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3일 삼위일체 대축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6,12-15)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 have much more to tell you,
but you cannot bear it now.
But when he comes, the Spirit of truth,
he will guide you to all truth.
He will not speak on his own,
but he will speak what he hears,
and will declare to you the things that are coming.
He will glorify me,
깨달음을 위하여 성령께서 오셨다. 구약에서도 거룩한 영이 내리면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다. 삼위일체의 가르침도 결국은 깨달음이며, 믿는 이에게 내리는 은총이다. 그분 곧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성호를 긋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기도하기 전이나 음식을 먹기 전에 바치는 성호경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도 삼위일체를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굳이 이러한 표현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의 기록 때문입니다. 곧 성경에 하느님, 예수님, 성령께서 따로 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고자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버지와 하나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령 강림 뒤에 비로소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한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도 성령께서 도와주신 결과입니다. 삼위일체는 아버지 하느님을 깨닫는 열쇠입니다.
새벽을 열며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크게 일으킨 찰스 키터링이 83회 생일 때, 그의 아들이 ‘아버지, 이제는 연구를 중단하고 좀 쉬시지요.’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흉하게 늙는단다. 사람을 흉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독약이 있지. 그것은 ‘불평, 의심, 정말, 경쟁, 공포’란다. 이 다섯 가지 독약의 양이 많을수록 노년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진단다. 반대로 사람을 우아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묘약도 있지.”
“그게 뭡니까? 아버지.”
아들이 묻자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이다.”
정말로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자주 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찰스 키터링이 말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단어를 내 안에서 품고 살아갈 때 우리들의 외적인 모습도 우아하게 그리고 멋지고 아름답게 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이가 이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런 긍정적인 단어보다는 부정적인 단어를 내 안에 품고서 힘들게 사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나’만을 강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나만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 다른 사람은 전혀 상관없다는 생각들, 나만 더 많은 것을 갖고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것을 목표로 생각하기에, 스스로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 되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 되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당신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삼위일체의 신비’인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푸시지요. 이제 성령을 통해서 인류 역사 안에 그 사랑을 계속해서 베푸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전해 주시기 위해서 성격이 전혀 다른 세 위격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인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랑과 신뢰로서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 역시 서로 사랑과 신뢰로서 하나를 이루길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모습이 삼위일체의 삶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자신이 얼마나 삼위일체의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혹시 ‘나’만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후회할 행동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모습을 본받아 나의 이웃과 하나 되어 이 세상에 사랑을 심으면서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심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쁘게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을 안고 살아갑시다.
빠다킹신부
삼위일체
-박영봉 신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참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시나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입니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모든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입니다. 이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모습에 관한 신비로서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오직 하느님께서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주심으로써 이 신비를 깨닫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의 모습에 관한 신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고,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사랑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기영신부-
어느 사업가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 천년이라는 시간은 대략 어느 정도의 시간입니까?"
"한 1분 정도."
"그렇다면 100억원의 돈은 어느 정도의 돈인가요?""
"1원 정도나 될까?"
하느님의 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업가는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그렇다면 제발 저에게 1원만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셨습니다.
"좋다. 1분만 기다리거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며, 또 그분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한 분이시며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를 지니신 하느님을 이해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 미사 때 한 분이시면서 삼위를 지니신 하느님에 대하여 물었더니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지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나를 부를 때 뭐라고 부르나요?"
"신부님이요."
"이 요셉 신부님이요."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소리를 지릅니다.
"이기양이요."
제가 원하는 답이 단번에 다 나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저를 부를 때는 "신부님"하고 부르지만 여러 신부님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요셉 신부님"하고 부르고, 동사무소나 사회에서는 "이기양씨"하고 부릅니다. 이렇게 다르게 불린다고 제가 세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드러나는 곳에 따라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뿐입니다. 저는 한 사람이지만 호칭은 이렇게 다양합니다. 한 분이시면서 삼위를 지니신 하느님이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해보면 쉬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 전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깜짝 놀라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반문하자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고 대답합니다. 인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 과정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은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그렇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모든 성사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며, 또 세 위가 사랑으로 일치되어 계시듯 하느님을 믿는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 관계는 사랑보다는 재물이나 능력, 외모에 치우치는 경향이 농후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물질이나 외형에 집착하게 되면 진실과 신의로 다져진 인격적 관계는 무너지고 불신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고독의 시대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면서 과연 나는 이웃과의 관계를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가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세 분이 하나 되는 사랑의 신비!
-김지영신부-
한 소년이 공터에서 하늘 높이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을 지나던 나지막한 구름이 소년의 시야에서 연을 가려 버렸습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어느 아저씨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꼬마야, 그 줄을 쥐고 뭐하니?”, 그 꼬마는 대답했습니다. “연 날려요.” 아저씨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구름에 가려진 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얘야, 너는 어떻게 저 하늘 높이 연이 있다고믿을 수 있니?” “제게도 연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이따금씩 당겨질 때가 있거든요.” 이 짧은 예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생(生)의 곳곳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힘,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승천하셔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매순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 신앙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특별히 하느님은 인간의 시공간의 역사 안으로 개입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눈에 보이는 구원자의 모습으로 함께하십니다.
오늘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고 하느님을 장엄하게 고백하며 찬미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란 하느님의 삶, 하느님의 업적,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성부는 창조하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구원의 근원이시며, 성자는 우리의 구원을 선포하시고 그 구원을 당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써 완성하셨음을,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원인과 결과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거나, 인간의 논리와 수학으로서 풀 수 없는,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오직 주님 안에서만이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매순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는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세 위(位)가 계심을 믿고 고백하는 아주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성호경은 가장 간단하고 가장 쉬운 기도이면서 가장 힘 있고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된 인격적인 삶을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5).
삼위일체의 신비
-홍승모신부-
삼위일체 신비를 바라보는 신앙인이 전제해야 할 조건은 그것이 하느님께 유보된 감추어진 신비(mysterium absconditum)라는 사실을 우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신앙은 “1 = 3”이라는 궤변적인 고등 수학도 아니고, 지금까지 무수히 비판하고 단죄하고 검증하려했던 사변적인 이론들의 나열도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신앙의 핵심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계시하고 구원하며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신비로운 3위가 다채로우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아들)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13.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아들) 것이다”라는 말씀은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하느님의 진리와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진리를 성령이 증언하시고 이제 신앙인이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곧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서 이 진리가 신앙 공동체에 계시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이 깨닫고 살아야 할 이 진리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 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1-2.5). 사도 바오로는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신비로운 3위를 향주 삼덕 곧 믿음, 희망, 사랑과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거, 현재, 미래의 3가지 시점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신앙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현재 시점에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삶은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신앙인이 깨닫고 찾아야 할 진리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둘 이상의 인격체 사이에 존재합니다. 홀로 사랑은 존재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1요한 4,16)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삼위는 다양한 역할 속에서 사랑의 단일한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치 가정에서 부모-자녀-손자가 다양한 역할 속에서 사랑의 단일한 관계를 이루듯이 말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큰 힘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몰라서 제대로 알릴 수 없기도 하고, 알고 느끼는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안타까울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완전히 이해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을 떠나실 날을 앞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으셨나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16,12) 3년간 함께 살면서 보여주시고 때로는 따로 한적한 곳에서 가르쳐 주시기도 한 모든 것도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가올 수난과 그 이후의 말씀들은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행하지 않는 것과는 마음가짐부터 다릅니다. 할 말을 다 하시지 않고 감당할 만큼만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어린 제자들을 염려하는 사랑을 느낍니다. 설사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어둠의 세력이 너무도 강해서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어리기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뿌리내어 실천되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은 때를 기다리십니다.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모든 것을 알아듣고 기록하기에는 시간과 공간, 지적·영적 능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5)
내 삶을 돌아봐도 그렇습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많은 일과 사건과 생각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내가 보고 느낀 매일의 삶의 사연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기억나는 것들은 빙산의 한 조각도 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기억나지 않는 내용은 ‘안 배웠어요!’라고 말하듯, 기억나지 않는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닐진대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시간은 그들 삶의 역사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강렬한 부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그 존재의 귀중함을 모르다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그 사랑을 깨닫듯,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14,9) 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뒤에야 ‘그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라고 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때는 몰랐던 것들의 영적 의미를 글로 쓴다면 저도 요한 복음사가처럼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 의미가 이 세상으로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큰 것 하나만 얻으면 다른 부수적인 것은 따라오기도 합니다. 곧 큰 것 하나만 깨달으면 다른 의미는 그에 준하여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선 수행을 하는 분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일단 크게 하나를 깨닫고 나면(대오각성) 다른 것들은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 또 우리가 대오각성해야 할 그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 하나를 깨달을 때 어린 제자들은 성숙해지고 스승님의 말씀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을 가르치고 깨우치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16,23)이며,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14,26) 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16,13)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이십니다(14,6). 진리의 영과 진리는 하나이며, 그 진리는 당신을 보내신 분,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7,16) 나아가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6,15)고 하십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관통하는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아버지와 늘 함께 있어도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큰아들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하신 말씀은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오늘도 새롭게 깨달아야 할 나의 과제입니다. 지금 내 손에 움켜진 것을 놓고 버려야만 받을 수 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우주를 소유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거침없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14,9-10)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17,22; 10,30)라고 하십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머리글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1,1-2)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예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요한 14,18)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함께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감당하면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내 몫은 남아 있습니다. 곧 아직도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말씀이 참 많습니다. 이해하지 못하여 그렇고, 알지만 행하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나’라는 질그릇 속에 담아주신 성령의 보물(2코린 4,7 참조)을 통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더 깊이 알아가야만 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축복>
-양승국신부-
오늘 오전 10시 저희 집에서는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8명의 아이들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더욱 가슴 흐뭇한 일은 그중 몇 명의 아이들은 저희와 함께 한 평생 같이 살고 싶어(수도자가 되어)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준비를 위한 1박 2일 피정을 마치고 온 아이들이 제게 와서 자랑스럽게 사도신경이나 십계명등 주요기도문들을 보란 듯이 줄줄이 외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기가 막힌" 사연들을 가슴 깊이 간직한 아이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또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이제 나름대로 상처를 추스르고 다시 서려는 아이들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세례 미사에 오셨다가 얼떨결에 대부를 서게 된 한 형제님은 아이와 맺게 된 우연한 인연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으로 생각한다며 기뻐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이 밤낮으로 고민하는 한 가지 문제는 어떡하면 저희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착한 시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나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할 때 아이에게는 아이를 사랑하는 세 사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세 사람과의 긴밀한 관계가 아이를 성장시키고 하느님께로 인도한다고 봅니다.
그 세 사람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삼위 관계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똑 같이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바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관대한 사랑입니다. 많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때로 엄격한 듯 하지만 그 엄격함 역시 자녀가 굳건하고 의지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는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엄격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성부의 역할이 바로 이런 역할입니다.
자녀들의 인격형성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따뜻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사랑, 작은 것도 소홀히 넘기지 않는 섬세한 배려를 하시는 분이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삶에 지쳐 흔들릴 때마다 찾아가 안기고 싶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성령의 사랑이 이러하십니다. 마치 미풍과도 같은 감미로운 사랑을 베푸시며, 우리 각자의 어려운 처지를 일일이 다 헤아리시는 분, 우리의 고통을 극진한 사랑으로 어루만져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아이들의 영육간에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있는데, 바로 친구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도 돌아서면 또 다시 만나서 어울리고 싶은 친구, 아무에게도 말 못할 이야기들도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일생을 살아가는 데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친구 같은 존재가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 똑같은 키, 똑같은 조건이 되신 분, 우리의 친구가 되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가시는 친구 중에 친구가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친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시지만 그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세분은 서로 온전히 같은 마음-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를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
-조욱현신부-
교회는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면서 구원의 전 역사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의 빛과 자극으로 성자를 통해 이루셨던 구원계획에 대해 묵상하면서 이 구원을 이루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흠숭의 예를 바쳐드리며 감사드리도록 초대하고 있다.
복음: 요한 16,12-15: 아버지의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구체적인 개체성을 통해 실현된 구원의 행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결코 그 신비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역사적 체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이론이나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는 신비이다.
복음을 보아도 성자를 보내시는 아버지(15절), 성자로부터 들은 것을(14절) 사람들에게 알려주심으로써 성자의 활동을 완성하러 오실 ‘진리의 성령’(13절)을 통해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시지만 오직 하나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15절). 이 표현은 위격의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또한 원초적 단일성을 말하고 있다. 즉 위격으로는 구별되면서도 모든 것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요한복음의 ‘진리’는 사고의 대상이 되는 존재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제물이 되신 나자렛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의미한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진리’를 그래서 이 ‘진리’를 얻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사랑을 동반한 신앙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게 해주실’(13절) 성령께서 오셔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 성령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보다 깊이 참여케 하고 그 진리를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진리의 성령’은 ‘생활한 성령’이시다. “다가올 일들을 알려주실”(13절) 성령은 연대기적 차원의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을 뜻한다. 즉 현재를 역사의 종말의 빛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다.
제2독서: 로마 5,1-5: 성령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은 미래로 희망에로 개방되어 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1절). 아버지와 아들간의 이 사랑은 우리가 매일 체험하게 되는 삶의 시련과 불확실성을 초월해 있는 결정적 구원에 대한 희망을 우리 마음속에 불러 일으켜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충실히 이끌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약한 인간이며, 구원이 결정적인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잘못으로 잃을 수도 있다. 복음의 요청을 따르려할 때 우리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지불하면서 자신의 한계 때문에 아파하는 일도 많다. 이러한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내적으로 강하게 해주시고 역경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도록 ‘희망’을 소생시켜주신다(3절).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심으로써 우리 행위의 원리가 되신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이렇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어떤 추상적인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결코 성령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의 삶을 통해 체험되어야 하는 신비이다. 항상 너와 나 사이에 일치를 이루려 노력할 때 우리는 그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거기에 진정한 천국을 이루고 그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신비는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신비가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삼위일체적 생명을 믿습니다. 당신 사랑을 통해 그것을 믿습니다. 그 생명의 신비는 당신의 진리를 지켜줍니다. 만일 그 신비가 버려지고 만다면 그 즉시 당신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 하느님, 저는 당신 생명의 평화가 우리의 본향이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적 이유에서라도 그 생명을 믿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보다 높이 보다 멀리 그리고 그처럼 거룩한 빛을 비추어주는 그 희망의 빛을 저에게서 꺼버리지 마소서. 오, 하느님,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
성서이야기
제1독서(잠언 8,22-31)인 잠언은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지혜문학은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가르칩니다. 잠언 8,22-30에서는 지혜를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하느님의 첫 번째 창조로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역자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요한 1,1-18에는 말씀의 선재사상(先在思想)이 들어 있듯이, 여기에는 지혜의 선재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지혜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에 선재하였고,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제2독서(로마 5,1-5)는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에서 자신의 신학과 사상을 총정리해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입니다. 바울로는 로마 1-3장에서 사람은 율법의 행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피력합니다. 이어서 4-10장에서는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때까지의 신앙과 구원의 역사를 논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신앙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희망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그리스도인은 환난 가운데서 오히려 긍지를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요한 16,12-15)은 예수께서 최후만찬 후에 하신 고별설교의 한 단락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 아직도 많지만 여러분이 지금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가면 ‘진리의 영’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진리의 영이 예수께서 가르친 것을 반복하여 말씀의 참 뜻을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만을 말씀하셨듯이, 진리의 영도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온전히 알려 주실 것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진리의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친 것을 반복하십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온전히 깨우쳐 주실 뿐만 아니라 장차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도 알려주십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진리의 영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익히고 지켜서 이웃에게 다양한 봉사와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다면 이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니체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를 거치면서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교리가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말하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체현(體現)하고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이룩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역사 안에 계속해 나가고 계십니다. 지금도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성령에 힘입어 이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무한 엿보는 믿음의 창(窓)
-배광하신부-
아타나시오 성인은 삼위일체 신앙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성부도 천주시오, 성자도 천주시오, 성령도 천주이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오, 성령도 아니며, 서로 다른 위격이로되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과 인간을 인격자로 전제하면서 인간의 인격성을 지능, 의지, 정서로 분류하여 성삼의 현존을 보다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인간에게도 완전한 인격성을 갖추기 위해 지능, 의지, 정서가 필요하다면 하느님에게서야 더욱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신적 실체를 이루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그토록 집요하게 연구하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연구의 마지막 결론에 가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너무나 깊은 신의 내적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신비의 내용이다”하며 두 손을 들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삼위일체의 신비를 쉽게 설명하려 하여도 결국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인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어찌 다 알겠으며,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이신 하느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 같은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책상이 자신을 만든 목수를 알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자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신앙은 애초에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창세기의 오묘한 우주의 탄생부터 신약의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어찌 인간의 두뇌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 없이는 신앙이 시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알려주신 계시이기에 믿을 따름입니다. 때문에 예수님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 15)
우주에 가득 찬 삼위일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꼽으라면 개신교 신학자이든 가톨릭 신학자이든 독일의 저 유명한 예수회 사제 「칼 라너 (Karl Rahner 1904~1984)」신부를 꼽습니다. 이 분의 펜 끝에서 흘러나와 출판된 책은 4000 여 종에 달합니다. 또한 이 분의 신학을 다룬다는 제목이 달린 단행본과 정기 간행물이 700 여 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분에 대한 연구가 또 하나의 신학 학문이 되고 있습니다.
칼 라너 신부는 평생을 하느님께서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신학 서적을 쓰시고 강단에서도 하느님에 관하여 가르치신 분이셨습니다.
이 위대한 신학자는 80회 생신인 1984년 3월 5일 오스트리아 인스부룩에서 친구, 제자들과 더불어 조촐한 생신잔치를 치르고 이튿날 병원에 입원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끝내 나오지 못하시고 1984년 3월 30일에서 31일로 넘어가는 한 밤중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부님을 마지막 떠나보내는 인스브룩 예수회 성당의 장례미사 중에는 위대한 신학자가 살아생전 가장 깊이 묵상하며 사랑했던 성경 말씀이 봉독되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 9~10; 12)
그 위대한 신학자 역시 이 같은 성경 말씀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지금은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만나 뵈옵는다면,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이 나 또한 하느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는 놀라운 삼위일체의 신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존재하려면 육체, 정신, 영혼의 삼위일체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생혼(식물), 각혼(동물), 영혼(인간)이 존재하듯이 나무나 식물이 존재하려면 뿌리, 줄기, 잎이 있어야 하고, 식물이 살아가기 위하여도 수분, 공기, 태양이 있어야 하며, 가정에도 부(아버지), 모(어머니),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주는 삼위일체의 신비로 넘쳐 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가 조화를 이루며 엮어져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모든 우주의 첫 시작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이며 조화로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세 개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분과 함께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성령과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가 서로 어떤 관계 안에 계시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절망하여 흩어졌던 제자들이 그분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예수님의 삶을 회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평소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몸소 그분의 생명을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심기일전하여 예수님이 사셨던 하느님의 생명을 그들도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 자녀 됨의 길에 초대하기 위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그 가르침이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 신약성서의 여러 문서들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일어난 이 변화를 하느님의 영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변화는 그들이 예기치 못한 새로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새로움이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던 구약성서의 시편(104,30)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 하느님의 입김이신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일이 소생하고 삶의 모습이 새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 시편이 말하는 것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 새롭게 표현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 안에 나타난 진리, 곧 하느님의 일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이어서 말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에 관해 제자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깨닫는 일은 실제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제자들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있게 하여 그들이 예수님 안에 보았던 생명을 하느님의 것이라고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제자들 안에 일어난 새로움이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세 분이신 하느님이 실로 오묘하게 하나로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삼위일체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믿으라고 하늘에서 내려준 단어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단어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제자들 안에 오신 성령은 그 사실을 깨닫게 하였고, 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제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셨던 예수님,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 그리고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이렇게 세 개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아직 사용하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분이신 야훼를 믿었습니다. 구약성서 신명기는 말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 한 분뿐이시다.”(6,5). 그들은 또한 하느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영이 내려 오셨다.”(창세 1,2)는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삶을 회상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 안에 실제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그들에게 새로움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그들은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성령이 하신 새로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과 관련된 호칭이 세 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 안에 숨결로 살아 계신 성령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당신의 서간을 다음과 같은 기도로 끝맺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세 분의 이름을 들어 축복의 인사를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생긴 주장입니다. 그리고 또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들 앞에 신앙인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이시고, 신앙인 안에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로써 초기교회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과 다르지 않고,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과 우리가 얼마나 다양하게 또 깊이 연결되어 있는 지를 고백합니다. 이 단어는 세 분이신 하느님이 하나로 뭉쳐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지를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을 우리 안에 주셔서 그 숨결로 우리가 당신의 참다운 자녀가 되어 살도록 하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느님 따로 우리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추상적 이론이나 객관적 지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하느님이 인류 역사 안에 다양하게 또 은혜롭게 일하셨고, 현재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렇게 세 분의 이름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은혜롭게 또 다양하게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귀감으로 삼고, 성령을 자기의 숨결로 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그분을 멀리 높이 계시는 분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세 개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분과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존재의 기원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사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웁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숨결과 같이 은밀히 일하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이렇게 우리와 밀접히 함께 계시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말합니다.
진정한 웰빙(well-being)
-김도율신부-
요즘은 ‘웰빙(well-being)’이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웰빙은 원래 ‘행복’, ‘안녕’을 뜻하는 말이지만, 최근에는 바쁜 일상과 인스턴트 식품에서 벗어나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문화 코드로 이해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의 근원적인 뜻(‘잘 있음’, ‘잘 존재함’)을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웰빙이나 웰빙족이 추구하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나 풍요로운 삶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자칫 자신의 행복을 가장한 못난 이기심의 충족에 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조차도 문화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진정한 웰빙(Well-Being)’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잘 돌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모두가 아닌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진정한 웰빙(Well-Being)의 모델이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세 위격으로 계시지만 한 본체로서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살아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삼일치의 원리를 해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그 일치의 원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현학적 강의가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는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해 주신(요한 17,26) 그분의 사신 모습의 핵심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의 해설입니다.
우리에게 보여진 하느님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그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갈 때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삶으로 고백하고, 그 신비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만큼 존재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가 좋은 모습으로 지금 그리고 영원히 있을 수 있는 조건은 사랑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는 대축일에 우리 마음에 주고도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길 청해야겠습니다.
시몬느 베이유의 말을 마지막으로 묵상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준 것만을 소유한다. 자기가 주지 않은 것은 자기로부터 달아난다.”
삼위일체 교리 따라잡기 : 이해 보다 신비 체험 통한 삶이 중요
-가톨릭신문-
예수 부활 사건이 일어난지 약 350여 년 후.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성인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고민하며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을 때였다. 한 어린아이가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성인이 다가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바닷물을 모두 퍼서 이 모래 구멍에 담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성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게 가능하냐”고 말하자 아이는“당신의 그 작은 머리로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대꾸했다. 성인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문장(紋章)에 이 전설에 나오는 작은 조개 한 개를 그려 넣어, 이성의 한계와 계시에 대한 겸허한 마음을 드러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초중고등부 교리교사들은 “교리 시간에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교리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삼위일체 신비의 경이로움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세 위격은 분리되지 않으며 전적으로 동일하고 영원하며 전능하신 한 하느님이시다”로 요약된다.
이에 대한 가장 고전적 해석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관계론적 설명이다. 한 분 하느님 안에는 세 가지 존재 양식이 있으며, 그 중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의 속성을 기억, 인식, 사랑으로 정의하고, “기억, 인식, 사랑이 성부, 성자, 성령에게 해당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초기 교회에선 촛불이 불꽃과 심지, 밀랍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삼위일체에 비교하기도 했다. 밀랍을 그리스도 육신에, 심지는 그리스도의 영혼에, 불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연결시킨 것이다.
최근 많은 현대 신학자들, 특히 칼 라너는 이 신비를 구세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에 따르면,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 안에 폐쇄된 채 머무르지 않고 당신 자신을 자유로이 외부로 건네주고자 하신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아들인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견했고,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다.
따라서 한 분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운데 여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는 한, 그분을 ‘성부’라고 부를 수 있다. 또 하느님의 이 자기 전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데 우리는 이분을 ‘성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자기 전달을 주도하는 사랑의 원리를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이와 같이 구세사적 관점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 신비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함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완성에로 이끄는 사랑의 하느님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신학자들은 하느님 체험에 초점을 맞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아버지이신 성부 하느님은 우리 앞에 계시며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이시다. 아들이신 성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동반자요 벗이 되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성령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내부로부터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분이시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이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좀 더 알기 쉽게 풀이하려는 방편들에 불과하다. 삼위일체 신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또한 그만큼 그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성령에 의해 우리가 신비에 동참할 수 있음을 밝힌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 12~13)
묵상 : 三位一體 교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교리이기에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가야 할 교리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삼교리는 우리 신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우리는 매일의 생촬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랑으로 하나되는 신비를 체험해야 한다.
구원의 역사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유영봉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한분이신 야훼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다.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느님은, 죄악으로 인해 당신께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 성자를 파견하셨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발하시는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삼위의 모습은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이며 영광인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자(信者)라는 말은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고 물으면, 대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당신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전지(全知)하신 분이시고, 악의 그림자도 없는 전선(全善)하신 분이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은 철학자들이 그려낸 신(神)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가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시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 그리고 크신 사랑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요한 4,8)고 하였다. 이 얼마나 마음에 바로 와닿는 표현인가?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아버지시다'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은 지상의 온 생애를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때가 많이 묻은 말이라, 때로는 그 뜻이 애매한 경우가 많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향해 자신을 완전히 내놓은 사랑으로 한몸을 이루시는 사랑이시다. 셋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신비, 이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본질이며 모습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삼위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주는 교리가 아닐 수 없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공동체인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라고 하였다. ‘백성'이란 공동체를 뜻한다. 그런데 이 백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사랑으로 한몸을 이루듯이, 신자 상호간에 서로를 위하는 나눔과 섬김을 통해 하나가 되는 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네 것 내 것 없이, 가진 바를 나누고 서로의 기쁨과 고통을 나눔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초대교화의 모습이다,(사도 2․4장) 서로를 향해 서로를 바치는 상호수여(相互受與)의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시는 성삼위(聖三位)의 신비는 바로 교회의 이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성삼위의 신비를 사는 생활
우리는 흔히 삼위일체교리는 잘 이해할수도 없고, 잘못하다가는 이단자가 되기 십상이므로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가면 되는'교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삼위일체의 현의야말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며 매일 살아야 하는 교리인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성삼의 신비,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가꾸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윤리의 근본 원리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가정에 부부간, 부모 자식간, 형제간에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향해 자신을 바치는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그런 사랑이 흐르고 있다면, 그 가정에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생명이 넘치게 될 것이다.
서로를 위하는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다. 영광송과 성호경을 바칠 때마다 성삼의 신비를 되새기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성삼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자.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년 6월 5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0) | 2007.06.05 |
---|---|
2007년 6월 4일 연중 제9주간 월요일 (0) | 2007.06.04 |
2007년 6월 2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0) | 2007.06.01 |
2007년 6월 1일 연중 제 8주간 금요일 (0) | 2007.05.31 |
2007년 5월 31일 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0) | 2007.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