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일 연중 제27주일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
(마르코 10,2-16)
Therefore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no human being must separat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혼인의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따라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부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담은 하와를 만나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하고 외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를 마련해 주신 데 대한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뒤, 하느님 앞에서 하와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앞에서 한 말과 지금 이 말이 같은 사람이 한 것으로 보이나요? 아담의 이 말을 들은 하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그에게 아담은 남편이 아니라, 이른바 ‘남의 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인류의 첫 부부도 이처럼 현실적인 모습을 지녔습니다.
성경이 전해 주는 부부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맞이한 어려움을 하느님 안에서 함께 견뎌 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느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혼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때로는 ‘남의 편’ 같고, 때로는 ‘부인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겠지만, 남편 그리고 아내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어 한 몸을 이룬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키엣대주교-
먼저 ‘신중함’입니다. 친구를 얻으려 서두르지 마십시오.
“친구를 얻으려거든 시험해 보고 얻되 서둘러 그를 신뢰하지 마라. 좋을 때에만 친구가 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다음은 ‘신의’입니다. 좋은 친구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어야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마지막으로 ‘주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주님을 사랑한다면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도 진실되어야함도 알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자질’이 필요합니다. ‘사랑이란 하나됨’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만일 진실로 사랑한다면 하나가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진실됨’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며 하느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가족은 사랑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부부의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 ‘인간의 사랑’은 주님 안에서 서로 존경하고 보살필 때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은 혼자보다 둘이 함께 갈 때 훨씬 쉽습니다. 상대방의 슬픔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부부입니다. 사랑은 보살펴 주고 보살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두 사람이 어떻게 평생 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겠습니까? 사랑도 식물과 같습니다. 물과 거름을 주고, 사랑으로 돌보지 않는다면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것은 물리적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물리적 아름다움은 퇴색할 수 있지만 ‘정신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가고 빛을 발할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기쁘고 슬플 때 말보다 마음과 눈으로 위로해 주십시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슬프고 추해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그사람을 사랑으로, 마음으로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말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고 배려하고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에게 중요하고 귀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의 행복이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희생의 사랑이 아닙니다. 나의 사랑에 당신의 사랑이 합쳐질 때 우리의 사랑은 완성된 행복한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을 그토록 아끼고 있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들 가정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둘, 셋으로 나누어지고 상처받고 있기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가 닮아야 할 진실된 사랑의 가족이십니다. 아멘.

1. 사랑하는 나의 사람과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실천해보십시오.
2. 지금 우리의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멀어져 가고 있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너 사실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실제로 동네에 개천이 있었고,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날 때마다 다리 밑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워왔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믿게 된 것은 제 위의 형·누나와 다른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형, 누나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잘하는 것이 많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리 밑에서 정말로 주워 왔나 봐’라는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행려자가 놀고 있는 저를 빤히 보더니, “너 나랑 같이 살래?”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저 역시 이분을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혹시 저를 다리 밑에 버린 진짜 아버지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진짜로 쫓아갈 생각도 했었습니다.
다른 점만을 생각하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제 고향이 다리 밑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제 형제들 얼굴이 다 똑같습니다. 눈꼬리가 처진 것, 주름 많은 것 등등 같은 점이 너무 많습니다. 같은 점을 보지 못하면 함께 할 수 없지만, 같은 점을 생각하면 함께 할 이유가 너무 많아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에 대해 다시 물으시고, 바리사이들은 이혼을 허락하는 성경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즉,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의 말은 바리사이들이 신명 24,1.3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혼인을 제정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혼을 허락하는 성경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이혼의 허락은 상대의 ‘추한 것’이 드러날 때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추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며,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추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를 이루는 같은 점을 먼저 생각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어린이를 축복해달라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언짢게 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내를 버리는 모습이나, 어린이를 쫓는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차이점을 찾으며 갈라내는 모습은 ‘하나’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십니다. 그만큼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십니까?


교구청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분이 면담하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분께서는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이 가지고 온 스타킹을 사달라고 합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제에게 스타킹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음은 그분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신부에게 스타킹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사모님께 선물로 드리면 되잖아요.”
“신부는 결혼하지 않아서 아내가 없습니다.”
“성직자가 어려운 사람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건 팔러 오신 것입니까? 도움을 청하러 오신 것입니까? 물건 팔러 오셨으면 저는 필요 없으니 안 살 거고, 도움을 원하시면 사회복지회로 가시길 바랍니다.”
이분은 욕을 하면서 나가셨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분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무조건 자신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거절되자 그렇게 화를 냈던 것입니다.
장사 잘하는 사람은 소비자의 욕구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소비자의 욕구는 전혀 헤아리지 않으면서 사지 않는다고 화내는 사람이 장사를 잘할 수 없음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헤아리고 있을까요?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셔야 한다면서 화를 내고 있지는 않나요?

혼인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 들어갈 길이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혼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한 번 성사된 혼인은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혼인을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믿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혼인은 행복을 위함이라기보다는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자기완성에 필수적인 코스가 자아의 종말입니다. 자기가 살아있으면 자기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서도 자기완성을 이루면 안 될까요? 혼자 살아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는 안 됩니다. 나를 죽여 피를 내어주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계 안에서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배우면 그 둘은 혼인 관계가 됩니다. 혼인이 아닌 이상 이것을 배울 곳은 없습니다. 사제도 혼인합니다. 신자들과 혼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내어주는 법을 배웁니다.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혼인한 사람뿐일 수밖에 없습니다.
혼인해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을 위해서도 내 피를 완전히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그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둘의 열매인 자녀가 있음에도 그 능력을 배울 수 없다면 그 어디에서도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다행히 혼인 안에는 자아의 소멸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혼인이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말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결혼한 아내요, 한 아이의 엄마인 자매가 ‘결혼하고 아내와 엄마가 된 후, 자아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쓴 글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공감 가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러니까 결혼해야지!’라고 생각하시면 신앙인이고, ‘그러니까 결혼하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면 그냥 사람입니다.
결혼하고 집안일이 이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밉게만 보이던 우리 엄마가 점점 이해가 된다.
점점 엄마에게 동질감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꾸자꾸 문득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도 그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가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엄마는 당연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 엄마는 그랬으면 안 되었던 거였구나.
엄마는 나와 아빠를 미워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남이 먹은 거 치우고 남이 먹을 거 차리고
예전 같았으면 불공평하다고 내가 시다냐고 버럭 했을 일들을
포기가 쌓여 이젠 잘도한다.
집안일은 끝이 없다. 변기가 이렇게 자주 더러워지는지
예전엔 몰랐다.
몇 명이서 쌀을 몇 킬로 사야 한 달을 먹는지
반찬은 뭐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저 빨래는 돌아가다가 언제 끝나는지
밥은 몇 시쯤 차려야 하는지
이런 집안일 계산이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뺑글뺑글 돈다.
이걸.... 앞으로 몇십 년을 해야 하나
손목 무릎 아작나도 속으로 눈물 먹으며 한다.
나 말곤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루종일 집안일을 하고 나면 밤엔 쉬고 싶다.
잠자리 갖는 것도 귀찮다.
애 낳고 이제 전업주부로서 일자리도 잃게 되면
나의 자아는 완벽히 끝이 난다.
나는 이제 남편의 성공을 바라는 서포터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다.
돈의 힘은 크다.
집 명의도 남편 쪽...
내 돈은 고작 혼수와 결혼 준비 따위로 다 날려버리고 남편이 벌어 오는 돈으로 살수밖에 없게 되면..
감히 집안일 반반하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된다.
남편도 당당히 퍼질러있기 시작한다.
내가 이 집안을 떠나서 홀로 선다면?
내가 지금 경단이 몇 년인가...
나 혼자 집을 구하고 내가 먹을 음식을 사고 그럴 수 있을까?
겁이 난다.
갑자기 집이 안락하게 느껴진다.
밖에서 실컷 남편 욕을 하며 풀어지면 다시 집에 와 집안일을 한다.
내 남편 욕만 잘 들어주면 되지 그냥 내 갑갑한 속만 풀어주면 되지
떠날 생각은 없다.
이쯤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이다.
남편 성 매수쯤은 무감각하다. 넘어갈 수 있게 된다.
돈이나 벌어와라...
매일 전쟁 같은 아침...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너도나도 자기 일자리로 출발하면
나는 홀로 텅 빈 집에 남아
슥 삭 슥 삭 뒷정리를 하고 집안일을 한다.
햇빛이 좋아 잠시 창밖 풍경을 본다.
남편이 밤에 먹고 그대로 두고 간 상하기 시작한 컵라면.
단 한 번도 먼저 닦여있지 않은 세면대.
식사 후 남편은 누워서 폰 게임 하러 갈 때...
그걸 내가 치우고 설거지할 때...
남편과 자식이 방과 소파를 차지해
내 자리는 부엌밖에 없을 때
내 자아는 서서히 서서히 죽어간다.
내가 의식하지도 못할 새에 점점 좀먹어간다... 흩어진다.
과거의 나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헉하고 문득 뒤돌아보면 예전 나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서서히 순응하며 하고 있다.
내 자아는 갈기갈기 조각조각 찢어져
내 남편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 가서 붙는다.
그들만을 바라보고 그들의 인생과 목표가 곧 내 성취가 되고 목표가 된다.
결혼 후에 머릿속에선 정말 생경한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초반에 그 자아 상실의 느낌이 갑갑하고 익사하는 것 같아
많이 울고불고 발버둥도 쳐봤으나
쇠창살이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 안을
영원히 탓 탓 탓 달리고 있는 거 같아 포기하게 된다.
이젠 멍한 상태로 그 속에서 미소짓고 있다.
여자가 결혼하면 나는 없어지고 엄마가 된다는 말...
말로는 많이 들어봤다.
하지만 그 말을 진짜 이해하지 못했다.
진짜 경험해보면 아, 이게 그 느낌이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한다는 건 그전 내 이름 세글자... 내 인생이 죽어버리는 것과 같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집안과 식구들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나갔던
그 자유.
내 목표, 나의 꿈, 사회에서의 내 위치 모조리 분쇄되고
어머니, 아내만 남아 나는 없다.
나는 죽었다.
결혼은 자아의 종말이다.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야 비로소 깨지는 지독한 환상이다.
사랑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가 깨지는 것입니다. 로맨스 소설을 보며 결혼을 환상적으로 여길 때, 그때 사랑을 안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현실은 그와 반대입니다. 실상은 사랑은 로맨스가 깨질 때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로맨스는 상대를 이용하여 내 행복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랑은 그 로맨스가 죽을 때 상대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성부라면 아내는 성자와 같고 둘을 이어주는 힘이 사랑의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부부관계가 끝까지 가야 하는 이유는 삼위일체의 실현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하셔서 내어주는 당신들의 피와 생명이 ‘성령’입니다. 쌍방의 이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실현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둘만 있다면 분열이요 그냥 둘입니다.
사랑은 나를 죽여야 해서 항상 셋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번째 것을 만들기 위해 둘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서로를 죽이는 이 혼인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면 하느님 삼위일체를 닮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 자녀도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삼위일체 혼인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제되지 않은 황금 원석입니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어서 이대로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정제되려면 용광로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순금으로 태어납니다.
용광로는 고통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용광로가 혼인입니다. 불순한 원석끼리 만나서 황금이 되겠다는 게 로맨스입니다. 그건 환상일 뿐입니다. 이 환상이 깨져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데 그 환상이 깨지는 장소가 가정입니다.

-조재형신부-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외할머니 댁에 가면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많이 싸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주신 보따리를 가지고 서울로 왔습니다. 장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들의 흑백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에서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밥 먹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손님이 오면 자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이웃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나고 하느님 품으로 가는 날에 많은 분들이 멀리서 왔습니다. 외할머니가 보여주신 덕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닿지 않아서 많이 배우지 못한 외할머니는 손주들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모두들 대학을 나왔고, 직장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의 시대에는 대학을 나오는 것도,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된 손주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 자랑스러움에 외할머니는 마리아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외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는 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되도록 일을 덜 하려고 쉬운 자리, 편안 자리, 고운 자리만 찾은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시밭길도 기쁜 마음으로 가셨는데, 저는 꽃길만 찾아다닌 것 같습니다. 저의 삶이 주어진 좋은 조건 속에서 누린 삶이라면, 외할머니의 삶은 어려움 속에서 일구어낸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며 사제의 길을 가는 저의 삶은 어느덧 바리사이파의 삶이 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작은 정성을 봉헌한 것처럼 외할머니의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제의와 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저와는 달리 외할머니는 나눔과 희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위대한 것은 ‘그가 어떤 능력과 업적을 만들어 냈는가.’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묵묵히 견디어 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짐을 들어주었는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과 40년 전만해도 당연하게 들리던 말들이 있습니다. ‘여필종부, 남존여비, 출가외인’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 여자는 결혼하면 시집의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에도 드러났습니다. 여자 아이를 낳으면 죄송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출산해야 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상속에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시집을 왔다는 이유로 친정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이 차별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무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운전을 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 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마녀라는 이유로 가진 것을 빼앗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문화적인 이유로든, 종교적인 이유로든, 신체적인 이유로든 여성이 차별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매년 새로운 차가 출시됩니다. 새로 나오는 차는 예전의 차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가지게 됩니다. 소음은 적고, 연비는 높고, 편리한 기능이 있기에 운전이 더 쉽고, 쾌적합니다. 새로 나온 차라고 예전에 나온 차보다 나쁠 수는 없습니다. 새로 나온 차를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도 그렇습니다. 매년 새로운 스마트폰이 출시됩니다. 사람들은 큰 비용을 지출하면서도 기꺼이 새로운 스마트폰을 마련합니다. 이유는 새로운 스마트폰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은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뼈로 창조하셨습니다. 자동차와 스마트폰으로 비유한다면 아담은 구형이고, 하와는 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료라는 측면에서도 흙보다는 뼈가 더 강도가 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서적으로 보아도 여성이 남성보다 차별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느님을 닮은 존엄성이 무시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그런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천년에 한 번씩 오는 선녀의 치맛자락이 커다란 바위를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닮아 없어지는 시간이 지나야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주는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참으로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남을 이룬 것이고, 그런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난 그 소중한 인연인 만큼 아끼고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은, 지금 우리의 만남은 치맛자락으로 1000년에 한 번씩 커다란 바위를 스쳐서 그 바위가 닮아져 없어지는 그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기다려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시작이시고,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될 것입니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혼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길 바랍니다. (군인주일을 맞아 기도와 더불어 물질적 후원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자, 아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2,23)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제 아내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것 아니냐?”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담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착하게 만드셨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아껴줄 것이 아니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가만히 보면 쟤가 좀 맹한 데가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하고 아담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애를 사랑할 거 아니냐?”
하느님께서 창조의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남자만으로도 그리고 여자만으로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각각 나름대로 아름답고 독특한 개성이 있지만 자기 혼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반드시 상대방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났어도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남녀의 관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줘야 할 동반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 하겠습니까? 우리는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니며 서로 존경하고 사랑 받아야 할 고유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서로 나를 위한 맹한 것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10,7)라고 혼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의 요건을 보면 먼저 “떠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통해 오늘의 내가 되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부모에게 의지 않고 자기 짝을 만나 독립된 자기 생활을 위해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다 큰 자식이 자기 생활도 감당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손을 벌인다든지 얹혀사는 것은 불효이며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부모도 자식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 비관하는 어르신도 계신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에게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서로 “떠나야 할 때 떠나고,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입니다. 혼인 서약을 보면 “나 000은 당신을 내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계약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괴로울 때, 아플 때가 그렇습니다. 그때 참 사랑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계약의 충실성이 드러납니다. 계약의 충실성 안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두 사람이 가꾸어가야 할 과제이며 의무입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줌으로써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배우자를 “거들 짝”(창세2,18)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둘 짝을 만나는 것이 혼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의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가 살아온 삶의 양식이 달랐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통계를 보면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나는 기분이 남자는 1.책임감이 앞선다(27%). 2.자랑스럽다(18.9%). 3.어른이 된 느낌(16.2%) 4. 기타 (37.9%)의 순입니다. 그에 비해 여자는 1.섭섭하다(41.9%) 2.어른이 된 느낌(16.1%) 3.책임감이 앞선다(12.9%) 4.기타29.1%)로 조사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고려하는 사항을 보면 남자는 1.성격(27.3%) 2.외모(22.8%). 3.가정환경(21.4%) 4.사회적지위(16.5%) 5. 종교(12%). 그리고 여자는 1.사회적 지위(25.6%) 2.성격(24.2) 3.가정환경(19.3%). 4.외모15.7%) 5.종교(15.2%)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고 합니다. 반면 “여자는 결혼할 때가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 있어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지 못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일방적인 자기 요구만을 강요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서로 ‘너와 나는 이것이 틀리다’ 고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었으면 죽기까지 그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 준 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주신 혼인을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시집가면 그 집의 귀신이 되라.” 이 말씀은 혼인을 했으면 절대로 갈라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 이라고 하는 데 인연은 우연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만나 서로의 구원을 위해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하지만 상대를 위한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통해서 나도 구원을 얻게 되고 상대방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신중해야 하며 신의와 사랑이 없는 혼인은 해서도 안 되며 하더라도 원인 무효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엮어진 이상 사랑을 더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5,25).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듯 순종해야 합니다”(에페5,22.33). 결국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실하여 행복한 날 이루시길 빕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 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하고 일상 안에서 그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 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62,5). 하느님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웃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청춘 남녀의 데이트에 관한 얘기 입니다.
1.미모가 확실한 남자와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환상적이다”.
2.못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저 청년은 보기보다 능력이 있구나!”
3.잘생긴 남자와 못생긴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저 여자는 돈이 많은가 보다”!
4.못생긴 남자와 못생긴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하나보다” 한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작품을 “보시니 참 좋다” 고 하셨습니다. 더더욱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환상의 커플, 능력의 커플, 사랑의 커플이 아니라 몸과 마음, 영혼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환상의 커플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송영진신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1)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남편과 아내로 만나서 함께 사는 일이
‘사람의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들 가운데에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일들이 분명히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위기를 겪고 있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부로 맺어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2) 이미 이혼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경우에, 하느님께서는 당사자들 못지않게,
어쩌면 당사자들보다 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 교회는 조당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당 상태에 있더라도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력하면,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이 말씀에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작은 이들’을 상징합니다.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는 “안수해 달라고 하였다.”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사람들을 막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던 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짜로 ‘예수님의 일’을
방해한 쪽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작은 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예수님의 일’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언짢아하시며’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에 통로가 되기는커녕 장벽이 된다면, 그래서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적극적으로 어린이들을 나에게 데리고 와라.”입니다.
우리는 ‘작은 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소극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작은 이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작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앞의 혼인에 관한 일에 이 말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은 조당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가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를 나타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조당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
즉 힘없는 ‘작은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작은 이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래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작은 이’가 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작은 이’였지만
그 나라에 들어가면 ‘큰 사람’이 됩니다(마태 18,4).
잘난 체 하는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위선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내가 잘나서, 내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인간 세상에서의 업적이나 경력을 내세워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도 아닙니다.
세속에서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업적’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위인전’에는
왕, 장군, 유명한 학자 같은 사람들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떤 업적을 남긴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던 사람인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그래서 성인전에는, 남긴 업적이 하나도 없더라도
‘삶’이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성인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의 ‘삶’ 자체를 업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율법 실천만 잘하면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의 선물이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율법 실천만 잘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가 생긴다는 것이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권리 같은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내가 지금 들어갈 테니 문을 열어 놓으시오.” 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인들 가운데에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악인들 가운데에는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자기가 겸손한 줄 모르는 ‘겸손한 사람들’만 있고,
지옥에는 자기가 교만한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들’만 있습니다.

연중 제27주일: 나해
-조욱현신부-
우리는 주변에서 혼인생활에 실패하는 부부들을 많이 본다. 혼인의 실패는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다. 이번 주간의 전례는 가정과 사랑에 대한 교리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거와 기반을 제시해주고 있다. 사랑은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원초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갈빗대는 셈족의 언어 감각으로 생명이란 뜻이다.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이라는 표현은 두 존재가 한 실체라는 뜻이다. 여기서 뼈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며, 살은 존재하는 인간을 뜻하고, 아담은 존재의 깊은 의미를 가리킨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부르리라”(창세 2,23)라는 말은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과 같은 의미이다. 남자는 이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단지 여자와 한 몸,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창세 2,24), 바로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셨고, 항상 하나가 되었으며, 갈라질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하느님의 모습, 즉 사랑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모세가 한 것,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5절)라는 말은 이것은 하와를 거슬려 한 핑계에 잘 나타나 있다(창세 3,12):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이것이 여기에 이제 사용된 것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여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뜻, 즉 구원계획은 충실성, 사랑, 영원한 일치이다. 창조 시에 인간을 만드실 때, 남녀 모두를 당신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창세 1,27). 그러므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하나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여자와 어울려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이신 하느님의 모습, 삼위가 하나인 모습을 닮는 것이다(6-8절).
즉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바로 하늘에서와같이 우리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최대의 계명으로 본래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다. 하나의 몸이고, 하나의 존재이기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갈라질 수도 없고, 갈라져서는 더욱 안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이를 거슬러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제자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해주신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11-12절). 즉 남자 편에서 하던 여자 편에서 하던 하느님의 계획에 거슬리는 것이며, 그 새로운 혼인은 간음이 된다. 왜냐하면 먼저 한 혼인의 의무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배반 혹은 간음이라고 규정하신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혼을 끌어들인 원흉이랄 수 있는 굳은 마음을 가진 마음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린이를 축복해 주신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은 혼인과 이혼에 대한 논쟁 뒤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는 거룩한 혼인의 결실, 즉 두 남녀의 하나 된 사랑의 결실이면서 이혼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린 생명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신다. 이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보고 듣는 대로 하는 단순한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도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어린이는 하느님 앞에 계속된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믿음의 관계, 또한 그 때문에 포기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단 하나의 어린이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에 가까운 형제들을(어린이들) 껴안으시고 축복해 주신다.
새 아담은 구원계획의 완성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이시며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당신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최대의 은총이다. 주님은 당신의 돌아가심을 통해 모든 이가 당신과 똑같은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견지하고 이루어 가야 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며 기쁘게 살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는 모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그리스도 안에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고, 자신을 희생하시어 모든 이를 하느님께 바치시고, 하느님께 나아가 일치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렇게 우리도 우리 사이의 일치,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항상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먼저 너와 나 사이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 우리가 속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자들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혼인의 계약으로 태어난 우리 가정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하느님 안에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으며, 더욱더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통하여 언제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관계의 관점에서 다가오십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혼을 주제로 물음을 던집니다. 여성들을 존중하고 약자들에 대하는 예수님의 시선과 배려가 당시 관습의 어떤 부분을 민감히 건드린다고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버리다"는 '헤어지다'라는 표현에 비해 이미 힘의 균형이 깨진 단어지요. '버림받다'라는 표현은 대개 약자의 것으로, 강자 측의 일말의 배려나 존중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처지가 그랬고 그런 문화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
예수님은 타인은 물론 누군가를 마음대로 버릴 권리가 있는 당사자도 이 관계를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십니다. 혼인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욕정이 아닌 사랑으로, 이용이 아닌 존중으로 소중히 이 관계를 돌보며 함께 조율해 나가야 합니다.
제1독서는 인류 첫 사람들의 혼인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아담은 주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짝지워주신 "알맞은 협력자"를 보고 부르짖습니다. 이 외침 안에는 기쁨과 탄성, 감사와 행복이 가득합니다.
상대가 내 뼈에서 나온 뼈이고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인식하는 이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듯 돌보고 아끼지요. 그가 바로 자신이고 서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마르 10,14)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6)
복음 대목의 뒷 부분에는 어린이들이 등장하지요. 오늘의 말씀이 혼인 논쟁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모든 관계의 문제로 확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약자에 대한 태도나 배우자에 대한 태도는 상대가 누구이건 본질은 크게 결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막아섰고, 예수님은 끌어안으셨습니다. 이 두 개의 상반된 태도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 관계에서는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약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일관되게 표출되는 태도들일 겁니다.
제2독서에서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를 명시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히브 2,11)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그분에게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하시기에 우리를 형제로 받아들이십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예수님께 우리는 한 아버지께 속한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데, 도토리 키재기도 안 되는 우리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고 약자를경시하며 착취하고 버리는 일은 혼인 관계에서건 고용 관계에서건 보통의 인간 관계에서건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건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말씀께서 이렇게 제시해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결과론적으로 이혼의 허용 여부라는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혼인 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 관계 안에서 얼마나 사람을 연민하고 존중하며 섬기느냐의 문제로 보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늘이 열린 것(개천)을 경축하는 오늘, 우리의 지상 순례길에 동행자로 허락하신 이들을 보면서 아담처럼 환호하고, 기쁨과 감사와 연민으로 서로를 포용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지향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끌어안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랍니다. 주님의 형제인, 그래서 저의 형제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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