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9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12,38-44)
“Amen, I say to you,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 contributors to the treasury.
For they have all contributed from their surplus wealth,
but she, from her poverty, has contributed all she had,
her whole livelihood.”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예수님의 시선을 더 받는다. 정성이 담긴 헌금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금방 아셨던 것이다. 또 다른 천사가 그 여인을 평생 보호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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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진실한 기도와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토빗기는 오늘 이 말씀을 남깁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속담에도 “적선하는 이는 귀신도 어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선을 쌓는 사람은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이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만이 아신다는 마음으로 선을 베풀라는 가르침입니다.
요즈음은 ‘광고가 꽃’이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알리는지에 그 기업의 성패가 달렸다고 합니다. 자신을 알리는 데 꾸미고 또 꾸미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도우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다 봉헌하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궁핍한 사람들의 심정을 알았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액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복음에는 그 과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아주 신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3월부터 시작했던 인천 가톨릭대학교 종교미술학부 강의를 마치는 날이었거든요. 학생들이 신나해야 할 날에 가르치고 있는 제가 더 기쁘니,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저것을 하다 보니 항상 시간이 부족했지요. 1시간 강의를 준비하려면 이 시간의 몇 배가 되는 시간을 준비를 해야 하니, 늘 바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강의 준비를 해서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이 잘 귀담아 들으면 이야 저도 신나서 강의를 하겠지만, 단순히 학점만을 따기 위해서 들어온 학생들에게 강의하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더군요. 그런 학생들은 주로 수업에 늦게 들어오거나, 들어와도 딴 짓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그러면서 저를 가르쳐 주셨던 많은 은사님들을 떠올려 봅니다. 저 역시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학생은 아니었거든요. 저의 모습에 얼마나 많은 은사님들의 마음을 속상하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해보니, 이제야 은사님들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은사님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네요.
상대방의 처지에 있을 때, 그 상대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 상대방의 처지를 전혀 모르는데 그리고 그 상대방의 입장에 놓여있지도 않은데, “나는 너를 이해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헌금 액수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열심한 사람이구나, 그렇지 않구나.’를 결정했지요. 바로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보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외아들이라서? 아닙니다. 당신께서 스스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직접 낮은 자의 삶을 사셨기에, 가난하고 소외된 낮은 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사람들을 어떤 모습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대신 마음을 그리고 정성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상대방의 자리로 낮추셨듯이, 우리 역시 상대방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낮은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일 봉헌할 주일 헌금을 미리 정성껏 준비합시다.
빠다킹신부
악한 표양 박영봉 신부
악한 표양은 악을 저지르도록 타인을 이끄는 태도나 행위를 말합니다.
악한 표양을 보이는 사람은 이웃을 악으로 이끄는 유혹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덕과 정의에 해를 끼침으로써, 이웃을 영적 죽음으로 이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행위로 일부러 타인이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게 한다면,
그 악한 표양은 중죄가 됩니다. 특히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악한 표양을 보인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악한 표양은 법이나 제도, 유행이나 여론 등으로 유발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정행위를 조장하는 기업주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격분하게 하는 교사들, 여론을 조작하여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하는 사람도 악한 표양을 보이는 것입니다.
철저하고 겸허한 봉헌
-김희경 수녀(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
복지 현장에서 만나는 다양한 분들한테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똘똘 뭉친 소명을 엿볼 수 있다. 수도자들한테는 공동체가 곧 울타리고, 어려울 때 지지 기반이 되어준다. 하지만 오로지 혼자서 소명감으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에 자신을 투신하는 평신도들은 자신의 열정과 믿음이 전 재산이다. 내가 속한 서울 지역 아동센터 협의회 소속 개별 공부방 대표 선생님들은 십여 년에서 길게는 이십여 년 가깝게 변두리 달동네에서 공부방을 열어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고, 그 지역 주민들의 든든한 조언자이며 동반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삼십대에 시작한 그들의 열정은 사오십대가 되었어도 식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년이 된 나이라 어느 정도 노후가 걱정되기도 하겠지만 언제나 그 선생님들은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 신나는 나날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삶 안에서 기쁨과 살아 있는 생명력을 느끼며 생활하는 공부방 선생님들의 투신은 자신의 전재산을 교회와 사회에 내놓고 바친 철저하고 겸허한 ‘가난한 과부의 봉헌’과도 같은 것이다. 선생님들이 바치는 삶의 구체적 봉헌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독서> : 천사들의 역할
천사들의 역할은 첫째 천국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께 큰 영광과 흠숭을 드리는 일이다. “천만 신하들이 떠받들어 모시고 또 억조창생들이 모시고 섰는데...”(다니 7,10).
천사들은 하느님을 흠숭하며 그분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고 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인간으로 태어나시던 밤에 있었던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때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가 2,13).
이사야 예언서 6장 1절부터 4절에도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모습이 나온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하며 미사 때 드리는 찬미가는 이사야 예언자가 그 모습을 본 대로 천사들이 부르던 노래이다.
둘째로 천사는 하느님의 사신으로서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의 소식을 전한다. 성서에는 천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일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이며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능력들로서 하느님의 심부름꾼들이다. 천사 가브리엘 ‘하느님의 힘’이란 뜻의 천사의 이름이다. 이 천사가 구세주 탄생을 마리아에게 예고했고, 또한 엘리사벳 에게서 요한 세자가 탄생할 것을 즈가리야에게 예고했다(루가 1,5-25)
은 성모 마리아에게 와서 구세주 탄생하실 것을 알렸다(루가 1,26-38). 또한 그 옛날 야훼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자 아들을 바치라 명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산으로 데리고 가 칼로 그 목을 치려 했다. 그때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가 그의 손을 멈추게 하여 하느님의 시험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창세 22,1-20). 이밖에도 많이 있지만 일일이 다 여기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셋째로 천사들은 인간을 도와주며 하느님의 명을 따라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 성서에는 자주 천사들을 인간의 형태로 표현하면서 그들이 인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말해 주고 있다. 토비트서 12장에는 라파엘 ‘하느님의 치유’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천사로서 도비아에게 물고기를 잡아 그 비늘을 태워 아버지의 눈 에 바르게 하여 도비아의 눈먼 아버지를 낫게 해 준다(토비 12장)
천사가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 토비트를 어떻게 도와 주었는지 잘 보여 준다. 또한 다니엘서 3장에 의하면 천사가 세 아이들을 불가마 속에서 구해준다.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여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행여 너 돌뿌리에 발을 다칠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고 가리라”(시편 91,11-12). 시편 저자는 천사들이 우리의 길을 보호하고 도움을 주고 있음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까따꿈바 묵상팀]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난한 과부의 정성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을 칭찬하는 말씀인데, 전체적으로 보아 율법학자의 태도와 가난한 과부의 태도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는 내용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조심하여야 할 내용은 크게 보아 명예욕과 재물욕이다. 예수님은 먼저 장터와 회당과 잔치 자리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그들의 명예욕을 비판하신다.
둘째로는 두 가지 예를 통해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들추어내신다. '과부들'은 구약성서에서 '고아' 와 '떠돌이' 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 의 대표격으로 자주 언급되는데,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날카로운 비판의 말씀을 하신다.
율법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는 일이 일어 나는지에 관하여는 복음말씀을 통해 알 수는 없지만,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의 역할을 하면서 과부들을 속여 먹는 경우들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는 있겠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남들에게는 거룩한 듯이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며,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신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이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에 관한 대목을 살펴보자. 이 대목은 예수께서 '헌금함' 이 놓여 있던 성전 앞마당에서 앉아서 가르 치고 계셨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앞의 대목에서는 율법학자들의 태도가 본받지 말아야 할 예로서 제시되었다면,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의 대목에서는 과부의 태도가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어 있다. 매우 대조적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대목에 나오는 과부에 관하여는 그가 나이가 많은지, 병중에 있는지, 가족들은 있는지 등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 하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어느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화폐단위였던 렙톤 두 닢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며 매우 장중 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치평가가 잘못 되어 있음을 가르치신다. 헌금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헌금으로 표현되는 자세의 질이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외양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가르치신다 (참조: 야고 2,1~13).
그리고 바로 앞 대목에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 에 관한 말이 있었는데, 다시 이 대목에서 과부가 언급되면서 그의 '가난한' 처지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가난한' 과부들을 도와 주어야 할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그들을 '등쳐먹어' 그들의 가난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판단은 준엄 하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 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종교지도자들의 그릇된 태도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말해준다.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토록 날카로운 비판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유다인 사회에서 영향 력이 매우 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과부는 일반적으로 성서의 유다인들의 사회에서 너무 가난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무시받기 쉬운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가난한 과부를 본받아야 할 예로 제시하신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은 당시의 사회에서 볼 때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어떠 한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말하기 전에 우선 종교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피해를 주는 경우들도 더러 있음을 생각할 때, -그것이 어찌 사이비 종교들 에게서만 보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찌르듯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은 복음 말씀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율법 학자들의 명예욕과 재물욕이 뒤섞인 위선을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하지만 온 정성을 다해 헌금하는 과부의 정성어린 '하느님 공경' 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초대를 받는다.
또한 복음 말씀은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특히 교회안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자신들이 혹시라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 부터 심하게 비판받는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교회 공동체 전체는 교회 안에서 가난한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무시 당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고, 그들이 교회를 따뜻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한다고 깨우쳐 준다.
교회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은 '하느님의 사랑' 과 '이웃 형제자매들의 사랑' 을 따뜻하게 느낄 수 있도록 급히 구체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향기가 있는 꽃, 향기가 없는 꽃
-이봉하수사-
지난 2005년 가을, 80대 할머니 한 분이 갖은 고생을 하며 평생 동안 모은 큰 돈을
어느 대학에 기부하였다는 훈훈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할머니뿐 아니라
세상에는 평생 법 없이도 살 만큼 선하게 살면서 모은 전 재산을 금액과 상관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아름다운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단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분들은 하나같이 돈이 많은 가운데서 얼마를 사회에 기부한 것이 아닙니다.
전 재산 아니 생명을 다 내놓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놓은 것입니다.
사회 안에 익명의 독지가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가 그 사회의 건강함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는 기부 문화가 미흡한 가운데
날이 갈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신앙생활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려다보면 모든 것이 욕심이고/ 내려다보면 모든 게 허공인데/ 나는 오늘
어디를 보고 걷고 있는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양승국신부-
<그리운 신부님>
정말 웃기는 인간들인 불쌍한 율법학자들, 그들은 오늘도 예수님으로부터 신나게 야단을 맞습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꼭 저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았기 때문입니다.
수도생활의 연륜이 더해갈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하는데, 가난한 아이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하느님으로 섬겨야하는데, 새싹 같은 소중한 후배들을 하늘처럼 섬겨야 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을 따라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하는데 가진 것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민족의 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 좋은 이정표가 되어주고, 모범이 되기는커녕, 백성들을 갈팡질팡 방황하게 만드는 율법학자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지적의 가장 구체적인 대상은 위선입니다. 탐욕입니다. 교만입니다.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그로 인한 거짓가르침입니다.
백성들은 기가 막히게 알지요. 누가 착한 목자인지, 누가 악한 목자인지를.
무엇보다도 그들은 가난한 민중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축척한 부의 출처는 가난한 과부들이었습니다. 착한 목자임을 식별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은 가난한 목자임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율법학자들은 조금 배웠다고, 가방끈이 길다고 엄청 뻐겼습니다. 못 배운 사람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길을 갈 때면 단 한 번도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기를 쓰고 연단에 앉으려고, 그래서 폼 한번 잡으려고, 매스컴 한번 타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더욱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의 위선적인 신심생활이었습니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으면서 기도할 때는 엄청 거룩한 척 했습니다. 길기는 또 왜 그렇게 깁니까? 하늘을 향해 팔을 펼치고, 눈을 치켜뜨고, 정말 꼴불견이었습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의 해도 해도 너무한 위선에 마음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셨기에 목숨까지 걸고 그들의 위선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힘겨운 세상,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백 마디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는 착한 목자, 자신의 구체적인 삶 전체를 통해 또 다른 예수님을 보여주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매월 일선 사목자들을 위해 발간되는 ‘사목’이란 잡지가 있습니다. 최근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 사목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목자료들을 제공하는 좋은 잡지입니다. 사목자들뿐만 아니라 신자들께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기에 구독을 권유합니다.
이번호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이란 꼭지기사에 제가 존경하는 신부님에 대한 글이 실려서 너무나 반가웠고 행복했습니다.
“1978년 겨울 한가운데의 어느 토요일 오후라고 기억된다. 교적을 옮기느라 본당을 방문하고, 성체조배를 하려고 성당에 들어갔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쓰고 작업복 차림을 한 어떤 분이 성당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가뜩이나 추운 실내 공기에 유리창까지 열려 있어 단 몇 분도 있지 못하고 성당을 나오면서, 직장이 없어 성당 청소를 해야만 하는 왜소한 체구의 그 아저씨의 처지가 안타깝고 측은하였다. 그런데 그분이 본당신부님이신 서정술 신부님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1980년 겨울, 꾸르실료 교육을 받고 하느님의 사랑이 고마워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우선 본당 청소를 해볼까 하여 어느 토요일에 성당에 갔더니 그 아저씨, 아니 본당 신부님께서 여전히 혼자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에서 그 일에 몰두하고 계신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쉬시는 월요일이면 농사짓는 교우 집을 방문하시어 땀 흘리시며 일손을 빌려 주셨고, 소독저가 방안 가득 쌓여있는 교우 집에서 소독저 포장을 척척 해내시며 교우들과 어울려 국수도 삶아먹고 김치 한 가지의 조촐한 식사를 즐겨 드셨다. 된장 뚝배기에 수저를 점벙점벙 담그시며 소탈하게 식사하시는 모습이 마음 편한 이웃 아저씨 같았다.”(조두이,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 사목 329호 참조).
제 마음 깊숙이 언제나 제가 나아가고픈 이상향으로 남아계시는 그리운 신부님, 오랜 날들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양떼 곁에 착한 목자로 남아주십시오.
작은 사람의 큰 신앙
-이기양 신부-
여러분들께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대답해보세요. 우리나라에서는 기초 생활 수급자들에게 구청을 통해서 얼마씩의 생계비를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당에서도 생활비나 기타 장학금 등의 명목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지요. 이렇게 여러 종교 단체나 사회복지 시설에서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도처에 가난한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에는 신자들도 많지요.
그런데 어려운 처지의 신자들 중에서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ꡒ남한테 도움을 받는 처지에 제가 무슨 교무금을 내겠습니까?ꡓ
도움을 받고 있으니 안 내는 것이 남을 돕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것이 오늘 저의 질문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주위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교무금을 내야 할까요? 안 내는 것이 타당할까요?
교무금은 당연히 내야 합니다. 교무금 납부는 모든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에게는 신자로서의 6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축일과 대축일 미사, 즉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성모승천 대축일, 예수 성탄 대축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참례할 의무가 있지요. 둘째, 정해진 날에 금육과 단식을 지켜야 합니다.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고, 금육은 사순절 동안의 재의 수요일과 매주 금요일에 지켜야 하지요. 셋째,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고백성사를 받아야 하고, 넷째,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부활 때는 반드시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다섯째, 신자는 교회 유지와 사업을 위하여 가정 단위로 교무금을 내고 헌금을 각자 봉헌해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혼인성사에 관한 혼인법을 지켜야 하지요. 태어난 자녀에게 세례를 주고 교리를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신자라면 당연히 교무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에서 사렙타 마을의 한 과부는 심한 기근이 들어 마지막 먹을 것만을 남겨 둔 상태에서 하느님의 사람에게 음식을 먼저 대접했고, 그 이유로 하느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근이 끝날 때까지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ꡐ콩 반쪽이라도 나누어 먹는다.ꡑ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나눔은 면제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헌금궤 맞은 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넣은 렙톤 두 닢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ꡒ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ꡓ(마르12,43-44)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렙톤 두 닢은 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의 1/72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돈이었습니다. 하루 노동자의 일당이 5만원이라면 약 700원에 해당되는 액수이지요. 그러나 과부는 그 돈을 정성을 다해 봉헌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의 정성된 마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정성을 다해 봉헌하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불우한 이웃에게 더욱 정성이 담긴 봉헌과 나눔이 이루어져야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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