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7. 30. 07:12

  200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that a person took and sowed in a field.
It is 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yet when full-grown it is the largest of plants.
It becomes a large bush,
and the ‘birds of the sky come

and dwell in its branches.’”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만큼 작아 보인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자라면 새들이 깃들 만큼 큰 나무가 된다. 작은 선행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베푼다면 축복으로 되돌아온다. 작은 기도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큰 응답으로 되돌아온다

 

☆☆☆

 

 어릴 적 이솝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예언자들도 그러한 비유로써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거나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많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복음에는 예수님의 40여 가지 비유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비유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알아듣기 쉽게 하며, 기억 속에 오래 남게 해 줍니다. 밭에 묻힌 보물 이야기는 우리가 중요한 것을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빚진 탈렌트를 탕감해 주는 임금의 이야기는 하느님께 용서받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왜 용서해야 하는지 이해시켜 줍니다. 돌아온 아들을 용서해 주는 아버지 이야기는 우리가 잘못했을지라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자 다가가야 하는 이유를 잘 알려 줍니다. 비유는 정말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비유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 뜻이 깊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책에서 본 이야기 하나를 적어 봅니다. 한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이 학생은 학교 성적도 매우 우수했으며, 집안에서도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는 혼자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진도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학교 수업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별 생각 없이 친구들 앞에서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게 되었데요.

이 말을 전해들은 친구들은 “거짓말이지? 너 공부 잘한다는 것 티내려고 그런 말하는 거지?”라고 말하면서 정말로 안 다닐 것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엉겁결에 “거짓말 아니야. 나에게는 학교 수업이 의미가 없어. 따라서 학교를 그만둘 거야.”라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이 다른 많은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고, 담임선생님에게도 전해졌으며 급기야 부모님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이제 분위기는 자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고 말았으며, 결국 이 학생은 자퇴를 했다고 하네요. 바로 아무 생각 없이 내 뱉은 말 한 마디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학교생활을 그만 둘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말 한 마디가 나를 비롯해서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문득 제가 어렸을 때 성당을 다니면서 복사를 섰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그 당시의 신부님께서 복사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어요.

“아니, 이렇게 큰 성당에 이제까지 신부님 한 분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니? 따라서 너희 복사들이 이 성당의 첫 번째 신부님이 되어 봐라.”

저는 그때 다짐했지요. 이 본당의 첫 번째 신부님이 되겠다고……. 그런데 이 말을 들었던 복사 중에 10명이 지금 인천교구의 신부님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말 한 마디가 이렇게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요. 그렇다면 하늘나라가 겨자씨와 누룩처럼 조그맣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껴지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힘이 있음을 바로 모든 이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말 한마디가 사람을 망하게도 또한 살리게도 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신비는 겉으로는 아주 작고 미미해 보여도 우리들의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더없이 크신 일들은 거창한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평범한 장소와 시간에 하느님의 신비는 은밀하게 드러나도 있습니다. 내 가족 안에서, 내 친구들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우연히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는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이제 우리들의 삶 안에 숨어 있는 그 하늘나라의 신비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일상의 삶 안에 숨어있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찾는 오늘이 됩시다.

 빠다킹신부

 

 

   내일은 다릅니다.     

-남상근 신부-


 겨자씨는 성장의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누룩은 팽창시킬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성장하고 팽창할 내일을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지나치기 쉬운 것이고,
보잘것없기 짝이 없음에도, 내일도 그러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내일은 다를 것입니다. 이번만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겨자씨가 싹이 트려면 휴면의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누룩이 밀가루를
팽창시키려면 발효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휴면과 발효의 시간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어서 불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 삶에서 불필요한 시간이란 없습니다.
어두움이 가득한 시간은 성장의 미래를 위해 땅에 묻혀 있는 시간입니다.
숨겨져서 드러나지 않는 시간은 팽창의 내일을 기다리며 밀가루에
고루 섞이는 시간입니다. 미래를 품고 있고, 내일을 끌어안고 있기에,
오늘은 참 소중하고 탁월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임인자(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 사무국장)-


 김태일 감독의 ‘안녕, 사요나라’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일본강점기 때 강제징집으로 일본에 끌려가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오기 위한 딸 이희자씨의 이야기입니다. 일본 정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일본인 후루카와씨는 계속 이야기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만행을 사죄하고 또 사죄합니다. 이희자씨는 이런 일본인을 만나면서 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함께 행동하게 됩니다. 평화의 길은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반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 동네가 생각났습니다. 탄광촌이었던 이곳에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가 들어온 지도 벌써 7년이 됩니다. 우리 동네는 참 슬픈 동네입니다. 예전엔 갱내 사고로 사람들이 죽었고, 이제는 카지노 때문에 도박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며칠 전 또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올해 들어서 벌써 네 번째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께 너무 미안했습니다. 혼자서 외롭게 죽어갈 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도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면서 먹고살아야 하는가? 너무 오랫동안 외면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을 그렇게 외롭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도움을 청할 때 함께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신부님과 목사님들, 지역의 뜻있는 분들과 함께 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을 지난 5월에 열었고, 저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겨자씨처럼 미약하지만 당신들이 흘릴 눈물과 외로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은 하늘처럼 크다고.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을 혼자 울게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런 작은 노력이 이 지역에 희망을 심고, 평화로 가는 길의 시작이라고.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작은 힘을 보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 하신 말씀처럼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 참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약속을 해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
강종석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나라의 비유로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비유는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해주고 또한 내용의 진수도 그대로 전달해 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늘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들어봅시다.

먼저 하늘나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그 뜻이 알 듯 모를 듯 한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하늘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잠시 역사를 더듬어보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요, 나라입니다. 그러나 왕들의 역사가 하느님을 배신하는 일이 많았고, 결국 아시리아, 바빌론의 유배라는 뼈아픈 체험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주변의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전하며, 그들의 신앙생활이 침해되고, 예루살렘성전에 이방국가의 우상이 세워지는 치욕과 신앙이 박해를 받는 억울함을 당하다가, 예언이 주어지기를, 하느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가 세워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약속입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원을 들어주시는 그러한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주신 강생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씨앗 가운데 가장 작지만, 커져서 공중의 새가 날아와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하늘나라는, 시작은 가장 작게 출발해도 가장 풍요로운 성장과 변화가 약속된 세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늘나라에 속해 있어 이미 이 풍요로운 변화에 속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 변화를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누룩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그 변화는 전체를 변화시킨 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부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요, 그것은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시작은 부분에서 그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 전체를 완성시키려는 계획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통치로 이 세상은 하늘나라가 시작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완성을 함께 기다리며, 그 과정 중의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이상의 예수님의 비유를 현실 속에서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과거의 내가 아니라 오늘도 겨자씨의 비유처럼 주님의 은총으로 변화되는 또 풍요로운 결실로써 응답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결실의 원인은 당연히 하느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누룩처럼 전체가 영향을 받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 발만 내디딘 것이 아니라 두 발로, 머리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심장과 내 몸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전체가 완성되고 전체가 구원받는 것이 하늘나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이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를 쉽게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풍요로운 기적들과 많은 사람들의 회심과 하느님께 줄기차게 나아가는 모습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증거하는 증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겨자 나무이고, 누룩이 들어 있어 부풀리고 있는 밀가루 반죽과도 같습니다. 하늘나라를 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정말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앙인이 많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더욱 정진하고 발전합시다.
안녕히 계십시오............◆

 

 

 겨자씨와 같은 우리의 작은 사랑을 원하시는 하느님
-
구경국 신부 -


신학대학 편입시험에 합격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학교동아리 후배들과 함께 환송회를 겸하여 광안리 바닷가로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신학교로 편입한 사실이 주제로 등장하면서 누군가가 저에게 무엇 때문에 신부가 되려고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물어 왔습니다.

신부가 되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군복무시절을 거쳐 드디어 편입을 하게 된 꽤나 긴 시간동안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께 심취되어 있었으므로 주저 없이 성인께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였는가를 아주 짧게 전해 주는 것으로써 신부가 되려는 이유를 설명을 대신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 말을 듣고 있던 한 후배 여학생이 대뜸 말했습니다 ; “선배님, 한 사람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합니까? 어쨌거나 죄 없는 사람 하나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잖아요.”

예기치 않았던 반응에 당황했던 저는 잠시 머뭇거렸고, 제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관심사는 다시 다른 것에 머물러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금 그 후배를 만나게 된다면 그 당시 해주지 못했던 대답을 이 말로써 해 주고 싶습니다.

죄 없는 한 사람을 대신하여 죄 없는 다른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지만 콜베 성인이 대신 죽은 그 곳에는 사랑이 함께 했었다고. 그리고 성인의 사랑은 그의 죽음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었고, 아마도 그들 중에서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범으로 사랑을 실천하였음에 틀림없을 것이고, 바로 이 사랑으로 인하여 그만큼 세상이 밝아졌다고... 무엇보다도 죄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억울한 사건으로 남도록 버려둔 것이 아니라 성인께서 대신 죽음으로써 죄 없는 사람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암울한 사건이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을 되도록 하셨다고...

비단 콜베 성인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사랑의 실천에 자극을 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경우가 꽤 많은 것을 본다면 사랑도 전염성이 강한 것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사람을 전염시킬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먼저 사랑을 행한다면 많은 다른 사람이 그것에 감동적인 자극을 받아 같이 사랑을 실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나 누룩과 같이 보잘 것 없이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그 사랑의 실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겨자나무처럼 큰 사랑으로, 그리고 누룩으로 부푼 반죽처럼 많은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듭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가끔 하늘나라는 결코 위대하다고 할 수는 없는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하늘나라는 우리의 작은 사랑의 실천만으로 절대로 완성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하늘나라는 주님의 은총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조그마한 사랑의 실천이 모이면 그것으로서 이미 대단히 큰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맛보는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사랑의 실천만으로써 하늘나라를 완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매일 매일 실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것을 위하여 일하는 숱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어가고 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나누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무색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으며, 또 다른 많은 불행이 존재하는 이 세상은 하늘나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조그마한 사랑의 실천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실천이 우리의 손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께 봉헌 될 때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많이 좋아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주님께 봉헌하기만 한다면, 어제 복음에서 들은 바와 같이 소년이 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빵 조각만도 열두 광주리가 넘게 만드신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우리의 사랑도 빵의 기적처럼 많게 하시어 우리에게 돌려주실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작다하여도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사랑을 최선을 다하여 실천하고, 또 무엇보다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총 속에 맡기면서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조그마한 겨자씨와 같은 우리의 사랑을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크게 해서 돌려주실 것이고 바로 그 곳은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비록 작아서 초라해 보일지라도 사랑을 실천하고, 우리를 좋게 해 주시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봉헌한다면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작고 하찮은 것     

-여성국 신부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 나라
하면 거창하고 호화찬란한 무엇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겨자씨와
누룩이라니요! 겨자씨와 누룩은 정말 작고 하찮은 것입니다. 겨자씨는
정말 볼품없이 작습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하지만 이것 역시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작고 하찮은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렇습니다. 결코 하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지도 호화찬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삶 안에서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쳤던 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작고 하찮다고
무관심하게 방치해둔 것들에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거기에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정원순 신부(구속주회)-

 

 ◆체험은 인간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체험이란 행동의 주체가 어떤 대상과 접촉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극을 받고,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얻어 자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체험에서 가장 커다란 특성은 하느님 체험을 통한 자아의 변화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기사로서 1521년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병상에 있으면서 평소 즐겨 읽던 무협소설 대신 종교서적 몇 권을 얻어 읽었는데 그 중에 「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도 있었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 책을 읽고 나서 명상하는 가운데 회심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곧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비록 그가 창설한 수도회가 시작은 작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금은 큰 수도회로 발전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체험은 사람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킨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맞아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것에 대하여 묵상해 보아야겠다. ●

 

 

 깨달음을 통한 변화와 성장

 -이수철신부-



예수님의 환경이 여유 있고 행복했었다면

결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나 ‘겨자씨나 누룩’의 비유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단하고 어둔 환경 중에도

일상의 사소한 사물을 통해

하늘나라의 희망을 내다봤기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참 깊고 풍부합니다.
누룩이 상징하는바 깨달음을 통한 변화입니다.


말씀을 깨달았을 때

말씀은 누룩이 되어

내 삶을 풍요롭게 변화시켜 주고,

이어 겨자씨의 성장 과정처럼 내외적으로 나를 성장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비단 말씀뿐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사물이나 사건도

누룩의 깨달음이 되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작은 미소나 친절, 선행도

주변을 기쁨으로 부풀리는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누룩 같은 형제, 하나만 있어도 그 공동체 활력에 넘칠 것입니다.
이런 누룩 같은 깨달음을 통한 내외적 변화와

이에 따른 내외적 성장이 겨자씨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누룩처럼 예레미야를 변화 성장시켜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었음을 봅니다.


“나는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교만을 그처럼 썩혀 버리겠다.”


하느님을 떠난 교만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누룩의 깨달음이나 겨자씨의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누룩의 깨달음과 내외적 변화,

겨자씨의 성장과정 같은 내외적 성장이 없다면

영성생활은 불모지가 될 것입니다.

 

매일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안에 하늘나라를 실현시키고자

말씀의 겨자씨와 성체의 누룩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멘.


 

 <천국이란 바로 이런 곳>

 -양승국신부-


아이들과 장대비를 맞으며 축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비가 고여 공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날아가기도 했고, 정신 없이 공만 보고 따라가다가 흙바닥 위에 큰 대(大)자로 미끄러지기도 했습니다.

 

흙탕물이 튄 얼굴이 너무 우스워 우리는 마주보며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마치 샤워를 하는 듯한 빗줄기 아래서 소리소리 지르며 축구시합을 하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지요.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그 순간이 천국이었습니다. 평소 자주 느끼던 근심이나 걱정, 스트레스나 우울함은 우리 사이에 끼어 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천국이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너스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천국은 지나친 욕심을 버린 사람, 매일 땀을 흘리며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 매순간을 긍정적, 창조적으로 건설해나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동시에 천국은 역설적이게도 죽어야만 입장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잘못된 삶을 죽여야만 입장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 것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 도에 지나친 출세욕, 금전욕, 사람에 대한 욕심에서 죽어야 체험할 수 있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극도의 이기심과 온갖 분쟁과 지나친 경쟁심에서 정화될 때 진하게 맛볼 수 있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소유욕에 붙들려있는 한 우리는 천국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곳이 연옥이지요. 연옥은 천국에 들기 위해 욕심을 정화하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현세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푸는 곳도 아닙니다. 천국은 온갖 물질적 풍요와 안락함만이 약속된 곳도 아닙니다. 천국은 소박한 장소, 기도와 묵상과 찬미의 영적 생활이 계속되는 곳, 절제와 양보, 희생이 미덕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서 잘 적응하는 인간은 주로 가난에서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이겨낸 사람입니다.

 

천국은 철저하게도 이 세상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천국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믿음에서 나오지요. 믿음 없는 천국은 어불성설입니다.

 

사실 천국은 이미 우리 인생의 한 복판에 와있습니다. 그 천국을 발견하는 일, 그 천국을 체험하는 일, 그 천국을 만끽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과제입니다.

    

천국체험의 열쇠 역시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손길을 찾으려는 믿음이 첫 번째 열쇠요,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소박함과 단순함이 두 번째 열쇠입니다. 하느님 앞에 늘 작은 자로 서려는 겸손함이 세 번째 열쇠요, 오늘 비록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도 다시금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용기가 네 번째 열쇠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소명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의 비유설교 집성문에 실려있는 7개 비유 중에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제자들과 군중이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되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비유이다.

 

예수께서 계시하시려는 하느님 나라는 신비(神秘) 그 자체이다. 신비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고자 비유를 학습도구로 삼으신다. 오늘 비유의 소재는 겨자씨와 누룩이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하찮아 보일 수도 있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 가장 작은 씨이지만, 밭에 뿌려져 성장하면 그 어떤 푸성귀(나물종류)보다 크게 자란다.(최고 3m) 마태오는 여기서 "나무"가 된다고 했으나 이는 좀 과장된 표현이다. 그러나 하늘의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려면 푸성귀가 나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종국(終局)에 세상의 모든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 쇄도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일 수 있다. 누룩도 마찬가지이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가진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누룩이지만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게 만든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은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하찮은 것들 같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능력은 필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낸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를 작디작은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신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면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장엄하게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느님 임재(臨齋)의 표징으로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고 또 놀라운 일들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도로 삼아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지만 사도들의 복음선포가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제자단의 배반은 물론 선인과 죄인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밀과 가라지의 비유)이 교회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뿌려진 씨 가운데는 열매를 가져오기도 하고, 때가 되면 추수의 기쁨도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들 안에는 하느님의 숨은 힘이 현존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새긴 것을 행동으로 증언한다면 그는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다. 그는 곧 큰 푸성귀(나무)가 되기 위해 밭에 뿌려진 겨자씨요, 빵이 되기 위해 반죽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누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