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Margaret K 2007. 7. 29. 01:45

   2007년 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오늘 복음 말씀은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도 남을 용서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끌어 주시지 않으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며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forgive everyone in debt to us,
and do not subject us to the final test.”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다. 짧은 기도문 속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다.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가르침이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십니다. 이 말은 어떤 이론보다 가장 정확하게 하느님을 알려 줍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정성이 부족한 기도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시며, 우리는 그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너무 바빠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을 몸에 익히면 신앙은 분명 삶의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땅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땅은 바로 우리 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루시려고, 때로는 축복으로, 때로는 시련으로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고마운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선물의 기도입니다. 유혹이 심할수록 이 기도를 바칩시다. 주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기도 잘하는 법     

-남상근 신부-


 누가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일까요? 머리 좋은 사람. 공부를 잘할 수 있지만
좋은 머리 믿다가 낭패볼 수 있습니다. 공부할 환경이 잘 갖춰진 사람.
그것도 조건이 좋지만 간절함이 없어서 마지막까지 잘할 수는 없습니다.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은 그래서 책상에 제일 오래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오래 하는 공부가 제일 잘하는 공부입니다.
누가 기도를 제일 잘하는 신앙인일까요? 오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은 오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역으로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꾼이 됩니다. 기도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의 양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중단없이 끈질기게 간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줄곧 졸라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래 기도하라는 초대입니다.
세상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실 앞에
오래 머물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물으면 답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불안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간청하기 위해서 등등. 오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을 차근히 가르쳐 주시는 예수께 우리도 귀를 기울여봅시다.
예수님은 낮동안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돌보시고 밤이나 새벽녘에 외딴 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오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범주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고, 또 그분은 그 내용대로 지상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우리에게도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지상 사명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40일간 광야에서 기도하며 준비하셨습니다. 죄인이 용서받고, 앓는 이가 치유되고, 갇힌 이가 해방되는 그 나라를 위해 추수할 일꾼 열둘을 뽑기 전에 밤을 새우며 산에서 기도하셨지요(루카 6,12).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시려 하자 예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십니다(요한 6,15).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예수님은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쉽게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유혹이 그만큼 교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기도해야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에서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드는 군중을 뒤로 하고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라고 하시며 떠나십니다. 그날 새벽녘에 기도를 하신 후의 결정입니다.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후 예루살렘 상경을 앞두고 제자 셋과 산에 가시어 기도하십니다(루카 22,39-44).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지 알 수만 있다면야….’ 하고 쉽게 말하지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예수님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기까지 피땀을 흘리면서 고뇌해야 했습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34) 하신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 다음날 것까지 거두어들인 것은 모두 부패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먹을 양식을 곳간에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날 저녁 목숨을 잃게 되면 그 양식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6-21)와 같은 맥락입니다.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을 나를 위해 축적하지 말고 굶어 죽어가는 이를 못 본 체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나는 몇 번이나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말씀을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같은 사람이 계속 나를 괴롭힐 때 ‘이번에는 절대 용서 못한다.’ 하고 마음에 독을 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란 기도문이 마음에 걸려 차라리 성당에 나가지 않는 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네 죄는 용서받았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며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기도는 유혹을 이겨내게 하는 큰 무기입니다. 유혹에 빠져들면 악과 손잡게 되는 일은 쉽습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면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루카 22,31-32ㄱ)라고 하시고는 올리브 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루카 22,39-40). 예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당신 자신을 위하여 또 제자들을 위하여,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요(요한 17장).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과 흥정하는 장면은 의인 한 사람의 기도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 한 분의 기도의 힘은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 일상의 모든 필요가 담겨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후반부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참 지혜―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의 외적 차원에서부터 점차 내적 차원으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용서의 필요성, 스스로도 속는 교묘한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 깊은 내적 성찰, 마침내 마음의 순결을 얻음으로써 하느님을 뵐 수 있도록 해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빈말을 되풀이할 필요도 없고, 드러내어 보이려고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마태 6,6 참조). 때로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 절망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졸라 불의한 재판관을 끝내 항복하게 만든 과부처럼 기도하여야 합니다(루카 18,1-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 성령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루어지리라는 신뢰와 믿음으로

-배광하 신부-


참된 기도의 정신

모든 기도의 모범 주님기도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되는 주님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기도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다하여 ‘주님기도’로 불리며, 기도중의 으뜸 기도입니다.

2000년 콘솔라따 선교수도회 사순묵상집에는 주님기도에 대한 특별한 묵상의 글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당신이 다만 세상의 것들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기주의 속에서 혼자 떨어져 살고 있다면 ‘우리의’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매일 아들로 처신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분과 물질적인 성취를 혼동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을 고통스러울 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약도 없이, 집도 없이, 직장도 미래도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형제에 대한 한을 품고 있다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를 계속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단호하게 악을 반대하는 편에 서지 않는다면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기도’의 말씀들을 진지하게 생활하고 있지 않는다면 ‘아멘’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기도를 앵무새 마냥 다 외운다고, 수백 번 기도한다고 하여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청하고 찾고 두드려라

우리가 그토록 기도하여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껴 절망 가운데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묵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도와 삶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 2~3)

둘째, 하느님께서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듯 싶어도, 그분은 분명 미래를 내다보시며 또 다른 계획을 갖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느님의 계획을 찾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에게 주어서는 안 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는 하느님께서 절대 들어주셔서는 안 될 기도가 있습니다. 그 같은 기도를 들어 주시면 미래의 우리네 삶이 더욱 불행과 곤경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기도의 가르침 뒤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 11)...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아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넷째, 우리의 기도가 항구함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소원을 기도하면서 며칠, 혹은 몇 달을 못 가 포기하면서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항변하면서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10)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심을 믿고 그분께 향한 굳건한 신뢰와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 32~33).........◆


 

 
주님의 기도

-홍승모 신부-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를 포괄하는 핵심 내용을 청원의 형태를 통하여 전해 줍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지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주님의 기도에 관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3구절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루가 11,3)라는 내용입니다. 청원자는 ‘나에게’ 필요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나 자신만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매일의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형제들을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난을 열망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배제한 이기적인 행복 추구는 신앙의 눈을 멀게 합니다.

둘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루가 11,4)라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그의 모든 행동과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고, 결국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마르 11,25)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가 11,4)라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듯 유혹에 빠뜨리시지 않습니다. 사목 서한은 이 사실에 대해 명확히 언급합니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야고 1,13-14).

우리는 자신의 내면 또는 외적인 요인에서 기인하는 크고 작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는 유혹에 지배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곧 유혹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기 힘든 유혹과 시련의 굴레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유혹이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도우심에서만 가능합니다.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 11,13).

성령은 우리가 진심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루가 11,9 참조) 할 행복이 하느님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신뢰에서 출발

-홍금표 신부-

중요성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실제 생활에서 말같이 쉽지 않은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생활이 쉽지 않은 까닭은 시간적 이유 때문입니다. 바쁨과 게으름이 혼합된 형태입니다만 급하고 필요한 일들을 하다보면 기도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고, 또 시간이 주어지면 게으름과 피곤함이 기도를 방해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도 자체에 맛들이기보다는 기도의 결과에 주목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남성들이 더 심하다고 합니다. 남녀의 대화를 비교하면 남자들은 목적 지향적인데 비해 여성들은 과정 지향적입니다. 그래서 남성들이 대화하고자 할 때는 어떤 정보를 주거나 할 말이 있을 때인데 비해 여성들은 관계를 위해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없을 때도 대화를 위한 대화를 즐깁니다. 기도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로 기도에 맛 들이는 사람들이 왜 여성들이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든 분명한 사실은 기도의 의미는 과정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기성찰, 그리고 성찰을 통한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볼 수 있음이 기도의 중요한 부분인데 인간의 욕심은 결과라는 그럴듯한 유혹에 넘어가 결과를 가지고 기도의 선악을 판단하고, 기도마저도 비용과 효과라는 경제적 관점으로 재단하면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없을 때는 기도하지 않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기도에 쉽게 실망하는 이유는 기도의 내용이 구체적이지도 않고 또 어떤 내용은 너무 불가능한 욕심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후 자신에게 물어보면 내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또 의식한다하더라도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가 완전무결한 상태인 극단적인 이상형만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천국보다 더 행복한 삶을 꿈꾸고 감히 예수님도 꿈꾸지 못한 완전한 사랑의 사람을 우리는 기도를 통해 염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적은 달성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기에 그러한 목적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허황된 목적의 추구는 삶을 공허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좀 더 현실적이고 인간의 조건에 맞는 목표를 기도 안에서 구하지 않는다면 기도를 또 하나의 정신적 유희로 만들거나 아니면 기도에 실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 실패의 요인은 조급함과 성급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은 즉각 이루어져야 하고 한번 기도하면 그 효과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조급성이 항구한 기도를 방해하는 원인이요, 이것이 모든 기도 실패의 근저에 뿌리박고 있는 요소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조급함은 우리가 기도를 위해 넘어서야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인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이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욕심과 감정을 다스릴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전반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고 후반부는 간청하는 친구의 비유인데 오늘은 후반부를 같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한 밤중이라는 상황 때문에 순순히 빵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하더라도 거듭거듭 청하면 들어준다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내용도 그 안에 나를 위치시키면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비유의 교훈자도 첫 번째 부탁이 거부당했을 때 여러 가지 느낌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치사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분노의 감정으로 오기로 청하거나 아니면 그 일을 가슴에 새기고 기회가 오면 그대로 갚아 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고 계속 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친구가 들어 줄 것」이라는 친구에 대한 믿음입니다. 친구가 한 밤중이라는 상황이 주는 모든 어려움과 몸의 게으름과 이기심을 이겨내고 나의 부탁을 들어 줄 것이라는 친구의 호의를 믿었기에 간청자는 자신의 감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친구에 대한 신뢰가 굽히지 않는 항구함과 인내의 간청을 낳는 씨앗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 비유는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를 가질 것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 인간은 한 두 번의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신뢰에 바탕을 둔 욕심과 본능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간청의 기도야말로 우리를 기도에 맛들일 수 있는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이 친구의 비유가 주는 교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과 기도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침

-서공석 신부 -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고,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십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목욕재계(沐浴齋戒)로 준비하라거나 치성(致誠) 혹은 제물(祭物)을 바치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기도를 위해 요구되는 자세도 없고 복장도 없습니다. 어느 장소가 기도를 위해 더 좋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면서 기도는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듯이 하느님은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하듯이,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며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계셔서 자녀들이 안심하고 행복하듯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리스도 신앙인도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남성 위주의 옛날 사회라서 아버지라는 호칭이 사용되었지만, 그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어머니도 함께 들어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분의 생명, 곧 그분 삶의 정신을 이어받아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하고 병든 이를 고쳐주어 살리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두려워할 분이 아니라 우리가 배워 실천해야 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기도는 하느님에게 청해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분의 생명을 살아서 그분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그분의 나라가 실현될 것을 빕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 앞에서 자기가 잘 될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모를 소중히 생각하며, 부모의 위상과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의 실천 안에 살아계실 것을 빌고, 이 기도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우리의 노동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먹여 주신다고 빈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한 우리는 우리가 노동으로 얻은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로우심에 감사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또 말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생각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만 하느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로우심을 그 이웃과 함께 기뻐한다는 기도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로써 오늘의 기도는 끝납니다.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우리 삶의 공간입니다. 유혹에 빠진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합니다. 게쎄마니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루가 22,40).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원하신다면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42). 유혹은 하느님을 생각하지도 부르지도 않는 삶입니다. 유혹에 빠진 사람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 자신만 잘되자고 삽니다. 게쎄마니에서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각자 살기 위해 도망칩니다.

이렇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설명하십니다. 친구를 졸라대는 사람과 같은 신뢰심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적극성과 신뢰가 어떤 것이라야 하는 지를 말씀하시는 선언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신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듣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명하고, 선언하고, 또 설명하는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그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라고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갇혀서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신뢰합니다. 노예는 주인을 이용하여 득볼 것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청할 것은 성령이라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그분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조르고, 구하고, 문을 두드려서 얻어내어야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며,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이 모든 것이 성령이 오셔서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큰 신뢰로써 다가가야 할 분은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뜻을 이루어주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아버지로 살아 계셔야 합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우리의 삶에 살아 계시면, 우리가 변합니다. 인색한 사람이 관대하게 변하고, 명예와 허례허식을 탐하던 사람이 섬기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인간은 고상한 것을 배우기 위해 실패를 무릅쓰고 노력합니다. 학문과 예술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피를 말리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우는 것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실패를 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조금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은 실패를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

-조욱현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은 기도의 본질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난주일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들었다. 주님을 올바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기도도 잘 할 수 있음을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제1독서: 창세 18,20: 아브라함의 기도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 하느님 야훼와 벌이는 공방전을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탄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도시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악을 편들어 변호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50명에서 10명) 그 도시에 있을 수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의 선으로 그 악을 상쇄하여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32절)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더 이상 말씀드리지 못한다. 그런데 예레미야 예언서에 보면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 한 사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예레 5,1). 예제키엘 예언서에도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죄 없는 사람 단 한명을 요구하고 있다(에제 22,30). 만일에 아브라함이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제시하였다고 해도 하느님은 허락하셨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한 사람도 죄 없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죄 없는 사람’의 역할은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1독서는 기도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첫째, 기도의 힘은 우리 인간의 관심과 한계를 훨씬 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그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께 대해 거리낌 없이 표현되는 듯한 기도의 대담성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신앙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기도자는 진정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 루카 11,1-13: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에서 루가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몇 가지 가르침을 한데 모아놓고 있다. 루가복음은 기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도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을 보고 어떤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1절). 이렇게 하여 ‘주님의 기도’의 파도를 일으켰다.

이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부성’의 표지 아래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4절)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는 “아빠”라고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자녀로서의 태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어린 아이와 같은 태도 즉 완전히 신뢰하고 의탁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갖출 것을 가르쳐주신다. 비록 아버지의 모습이 권위주의와 엄격함으로 변모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아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어린이다운 태도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해설해주시고 계시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3절)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고자’(마태 18,3)하는 의지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에 먼저 성부께 바쳐드려야 할 두 가지 내용에 관해 가르쳐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가 임하심, 그리고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 즉 매일의 양식, 죄에 대한 용서, 유혹에서의 해방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여러 가지 차원을 하나로 묶으신다. 영적이면서 육적인 인간이 충만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기도가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그분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기도는 자기 소외와 같은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반대이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베풀어주시는 항상 새로운 은총과 힘으로써 자신의 생활 속에서 매일 실현해야할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해야 한다.

비록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실현시키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데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며, 유혹으로부터의 자유도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생활을 자유로운 마음과 자녀다운 신뢰심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도록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변모시켜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아 이루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도 그러한 기도의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삶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삶을 주님께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기도의 습관보다 더 큰 유산(遺産)은 없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 길잡이 : 일반 사람들은 사제나 수도자는 기도의 전문가인양 생각한다. 그러나 참으로 기도에 맛들인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기도에서 멀어진 만큼 무(無)신앙적이고, 이기적이며, 현세적임을 깨닫자.

1. 신자들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

어떤 본당에 새 본당신부가 부임했다. 신부님은 항상 미사하기 30분전에 고해성사도 줄 겸 성당에서 신자들을 기다리며 기도를 했다. 성모회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새로 부임하신 본당신부님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씩 늘어놓으며 ‘본당신부 품평회?’를 한다. “우리 신부님은 내가 성당에 일찍 가면 항상 나보다 더 일찍 와서 기도를 하고 있더라.” “뒤에서 보면 얼마나 멋있고 마음이 흐뭇한지 모르겠어.” “그렇게 기도하는 신부님만 보고 있어도 갑자기 우리 본당이 부자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요즘 우리 신부님 기도하는 것 좀 많이 보려고 성당에 더 빨리 온다.”

할머니들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신부님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본 듯하다. 그리고 신부님이 무엇이든 시켜만 주면 최선을 다해 협조를 하겠다는 자세이다. 그런 느낌은 할머니들만의 것이겠는가? 이런 기운은 많은 신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공동체 안에 번져가기 마련이다. 사제와 신자 사이에 신앙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하는 신부님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저 ‘마음이 흐뭇하고 부자가 된 것처럼 느끼는’ 신자들이다. 그 어떤 활동보다도 신자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2.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귀신 잡는 해병’으로 월남전에서 매복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평소에는 신부 될 놈이라고 놀리던 소대장이 모두들 긴장하고 겁에 질려 말이 없으면, 나를 보고 “유수병, 기도 좀 열심히 해!”하면서 기도를 청한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에서 절대자를 향해 기도하고 부르짖고자 한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기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신(神), 하느님 같은 것은 없다.”는 철저한 무신론적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는, 항구하게 기도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린다.”는 믿음을 강조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어는 아버지가 이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11,11-13)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도록 당부하신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도 내 소망대로 이루지지 않고, 오히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환이 줄줄이 겹칠 때도 있다. 문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설령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라도,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참 믿음은 ‘시련’마저도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믿는 믿음이다.

또 많은 경우에, 우리는 기도의 위력을 믿지 못한다.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를 하면 무쇠도 녹는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늘 들었던 말씀이 생각난다. 무쇠란 바로 가마솥을 만드는 주물(鑄物)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을 때 간절히 그리고 항구히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3.자녀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다.

제2차 바디칸 공의회를 지나면서, 가족이 모여 가정기도를 바치는 신자 가정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한국교회 교세통계를 보면, 주일미사를 하는 신자는 교적신자의 평균 26.5%이고, 매일 가정기도를 하는 가정은 3%도 안 된다. 첫 영성체 교리를 통해 기도문을 잘 배운 주일학교 학생이, 5-6개월 지나면 기도문을 다 잊어버리고 만다. 집에서 함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기도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다. 있다 해도 부모들은 하지 않으면서 “너희들 기도하고 자거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주일학교에만 내 보내면 신앙생활은 다 된 것으로 생각하거나, 학원 보내기에 바빠 아예 주일학교엔 보내지도 않는 부모들도 수두룩하다.

미국의 경우 어떤 주(州)에는 부부 열 쌍 중에 이혼하는 부부가 5-6쌍이 되는 곳도 있다. 단연 세계 1위이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주일을 지키는) 사람은 51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하고, 매일 가정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은 1011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한다. 같은 사회 환경에서 같은 어려움과 유혹을 겪고 살면서도 기도를 하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돈을 몇 억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보다, 언제나 기도하며 자신을 하느님 앞에 비춰 볼 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자신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고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준다면 세상을 사는데 이보다 더 큰 유산은 없을 것이다. “9시에 기도 합시다.” 이것 한 가지만 실천해도 나의 인생과 자녀와 가정이 엄청나게 변화 될 것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아쉬운 것도 많고 필요한 것도 많은 우리의 일상에 위로와 힘이 되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간절히 기도하며 청했던 일들이 허망하게 끝나 버리는 경험을 합니다. 아프지 말아야 할 사람이 아프고, 시험에 합격해야 할 사람이 탈락하고, 최선을 다해 추진하던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는 경우들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때로는 신앙을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기도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기도를 마치 자동판매기에서 물건을 사듯이, 특정한 기도를 정해진 양과 순서대로 바치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주님과 벌이는 겸손하면서도 끈질긴 청원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창세 20-32 참조),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인간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형적인 청원기도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임을 전제합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하느님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청원기도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청원기도를 통해 하느님 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고백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기도’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 보호와 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뒷부분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청합니다. 말하자면 나의 기도 지향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향들이 우선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먼저 하느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자신의 뜻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 기도의 근본정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해로운 “뱀”이나 “전갈”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실패와 시련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며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 주십니다.

 

 
기도에 대하여

-서울대교구 안상인 신부-


기도의 정의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리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이다. 비록 원시인이라 하더라도, 초자연적인 분께 공포 중에, 또는 위험 중에 본능적으로 기도를 바쳤다. 기도는 또한 인간의 심층에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하면, 하느님은 기도 없이 인간에게 은총과 구원을 주시 지 않는다.

인간은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하며, 필요한 은총을 받고, 하느님과 계속적인 유대와 상통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우리는, 하느님과의 부자(父子)관계를 지속시키는 기도를 생활화하여 야 한다.

기도해야 할 때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에페 6,18) 또한 “늘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항상 기도를 바쳐야 한다. 인간이 매 순간마다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다. 특별히 다음의 경우에 기도를 해야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개어 기도하라" (마태 26,41)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죄로 유인하는 유혹 중에, 죄 중에 있을 때, 타인에게 사랑의 실천을 필요로 할 때, 또한 특별한 은총을 구해야 할 때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의 형식과 목적


기도의 형식은 정신적인 기도와, 기도서나 또는 꾸며서 입술로 바치는 기도가 있다. 정신적인 기도에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가 있으며, 특히 관상기도는 기도 가운데 가장 탁월한 형식의 기도이다. 기도의 목적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흠숭이다. 이는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분들이기에 찬미를 드린다. 그러나 흠숭을 드리지는 못한다.

둘째, 감사를 드려야한다. 나의 존재와 여러가지 은혜를 풍부히 베푸심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셋째,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또는 궐함으로 잘못한 죄에 대하여, 뉘우치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넷째, 우리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하여, 또는 현세적으로 필요한 어떤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기도라고 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것을 우선 생각하지만, 이것만이 기도의 전체 목적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그 분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청하기 위해서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청원의 기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고치고, 따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더욱 상세히 뒤에서 다루겠다.

기도는 누가 하는가?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기에, 지성을 갖고 있는 존재만이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기도하실 수 있지만, 하느님으로서는 기도를 바칠 수 없다. 성모 마리아, 천사들과 하늘나라의 성인들은 기도할 수 있으나 악신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기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특히 죄인들과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연옥 영혼들은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산이와 죽은이를 위하여 기도할 의무가 있다. 특히 가족과 친척을 위하여 기도를 바쳐야 한다. 또한 지옥에 있는 영혼은 아무런 기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기도해 야 한다.

청원기도의 적합한 대상


사도 야고보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하셨다.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청하는 것이 아니다. 구하더라도, 타당하고 선한 것을 구해야 한다. 비록 타당하고 선한 것이,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라도 상관없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갈구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라면, 청하기에도 타당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현세적인 어떤 이익이나 편리도,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영신적인 면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면, 하느님께 청할 수 있다. 건강한 몸, 상처의 치료, 사고로부터의 안전을, 좋은 직업이나, 안락한 가정 등, 이와 같은 것들이 기도의 지향일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신 사정이나 구원에 도움이 될 때, 그러한 청을 들어주신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는 청하는 것이 영신적인 면에 도움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것이 우선적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덕이 향상되고, 악습을 고치고,, 유혹을 이기고, 은총을 받고, 항구하게 성사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인 여건이다.

청원의 기도를 바칠 때 바치는 첫째 대상은,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다음으로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 그리고 복자들께는 전구를 요청하는 기도를 바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생각이나, 원의까지 알고 계시지만,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은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의 생각이나 원하는 것을 모른다.

필요한 조건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먼저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기 주실 수 있고,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둘째, 희망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만이 약속하신 행복을 보장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셋째,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는, 보다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의 정신을 갖고 청하면서도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한다. 즉 자기 구원에 해가 되는 것을 청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드려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 주신다"(잠언 3, 34). 또한 항구하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 과부의 번거로운 청을 들어준 판관의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한다(루가 18,1-5).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기도


“우리의 찬미가 주께 필요하지 않은 줄 아오나, 주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감사 드리오니, 우리의 찬미가 주게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유익이 되나이다" (감사송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자체로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시기에, 그분께 대한 찬미와 감사가 영광을 더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알고 계신다. 즉 우리가 무엇을 청해서, 우리의 요구를 일깨워 드릴 어떠한 기도도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이나, 지향을 바꾸는 효과를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한 부분이다." 이는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이다. 가령 하느님께서 어떤 농부에게 곡식을 수확하도록 계획을 세우셨다고 하자, 그 수확은 농부의 경작과 적당한 햇볕과 비와 좋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하여 기도를 바친 결과로써 계획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요소만 제거되어도 수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수확을 하기 위하여, 필수요소인 기도를 그의 계획안에 넣으셨기에, 기도가 없었다면 좋은 곡식을 수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계획을 세우시거나 지향하실 때, 인간의 기도를 그 섭리 안에 내포시키신다.

전례와 기도


전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교회의 모든 공적 경신 경배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로 창조하시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신비체를 이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면서 말씀을 들려주시고, 공동체를 이룬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전례란 바로, 교회 공동체의 기도이며, 이 기도를 통하여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 전례는 반드시 교회의 권위로부터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교직자가 교황청으로부터 인준한 전례서에 따라 거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성부께 십자가상에서 거룩한 제사를 드리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 제사의 힘으로 구원되기를 원하셨다. 고로 예수께서는 그 거룩한 제사를 기념하여 그 예를 계속하기를 원하셔서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전례행위는 바로 이러한 거룩한 제사와 성사 그리고 성무일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전례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미사 성제이다.

그 외의 모든 기도는 신심행사에 속하는 것들이다. 로사리오 기도, 구일기도, 십자가의 길, 성모나 성인을 공경하는 기도, 또한 성인 열품도문 등 비 전례적인 개인적 및 공적인 기도들도 있다. (여럿이 바치는 경우라고 해서 전체 교회의 기도는 아니다. ) 하느님께서는 전례 중에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간은 그 전례를 통하여 응답으로 말씀과 은혜를 받아들이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전례에 참여하여야하며, 내적 준비를 합당하게 하여야 한다.

결론


신자들을 화초에 비한다면, 기도는 물이나 공기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화분의 화초라도 물과 공기가 없으면 시드는 것과 같이, 기도 없는 신자생활이란 불가능하다. 기도는 모든 신자들 생활의 중심이다. 기도하기를 그치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끊는 것이고, 신자 생활을 원치 않는 증거이고, 은총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자녀임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아름다운 중재자의 삶

-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오늘 1독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구해 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애절한 노력이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본래 소돔과 고모라는 지금의 사해 남부에 위치해 있던 도시로서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던 악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모두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들 뿐이요 사람답게 사는 의인이라고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구제불능의 도시였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그 도시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썩을 대로 썩어서 타락한 도시였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받을 수 있도록 체면 불구하고 하느님께 매달리며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소청을 기쁘게 들어주셨지만 그러나 의인이 단 열 명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때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사해 남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진으로 인해서 푹 가라앉아서 지금은 사해 바닷 속에 묻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해가 그 이전의 사해보다 더 커졌다는 것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두 도시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하느님, 바로 이 중간에 서서 아브라함은 중재자로서 아름답고도 감동스런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은 그처럼 살맛나는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그건 추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재자의 길은 대단히 고달프고 험난합니다.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보람있는 길이요 멋지고 위대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중재자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있던 벽을 허물어 버리고 화해와 용서로써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당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성부는 그래서 당신 아들의 희생을 보시고 인류를 죄에서 용서해 주셨으며 닫혔던 천당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중재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죄 없이 얻어맞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이 맞아야 할 것을 내가 맞음으로써 그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방에서 마루로 나오다 넘어져서 울었습니다. 아기는 아픔보다도 걸려 넘어졌다는 그 자체 때문에 속이 상해서 웁니다. 이때 빨래를 하던 엄마가 갖가지 방법으로 아기를 달래 보지만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아이스크림 사 준다는 것도 싫으며 매맞는다는 것도 겁이 나지 않습니다. 속상하니까 웁니다.

이때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 와서 문지방을 막 때립니다. 그러면 서 "이놈, 너 왜 우리 아기 넘어뜨렸니? 나쁜 놈, 매 좀 맞거라." 하면서 때립니다. 그러면 아기가 그 모습을 보고 속이 풀어져서 울음을 그칩니다. 여기서 문지방은 아무 죄 없이 얻어맞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아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참으로 악한 시대입니다. 나라 곳곳에 썩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건물만 썩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에 썩은 오 물이 들어가니까 사회의 모든 부문이 썩어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사건을 비롯해서 각종 대형 사고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은 제쳐놓고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살맛이 납니다.

우리는 그래서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친구를 위한 중재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서 빵을 꾸어 달라고 귀찮게 조릅니다. 주인은 성가셔서 대답도 하기 싫은데 뻔뻔스럽게도 계속 조릅니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하도 귀찮게 구니까 친구의 청을 들어줍니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도 자기가 먹으려고 빵을 꾸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체면불구하고 밤중에 어려운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운데에서 욕먹으며 요청하고 조정하는 자를 중재자라 하며 이들의 기도를 중재기도라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중보자,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세상은 중재자들에 의해서 구원받고 있습니다. 악인이 아무리 많아도 의인들이 많기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용서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멋지게 살도록 합시다. 진정 사람답게, 양심 바르게, 그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살도록 합시다. 거기에 인생의 참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항구한 기도

-춘천교구 이태혁(요아킴) 신부-


유물론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의 딸이 어느 날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무런 신앙도 없이 자랐고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낡은 책 속에서 기도문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만약 그 기도에 나오는 하느님이 계신다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친구가 그 기도문이 무엇이냐고 묻자 칼 마르크스의 딸은 <주님의 기도>라고 대답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 하나가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사실 우리는 이름모를 이 제자에게 감사해야한다. 이 제자의 청을 들어 우리 모두가 매일 반복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기도>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내용 자체 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자세와 그 정신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 그 자세와 정신은 무엇일까? 우선 예수님은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린 아이가 아빠에게 지니는 완전한 신뢰심과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죄 없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여가면서 야훼 하느님과 애써 흥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끈질긴 요청에는 하느님께서 단 한사람의 의로운 사람이라도 있으면 타락한 도시 전체를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굳은 신뢰심이 담겨있다. 이 신뢰심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청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짧은 비유도 귀찮을 정도로 하느님께 항구하게 청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신뢰심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 신뢰심은 우리 스스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다. 사실 유다인만큼 기도를 잘 하는 민족도 드물다. 그런데 유다인에게는 “입의 위대한 무기인 기도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라는 속담이 있다. 기도는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삶에 희망을 불어넣고 방향을 가르쳐 주고 활력이 솟구치게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는 많은 성인들이 있다. 그런데 위대한 성인들의 공통된 특징은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를 성인이 되게 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은 더 온유해지고 모든 것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지며 삶의 유연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사람을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