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6월 4일 연중 제9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6. 4. 05:42

  2007년 6월 4일 연중 제9주간 월요일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마르코12,7)

 

 ‘This is the heir.
Come, let us kill him,

and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소작인들도 주인을 잘 몰랐다. 그들은 인내하고 참아 주는 주인을 오히려 모자라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소작인들이다

 

☆☆☆

 

 날이 갈수록 의인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남을 돕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남을 돕는 일은 여유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앞 가리기에도 급급한 형편에 어찌 남을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도와줘 보십시오. 언제나 새로운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은총의 충만함을 느낄 것입니다.
여유가 있다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도움이라도 실천해 본 사람이 쉽게 도와주는 법입니다. 베풀면 돌아옵니다. 기쁨이 돌아오고 당당함이 돌아옵니다.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베푸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면 어찌 그를 의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베푸는 것에는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정한 말 한마디, 온화한 눈빛 하나가 이웃을 기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듯한 말이 자선이 되고, 웃음 가득한 표정이 의인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먼저 의인이 되어야 참된 의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남편이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자 아내는 여섯 살 난 딸아이를 보고는 “네가 기도 잘 하니까, 한번 기도해보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색을 하면서 대답합니다.

“난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엄마가 하는 소리 들었잖아. 그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러자 딸은 머리를 숙이더니 성호를 긋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오! 주님, 어쩌자고 이 바쁜 중에 사람들을 불러다가 식사를 대접하게 하십니까?”

똑똑한 딸아이를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려고 기도를 시켰던 것인데, 오히려 망신을 당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는 딸아이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요. 바로 평소에 자신이 자주 하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부정적인 말마디를 딸이 들었던 것이고, 그 부정적인 말이 그렇게 부정적인 기도가 되었던 것이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나의 삶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쓰시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작은 것을 무시하고, 세속적으로 크고 화려한 것에만 온갖 관심을 쏟아 붇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래서 점점 주님의 뜻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아니 주님의 자리에 내가 올라서려고 합니다. 모든 판단을 나의 관점에서 하기 때문에, 내 안에서 주님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너무나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때 과연 행복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모든 것을 인간이 경작하도록 큰 은총을 주셨는데, 우리들은 마치 자연의 모든 것을 직접 창조한 하느님이라도 되는 듯이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보고도 뉘우치지 않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는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원 소작인 같이 ‘그렇게 경우가 없는 사람이 있으려고요?’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경우 없는 또 한 명의 소작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업신여긴 것,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하느님께서는 쓸모 있게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어 긴요한 자리에 놓으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당시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볼품없어 보이는 사람들 심지어 죄인이라고 평가받던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과연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를 걱정하여 봅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여 봅시다.

 빠다킹신부

 

 

   비유    

- 박영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비유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시지만,
한편 근본적인 선택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주어야 합니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도 필요합니다.
비유는, 사람들이 마치 단단한 땅처럼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좋은 땅처럼 받아들이는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계신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이 비유 안에
은밀하게 들어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마태 13,11)를 알아들으려면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 바깥’(마르 4,11)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올 하늘 나라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게 하신 다음
그 새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비유로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바보들

-김희경 수녀(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지혜로운 바보들이 참 많다. 내가 하는 사도직 현장에서 운영비나 인력 부족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 또한 어떻게 해결해 보려고 애쓸 때마다 나의 걱정과 교만이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어느 시대든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있었다. 우리나라 현실도 마찬가지다. 소득 수준이 높아졌다 해도 여전히 사회복지 시설, 특히 소규모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열악하다. 물질만능 시대인 오늘날에는 특히 심리·정서적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매일 100여 명의 아동·청소년을 만나며 지낸다. 아이들은 학교 공부를 마치고 공부방에서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며 간식도 하고 서로 얘기하고 놀기도 하면서 자기 집처럼 지내다가 간다.
아이들과 면담을 하다 보면 집안 사정이 하나같이 소설에나 나올 법한 가슴 아픈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혼자 힘으로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는 없지만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서 자신의 시간·재물·능력을 나누는 이들이 있기에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질적 후원을 해주시는 은인들, 부족한 학습을 채워주고자 바쁜 시간을 내놓은 자원봉사 선생님들`…. 이분들과 같은 지혜로운 바보들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밝게 웃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점점 악해져서 멸망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의 모습

-김정완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부활시기도 끝나고 성령강림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연중시기로 들어섰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한 역사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의 출현을 소작인들의 이야기로 엮은 우화입니다. 줄거리를 뽑아보면 이렇습니다.

①어떤 지주가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고 그것을 농부에게 도조로 내어 주고 떠났습니다.
② 포도철에 그 지주는 종을 소작인에게 파견하여 농부들에게서 포도원의 소출을 받도록 했습니다.
③ 그런데 소작인들은 파견된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④ 그러자 지주는 다신 다른 종을 파견하였으나, 그들은 그마저 머리를 치며 모욕하였습니다.
⑤ 마지막으로 지주는 자기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파견하면서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⑥ 하지만 소작인들은 ‘이 자가 상속자다. 가서 그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상속을 우리 것이 될 것이다’ 하고 서로 짜서, 그 아들을 잡아 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⑦ 그러니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주인은 가서 농부들을 없애고 다른 이에게 포도원을 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주와 소작인으로 대표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참 잘 설명해 주고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 지주는 자신의 포도밭을 가꾼 후 그 포도밭을 도조로 줍니다. 그런데 당연히 받아야 할 도조를 소작인들에게 착복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는 심부름꾼들을 보내며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며, 소작인들을 끝까지 믿습니다.

자기 아들도 사지로 보내는 순박한 지주의 모습은 참아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밭을 임시로 맡아 관리하는 소작인들은 주인의 포도밭을 자신의 포도밭인 양 모든 소출을 자기 것으로 합니다. 간이 점점 커져 도조를 받으러 오는 종을 때리고 모욕을 줍니다. 이제 간이 배밖에 나와 지주의 상속자를 죽입니다. 점점 악해져서 멸망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말하셨을 때, 예언자들의 운명을 마음에 두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창조 질서로 돌아오라는 예언자들의 말을 아니꼽게 들은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하나같이 가만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모두다 손 대어, 명대로 죽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모욕하고 더러는 죽이고 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발설하셨을 때는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직감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뒤로 물러 나시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 자기 아들을 사지로 보내는 지주 마냥 예수님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은 만용을 부리다 죽은 어리석은 사람의 객기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남아 우리들에게 새로운 빛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도조를 잘 내는 새로운 소작인 때문일 겁니다. 이 새로운 소작인은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예언자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서로 음모를 짜서 예언자들을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인류가 예언자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는 죄악 속에 파묻혀 있더라도, 하느님의 구원은 끊임없이 계속됨을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새로운 소작인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일은 놀랍고도 위대한 일일 것입니다. 새로운 소작인들이 할 일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을 모욕주거나 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은 누구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죄악 속에 버려져 있고, 죽음이 언제 덮칠지 모르는 우리이지만, 이런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뽑아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시편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 축복의 말씀이니 한번 더 마음에 새깁니다...........◆


 

 
<독서> : 하느님 사랑의 마음이 가득한 토비트
-
경규봉 신부-


토비트 서는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시련을 당할지라도 하느님께서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신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납달리 지파의 토비엘의 아들 토비트는 니느웨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다.

오순절 축제 기간에 성대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식탁 앞에 앉은 토비트는 가난한 동포에 대한 애절한 마음이 들어서 아들 토비아로 하여금 동포 중에 진심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가난한 이들을 찾아서 데려오도록 하였다. 가난한 사람을 찾으러 나갔던 토비아는 이스라엘 동포 가운데 한 사람이 목 졸려 살해되어 장터에 버려져 있는 시체를 발견한다.

그가 이 사실을 아버지 토비트에게 알리자, 토비트는 그 시신을 운반하여 어떤 헛간에 감추어 두었다가 해가 진 뒤에 땅에 묻어 장사지낸다. 그는 예전에도 처형된 동포들을 장사지내다가 사형감으로 수배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이들을 매장함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

타향살이도 서글픈데 이국생활은 얼마나 힘이 들까! 기후와 풍토뿐만 아니라 말도 다르고, 문화나 전통도 다르며, 생활습관까지 다른 이국생활은 고달픈 생활이다. 더욱이 많은 재산이나 지식을 가지고 이국으로 이민을 떠난 생활 아닌 포로생활, 이국 사람들이 보내는 눈총과 질시 속에서 멸시받으며 사는 포로생활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하느님께 충성을 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비트는 포로생활을 하는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율법을 충실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진리와 정의의 길을 걸으며, 어려운 동포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먼저 가난한 동포들을 떠올리고, 버려진 시신을 염습하여 매장해줄 정도로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였다. 그 정도로 그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믿음은 그의 마음속에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도록 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정을 발하도록 하시어 그로 하여금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지 않을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비록 그의 행위가 적대자들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 수 있을지라도 그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고 안락하게 지내고 싶어 하며,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본능과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방어 내지 보호 본능이 있다.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누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더욱이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현실적 이익이 없고 혹시라도 손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욕망을 이겨내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시어 그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은 사랑이며 희망이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의 마음을 닮도록 한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슴속에 가득하도록 한다.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희망이 샘솟게 한다. 기도나 신심행위가 그 사람의 신앙을 짐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따라 신앙의 깊이가 드러난다.

사랑과 희망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기보다 자신의 신념이며 고집에 불과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 나를 믿느냐?” 하고 질문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이하) 하고 세 번씩이나 질문하셨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곧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늠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 대한 깊은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이 가슴속에 가득하고, 주님께 대한 희망이 가득하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포도원 소작인의 우화에서 전형적인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복례 수녀 (성모영보수녀회)-


포도원 소작인의 우화에서 전형적인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포도원 주인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소작인들과 집 짓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뜻하고, 종들은 예언자들을 상징하며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을 뜻한다. 그리고 새 소작인들은 이방인들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며, 버린 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머릿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여기서 우리는 소작인들에게서 무법천지의 폭도 같은 모습을 본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 때는 거기에 많은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포도원이 있음으로 해서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여 살아갈 수 있고, 그곳에서 나는 포도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도 만들고, 더 나아가서 이 포도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길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의 이러한 좋은 의도도 모르고 소작인들이 허황된 욕심을 부림으로써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포도원 주인이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주겠지” 하며 외아들을 보내지만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으로 내다버린다. 이런 몹쓸 소작인들을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포도원 주인은 돌아와서 외아들을 죽인 소작인들을 죽이고 새 소작인들을 찾을 것이다. 하느님은 새 소작인들이 제때에 도조를 잘 바치길 바란다. 구 소작인들처럼 어떻게 하면 포도원을 빼앗을까 궁리하는 못된 사람들을 결코 봐주지 않을 것이다. 포도원의 새 소작인으로 뽑힌 우리는 제때에 도조를 잘 바치고 있는가?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부활 사건이야말로 하느님이 하신 일이므로 우리 인간의 이치로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다. 버린 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동족들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으며 수난을 당했는지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이 버린 돌이 부활 후 교회를 세우시고 모퉁이 머릿돌이 되셨다. 우리는 모퉁이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되어 주님의 집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의 새로운 포도원인 교회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농사를 잘 지어 제때에 도조를 바칠 때 하느님은 기뻐하실 것이며 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포도원에서 달콤한 포도즙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제때에 도조를 잘 바치는 성실한 소작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손에 손잡고 함께 걸어간다면 

-이봉하수사-


혹시 양은 아니더라도 소나 염소를 키워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서 학교를 갔다 오면 소와 염소를 풀밭으로 몰고 다니며 논 적이
많았습니다. 즐거움보다는 귀찮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때로는
아무 데나 묶어놓고 친구들과 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집으로 몰고 오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귀찮은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소나 염소뿐
아니라 여타 동물들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따릅니다. 그러나 동물들을 다루는
데 문제가 있다면 사람들이 동물들을 억지로 따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을 다루는 사람은 동물과 같이 호흡을 해야 합니다. 가끔은 이야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고삐가 없어도 동물들이 주인이 어딜 가든 잘
따라다닙니다. 또한 주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 주인이 위급할 경우
주인을 구하고자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을 사랑하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둔다면 동물들이 오히려 주인을 들이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꼭 성직자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가정, 사회,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하는 목자들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어린 행동 하나가 큰 힘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의 좋은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공동선을 위하는 데 기꺼이 동참하게 할 것입니다.

 

 

 “저 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양승국신부-


<여러분 자신에게 감사하십시오>


한 ‘소박한’ 강좌를 마무리 짓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다시금 그 어려운 ‘사랑’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분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통덩어리’ 하나씩 지고 가게 될 ‘착해빠진’ 분들이었기에 제가 격려차 그랬습니다.


“여러분들,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은 다들 어여쁜 한 송이 꽃들이십니다. 한분 한 분 얼굴이 제겐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지난 세월이 어찌되었던 간에 이제 가슴을 활짝 펴십시오. 자신감으로 충만하십시오. 여러분들은 가능성으로만 똘똘 뭉쳐진 ‘희망덩어리’들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입니다. 별 들 중에서도 크게 빛나는 왕별들이십니다. 부디 여러분 자신에게 감사하십시오. 오랜만에 여러분 자신에게 깊은 고마움의 인사를 하십시오.


제가 여러분들 보기에도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얼마나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분께 여러분 한분 한분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입니다.”


제 덕담 응수라도 하듯이 어떤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행복했습니다. 이제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좀 더 잘 보살피며 살겠습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살도록 힘쓰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스쳐지나가는 정겨운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나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사랑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데,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데, 과연 누가 나를 챙겨줄 것인가? 너무도 오랜 세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왔었구나. 나를 너무도 차가운 시선으로 대해왔구나, 지나치게 학대했었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다시금 꿈꿉니다. 과장되게 겉꾸미지 않고, 잔뜩 포장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거추장스럽게 걸치고 있던 가식의 겉옷을 이제 그만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거듭 보내시는 사랑의 신호를 끝까지 거부하는 완고한 유다인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계속 온몸으로 보내시는 사랑의 표현을 끝끝내 거절하고 냉랭하게 돌아서는 유다인들의 모습에 예수님의 마음은 그야말로 찢어질 듯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 가운데 큰 실수 하나는 하느님을 너무 무서운 존재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분은 그들에게 하느님으로서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끝끝내 이 땅에 오신 사랑의 하느님을 거부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유다인들을 바라보며 그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해봅니다.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탓도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위치, 처지,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탓이 클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며,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다보니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자신들의 관계 설정에도 문제가 발생했겠지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과대포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를 사랑해야 하느님께서도 나를 사랑하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오랜 세월, 갖은 역경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걸어와 준 나 자신에게 감사하는 하루이길 바랍니다. 때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고, 때로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픈 삶이라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그 자체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는 너무나 존귀합니다. 소중합니다.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포도원 사건이 주는 교훈

-김웅태신부-
 

요즘 시골도 영농기술의 변화로 그런 풍경들이 차차 우리 눈에 사라져 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연세 많으신 분들은 시골에 "원두막".. 하면 옛날 농촌의 정서를 쉽게 연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시골의 풍경을 환히 알듯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쉽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를 상식적으로 알아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포도원"에는 모든 것이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경계를 표시하고, 도적을 막고, 들 짐승들의 내습을 막기 위해 울타리가 으례 만들어 있었고, 거기에는 으례 술통이 있었고, 포도를 밟아서 즙을 짜내는 술 만드는 틀이 있었고, 틀 밑에는 짜낸 즙이 흘러 들어가는 술통이 있었고 그곳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술을 저장하였으며 농부들이 그곳에 유숙하였으며, 수확기에는 도적을 망대에서 지켜왔습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용어들은 이사야 5 ; 1-7 말씀의 반복과도 같은 내용의 용어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자기들의 비행을 꼬집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 듣고 분개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1) 첫째,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은 농부들이 일하기 쉽고 이익을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정비해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주셨고 삶의 터전을 나름대로 주셨고 나의 삶을 주시고 계시다는 점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2) 둘째, 하느님은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멀리 떠나고, 포도원은 농부들에게 그 경영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리를 충분히 신뢰하시고, 우리 스스로가 무엇인가 나름대로 하게끔 우리가 선택하는 할 수 있는 인생을 삶을 자유를 주셨다는 점을 감사해야 합니다.

3) 셋째, 하느님의 인내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주인은 농부들이 진 빚을 지불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이 무엇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호의와 인내로서 그들을 대우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인내와 호의로서 기다리십니다.

4)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의 의도를 저버린 곳에는 하느님의 정의가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경고를 주십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내와 호의를 저버리고 악용할 때 정의의 심판이 기여히 닥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불순종과 반항과 무관심에 대하여 오랫동안 참으시나 끝내는 심판의 처벌을 하신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포도밭>(마르 12,1-12)

   -유광수 신부-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놓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에서 얼마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

 

이 비유는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 "(이사 5, 1- 2)


 이것은 사랑하는 임을 사모하며 부른 사랑의 노래이다. 임이 포도밭에 쏟은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지극하였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임이 손수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 나무를 심었고,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 마련해 놓은 최상의 포도밭이었다. 얼마든지 많은 수확을 낼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다 마련해 놓은 포도밭이다. 임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하고 수확 철이 되어 가 보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들 포도가 달려 있으니 임의 실망이 오죽하였겠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즉 포도밭 주인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맺을 수 있도록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잘 가꾼 다음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주인은 그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포도 철이 될 때까지 잘 관리하도록 맡긴 것이지 넘겨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주인이 믿고 맡긴 그 포도밭을 정성껏 관리하여 많은 결실을 맺도록 잘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이 정성스레 가꾼 포도밭이다. 또한 나의 가정이 주님의 포도밭이고 나의 직장이, 나의 본당이, 나의 사도직 장이 주님께서 나에게 관리하도록 맡긴 주님의 포도밭이다.  나는 주님이 맡기신 주님의 포도밭이 많은 결실을 맺도록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가?  나의 몸을 함부로 또는 무리하여 병이 들게 하거나 또는 나의 가정과 직장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나에게 맡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는가?  자연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긴 포도밭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자연을 잘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의 자연은 온갖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의 관리 소홀로 자연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주인이 정성껏 만들어 놓은 포도밭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떠나 갈 때에는 가장 신임하는 소작인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쌍방간에 일정한 계약을 맺고 떠났을 것이다. "포도밭의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주인은 포도 철이 되자 당연히 종을 보내어 도조를 받아오라고 보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소작인들이 그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소작인들이 어떤 짓을 하였는가?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종합해보면 "첫 번째는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고, 두 번째는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며 모욕을 주었다. 세 번째는 이번에는 아예 죽어 버렸다. 마지막으로는 주인의 아들마저 잡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내어던졌다." 소작인들이 저지른 행동은 점 점 더 포악해져갔고 마침내는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리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행동들이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반복해서 저질러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들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오늘도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직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악한 행동들이다. 순박하기만 했던 소작인들 (농부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끔찍한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저지를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해서 악한 행동들이 이렇게까지 발전될 수 있었는가?  이 소작인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7절에서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기들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들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소유욕이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하고 동물로 타락하게 만들었다.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동물처럼 본능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타락한 모습이다. 인간이 어떤 욕심에 너무 집착할 때 눈이 멀어진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이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 욕심에 집착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인간 관계를 망쳐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다른 것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님, 귀머거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서운 짐승으로 돌변하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 된다.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는 소유욕이야 말로 인간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 소유욕 때문에 일어난다. 부모와 자식간에, 친척간에, 친구간에 이웃 간에 등 모든 관계가 악화되는 원인은 "내가 차지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이 욕심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였듯이 내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소유욕이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마음을 굳어버리게 만든다.

이번에는 주인의 입장을 묵상하자. 한번 당한 것도 분하고 괴심한 일인데 주인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길래 한번도 아닌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주인은 그렇게 당하하면서도 왜 그토록 보내시기만 하는가? 우리는 오늘 주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주인의 마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


이런 주인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벌써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악한 행동과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주인의 한 없는 이해와 용서와 인내의 덕분이리라.


주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는 말이다. 주인의 행동을 잘 나타내는 동사는 "보내다"이다.

"보내다"는 동사가 5번 사용되었다. 보낼 때마다 사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주인의 행동은 계속해서 보냈다. 나중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에는 "알아 주겠지"하는 소작인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심이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끝까지 신뢰했고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인내하며 또 많은 희생을 치루어 가면서까지 기다려 주었다.

 

 "알아 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보내고 또 보내는 주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에서나 비슷하게 찾아 볼 수 있고 느껴 볼 수 있는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한테서도 나 올 수 없는 오직 부모만이 자식에게 보낼 수 있는 마음이다. 속는 것을 알면서도 또 돈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알 수 있을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알아 주겠지" 하는 주인의 마음은 그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또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설명 할 수 없는 것 같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그 전후의 문맥을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 직전에 행하신 예루살렘 입성과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마지막 5일간의 활동부분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활동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 부분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표징으로 보여주신 활동이고, 둘째 부분은 유대교 장상들과 맞붙은 논쟁이며, 셋째 부분은 세상종말에 관하여 행하신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유대교 장상들과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 둘째 부분은 예수의 권한에 관한 논쟁,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 세금납부에 관한 논쟁, 부활논쟁, 그리고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논쟁 등을 담고 있습니다. 한가지 흥미를 돋구는 일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일어났던 토론과 논쟁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놓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성도인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장상들과 예수의 대결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이 대결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장상들은 예수와 토론을 벌이는 가운데,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와 무능력을 드러내 보였고, 바로 이 무지와 무능력이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 부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마르코 12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활동에 관한 바로 둘째 부분인 유대교 장상들과의 논쟁에 해당하는 <포도원 소작인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유대교 장상들이 하느님의 백성들을 지도할 자격을 이미 상실했음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의 자격상실을 선포하신 것입니까?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차례로 파견되어 죽어나간 종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파견하신 예언자들을 상징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은 바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요, 포도밭 霑만?바깥 쪽 골고타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의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유의 종결부분은 주인이 와서 못된 소작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그 포도밭을 다른 충실한 소작인들에게 넘길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종결 부분이 유대 장상들의 자격상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포도밭을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 세상의 다른 소작인들에게 맡겨주셨지만, 비유의 말씀처럼 그들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를 부활시키시어 포도밭인 세상의 새 주인이 되게 하셨고, 구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담겨있고, 그분의 심오한 구원계획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시편 118장을 인용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 야훼께서 행하신 일이로다."(시편 118, 22-23)

우리 중에 혹시 누가 '내가 바로 집 짓는 사람들이 내다버린 쓸모 없는 돌'이라고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감하려는 사람은 없습니까? 지난 일들은 훌훌 털어 버립시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안에는 모퉁이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모퉁이의 머릿돌로 여러분을 쓰시고자 하십니다.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