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7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12,29-31 )
"The first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Lord alone!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그러니 온몸으로 믿어야 한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계명의 본질을 자신도 모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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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동을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감동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성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감동을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그러한 자세로 다가간다면 그가 어찌 감동받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계명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온몸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온몸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동일시했습니다. 율법 준수와 하느님 사랑을 같은 자리에 놓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율법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동이 생략된 채 형식으로만 흐른다면 참으로 삭막한 일입니다. 온몸으로 애정을 쏟는다는 말만 앞세운 채 실제로는 메마른 행동의 되풀이라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감동을 주라는 말입니다.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그러한 감동을 준다면 자신의 삶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감동은 주는 만큼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멋진 작품을 그리고 싶어 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막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비 신랑신부는 동시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지요. 사랑은 가난을 부유하게 하고 눈물도 달콤하게 만들지요. 사랑 없이는 아름다움도 없어요.”
화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번에는 신부님을 찾아가서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믿음이지요. 주님을 믿는 간절한 믿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화가는 신부님의 말에도 수긍을 했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명에게 더 물어보자는 생각으로 마침 지나가는 한 지친 병사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병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무엇보다도 평화가 가장 아름답지요.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순간 화가는 생각했지요. 사랑과 믿음과 평화를 한데 모으면 멋진 작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그 방법을 생각하면서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순간, 바로 이 모든 것을 찾을 수가 있었어요.
우선 아이들의 눈 속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또한 아내의 눈에서는 사랑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과 믿음으로 세워진 자신의 가정 안에 평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마 뒤, 화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정’이었답니다.
우리들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할 때가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의 모습을 부러워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 지요?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들은 이미 우리의 곁에 있었습니다. 단지 세상의 것에만 관심을 갖다보니 중요한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문제였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613개의 유대교 율법 조항을 단 몇 줄로 요약해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알고 있었던 사랑의 계명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 사랑의 계명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시지요.
내 곁에 이미 와 있는 그 모든 중요한 것들을 얼마나 깊이 깨닫고 소중하게 여겼을까요? 그 중요한 것들을 깨닫고 소중히 여길 때, 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박영봉 신부-
모든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인가 하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상기시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로마 13,8-10).
올인
-김희경 수녀(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가슴 깊이 깨달은 기억이 되살아난다. 종신서원을 앞두고 40일간 침묵 속에 피정을 할 때였다. 내 인생 여정 속에 계신 하느님 현존을 가슴 깊이 담고 그 사랑이 넘쳐흐르게 했던 은총의 시간이었다. 어찌 그리 큰 은혜를 받고 살았는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정성껏 기도를 했다. 일 초, 일 분도 남김없이 하느님으로 내 모두를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리면서 말이다. 사랑의 숨결과 성령의 이끄심으로 내 생을 감싸주신 하느님의 섭리에 놀랐다. 부족하고 모순투성이인 나를 이리도 사랑하신다니 그 사랑에 겨워 많이 울기도 했다. 수도생활을 시작할 때 내게 생명을 주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앞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 그 ‘첫 마음’으로 재무장하며 피정을 마친 것이 엊그제 같다.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했는데 지내다 보면 나를 더 사랑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투정도 많이 한다. 하지만 이내 하느님 사랑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로서 내게 남은 일은 내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밖엔 없다는 고백 기도로 마무리하게 된다. 내 남은 생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올인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미소 짓는 얼굴
-김동환 신부-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실지 아침에 생각하셨습니까?
오늘은 여러분 중에는 약간 바쁜신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매우 한가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하루가 바쁘든 한가하든지 간에 좋은 일들로 가득 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런 때에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 다가와서 오늘 하루 동안 행운을 안겨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여러분은 오늘 하루가 좋겠습니까?
한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자, 다들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럼 조금 색다른 생각을 해 보도록 합시다.
오늘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 중에 그 사람들은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좋아할까?.....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내가 그 사람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나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상상 아닙니까?
오늘 내가 그 사람에게 행운의 여신이 되어서 그를 위해서 행운을 불어준다고 상상해 보세요.
즐겁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상상을 자주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빠서 못하신다고요... 어쩌다가 한번이라고요... 전에 한번 해본 적은 있지만 부끄러워서 실천한 적은 없다고요...그럼 지금 당장 해보세요.... 그리고 생각하신대로 옮겨 보세요.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용기를 내어서 꼭 해보세요.... 그리고 이런 상상을 자주하시고 그대로 잘 옮기시는 분들에게 하나 더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나면 미소를 지을까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나이가 아주 많으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일들은 어떤 일들이 있을지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부담 갖지 말고 한번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해 보세요.... 머리 속에 무엇이 떠오릅니까?
그리고 그것을 했다치고 한번 하느님의 미소 짓는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또 환하게 웃으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상상 아닙니까?
매일 아침 이렇게 세가지 상상을 하고 나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고 한번 그대로 해보세요. 아마 그날은 정말 멋진 일들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 일을 알아채시고 그대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런 상상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 방법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루 기쁘고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입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
--이봉하수사-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기본 정신은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절대자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냉담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그들은 각자 여러 가지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들자면 하느님과 싸워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 동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든지,
아니면 하느님보다 성직자 수도자를 너무 사랑하고 따르다가 어느 순간
그들 안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여 실망하고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존재 여부까지 파고 드는 상황에 이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믿음의 주인을 죽는 순간까지 믿고 따르며
사랑하겠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요 남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사랑할 때도 단순히
며칠 몇 달만 하는 것도 아니요, 편하고 기쁠 때만 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렵거나 병들었을 때나 한결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성녀들이 100퍼센트 예수님만 믿고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남긴 언행은 너무도 파격적이고도 의미심장한 것이어서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희자되고 있습니다.
한 농부와의 대화입니다.
“옳은 말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를지도 몰라. 그럴 때 어떻게 하겠어?
그땐 말이지, 칼을 빼서 자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그 사람에게 공손하게 돌려줘.
그리고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라고. 거기까지 가야 돼.”
이러한 그분의 생각은 당신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철저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시골 아낙네가 장일순 선생님을 찾아와 딸 혼수 비용으로 모아둔 돈을 기차 안에서 몽땅 소매치기 당했다며, 그 돈을 찾아달라고 선생님께 매달렸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주머니를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가셨습니다. 원주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놓고 앉아 노점상들과 애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기를 사나흘 하자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들을 죄다 알 수 있었고, 마침내는 그 시골 아주머니 돈을 훔친 작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를 달래서 남아 있는 돈을 받아냈습니다. 거기다 자기 돈을 합쳐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줬습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뒤로도 선생님은 가끔 원주역에 나가셨는데, 그것은 그 소매치기에게 밥과 술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소매치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네. 이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 잔 받으시고, 용서하시라고.”
앞으로 소매치기 같은 것 하지 말라든가 나무라는 말 같은 것은 일절 하시지 않았습니다.(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출판사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덧붙여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랑의 실천 대상인 ‘이웃’이 누구인지 당신의 한 평생 삶을 통해서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가까운 사람들, 절친한 친구들, 괜찮은 동료들 나와 ‘죽이 잘 맞는’ 사람들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웃’은 차원을 달리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이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족들, 열두 제자들뿐만 아니라 압제자 로마인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방인들, 세리와 죄인들, 생활이 문란한 여인들뿐만 아니라 막가는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던 바리사이들...모두가 다 이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 사랑은 늘 멀고도 요원한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그리스도인으 사랑입니다. 한계가 없습니다. 너무나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힘겹게 느껴집니다. 때로 하느님은 너무도 요구가 많은 분이시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한계나 장벽을 두지 않는 너무나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사랑, 힘들기에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 다시 한 번 마음 크게 잡수시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힘겹고도 먼 사랑의 길을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여럿이 함께하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어려움이 많다.
- 김효성 수녀 (성심수녀회, 통합사목연구소)-
여럿이 함께하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어려움이 많다. 심지어 무엇인가 좋은 뜻을 이루어 보고자 의기투합했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옛말이 있나 보다. 좋은 뜻과 바른 방법을 잘 알면서도 함께 일을 이루어 내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리라. 나는 지혜가 모자라서인지, 말재주가 없어서인지 공동체 회의에서 의견을 내어 여럿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돌아보면 다른사람들이 나보다 더 바르고 좋은 의견을 내어 그렇기도 하거니와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세 율법을 절대화하던 율법학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감탄스런 동의를 받아내신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런 일은 마르코복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복음 시작부터 반대에 반대를 거듭 받으신다. 특히 당대 사회에서 지도급에 있는 유력인사들에게서 반대와 질시를 받으셨는데, 그분이 바른 가르침을 펴실수록 사정이 더 악화되어 예루살렘 길에서는 그 고비가 절정을 이룬다.
그럴 즈음 책 잡으려 달려드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논쟁하시던 예수께 한 율법학자가 여쭙는다.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율법이라면 전공분야였던 그가 예수님의 해석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놀란다. 예수께 율법은(이론을 뛰어넘어) 살아 있는 명쾌한 실천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즉시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고 감탄어린 동의를 고백함으로써 바로 그 자리에서 첫째 계명을 실천한다. 율법을 글로 써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온 마음·목숨·생각·힘으로 율법을 드러낸 그에게 예수님은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인정해 주신다.
나의 옳은 생각과 관점이 내 틀에만 갇힌 죽은 율법으로 되어 간다면 이제라도 생동하는 율법 자체이신 주님 앞에 고백하면 어떨까? “그렇습니다, 주님” 하고…. 당장 주님과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꽃피어 날 나의 마음·목숨·생각 그리고 힘!
가장 먼 길
-김귀웅 신부-
오래 전에 ‘가장 먼 길’이라는 제목으로 쓴 동시가 하나 있습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옮겨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남극에서 북극에 이르는 길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길
아니 아니
그보다 더 멀고 힘든 길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
그리고 그보다 더더욱 멀고 힘든 길은
머리에서 손끝에 이르는 길
머리에서 발끝에 이른 길.”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평생의 노력으로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어려운 일이지요. 특히 남 앞에서 많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제로 살면서 내가 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고 자주 다짐하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알고 있는 것, 그러면서도 나는 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하라고 말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속으로 창피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냐는 물음에 슬기롭게 말한 율법학자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것으로는 가까이 갈 뿐이고, 그 아는 바대로 실천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죽으면 좋은 말만 해서 입만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 또는 좋은 말만 들어 귀만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그냥 웃어넘기는 것으로 끝낼 수 없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
-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2티모 2,8-15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복 음 : 마르 12,28ㄱㄷ-34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아는 말씀이지요.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ꡒ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ꡓ(마르12,28)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ꡒ첫째는 이것이다. ꡐ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ꡑ 둘째는 이것이다. ꡐ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ꡑ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ꡓ(마르12,29-3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이웃 사랑이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그 모습으로 비로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서 있지 않으면 이웃 사랑은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모든 것에 앞서서 그를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요. 다들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기를 원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내고, 그 어떤 귀한 것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안달이 나며,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어서 마냥 행복한 것이 사랑이지요. 그런데 사랑이 시들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만나자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또 무엇을 사달라고 하면 ꡐ나중에ꡑ하고 미루게 되지요. 상대방의 요구가 두 번째, 세 번째로 밀려나고 관심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사랑을 실천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 번째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요.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자로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삶의 첫 번째 자리에는 자식이, 남편이, 또 재물과 건강이 먼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 자리에 하느님을 놓지요.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것저것을 먼저 챙기고 서너 번째 차례에 슬그머니 끼워 넣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내 방식대로, 내 편리에 의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모든 것에 앞서서 생각하고 섬기고 함께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삶이 놀라운 것이지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가정도 자식도,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드린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지요. 주는 것 없이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참 사랑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ꡐ나눔ꡑ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셨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몸과 피까지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을 받아 모시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지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가난한 이웃에 대한 나눔의 실천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귀한 것을 나누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지요. 사랑의 첫 번째 표현은 나눔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좋게 보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나쁜 것만을 보는 사람이 있지요. 사랑이 없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끝없이 감싸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찾아내서 분발시켜 주는 것이지요.
24세에 왕으로 즉위한 뒤에 동방 원정을 시작하여 유럽과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에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은 동, 서양에 활발한 문물 교류를 이루었으며 그 영향으로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이 되는 등 세계 문명의 조류를 바꾼 인물입니다. 대제국의 건설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을 때 대왕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를 불러서 전신이 나오는 초상화를 그릴 것을 명령했지요. 평소에 대왕을 존경했던 화가는 기쁜 마음으로 작업에 들어갔으나 곧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오른쪽 뺨에 깊이 패인 상처가 있었고 그것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왕의 훌륭한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화가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묘수를 생각해냈습니다. 대왕을 테이블에 앉게 한 다음 손으로 오른쪽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감싸주는 것입니다. 어떤 비판적인 시각으로 파헤치는 것이 아니지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잘못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단점마저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이렇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기보다는 비판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점차 사라지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친구라는 말이 주는 감동이 많이 사라졌지요. 친구를 위해서 정말 내 목숨까지도 내어놓겠다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부모나 형제, 친구 사이에서도 이득만을 보려고 할 뿐 아주 작은 희생도 전혀 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들이 다 무너지고 있지요. 사랑은, 또 좋은 관계는 귀한 것을 나누고 감싸주고 받아들일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지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하고 1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내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니던 회사의 어느 세미나에 참석하게 된 남자는 사랑은 실천하는 것이라는 강의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이제라도 사랑을 표현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를 했지요. 아내가 전화를 받자 남자는 너무나 쑥스러워 말을 쉽게 하지 못했습니다.
ꡒ나야.ꡓ
ꡒ어머, 이렇게 일찍 웬일이세요?ꡓ
ꡒ저, 당신 말이야…ꡓ
ꡒ네!ꡓ
ꡒ저기 말이야.ꡓ
ꡒ뭔데요?ꡓ
ꡒ…ꡓ
ꡒ또 늦는다는 말씀이시죠?ꡓ
ꡒ아니, 그게 아니고…ꡓ
ꡒ아이고, 바쁘니까 빨리 좀 이야기하세요.ꡓ
아내의 재촉에 남자는 그만 내뱉듯이 얼른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ꡒ사랑해.ꡓ
ꡒ…!ꡓ
그 날 저녁 남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의 얼굴에는 13년 동안 보지 못했던 환한 웃음꽃이 활짝 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사랑은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면 달라지지요. 실천한다는 것은 나를 나누는 것입니다.
제대 앞 같은 자리에서 유아세례를 주고 첫영성체를 주며, 또 견진성사와 혼인성사, 장례미사를 봉헌하는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장례미사 때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지요. 삶을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나눔을 잘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나누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눌 때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삶을 무척 힘들게 살다 갑니다. 더더군다나 안타까운 것은 인색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인색을 떨고 욕심을 부리며 쌓아 놓은 재물을 그대로 고스란히 놔두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빈손으로 허망하게 떠나가지요.
내가 가진 것을 다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의 10%만 나누어도 부모자녀 간이나 형제지간, 이웃 사이의 무너진 관계가 회복이 될 것입니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원한다면 목표를 세워 놓고 나눔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 년 동안 쓸 수 있는 돈의 10%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또 이웃에 대해서 좋은 점보다는 좋지 않은 점이 더 빨리 눈에 들어온다면 내 시선을 바꾸도록 노력하십시오. 비난보다는 칭찬을, 지적보다는 감싸는 마음을 우선 갖추시기 바랍니다. 저는 초등학생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는 것과 더불어 친구를 칭찬하라는 보속을 제일 많이 내주고 있습니다. 칭찬은 듣는 사람보다도 하는 사람에게 더 큰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지요. 또 어린이 미사 때마다 퀴즈를 내서 상금으로 삼천 원씩 주는데 그 돈을 쓰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만 써야한다는 조건이지요.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돈을 썼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를 어린이들에게 체험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친구들을 위해 돈을 쓰고 돌아와 발표하는 어린이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나누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풍요로움을 번번이 확인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마디로 나누고 덮어주라는 것입니다.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지름길은 나누고, 감싸주고, 아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쉐마-법, 계명의 정수
-류해욱-
오늘 복음에서 어느 율법학자가 와서 예수께 묻지요.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왜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서 그런 물음을 던졌을까요? 법, 계명 등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율법학자가 그런 물음을 던진 속내를 헤아려 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유대인들 안에 두 가지 경향을 볼 수 있어요. 하나는 법이나 계명을 세분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분화된 여러 율법이나 계명을 다시 가닥을 잡아 큰 줄기를 찾고 몇 가지 핵심으로 압축하는 경향이지요. 세분하는 일은 주로 율법학자들이 하고, 법의 본질을 담아서 압축하는 일은 주로 예언자나 유명한 랍비 등의 대가들이 했지요.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613 가지의 법으로 세분화했는가 하면, 그것을 다시 몇 가지로 모으는 시도가 구약 성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압축했던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다윗은 시편 15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을 11가지로 압축합니다. “야훼여, 당신 장막에 살 자 누구입니까? 첫째,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둘째,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셋째, 남을 모함하지 않는 자이며..... 등등이지요.
이사야 예언자는 누가 야훼의 법을 지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물으며 다시 6개로 압축합니다. (이사 33, 15) 첫째, 옳게 살고, 바르게 말하는 사람, 둘째, 착취로 돈을 벌지 않는 사람, 셋째, 뇌물을 마다고 뿌리치는 사람, 등등.
미가 예언자는 다시 3개로 압축합니다. (미가 6, 8) 첫째, 정의를 실천하는 일, 둘째,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셋째,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등등.
당시 이스라엘의 유명한 랍비들도 몇 개, 또는 하나로 압축하기도 했지요. 예수님 시대 당시에 많은 제자들이 따랐던 가장 유명한 랍비는 힐렐이라는 사람이었는데요. 힐렐파라는 학파가 생길 정도였지요. 그는 당시 법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네 이웃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법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다만 주석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과 비슷하지요. 또 다른 유명한 대가 중의 한 사람인 아키바라는 랍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모든 법의 원칙이다.”고 했지요. 아키바도 예수님과 같은 말을 하지요. 두 분 다 성서를 인용하신 것이지요.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라는 그런 물음을 던진 것은 예수님을 대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면서 가르침을 구한 것이 아닐까요? 다른 어떤 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께서는 다른 대가들처럼 법의 핵심을 구약성서를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예수님도 두 계명으로 압축하시네요.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실상 하나로 압축하신 것이지요. 첫째가는 계명으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신명기 6, 4-5이지요. 신명기에서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는 의미로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하지요. 히브리어로 쉐마라는 말이 ‘듣다’라는 동사의 명령형인데 바로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는 의미로 쓰는 용어가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쉐마,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씀하셨지요.
랍비 아키바도 인용했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 18입니다. 다만 레위기에서의 이웃의 의미는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예수께서는 이웃의 범위를 무제한으로 열어두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지요.
예수님이 하신 중요한 것은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에게서 이웃은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됩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주님, 바르게 하느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 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담화 †
-박상대 신부-
잘 알다시피 마르코복음 1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에 속한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의 대부분(1-9장)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그 마지막 시기에 베드로의 메시아고백을 받으셨고, 이어서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목에서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고(10장),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정화 사건(11,15-19)으로 예루살렘 활동기를 시작하셨다.
예루살렘 활동기는 사실상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외적인 업적보다는 적수(敵手)들과의 논쟁과 대담을 통한 자기계시적 가르침, 그리고 종말과 재난의 예언 등으로 일관된다. 논쟁과 대담은 주로 적수들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으로 이루어지는데 예수의 권한논쟁, 납세에 관한 대담, 부활논쟁 등은 이미 치러졌고, 오늘 복음은 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대담을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고,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오늘은 율법학자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서기관 또는 랍비(스승)라고 불리던 율법학자들은 바빌론 유배(B.C 587년) 이전에는 예언자와 사제들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삼대 지도계급에 속했다. 그러나 유배 이후(B.C 538년)에 들어 사제들은 권위를 잃었고, 기원전 500년경에 활동하던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와 말라기를 끝으로 더 이상 예언자들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메시아 사상이 강하게 싹트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은 모든 희망을 토라(율법)에 두었다. 이 때부터 율법학자들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더욱이 희랍의 통치(B.C 333년)와 로마제국의 통치(B.C 63년)가 이어지면서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힌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구심점을 잃게 되고, 흩어진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그 안에 회당(Synagogue)을 세워 안식일 예배를 드림으로써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지게 된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제사 없이 율법서와 예언서의 봉독과 해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사들이 사제들보다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물론 신약시대에 들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각종 제사는 거행되었다. 율법학자는 상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년간의 정규적인 연구과정을 거친 사람이면 40세의 나이를 채운 자에 한하여 서품을 통하여 누구나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 중에는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뿐 아니라 일반직업을 가진 평신도 출신도 있었고,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에 속한 자도 있었다. 특히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는 모두가 율사들이었다. 율법학자들의 힘은 오직 율법에 대한 지식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했고, 술 달린 긴 예복을 입고 다녔으며, 향연에서나 회당에서 항상 윗자리에 앉았다.
이러한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248개 조항의 행령(行令)과 365개 조항의 금령(禁令)을 합한 613개 조항의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가 예수와 사두가이파 사람들 사이의 토론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호쾌한 답변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이 질문을 하였다(28절)는 오늘 복음의 서두와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34절)는 말미는 순전히 마르코복음사가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오늘도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하다. 613개 조항을 축약하면 십계명이 될 것이고, 십계명을 축약하면 첫째가는 계명이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는 계명이고, 둘째가는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18)는 계명임을 이 율법학자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골자로 선포하신 사랑의 이중계명인 것이다.(마태 22,34-40; 루가 10,25-28 참조)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신 사상의 재확인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율법학자의 답변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큰 성과이다. 그렇다. 야훼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며, 재물을 바치기 전에 하느님이 마음을 알고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호세 6,6)
사랑의 이중계명을 다시 환원시키면 십계명이 되고, 십계명을 다시 환원시키면 수백 개의 계명이 될 수도 있다. 사랑은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도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의 핵심정신을 비켜갈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알고 지키는 자에게 이미 하늘나라를 약속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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