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가 10,38-42)
Martha, Martha, you are anxious
and worried about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르타가 많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시중드느라 이리저리 분주하였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자매의 이러한 상반된 모습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마르타의 모습은 주도적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오고, 나서서 갖가지 시중을 들며 그분을 극진히 모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떠하였습니까? 마리아는 이 장면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목적어로 삼고 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어로 삼고 있습니다. 복음은 두 자매의 뒷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장면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마르타는 ‘나는 예수님을 우리 집에 모셨어!’라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 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전하지만, 마르타는 자신이 주체가 되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체로 모시는 것이지요.
문득 미사 참례 뒤에 우리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 몸을 내어 주셨어.”라고 하는지, 아니면 “오늘 나는 미사에 다녀왔어.”라고 하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첫자리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미사에 참석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는 모든 것의 첫째 이유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도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을 그 무엇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는 마르타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톨스토이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톨스토이는 이렇게 인상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랑의 실천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특별한 날에만 또 특별한 사람에게만 하는 사랑이 아닌, 지금 여기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실천하는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주님께서도 제일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사랑의 실천을 좀처럼 실천하지 못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나의 것을 채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중에’라는 말로 뒤로 미룰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지금 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또 사랑은 내게 잘해준 사람에게 나도 보답 차원에서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시중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가 언니인 마르타를 돕기는커녕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답답하겠지요. 예수님께 더 잘 대접하기 위해서는 일손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할 텐데, 예수님 옆에서 빈둥대는 마리아가 어떻게 예쁘게 보이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마리아가 가장 좋은 몫을 선택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가장 귀한 일은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현세의 어떤 일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처럼 그 말씀을 듣는 ‘경청’의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마르타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녀 역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예수님에게 잘해주는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둘 다 바른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틀렸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행하고 있을까요?


지난 7월. 매일 아침 “오늘은 올여름 가장 더운 날입니다.”라는 알람이 스마트폰으로 들어오더군요. 매일 어제보다 더운 날씨였습니다. 밖에 나가면 너무 더워서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였지요. 그래서 주로 사제관 안에서만 생활했습니다. 시원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으면서 말이지요.
한참을 시원한 에어컨을 맞으면서 책을 보고 있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습니다. 시원하니 상쾌함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두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너무 실내에만 있었던 것 같아서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역시 너무 더웠습니다. 피부가 타는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잠시 쉬려고 나무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이 안에서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솔솔 부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한여름 에어컨 앞에 있는 사람은 상쾌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무더위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은 잠시 몸을 기댈 수 있는 나무 그늘에도 시원함과 상쾌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이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를 통해 '걱정'을 없애고 싶은가, '불안'을 없애고 싶은가?
-전심용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타가 마리아를 질투하는 내용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봉사하려고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의 모델이고 마리아는 기도만 하려는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도’와, ‘염려’ 혹은 ‘걱정’을 대비시키십니다. 당신에게 붙어있으며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와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도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염려와 걱정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예수님을 위해 하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떤 이익 때문에 예수님께 붙어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불안은 믿음으로 극복되고 염려는 깨달음으로 극복됩니다.
아이가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불안 때문입니다. 그 불안은 엄마 품에 안기면 사라집니다. 불안은 ‘존재적인 것’입니다. 불안이 해결되려면 ‘내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러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불안은 자신을 만들어주시고 죽은 뒤까지도 책임져 줄 창조자 외에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불안을 잊기 위해 하는 행동이 ‘염려와 걱정’입니다. 염려와 걱정은 방향이 명확합니다. 공부하지 않은 아이는 시험이 걱정됩니다. 결과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수를 못 받아도 부모님이 괜찮다고 안아주실 것을 확신하면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미래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걱정과 근심, 염려는 존재적 불안만 해결되면 같이 사라집니다.
아이는 부모를 확실히 믿습니다. 자신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해도 부모가 자신에게 주는 눈빛으로도 부모가 자신을 낳고 보호해 줄 것을 믿습니다. 그런 것도 해주지 못할 것이면 자신을 낳았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누가 바로 파도에 사라질 모래 위에다 성을 짓는 노력을 하겠습니까? 나를 태어나게 했다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한다면 불안이 사라집니다. 불안이 사라지면 걱정도 없어집니다. 시험을 못 봐도 부모님은 나를 안아주시고 여전히 사랑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패신저스’(2016)는 미래에 우주선에서 시스템 오류로 90년 먼저 동면에서 깨어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다시 동면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그 남자 주인공은 1년 동안 우주선 안에 있던 모든 재미있는 것들을 다 해봅니다. 심지어 대화를 나눌 로봇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자살을 선택하려 합니다.
그러던 중 동면하고 있던 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녀의 모든 정보와 그녀가 쓴 책 등을 다 읽고는 그녀에게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녀를 깨워버리면 그녀가 평생 자신과 둘만 살게 되어버리는 것에 분개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더라도 우주선 안에는 둘이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깨웁니다. 물론 시스템 오류로 그렇게 된 것으로 속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여자는 그 남자가 혼자 외로워 자신을 깨운 것을 알게 되고 분개합니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마주치지 않고 혼자 우주선 구석에서 살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너무 외롭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걱정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그냥 혼자 외로이 분개하며 늙어 죽던가 아니면 자신을 깨운 남자의 사랑을 믿던가... 행복하게 할 자신이 없었다면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깨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자는 함께 지내며 남자가 자기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랑을 확인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을 깨워냈다면 그 우주선 안에는 자신이 도달하여 누릴 것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일 것임을 짐작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믿고 살아보기로 합니다. 우주선을 자신들이 도착할 곳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둘은 수십 년 동안 우주선을 지구처럼 아름다운 식물들로 꾸미며 최초의 아담과 하와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 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우리를 깨웠다면 이 세상에서 걱정 근심하며 두려움 속에 살기를 원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준비가 갖춰져 있어서 우리를 깨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하지 말고 우리를 깨운 그분을 믿고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걱정도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걱정은 불안의 하위 개념입니다. 불안하니까 여러 가지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불안은 ‘염려와 걱정’을 낳습니다. 마르타는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불안을 해결하려 예수님의 품 안에 머물려는 사람입니다. 누가 현명하고 무엇이 꼭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걱정은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것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불안함이 그리스도의 존재로 해결되면 더는 걱정도 생기지 않습니다. 누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입니까?
우리는 왜 걱정할까요? 불안함을 잊기 위해서입니다. 왜 생겨났는지 모르기에 그 불안함을 잊으려 걱정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말은 ‘내 힘으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염려하고 걱정해서 이만큼이나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까요? 몸도 버리고 마음도 버리고 나쁜 일을 불러들입니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욥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려워 떨던 것이 나에게 닥치고 무서워하던 것이 나에게 들이쳐 나는 편치 않고 쉬지도 못하며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고 혼란하기만 하구나.”(욥기 3,25-26)
그렇다면 걱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이 있을까요?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불안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불안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잠을 자기 두려운 아이들은 부모의 품 안에서는 쌔근쌔근 잘도 잡니다. 불안하지 않으니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르타보다 마리아를 닮읍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그분 품에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낳으려고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면 하느님만 믿으면 됩니다.
그 믿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걱정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으로 해결되겠지만, 불안은 예수님의 존재와 그 믿음만으로 해결됩니다. 그리고 불안이 사라지면 걱정도 사라집니다.

-조재형신부-
국 중에 김이 나지 않으면서 뜨거운 국이 있습니다. 매생이 국입니다. 완도에는 ‘미운사위에게는 매생이 국을 끓여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생이 국은 뜨겁지만 거의 김이 나지 않기 때문에 무심코 먹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뜨거운 국물은 뱉기 마련입니다. 잘못하면 목에 화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동물이나 독이 있는 뱀을 보면 피하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하다가는 큰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자극에 반응하면서 진화하였습니다. 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려웠습니다. 더운 사막에 사는 사막여우는 더위를 이겨 내기 위하여 적당히 마른 몸을 가지고 있고 큰 귀를 통해 몸속의 열을 많이 방출합니다. 반대로 추운 북극에 사는 북극여우는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몸에 지방층이 두껍게 발달했으며 작은 귀로 열이 많이 방출되는 것을 막습니다. 사막여우, 북극여우와 같이 생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적응’이라고 합니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운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의 평균 몸무게는 77kg이지만 더운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평균 몸무게가 57kg입니다. 몸속의 지방은 체온이 발산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에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에스키모인들의 몸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지방층이 매우 많이 발달되어 있어 몸무게가 많이 나가게 됩니다. 반대로 기후가 따뜻하면 할수록 몸속의 열을 많이 방출해야 하므로 지방층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따뜻한 지역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지방층이 적어지므로 평균 몸무게가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기후의 차이는 에스키모인들과 사막인들의 몸무게뿐만 아니라 체형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대체로 팔과 다리가 짧고 큰 가슴과 긴 상체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뭉툭한 체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에 열이 덜 노출되도록 발달하였습니다. 반대로 사막인들은 신체의 표면이 외부에 많이 노출될 수 있도록 가늘고 긴 몸을 가지고 있어 몸의 열을 효과적으로 발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환경과 자극에 적응하는 것은 본능적인 면이 있습니다. 인간도 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마치 비워있는 집에 먼지가 쌓이듯이 마음에도 먼지가 쌓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농부는 밭에 밀을 심었지만 가라지도 함께 자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아무리 적응을 잘 한다고 해도 늘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경험이 되고, 연륜이 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종교는 우리가 몸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사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몸의 적응과는 다른 길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과 죽음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부활의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나의 말을 들었던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의 몸을 가꾸는 만큼 나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소중했지만 니네베 사람들 역시 소중했습니다!
-양승국신부-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참으로 솔직하고 인간적인, 그래서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바로 요나입니다. 보통 다른 예언자들은 비록 주님의 명령이 두렵고 떨렸지만, 거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때로 너무 부담스러워 주님께 따지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했지만, 대체로 마지막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께서 전하라고 하는 말씀,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는 예언의 말씀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주님을 뒤로 하고 도망쳐버렸습니다. 부담스런 주님과 엮이지 않으려고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타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거부의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 사흘간이나 머무는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참 하느님께서도 참 재미있으십니다. 거부에 대한 벌로 육체적 질병을 겪게 한다든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게 하셔도 될 텐데, 요나를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물고기가 사람 뱃속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사람이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아마도 커다란 고래 뱃속이었겠지만. 고래뱃속 깊은 곳, 캄캄한 곳에서 사흘을 버티는 동안 요나의 인생은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절박한 상황 앞에 놓인 요나는 간절히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는 존재론적인 심오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흘간의 죽음체험을 통해 요나는 온전한 주님의 참 예언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또한 요나는 참회와 동시에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주님께 바칩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바다 속 깊은 곳에 저를 던지시니 큰 물이 저를 에워싸고 당신의 그 모든 파도와 물결이 제 위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를 구렁에서 저를 건져 올리셨습니다.”(요나서 2장 3~7절)
드디어 요나는 일말의 두려움 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백성들 앞으로 다가섭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때로 거침없이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요나로부터 전해진 신탁의 말씀에 니네베 주민들은 임금에서부터 시작해, 모든 대신들과 백성들이 참회를 하게 됩니다. 단식과 금육을 실시하면서 크게 가슴을 쳤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크게 회심하는 표시로 사람들만 자루 옷을 걸치고 단식을 하면 될 텐데 아무런 죄도 없는 소나 양, 낙타나 염소에게까지 자루 옷을 입혔으며 단식에 동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강제로 이상한 옷을 입히고 밥도 주지 않으니 동물들이 꽤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 의지가 강력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신 주님의 마음이 드디어 눈 녹듯이 녹아내렸습니다. 단단히 징벌하려던 주님께서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한편 편협된 요나의 구원관에 비해 주님께서는 구원의 보편성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른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서 3장 11절)
우리 주님은 크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소중했지만 니네베 사람들 역시 소중했습니다. 그들 역시 당신께서 손수 창조하신 사랑스런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비교에서 악이 나온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가 아플 것도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 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카10,40).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하고 좋은 몫입니다. 활동과 관상은 자기의 취향에 따라 더 크게 비중을 두었다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마르타의 태도, 편견이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꾸중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도 그녀가 필요한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마리아가 선택한 것은 좋은 몫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0,17). 말씀을 기초로 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진정 하느님 앞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다소 불평어린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그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생색은 왜 냅니까? 왜 동생과 비교합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라도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12,31).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친구를 따라 강남을 가지 말고, 자기 몫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을 따라가다 보면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고, 결국, 악에 지고 맙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은 몫이라면 마음껏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송영진신부-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이 이야기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비교해서 누가 더 잘했는지를
따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또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모셔 들여서 조금이라도 더 잘 대접하려고 애를 쓴 것은,
무슨 사심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분명히 좋은 일이고,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르타에게 하던 일을 중단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고 타이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 가지만 생각하여라.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많은 일’을 ‘너무 많은 음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1) ‘너무 많은 음식’으로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대접이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 경우에,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의 목적을 잊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음식을 만드는 일 자체를 하지 마라.”가 아니라.)
2) ‘다른 사람들의 일’로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네가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하여라.” 라는 뜻이 됩니다.
이 경우에,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은,
“너 자신의 구원을 가장 먼저 생각하여라.”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든지 말든지 자기 자신의 구원만
신경 쓰라는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지만,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말씀은 이 두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그 일만 생각하느라고 예수님은 잊어버렸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도,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 일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걱정’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이 말씀을 마르타의 상황에 맞추어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는 무슨 음식을 준비할까? 음식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야 할까? 하며
걱정하지 말고, 꼭 필요한 음식만 만들어라.
그리고 와서 ‘나의 말’을 들어라. 그것이 곧 나를 잘 대접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새겨듣고 실천하는 일,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걱정해야 할 일입니다.
‘시중’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예수님은 ‘시중들며 섬기는 사람으로’,
즉 우리를 먹이시려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잘 대접하는 일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해 드리려고 애를 쓰다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말씀의 양식)을 받아먹는 일을 놓쳤습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일도 연상됩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2ㄱ.13).”
우리가 예수님께 양식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양식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양식을 받아먹고 새 힘을 얻어서 살게 됩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은,
“너는 나쁜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은 아니고,
“마리아는 자신에게 좋은 방식을 선택하였다.”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각자 자신이 받은 탈렌트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3,6).”
신앙생활의 목적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지까지 가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탈렌트에 대해서 시기 질투해도 안 되고,
자신이 받은 탈렌트에 대해서 잘난 체 해도 안 됩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르타의 방식이 있고, 마리아에게는 마리아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르타에게 마리아의 것을 빼앗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은 모두 ‘우리가 영원히 누리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주님을 잘 섬기려고 애를 쓴 일은 분명히 좋은 일인데,
그 일에 치여서 주님을 잊어버린 것은 잘못한 일입니다.
주님을 잊어버리고 ‘일’만 생각하는 것은,
그 일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조욱현신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그래서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즉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주님은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빵인 당신을 마리아에게 먹이고 계셨다. 그분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하셨다. 그 빵은 사람을 먹여 기르되 절대 줄어들지 않는 빵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신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을 얻도록 노력하자.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언제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따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갈림 없는 마음으로 쫓는 길이어야 한다. 다른 것은 아무리 중요해 보이더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경의 아름다운 예라고 할 수 있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마리아가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심으로써 마르타의 몫은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상우신부-
필요한
한가지는
주님과의
참된
만남뿐이다.
만남의 진가는
마음의 진가로
드러난다.
뒤엉킨
마음에서
좋은 몫을
선택하는
방식은
먼저 주님께
우리 마음을
두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우리자신을
주님께
두는 것이다.
주님께
마음을 두어야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머무르는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이란
주님과의
이야기가
깊어가는
것이다.
이야기가
깊어간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
깊어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을
머물러
듣는 것이
마음을 살리는
가장 큰 일이다.
마음과 마음의
일치가 주님의
눈물어린
현존이다.
마음에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마음을 살리는
말씀을 먼저
듣는 오늘이다.
마리아는
그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돌아섬, 곧 회개를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요나 3,1-3)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남은 요나에게 두 번째로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요나가 이번에는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독서의 첫 번째 회개자, 곧 방향을 바꾸어 주님께 돌아서는 이는 요나입니다. 그동안 닥친 일로 보아 주님과 그분 말씀에서 빠져나갈 길을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지요. 요나서의 마지막 일화를 미리 떠올려 보면 지금 요나가 주님께 온전히 승복한 건지 자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당장은 일단, 몸으로는 따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 자루옷을 입었다."(요나 3,5)
두 번째 회개는 요나의 전언을 들은 니네베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이방인인 그들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길을 뉘우치고 자신을 낮추며 주님 앞에서 힘껏 부르짖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요나 3,10)
이제 세 번째 돌아섬은 하느님에게서 일어납니다. 그분은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이내 마음을 돌이키시어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들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대접으로 분주한 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에 푹 빠져 있습니다.
보다 못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입을 엽니다. 동생이 그렇게 당신 곁에만 있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고 언니를 좀 돕게 한 마디 해달라는 거지요. 마르타의 뜻대로 되려면 예수님과 마리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마르타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녀는 지금 예수님과 마리아의 돌아섬을 종용하고 있는 셈이지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하지만 예수님은 돌아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도 돌아설 필요가 없다고 일깨워 주십니다. 행여 마르타에게 실망을 안기더라도 애둘러 말씀하시지 않으시지요.
돌아섬,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감, 회개의 종착지에서는 더 이상 돌아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미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주님 발치에서 그분 말씀을 듣고 말씀에 머물러 말씀이신 분과 함께 사랑이 되어가는 소명, 이는 이 세상의 모든 돌아섬이 끝내 닿아야 할 지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회개는 단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로 불리는 이 세상을 지나는 여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선 지점의 위치와 방향성을 성찰하고 방향을 조율해야 합니다. 우리가 향해야 할 지점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니, 혹 길을 잃었다면 가던 길을 돌이켜 다시 주님을 향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어린이 같은 겸손과 영적 유연함으로 세상 어디에 떨어져도 요나처럼 돌아서서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또 마리아처럼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주님을 떠나지 말고 그분 발치에 머무르며 그분 말씀을 듣는 좋은 몫을 탁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에 잠겨서>
-김찬선신부-
중요한 손님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이하여 다들 바쁘고,
언니 마르타는 전체를 지휘하느라 더 분주한데 마리아만
얄밉게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에겐 마리아만 얄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리아를 그대로 내버려주시는 주님,
자기의 수고를 몰라주시는 주님도 얄밉습니다.
그래서 얄미운 짓 멈추고 일을 거들게 하라고,
자기의 수고를 알아달라고 볼멘소리를 하는데
주님께서는 마리아도 당신도 잘못이 없다시며
한 술 더 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마르타는 나쁜 몫을 택한 것입니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궂은 일을 맡은 것이니
마르타가 나쁜 몫을 택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인간적인 기준에서
좋은 몫과 나쁜 몫을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준, 그것도 이기주의적인 기준에서는
보통 나의 '좋고 싫음'이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되어
객관적이어야 할 '좋고 나쁨'이 나의 주관적인 '좋고 싫음'에 좌우됩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이 꼭 내게 좋은 것입니까?
어린이의 경우 좋아하는 사탕이 이빨을 썩게하듯
내가 좋아하는 것이 꼭 그리고 다 내게 유익한 것은 아니고,
그래서 많은 경우, 좋아하는 것이 오히려 나쁜 것이지요.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리고 하느님 보시기에는 더더욱 나쁜 것,
악을 우리 인간이 좋아하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고,
오늘 주님께서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는 것도 이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좋은 몫이고,
내 악한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좋은 몫입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 사랑에 머물고 잠기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니 좋은 몫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리아뿐 아니라 마르타도 뺏기지 말아야 할 몫이고
그 누구도 누구에 의해 뺏기지 말아야 할 것이니
주님께서는 마리아편만 든 것이 아니고 모두 그러해야 한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머물고 잠기는 그 좋은 몫을 뺏기지 말아야 하고,
주님의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일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주님의 사랑에 잠기지 않고 질투에 빠지는 일도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사랑에 잠기지 않고,
이웃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시작하고서는
하느님은 빠지고 인간적인 경쟁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쉽지 않지만 일을 하되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말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가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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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마르타는 ‘나는 예수님을 우리 집에 모셨어!’라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 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전하지만, 마르타는 자신이 주체가 되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체로 모시는 것이지요.
문득 미사 참례 뒤에 우리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 몸을 내어 주셨어.”라고 하는지, 아니면 “오늘 나는 미사에 다녀왔어.”라고 하는지 말입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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