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0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루카 9,11ㄴ-17)
He said to them, "Give them some food yourselves."
They replied, "Five loaves and two fish are all we have,
unless we ourselves go and buy food for all these people."
Then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aid the blessing over them, broke them,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crowd.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빵은 음식이요 양식이다. 하루라도 먹지 않는 날이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빵을 선물하셨다. 말씀을 듣고 따라왔던 군중만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성체 역시 기적의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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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힘을 얻으려고 성체를 모십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풍요로웠지만 육신은 배고팠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라고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뿐이었습니다. 어른 한두 사람이 먹어도 모자라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군중이 배불리 먹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요즈음은 각종 세균 때문에 먹을거리에 무척 민감해졌습니다. 그러나 내적 음식에는 무관심합니다. 영혼에게도 음식이 필요하건만 그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삶이 우울하고 이유 없이 불안한 것은 영혼이 굶주렸다는 신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영혼에 양식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의 힘을 얻고 마음이 밝아집니다. 삶의 기쁨을 얻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힘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스스로 다짐해 봅시다.
성체
-박영봉 신부-
예수님께서 군중을 먹이시려고 빵을 축복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을 시켜
나누어주신 빵의 기적은 당신 성찬의 이 유일한 빵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요함을 준다는 것을 예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빵으로 양분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빵으로 양육되고
굳세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사성제를 통하여 이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성사에 현존하시게 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도 성체가 “날마다 짓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고
죽을 죄에서 보호해주는 해독제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은 마땅히 성체를 공경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흠숭 안에서, 신앙으로 충만하며, 중대한 잘못과 세상의 죄를 속죄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드리는 묵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을
거부하지 맙시다. 우리의 흠숭이 중단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주님, 오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함께 잘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런 보편지향 기도가 때로는 참 공허하게 느껴집 니다. 그 까닭은 어떤 형태로든 내 양식을 쪼개어 나누기보다 이 기도로 써 내가 할 몫을 다 한 것처럼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 참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장정만 오천이니…) 이야기는 군중을 사이에 둔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일화로, 벳사이다 고을 어디, 마을도 없는 황량한 장소에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기승전결의 형식으로 나누어 봅니다.
<기>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다니는 군중에게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 말씀도 해주시고 병도 고쳐주신다(11절).
<승>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제자들이 와서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군중을 보내어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자고 예수께 제의하는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먹을 것을 주라고 억지(?)를 부리신다. 빵이 턱도 없이 부족한 그들의 사정을 말하니 예수께서는 그제야 그들을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잡고 앉도록 지시하신다(12-15절).
<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축복하신 다음 제자들을 시켜 군중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야기의 절정이다(16절).
<결>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17절).
이 일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파견받았던 제자들이(9,1-6)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께 보고하였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사이다란 고을로 물러가셨는데, 군중이 이를 알고 따라와 그들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으로 보입니다(9, 10). 아마 예수님과 제자들 마음에 이런 생각이 교차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 배도 고프고 피곤한데 이제 이 훼방꾼들을 좀 돌려보냈으면 좋겠다. 날은 저물고 인가도 없는 이 황량한 곳에서 스스로 먹을 것과 잠자리를 구하도록 빨리 보내는 것이 현명한데 선생님은 저렇게 계속…. 체력도 좋으시지. 말씀드리자.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예수님: 너희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너희는 조금 전까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온 사도들 아니냐. 너희는 어떤 마음으로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냈느냐? 남을 위해 불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각자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라고? 아직 멀었구나! 이 기회에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몸과 피를 너희의 생명을 위해 내놓을 때까지 너희가 오늘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줄을 알지만 비로소 알아들을 그날을 위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 사정 잘 아시잖아요. 장정만도 오천 명, 모두 합치면 헤아릴 수도 없는 이 사람들에게 저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요? 우리 먹을 빵도 모자라는 판인데. 더구나 그만한 빵을 살 가게는 없고, 날도 어두워지고, 그만한 돈은 더욱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고 말하고 싶지만.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아버지께서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굶긴 적이 있었더냐? 엘리야가 기진하였을 때 천사들이 두고 간 빵, 사렙타 과부의 이야기를 모르는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카나의 혼인잔치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느냐? 물이 최고의 맛을 가진 포도주로 변해 잔치의 흥이 깨지지 않았음을.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신 어머니의 믿음을 못 보았는가? 내가 시키기 전에 ‘주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도 부족하구나.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의 회상: 주님,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빵이 당신의 ‘살’이라는 것을. 그때의 황량한 장소는 바로 군중에 대한 연민이 없었던 저희의 황량한 마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마지막으로 저희와 파스카 식사를 하실 때 빵을 들고 감사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하실 때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축제의 기쁨에 들떠 있었지요. 부활하시어 저희와 엠마오의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 빵을 쪼갤 때 빵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만(루카 24,35)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대표인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셨을 때 어떻게 돌보라는 말씀이신지 아직도 제대로 몰랐지요.
그러나 당신께서 떠나신 이제야 확연히 당신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함께 계실 때 알았더라면 당신께 기쁨을 드렸을 텐데 참으로 저희는 어리석고 굼뜨고 미련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요한 16,7)고 하셨군요. 당신은 ‘살아서 키우시고 죽어 가르치십니다.’(이 표현은 유소림 시인의 「살아 키우시고 죽어 가르치시네」에서 인용) 하고 깨달은 지금 당신의 사랑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저희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하신 대로 주님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을 나눕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양떼들의 빵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고파는 상거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서로 내어 놓을 때, 그것을 나눌 때 비로소 모두가 만족하고도 남는 것이라는 것을 당신을 믿는 모든 제자들이 알고 행하도록 말입니다!
주 예수, 사랑 깊은 펠리칸이여!
-김지영 신부-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로 유명합니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는 어미새 펠리칸이 등장합니다. 어미새 펠리칸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새들을 해변에 놓아 두고 먹이를 구하러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어미새는 단 한 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맙니다. 여행에 지친 어미새 펠리칸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떼들은 어미새에게 몰려갑니다. 그러자 어미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합니다. 다음 순간 어미새는 해변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습니다. 어미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새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또 하나의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남김없이 내주신 한없는 사랑. 그래서 성 토마스는 ‘성체찬미’에서 ‘ 주 예수, 사랑 깊은 펠리칸이여’라고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매일 세 끼의 밥 이외에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으로서 성체의 의미를 좀 더 새롭고, 가슴에 와 닿는 실제적 의미로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매일 대하는 밥상을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살 수 있는 생기를 주는 이 밥은 어떻게 해서 내 밥상 위에 놓이게 되었는가? 그것은 부모의 피와 땀이 한 그릇의 밥을 상 위에 올려놓은 것이고, 이것이 자녀의 생명을 자라게 하고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밥의 앞면에는 ‘자녀의 성장’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부모의 죽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라는 밥상 위에 당신을 밥으로, 제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밥이라고 선언하시는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사랑의 절정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앞면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미사 안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는 한갓 밀가루를 구운 빵 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기와 살아갈 힘을 주는 예수님의 몸인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부서지고 나눠지고 먹히는 삶을 사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성체성사 안에서 부서지고 나누어지고 먹히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모신 우리도 가정과 이웃 안에서 조건 없이 내어주는 존재, 쪼개어지는 존재 봉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성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성체는 바로 나를 지탱해 주는 음식이기에 성체 없이는 나의 봉헌생활은 하루 한 시간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돌보는 가난한 이들은 바로 예수님의 성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고통은 작아지고 기쁨은 커집니다 "
-이기양 신부-
아빠와 일곱 살 난 아들, 다섯 살짜리 딸이 살았습니다. 어느날 등산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응급수술을 받던 중 급하게 수혈이 필요하게 됐는데 가족 중에 아들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은 딸뿐이었습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아빠가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오빠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딸아이는 잠시 동안 무얼 생각하는 것 같더니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 의사선생님은 수술이 대성공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때까지 딸아이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구나."
아빠의 말을 들은 딸은 낮은 목소리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와! 정말 기뻐요. 그런데 전 언제 죽게 되나요?"
아빠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죽다니,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피를 뽑으면 곧 죽지 않나요?"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흐른 뒤에 아빠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죽을 줄 알면서도 오빠에게 피를 주었단 말이냐?"
"예,… 전 오빠를 사랑하거든요."
오빠에 대한 동생의 사랑이 놀랍습니다. 행복한 가족이지요.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쳐줄 사람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순순히 바칠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목숨을 바쳐 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목숨까지도 주셨으며, 심지어 당신의 몸과 피까지도 성체와 성혈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셨듯이 그것을 받아 모시는 우리 역시 그러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 성체성혈 대축일의 의미입니다.
성체는 나눔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그것을 받아 모신 우리가 또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성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어느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바탕 큰 격전이 오고 간 후에 부상을 당한 어느 병사가 애타게 마실 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를 본 군종 신부는 자신의 수통에 약간의 물이 남아 있음을 알고 그 부상병에게 수통을 건네주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갈증으로 숨이 넘어갈 것 같던 부상병은 급히 물을 마시려는 순간 모든 소대원들이 자기를 애타게 쳐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갈증으로 목이 타기는 너나없이 똑같았던 것이지요. 부상병은 상사인 소대장에게 수통을 건넸습니다. 소대장이 그 정황을 모를 리가 없었지요. 소대장은 수통을 집어 들고 꿀꺽꿀꺽 소리가 나게 물을 마시고는 부상당한 부하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시려던 부상병은 수통의 무게가 전혀 줄지 않은 것을 눈치 챘습니다. 소대장의 뜻을 알아들은 부상병은 소대장처럼 소리를 내어 물을 마시고는 다른 병사에게 그 수통을 넘겨주었습니다. 이렇게 전 소대원들이 모두 꿀꺽꿀꺽 소리 나게 물을 마셨지요. 마침내 한 바퀴를 다 돈 수통은 본래 주인인 군종 신부에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물은 전혀 줄지 않은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이제 그 곳에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누려는 마음만으로도 갈증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는 노력이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누자고 하면 우리는 즉시 부유한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저 사람들이 나누면 이 세상은 더 행복해질 텐데….'
나눔은 나보다 형편이 나은 저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유한 '그들'만이 나눔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모신 바로 '내'가 나눔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나부터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그리스도 성체성혈 대축일에 성체를 받아 모신 여러분이 먼저 나눔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성체나누기는 사랑과 은혜 나누기
- 조순창 신부-
6월의 뜨거운 태양의 열기 아래 무성하게 녹음이 짙어져 가는 계절에,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기리는 ‘예수 성심 성월’입니다. 6월의 첫주일인 오늘은 예수님 사랑의 표징인 성체 현의(玄義)를 나누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일주일 동안 무더운 날씨에 시간에 쫓기고, 일이나 숙제에 몰리면서도, 일한 흔적은 적고, 수익이 부족해서 더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인 듯합니다. 시간이나 돈의 여유 없는 삶, 사람과 자동차와 공해, 그리고 세금과 폭력이 넘치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분이 말씀과 성찬의 잔치에 초대받은 만큼, 피로와 스트레스를 푸시고, 몸과 마음의 병의 치유를 받으시고, 재물과 풍요와, 지식과 지혜를 얻으시고, 새로운 활력과 축복을 받을 좋은 자리입니다. 은혜의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우주와 사회와 인간은 질서에 따라 순환하고, 공정하게 분배되고, 선악에 따라서 보상이 되어야 합니다. 돌고 도는 돈이 유통이 잘 되어야 경제가 활기 있고, 지식을 나누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찾음으로써 학문의 발전과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권력도 순리대로 교류해야 정치 안정이 되며, 법이 공정하여야 사회가 평화롭습니다. 이 사회는 그렇지 못한 면이 많아서, 돈은 들어가면 안나오고, 사이비 학자 시비가 있고, 권력도 잡으면 안 놓을 때에, 괸 물이 썩듯이 사회의 부조리와 악순환이 계속 되어서, 생존을 위한 돌파구가 사고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현세적이며 인간적인 욕심으로 꺾이고 시들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원리는, 사랑으로 나누는 성체의 원리뿐입니다. 성체주의의 원리는 생명(예수님의 몸)을 나누는 원리입니다. 한 생명을 나눈 형제는 생사 고락을 같이 해야 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는 인권 유린과 살인과 전쟁과 폭력은 사라질 것입니다.
성체주의의 원리는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나누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밤낮으로 사람들을 만나시고 은혜 주시며, 집도 없이 죽으시고, 남의 무덤에 묻히시고, 십자가상의 죽음의 경각에서도 강도와 악의 앞잡이들을 사하여 주셨고, 목숨마저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체주의의 원리는 사랑을 나누는 원리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여 구원 얻도록 하셨는데,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있기를 원하듯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성체 안에 오늘도 현존하여 계신 만큼,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축복과 사랑의 표지가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고립되고 불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존중하고, 아낌없이 가진 바를 사랑으로 나눌 때에, 그 가진 바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5000여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광주리나 될 만큼, 큰 기적을 오늘도 우리 손을 통하여 성체의 은혜로 이루어 주십니다.
생명을 나누어주는 잔치, 가진 것을 나누는 잔치, 사랑을 나누어주는 성찬, 이 모두를 모으고 챙기면 모두에게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나누어주고 베풀면, 모두에게 풍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는 우리는, 차고 넘치게 은혜 받는 시간입니다. 성체께 흠숭과 감사를 드립시다. 잘 모시고 참사랑으로 나누며, 모두에게 차고 넘치는 기쁨을 함께 누립시다.
사랑과 나눔의 성사인 성체
-함세웅 신부-
오늘은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으며, 매주일 성체를 받아 영하는 우리에게는 사실, 어떤 의미로는 매일, 그리고 매 주일이 성체 축일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교회 전례는 일정한 축일을 정하여 더욱 깊이 성체의 신비를 묵상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목요일에 우리는 성체성사 설정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미 그 뜻을 장엄하게 기념했습니다.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로 표시된 예수의 몸과 피, 곧 예수의 현존을 체험케 하는 실재적 징표(實在的 徵標, Signum reale)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지인 것입니다. 최근 신학자들은 성사의 의미를 보다 쉽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성사가 하나의 표지, 또는 상징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징은 언제나 의미와 내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위적 관계가 종교적 관점으로 연결될 때 그 상징은 보다 깊은 뜻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는 부부들의 결혼 반지와 또는 선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혼 반지는 절대로 물량적인 값으로만 측정될 수 없습니다. 그 반지에는 부부의 신의, 사랑, 인격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선물에 담긴 정성도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성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음식입니다. 그리고 성체성사의 설정은 사실 식탁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 식탁, 결별의 식탁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심각하고 의미 있는 식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 식탁에서 일상용의 빵과 포도주에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셨습니다.
즉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존재를, 당신의 기념을 이 빵과 포도주에 짙게 남기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 빵을 먹고 이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예수의 이 말씀은 유언이며 동시에 재회의 다짐과 확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초기교회 신자들은 이 예식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미사인 것입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성체 안의 예수의 현존을 그리스 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성체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체적’, 또는 ‘본체적 변화’(Transsubstantiatio)라고 설명했고 고백했습니다. 즉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강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신학자들은 본체적 변화란 뜻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 관계를 ‘의미전환 ’(Trans -significatio) 또는 ‘목적 변화’(Transfinalizatio)란 표현으로 설명하고 신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한동안 후자의 표현에 대하여 염려하는 견해가 있었지만 성체 안의 예수의 실재적 현존(Praesentia realis)을 고백하는 한 그 신학적 표현은 변할 수 있다는 데 모두 일치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변화 후의 성체와 성혈은 똑같은 빵과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 식용으로서의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키 위한 표지로서,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빵은 빵이로되 보통 빵이 아니며, 포도주는 포도주로되 일상용의 포도주가 아니고 그 안에 담긴 의미와 목적이 전혀 새롭게 전환되었다는 뜻입니다.
반지와 선물에 담기 사랑의 뜻을 생각하면 성체의 신비를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는 단순한 표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전능을 통해 표지 이상의 의미 곧, 성체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 위격적 관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체는 참으로 교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 음식을 먹고 자랍니다. 음식은 참으로 거룩하며,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콩 한 톨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선조들의 말씀도 이러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의 사랑, 그 현존성을 다시 고백하며 동시에 매일 먹는 음식에 대하여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특히 매일 식사 때, 미사와 연결되는 의미를 찾으며 식탁이 곧 미사의 연장, 영성체의 연속일 수 있도록 실천적인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창세기 14장의 말씀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람에게 멜기세덱이 복을 빌어주며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 하느님께 찬미 드린 내용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환대의 뜻이며 교부들은 그것을 성체 성혈의 전표로 이해하였습니다. 사실 멜기세덱(나의 왕은 정의〔正義〕)은 족보도 없이 단 한번 나타나며,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람을 축복한 사실로 보아 아브람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 이해되었고, 혈연에 의한 레위 사제 지파를 뛰어넘는 메시아적 사제의 전표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시편 110,4; 히브 7장).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사제직을 멜기세덱의 제도를 따른 사제직이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2독서는 고린토 전서 11장의 말씀으로 성체성사 설정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언 내용입니다. 고린토 전서는 사도 바울로에 의해 57년 봄에 씌어졌고 바울로의 회개는 36-37년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바울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聖傳〕을 다시 신자들에게 전해주며 가르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훌륭한 교사이며 사도였던 바울로도 물려받은 것을 다만 전달하고 있을 뿐이지 자신이 결코 그 어떤 새로운 것을 설정하거나 만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성체성사의 기원이 주님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증언한 내용입니다. 이 성체에는 일회적이며 동시에 종말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이 기억의 예식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거행했던 그 심각한 의미, 유언의 의미를 담고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똑같이 미사 중에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루가 복음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기적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4복음의 공통 내용이기에 더욱 권위 있으며, 이 기적은 성체가 지닌 풍요로움 곧, 하느님 은총의 무한함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빵을 나누는 그것이 바로 기적임을 이 일화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체를 사랑과 나눔의 성사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철저하게 당신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 우리 모두 당신과 같이 우리 자신이 이웃에게 음식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도 당신과 같이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내어놓을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소서. 아멘.
우리를 당신으로 변화시키는 성사
-조욱현 신부-
오늘은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은 성체성사를 세우셔서 우리에게 최상의 선물을 주신 그리스도께 감사드리며 성체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고 찬미를 드리는 날이다. 교회는 성체성사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는 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종합이며 우리 크리스천 생활의 근원적인 힘이며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성목요일, 최후만찬에서 세우셨으나 이날은 수난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수난을 떠나 기쁨으로 성체성사를 기념할 날을 생각하게 되어 제정하게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후대에 이 날을 삼위일체 대축일 후 첫 목요일이나 첫 주일을 이 축일로 지내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주일인 오늘 지키고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성체와 성혈에 대한 기적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볼세나라는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이 도시에는 작고도 아담한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 들어가면 왼 쪽으로 약 13세기 때 일어난 성체와 성혈의 기적을 보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의 미사를 드리던 제대가 그대로 있고, 제대의 대리석 일부가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보헤미안(지금의 동구 헝가리 지역) 지방의 사제가 자신이 미사를 매일 봉헌하면서도 항상 성변화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자신이 사제이면서도 그러한 의심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이 사제는 결국 로마 여행을 하기로 하고 로마 순례를 떠나게 된다. 로마를 순례하고도 이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사제직을 떠나겠다고 생각하였다. 로마를 향하여 가는 도중 이 볼세나를 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도 이 사제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변화를 확실히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성찬의 전례에서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그는 또다시 의심을 하였다. “정말 이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변할까?”.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축성기도가 끝나자 성작에 담긴 포도주가 순간 피로 변하였고 이 사제는 깜짝 놀라 성작을 제대 위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래서 피는 제대보를 적시고 제대의 대리석을 붉게 물들였다. 이 기적을 본 사제는 결정적으로 회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제대보는 지금까지 기념 성당(오르비에또)에 보존되어 있다. 이 기적은 당시의 교황 우르바노 4세에게 보고되었고, 교황은 오르비에또에 아름다운 기념 성당을 지은 후, 볼세나에서 오르비에또까지 그 제대보를 들고 행렬을 하여 그곳 성당에 모셨다. 아마 지금의 성체거동이었을 것이다. 1264년 이후로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 제정되었으며 거행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미사 때 축성되는 빵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며, 이를 정성 되이 준비하고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됨을 믿고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며,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영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당신으로 변화되게끔 해 주신다. 즉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화, 하느님화, 그분과 같이(1 요한 3,2) 되는 것이다. 이는 성체성사가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남겨주신 가장 귀하고 신비로운 성사임을 알게 해 준다. 이는 실제로 많은 교부들이 가르친 것이다.
복음: 루가 9,11b-17: 빵과 물고기의 기적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남자만도 5000여명이나 되는 인원을 먹이셨다. 제자들의 걱정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앉히시고, 빵과 물고기를 축성하셔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신다. 이것은 사제로서의 행위이며, 말씀 다음에 양식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의 아버지를 우러러보시고, “축복하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 행위는 아버지께서 빵과 물고기의 “표징”에 축복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그들을 배불리셨다. 이것은 그 제자들을 먹이며 배부르게 하는 지혜의 잔치에 미리 참석하는 것이다(잠언 9,1-6). 주님의 손으로 “나뉘어진” 음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지켜져야 하고 분배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의 빵의 형상 아래, 매일의 양식, 신비들의 빵의 형상하에서이다. 이것은 교회가 2000년간 계속해온 주님의 유일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적사화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수난예고인 것으로 보아 희생이 함축되어있는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성체성사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기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의 존재 그대로, 가진 바 그대로의 봉사와 참여와 형제애가 봉헌될 때에만 참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음에 대한 참된 기념과 선포가 될 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나눔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 있을 때 그러한 기적을 만들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의 두 상징적 형상을 통하여 거룩한 양식으로 당신 자신을 주신다. 이것은 그러기에 그분의 살과 피에의 참여이다. 여기서 상호적인 거처를 제공하게 된다. 즉 주님께서는 오셔서 머무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영원히 머물 것이다. 영성체가 얼마나 중요한 성사인지 우리는 더욱 잘 깨닫고, 합당한 준비로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어야 하겠다. 이 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분의 거처가 될 뿐 아니라, 우리도 그 안에 머물면서, 그분과 같이 되며, 그분으로 변화시켜 주는 성사이기 때문이다.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이 풍성한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 이 은총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나눔의 신비를 살 수 있으며, 나눔의 신비, 즉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잠길 수 있다.
기적의 재료
-김현신부-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려고 빵의 모양으로 나타나시니 그 안에 진리와 인성을 감추시고 오직 사랑만 드러내십니다.”
성 알폰소 리구오리 또한 “저희 믿음을 크게 하시고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빵의 형상 속에 숨으신 채 제대 위에 머물러 계십니다.” 라고 하면서, 숨어계심 그 자체가 우리를 위한 사랑임을 노래합니다. ‘숨어계심’은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어 청할 수 있도록, 그때에 넘쳐흐르는 은총을 몽땅 쏟아 부어주려 기다리시는 그분 사랑의 방식입니다.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는 제자들이 미리 마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의 것이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랑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아주 살짝 누구의 것이었는지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6,9)라고 겨우 귀띔해주는 정도입니다. 오천 명이 훨씬 넘는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만큼 남은 그 기적의 재료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웬 아이의 내어 놓 음”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 그러한 기적의 재료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마음을 굳히시면 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테지요.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먼저 찾으셨습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6,38) 그런 뒤에 기적을 베풀어 군중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우리를 위해 택하신 사랑의 질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고 생활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 이러한 온 과정이 하느님 사랑의 질서였으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 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 위한 질서였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께 믿음을 고백하는 이가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으십니다.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예수님 앞에서 결코 부족함이 없는 기적의 재료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될 것을 다짐합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찾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먹이고픈 예수님의 열망이 우리의 사랑보다 언제나 더 크고 힘셉니다. 그러니 수줍어할 이유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필요도 없습니다. 가난한 그대로, 부족한 그대로 우리의 믿음을 기적의 재료로 내어 드리면 됩니다. 이제 기적은 예수님의 몫입니다.
한 주간을 지내면서 우리 몸에 흡수되어 완전히 숨어 버림으로써 생명을 더해주는 빵처럼, 숨은 사랑을 실천하는 웬 아이가 되어 보십시오. 성체를 닮은 이 ‘웬 아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숨 쉬게 합니다.
나눔의 기적
- 배광하 신부 -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게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교훈은, 예수님 친히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생명까지 내어 놓으신 가없는 사랑이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영육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시리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27; 50~5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빵은 참되고 영원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결코 썩지 않는 음식,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음식, 충만한 생명을 주시는 음식,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아가는 음식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신 사랑의 성체성사를 통하여 이제는 우리들도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실천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기심과 기적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굶주린 군중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역시 자주 우리를 찾아오는 이들을 돌려보낼 때가 많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구실을 내세워, 도와줄 가치가 없다는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 목자의 마음은 단호하였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 13)
이 소중한 말씀은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면, 없는 가운데서도 나누어 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것이 엄청난 생명의 은총인 성체성사의 혜택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복음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기도 후에 빵이 남산만큼 커졌다거나, 물고기가 고래만큼 커졌다거나 하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그 많은 장정들이 며칠째 예수님을 따라 왔는데, 자주 여행을 했던 경험이 있는 유목 민족인 그들의 보따리에 먹을 것이 전혀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들 눈치를 보며 날이 저물도록 음식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웬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습니다. 그러자 부끄러운 어른들과 제자들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음식을 내어 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고, 모두 배불리 먹은 뒤,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가설입니다.
이 같은 추측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만약 예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으로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회성의 기적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십시일반으로 서로가 함께 나누어 먹었다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훗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이 그 모범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혼자만이 하시는 일회성 기적을 절대 행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모든 인간이 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기적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교회가 오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이 같은 복음을 선택한 이유와 가르침은 자명해 집니다.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하느님 백성은 진정한 나눔의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상 나눔의 희생 제사인 성체성사는 빛을 잃고 맙니다.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나눌 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이웃의 불행과 아픔에 대한 무관심 때문인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는,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살아야 할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지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탄 무렵 구세군의 자선냄비의 기적이나, TV 불우이웃돕기 ARS 자선기금 마련들의 모습을 보면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의 삶이며, 그 같은 삶을 살아가라고 예수님께서 간곡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 24)
성찬의 신비를 살자.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다. 지켜야 할 계명의 핵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신자답게 살기 위한 은총을 얻는 방법은? 그것은 「기도와 성사이다.」 성체성사 안에 이 모든 것이 있다.
1. 성체성사는 하느님 사랑의 극적인 표현이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이 크게 드러난 구원사건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강생사건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심에 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요한서4,9)고 하셨다.
둘째로, 하느님의 사랑을 크게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원사건은, 주님의 수난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구원 사건은 성체성사이다. 예수님은 왜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가? 이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자.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삶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5-57)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자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주님의 사랑은 성체성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2. 성체성사는 일치의 성사이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받아 모신다. 손위에 놓인 성체께 㰡당신은 왜 이런 모습으로, 이런 몸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까?」하고 한번 여쭈어 보자. 예수님은 이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57) 하셨다. 「내가 네 안에 머무르고, 네가 내 안에 머무른다.」는 이 말씀은 ‘인격적인 일치’를 뜻하는 말씀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우리와 함께 사심으로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미사 때마다 기계적으로,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는 성당 문밖을 나오자마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자 성체성사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사는 삶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은 㰡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삶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셨다. 참으로 주님은 항상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루가22,42)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 하셨고, 그리하여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10,30) 하셨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산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과 일치하여 살아야 한다. 신앙(종교)의 궁극 목표가 신(神)과 인간의 만남(일치)에 있다면, 영성체하고 그분과 의논하며 사는 삶에 그 길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과 일치 할 때 참으로 형제들과도 하나 될 수 있을 것이다.
3. 성체의 신비를 살아야 성체는 ‘생명의 빵’이 된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축성하는 엄숙한 순간에 㰡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㰡는 주님의 명령을 듣는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요한복음에는 성체성사를 세우시는 장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4)고 말씀하시는 세족(洗足)례 장면이 나온다. 사도 요한은 최후만찬 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를 행하라」하신 말씀의 뜻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하신 그 뜻임을 깨달으셨던 것이다. 㰡발을 씻어줌㰡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봉사이다. 그렇다. 「이를 행하라」는 명령은 내가 너희를 위해 제물이 되어주고 밥이 되어주듯이 너희도 「서로 종이 되어 주라」, 「서로 밥이 되어 주라」는 말씀이 아닌가?
청년 실업자 350만이 넘고, 신용 불량자거 속출하는 시대, 한 집에 직장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무직자 세대 25만 가구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나눔이 없이는 어떤 부(富)로도 모두를 채울 수는 없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가는 현실은 시한폭탄이나 암(癌)처럼 우리사회를 와해시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서로 섬기고, 밥이 되어주는」 자세로 이기적인 껍질을 벗고 가진 바를 나누고, 걱정을 나누고, 희망을 나누는 삶을 살 때, 오늘 복음의 빵의 기적은 현실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강영구 신
오늘은 당신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쌍둥이 딸을 해산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한 천사를 보내어 그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고 명령하지만, 천사는 여인이 너무나 가련해서 감히 그 영혼을 거두어 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한 그 천사는 지상으로 쫓겨납니다. 하느님은 그 천사를 지상으로 쫓아내면서 세 가지 문제를 줍니다.
그 문제의 해답을 찾게 되면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문제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문제는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셋째 문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6년 세월을 셰몬이라는 신기료 장수 밑에서 일하는 동안 천사는 그 문제의 해답을 찾게 됩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온갖 탐욕과 이기심과 분노하는 마음과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 하늘에서 내쫓긴 천사가 길거리에서 떨고 있을 때, 셰몬이라는 신기료 장수와 그의 아내가 그를 구해 줍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온갖 탐욕과 욕설과 분노와 시기 질투가 들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그를 구해 준 것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랑하는 마음이 발동되어 그를 구해 줍니다. 탐욕과 미움과 증오는 사람을 죽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무엇이 허락되어 있지 않는가?" 그가 셰몬과 함께 구두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 도시의 제일가는 갑부가 새 부츠를 맞추러 왔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목이 긴 부츠 대신에, 시체에 신길 샌들을 꿰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갑부의 등뒤에 서 있는 죽음의 천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갑부가 새 부츠를 맞추고 돌아간 한 시간 뒤에, 그의 하인이 다시 와서 시체에 신길 샌들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금방 그 갑부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 여럿 있지만,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인간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천사는 어느 날 세몬의 신기료 가게에 두 계집아이를 데리고 와서 새 신발을 맞추려는 마음씨 착한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아주머니가 데리고 온 그 두 계집아이는 6년 전 자신이 영혼을 거두어 가려 했던, 가련한 여인의 쌍둥이 딸들이었습니다. 불쌍한 여인은 쌍둥이 딸을 낳은 후에 죽고 말았지만, 그 쌍둥이 딸들은 살아 남았습니다. 그 쌍둥이 딸을 이웃의 착한 아주머니가 거두어서 젖을 먹여 길렀는데, 벌써 여섯 살이나 되었고, 쌍둥이 딸은 어미가 없어도 이웃집 여인의 따뜻한 사랑을 먹고살았던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저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밥으로 삽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밥도 사랑의 밥으로 삽니다. 모든 생명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무엇인가를 먹어야 삽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식물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햇빛과 공기와 물을 먹고삽니다. 그러나 그것은 식물들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탐욕으로 내뿜는 공해만 아니라면, 식물들은 더욱더 푸르고 싱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식물이나 또 다른 동물들을 먹고 삽니다. 그것을 먹이 사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느님께서 동물이 살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동물들을 죽이거나, 혹은 공해로 그 먹이 사슬들을 끊어 놓지 않는다면, 이 땅의 모든 동물들은 조화롭게 번창할 것입니다.
농사도 짓지 않고 창고나 곳간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온갖 동물들과 새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삽니다. 길쌈하거나 베를 짜지 않지만, 들의 꽃들은 솔로몬 왕이 입었던 옷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들꽃들도 입히시기 때문입니다(마태 6,25-34). 이렇게 온갖 동식물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입으면서 삽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사랑을 먹어야 삽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먹고삽니까?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젖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우유만 먹고 자란 아이가 성격이 비뚤어지고, 사회성이 약하고, 병에 약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생명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젖을 빨고 자란 아이는, 어머니의 생명과 사랑을 먹었기에 건강하고 밝습니다.
어른인 우리는 밥을 먹고삽니다. 밥은 단순히 쌀로 지은 음식물이 아닙니다. 거기 농부들의 땀과 정성이 깃들여 있고, 벼가 자라도록 햇볕을 비추시고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더구나 그 쌀을 매만지며 깨끗이 씻고 솥에 앉힌 주부들의 사랑과 정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한 그릇의 밥으로 나날이 생명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그릇의 밥이 아니라, 한 그릇의 사랑과 정성입니다.
이렇게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사랑을 먹지 않으면 한순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째 편지 4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죄로 죽어 가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는, 사람들의 밥이 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분 역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요한 복음 6장 53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성체 성사의 신비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 조각의 밀떡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지, 한 잔의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가 되는지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간직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사랑을 먹고살듯이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도 그리스도를 먹어야 삽니다.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자주 미사에 나와서 주님의 성찬에 참례하는 신앙인들이, 분명히 생명에 넘치는 신앙 생환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먹고 주님의 생명을 그 안에 간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사는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인간을 살리시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극명(克明)하게 나타남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성찬에 초대하셨습니다. 함께 주님의 몸과 피, 주님의 생명,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 먹읍시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우리의 삶은 또한 어떠해야 합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스스로를 밥으로 내어 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이웃은 이웃에게, 형제는 형제에게 자신들을 먹도록 밥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밥으로 내어 주어 먹을 때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어떻습니까?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애를 쓰기만 했지 먹히려고 애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이 살벌한 싸움판으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을 밥으로 내어 주려 하지는 않고, 아내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부모 자식이 그렇고 이웃과 이웃이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 맹수로 변해서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대기만 합니다. 서로 먹으라고 자신을 밥으로 내어 주기만 하면, 모두 함께 살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먹고 사는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줍시다. 그러면 서로를 먹고 모두 살아날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우리 본당이 너무나 큰 하느님의 축복 속에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참으로 풍요로운 우리 본당과 풍요로운 형제자매 여러분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큰 덩치의 新安 본당 신부님은 한푼이라도 더 얻어 가기 위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지만, 여러분이 못 들은 체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성체 성사의 신비를 몸소 실천하셨기에, 기쁨을 거두어서 돌아갔습니다. 사실은 여러분의 사랑을 거두어 간 것이지요. 거금 삼천칠백만 원‥‥ 그 돈으로 성당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의 그 나눔과 베풂이 성당 없는 신안 본당 교우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그런 것이 모이면 성당도 건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움과 넉넉한 마음가짐에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되는 여분이 남았음을 들었습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누어주고 베풀어 주면 모두가 풍요롭게 되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나눔의 신비, 자신을 내어 줌의 신비입니다. 곧 성체 성사의 신비입니다.
오늘 이 주님의 식탁에서 더욱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두려움 없이 성체를 모시자
- 신은근 신부-
성체와 성혈은 직역하면 거룩한 몸과 거룩한 피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말한다. 역사 안에 살아 계셨던 예수님, 이제는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정신과 얼을 말한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고 있다. 작은 빵을 먹음으로써 이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 정말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었던가.
첫 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렇게 산만하던 아이들이 너무나 경건하게 성체를 모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 어린아이들이 온 몸으로 성체 앞에 나설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서 하나의 답을 발견하게 된다. 선입견 없이 성체께 나아가는 자세다. 두려움 없이 성체께 다가서는 모습이다.
ꡒ영성체가 무엇이지요ꡓ 하고 물으면 ꡒ서슴없이 예수님을 모시는 겁니다ꡓ 하고 답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아무런 의심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이 정답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도 살아서 그들에게 오신다. 그들의 당당한 모습 안에는 분명 성체성사의 힘이 실려있다.
너무 자주 우리는 성체성사와 죄를 연결시킨다. 성체 앞에 완벽한 모습으로 나설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죄를 느낀다면 더욱 성체께 나아가야 한다. 성체는 일부 사람의 특권이 아니다. 죄 없는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다. 성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 앞에 나서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한가.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죄와 연관된 성체신심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를 먼저 생각하는 신심을 우리는 어린이들에게서 배우게 된다.
성체는 근본적으로 음식이다. 영적 힘을 주는 하늘의 음식이다. 어린이들이 거리낌없이 성체를 모시듯 우리도 두려움 없이 이 음식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또한 아무 주저함 없이 주님이 주시는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며 ꡒ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ꡓ 하고 말씀하신다. 최후 만찬의 모습이다. 우리도 미사 때마다 이 말씀을 되풀이해서 듣는다. ꡒ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ꡓ 무엇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인가.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건과 나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 관계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이 아닌가.
사건이 빵이고 사람이 빵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빵이다. 받아먹어라 하고 주시는 빵이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분처럼 누군가에게 빵의 모습으로 가야 한다. 가는데 힘이 부친다면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어린이들의 만화영화에 뽀빠이라는 것이 있다. 악한들과 싸우다 힘이 빠지면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다시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악의 세력을 이긴다. 성체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영적 에너지를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지난날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셨다면 이제는 새로운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도록 하자.
몸과 피를 주신 하느님
-강길웅 신부-
성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혈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인간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그것은 구약의 계약 의식과 긴밀한 연관이 되며 또한 신약 역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 본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통상 말하는 구약(구계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말합니다. 이때 백성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피의 예절로 했습니다. 즉 송아지를 잡아서 하느님을 표상하는 제단에 피의 반을 뿌리고 나머지 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겠다는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여기서 한 쪽이 계약을 어기면 막말로 피를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앞에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수없이 많은 죄를 졌습니다. 배반하고 또 배반했습니다. 백성은 그래서 당연히 목숨을 바쳐 피를 흘려야 하지만 그러나 목숨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 대신 수송아지나 염소 혹은 양이나 비둘기 두 마리로 속죄의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죄는 너무도 극에 달해서 이제 동물의 피만 가지고는 하느님의 의노를 풀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속이고 또 속여서 하느님을 수없이 속여 왔기 때문에 이제는 짐승의 피는 억만 마리를 바쳐도 소용이 없게 됐습니다. 아니, 세상에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제물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구제 불능이었습니다. 여기서 새 계약이 필요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계약은 시나이의 계약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예레 31,31~34참조). 에제키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고 하면서 새 계약을 통하여 성령을 부여하신다는 의미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에제 31,26~27참조).
그럼 새 계약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새 계약을 체결하시는데 그 말씀이 최후만찬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고 하셨고 루가와 바오로도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루가 22,20.Ⅰ고린 11,25)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백성은 감히 바라지도 못했는데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너희는 나의 백성이며,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다"라는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그 계약을 백성이 어기자 예언자를 파견하시어 백성들이 계약에 충실하도록 종용하셨고 그래도 백성이 고집을 피우자 새 계약을 말씀하시면서 끝내는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낸다는 것은 그 아들을 제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 아들을 잡아죽일 줄을 뻔히 아시면서도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셨고 그리고 그 피를 통해서 새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백성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봉헌해서 얻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를테면 맞바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빵 다섯 개를 가지고 남자만도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실 때는 그렇게 풍성합니다. 째째하거나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빵의 기적은 메시아의 풍요로운 징표로 보여 준 것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시는 계약의 식사를 보여 준 것입니다.
미사는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새 계약의 예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봉헌되시는 계약의 체결을 미사 안에서 새롭게 거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뜻으로서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Ⅰ고린 11,25참조)고 하셨던 것입니다. 미사는 일종의 하느님의 사랑의 잔치요 제사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맛좋은 술로 오셨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그와 함께 머물고 그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인간을 찾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먹히러 오셨고 먹힌 상태에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와 구원을 주십니다. 당신의 전 생명을 오늘도 그분은 우리에게 제공하십니다. 그것도 무료로.
우리는 그래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우리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구해진 백성이요 목숨인데 이 은혜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원하신다면 무슨 사랑을 못하겠습니까? 우리도 먹히는 삶을 삽시다.
밥은 하늘입니다.
-강호성 신부-
김지하 시인의 표현처럼 ‘밥은 하늘’이다. 밥은 하늘이기에 혼자 가질 수 없는 것이고 나눠 먹는 것이다. 사람은 하늘인 밥을 나누어 먹고, 그 밥에 의해 힘을 얻고 살아간다. 그것을 어른들의 표현을 빌리며 ‘밥심’이라 했다. 오늘 복음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어떤 식으로 해석으로 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몇 명이 먹고 몇 광주리 분량의 음식이 남았다 등은 부차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도 남았다는 기적이다. 그리고 그 기적의 한 가운데 예수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건, 사람들이 내놓고 나누어 먹어서 이루어졌건 간에 예수가 그 기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눔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빵과 물고기의 수효나 크기가 증가한 물질적 변화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에 역점을 둔다면 예수를 통한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 또는 회개라 표현할 수 있는 상황, 바로 그 상황을 기적이라 부르고 싶다. 어느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고, 어느 물이 어떻고 하는 것보다도 바로 이런 모습, 이런 상황을 기적이라 하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의 변화를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밥심으로 사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도 그 변화를 가져야 할 것이다. 스승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나누어 먹고 난 뒤,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제자들이 군중들을 먹일 양식을 걱정할 때 예수는 "너희가 주어라"라고 했었다. 이 표현은 "너희 것을 나누어 주어라"라고 바꾸면 오늘 복음의 의미는 더 명확해진다.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너희 것을 나누어 주어라", 정부만 바라보지 말고 "너희 것을 나누어 주어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 자문해 볼일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신다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예수의 삶을 회고하고 느끼고 마음에 새긴다면, 하늘인 밥을 나누어 먹고 밥심으로 사는 것처럼, 우리 모습들이 어떻게 밖으로 흘러나오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힘들게 멀리 있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우선 가정에서의 모습을 생각하고, 학교나 회사에서의 모습을 생각하고 정리하자.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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