하늘나라의 보물은 내 몫이 아니라, 다른 이의 몫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겁먹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내게 값진 보물      

-임문철 신부-


 내년이면 은경축을 맞는 저에게 사제 서품을 제외하고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을
꼽으라면 주저 않고 서품 직전에 참석했던 성령세미나를 꼽을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요. 저는 신부가 되면
우리 교구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운동을 제대로 잡아보겠다는 자세로 세미나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성령이라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날 첫 시간 성체조배 때에 하느님께서는 요나처럼 이리 저리 도망 다니는
저를 붙잡아 신부를 만드시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소신학교 때부터 그날 그 순간까지 제가 그 많은 성소의 위기들을 어떻게 넘길 수 있었는지,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사랑의 손길이었음이 주마등처럼 제 눈앞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다 부질없어
보였습니다. 돈 보스코 같은 성인 신부, 토착화에 기여하는 신학자 등
어려서부터 가져왔던 저의 모든 꿈들도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을
신자들과 같이 나누며 사는 것만이 제게 의미 있는 유일한 것이 되었습니다.
깨달으면 모든 게 달라진다는 것을 경험한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나의 보석

-이인주 신부(예수회)-


 어느 날 한 스님이 집에 들러 어머니와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셨다. 스님은 나를 보더니 어머니에게 “아드님이 인물은 좋은데 서른을 넘기기가 힘들겠습니다.” 하며 혀를 끌끌 차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너무 놀라 눈이 화등잔만해지시더니 스님께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들이 오래 살 수 있을까요?” “정성을 드리셔야죠.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어머니는 당장 광으로 뛰어가 쌀 몇 말을 가져다 보시를 했다. 유난히 몸이 약한 아들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나를 바치신 셈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여기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그때 나를 하느님께 맡기신 것이다. ‘하느님의 것’이 되려고 그랬는지 나는 늘 마음이 허전했다. 마음 한구석이 늘 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를 찾아 나섰지만 채워지지 않았다. 여러 직장과 학교를 맴돌고 술도 마시고 책과 씨름해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러던 중 내 눈을 뜨게 한 사건이 있었다. 어른 같은 아이! 몸집은 어른이지만 지능이 모자라 차별받는 어른아이가 있었다. 그는 추운 겨울날 뒤를 못 가린다고 찬물 세례를 받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오는 담장 너머로 본 이 광경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그러면서 ‘왜 다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달라야 하고, 차별받아야 하나? 누가 이걸 해결하는가? 하느님은 왜 이런 불공평에 침묵하고 계시는가?’를 질문했다. 그리고 직장에 사표를 냈다. 일주일 동안 앓고 난 후 주변을 정리했다. ‘어른아이 속에서 보석을 발견했으니 떠나자. 그리고 그분의 사람이 되어보자.’ 이것이 내가 발견한 보석, 반짝이는 영롱한 꿈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제이지만 그래도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살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석의 밭을 보며 기도해 본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이며 좋은 진주를....

-부산교구 강종석 신부-


오늘 말씀은 하늘나라의 비유 두 가지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이며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꾼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밭에 묻혀있는 보물은 먼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점은 좋은 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진주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값진 보석입니다. 하늘나라는 감추어져 있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값진 보석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그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또 찾아다니는 사람에게 발견되고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손도 대지 않고 감이 저절로 떨어져 제 입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도, 좋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도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자신의 소유를 다 합친 것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늘나라는 보물과 같이 소중하고 이를 발견하고자, 찾고자 애쓰는 자의 행운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당연히 하느님을 선택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은 진실로 그것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보물은 자기가 가진 것을 통틀어도 결코 능가할 수 없는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풍요롭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완전합니다. 그 분은 완전한 평화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천 날 보다 하느님과의 하루가 더 좋고, 세상의 영예보다 하느님의 인정이 더 좋고, 세상의 상 보다 하느님의 상급이 더 좋고, 세상의 화려한 꽃보다 하느님이 알아주시는 들꽃이 더 좋고,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대 데레사 성녀는 그의 자서전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목숨이나 명예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느님 사랑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던진 이는 이 보화의 맛을 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물 중의 보물이 하느님의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애써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로 옆에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애써 찾으려고 그것도 세상 어느 것과 견줄 주 없는 보물과 같은 하늘나라를 우리가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부와 명예나 여타의 것에만 만족하고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는 스스로의 눈을 감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은 하늘나라는 찾고자 하는 자는 얻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 깨치려고 애쓰는 사람, 성당을 다녀도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려는 노력하는 사람, 기도를 해도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고 신앙에 있어서도 많은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을 저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찾고 애쓰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 후에 조금 더

- 장동현 신부-


며칠 전 대중가요 가수들이 출연한 음악회에 다녀왔습니다. 노래를 세 곡씩 부르고
중간에 인사말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유명 가수도 몇 명 왔는데
한 가수에게 많이 실망했습니다. 연습부족인지 고음 부분에서 목소리가 갈라져
듣기가 거북했습니다. 인사말을 할 때도 지극히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하는 것이
영 성의가 없어보였습니다. 유명세를 깎아먹는 모습이었습니다.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노래하는 가수도
있었습니다. 인사말도 잘 준비해서 관객들 모두를 흐뭇하게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참 좋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되게 하고 예수님이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시시한 것에는 억만금을 퍼부어대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약간의 시간도 아까워하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어떤 성인이 말했습니다.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조금 더!’

 

-춘천교구 하화식 신부-


 보물찾기를 가끔 할 때가 있다. 숲을 헤치고 돌을 뒤집으면서 아니면 나뭇가지에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도 기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일까 기다리는 마음이 더 기쁘기도 하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축소해 보면 보물찾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인의 삶은 어쩌면 보물을 찾아 나서는 것과 같은데 보물을 찾게 되면 그때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기쁠 것이다. 그런데 게으르고 편안한 마음으로만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면 결국 얻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을 빼앗기고 찾아 얻는 기쁨이 없어 우울하고 자기 자신 안에만 갇히게 된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가 그 보물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 없이 결실은 결코 없는 것이니 오늘 하루도 하느님 나라 보물찾기에 앞장서서 어떤 보물을 찾아냈는지 마지막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감사와 기쁨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참 믿음의 사람은 늘 이렇게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목적이 뚜렷하기에 하루를 살아가는 동기가 강해지며 그렇기에 하루의 삶이 창의적이고 생산적 삶의 결과를 낳는 아름다운 나날이 계속 될 것이다. 오늘 하루도 기쁨을 만들어 가는 보물찾기에 전념하도록 하자.

 

 

-대구대교구 채홍락(시몬)신부-

 

 한 소경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방키라는 이름을 가진 禪의 대가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목소리로 진실성을 판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의 성공을 축하하는 말을 들을 때면
대체로 그 목소리에서 시샘을 감지하곤 하며,
애도를 표시하는 말을 들을 때는
은밀하게 깔려 있는 쾌감의 음색을 알아차리곤 하지요.
그러나 방키 당신의 경우는 다릅니다.
당신이 행복을 표현할 때는 목소리가 온전히 행복에 젖어 있고,
슬픔을 표현할 때는 내 귀에 전달되는 것도 온통 슬픔뿐입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2고린 4,7).”
그러므로 ‘자신의 참모습으로 돌아간다’, ‘평범성을 간직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핑계나 방어, 시샘이나 경쟁심에 힘을 소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바로 그것이지요.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탄생을 대단한 창조만큼이나 고귀한 사건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며 사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또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세상의 가치에 영합하여 적당히 타협하고,
돋보이고, 인정받고 찬사를 듣기 위해 살아간다면,
그래서 나 아닌 다른 것이 되어 살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속에 담아주신 보물을 찾기나 할까요?
그 무엇보다 값진 진주를 발견하기나 할까요?
아니 제 속에 얼마마한 보물과 진주가 숨겨져 있는지
그 가치만이라도 제대로 짐작할 수 있을까요?
짐작 못하겠지요. 모르니 기쁘지도 않고, 기뻐할 수도 없을 것이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 생각도 살 생각도 하지 않겠지요.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부산교구 이차룡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보물과 진주의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셨을까요? 보물을 발견한 기쁨, 값진 진주를 발견한 기쁨이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땅 속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 농부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아 자기의 소유물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보잘것없게 됩니다.

보물의 발견은 일생일대의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가난한 농부는 집으로 돌아와 그 밭을 사기로 결단을 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처분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미쳤다고 수군거렸지만 본인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찾아 얻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참 기쁨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결단을 내리고,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파스칼은 하느님 편에 서는 도박은 잃는 도박이 절대로 아니고, 아무 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온전히 이기는 도박이라고 말했습니다. 농부가 지금까지 소유한 모든 것은 발견한 보물에 비해 보잘것없으며 발견한 보물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보물과 진주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가장 귀하게 여겼던 어떤 것이라도 무조건 버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소유한 어떤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보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신앙인은 보물보다 더 귀한 주님을 발견한 기쁨을 간직하고 살아갑니까? 저는 가톨릭 성가 61번을 즐겨 부릅니다. 이 성가는 참으로 은혜롭고 생기가 넘치는 노래입니다. 한 번 불러 볼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그렇습니다. 세상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전부이시고 모든 것입니다. 그분을 얻은 사람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행복한 사람이고 그분을 잃은 사람은 이 세상 모든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릴지라도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천상보물인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 어느 것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사람은 최고의 보물을 찾았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과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하며 온 천하를 다 얻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이시고 목적이시며 모든 문제의 해결사이십니다. 어떤 예비신자가 처음 미사에 참례하였는데 신자들의 얼굴이 수심에 가득 싸여 기쁨이 없이 무표정한 모습을 보고 천국이 저렇게 기쁨이 없고 재미가 없다면 나는 성당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세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함으로 기쁘세요? 성당에 가는 발길이 가볍고 즐거우세요?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며 언제나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은 복되십니다.

그러나 성당에 가도 재미없고 기도하면 하품이 나고 성경 읽으면 잠만 오는 사람, 신앙생활이 짐스럽고 부담스러우신 분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꾸르실료나 성령묵상회나 성서 40주간 등 성서공부나 피정을 통해 영적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 말을 들으시고 실천하시는 분은 하늘나라의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보물을 주시려고 하나 우리의 마음이 열리지 않고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자 원하지 않기에 못 받을 뿐입니다. 영적인 보물에 대해서는 욕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과 동기가 우리를 성인으로 만들게 됩니다.

천국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매일 매일을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곳에서나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느님이시기에 늘 깨어 기도하며 하늘나라 보물을 잃지 말고 또 그 보물을 모르는 이에게도 보물을 찾을 수 있도록 보물지도를 가르쳐 주는 것은 복 받을 일입니다.

한 여름에도 참 보물이신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며 복음의 씨를 뿌리는 농부가 됩시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양승국신부-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하더라도>


가끔씩 지극한 정성으로 ‘그 뭔가’를 열심히 수집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우표수집으로부터 시작해서 외국돈수집, 병뚜껑수집, 성냥갑수집, 열쇠고리수집, 지나간 만화수집, 과자 상표수집, 옛날 음반수집... 정말 다양합니다.


그분들 가만히 생각해보니 훌륭한 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지난 우리의 역사를 수집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우리의 지난 추억들을 수집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우리의 삶을 정리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이런 분들도 만납니다.


거의 전 재산을 다 바쳐 ‘그 뭔가’를 수집합니다. 어디 ‘좋은 물건’ 나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 물건을 손에 넣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그 물건이 어디 있든 상관없습니다. 얼마나 비싸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물건을 획득하기까지는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뭔가’를 손에 넣고 난 후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하늘나라에 대한 교훈 역시 비슷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중요한 것’ 하늘나라를 위해 우리의 총력을 기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할지라도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얻는다할지라도 단 하나를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나라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들 수집했다 할지라도, 아무리 소중한 것들을 손에 넣었다할지라도 하늘나라를 얻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종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실패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목표들 가운데, 별 의미 없는 것들은 옆으로 밀쳐두고 우리 일생 일대 가장 중요한 것, 하늘나라를 가장 중심에 두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표수집도 좋습니다. 화폐수집도 좋습니다. 음반수집도 좋습니다. 연예인 사진 수집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가장 첫째가는 수집 대상 물품은 바로 하늘나라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 부산교구 이영훈 신부 -


절벽에 매달려 있는 사람 있다. 그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는데, 가방에는 맛있는 음식과 새로 산 최고급 등산복, 각 종 신용카드, 최신형 카메라, 자동차, 아파트 열쇠, 부와 권력을 담고 있는 각종 회원권과 신분증 등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의 손은 그 어디에도 아닌, 바로 별 볼 일 없는 밧줄을 잡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당연히 이 밧줄을 놓는 그 순간 그는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지금 그에게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것은 맛있는 음식도, 좋은 옷도, 돈도 아니라, 바로 밧줄 하나가 절실히 필요하고,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만약 그가 평소 생각처럼 밧줄을 그리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음식을 먹으려고, 옷을 입으려고, 돈을 만지려고 밧줄에서 손을 놓는 그 순간 그는 죽음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오히려 그가 살기 위해서는 무거운 가방을 던져 버려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바로 커다란 가방을 메고 절벽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다. 밧줄에 자신의 목숨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힘을 다해 그 밧줄을 잡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가방 속에 있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 밧줄을 놓고 가방 속에 있는 것을 잡으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입장에서 밧줄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리고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더 소중하겠지만, 내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 그 줄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보물이며, 생명 자체이며, 희망이다. 그러면 우리가 절대 놓아선 안 될 줄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가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될 생명줄이다. 삶의 행복과 영원함을 바라는 우리에게 이것은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보고 있고, 정말 소중히 받아들이며 간직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주신 그 모든 사랑과 은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얼마나 감사드리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보여 주신 그 사랑의 길을 정말 사랑하고 그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밭에서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평소 보아 온 그 밭을 그리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고선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얻는다. 그 사람처럼 이미 우리는 복음이 세상에 숨겨져 있는 최고, 최상의 보물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복음을 얻고자 그리고 사랑하고자, 실천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걸까? 예수님의 말씀과 삶만이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사는 사람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그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려고 하지 않고 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가? 세상의 이윤을 얻는 데에는 날쌘 독수리와 끈질긴 진돗개와 같으면서도 왜 하느님 나라를 얻고자 하는 데에는 태평세월일까?
  우리 앞에 하느님 나라 열쇠가 있다. 이미 우리 손 안에 그 열쇠가 있다. 그런데 그 열쇠는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무겁다.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을 힘도 모자라고 여유가 없는데 어디에 신경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또 무엇을 얻으려고 천국의 열쇠마저도 던져 버리려고 하는가?  우리의 선택과 결정은 무엇인가?



 보물과 진주

-강영구신부-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또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대에게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가 생각납니다.
문부성의 하급관리 루아젤의 부인 마틸드는 친구 포레스티에로부터 빌린 가짜 보석 목걸이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모조품인지도 모르고 빚을 내어 꼭 같은 목걸이를 사서 되돌려줍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빚을 갚기 위해 하녀처럼 온갖 궂은일을 하다가 폭삭 늙고 만다는 줄거리입니다.
사치와 허영심이 인간을 어떻게 눈멀게 하고,
어떻게 허망하게 젊음과 세월을 낭비하게 하는가를 잘 말해주는 단편입니다.

보석감정사는 진짜와 가짜 보석을 가려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값비싸고 고귀한 것일수록 가짜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진짜 보석과 진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탐욕, 어리석음, 허영심, 미움과 증오, 자기과시 따위는 사람을 눈멀게 하여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눈먼 사람은 엉뚱한 가짜에 매달려서 시간과 젊음과 정력을 낭비하고, 하늘나라마저도 잃게 됩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맑고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은 진짜 보석과 진주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진주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보물과 진주에 비유된 하느님 나라

-박상대 신부-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께서는 군중을 떠나 다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다. 밀과 가라지가 성장기간에는 서로 섞여 자라지만 추수 때가 되면 철저한 추수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가라지 비유의 설명 안에는 마음의 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성장하는 동안에 주어지는 가능한 모든 여건과 조건을 잘 활용하여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경고와 독려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밀알이 좋은 밭에 뿌려졌다 하더라도 그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추수 때 따로 묶여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가라지의 신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따라서 신앙인이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잘 깨닫고, 깨달은 바를 실제로 실천하며, 그 나라를 세상의 무엇보다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또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마태 25,34) 모든 것을 다 바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강제나 의무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강요되는 나라가 아니라 죄와 악으로부터 해방된 백성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선물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만이 그 진실을 알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의 두 가지 비유는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비유설교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마태오복음 고유의 비유로서 아주 짤막한 문장으로 비유가 원하는 명쾌한 뜻을 전달하고 있다.

‘보물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고는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이 묻혀 있는 그 밭을 산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하루의 노동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가난한 소작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지주(地主)의 밭을 갈다 보물을 발견하고는 다시 묻어둔다. 보물이 묻혀있는 그 밭이 자기 소유가 아니므로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자기 소유로 만든다는 것이다.

‘진주의 비유’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다가 좋은 진주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떤 장사꾼’은 앞의 소작인과는 달리 장사를 통해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진 부자일 수도 있다. 그가 늘 좋은 진주를 찾아다닌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구도자에 비유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보물과 진주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언어(比喩言語)라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가 보물이나 진주 그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참고로 비유(比喩)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원관념)을 다른 대상(보조관념)에 빗대어 나타내는 것을 말하며, 그런 방식을 비유법이라 한다. 비유법(比喩法)에는 직유법(直喩法), 은유법(隱喩法), 환유법(換喩法), 제유법(提喩法), 대유법(代喩法) 등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직유법은 “대나무처럼 키가 큰 사람”, 은유법은 “내 마음은 호수다.”, 환유법은 “나는 괴테를 모두 읽었다.”, 제유법은 “바다에 돛이 떠 있다.”, 그리고 대유법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백의의 천사” 등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비유를 대하면서 조심해야 할 점은, 자칫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귀한 보물이나 값진 진주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을 그런 좋은 보물이나 진주, 즉 귀한 물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그런 보물과 진주에 빗대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다고 하셨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은유법(隱喩法)임을 알아야 한다.

하늘나라와 보물(진주)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보물이 귀한 것이고 좋은 것이므로 하늘나라를 보물에 비길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결코 인간의 소유가능한 대상물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소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더욱 더 그렇다. 하느님은 사물(事物, res)이 아니라 위격(位格, persona)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위격이시라는 말은 마치 인간이 가진 인격(人格)과 흡사하다. 인격은 인간에게서 비교적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성격이나 경향, 또는 자아의식으로서 하느님의 위격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이 돈으로 몸을 살 수 있어도 마음을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위격도 그런 것이다. 하느님의 위격은 오직 그분과의 친밀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그 공동체 안에서 그분의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느님의 나라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하고 소중하게 깨닫고 사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 깨달음을 얻은 자는 가난한 소작인처럼 보물을 발견하고 그렇게 기뻐하면서(44절)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것이다.........◆

 

 

 <숨겨진 보물>(마태 13,44-46)

- 유광수 신부-


한 수피 선생이 집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그는 그 열쇠를 밖의 잔디밭에서 찾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손가락으로 잔디 잎사귀 사이사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의 제자 여남은 명이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집 열쇠를 잃어버렸네."


"저희도 함께 찾아볼까요?" "그래 주면 좋겠구먼."하고 스승은 대답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무릎으로 기며 손가락으로 잔디 잎 사이사이를 뒤졌다.


해가 떠서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그 중 영리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그 열쇠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 선생은 대답했다. "물론 알고 말고. 집 안에서 잃어버렸지."


그러자 제자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집 밖에서 찾습니까?"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야 분명하지 않은가, 여기가 더 밝거든."

 

우리 모두는 집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집 안에서

 

살고 있지 않고 밖에서 찾고 밖에서 헤메고 있다.

 

 

하늘 나라란 행복한 나라이다. 우리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하늘 나라를 발견하면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찾아 나서고자 하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여기 저기 행복을 찾아 헤메이고 있기 때문에 바쁘다.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고,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여기 가서 무엇을 듣고 보고, 저기 가서 듣고 보고 하자니 얼마나 바쁜가? 열쇠를 잃어버렸으나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른 채 엉뚱한 데에서 열쇠를 찾느냐고 모두들 부산을 떨고 있다.

 

우리가 하늘 나라(행복)를 발견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하늘 나라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즉 하늘 나라를 찾아 나서야 한다. 찾아 나서지 않으면 절대로 발견될 수 없다. 하늘 나를 찾아나서는 자 만이 발견할 수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이 흡족하리니."(마태 5,6)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늘 나라를 찾고자 하는 주림과 목마름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발견 될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늘 나라를 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순례자 또는 求道者라고 할 수 있다. 안주하고 있는 이는 결코 하늘 나라를 발견할 수 없다.


둘째 하늘 나라가 무엇인가 즉 찾고자 하는 보물 또는 값진 진주가 무엇인가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나서지만 무엇이 보물인지 값진 진주를 모르기 때문에 하늘 나라가 아닌 다른 것을 찾고 있다. 하늘 나라인 숨겨진 보물 또는 값진 진주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오로는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가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 3,8-10)라고 말씀하셨고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 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수피 선생처럼 집안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듯이 보물을 숨겨둔 곳이 어디인지 값진 진주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알아야 찾아 낼 수 있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은 복음이다. 복음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보물을 발견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 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활동에서 또는 일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하늘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복음은 하늘 나라를 찾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늘 나라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 나라를 발견하면 어떻게 되는가?

 

첫째, 우선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그토록 찾고자 했던 보물을 발견한 데에서 오는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 기쁨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요, 하늘 나라를 차지 발견한 자만이 누리는 기쁨이다.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 임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시편 33,10)


둘째, 마음에 평화를 얻는다. 찾고자 했던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욕망이 없다.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평화로워 진다. 어떤 곳에 있든 불안하지 않고 늘 평화롭다. 그리고 고요 속에 머문다. 고요 속에 머물면서 주님을 보고 맛들이고 음미한다.


셋째, 충만함을 느낀다. 찾고자 했던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에 만족스럽고 충만해진다. 그래서 더 이상 배 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외롭지 않다. 충만하니까. 늘 여유가 있고 관대해진다. 짜증 내지 않는다.

왜? 충만하니까.


넷째, 불필요한 것을 버린다. 찾고자 했던 것을 발견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별견한 보물만으로도 배부르고 충만한데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버리는 일은 즐거움이다. 아니 버리라고 하지 않아도 버리게 된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값진 진주를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물은 결코 멀리 있는 곳에 있지 않다. 값진 진주는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복음인 바로 여기에 지금이라도 찾아 나서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발견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이미 그 보물을 발견하고 충만함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보물을 발견 한데에서 오는 기쁨과 충만함과 관대함과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 때 가장 좋은 복음선포요,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축복에로 불리움 받은 복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