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07. 6. 6. 04:03

  2007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27)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죽고 사는 것은 하느님께 달린 일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생명의 주인으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실 뿐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부활은 소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생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두가이들이 엉뚱한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모르기에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죽은 다음의 세계는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질문하고 쉽게 답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곧 한 여인이 일곱 형제와 혼인한다는 설정 또한 얼마나 유치한 생각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조용히 이르십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잘못 질문하기 십상입니다. 억지를 부리고 고집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익은 벼는 고개를 숙입니다. 익지 않은 벼는 알맹이가 없어 바람에 날립니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읽지도 쓰지도 않는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서는 더 요란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두가이들과 다를 바 없는 행동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제 동창 신부로부터 참으로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글쎄 어떤 신부님께서 요즘 한창 문제가 되는 금융사기를 당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부님의 전 재산이라고 해봐야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필요할 때 쓰기 위해서 나름대로 아끼고 아껴서 모아 둔 돈일 텐데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그 신부님이 어딘가 약간 부족한 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그 신부님 이름을 대면 ‘똑똑한 신부’라고 말할 정도로 자타가 인정하는 지혜로운 신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융사기를 당했다는 것이지요. 그 신부님이 당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검찰청이라면서 전화를 받았답니다. 그리고는 검찰청에 출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더랍니다. 이유는 신부님의 계좌가 지금 국제 범죄 집단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신부님의 계좌를 보호해야 하니까 가까운 현금 인출기로 빨리 가라고 했고, 하라는 대로 따라 하다보니까 다른 계좌에 자신의 전 재산을 송금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금융사기를 당했었습니다. 그래서 은행에만 가도 ‘금융사기를 조심합시다.’라는 문구를 쉽게 볼 수 있으며,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에서도 금융사기에 주의할 것을 여러 번 방송했었지요. 하지만 이 신부님은 남의 이야기로만 봤지, 자신에게도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객관적으로 볼 때, 분명히 이 신부님보다 똑똑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금융사기를 당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저도 그러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지요. 텔레비전에서 이러한 식으로 금융사기를 한다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앎과 모름의 차이는 이렇게 큰 것이 아닐까요?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도 똑똑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을 때, 계속해서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고, 죽은 이들의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요. 그리고 자신들의 이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철저히 배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따른다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니, 자신의 사흘 만에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말로써 드러내기 위해서, 칠 형제 모두의 아내가 되었던 그 여인은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그래도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배격하려는 마음만을 갖다보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모습을 닮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겸손 되지 못하고, 나만을 드러내기만을 하는 노력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들. 또한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러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금융사기 조심하세요. 요즘도 그러한 전화가 많다고 합니다.


 빠다킹신부

 

 

   죽은 이들의 부활     

-박영봉 신부-


 부활신앙은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에 대한 믿음에 그 근거를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돌려주심으로써 부활에 대한 징표를
보여주셨으며, 당신이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흗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부활의 증인’(사도 1,22)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으로, 예수부활의 능력을 통해
육신을 영혼에 결합시키심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신에 돌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콜로 2,12). 부활신앙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종말의 날에 앞서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이의 하느님

-김희경 수녀(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


 하느님은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다. 과거의 하느님이시기도 하고 현재의 하느님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하느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한 것으로 가득 찬 것처럼 여겨질 때도 많다. 하느님이 계시면 고통 받는 이들, 슬픈 이들, 어려운 이들을 이대로 두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힘든 일상에서 하소연할 사람을 찾지 못해 내게 온 학부형이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것이냐?”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너무도 힘겨운 현실에 놓여 있는 형제님을 보면서 나는 대답할 길이 막막했다. 견디기 어려운 아내의 불륜, 자녀의 일탈, 친구의 배신, 건강치 못한 육신. 하나같이 힘겨운 십자가! 자신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현실에서 ‘신의 부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그 형제에게 나는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하나?
반복되는 하소연을 들으면서 “힘드시겠어요.”, “하느님이 뜻하신 바가 있으시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나 역시 힘겹기는 매한가지다. 그런 가정 환경에서 지내는 공부방 아이의 일탈도 이해가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겨운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아버지인 그 형제님에게 나는 기도 중에 말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서는 곧 당신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라고.


 

 ‘하느님께서는........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

-김효성 수녀 (성심수녀회)-


지난주 화요일이었다. 동료 몇몇과 점심식사를 하고 막 사무실로 올라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간해서 집에서 전화 오는 일이 없던 나는 발신자 번호를 보고 약간 의아했다. 어머니가 위중하시다는 연락이었다. 80세가 훨씬 넘으신 노부모가 계시기에 나는 늘 마음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전화를 받으니 당황스러웠다. 사무실을 나오려고 컴퓨터를 끄는데 손이 떨려 제대로 끌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가족들에게 어머니는 잠시 빙그레 웃으시고는 그대로 잠에 빠져 드셨다.

그런데 외국에 살고 있는 막내동생에게 연락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주말에는 동생가족이 텔레비전 생방송에 출연할 약속도 잡혀 있던 터라 동생은 연락을 받고는 “언니, 마지막 순간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어머니 장례미사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다만 며칠이라도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만나서 사랑해 드리고 싶어” 한다. 살아 계신 어머니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시 고위 사제 계층인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고 영적 존재나 후세, 죽은 자들의 부활은 부인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후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트집을 잡던 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면서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일이 급선무라고 알려주신다. 생명이신 주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에게서 생기를 얻지 못한다면 죽은 자로 살아가며 죽은 자의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생기를 얻고, 또 누구를 믿고 사랑하는가?

지금도 어머니는 누워 그렇게 간신이 숨만 쉬고 계신다. 멀리서 달려온 막내딸의 사랑을 받으시면서….  

 

 
<독서> : 하느님으로부터 응답받는 토비트와 사라의 기도

-경규봉 신부-

토비트는 장터에 버려진 불쌍한 동포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한 후 정결례의 규정을 지키려고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뜰에서 잠을 청하던 중, 새똥이 눈에 떨어져 봉사가 된다. 그렇게 지내던 중 토비트는 아내 안나와 말다툼을 하는데, 아내로부터 자선과 정의를 행한 결과가 무엇이냐는 핀잔을 듣고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운다. 그는 탄식 속에서 주님께 기도한다.

그는 주님께서는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진리 자체이신 심판관이심을 고백한다. 자신과 조상이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참되게 살지 못하여 죄를 지었으며 그로 인하여 포로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자신들의 죄에 따른 주님의 심판이 참되므로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가기를 청한다. 그럼으로써 삶의 고뇌와 조롱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청한다.

이렇게 토비트가 기도하던 때에 메대의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주님께 기도한다. 그녀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랑과 한 자리에 들기도 전에 아스모데오(파괴자라는 뜻)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다. 그런 가운데 여종으로부터 남편들을 죽인 사람이므로 남편들처럼 죽으라는 비난과 저주를 듣는다.

그녀는 몹시 슬퍼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가, 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목숨을 거두어 가시도록 기도한다.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느님께서는 천사 라파엘을 보내시어 두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신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기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고 느끼도록 하는 동시에 사람의 자리를 알도록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느님이 온 세상의 참 주인이시며,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도록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을 익히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주셔야 하는지를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도록 한다.

기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고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알도록 한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며,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도록 한다. 그래서 기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 서게 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도록 한다.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도록 한다. 이처럼 기도는 사람을 하느님과 연결시켜주는 고리이다.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누구나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성서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1사무 12,23)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에서(루가 5,16), 때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다(루가 6,12).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라고 말씀하시며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루가 18,1).

“하느님께서는 나쁜 사람을 멀리하시고 착한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신다.”(잠언 15,29) “착한 사람은 기도로 이웃을 살린다.”(잠언 11,9) 주님께서는 바른 사람의 기도는 반가워하시지만(잠언 15,8),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기도는 역겨워하신다(잠언 28,9).

오늘 독서에서 착한 토비트와 사라의 기도는 하느님께 응답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천사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 주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이 되자.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야고 5,16)는 말씀을 새기며 기도의 신앙인이 되자............◆


 

 부활 이후의 삶

[말씀자료 : 까따꿈바 묵상팀]

예수님 당시 사두가이들은, 오직 성문화된 성경만을 받아들이며 구약 모세 5경만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사두가이는 영생을 믿지 않았고, 영혼과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족이며 부호였고, 대사제(제사장)직을 차지했고, 적에 대해서는 자연적으로 협력하여 특권을 유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않은 이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과장되고 어리석게 꾸며진 질문을 가지고 부활에 대해 예수께 도전하는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신명기 25, 5 이하에 나오는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한 여자가 차례 차례 일곱 형제와 결혼했을 경우,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부활 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듣기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 당시 유대인이 타 종족과의 혼혈을 막기 위해 또 가족의 명칭을 보존하고 가족의 재산이 가족안에 남게 하기위한 규정으로서 여러 형제가 한 집에 동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 형이 자손이 없이 죽으면, 죽은 형의 부인을 아내로 삼아 형을 위하여 자손을 이어 주라는 것이 동생의 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풍속을 사두세이들이 과장해서 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부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어리석게 만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1) 부활한 육신은 육체적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 우리의 육신이 다시 부활했을 때 그 육신은 어떤 성질을 띨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을 때 이 육신은 이미 지금의 세상에서 살았을 때의 육체적 욕구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한다든지, 결혼을 하고 싶다든지 하는 육체적 욕망같은 것은 부활한 후에는 그 육신 안에 들어 있지 않다고 단언하시는 것입니다. 즉, 부활 후의 생활은 이 세상 언어로서는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개념 안에서 문제를 깨우쳐 답변하신다는 점입니다. 그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모세 5경을 중요시하면서도 그 모세 5경 안에는 영생에 관한 사실이 없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출애급 30, 6에 나오는 말을 가지고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즉, 하느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만일 여기서 하느님이 이러한 족장들의 하느님이시라면, 이 족장들은 우리와는 달리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지 않으면 이들의 하느님이 될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영생에 대한 이러한 증명에 그들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논쟁을 못했던 것입니다.

천당의 생활은 어떠한가? ...하는 것에 대해 사두가이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습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못 알아 들은 것처럼, 우리들도 흔히 자기식대로 천당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아메리카 인디안 : 사냥이 그들의 주 생활이었기에 유쾌하고 만족한 수렵장을 그들의 천국으로 생각했음.

- 해적 바이킹들은 : 종일 싸움을 하고, 밤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고 부상된 곳이 회복되고, 그리고 정복한 적의 두개골로 만든 술잔으로 술을 마시는 저녁 잔치를 지내는 곳을 천국으로 생각했음.

- 마호메트 교도들 : 사치를 모르는 사막에서 사는 이들이기에 그들의 천국은 감각적이며, 육체적 쾌락을 마음껏 즐기는 생활을 하는 곳으로 생각함.

- 유대인들 : 바다를 싫어하므로 천국은 바다가 없는 곳으로 알았다.

- 대부분의 사람들 : 슬픔과 고통을 싫어하므로 천국은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기는 곳! 이제 고통이 없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1서 2,9에 말하기를 : "하느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으로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즉, 하늘나라의 생활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줄 수 있는 그 어떤 개념, 그 어떤 모습보다도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논쟁

-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에 대한 논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영생이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 붙잡혔을 때 이 두파의 교리가 대조적인 점을 이용하여 의회에서 연설하여 풀려나온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평신도들이었으나 사두가이파는 귀족이나 부호들 출신이었고 그 대부분은 제사직(사제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안정되고 특권을 누리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지배자들도 나왔습니다. 또 사두가이파는 성문화된 모세 5경만을 귀중하게 여기고 바리사이파가 귀중하게 여기던 구전상의 율법이나 관습, 규정 등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두가이파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바리사이파 들에게도 질문을 받은 일이 있고 또 사두가이파들에게서도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두가이파들은 그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모세 5경 중에 신명 25, 5-10에 나오는 수혼제도(嫂婚制度)라는 율법을 가지고 부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신명 25, 5-10을 보면 이 수혼제도에 대해 나옵니다. 즉 여러 형제가 한 집에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죽은 형의 미망인을 아내로 삼고 형을 위하여 자손을 이어주는 것이 다음 동생의 의무로 나옵니다. 그리고 자손이 생기면 본래 남편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가족의 명칭이 유지되고 가족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율법에 근거를 둔 이스라엘의 수혼제도를 가지고 부활이 없음을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즉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하면 부활 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두가지 점을 강조하면서 답변하신 것입니다.

첫째, 부활한 육신은 육체적인 욕망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한 후에는 육체적인 욕망같은 것은 없게 되고 천사와 같은 기쁨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 사람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즉 출애 3, 6을 보면 모세가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보면 사람이 죽은 후 살아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하느님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이 죽고 또 살아 있지 않다면 모세가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이 모세 5경에서도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나 그밖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시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인해 그 모든 신비가 벗겨진 것입니다. 특히 그분의 부활을 알고 또 믿는 우리로서는 이 질문이 별로 큰 문제는 안될 것입니다만,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될 때 우리도 예수의 논증과 같이 그 확실한 믿음과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부활시켜 주시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천주님! 우리는 비록 한번 죽게 되더라도 당신의 능력으로 부활하리라 믿습니다. 살아 생전에 당신을 믿고 따름으로서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하루 하루의 삶이 부활의 삶이 될 수 있다면 

-이봉하수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지상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예수님의 뒤를 이어 부활하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오늘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복음 안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모세가 정해준 법을 예로 들며 질문을 던지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다’라고. 그렇습니다. 부활도 천국도 산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부활과 천국을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죽음 이후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부활에 대한 신앙을 주신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죽고 부활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일상 안에서 어떻게 죽어야 할까요? 이는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세속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의 죽음을 말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상 안에서 부활의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중에 하나는 기쁨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양승국신부-


<저물어가는 하루가 너무나 아쉽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꺼져만 가는 어린 생명의 끝을 붙잡고 통곡하는 한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의 얼굴은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다고, 그쯤 했으면 할 도리 다 한 것이라고,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그렇게 타일러도 소용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더 붙들고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끝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 세상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모릅니다. 안타까움 중에 가장 큰 안타까움은 어린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겠지요? 청춘의 나이에, 활활 타올라야할 절정기에 이 세상과 작별하는 일이겠지요.


사실 더 큰 안타까움이야 남아있는 분들의 몫입니다. 먼저 가신 분들보다 몇 백배 더 큰 허전함으로, 상실감으로 한 평생 가슴 시릴 분들도 많습니다. 밤마다 베갯머리를 눈물로 적시는 분들, 떠난 분들의 빈자리로 평생 마음이 허전할 분들,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 세게 틀어놓고 남몰래 통곡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가신 분들과의 인연을 돌이켜보며 떠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남아있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생과 사, 남음과 떠남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언제까지 남아있을지 전혀 예측 못할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위를 걷고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그 사이에 난 가파른 골짜기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습니다.


결국 먼저 떠난 분들, 다 하느님께서 계획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우리에게도 뭔가 하느님의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남아 있는 우리에게 정녕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사별의 충격에 늘 애통해하면서, 늘 가슴아파하면서, 늘 괴로워하면서 한평생 살아갈 것을 하느님도, 먼저 떠나신 분들도 절대 원치 않을 것입니다.


먼저 떠난 분들의 안타까움, 아쉬움, 섭섭함, 허전함을 우리의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이 남아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떠난 분들이 못다 이룬 사랑을 우리가 대신 실천하는 일. 그분들이 못다 이룬 꿈을 우리가 대신 실현시키는 일, 그분들이 채 못 누린 행복을 우리가 대신 누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망자(亡者)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하루가 죽음처럼 고달플지라도 절대로 힘들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세상살이가 너무 힘겹다고, 사는 것이 너무 지루하다고 투덜대지도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단 하루의 삶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분들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단 1%의 가능성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적을 갈구하고 있는 분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맞이하는 아침, 보통 아침이 아닙니다. 너무나 소중한 황금 같은 아침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가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 사실 축복 중의 축복이며, 눈물겨운 환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가장 큰 선물이며 가장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아침,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다시금 눈떴다는 것, 커튼을 젖힐 수 있다는 것, 창문을 활짝 열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크신 주님 은총의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먼저 떠난 분들은 이제 자비로운 하느님 손에 맡겨졌습니다. 그분의 따뜻한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것입니다. 더 이상 울며 애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는 일, 끊임없이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 시선을 우리의 오늘에 돌려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살아있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이 땅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 아직 부족하기에 죄도 짓고 방황도 하는 우리, 그러나 아직 살아있기에, 다시 말해서 주님 은총의 손길 안에 있기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행복해하며 그렇게 살 일입니다.


저물어가는 하루가 너무나 아쉽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전해야 했었는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좀 더 실천했어야 했는데, 좀 더 행복하게 살아야 했었는데...


 

 하느님의 존재방식 : 순수현재

 -박상대 신부-


  어제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께 와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로마황제에게 주민세(인두세)를 바쳐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었다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17절)는 놀랄만한 명답(名答)을 듣고 물러갔다. 오늘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서 와서 구약의 수혼법(嫂婚法)을 부활과 관련지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질문은 구약의 수혼법(창세 38,8; 신명 25,5-10)에 근거를 둔 것이긴 하다. 수혼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게될 경우 가장 가까운 형제로부터 친척까지(룻기 4,1-8) 미망인과 결혼해야하고, 이렇게 하여 낳은 첫 아들은 고인의 아들로 인정하여 이스라엘 가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칠 형제가 모두 맏형의 부인을 두고 자식 없이 살다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일곱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은 너무 과장된 가공(架空)의 질문이라 하겠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이 질문은 사실상 두 가지 측면을 의도하고 있다. 하나는 그 시대에 통하던 부활사상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된다면 예수까지 난처하게 만들 심상이었다.

 

  우선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94번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훨씬 드물게, 모두 14번 등장하는데, 마르코와 루가복음에 각각 1번(마르 12,18; 루가 20,27), 마태오복음에 7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5번 등장한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정확한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333년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침공한 모든 곳에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린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이때부터 기원전 63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때까지의 과정에서 지도층의 유다인들은 크게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혈당원(젤롯당원), 꿈란공동체 등으로 분리된다. 비록 여러 번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야훼신앙과 율법준수에 대한 정신은 누구보다 강했던 유다인들이다. 헬레니즘 문화와 이교도의 신과 여신의 숭배를 강요하던 희랍의 프톨로메오 왕가와 셀레우쿠스 왕가의 통치는 약탈과 박해로 이어지고, 결국은 유다인들의 무력(武力)저항을 불러오게 되고, 하스모네 가문의 마따니아가 선봉에 선다. 마따니아의 저항운동은 "하시딤"(경건한 자, 율법에 충실한 자들) 무리와 결탁하면서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고, 그의 아들 유다(마카베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유다는 마카베오항쟁을 일으켜 셀레우쿠스 군대를 무찌르고 기원전 164년 12월에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고, 그 후 해마다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이를 계기로 종교적인 상황은 호전되었지만 정치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제는 유다의 동생 요나단에 와서 벌어진다. 그와 그 일가는 헬레니즘 세력과 오히려 결탁, 협정 등을 통하여 유다를 통치하는 실세로 둔갑하였고, 다윗 시대 이후로 사독 가문이 맡아왔던 대사제장직을 겸하는 탐욕을 부렸던 것이다. 이에 "하시딤" 무리들이 결별을 선언하고 "분리된 자",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율법 경건주의자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경건한 자"로 자처하는 "에세네파" 사람이다. 후자는 속세를 떠나 사해 근처에 모여 꿈란 공동체를 이루었다. 나머지는 끝까지 무력으로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꾀하려는 열혈당원에 속한다. 결별을 선언한 자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무리들이 바로 하스모네 가문의 후손들인 사두가이파 사람들인 셈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당시의 대사제장직을 독차지하고 최고의회 산헤드린의 구성원으로서 당대 최대의 권력을 누리는 자들로서 율법에 대하여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口傳)된 율법이나 계율, 조상의 전통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세오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싹튼 부활사상을 믿지 않았으며, 천사의 존재, 사후(死後)의 상벌,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사도 23,8) 원래 기득권은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법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예수의 출현으로 적지 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 날로 많은 추종자를 얻어 가는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두가이파의 가공할 질문에 예수께는 성서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먼저 탓하신다. 구약의 수혼법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가 그런 오류를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두 가지 의도를 내포한 답변을 시도하신다. 첫째는 육체부활의 의미를 밝히시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래도 세상에 빗대어 천국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체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 육신도 함께 부활한다면, 그 육신이 어떤 모양일지는 지금의 육신의 틀을 벗어나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무지하게 더울 때, 시원한 곳을 천국이라는 생각, 무지하게 배고플 때 한 술의 밥이 천국이라는 생각, 사막에서는 오아시스가, 유목민들에게는 어렵게 찾아낸 푸른 풀밭이 천국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부활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차원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는 차원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하느님의 계시말씀(출애 3,6)을 새롭게 해석하여 이 계시가 이미 부활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늘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두 죽었다. 인간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이다. 즉 시작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니 늘 영원하시다. 이를 계시신학적 언어로 "순수현재"(pura praesentia)라고 한다. 순수현재란 하느님의 존재방식으로 과거와 미래가 없는 늘 순수한 현재(現在)의 상태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죽었던, 살았던, 살 것이든, 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것은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2티모 1,1-3.6-12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복 음 : 마르 12,18-2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여러분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으십니까? 죽고 난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으신지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요. 죽은 후에 하느님의 심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삶이 있음을 믿고 또 그 믿음대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신자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사는가 하면 그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정말 영원한 생명을 믿고 지향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입으로면 믿는다고 하는 사람인지를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생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었지요. 이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믿을 뿐 영혼 불멸이나 육신의 부활, 또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현세적이었지요. 때문에 이 세상에서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치부를 위해서 침략군인 시리아군이나 로마군과 결탁하여 이권을 유지하고 동족을 착취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께 와서 묻고 있습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마르12,19-23)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부활 때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그 자체가 모순이지요.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불순한 계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리도 진실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들은 얼마되지 않아서 역사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말았지요. 이렇게 사두가이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모두 다 영생을 믿고 또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문제는 천주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儒敎)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으로 ?교(敎)?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인(仁)과 예(禮) 사상이 발전하여 동아시아 나라의 일상 생활 윤리 양식에 깊이 영향을 끼친 이 사상에는 죽은 후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영생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현세적인 가르침을 주는 이 유교를 우리는 종교라고는 잘 이야기하지 않지요.

그럼 유교는 어떠한 형식으로 영생을 희망할까요? 유교의 중심은 제사와 후손에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굉장히 중요시하지요. 또 자식을 중요시하는데 자식 중에서도 아들에 큰 비중을 두지요. 남자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 것으로 영생을 확인하려들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조상님과 제사를 지내는 본인과 후손, 이렇게 3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유교의 제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인 셈입니다. 그래서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사는 참으로 중요한 예식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식이 없어서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생명력이 끊기는 것으로 조상 볼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첩을 얻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애를 썼지요.

또한 제사를 드리려면 반드시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여자는 자격이 없지요. 그 생명에 다른 씨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혈통은 남자들로 이어졌고 지켜졌습니다. 따라서 아들에 대한 집착은 영생과 관계되어 강할 수밖에 없었지요. 자기의 영생이 그 자식으로서 확인된다고 믿었기에 모든 재산을 제사를 주관하는 자식인 장자에게 몰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주교 신자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을 믿는 우리는 자식에 집착하지도, 또 제사에 집착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재산을 장자에게 물려줄 책임도 없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할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살고,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자식을 잘 키우고 대를 잘 이어가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것은 너무나도 유교적 발상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가난한 사람들과 얼마나 나누면서 사는가, 바로 이것이 영원한 삶을 믿고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기준이지요. 이제 확연해집니다. 강론 서두에 저는 여러분들께 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으십니까??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자녀 교육과 자식에게 좀더 많은 재산을 몰아주는 데만 모든 힘을 다 쏟으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생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면 차라리 유교 신자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영생을 믿고 또 희망한다면 그에 맞게 살아갈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마르12,25-26)

죽은 후의 영원한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렇습니다. 부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처럼 될 것이고, 죽은 이들의 부활은 하느님 나라를 증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은 믿지 않는 자들의 것이라면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자식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넘어선 집착은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 결과 서로가 불행해져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현세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가면 자식에 있어서도, 재산에 있어서도,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울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믿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맞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자답게 산다는 것,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것은 그에 맞추어 준비하며 살아가는 책임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순교자들, 동정녀들, 수도자들은 자식도, 가정도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만을 희망했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지요. 영원을 믿지 않는 유교 신자들로서는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이 사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 100여 년에 걸친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 사건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사와 혈통만을 중시하던 유교 사대부들의 끈질긴 반대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소중한 목숨을 바쳐야 했지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하면서 유교 신자처럼 산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들의 사고 속에는 그런 유교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별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식 농사가 얼마나 잘 되고 재산을 얼마나 많이 쌓아 놓았느냐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하느님 안에 빛나는 것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나의 신앙 행위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